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 시대 -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
주경철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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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저서는 '대항해 시대'에 대한 여러 논의를 총체적으로 집약, 분석, 정리하여 심화학습으로 안내해주는 기본 교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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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계의 팽창, 세계의 불균형
- 보호 비용 protection cost
운송로의 안전을 위해 지불하는 비용
- 보호 지대 protection rent
국가의 지원을 받아 보호 비용을 절감

# 무장은 보호뿐만 아니라 약탈도 가능
--> 포르투갈은 강력한 무장을 바탕으로 아시아의 상업 세력에게 통행증을 발급하여 보호 비용을 수취 : 무역 체제 유지
-->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무력을 수단으로 시장 교역을 강제함으로써 이윤 수취 : 무역 체제의 변화 유발

- 근대 유럽 체제의 우위를 말하는 이론들
1) 고전파 정치경제학자
유럽식 자본주의적 발전이 곧 진보
2) 오리엔탈리즘
열등한 비서구를 이데올로기로 정당화
3) 19세기 민족주의 역사학
당대의 유럽의 우위를 과거에 투사

- 지구사(global history)
역사의 흐름에 하나의 중심부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지역들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점을 인식하고 중요한 주제들을 비교사적인 방법으로 검토하는 관점.
예) 근대세계체제론, 전前근대 세계체제론, 리오리엔트

# 대분기(大分岐, Great Divergence)
18세기까지도 중국과 유럽의 경제 발전 단계는 유사했는데, 유럽이 산업혁명에 성공하여 '발전의 덫'을 벗어난 요인은 1) 해외 식민지 획득과 2) 영국의 채굴이 쉬운 석탄 부존이라는 '우연'과 '폭력'의 결과이다.

2 유럽의 해상 팽창
- 포르투갈의 대항해 시대 선점
1) 이슬람과 기독교 문명이라는 상이한 두 세계의 경계
2) 대서양 세계와 지중해 세계의 경계

# 카레이라(Carreira, 국왕선박항로)
국왕 명의로 사업을 수행하면서 사적인 거래를 추가하는 방식
# 카르타스(Cartaz)
주요 항로의 안전통행증을 판매하는 합법화한 해적 행위

*'과잉 팽창' 상태에서 오토만 제국의 역습과 아시아의 경제 불황으로 영향력 감소.
*국왕 주도의 무역 체제가 개인 사업자(봉사 귀족) 주도로 이양되었고, 1578년 알카스르알카비르 전투 패배 후 에스파냐에 합병(1540-1580)되어 해외 교역망 약화

- 제국과 플랜테이션 :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화
*상업보다 정복에 치중한 에스파냐는 참혹한 살육(Black Legend) 이후에 가혹한 조세•조공 체제(엔코미엔다)와 대농장 노동 제도(아시엔다)로 아메리카 식민지를 지배
--> 17세기 이후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확대되면서 흑인 노예 본격 도입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과당 경쟁을 해소하고 해양 무역의 수익성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가 나서 결성한 연합 회사(1602). 군사력의 사용 권한을 위임받은 '국가 밖의 국가' 형태를 띠었다.
: 최초의 근대적 주식회사

- 영국 동인도회사(EIC)
VOC와의 경쟁에서 밀려나 향신료 시장에서 철수했지만, 인도에 집중한 결과 최종 승리자가 된다.
--> 영국 정부가 각종 지원과 관리, 감독을 병행하면서 총독과 지사, 사령관을 파견하여, 무역과 식민 지배의 복합체로 전환
--> 인도 통치법 가결로 EIC를 해산하고 영국 정부의 직접 통치(1858)

# 아시아 교역의 주요 상품
후추, 향신료, 직물, 비단

3 근대 해양 세계의 내면 : 선박•선원•해적
- 선박(갤리선에서 범선으로)
: 삼각돛과 사각돛의 교환 기술 발전
: 중심축과 같은 방향에 설치한 중앙타
: 판재를 이어붙여 방수 효과를 높임
--> 카라벨선 개발

*선박 크기의 변천
발견과 탐험의 시대 : 소형 선박
정복과 교역의 시대 : 대형 선박

- 해적(폭압적 착취 구조의 반질서)
1) 사략선 업자(privateer, coisaire)
정부와 계약을 맺고 전시에 적선을 공격할 권리를 받은 자
2) 버커니어(buccaneer)
17세기 전반에 카리브 해에서 에스파냐 선박들을 공격한 자
3) (좁은 의미의) 해적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바다의 무법자

4 군사혁명과 유럽의 팽창
- 군사력의 결정 요소
1) 기계와 기술의 우위
2) 사기와 조직력

*16~18세기 군사 혁명
1) 총포류가 창을 대체하는 무기 변화
2) 군대 규모의 엄청난 증대
3) 대규모 복합 전술
4) 사회에 대한 군대의 영향력 증가
# 개별 국가들 간의 팽팽한 대립은 지속적인 군사력 강화를 유도

*당대의 전쟁 개념의 차이
서방 : 전쟁은 정상성이 깨진 상태이며, 최대의 전력으로 맞붙어 패자의 피해를 극대화한 뒤 조약을 맺으면서 끝난다.
다른 사회 : 국경 지대의 소규모 투쟁과 약탈이 일상적이며, 지도자의 권위를 드러내는 의식화(ritualized)의 경향을 띤다.

5 화폐와 귀금속의 세계적 유통
- 기존 학설과 오류
귀금속의 "아메리카 생산-유럽 유입-아시아로 유출" 패턴은 중국과의 교역에 한정되며, 16~17세기 인플레이션과 공산품 가격 상승 역시 귀금속의 유입이 원인이 아니라 경제 성장에 따른 화폐 수요 증가가 불러일으킨 결과일 가능성이 있다.

- 중국으로 은이 집중된 이유
금과의 교환비율이 유럽보다 높아 차익거래가 가능했고, 일조편법(1570)의 시행으로 은 수요가 대규모로 증가
# 일조편법(一條鞭法)
모든 조세 수입을 은으로 통일

- 기타 화폐
구리, 카우리 조개, 아편
# 아편은 정식 화폐는 아니지만 결제 수단 부족 문제를 해결해 준 보조 수단이었다.

6 노예 무역
- 아프리카 사회
왕이 토지가 아니라 인민을 지배하며, 사유 토지 대신 사유 노동이 사회의 근간을 이룬다. 따라서 유럽의 영토 정복 전쟁이 아프리카에서는 노예 획득 전쟁이 된다.

- 노예 무역의 방식
국가의 지원을 받은 회사가 주로 수행했으며, 자본과 폭력이 결합된 사례이다.
1) 성채 무역(castle trade)
다른 노예상과 대치하면서 해안가의 요새를 거점으로 내륙의 노예 공급선을 확보
2) 코스팅(costing)
유럽 상인들 스스로 노예 판매상(란사도스, lançados)을 찾아 강 상류까지 진출
# 중간 항해(middle passage)
배의 화물칸에 갇혀 대서양을 건너는 일

- 흑인 노예제 도입
1) 인디오 노예화에 대한 거센 반발의 대안(인디오 구원 가능론은 흑인의 비인간화를 부추기는 인종주의로 연결)
2) 면역력이 강하고 숙련된 기술을 갖춘 흑인들의 높은 가치
3) 유리한 노동력 구매 비용

- 노예제 정당화 논거
1) 문명을 전수하고 예수를 알게 해주었으며 일부에게는 자유도 주었다는 논리
2) 무역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논리
3) 흑인들은 야만인이기 때문에 즉각적인 폐지보다 점진적 개선이 낫다는 논리

# 노예무역은 자체의 수익성이 높다기보다는 세계 경제 체제가 원활하게 작동하는 데 필수적인 노동력을 제공하여 경제 성장을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만든 변방의 분야이다.

7 환경과 인간
- 유럽 생물상의 신대륙 점령
(크로스비) 유라시아 대륙의 생물상이 신대륙들의 생물생에 비해 훨씬 복잡하게 진화해왔다.
(프로스트) 토종 생물상이 토착 환경 변화에 잘 적응하기 때문에 외래종보다 복원력이 크다.
# 인간 행위자와 그들이 가져온 기술이 승리의 최종 변수

- 맥닐의 법칙
많은 사람들이 한번에 외부 지역으로 나갈 경우 그 지역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병균들을 보유한 '숙주'의 침입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현상

- 전염병의 사회적 해석
유럽인들에게는 신의 응징이었고, 원주민들에게는 사악한 마법이었다.

8 기독교의 충격
- 가톨릭의 영향력 복원
유럽 내에서 신교도에게 빼앗긴 영향력을 해외 선교에서 보충하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는 근대 초의 전도 기획에는 무력에 의한 정복과 강제 포교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 영혼의 정복(spiritual conquest)

- 선교 방법 논쟁
(모토리니아) 다가오는 천년왕국 이전에 공격적으로 전도를 시행해야 한다.
: 피오레의 요아킴 계승
(라스카사스) 구원받을 사람은 예정되어 있으며 정당한 사회 건설이 우선이다.
: 아우구스티누스의 계승

9 문화의 교류 : 언어, 음식, 과학 기술
- 유럽의 외국어 연구
식민 지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권력화(empowerment)와 배제(displacment)의 과정.

-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
여러 언어가 만날 때 공통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언어. 여기서 여러 언어 요소들이 뒤섞이면 피진(pidgin)이 되고 이것이 발전하면 크레올(creole) 언어가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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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돌베개 석학인문강좌 12
김호동 지음 / 돌베개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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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에 마르코 폴로가 쓴 '동방 견문록'은 유럽에서 '성경' 다음 가는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대유행을 누렸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환상적인 묘사로 가득 채워져 있던 이 책은 지브롤터 해협 안에 갇혀 있던 유럽이 자신들의 협소한 세계관을 깨고 나와 동방의 엘도라도를 찾기 위한 열정적인 탐험에 나서는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 팍스 몽골리카(Pax Mogolica)
1. 유라시아 대륙을 감싸는 광대한 역참(jam) 도로망 구축
2. 본속주의本俗主義를 기초로 민족간 풍속의 다원성을 인정
3. 광범위한 통역원(켈레메치, kelemechi, 通事)과 번역원(비체치, bichēchi, 譯史) 육성으로 지식의 전파
4. 무슬림 상인들을 활용하여 농경민들의 통치 제도 수용
5. 은본위 제도를 도입하고 교초(지폐) 사용을 확대하여 세계 경제권 실현
6. 대여행의 시대 도래(마르코 폴로, 이븐 바투타, 랍반 사우마)로 세계관 변모


이러한 세계관의 확장은 몽골 제국이 구축한 세계 위에서 실현되었다. 그러나 이후 아시아가 몽골의 정치적, 군사적 업적을 모방하는 데 주력하여 서로를 견제하는 동안 유럽은 경제적 이익을 목표로 삼아 혼란에 접어든 대륙을 버리고 바다로, 바다로 나아갔다. 토끼는 계속 뛰었지만 유영(游泳)하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원제국의 경우, 당시 중국을 통치했던 쿠빌라이나 그의 계승자들에게서는 중국 왕조의 전통을 잇는 군주라는 의식을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유라시아를 지배하는 `대몽골 올루스`, 즉 몽골제국의 대칸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
(청제국의 군주들도) 한인들에 대해서는 `황제`를 칭하면서 `덕치`를 강조하였지만 몽골리아, 티베트, 신강 등지에서는 어디까지나 내륙아시아형 군주인 `카간`[可汗]이었다. 43)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사실은 유목민들의 약탈전이 실제로 필요한 물자를 `약탈`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농경국가를 `협박`하기 위해서 수행되었다는 점이다.
...
유목민의 약탈전은 부족한 물자를 빼앗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정주국가의 변경을 위협함으로써 그러한 물자를 정기적으로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게 해주는 협약을 도출해 내기 위해서 수행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55-6)

몽골 시대의 여행은, 참가한 사람들의 숫자는 물론이거니와 거리라는 측면에서도 과거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다. 그 결과 많은 여행기들이 쓰였던 것이고, 그것은 종래 사람들이 갖고 있던 외부세계에 대한 관념을 바꾸기 시작했다. 177)

콜럼버스는 몽골의 시대에서 영감을 받았기 때문에 그 같은 항해를 계획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그의 목표 지점이 바로 몽골의 대칸이 다스리고 있는 나라였으며, 그가 출항할 때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 두 국왕이 몽골의 `그란 칸` Gran Can, 즉 대칸에게 보내는 친서를 휴대하고 갔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236-7)

명나라는 정화의 위대한 성취를 뒤로 한 채 해양으로 향한 문을 닫아버리고 몽골 유목민들이 가하는 위협을 여하히 봉쇄할 것인지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결국 오늘날 우리가 보듯이 엄청난 물자와 인력을 투자하여 만든 만리장성으로 구체화되었다. 240)

유럽의 성공은, 몽골제국이 남긴 정치적•군사적 부담인 `내륙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으면서도, 몽골의 시대가 남긴 `세계사의 탄생`이라는 축복은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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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하고 황량한 사막 풍경을 100% 활용한, 말 그대로의 "폭발적인" 추격 장면과,

 

억눌린 미치광이 맥스의 광기를 집어삼키며 폭주하는 임모탄 집단의 광기의 항연들,

 

스릴과 폭력이 난무하는 절망의 세계를 종국에 감싸안는 어설프지 않는 인간미까지,

 

모든 것을 다 보여주면서 오바하지 않는 이 영화의 "균형 감각"이 그야말로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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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탄생
오카다 히데히로 지음, 이진복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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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생각하는 역사의 기준은 (시간을 규정한) 역(歷)법의 발명과 기록 수단인 문자의 보유이다. 지중해 문명과 중국 문명만이 이 기준에 합당한 역사를 갖고 있으며, 여타의 문명은 이들과의 만남 속에서 비로소 역사를 체현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중해 문명의 역사를 선과 악을 대변하는 유럽과 아시아의 '대결' 구도로, 중국 문명의 역사를 천명(天命)을 받은 통치권력의 세습 혹은 교체라는 '정통'의 계승 구도로 본다. 양자는 역사 서술의 전제(世界觀)가 완전히 다른 모형이었다.

저자가 제시하는 이 '대립'과 '정통'의 대립항은 범주가 다르다는 점에서 단순화의 경향을 띤다. 신이 선택한 선한 세력이 곧 '정통'일 수 있으며, 왕조 교체기에 나타나는 오행 순환의 역성혁명 주장은 '대립'을 정당화하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칭기스칸의 정벌기는 완전히 다른 두 문명의 조우가 아니라 대륙의 실질적인 지배자였지만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버린 유목민의 함성이 되살아난 것이며, 또한 유목민과 정주민의 공존이라는 오래된 선先역사의 재서술이기도 하다.


시간의 <세밀함>과 <오묘함>의 감각은 집단과 문화마다 대단히 다르다. 시간 그 자체는 물리적인 것이지만 시간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문화인 것이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 양쪽을 대상으로 하는 역사도 자연계에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문화의 범위에 속하는 것이다. 역사는 문화이고 문화는 인간의 집단에 의해 차이가 있기 때문에 집단마다 각각 <이것이 역사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31)

원 왕조는 동아시아의 대부분을 통합하는 대제국을 세웠지만, 가장 중요한 지역은 물론 몽골 고원이기 때문에 중국은 원 왕조 식민지의 하나에 불과했다.
...
원 제국은 1368년 중국을 상실했을 때 멸망한 것이 아니다. 몽골인들은 결코 명을 <정통>의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칭기즈 칸 자손의 왕가는 중앙 유라시아 도처에 살아남아 있고, 몽골 고원에서도 원 왕조(북원)를 자칭하는 왕가가 17세기까지 존속했고, 최후 칸의 아들은 만주인의 군주에게 항복하여 몽골 제국의 통치권을 청 왕조(1636~1912)에 인계했다. 102-3)

세속적으로 <몽골 제국은 네 개의 한국으로 분열했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몽골 제국에는 창립자 칭기즈 칸 시대 이래 이미 많은 올루스가 있었고, 칸이라고 해도 지배권이 직접 미치는 것은 자신의 직할 올루스뿐이고 그외의 올루스 내정에 개입할 권리는 없었다.
이처럼 잡다한 몽골인의 올루스로 이루어진 몽골 제국을 통합하고 있었던 것은 위대한 칭기즈 칸의 인격에 대한 존경과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세계 정복의 신성한 사명에 대한 신앙이었다. 192-3)

육상 운송의 비용은 수상 운송에 비해 훨씬 높고, 그 차이는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커지게 된다. 해양 제국은 항구를 요소요소에 확보하는 것만으로 육군에 비해 적은 해군력으로 해상권을 유지할 수 있다. 또한 대량의 물자를 낮은 비용으로 단기간에 수송하는 무역을 통해 큰 이익을 올리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이 몽골 제국이 아닌 몽골 제국 밖에 남아 있던 나라들에 의해 이른바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는 원인이었다.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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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
김호동 지음 / 까치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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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 사회의 이단 논쟁에서 패배한 네스토리우스교는 동서교역을 독점하고 있던 소그드 상인들의 발길을 따라 동방 세계로 전해져 당唐의 수도 장안에까지 이르게 된다. '격의불교'처럼 현지화 과정을 거친 그들은 儒佛道 三敎와 습합되어 본래의 모습을 다소 잃어버렸지만 서방 세계에 기독교 국가에 관한 몽상을 심어주기에는 충분했다.

각색된 전설을 접한 서구인들이 이슬람 세력을 징벌하는 동방의 '사제왕 요한'에 관해 막연한 환상과 기대를 품고 있었다면, 동양인들 역시 서왕모(西王母) 설화나 불교의 '서방정토'와 같은 관념을 통해 오래전부터 서방을 이상향으로 그리고 있었다. 미지의 것에 대한 동경과 신포도를 바라보는 두려움은 지리상의 발견 이전의 보편적인 정서였다.

12세기를 피로 물들인 징기스칸의 대大정벌은 대륙을 하나로 이어붙였고, 동방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던 서구 세계가 그 실체를 본격적으로 탐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비록 그것은 종교적으로 채색된 환상들이 물거품으로 사라지는 현실을 목도하는 과정이었지만, 이 때의 만남에서 축적된 지식들은 대항해 시대를 예비하는 열쇠로 남았다.

동방 기독교는 지배층의 변심과 교역의 중단 등으로 점차 세력이 감소했으며, 흑사병의 창궐과 이슬람 제왕 티무르의 잔혹한 정벌은 그들의 생존을 결정적으로 위협했다. 가혹한 현실은 신을 향한 믿음을 회의(懷疑)의 제단 앞에 무릎 꿇렸다. 욥(Job)이 아니었던 네스토리우스 교도들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자취에서 세계사가 탄생하고 있었다.


1145년 사제왕 요한에 대한 소식이 처음 전해진 지 300년 만에 비로소 그들이 그토록 열망하던 꿈, 즉 요한의 왕국을 찾으려는 소망은 마침내 실현되었지만, 그들이 찾아낸 것이 기대했던 결과와는 너무나 달랐다. 그러나 그동안 들였던 노력의 대가는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침내 동방세계에 대한 확고한 지식과 대항해의 시대로 들어가는 열쇠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16)

중국의 경교화景敎化가 언어와 관습이 다른 멀고 먼 이역에서 하루 빨리 전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가의 적극적인 보호를 받으며 수많은 중국민들이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는 종교적 개념을 표방할 필요가 있었고,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변신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 변신은 결국 `중국화`, 즉 유불도, 삼교의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었다. 153)

그들(소그드 상인)은 유목민들이 사는 초원으로도 진출하여 교역을 하면서 그들을 개종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몽골 제국이 출현하기 전에 네스토리우스교는 이미 초원 여러 곳에 견고한 발판을 만드는 데에 성공했고, 씨족, 부족 단위로 생활하는 유목민들은 수령의 결정에 따라서 집단적인 개종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케레이트나 나이만 혹은 웅구트와 같은 유목집단들이 대거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그것이 바로 서구에서 사제왕 요한의 전설을 잉태시킨 모태가 된 것이다. 172)

흥미로운 사실은 유럽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서아시아에서도 특히 수도원이 (흑사병으로부터) 극심한 타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우선 체계적인 의료기관이 부재한 상태에서는 그나마 교회나 수도원과 같은 종교시설에서 초보적인 치료조치를 취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감염된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들 수밖에 없었고, 역병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정신적 안식처로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곳을 찾았기 때문이다. 2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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