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지음, 유경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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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과 그의 동료들은 1941년 5월 19일 "중국 남부의 칭시에 모여 '베트남독립동맹' 즉, '베트민Viet Minh'을 결성"한다.(26) 호치민의 게릴라 부대는 2차세계대전의 전세가 기울던 1945년 5월 일본군 진지를 공격하여, "프랑스가 군사적으로 인도차이나를 재장악하지 못하도록" 지방에서 세력을 확대해 나아갔다.(32) 그러나 포츠담회담에서 "영국군이 16도선까지 베트남 남부를 점령하고, 영불 합의에 따라 이 지역의 통치권이 프랑스로 넘어가면서"(43) 식민지 베트남의 망령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드골은 프랑스가 라오스를 재점령한 후 "식민지가 없다면 프랑스는 강대국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55)고 말하면서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한 주권 행사를 천명했고, 미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국가들의 효과적인 조직화와 재무장"(61)을 위해 유럽과 연합하는 데 동의했다. 이에 맞서 "1950년 1월 중화인민공화국이 호치민을 베트남의 유일한 지도자로 인정"하고, "소련도 이에 뒤질세라 재빠르게 동일한 조치를 취"하자, 미국 역시 남베트남의 사이공 정부를 인정하면서 본격적인 전쟁의 열기가 타올랐다.(66)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도차이나 반도가 미국의 관심에서 멀어지자, 북베트남의 지압 장군은 프랑스에 대한 대공세에 나서 디엔비엔푸(1954.5.7)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공산주의 세력 차단에 집착했던 미국은, 호치민의 희망을 저버리고 고 딘 디엠을 남베트남의 대통령으로 추대하면서 프랑스와의 임무 교대를 자원한다. "디엠은 권력을 가졌던 마지막 민간인이었다."(152) 디엠정권의 부패와 학정에 실망한 미국이 군사쿠데타(1963.11.2)를 묵인하자, 남베트남은 "이후 20개월 동안 10번의 정권 교체를 경험"하면서 허수아비로 전락했다.(153)


1964년 가을 무렵부터 북베트남은 "정규군을 호치민루트를 통해 남파하기 시작했다." 케네디의 암살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권력을 이양받은 존슨은 '자유 세계의 경찰국가론'에 깊이 빠져들었으며, "국가의 자존심"을 지키고 "백악관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베트남을 수호해야 했다."(159) 케네디에게 인계받은 보좌관들과 현지 군 관계자들은 미국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남베트남이 붕괴된다는 논리를 펴면서 "폭격과 확전이 지상 과제라고 주장"했다.(215) 존슨은 미국이 강력한 무력을 과시하면, 북베트남이 타협을 수용할 것이라 생각했다. 8월 5일 북폭을 시작으로 미국은 "아무런 선전 포고도 없이 베트남전에 직접 참전"을 결행한다.(206)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우세한 화력과 승리는 무관하다는 사실만 입증될 뿐이었다. "군사작전에 동원된 미군 병사들 중 4명당 3명은 비전투요원"으로, "장병들은 공기를 제외하고 전량 미국에서 수입한 물자로 미국 생활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256) 1966년 한 해에만 남베트남 지상군의 21%가 탈영했다. 전면전도 없는 상태에서 게릴라들에 대한 끝없는 수색 작전에 지친 미군은 "기강 해이와 사기 저하"(291)에 물들어갔다. 군부의 모든 사건, 사고가 여과 없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었고, 민간인과 군인을 가리지 않고 불만과 좌절감이 확대 재생산되었다.


"1968년 1월 31일 밤 공산군은 베트남의 명절인 구정에 때를 맞춰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무모한 화력전은 북베트남군에게 큰 피해를 남긴 채 재빨리 수습되었지만, 승리를 자신하던 미국 시민들에게 엄청난 심리적 압박감을 안겨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저는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이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347) CBS의 뉴스캐스터 월터 크론카이트가 한 말이다. 마침내 1968년 11월 1일, 존슨 대통령은 "정찰 비행을 방어하기 위한 필수적인 공습 외에는 북베트남에 대한 공군과 해군의 폭격을 일체 중지한다고 발표했다."(423)


전쟁이 마무리국면에 접어드는 듯 했지만, 존슨 행정부를 계승한 닉슨은 "하노이의 늙은 지도자들이 지쳐서 결국은 정치적 협상을 모색할 것"이라는 잘못된 신념마저 물려받았다. 닉슨은 54만 3,000명의 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하는 한편, 전쟁을 빨리 끝내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비밀리에 "캄보디아에 있는 게릴라 '성역'에 대한 B-52 전폭기들의 공습"(440-1)과 지상군 투입을 승인했다. "명분 없는 싸움만 했다는 좌절감이 깊어진" 미군 병사들의 구호는 "베트남에서 죽는 마지막 미군이 되지 말자"(474)로 바뀌었다. "1971년 전투에서 부상당해 입원한 환자가 5,000명 미만이었으나, 마약 남용으로 치료받는 환자의 수는 이보다 4배가 많은 2만 529명을 가리키고 있었다."(503)


1972년 11월 7일 재선에 성공한 닉슨은 다시 한 번 하노이와 하이퐁에 대한 크리스마스 대폭격을 감행했다. 이는 "북베트남 사람들에게 가능한 많은 피해를 주어 자신의 의도대로 전쟁의 막을 내리게 하자는 '인륜을 파괴하는' 계산"(549)이었지만, 전세계 여론이 악화되는 부작용만 초래하고 말았다. "1973년 1월 23일 파리에서 키신저와 레 둑 토가 확정한 마지막 평화협정안은 1972년 10월에 제시되었던 내용과 동일했다."(552) 


1975년 미국이 더 이상의 직접 개입을 회피한다는 확신 아래 북베트남 정규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자, 남베트남의 티우 대통령은 미국에게 원조 약속을 지킬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닉슨은 이미 6개월 전에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을 사임한 상태였다.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대답은 '북베트남에 대한 정찰 비행을 복원한다'였다."(567) 미국만 바라보던 티우와 남베트남 장성들은 국가 수호에 미련이 없었다. 북베트남군이 지척까지 다가온 사이공은 여전히 평화로운 분위기에 감싸여 있었지만, 티우 대통령은 국민을 버리고 망명길에 오른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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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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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을 뜨겁게 달군 베트남전쟁은 '선전포고 없는 전쟁'이었으며, 미국의 제1목표는 "남베트남 정부를 지키는 것"이었다. 케네디의 뒤를 이어 베트남의 운명을 떠안은 존슨 대통령은 "미국이 중국 대륙을 잃었을 때 불었던 매카시 선풍"(58)이 국내 정치를 유린했던 사실을 떠올리면서, 베트남에서 철수하면 공산주의가 "중동과 유럽,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51)고 우려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제한전 전략을 채택하여 베트콩을 지원하는 "북베트남을 폭격"했지만, 전면전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59) 


미국이 "제한전을 고려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중국의 참전 가능성" 때문이다. 한국전쟁에서 38선 이북으로 전선을 확대했던 미국은 중국의 참전에 밀려 "한반도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데 일조"하고 말았다.(61) 전선의 확대를 막는다는 명분은 타당했지만, "진격할 목표가 없다는 사실"은 목숨 걸고 싸우는 최전선의 병사들이 전투의 승패보다 살아남는 것에 집착하게 만들었다.(60) 베트남전쟁은 이데올로기 수호라는 지상목표 외에도 "경제를 위한 전쟁"(53)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공산주의의 확대는 "미국의 가장 믿음직한 파트너였던 일본 경제의 부흥을 위한 가장 중요한 배후지"로 떠오르고 있던 동남아시아 시장의 축소를 의미했다.(54)


"한국 정부는 1964년 봄이 가기 전에 파병을 결정했다."(23) 박정희 정부가 파병의 근거로 내세운 표면적인 이유는 주한미군 감축 저지와 한미 동맹 고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수호였지만, 한일 협정 체결에 반대하는 사회 분위기를 일신하고, 군축에 따른 군부의 지지기반 붕괴를 막겠다는 속내가 들어 있었다. 여기에 존슨 대통령이 '더 많은 깃발more flag' 정책을 표방하면서, "더 많은 한국군을 시급하게 요청"(40)하자 박정희 정부는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얻어내기 위해 체제를 적극 동원했다.


북한은 이에 맞서 북베트남과 베트콩을 측면 지원하기 위해 한반도 안보 위기를 조장했다. 1968년 1월 21일에 청와대 습격 사건, 23일에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이 벌어졌다. 1965년과 1966년에 30~40건에 불과했던 비무장지대의 남북간 교전이 "1968년에는 500건으로 급증했다."(30) 박정희 정부는 북한의 공세에 대응하는 수준을 넘어 적극적으로 선제공격을 펼치면서, 한국군 추가 파병이 "북한의 도발을 막기 위한 군사 장비가 [한반도에] 얼마나 제공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44)는 말로 미국을 압박했다. 


베트남에 가는 이유는 다양했지만, "금전적인 요소"는 군대와 기업 모두에게 가장 큰 유혹이었다.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 사병의 전투 수당(이병의 경우 51.11달러)"은 당시 국내 이병 월급 1달러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많은 돈이었다.(154) 1965년부터 1973년까지 파병 군인들이 국내로 송금한 돈은 "전체 수당의 83퍼센트"에 달했고, 정부는 높은 송금 및 환전 수수료를 통해 일부를 거둬들였다. 1975년 10대 재벌에 새롭게 진입한 "현대, 한진, 효성, 쌍용, 대우, 동양맥주, 동아건설, 신동아 등"은 "베트남전쟁 당시 용역과 건설, 무역 등으로 성장한 기업이었다.(224)


한국 정부는 전투부대 파병으로 인한 공백을 채우기 위해 1968년 예비군을 창설하여, "병역의무를 마친 예비역들을 지속적으로 통제, 동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주민등록제도도 196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국민들의 정신을 개조하겠다는 제2경제론은, 광화문에 충무공 동상을 세우고,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하는 것으로 이어졌다."(217-8) 전쟁 특수는 한국의 산업구조도 바꾸어놓았다. 박정희 정부는 "중화학공업과 종합 기계 산업 건설이라는 애초의 계획을 다시 부활"시켰으며, 독자적으로 "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받았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전쟁 특수"이다.(227-8)


그러나 미국이 아무리 국력을 쏟아부어도 정글의 늪은 깊어만 갔다. 1968년 베트콩의 구정공세는 비록 실패한 전투였지만, 성공을 자신하던 워싱턴을 충격에 빠뜨렸고, 반전 여론의 기폭제가 되었다. 파병국들이 높은 경제성장을 구가할수록, 미국은 과다한 국방비 지출로 재정적자에 시달렸다. '브레튼우즈' 체제를 주도하던 미국은 "1968년 3월 금의 이중가격제"를 시행했고, "달러의 가치 하락은 전 세계에 인플레이션"을 가져왔다. 마침내 닉슨 대통령은 "1971년 8월 15일 달러의 금태환이 정지됐음을 선언했다."(186-7) 


미국은 반전 여론과 악화된 재정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베트남에서 철군을 결정했다. 언론과 의회는 "남베트남 정부가 더 이상 지켜야 할 가치가 없"다는 점을 집중 부각시키면서 철군을 지지했다.(318) 닉슨 행정부가 일방적으로 베트남 주둔 미군의 철수를 결정하자, 전쟁특수가 실종된 아시아의 파병국들은 쿠데타와 계엄령의 포연에 잠겼다. 자유체제 수호라는 임무를 스스로 저버린 미국이 그들의 반란 앞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관망'뿐이었다. "1971년 11월 18일 타이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 10개월이 지난 1972년 9월 22일 필리핀에서 계엄령이 선포됐다. 그리고 "한달이 채 되지 않아 한국에서 유신이 선포됐다."(2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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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새마을운동 - 한 마을과 한 농촌운동가를 통해 본 민중들의 새마을운동 이야기
김영미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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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는 1932년 7월부터 1940년 12월까지 조선농촌진흥운동을 전개하여 '모범 부락'으로 선정된 마을을 집중 육성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승만 정부 하에서도 자발적으로 마을환경을 개선하는 마을을 '모범 부락'이라 칭하며 표창하는 제도가 있었다. 새마을운동의 '자립마을' 정책은 이전 시기 정부 정책을 계승한 것으로서, "마을은 전년도의 성과에 따라 기초마을, 자조마을, 자립마을로 구분되었으며 우수한 성과를 낸 자립마을로 선정되면 대통령의 특별하사금과 함께 집중적인 지원을 받았다."(51-2)


전통적인 농촌 마을을 도농 복합 마을로 변모시키고 "국가가 농촌 사회에 지배적인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마을] 신들이 가진 신성을 전유해야 했다."(38) 국가는 마을의 공존 영역을 해체하여 마을회관이나 정미소, 구판장 등이 들어선 공유재산 영역으로 재배치하고, 동리 이장을 통해 하부 행정을 보조하도록 했다. 이장의 급여는 마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이세를 모아 충당하도록 함으로써, "행정비용을 주민들에게 전가하는 효과"(45)도 거두었다. 


해방 후 농촌 지역의 변모를 이끈 주요 원동력은 농지개혁과 한국전쟁이다. 농지개혁은 일정한 경제력이 있는 자소작층에게 소작지를 분배하여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를 해체시키고, 소작권을 매개로 농민들의 생존권을 위태롭게 했던 마름의 존재를 무력화시켰다."(108) 1950년 12월에 공포된 '국민방위군 설치법안'은 "씨족과 지역, 신분 등의 관계망에서 벗어나 새로운 군사조직의 편재로 전국민을 통합"하여, 국민은 "국가에 복종하고 충성해야 할 존재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116)


그러나 전후 약자가 월북하거나 도시로 이주하면서 농촌 지역은 이념적으로 단일화되고, 보수성이 짙은 씨족 공동체로 되돌아갔다. "전통적 신분 관념"과 "부계 중심의 위계질서"에 균열을 낸 것은 1960년 이후에 대거 등장한 청년 이장들이었다. 그들은 "서울에서 유학하는 것과 도시에서 근대적인 직업을 갖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한 이들로서, 자신의 충족되지 않은 욕구를 "자신과 마을의 생활환경을 도회지와 같은 수준으로 변화시키는 사업"(160-2)에 쏟아부었다.


부녀회 활동도 씨족 공동체에 균열을 가하고 국가와 주민들을 밀착시켜주었다. "당시 여성들은 이름 석 자를 가지고 있었지만 출가 후 한 번도 자신의 이름으로 호명된 적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부녀회를 매개로 국가가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자, 여성들은 "목숨이라도 내놓을 듯이 마을과 국가의 열렬한 투사가 되었다."(210) 부녀회 사업을 통해 마련된 기금으로 진행된 "부녀회 관광은 여성들만의 해방구였다."(214)


국가가 깊숙히 개입한 새마을운동은 필연적으로 정치운동과 밀착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당읍면지도장이나 부지도장의 권력은 대단하여, 읍면 사업은 그들과 함께 사전 회의를 통해 결정되었으며, 그들이 마을에 어떤 불편사항이 있다고 말하면 즉각 반영되었다."(215) "도시에서 유신반대 운동이 격렬하게 벌어진던 때에 농촌에서 박정희 정부의 지지표가 지속적으로 이어졌던 것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 지배전략 때문이다."(218)

 

국가주도의 계몽운동은 농민들의 경제적 빈곤을 지배체제와 정책의 한계가 아니라, "농민들 자신의 게으름과 낭비적 생활태도에서 기인한 것으로 책임을 돌린다." 이는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사사화私事化' 전략"(62)으로서, 새마을운동의 주요 전략이기도 하다. 새마을운동은 "근대화운동의 주체를 마을로 설정"(352)하여 국가가 개인의 결함을 치유해주는 적극적인 시혜자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현재까지도 새마을운동 지도자나 마을 이장 역임자들은 그들과 인생의 황금기를 함께 했던 박정희 정부의 지지자로 남아 있다."(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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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특설대 - 1930년대 만주, 조선인으로 구성된 친일토벌부대
김효순 지음 / 서해문집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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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대한 저항, 조선인 자치 추구, 사회주의혁명 노선의 수용 여부를 놓고 다양한 흐름이 존재"하던 만주의 조선인 사회는 1931년 9월 18일에 벌어진 만주사변을 계기로 "친일과 반일 어느 한쪽을 분명하게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몰렸다."(158) 조선인 항일 운동가들은 코민테른의 1국 1당제에 따른 중국공산당 입당 지시와 친일파 모임인 '간도협조회'의 회유와 모략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렸다. 설상가상으로 중국 공산당 내부의 친일 첩자를 둘러싸고 벌어진 반민생단 투쟁은 "어처구니없게도 일본의 특무조직이나 밀정이 아니라 조선인 항일 혁명가를 주요 투쟁 대상으로 삼았다."(117) 분파 숙청이 외부 투쟁을 압도한 상황에서 "민생단 혐의를 뒤집어쓴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죽음, 변절, 은신 같은 몇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118)


"동만주 지역에서 작전을 펴다가 1943년 말 러허 성으로 이동해 팔로군을 비롯한 중국인 항일 부대 토벌에 투입됐고, 나중에는 철석부대 산하로 편입돼 독립보병대로 활동"(18)한 간도특설대는 이러한 배경 위에서 탄생했다. 조선인들이 본격적으로 간도특설대에 배치된 시기는 '빗질 작전'이나 '말파리 작전'으로 불린 노조에 부대의 대토벌로 간도 지역의 무장 항일운동이 사실상 막을 내린 뒤였다. 그러나 현장지휘관의 즉결처분권을 뜻하는 임진격살(臨陣格殺) 제도를 패망까지 유지한 만주국은 설립부터 해체까지 줄곧 전시 상태였다. "만주국의 역사는 바로 항일 무장 세력에 대한 '토벌'의 기록임과 동시에, 그것에 맞서 투쟁한 '반토벌'의 기록"(183)인 것이다.


초대 해병대 사령관을 지낸 신현준에게는 "일본군 부대에 통역으로 들어갈 때나, 펑텐 군관학교에 들어갈 때나, 간도특설대 창설에 몸담을 때나 심적인 부담을 느낀 흔적"(38)이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펑톈 군관학교 5기 출신인 정일권은 "만주국에서 옌지 헌병대장 등을 지냈고 일제 패망 때 소련군에 체포돼 시베리아로 이송되던 중 탈주해 남한으로 왔다.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박정희 정권에서 국무총리, 국회의장 등을 역임한다."(162)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 부임한 것은 1943년 2월이었으며, 그는 "항일연군이란 표현을 거의 쓰지 않고 게릴라라는 용어를 고집했다.'(228) 그의 창씨명인 시리키와 요시노리(白川義則)는 우연인지 모르지만,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폭탄투척 의거 때 중상을 입고 26일 뒤 숨진 상하이파견군 사령관의 이름"(363)이었다.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조선인들은 "일본군이나 만군 장교로 가는 길에 위화감을 갖지 않았다." "일제 군국주의 체제 아래서 군 장교의 위상과 권한은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았"으며(38) 장교 임관은 입신양명의 보증수표였다. 간도특설대 대원 중에 만주의 치안 숙정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훈장을 받은 이들은 175명에 달하며, "그중 조선인이 167명, 일본인이 8명이었다."(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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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에게 만주국이란 무엇이었는가
강상중.현무암 지음, 이목 옮김 / 책과함께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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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승전의 영광과 축복을 몸소 체험하면서 "일본이라는 국가의 생존은 '제국의 영유(領有)'에 달려 있으며, 일본은 자위(自衛)를 위해서 영토를 확대해온 것"(46)이라는 호전적 애국주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정치가들이 국내의 농촌 과잉인구를 해소하는 방안으로 만주를 일본 국민의 발전을 위한 "독점적 지역"으로 재인식하면서, 만주는 "생명선"이자 일본의 "특수권익"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나갔다.


기획원을 본거지로 삼아 고도국방국가(高度國防國家) 건설을 추진했던 일본의 혁신관료들은 일찍이 기타 잇키가 <일본개조법안>에서 주장했듯이 폭력을 수반한 국가개조를 옹호하였고, "독자적인 법칙 아래 운동을 완성하는 사회의 구조 또는 그 메커니즘을 파악하고 그 공학적인 지도를 실행"(31)해야 한다는 마르크스-레닌주의적인 사회과학도 수용했다. 기시를 비롯한 이들은 국가를 철저하게 "관리하는 테크노크라트적 지도자"(33)로 자신들을 자리매김했다.


떠오르는 제국 일본에게 만주는 조선을 지배하고, 중국을 제압하며, 소련을 감시하는 교두보이자, 미국과 벌이게 될 최후의 한판을 준비하는 병참기지였다. '세계제패'라는 막중한 운명을 짊어진 만주국은 계획경제, 군부독재, 사상통제가 한 몸을 이룬 거대한 병영국가로서 야심찬 '정치가'와 '군인'들의 등용문이었다. "박정희를 '군인'으로 변신시킨 것도, 기시 노부스케를 '정치가'로 단련시킨 것도 모두 만주제국이라는 대일본제국의 '분신'이었던 것"이다.(12)


박정희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을 이념으로 하는 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를 제도나 사상 면에서 실질적인 것으로 만들어가는 황민화정책이 본격화"(107)되던 1930년대에 청년 시절을 보냈다. "박정희와 같은 청년들이 나중에 '피지배민족'에서 '제국적 주체'로 변모하고 만주에서 활약할 꿈을 꾸려고 했던 것도 이러한 제국 일본의 동심원적인 확대가 가져온 '음덕' 덕분"(47)이었으며, "박정희가 택한 길은 '동아신질서'에서 제국의 정당한 주체로서의 지위를 살려 황국 군인이 되어 그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었다."(122)


그러나 1944년 12월 소위 임관과 1945년 7월 중위 진급이라는 그의 짧은 성공은 종전(終戰)으로 중단되었다. "만주에서 종전을 맞이한 박정희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주도하는 광복군에 합류한 뒤 이듬해 5월에 귀환선 편으로 부산에 도착했다."(123) 1948년 여순사건에 따른 숙군작업에서 남로당 가입이 적발된 박정희는 1949년 2월의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으로 파면이 언도되었지만, 그마저 10년 감형과 형집행정지로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그를 부활시킨 것은 백선엽을 비롯한 만주군 선배들의 배려와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이었다. 


한편, 미국의 일본점령을 "일본 국민 길들이기, 모럴의 파괴"(200)라고 규정한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국을 향한 "잃어버린 뿌리에 대한 열렬한 향수"와 "심오한 꿈이 깃든 강력한 정치"(160)에 대한 대중의 갈망을 연료 삼아 전후 정치권에서 부활을 도모했다. 그는 점령에 대한 반동으로 확산되는 "내셔널리즘 풍조"를 적극 이용하여 세력을 얻었고, 만주국에 적용하던 통제경제 실험을 "일본적 경제시스템의 원형"(178)으로 단단히 이식시켰다. 기시에게 "일본헌법은 일본의 빛나는 전통과 역사를 깎아내리는 전전부터의 오점"에 불과했으며, "자주적인 헌법을 새로이 제정하는 것"(206)만이 점령정치의 굴욕을 씻는 유일한 길이었다.


박정희 역시 "막강한 군을 배경으로 하는 리더십, 소수의 경제 테크노크라트에 의한 의사결정과 자원배분 권한 독점, 수출시장 확보와 기술력 및 외자 도입을 목적으로 하는 대외관계 구축, 중화학공업화를 향한 적극적인 재정지출, 그리고 만주국협화회를 방불케 하는 국민동원을 위한 새마을운동 등"(218) 만주국과 유사한 형태로 국가를 조직했다. "박정희 정권 치하의 한국은 만주국에서 거행된 국민대회, 추도식, 전몰자기념비, 학생웅변대회, 표어 짓기, 반공대회, 체조, '건설'이나 '재건'이 붙은 슬로건, '총력안보', '총동원' 등을 모조리 모방"(271)한 병영국가였다. 기시가 청출어람의 옛 식민지 지도자를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4월 혁명 이후 "한 번 더 혁명해야 한다. 혁명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고 외친 함석헌은 물론이요, <사상계>의 지식인들도 "정부의 무능과 분열, 인플레이션과 실업자의 증가, '혁명과업'의 후퇴 등을 엄하게 추궁하면서 경제번영의 건설과 국민성의 '개조'라는 두 측면에서 국가발전의 이정표를 제시"(220)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당시 강력한 국가주의는 모두의 염원이었다. "빈곤에서의 해방이라는 경제적 욕망과 '조국 근대화'라는 민족주의적 욕구"(224)가 전국민을 감싸고 있었기에,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 프로젝트는 자율과 동원이라는 양대 엔진을 달고 힘차게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혼돈에 빠진 조국을 구해낸 "중흥의 아버지"는 1968년 제2경제론을 표방하여 동원체제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그것은 "일본의 교육칙어를 상기시키는 '국민교육헌장'의 제정과 민족교육의 강화"(243)를 통해 추진되는 정신의 동원이었다. '화랑도'에서 민족정신의 기원을 찾는 이선근의 '신라중심사관'은 "북한과 대치하며 민족사관을 정립해서 이데올로기 면에서 국내체제를 다잡으려는 박정희 정권에게 유용"(266)한 수단이었다. 


마침내 "1972년 11월 21일에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91.9퍼센트의 투표율과 91.5퍼센트의 찬성으로 유신헌법이 확정"되었다. 대통령이 "국회해산권과 긴급조치권을 장악하고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함으로써 의회와 사법에도 견제"(252)당하지 않는 초법적인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그 마지막은 다시금 혼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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