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체제의 성립과 전개 및 몰락 - 국제적.국내적 계급관계의 관점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모노그래프 54
김수행.박승호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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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정희 체제에 대한 평가가 왜 쟁점이 되는가?


"동아시아 발전모델에 관한 논쟁은, 신고전파 이론에 의거해 시장기구의 역할을 강조하는 시장중심론, 자율적인 국가에 의한 시장개입의 유효성을 강조하는 발전국가론, 유교문화의 역할에 주목하는 유교자본주의론, 동아시아지역의 특수한 지정학적 여건에 주목하는 국제주의적 시각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국제주의적 시각을 제외하면, 나머지 세 관점은 모두 주류경제학의 패러다임에 입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고, 시장중심론의 한계를 발전국가론이나 문화론이 보완하는 형식으로 논쟁이 전개되었다. 논쟁의 초점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제3세계에서 예를 볼 수 없는 고도성장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었는가"이므로, 이 논쟁에서는 논점의 차이와 대립에도 불구하고 고도성장은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반면 정치적 독재는 고도성장을 위한 불가피한 측면 또는 필요악이었다는 관점이 암암리에 전제되고 있었다."(2-3)


2 민족경제론 : 박정희 체제에 대한 정통적 비판


"민족경제론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이 추구하는 외자의존적 수출공업중심의 개발정책은 한국경제의 대외종속성을 강화하며 경제의 대내적 분업관련을 파괴해 불구적이고 파행적인 경제구조를 낳을 것이다." "따라서 자립경제의 확립을 점점 더 어렵게 하고, 매판 독재정권을 점점 더 강화하며, 한국경제는 대외종속에 따른 경제잉여의 유출과 외채위기로 파국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민족경제론은 1950~60년대의 제3세계 혁명이 제기한 '자립적 민족경제의 건설'과 '매판 독재정권의 타도'를 슬로건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한국의 진보진영에 의해 크게 수용되었다. 그러나 무엇이 '진정한 자립경제'인가에 대한 명확한 개념도 제시하지 못했고, 어떤 경로를 통해 '파국'이 불가피한가에 대한 분석도 없었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이 수출증진을 통해 고도성장─비록 '허울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을 달성하자마자 민족경제론적 관점은 점점 지지세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8)


# 민족경제론 비판

1. 한국경제의 세계시장 편입은 불이익의 측면만이 아니라 기회의 측면에서도 보아야 한다.

2. 자본주의화의 진전에 따른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계급대립이라는 근본 과제를 외면한다.

3. 정치와 경제가 자본주의적 계급관계의 ‘정치적 형태’ ‘경제적 형태’임을 파악하지 못한다.


3 발전국가론 : 국가의 물신화


"발전국가론은 국가의 자율성과 국가의 개입을 성공적인 경제성장의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박정희 정권은 대내·대외의 이익집단으로부터 독립적이고 자율적이어서 한국경제의 장래를 공평무사하게 계획하고 집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고도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국가는 이익집단들이나 압력단체들로부터 상대적인 자율성을 가진다고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지만, 발전국가론은 박정희 정권의 상대적 자율성을 진지하게 다룬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전국가론은 박정희 정권이 기존 이익집단이나 낡은 경제지식에 포획되지 않으면서 한국경제를 고도로 성장시킬 지도자와 관료들을 지니고 있었다고 강조하기 때문에, 발전국가론은 국가물신주의(國家物神主義)에 빠졌다는 비판을 받지 않을 수 없다."(16)


"물론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1961년에 농민들과 노동자들이 아직 정치세력으로서 힘이 없었고, 야당정치인·종교인·일반시민·학생도 군사적 폭력 앞에 당분간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그 당시 남북대치와 미소냉전 상황에서 군사쿠데타 세력이 미국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미국 정부가 미군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었고, 미국의 경제원조와 군사원조가 아직도 국가재정의 큰 기둥이었으며,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미국 정부의 호의(好意)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을 생각하면 군사쿠데타 정권의 대외적 자율성은 크게 제한되어 있었다. 또한 군사쿠데타 세력의 소시민적 민족주의는 광범한 민중을 지지기반으로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재벌과 자본가들을 국내의 동맹세력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으므로, 박정희 정권의 대내적 자율성도 크게 제한되지 않을 수 없었다."(17)


#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 부정부패

1. 부일(釜日)장학회 헌납 사건 : 부산일보·한국문화방송·부산문화방송 등을 소유한 김지태를 구속한 뒤, 처벌을 면해주는 조건으로 언론 3사의 주식과 부일장학회 토지를 헌납받아 정수장학회 설립

2. 경향신문 매각 사건 : 1965년 각 은행들이 경향신문에게 일제히 대출금을 상환할 것을 요구해, 1966년 기아산업 사장 김철호에게 매각됨. 이후 여러 과정을 거쳐 1974년 5·16장학회(정수장학회) 소유로 넘아감.


4 개발독재론 : 발전국가론의 제도주의적 수정


"이병천은 (발전국가론을 개량하여) '국가주의 근대화 수동혁명체제'로서 '개발독재체제' 개념을 만들었다. 개발독재론에 따르면, 박정희 집권기의 '사회발전체제'는 개발독재체제인데, 이 체제가 산업화에 성공한 것은 주로 특정한 제도형태, 이른바 '복선형(複線形) 산업정책(수입대체정책과 수출지향정책의 결합)' 또는 '개발주의 제도형태' 때문이며, 부차적으로 재벌체제와 노동의 '헌신(獻身)'이 기여했다. 이병천은 근대와 현대의 세계경제사에서 국가 개입이 산업화에 성공한 사례가 매우 드문 근본원인을 "국가의 지원과 보호가 새로운 생산적 부와 혁신을 창출할 수 있는 규율과 연계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며, 한국 산업화 성공의 핵심요인을 "국가 지원에 성과 규율을 연계시킨, 규율을 동반한 지원제도"에서 찾는다. 그리고 "국가에 의한 시장·자본·노동에 대한 유도-통제-규율방식의 틀에서 재벌체제와 노동의 헌신이 산업화에 기여했다"고 평가한다."(29)


"개발독재에 노동대중이 '동의'하고 '헌신'하며 나아가 '자발적으로 호응'했다는 평가와 압축적 산업화를 위해 단순한 '권위주의적 조절'이 불가피했다는 평가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런 평가는 근본적으로 박정희 체제가 급속한 '자본주의적' 발달을 도모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본에 의한 노동의 처참한 착취, 자본과 노동 사이의 계급투쟁을 보지 못했고, 포악한 군사독재가 노동자들에 의한 계급투쟁과 중간계층(지식인·종교인·학생)의 민주화 투쟁을 탄압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 것이다. 개발독재론은 박정희 체제가 단순히 '국가주도하에서 민족주의적 산업화'를 추진하고 '근대적 민족국가'를 건설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모든 국민이 '공통의지'로 산업화를 지지하고 노동대중이 자발적으로 산업화에 헌신했다는 비상식적이고 몰역사적인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30-1)


5 박정희 체제에 대한 대안적 평가


"'자본축적'은 기계·기술·숙련 등에 의존할 뿐 아니라 임금수준·노동시간·노동강도 등에 의존하며, 특히 자본주의적 발달의 초기 단계에서는 전자를 규정하는 생산력보다는 후자를 규정하는 자본-노동관계, 즉 생산관계가 더욱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즉, 자본축적을 통한 자본주의적 발달은 기계·기술·숙련 등 생산력의 발달을 가져올 뿐 아니라, 임금노동자들을 더욱 많이 만들어 냄으로써 자본-노동관계를 경제영역 전체로 확대한다. 따라서 박정희 체제는 '고도성장', '압축성장', '근대적 산업화' 등 생산력 차원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자본주의적 계급관계인 자본-노동관계의 사회적 확장이라는 생산관계 차원을 가지고 있다. 더욱 분명히 말하면, '고도성장', '압축성장', '근대적 산업화'가 가능했던 것은 자본-노동관계의 사회적 확장이 군사정권의 '독재'에 의해 압도적인 자본 우위 하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41-2)


"'계급투쟁'이란 용어의 관용적 사용을 엄밀히 살펴보면, 자본(또는 정치권력)을 하나의 '구조'로 전제하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투쟁에만 계급투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자본을 구조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로 파악한다면, 즉 자본을 자본-노동의 착취관계로 파악한다면, 계급투쟁은 상호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전자를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이라 한다면, 후자를 '위로부터의 계급투쟁'이라 부를 수 있다. 1960년대의 개발독재가 압도적 자본 우위의 계급 역관계에서 '위로부터의 계급투쟁'에 의해 급속한 자본주의적 발달을 도모했다면, 1970년대의 유신체제에 의한 개발독재는 1960년대의 급속한 자본주의적 발달에 따라 노동자계급이 대규모로 형성되어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이 반(反)독재투쟁과 더불어 격화되는 상황에서 자본주의적 발달을 유지하기 위한 '위로부터의 계급투쟁'이었다."(45-6)


"5·16 군사쿠데타 이후 쿠데타 주도세력에 대한 지지 여부에 대해 미국 정부가 경제개발계획의 안정적 추진을 주요한 기준으로 삼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국 케네디 정부는 박정희의 좌익 전력에도 불구하고 군사쿠데타 세력이 참신한 세력으로 부패를 일소하고 경제개발계획을 효율적으로 추진할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사후적으로 승인했다. 여기서 박정희 군사정권의 특수성은 군사쿠데타에 의한 집권이라는 정당성 취약 때문에 경제성장의 성과에 더욱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고도성장의 성공 요인을 정책 차원에서 찾는다면, 수출지향 산업화로의 정책전환보다는 한·일 국교정상화에 따른 대일청구권자금의 도입과 베트남파병 등에 의한 막대한 외자도입이 더 중요하게 작용했을 수도 있다. 이완범(1999)은 1960년대의 후진국 산업화에서 여타 제3세계와 남한의 결정적 차이는 원활한 외자도입에 있었다고 말한다."(54)


"박정희 체제의 역사적 성립과 전개과정을 자본주의적 계급관계를 중심으로 파악하면, 제국주의·정치·경제 사이의 내적 연관을 통일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냉전체제와 남북분단체제에서 미국은 남한을 '자유세계'(사실은 자본주의 세계)의 본보기(show-window)로 만들어야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었고, 군부쿠데타 정권은 고도경제성장을 통해 쿠데타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할 과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박정희 정권은 정치적 독재를 통해 자본이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는 계급관계를 재구축·강화함으로써, 자본가들로 하여금 직접적 생산자들(농민과 노동자)을 무자비하게 착취하게 하고, 소수의 대자본(재벌)으로 하여금 중소자본을 수탈해 모든 잉여가치를 자기에게 집중시킬 수 있도록 하며, 모든 이용가능한 대내외 자원을 특정 성장산업에 투자하도록 대자본에 특혜를 부여했다. 이리하여 고도성장이 달성된 것이다."(58)


"박정희 체제의 장시간·저임금·위험한 노동은 도시와 농촌의 엄청난 상대적 과잉인구의 존재에 의해 유지될 수 있었다." "농산물의 낮은 가격정책은 도시노동자의 임금수준을 낮은 수준으로 억누르기 위한 것이었고 주로 미국 잉여농산물의 도입을 통해 실현되었는데, 그 결과 식량의 자급률은 1962년 93.4%에서 1969년 78.8%로 급격히 저하했고, 1963~64년에 도시근로자 소득을 크게 상회했던 농가소득은 1965년을 기점으로 낮아지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 공적사회부조(公的社會扶助)가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서민들의 생계는 가족적 복지망을 통해 겨우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데 가족적 복지망은 가족 중 누군가가 희생될 것을 강요했는데, 그 일차적 희생자는 농촌 출신의 젊은 여성들이었다." "(전태일의 분신 저항으로 대표되는) 노동자계급의 참상에 비추어 볼 때 제도학파의 '사회적 합의'나 '공통의지'라는 시각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사실왜곡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61-3)


"1970년대 초반의 경제위기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대응은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봉쇄하는 조치로부터 시작하여 반동적인 유신체제를 구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신체제는 3선 개헌이라는 헌법파괴로부터 진전된 정치적 위기와 1960년대 말 사회·경제적 위기로 나타난 종속적 개발지배연합의 재생산 위기에 대응하여 등장한 공개적 독재체제였다."(이광일 2001) 박정희 체제는 '외국인 투자기업에 관한 특례법'(1970), 국가비상사태선포와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1971), 10월 유신(1972) 등 일련의 파시즘적 악법을 통해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을 한층 강화했다. 유신체제는 노동자의 단결권 자체를 총체적으로 부인하였으며, 이런 노조부인정책은 유신체제의 적자(嫡子)임을 내세워 또 다른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한 정권기 내내 계속되어 1987년 민주화 투쟁과 노동자 대투쟁에 의한 노동법 개정 때까지 유지되었다."(68)


"유신체제에 맞선 정치적·경제적 계급투쟁은 1970년대 말에는 세계경제의 위기와 맞물린 박정희 체제의 위기에서 다시 폭발적으로 고양되었다. 1979년 8월 외자기업의 철수에 맞선 YH무역노조의 완강한 생존권투쟁은 야당인 신민당의 당사(黨舍) 농성을 계기로 여당과 야당 사이의 정치투쟁을 야기했고, 나아가 서울민사지법이 신민당 총재 김영삼을 직무정지시킴으로써 부마사태로 발전했다. 이에 대한 대응책을 놓고 지배계급 내부의 분열에 의해 박정희가 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음으로써 유신체제는 종말을 맞게 되었다. 이 과정은 전형적인 계급투쟁의 역동성에 의한 것이다." "이후 노동자계급의 폭발적인 생존권 투쟁과 학생·지식인·종교인의 전면적인 민주화 투쟁에 대응하여, 지배계급의 '위로부터의 계급투쟁'이 전두환의 또다른 군부쿠데타로 표현되었다.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으로 상징되는 격렬한 계급투쟁으로 인해 박정희 체제는 더욱 강화된 억압체제로서만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77-9)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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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1947 - 전후 독도문제와 한.미.일 관계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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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1952년 1월 한국의 해양주권선언, 즉 평화선 발표에 대해 일본이 항의하면서 독도의 영유권을 둘러싼 논쟁이 시작되었다." 일본 외무성의 입장을 대표하는 각서는 모두 네 건인데, "첫 번째 각서에 첨부된 「1953년 7월 13일자 죽도에 관한 일본정부의 견해」라는 장문의 글에 일본정부가 주장하는 독도영유권의 핵심적 내용과 구상이 잘 드러나 있다. 일본 외무성은 역사적 사실과 국제법의 두 가지 측면에서 일본의 독도영유권을 다루었다. 먼저 역사적 사실로는 ①과거에 죽도(竹島) 혹은 기죽도(磯竹島)라는 명칭으로 불린 섬은 현재의 울릉도이며, 현재의 죽도는 과거에 송도(松島)로 불렸다. ②1693년과 1881년 조선정부의 항의로 일본인의 죽도 출입이 금지되었으나, 이는 현재의 울릉도이지 죽도(독도)가 아니다. ③한일 간 존재했던 충돌은 울릉도에 관한 것이지 현재의 죽도(독도)에 관한 것이 아니다. ④문헌·고지도상의 송도는 현재의 죽도(독도)로 일본에 알려졌고, 일본 영토의 일부분이다."(25-6)


"1952년 처음으로 한일 양국 간에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외교각서 교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이래, 양국의 각서는 일종의 독도연구사를 형성하게 되었다. 역사적 근거(문헌·지도·연구)와 국제법적 근거(SCAPIN·대일평화조약·독도폭격·독도 폭격연습장 지정 및 해제)가 동시에 다루어졌으며, 시기적으로는 삼국시대부터 1950년대에 이르는 긴 시기가 다루어졌다. 역사적으로는 광범위한 주제에 대한 바늘 끝 같은 첨예한 자료적 해석이 대립하기 시작했다. 한국정부는 역사적 근거를 강조하는 입장이었던 반면, 일본정부는 국제법적 근거를 강조하는 경향이 강했다. 때문에 한국은 일본의 국제법적 근거를 반박하는 데, 일본은 한국의 역사적 근거를 부정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이 시기에 양국 정부의 견해는 단지 외무부·외무성의 작업이 아니라 역사학자·지리학자·국제법학자 등 양국의 전문가가 총동원된 총력전의 양상이었으며, 주로 역사적 근거가 주요 쟁점으로 부각되었다."(32-3)


"1951년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의 준비·진행 과정에서 일본이 미국을 이용해 독도영유권을 확보하려 시도한 것에서 전후 독도문제가 발원했다는 판단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 1905년 일본의 한국 침략과정에서 첫번째 희생물이 된 독도는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이었고, 전후 한국령으로 귀속되는 것이 당연했다. 1952년 일본이 한국을 상대로 독도영유권을 주장했을 때 그 근거는 일본의 고유영토설이나 1905년의 불법 영토편입 사실이 아니라 1951년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에서 독도가 일본령으로 남게 되었다는 주장에 무게중심이 두어졌다. 즉, 일본은 1905년의 불법적 영토편입은 을사늑약으로 실질적 주권을 상실하고 항거불능이었던 한국을 상대로 한 일방적이며 제국주의적인 침략의 일환이었기에 주장의 근거와 정당성이 현저히 부족한 상태였던 반면, 자국과 48개국이 서명한 1951년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평화조약은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보편적 동의를 획득할 수 있는 근거라고 판단했다."(60-1)


#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의 성격

1. 미국 주도의 단극적(單極的) 평화조약 : 반공·반소가 핵심

2. 일본과 서명국들간의 평화관계 회복 : 중국(대만과 분열되어 대표성 논란)과 한국(식민지 전력 논란) 배제 → 공산주의 저지라는 반공에 방점

3. 일본의 전쟁책임과 배상·보상·사과 문제 외면

4. 조약 이후 동북아시아에서 미국과의 양자동맹을 통한 안보·지역 질서 구축


#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이 한일관계에 미친 영향

1. 한국을 서명국·조인국에서 배제하고 '2차 대전 이후 해방된 국가'로 간주하면서 (재일한국인을 비롯한) 한국의 국제법적 지위 문제 방치

2. 일본이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을 통해 독도를 일본령으로 인정받았다고 주장하면서 한일간 영토문제 상존

3. 일본이 한일회담 과정에서 한국의 대일청구권을 상쇄하거나 묵살하기 위해 적산(敵産)에 대한 대한(對韓)청구권을 주장하면서 배상·청구권 문제 쟁점화


1 한국 1947년 : 남조선과도정부·조선산악회의 독도조사


"1947년 6월 울릉도에서 시작된 일본인의 독도 불법상륙 및 한국 어선 총격사건은 (일본의 어업한계선인) 맥아더라인 확대 및 한국의 어로구역 축소 우려와 결합되면서 강력한 목소리로 발전했다. 그런데 당시 한반도의 정치적·사회적 상황은 혼란의 극을 달리고 있었다. 미소의 강력한 영향 속에 남북은 분단되었고, 좌우갈등은 격렬한 상황이었다. 완전통일·자주독립 국가 건설을 둘러싼 갈등과 미소·남북·좌우의 갈등과 대립은 생사를 건 인정투쟁으로 전개되었다." 찬반탁·좌우익의 대립이 극심한 물리적 충돌과 테러로 이어지는 "혼란한 시점에 한국인들 가운데에서 독도영유권에 대한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다. 돌이켜보자면 당시 독도영유권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과 노력이 본격화된 것은 요행이자 천우신조에 가까웠다. 이후의 역사적 맥락에서 보자면 1947년 울릉도에서 시작되어 대구·서울로 이어진 독도에 대한 관심은 한국의 독도영유권 확립에 중요한 기여를 한 첫 출발점이 되었다."(107-8)


"1947년 독도조사대의 결성·파견에는 과도정부 민정장관 안재홍, 국사관 관장 신석호, 조선산악회 송석하·도봉섭 등 일제하에서 진단학회 활동을 벌였거나(신석호·송석하·유홍렬), 조선학 운동을 주도했던(안재홍·송석하)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즉, 식민지시대 이래 한국적인 것, 한국 문화·역사·지리 등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연구를 주도했던 인물들이 해방 후 독도조사대 결성을 주도한 것이다. 특히 안재홍이 민정장관 직위에 있었던 점은 조선산악회가 독도조사에 동원될 수 있는 실질적 힘이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1947년 8월의 독도조사는 비밀리에 수행되었지만, 해안경비대 등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이루어졌고, 이는 민정장관 안재홍의 조력이 아니면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독도에 대한 조사작업이 필요했던 과도정부 민정장관 안재홍은 소규모의 공식조사단 파견과 더불어 대대적인 학술조사활동을 민간의 조선산악회에 부탁했던 것이다."(120)


2 한국 1948년 : 독도폭격사건과 독도의 재발견·재인식


"1947년 독도조사로 시작된 한국인들의 독도 인식은 1948년 6월에 발생한 독도폭격사건을 통해 결정적으로 제고되었다." "사건발생을 처음 보도한 것은 『조선일보』 1948년 6월 11일자였는데, 6월 8일 오전 11시 반경 국적불명의 비행기가 독도에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소사를 가해 울릉도·강원도 어선 20여 척이 파괴되고, 어부 16명이 즉사하고, 10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보도했다." "폭격소식은 다음 날 독도에 출어했던 어선을 통해 울릉도에 전해졌고, 울릉도 경찰은 6월 9일 저녁 7시 구조선 두 척을 독도로 파견했다. 그러나 불과 4톤도 안 되는 구조선으로는 구호작업을 뜻대로 할 수 없었다. 이들은 10일 저녁 6시 울릉도로 돌아왔는데, 폭격 당일 독도 부근에 흩어졌던 사체와 배 파편은 하룻밤 사이 파도에 휩쓸려갔고, 바위에 난파된 경양환(慶洋丸)에서 김준선, 최태식 두 사람의 사체만을 수습해 왔다. 폭격 당시 즉사한 사람은 9명이며, 행방불명자 5명도 즉사한 것으로 추정되었다."(179-81)


"하지는 6월 17일 맥아더에게 2급 비밀 전문을 보내 "(독도폭격) 문제는 현지에서 매우 중요한 이슈"이며 모든 구실과 경우를 활용해 총력적으로 반미주의를 부채질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악효과를 극복하고 대응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하지가 맥아더에게 원한 것은, "지난주 리앙쿠르암(독도)에서 한국 어선에 대한 우발적 폭격을 포함한 불행한 사태에 비추어, 맥아더 장군은 장래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 지역이 미군기의 폭격이나 총격지역으로 활용되지 않게 하라고 명령했음을 본인에게 통보했다"라는 하지 성명의 승인이었다." "아울러 딘 군정장관이 독도 동방 10해리 지점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지역에 대한 폭격금지를 요청한 것은 단지 이 해역이 한국 어민들의 어로지역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주한미군정의 관할구역이자 한국 영토임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미군정은 이 지역이 한국 어부들의 어업구역이라며 구체적인 어획고를 제시하기까지 했다."(191-3)


"1948년 독도폭격사건은 한국인들에게 중요한 교훈과 계기를 제공했다. 이 폭격사건으로 말미암아 독도가 한국령이라는 국민적 공감대와 국내외적 확인작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언론의 보도는 피해 어민들이 강원도 울진·묵호, 울릉도 어민들로 모두 한국인들이며, 이들이 조업하던 독도 역시 한국령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또한 미군정 역시 사건이 발생한 독도에 "군의를 포함한 조사 및 구호반"을 파견했다. 즉, 독도의 관할권이 미군정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과 조치들은 모두 사건발생지인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분명한 증거였다. 또한 이 사건의 조사와 처리에 일본정부나 SCAP은 전혀 개입하지 않았으며 일본 언론에 보도되지도 않았다. 때문에 독도폭격사건을 계기로 모든 한국인들은 독도가 명백히 한국의 영토이며, 불행한 사건이 발생한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했다."(244-5)


"일본은 미국에는 패배했지만, 아시아국가들 특히 한국이나 중국에는 패배하지 않았다는 이중적인 전후 인식을 갖고 있었다. 특히 전쟁 책임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일본은 미국에는 복종적·위계적 동맹을, 아시아국가들에는 멸시적이며 냉소적인 구제국주의적 시각을 유지했다. 이미 1948~49년 단계에서 일본 외무성은 한국의 독립을 부정했다. 훗날 한일회담 일본측 수석인 구보타 간이치로가 한국이 샌프란시스코조약 이전에 독립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었다고 한 발언은 이러한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일본은 1905년 독도 불법 영토편입 사건을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침략의 맥락·구조에서 분리시켜 개별적인 사건으로만 다루려 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1900년대를 전후한 제국주의 침략과정에서 대한제국·조선 정부와 맺은 조약들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전제와 가정하에서 나온 것이었다. 일본이 철저한 전후 반성과 청산과정을 거쳤다면, 독도영유권 주장은 결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273-4)


3 일본 1947년 : 독도·울릉도는 일본령


외무성 조약국장이던 하기와라 도오루가 작성한 「평화조약에 대한 일본정부의 일반적 견해」 제1차안(1947.5)을 검토한 가세 도시카즈는 "카이로선언은 일본정부가 감수하기 곤란한 영토조항을 담고 있으므로, 일본정부가 이를 승인하는 것처럼 전제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카이로선언의 영토조항은 ①일본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이래 탈취·점령한 태평양의 모든 도서 박탈, ②만주·대만·팽호도 등 중국에서 도취(盜取)한 영토의 중화민국 반환, ③폭력·탐욕으로 약취(略取)한 기타 일체의 지역에서 구축(驅逐)을 규정한 바 있다. 그런데 가세 참사관의 코멘트는 기본적으로 일본 외무성 관리들이 자국이 수락한 항복조건마저 무시하고 무력화하려 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일본은 포츠담선언에 제시된 무조건 항복조항을 수락함으로써 종전에 이르렀다. 포츠담선언은 곧 일본 항복문서의 기본텍스트가 되었다. 그런데 포츠담선언의 영토조항은 카이로선언을 계승한다고 명백히 규정하고 있다."(287)


"조지 앳치슨은 국무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치고문으로 맥아더와 충돌했다. 아시아우선주의자로 일본의 새로운 '황제'였던 맥아더는 반공주의에 입각한 일본 사회의 재건을 원했다. 맥아더는 전후 일본 개혁 대부분이 실제로는 "소련의 첩자"인 "이른바 자유주의자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을 수행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공직추방, 배상, 반독점 조치 등은 압력솥의 뚜껑을 여는 것이기에 개혁을 하는 시늉만 하며 실제권력은 똑같은 사람들 수중에 내버려두어 일본이 "타고난 아시아의 지도자"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이 오히려 상책이라고 판단했다." 1947년 8월 강력한 대일징벌론자이자 중국통이었던 조지 앳치슨이 불의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한 것을 계기로 "SCAP(연합국 최고 사령부) 내에서 중국전문가 대신 일본전문가가 득세하기 시작했고, 대일정책에서도 징벌적 정책과 민주화 정책에서 온건적 현상유지정책 내지 역전코스가 시작되었다."(299-301)


"일본 사회에 대한 시볼드의 인식은 '매료' 그 자체였다. 그는 일본계 여자와 결혼했고, 수많은 일본인 거물들을 친구로 삼았다. 전후에도 시볼드는 정치담당보고관으로 거리낌 없이 일본 극우 정치인들과도 교류했다. 시볼드는 태평양전쟁의 책임은 일본의 정치·경제·사상의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극소수 '군국주의자'들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시볼드는 자신의 친일적 입장을 일본의 공산주의화 저지, 즉 반공주의로 정당화하려 했다. 그는 전후 일본에서 벌어진 전범추방, 재벌해체 등의 경제개혁을 공산주의자들이 사주라며 반대했다." "반면, 한국을 여섯 차례 방문했던 그는 한국인이 "슬프고, 억압받고, 불행하고, 가난하고, 조용하며, 음울한 민족"이며, "전후 상황과 이 대통령의 거친 성격은 미군사령관에 파견된 수많은 미국정치고문들에게 한국을 보다 완고하고 견딜 수 없는 곳으로 인식"한다고 썼다. 그는 이런 견지에서 대일평화조약과 초기 한일회담을 이끌어갔다."(302-3)


1946년 11월부터 1947년 6월까지 일본 외무성은 총 4차례에 걸쳐 연합국에 대대적으로 배포한 「일본의 부속소도」(Minor Islands Adjacent Japan Proper)라는 팸플릿에서 "울릉도를 일본령으로 묘사하려는 의도를 내보였다. 일본 외무성의 설명을 따라가보면 11세기에 일본이 먼저 울릉도를 인지했으며, 한국은 13세기 중반 이후에야 식민지화를 시도했지만, 15세기 이후 공도(空島)정책을 취했고, 임진왜란 후 1세기 동안 일본이 이 섬을 지배했다. 17세기 말 울릉도 영유권을 둘러싼 논쟁 끝에 한국령이 인정되었지만, 한국은 여전히 공도정책을 취했고, 일본 어부들이 인근에서 계속 어업을 했다. 19세기 후반에도 일본 내에서 울릉도 개발논의와 청원이 있었고, 일본정부의 불허에도 일본인들이 울릉도를 출입했다는 주장이다. 즉, 일본이 먼저 울릉도를 인지했으며, 1세기 동안 지배했고, 영유권 논쟁이 있었으며, 한국이 공도정책으로 사실상 방치한 사이에 일본이 실질적으로 개발했다는 내용이다."(345-6)


"다음으로 독도에 관한 팸플릿의 서술을 살펴보면, 일본인들은 고대부터 독도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1667년에 마쓰시마(松島)라고 명명했으며, 유럽인들은 1849년에야 리앙쿠르암이라고 명명했다. 한편 울릉도와는 달리 리앙쿠르암에 대해서는 한국 명칭이 없고, 한국에서 제작된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1904년 9월 시마네현 어부 나카이 요사부로가 일본정부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시켜 자신에게 대여해줄 것을 청원했다. 다음 해인 1905년 1월 28일 일본정부는 독도를 다케시마라는 이름으로 자국령에 편입시켰고, 이를 시마네현 현보에 고시했다. 나카이와 일본정부는 독도가 한국령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한제국정부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1년 뒤인 1906년 울릉도 군수 심홍택의 보고로 뒤늦게 사태를 파악했으나, 러일전쟁의 와중에 일본 군대가 궁성을 점령했고 외교권은 박탈당한 상태였다."(349-50)


"일본 외무성이 만든 허위정보에 기초한 팸플릿이 1948~51년 간 주요 길목에서 한국의 독도영유권을 무장해제하는 결정적 도구로 활용되었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 문건을 동경의 미국 외교관·관리들이 신뢰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손을 거쳐 국무부로 전달된 후 중요성이 재차 확인되었다는 데 있었다. 즉, 일본 외무성과 미 국무부 외교관·관리들의 교류와 소통, 상호 영향력이 한국의 정당한 권리와 요구를 침해했다는 사실이었다. 정부가 수립되지 않았던 한국은 일본의 이러한 허위정보와 문서조작작업을 전혀 알지 못했으며, 정작 대일평화조약이 논의되는 시점에는 국가의 운명이 걸린 전쟁에서 생존을 위해 허덕이고 있었다. 1905년 국가 운명이 백척간두에 서 있을 때 일본이 독도를 불법적으로 영토편입한 이후, 1947년 일본 외무성에 의해 또다시 허위문서로 조작된 정보가 유포되었고, 1950~51년 한국전쟁으로 한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일본의 허위정보가 미 국무부를 움직였다."(365)


4 미국 1947년 : 리앙쿠르암(독도)은 한국령


1949년 11월 2일 미 국무부가 작성한 대일강화조약 초안에는 부속지도가 첨부되었는데, 독도(리앙쿠르암)이 한국령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독도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이 시점에 발생했다. 국교가 수립되지 않은 일본에서 미 국무부의 대표이자 주일정치고문이었던 시볼드는 초안에 대한 검토의견서에서 독도가 1905년 일본령이 된 이후 단 한 차례도 한국의 이의제기를 받지 않아 일본 영토라는 주장을 폈다. 초안을 전달받지 못했던 주한미대사 존 무초는 미국과 유엔이 정책적으로 한국을 지지했으며 한국정부의 위신이 있기 때문에 한국에 대일평화협상 참가 및 서명국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미 국무부가 양국의 의견을 모두 수용하여 한국의 대일평화협상 참가, 독도는 일본령이라는 조항을 새로 추가한 "이 (수정) 초안의 존재는 일본이 주장하는 독도의 일본 영유권, 대일평화조약에서 독도가 일본령으로 확인되었다는 주장의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되었다."(375)


"1950년 5월 대일평화조약 대통령특사로 임명된 존 포스터 덜레스는 일본 및 연합국들과의 협상을 지휘했다. 덜레스는 대일평화조약의 핵심이 "비징벌적인 평화조약"에 있다고 생각했다. 제1차 대전을 종결한 베르사유회담에 초급 외교관으로 동석했던 덜레스는 베르사유조약이 패전국에 대한 전쟁책임을 명문화한 후 영토할양, 배상금 등을 강제했기 때문에 독일에 의한 제2차 대전이 발발했다고 생각했다. 당시 미 국무부가 작성한 기존의 조약 초안을 베르사유체제와 마찬가지로 배상을 포함한 징벌적 성격이 강했으며, 제2차 대전 이후 이탈리아와의 평화조약 역시 전쟁책임과 배상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때문에 덜레스는 국무부가 준비한 초안이 "지나치게 상세"하며, 일본인의 의견을 결정적으로 수용하지는 않더라도 시작단계부터 일본과 의논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덜레스가 추진한 비징벌적이며 배상문제를 거의 배제한 '평화조약'은 세계외교사에서 유례가 없는 우호적 조약이었다."(375-6)


"대일평화조약의 초안은 얄타체제로 대표되는 미·소·영·중 4대국의 연합전선이 냉전의 격화와 중국 대륙의 공산화로 대표되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붕괴되는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며 변화해갔다. 최종적으로 미국·영국은 일본과 평화조약 체결에 참가해 서명했고, 소련은 참가했으나 서명을 거부했으며, 중국은 초대받지 못했다. 미국은 적국 일본에 대해 가혹하고 징벌적인 조약 초안을 준비했다가, 1948년 냉전의 격화와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정책을 변경했다. 미국은 일본을 미국의 동아시아 하위동맹자로 설정했고, 일본에 관대한 평화조약을 제안했다. 미국은 남태평양의 구일본위임통치령의 접수 및 신탁통치, 오키나와에 대한 신탁통치 및 군사시설 유지, 일본 본토에 대한 군사시설 및 군대주둔권을 획득함으로써 대일평화조약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영국은 일본에 대한 경계심과 억제를 표명했으나 결국 초안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상태에서 대일평화조약에 동의하였다."(379-80)


"로버트 피어리는 전쟁기간 동안 국무부에서 대일정책 관련 업무를 맡았고, 1945년 10월 주일미정치고문실에 배속되어 근무했으며, 1946년 중반 미 국무부 극동국으로 옮겨 일본담당관 및 동북아시아과 등에서 일한 일본통이다." "1947년 1월 30일 로버트 피어리가 제출한 제1장 영토조항을 다룬 초안·비망록·지도 가운데 초안이 남아 있다." "피어리가 만든 매우 간단한 2쪽짜리 문서는 이후 1947~49년 국무부 대일평화조약 초안 영토조항의 원천이자 핵심이 되었다. 피어리는 대일평화조약의 영토조항 초안을 처음 작성할 때부터 제주도·거문도·울릉도와 함께 독도를 "한국 근해의 모든 작은 섬들"에 포함시켰다. 또한 피어리의 영토조항 초안은 1947년부터 1949년까지 독도를 한국령으로 표시한 미국측 초안으로 이어졌다. 특히 피어리가 일본통이며, 일본에 우호적인 입장이었음에 비추어볼 때 독도가 한국령으로 명확히 규정된 것은 매우 중요하고 특별한 의미가 있다."(388-9)


5 미국의 대일평화조약 초안과 독도 인식(1947~1951)


1. 미 국무부 조약 초안의 독도 인식(1947~1949) : 리앙쿠르암(독도)은 한국령

2. 시볼드의 공작(1949~1950) : 리앙쿠르암(독도)은 일본령 주장

3. 존 포스터 덜레스의 등장(1950~1951) : 대일평화조약에서 독도조항 삭제

4. 영미합동초안의 성립과 최종 조약문의 확정(1951)


6 영국의 평화조약 초안과 영미협의(1951)


7 미국과 일본의 협의(1951)


"(경제적 배상과 관련하여) 무배상은 대일평화조약 체결과정의 기본정신이자 원칙이었다. 무배상이 강조된 것은 장래 오랫동안 일본에 중대한 부담을 지우면서까지 배상하지 않도록 한 원칙을 주요 교전국인 미국·영연방·네덜란드 등이 승인했기 때문이며, 국민당 정부도 배상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배상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조약의 기본정신과 원칙이 무배상을 강조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무배상으로 불린다. 사실상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서 채택된 것은 역무(役務)배상이라는 새로운 방식이었는데, 이는 구상국(求償國)이 제공하는 원료를 가공해 인도하거나 구상국 연안수역의 침몰선박의 인양·해체를 맡는 방법 등으로 일본이 외화부담을 지지 않으면서 피해국의 손해를 보상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방식이 채택된 가장 큰 이유는 승전국인 미국이 일본에 다량의 원조를 제공하는 상황에서 일본의 배상액이 커지면 그만큼 미국의 부담이 늘어나기 때문이었다."(629-30)


"청구권과 관련해 일본 외무성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a) 일본의 재외재산: 연합국 중 〈일본과 현실적으로 전투행위에 돌입했던 제국에 있는 모든 일본 자산은 반환될 것〉. 일본 재산 중 사유재산에 대해서는 특별한 고려를 해줄 것을 간청. 전쟁에 따른 청구권의 지불에 이것이 적용될 때는, 재산의 소유자에 대한 보상문제는 일본정부의 재량에 일임해줄 것. (b) 약탈재산: 〈반환은 대부분 완료되었음. 평화조약의 체결과 함께 종결될 문제임〉. 괄호 친 두 부분은 일본 외무성의 기본적 시각을 보여주는 것인데, 교전당사국 내 일본 재산은 반환되어야 하지만, 일본이 타국으로부터 약탈한 재산은 반환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평화조약 체결로 종결하자는 것이었다. 교전국가와 점령지의 경우에 이런 시각을 유지한다면 식민지의 경우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었다. 식민지에 대한 약탈재산이나 반환은 존재하지 않으며, 사유재산을 포함한 식민지 내 일본의 재산반환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630-1)


"덜레스의 1951년 1~2월 동경 방문은 한국 전장에서의 상황이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성사되었다. 1950년 11월 중공의 개입 이후 백두산까지 진격했던 유엔군은 급속히 후퇴했으며, 1951년 1월 초에는 한국정부 및 주요 인사들의 제주도·일본 망명을 고려할 정도로 전황이 악화되었다. 대일평화조약의 조속한 체결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미국 조야에서 제기되었고, 덜레스는 전격적으로 일본과 대일평화조약·미일안보조약의 체결에 합의하게 된다. 다른 연합국과의 협의, 구체적 조약문의 세부적 수정작업이 남았지만, 1951년 2월 11일 그가 동경을 떠날 때 이미 대일평화조약은 거의 완성단계에 돌입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덜레스와 일본의 가장 주요한 관심사는 일본의 미래안보문제였다. 2월 2일 일본 국회에서 덜레스는 일본이 상호방위 같은 일정한 조약체제하에 들어온다면 미국은 주일미군을 확실히 보유해달라는 일본정부의 요청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이라는 취지로 연설했다."(638-9)


# 미일안보협정과 미일행정협정(SOFA) 체결로 실현


"일본정부가 제시한 한국의 대일평화조약참가 불가 이유는 첫째, 한국이 일본과 관련해서는 평화조약에 따라 독립을 획득하게 될 해방국으로 일본과 교전상태나 전쟁상태가 아니었다. 둘째, 한국이 서명국이 되면 공산주의자들인 재일한국인들이 재산회복·보상 등에서 일본정부에 엄청난 요구를 할 것이다. 때문에 미국 초안에 명시된 것처럼 한국에 대한 권리·권원·청구권을 포기하고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는 정도면 충분하고, 양국 관계는 한일간 양자조약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시다의 입장을 정리하면 ① 전시 한국의 연합국 지위 불인정, ② 재일한국인의 연합국 국민 지위 부여 시 일본정부 파탄, ③ 한국의 조약서명국 배제, ④ 한일관계 수립은 한일 간 협정으로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회담일 오후, 재일한국인이 연합국 국민의 지위를 획득하지 않는 것만 확실히 보장된다면 한국이 강화조약의 서명국이 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덜레스에게 전달했다."(664)


8 한국정부의 대일평화조약 대응과 한미협의(1951)


# 덜레스의 1차 초안(제안용)에 대한 한국정부의 답신(1951.5.7)

1. 한국의 연합국·서명국 자격 부여 및 재일한국인의 연합국 국민 자격 부여

2. 대마도 반환

3. 재한일본인의 적산 몰수 인정

4. 맥아더라인 존속


"미 국무부는 미군정기 및 한국정부 수립기에 한미 협정을 통해 귀속재산으로 인정한 한국 내 일본 재산에 대해서는 타당성을 인정하였다." "한국에 대한 연합국 자격 및 조약서명국 지위 부여와 관련해서는, 한국이 주장하는 근거(임정의 대일투쟁·선전포고, 폴란드의 예)를 부인했다. 다만 이 문제와 관련해 미국정부의 입장이 결정되는 바에 따라 한국에 연합국·서명국 지위를 부여하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즉, 한국이 제시한 과거의 사실이 연합국·서명국 자격조건을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재 미국의 대한정책적 입장에 따라 한국의 자격이 결정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마지막으로, 미국은 대마도 반환 요구와 맥아더라인 존속 요구를 과도한 배상 혹은 일종의 영토할양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전반적으로 한국의 주장은 당시까지 미국이 추구해왔던 '비징벌적이며 배상을 제외한' 평화적 조약 체결이라는 원칙과 큰 격차가 있었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상을 주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731-2)


# 미국의 결정사항 통보(1951.7.9)

1. 한국에 최신 대일평화조약 초안(제3차 영미합동초안) 제공

2. 한국의 조약서명국 자격 부정

3. 한국의 대마도 반환 요구 기각

4. 맥아더라인 논의는 국제어업회담으로 해결 권고


# 한국의 제2차 답신서 주요 내용

1. 재한일본인 귀속재산의 한국 소유권 확인(최우선 요구 사항)

2. 대마도를 기각하는 대신 독도·파랑도 등의 영토권 확정

3. 맥아더라인 유지


"한국정부가 최초로 독도를 거론한 제2차 답신서(1951.7.19)에는 독도의 명칭만이 거론되었을 뿐 독도·파랑도에 대한 어떠한 근거·관련자료도 제시되지 않았다. 한국정부는 조약 초안에 거론된, 일본이 방기할 도서인 제주도·거문도·울릉도 뒤에 단지 독도·파랑도를 첨부했을 뿐이다. 추가 설명도 전무했다. 또한 위치와 존재가 확인되지 않던 파랑도와 함께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주장함으로써 독도 자체의 실존감이나 신뢰도를 저감(低減)시켰다. 나아가 한미협의의 맥락에서 보자면 대마도 반환 요청이 기각된 다음에 독도 반환을 주장했고, 그것도 가공의 섬인 파랑도와 함께 요청함으로써, 독도가 한국측 영유권의 중요성에서 후순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한미협의(1951.7.19) 시점에 한표욱 1등서기관은 독도와 파랑도가 "대체적으로 울릉도 인근에 위치"한다고 발언함으로써 지리적·역사적·문헌적 정보가 부정확하고 미비했음을 드러냈다."(762-3)


"미 국무부는 1951년 8월 10일 대일평화조약과 관련해 한국정부에 최종입장을 통보했다. (여기서 러스크는 독도가 "1905년 이래 일본 시마네현 오키도사 관할하에 놓여져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독도는 7월 19일자 한국측 제2차 답신서에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미국은 불과 20여 일 만인 8월 10일에 일본령이라고 결정해 한국에 통보했다. 러스크 서한에 등장하는 이 대목은 1947년 6월 일본 외무성이 제시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었다. 이 사이 한국측은 근거자료를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 한국정부는 물론 주미한국대사관도 독도와 파랑도가 울릉도나 다케시마 인근에 있다고 했을 뿐 정확한 방위나 실체, 그것이 한국령이라는 역사적·문헌적 증거나 근거자료를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주한미대사관도 회신을 보내지 못했다. 이미 대일평화조약 초안 완성의 시기적 압박을 받고 있던 상황에서 미 국무부는 더 이상 결정을 늦출 수 없었고, 자신들이 보유한 정보에 근거해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777-9)


"지금까지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한국정부는 러스크 서한의 독도문제에 대해 공식적으로 항의하지 않았다. 조약서명국 자격·맥아더라인에 대해서는 몇 차례 의견을 개진했지만, 독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훗날 유진오는, 독도를 평화조약에 명기치 않은 것은 오랫동안 지속된 분쟁의 씨를 남겨놓은 처사라고 평가했다. 맥아더사령부가 맥아더라인을 그을 때 독도를 맥아더라인 밖에 위치시켜 한국령으로 표시했는데, 그것을 평화조약에 명시하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다만 그렇게 된 이유는 "미국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생각하는 것이라고는 해석되지 않는다. 울릉도에 부속된 소암초에 지나지 않으므로 특기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본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평가했다." "아울러 국가의 권위를 상징하는 정식 외교공문서에 실존하지 않는 섬(파랑도) 이름을 적어 우리 영토라고 주장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고 기록했다."(785-6)


# 1950~1951년 간 한국의 최대 우선순위는 한국전쟁에서의 생존 및 승리였다.


9 보이지 않는 전투 : '독도분쟁'의 서막과 한·미·일의 대응


"1952년 1월 19일 (독도가 포함된 '영해선 이외의 어족자원 보호관할권(관할선)'을 확정한) 한국의 해양주권선언이 있은 직후, 일본 외무성은 성명을 발표해(1.20) 일본의 독도영유권을 주장했다. 일본 외무성은 한국정부가 한일 간 공해에 50~60마일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데, "강화조약에서 우리에게 귀속된 우리의 독도까지도 한국에 속하게 될 것"이며 "한국정부는 또한 그 지배하에 있지 않은 북한의 해역에까지 그 주권을 확장"하고 있다며 맹비난했다. 일본이 대일평화조약에서 독도가 일본령에 귀속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일본은 현재같이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고유영토설)이거나 1905년에 무주지로 편입된 영토(무주지편입설)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1951년 샌프란시스코대일평화조약에서 일본령으로 귀속된 섬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이 한국을 상대로 독도영유권을 주장하게 된 첫번째 배경이 샌프란시스코대일평화조약이었음이 분명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826)


1952년 9월 한국산악회 독도조사대의 방문을 전후하여 재차 독도폭격사건이 발생하자 "1953년 2월 27일 한국군은 한국 및 유엔군 당국의 완전 합의로 독도 주변 공폭(空爆)연습이 없을 것을 미극동총사령관 명의로 보장하였으며, "미국정부로서도 독도는 한국 영토의 일부임을 인정"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즉각 이에 대해 반박했다. 미극동군사령관에게 조회한 결과 "유엔군사령부는 독도에 있어 폭격연습의 중지를 한국정부에 통고한 것일 뿐, 그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라는 회답을 얻었다고 주장했다. 일본정부는 영유권 주장 근거로 두 가지를 내세웠는데, 첫째 대일평화조약에 일본이 권리·권원·청구권을 포기할 지역을 명문화해 규정했는데 독도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점, 둘째 독도는 미일합동위원회의 결정에 의해 폭격연습지 리스트에 추가되었는데, 이는 본래 독도가 일본령인 까닭에 합동위원회가 리스트에 올린 것이므로 한국령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었다."(840-1)


"독도문제가 표면화되는 중요한 동기는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의 체결과정에서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에 대한 미 국무부의 우호적 동향을 일본정부가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해 미 국무부는 러스크 서한(1951.8.10)을 일본정부에 공식 전달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정부는 윌리엄 시볼드 등을 통해 미 국무부의 결정내용과 관련 정보를 인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1947년 6월 일본 외무성의 팸플릿 작성과 1949년 11월 시볼드의 주장 이후 독도문제는 표면에서 전혀 논의되지 않았고, 1951년 2월과 4월 덜레스의 두 차례 동경 방문에서도 전혀 논의되지 않았다. 그런데 1951년 7월 한미협의과정에서 독도문제가 제기되고, 1951년 8월 딘 러스크 국무차관보의 서한이 제시되고 난 뒤에야 일본의 독도영유권 선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인과관계로 보자면 일본측에 관련 정보가 누설되었거나, 일본측이 관련 정보를 입수한 후 선전이 시작되었음이 분명했다."(859-60)


"일본의 외교적 성명(1952)과 물리적 점령 시도(1953) 사이에 위치한 것이 바로 독도의 미군 폭격연습장 지정·해체 전략이다. 먼저, 1952년의 시점에 일본은 독도영유권을 주장할 근거가 현저히 약했기 때문에 미국을 이용해 영유권 증거문서를 확보하려 했다. 둘째, 1952년부터 1953년 5월까지 일본 순시선·어선 등이 독도 해역에 출현하지 않거나 독도에 불법상륙을 시도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이들은 독도가 미군 폭격연습장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셋째, 1953년 3월 19일 독도가 폭격연습장에서 해제되자 5월부터 본격적으로 불법상륙과 일본령 표지판 설치 등의 공격적 행동을 취했다. 넷째, 5~7월 간 여러 차례 독도 불법상륙을 시도하고 외교각서를 발표하는 등 화전양면 공세를 취한 후에야 일본은 한국정부를 상대로 독도의 폭격연습장 지정·해제가 일본의 독도영유권을 증명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는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기획된 대응방략의 결과였다."(872)


# 1953년 물리적 점령 시도에 담긴 일본의 의도

1. 독도 폭격연습장 지정·해제로 미국에게 독도영유권을 확보했다는 자신감의 표출

2. 제2차 한일회담(1953.4.15~7.13)에서 일본 영토인 독도를 포함한 평화선(이승만라인)은 불법한 획선(劃線)이라는 것을 강조

3. 자신들의 도발에 맞선 한국측 대응을 통해 재무장강화의 구실을 만들려는 의도


"그런데 한국 어민들이 폭격을 당했고, 이에 대해 한국정부가 강하게 항의하자 미공군사령부는 폭격중단과 폭격연습장 해제를 결정했다. 만약 독도가 한국령이 아니라면, 미군은 한국정부에 대해 불법월경 및 불법어로로 발생한 사고였으며, 귀책사유가 한국측의 위법에 있었다고 통보하면 그만인 문제였다. 일본측 논리에 따르자면, 폭격연습장 지정이 독도에 대한 일본 영유권을 미국이 확인한 증거이듯이, 미국이 폭격연습장 사용중단을 한국정부에 통보한 것은 미국이 독도를 한국령으로 인정한 증거였다. 나아가 1948년 독도폭격사건에 이어 독도가 한국 어민들이 조업하는 한국 어장이자 한국 영토임을 미국이 재확인한 것이었다. 때문에 미군 당국은 한국정보에 통보했고, 한국정부가 이 사실을 공표한 다음에야 일본정부가 인지하고 미군 당국에 재확인을 한 것이었다. 일본정부는 미국이 일본과 상의 없이 독도 폭격연습장 사용을 중단하고 이를 한국정보에 통보한 사실에 대해 거세게 항의했다."(882)


"당시 미국에게는 한국 상황의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이었다. 만 3년 이상 지속된 전쟁은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스탈린이 사망함으로써 휴전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반공포로를 석방하는(1953.6.18) 등 휴전에 강력하게 반발하는 상황이었다. 미국에게 이승만은 도저히 통제 불능이었다." "1953년 중반 이승만의 휴전회담 반대가 절정에 달하자 미군 수뇌부는 또다시 이승만 제거계획을 꺼내들었다. 5월 3일 미8군사령관 테일러는 이승만 제거를 위한 에버레디계획(Everready Plan), 즉 상비계획을 승인했다." "이승만을 정점으로 한 한국정부에 대한 미 군부·국무부의 불신과 증오심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달했다. 거칠고 비이성적이며 막무가내인 이승만과 한국정부, 이에 대비되는 세련되고 고분고분하고 합리적인 일본정부, 이것이 당시 미 국무부 당국자들의 눈에 비친 한국과 일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미 국무부는 독도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943-4)


"한일 양국은 독도에서 대결적 충돌을 벌였지만, 미국의 중재와 무마로 1953년 10월 6일 제3차 한일회담을 개최했다. 그러나 불과 보름 만에 일본 수석 구보타 간이치로의 망언으로 10월 21일 회담은 결렬되었다. 구보타는 작심하고 ① 한국이 강화조약 발효 전에 독립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다, ② 일본 패전과 동시에 재한일본인을 전부 철수시킨 것은 국제법 위반이다, ③ 재한일본 사유재산 몰수는 국제법 위반이다, ④ 카이로선언의 '한민족이 노예상태'에 있다는 문구는 전시(戰時) 흥분상태에서 작성된 것이다. ⑤ 일본의 한국 식민통치가 한민족에 은혜를 주었다고 발언했다. 한국측에서는 구보타 발언의 철회 및 사과가 회담재개의 전제조건이었지만, 일본은 전혀 그럴 의사가 없었다. 존 앨리슨 신임 주일대사는 1953년 11월 18일 "일본 국내의 정치적 민감성 때문에 구보타 발언의 취소 혹은 직접적 사과는 정치적으로 불가능하다"라고 평가했다."(946)


"주일미대사관의 앨리슨 대사, 윌리엄 터너 참사관, 핀 2등서기관 등은 물론 워싱턴의 동북아시아국 일본과의 더닝까지 모두 러스크 서한의 공개를 통한 미국의 입장표명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동북아시아국장 매클러킨이 러스크 서한 공개를 억제하고 있었지만, 현장과 본부의 공개 요구가 국무부의 회랑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노회한 변호사 출신의 덜레스가 미 국무장관이 아니었다면, 1953~54년의 시점에 러스크 서한이 공개되어, 한미·한일 관계가 대파란에 휩싸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덜레스의 지시는 첫째, 독도분쟁과 관련해 미국이 일본편을 들 수는 없다. 둘째, 문제가 있다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해야 한다. 셋째, 그때까지 미국이 중재할 수 있다. 넷째, 미국의 입장을 밝히라는 일본정부의 주장은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1월 23일자 앨리슨 주일대사의 전문은 바로 덜레스가 강조한, 미국이 독도분쟁에 "법률적으로 관련되지 않았다"라는 점을 강력하게 논박한 것이었다."(947-8)


동경의 반발이 거세지자 덜레스는 1953년 12월 9일 미 국무부의 최종 입장을 정리한 전문을 동경대사관에 보냈다. "이 전문에서 덜레스는 대일평화조약과 미국의 행정적 결정이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과의 독도분쟁에서 미국이 일본에 우호적으로 행동하길 기대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이는 1951년 대일평화조약문의 영토조항에 독도가 일본령에서 배제될 섬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사실, 그리고 1952~53년 간 미일합동위원회가 독도를 일본정부 시설로 인정해 폭격연습장으로 지정·해제한 사실을 언급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미국의 입장을 한국에 공식 통보한 1951년 8월 10일자 러스크 서한은 일본정부에 알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즉, 한국에 대해서는 정책결정을 통보했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일본정부에 대해 미국의 입장을 알리는 것이 필요하거나 바람직하겠지만, 최근의 한일관계의 어려움에 비추어볼 때 더 이상 미국이 개입하는 것은 안 된다고 못박았다."(949-50)


"덜레스는 평화회담 당시 미국의 입장은 수많은 조약서명국들 가운데 하나이며, 이것이 서명국들의 합의된 공론이자 결정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지적이었는데, 러스크 서한은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조문의 최종 성안을 앞둔 급박한 시기에 행정실무자의 편의적 문서작업 과정에서 채택된 것으로, 국가 간 논의·결정 과정이나 고위급 정책결정을 거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덜레스는 미국이 공개적으로 소련이 점령하고 있는 하보마이를 일본령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일본은 이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는 반면, 공산 침략에 맞서 싸우는 허약한 위기의 한국에 대해서만 강력한 조치를 취하며 미국을 압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덜레스의 정책판단은 (독도분쟁이 "한국의 다케시마에 대한 요구"에서 비롯되었다는 식의) 한국인들의 관점에서 믿기 힘든 사실과 평가들을 담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1953년 12월의 시점에 가장 한국의 입장을 옹호한 결정이기도 했다."(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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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김태우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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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서막


1장 폭격의 역사 : 개관


"(공군이론의 창시자로 평가되는) 줄리오 두에는 국가의 모든 자원이 전쟁에 집중된 1차대전의 새로운 전쟁양상에 주목하면서, 지형에 국한되지 않고 언제나 공격에 임할 수 있는 공군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더불어 그는 공군력의 가장 핵심적 요소로 '제공권'의 장악을 강조했다. 두에의 주장에 따르면, 현대전에서 제공권의 상실은 곧 지상작전과 해상작전의 실패를 의미했다. 두에는 제공권 장악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현대 '전략폭격'의 효시가 된 생각들을 최초로 개념화했다." "두에는 적의 저항의지를 말살하는 것이야말로 전쟁의 주요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공군력에 의한 적의 핵심지역(vital centers) 무력화를 강조했다. 두에는 심지어 "군사목표보다 공업목표를 중시해야 하며, 적국의 도시에도 인정사정없이 타격"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군사작전의 핵심 파괴 대상이란 적 병력이 아니라 오히려 적 점령지역의 민간인들이었다."(28)


# 전략폭격과 전술폭격

1. 전략폭격(strategic bombing) : 적의 전쟁수행능력과 전쟁의지를 없애기 위해 적의 주요 도시나 생산시설, 정치·군사의 중추부 등을 파괴하는 폭격작전

2. 전술폭격(tactical bombing) : 지상부대나 해상부대의 작전을 돕기 위해 실시되는 공중폭격


"1942년 2월 아서 해리스의 영국공군 폭격기사령관 임명은 영국 공중폭격정책의 전환점을 의미했다. 당시 영국정부와 공군은 공중폭격 결과의 미미함에 대해 국내 여론의 심한 질타를 받고 있었다. 영국공군의 사기는 떨어졌고, 공군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수는 날로 증가했다. 처칠은 공중폭격 여론에 내몰렸다. 그로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1942년 초 영국정부와 공군은 마침내 과감한 해결책을 뽑아들었다. 영국정부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정치적으로는 좀더 솔직하고 군사적으로는 좀더 효율적인 '지역폭격'이라는 공중폭격정책을 제시했다. 지역폭격은 '목표구역폭격'(target area bombing)이라고도 불리는데, 명확하게 분리된 다수의 목표를 단일 목표로 취급하는 방법이다. 즉 군수공장이나 항구, 철도조차장 같은 군사 용도 시설과 주변 주거구역 등 시가지 '전체'를 하나로 묶어 군사목표로 간주해 일정 지역을 통째로 융단폭격하는 방식의 폭격작전이다."(35)


"태평양전쟁 당시까지만 해도 미군은 유럽에서와 동일한 정밀폭격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공군과의 공조 속에서 지속되었던 유럽에서의 정밀폭격과는 달리, 일본 군사·산업시설을 향한 정밀폭격은 그 효율성에서 적잖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1945년 1월, 헨리 아널드 미 육군항공대 사령관은 태평양지역에서의 국면전환을 위해 중국과 인도에 배치된 미공군 부대들을 전면 철수하고, 모든 B-29기들을 마리아나기지에 집결시켜 하나의 지휘통제 아래 둘 것을 명령했다. 더불어 조직개편의 일환으로 정밀폭격을 주장하던 헤이우드 한셀을 대신해 커티스 르메이를 제21폭격기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후 미공군의 전략폭격 역사에서 독보적이고 상징적인 인물이 된 르메이는 2차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에 이르기까지 미군의 민간지역 무차별 폭격작전의 상징적 존재로 역사에 기록되었다."(40-1)


2장 일제시기 조선인과 공중폭격


"일본군의 전략폭격은 서구 중심의 공중폭격 역사 서술에서 빈번히 제외되거나 망각되었으나 1937년 게르니카 폭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전략폭격이 같은 해 중국대륙의 주요 도시들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일본군은 일본의 대만·조선·중국의 저항세력을 향해 무차별폭격을 가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 예로는 1920년 간도출병 당시의 조선인 거주지 폭격과 1930년 대만에서 발생한 항일무장봉기 우서(霧社)사건 진압시 공중폭격 등을 들 수 있다. 간도출병이란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 남동부 간도지방에서 조선인 무장독립운동단체 결성이 급증하자, 이를 토벌하기 위해 일본이 제19사단 시베리아 출병군 등을 간도에 투입한 사건을 일컫는다." "당시 일본군은 폭격의 효과와 관련해 "지금까지 한번도 비행기를 보지 못했던 선지인(鮮支人, 조선인과 중국인에 대한 멸칭)에게 많은 효과가 있었다"라고 평가했다."(47-8)


"일본군은 1910년대 이래 다양한 공중폭격 경험을 기초로 1930년대에는 선진적인 항공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더욱이 1930년부터는 일본산 비행기 시대를 열었고, 미쯔비시중공업 등에서 생산된 각종 신형 폭격기들은 1937년 중일전쟁에서 가공할 위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 발발 시점부터 다음 해 10월 27일 우한(武漢) 점령에 이르기까지 16개월 동안 일본 해군항공대(육군항공대 제외)만 무려 1만대의 비행기를 참전시켰고, 약 3만 5000발의 폭탄과 32만발의 지상 총격용 총탄을 소비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그 이전 시기 동서양을 통틀어 어떤 공중폭격 양상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 공군력의 발현이었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는 「전전긍긍한 남경시민, 공습 후 침묵의 일야(一夜)」 「비행대는 적 후방시설 폭격, 상해전선 공육군 활약」 같은 화려한 제목의 신문기사들이 단 하루의 예외도 없이 일본의 공군력을 찬양하고 있었다."(48-9)


3장 냉전과 공중폭격


"(전후 수립된) 합동참모본부의 비상전쟁계획은 유럽지역 적극공세와 극동지역 전략방어라는 큰 틀 속에서 '공군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소련에 대응하고자 했다. 미군은 이러한 전쟁계획하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제어할 수 있는 소련 주변부 공군기지 확보 문제에 당면하게 되었다. 1945~46년 중국 서부지방과 이탈리아의 공군기지들이 미국의 전쟁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공내전 상황과 중공군의 진격으로 인해 중국의 공군기지는 고려대상에서 제외되었고, 이탈리아 또한 소련 공격에 대한 취약성 때문에 합참의 계획에서 빠지게 되자 합참은 새로운 지역들을 미군 전쟁계획의 주요 거점으로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1947년 합참은 일본과 류큐열도를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제어하기 위한 주요 공군기지로 선정했다. 더불어 미국의 여러 주요 인사들은 류큐열도에 위치한 오키나와를 극동지역 전략방어의 거점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71-2)


1948년 6월 8일 벌어진 독도폭격사건에서 한국전쟁과 관련한 사실들을 짚어보면 "우선 냉전 초기 독도폭격훈련은 소련과 북한을 향한 미군의 '위력과시용'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적시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독도폭격사건이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의미심장하게 읽히는 대목 중 하나는 대규모의 민간인 희생에 관한 부분이다."(78-9) "2차대전기 일본인 혹은 아시아인에 대한 미국의 인종주의적 편견은 현재 학계에서도 통용되는 역사적 사실이다. 독도폭격사건이 2차대전 종료 후 불과 3년 뒤에 발생했다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처럼, 독도폭격사건 2년 후에 발발했던 한국전쟁 중에도 아시아인을 향한 미군의 인종주의적 편견은 결코 현격하게 줄어들지 않았다." "우리는 한국전쟁 발발 불과 5년 전 극동지역에서 무차별 대량폭격을 수행했던 주체들이 자신의 무대를 고스란히 한반도로 옮겼을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82)


제2부 북폭


"1950년 7월 7일 전선에서 북한군의 전황은 겉보기에 상당히 낙관적이었다. 7월 5일 북한군은 오산에서 미 지상군과 최초로 교전하여 그 병력의 3분의 1을 몰살시키는 커다란 승리를 거두기까지 했다. 기존 학계의 한국전쟁 서술에 따르면, 당시 북한지도부는 승리의 축배를 들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어야 했다. 그러나 당대 소련 문서에서 보듯, 김일성을 포함한 북한지도부는 소련대사 앞에서 자신의 불안과 당혹감, 좌절감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당대 소련 문서를 통해 알 수 있는 전쟁 초기 북한지도부의 불안과 좌절의 표면적 원인은 전쟁 초기부터 본격화된 미공군의 북한지역 대량 폭격 때문이었지만, 좀더 근본적으로는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전면적으로 전쟁에 개입한 미국의 결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역사적으로는 그들의 식민지기(期) 경험을 통해 획득한 다양한 공중폭격 관련 지식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86-7)


4장 정밀폭격


북한지역 공중폭격을 수행하기 위해 1950년 7월 8일 창설된 "극동공군 폭격기사령부의 전쟁 초기 주요 임무는 북한군의 전투력에 기여하는 북한지역 산업시설과 군수창고, 유류저장소, 한강-삼척 라인 북쪽의 도로·철도·항만과 항공시설 등을 파괴하는 일이었다. 즉 한강에서 압록강 사이에 있는 북한군 수송망을 차단하고, 북한군 병참보급에 도움을 주는 산업시설을 파괴하는 것이 폭격기사령부의 주임무였다." "한국전쟁 초기 극동공군 폭격기사령부의 북한지역 폭격 목표는 거의 모두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었다. 폭격기사령부는 북한지역 출격 이전에 목표물을 구체적으로 배정했는데, 대부분은 평양, 원산, 흥남, 함흥, 청진, 나진, 성진 등 북한의 대도시에 위치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초기 미공군의 북한지역 폭격이 대도시지역에 국한된 이유는 폭격사령부의 작전 자체가 '차단작전'과 '전략폭격'이라는 2가지 작전개념하에 전개되었기 때문이다."(104)


# 차단작전(interdiction) : 적의 병력과 물자가 전선으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적 후방의 교통중심지, 도로, 철로, 병력이동로, 이동병력의 숙소 등을 폭격하는 항공작전


5장 북폭, 그리고 논쟁의 시작


"전쟁 초기 양측의 목표물 인식은 극단적으로 판이했다. 미 극동공군은 군사목표 정밀폭격이라는 폭격정책에 따라, 원산의 조선정유공장·조차장·선착장 등의 목표물을 공격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군 폭격기의 타깃이 5년 전 일본 본토 폭격 당시처럼 도심의 민간지역을 향한다고 주장했다."(117) "원산은 1950년 7월 초부터 약 한달가량 지속된 폭격에 의해 핵심 산업시설과 교통시설의 상당부분을 상실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원산지역 민간인 주택 수백채와 북한주민 수천명이 함께 희생되었다. 미공군은 전쟁 발발시점의 폭격정책에 따라 군사목표 정밀폭격을 모색했으나, B-29기를 이용한 고공폭격은 필연적으로 대규모의 민간인 희생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초기 군사목표만을 정밀폭격했다는 미공군 측 주장과, 도시지역 전반에 무차별 폭격피해를 입었다는 북한 측의 주장은 모두 나름의 근거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119-20)


# 그 외의 폭격 지역 : 흥남·평양·청진·나진·함흥·겸이포·성진


"한국전쟁 초기 B-29기의 폭격양상에서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조종사의 시야가 완전히 가려진 상태에서 진행된 맹목포격이 매우 빈번히 수행되었다는 사실이다. B-29기 조종사들은 기상악화로 인해 목표물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1만피트 이상의 고공에서 대량의 파괴폭탄을 도심 목표물을 향해 투하하곤 했다. 이런 경우 조종사와 폭격수는 매우 세밀한 목표물 판단근거를 지녀야 했는데, 실상 그들은 지극히 초보적 수준의 레이더장치만을 유일한 목표인식의 근거로 갖추고 있었다. 조종사들은 이러한 맹목폭격 방법을 레이더폭격이라 불렀고, 원산과 평양 등의 목표물을 향한 대량폭격에서 이 방식을 빈번히 활요했다. 실상 B-29기는 굳이 레이더폭격이 아닌 주간육안폭격을 수행한다할지라도 필연적으로 주변지역 상당부분을 동시에 파괴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B-29기의 높은 '오폭률' 때문이었다."(144)


"B-29기 정밀폭격의 수행절차와 위력 및 한계는 한국전쟁 초기 미공군 공중폭격의 역사적 실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본 전제들이다. 미공군은 군사목표 정밀폭격을 정책적으로 분명히 했다. 하지만 이 정책은 사실상 실행 불가능한 목표나 다름없었다. 폭격목표물들이 대부분 도시 인구밀집지역 부근에 위치한 반면에, 폭격을 수행할 B-29기들의 목표물 적중률은 터무니없이 낮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기 미국은 자신의 폭격기들이 군사목표만을 정밀폭격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상 현실과 거리가 먼 수사에 불과했다. 한국전쟁기 북폭에 동원된 수많은 폭격기 조종사들은 대량의 폭탄을 한꺼번에 쏟아부어 타깃 인근의 민간지역 전반을 완전히 괴멸시키는 방식으로 폭격을 진행해야만 자신의 군사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 그러한 방식으로 폭격을 수행했다."(146-7)


6장 북한의 피해와 대응


"1939년 일본군의 충칭폭격을 목격하고 에드거 스노우가 표현한 "완전히 개인적인 증오"는 당대 북한의 사진과 문헌들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1950년 9월 9일 9일 『로동신문』은 미공군의 평양폭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사를 게재했다. "높이 솟았던 선암리 교회당과 고아원 및 기타 문화시설들도 완전히 파괴되었다. 폭연 속에서는 잃어버린 가족들을 부르는 비통한 목메인 목소리들이 들려오고 있었으며, 구호대원들은 이곳저곳에서 무너진 벽돌을 헤치고 어린이와 늙은이들의 시체를 끌어내고 있었다." 폭격 현장에서 아내와 아이를 잃은 김리익은 다음과 같이 미국을 향한 증오를 표현했다. "우리는 원쑤들의 이 만행을 영원이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다하여 골수에 사무친 이 원한을 갚고야 말 것이다." 미공군의 공중폭격은 한국전쟁 초기부터 "누구도 진실로 이해할 수 없는 완전히 개인적인 증오"를 북한 곳곳에서 만들어내고 있었다."(152-3)


제3부 평범한 임무


7장 폭격의 구조


"한국전쟁기 제5공군의 전술항공작전은 기본적으로 미공군의 일반적 전술항공작전 개념 속에서 작동했지만, 한국전쟁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일정한 차별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요컨대 공군의 보편적인 전술항공작전은 크게 제공권 장악, 전선지역 차단, 지상병력 화력지원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중에서 미공군은 일반적으로 제공권 장악을 가장 중시했고, 다음으로 병력과 물자의 이동을 막는 차단작전을 중시했으며, 지상군에 대한 화력지원은 이상의 작전이 완수된 후에 이행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1950년 남한에서는 이러한 단계설정이 상당정도 와해되었다. 북한 공군력이 열악했기 때문에 미공군은 가장 중요한 목표였던 제공권 장악을 단기일 내에 완수할 수 있었다. 또한 지상전황이 급박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에, 차단작전보다 전선의 지상군에게 직접적인 화력지원을 제공하는 근접지원작전(Close Air Support)이 중시되기 일쑤였다."(170)


"한국전쟁 초기 매우 불안정했던 전술항공통제시스템 속에서 속출했던 미공군의 유엔지상군 공격 사례들은 명백히 '오폭'으로 분류 가능한 사건들이지만, 당시 미공군 전폭기들의 임무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남한지역 도시와 농촌에 대한 폭격은 대부분이 이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수많은 임무보고서들은 미공군 전폭기들이 전술항공작전에서 전선 인근의 촌락들을 애초부터 타깃으로 설정했음을 생생히 보여준다." "노근리사건조사반은 노근리사건 발생을 전후한 시점의 미공군 전폭기 임무보고서들을 전반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적잖은 당혹감과 충격 속에 해당 결론에 도달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당대 미공군 전폭기들의 임무보고서들 대부분이 남한의 도시와 농촌, 혹은 흰옷을 입은 피난민 행렬을 향한 전폭기의 무차별적 공격이 일상적인 임무인 듯 너무도 태연하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180-1)


"기초교육과 훈련과정에서 기능주의적인 전쟁기계로 육성된 미공군 조종사들의 전시 행동양식은 폭격의 구조와 양상을 살피는 데 중요한 분석대상이다. 과거 2차대전기 상당수의 미군 조종사들이 자신들의 전쟁을 인종우월주의, 군국주의, 광신적 민족주의, 팽창주의에 맞서는 숭고한 성전(聖戰)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한국전쟁에 지원한 공군 조종사들은 달랐다. 조종사 선발, 교육, 임무브리핑, 작전 과정에서 정치적 요소들은 오히려 탈색되었다. 조종사들에게 강조되는 제일의 덕목은 오로지 유능한 비행술과 폭격술뿐이었다. 조종사 개개인의 전투 동기부여도 마찬가지였다. 2차대전 당시 나치의 인종주의와 일본군의 진주만공격, 미군포로 학대 등은 비행기 조종사들에게 커다란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한국전쟁에 참전한 조종사들은 개인적 출세와 성공과 같은 원인들에 이끌려 매일 조종간을 잡고 있던 셈이다."(188-9)


"개인적 성공이라는 목표 외에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중요했던 비행 동기부여 요소는 '동료들의 압력'이었다. 조종사들은 일단 공격을 위한 진입대열에 서면 동료들에게 창피한 꼴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전투공격을 회피할 수 없었다. 공격을 중단시킬 권한은 대개 전투경험이 풍부한 편대장만이 갖고 있었다. 편대원들은 용맹한 편대장들의 통솔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 출세나 동료들의 압력은 모두 지극히 개인적인 동기부여였다. 2차대전기 조종사들에게 강조된 파시즘의 축출 같은 정치적 구호들은 한국전쟁 과정에서는 완전히 논외였다." "전폭기 조종사들은 그저 정찰병의 지시를 기계적으로 따르거나, 무감각하게 임무 구역 내에 폭탄을 소진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했다. 그들은 자신의 타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자신의 작전이 어떤 성격의 군사작전이며, 왜 그 같은 공격을 수행해야만 하는지 되묻는 경우가 없었다."(190-1)


"조종사들은 기계로 양성되었지만 결코 완전한 기계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신의 인격과 개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차별적인 민간지역 폭격이나 민간인 공격을 정당화시켜야만 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 살상이나 민간지역 폭격과 관련하여 조종사들이 제시한 가장 상투적이고 전형적인 자기정당화 논리는 크게 2가지다. 첫째는 북한군 점령지역의 모든 민간인이 궁극적으로 북한군의 군사활동을 돕는 세력으로서 사실상 적과 동일시될 수 있다는 논리고, 둘째는 군인으로서의 직업정신을 강조하는 논리로, 자신의 민간인 공격을 부대 상관이나 정찰병의 지시에 의한 직업적 업무수행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셔우드의 인터뷰 분석결과에 따르면, 조종사들은 살인으로 이어지는 자신의 공격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전투원과 민간인 사이의 구분을 흐리게 만드는 경향이 강했다고 한다."(192-3)


8장 흰옷을 입은 적들


"전술항공통제반(Tactical Aircraft Control Parties, TACP)이나 모스키토 정찰병의 유도에 의한 공중폭격은 전폭기의 전술항공작전 수행에서 가장 원칙적·보편적으로 활용되는 폭격절차다. 전선지역에 배치된 통제관의 유도에 의한 폭격은 목표물 발견이 힘든 전폭기 입장에서는 매우 효율적인 공격방법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기 전술항공작전의 성격 규명에서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정찰병의 유도에 의해 공중폭격을 실시하는 경우, 일단 공격지시가 하달되기만 하면 모든 전폭기 조종사는 공격지점의 적 병력이나 민간인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진행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기 미공군이 직접 작성한 수많은 임무보고서와) 전쟁 중 실시된 조종사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실제 전폭기 조종사들은 연료부족에 따른 심리적 압박감 때문에 전술항공통제반이나 모스키토 정찰병의 공격지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반문하지 않고' 공격을 실시했다."(198)


적 병력이나 보급품의 존재를 전혀 확인할 수 없는 민간지역에 대한 무차별적 '시험폭격'에 대해 증언한 "전폭기 조종사들은 대낮에 전선 인근의 북한군 병력을 찾아내는 데 많은 곤란을 겪었다. 빠르게 비행하는 전폭기 내에서 산속에 은신한 적을 찾는 일은 어려웠다. 이런 까닭에 미공군 조종사들은 점차 적 병력이 거주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특정지역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폭탄을 투하하는 것을 점차 당연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같은 '의심지역 시험폭격'에서 민간인 거주지역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다수의 조종사들은 오로지 자신의 '육감'(hunch)에 의존해 남한의 도시와 농촌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폭탄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조종사들에게 중요한 것은 빠른 시간 내에 적 병력을 찾아내 살상하는 것뿐이었다. 이들은 네이팜탄 투하나 기총소사로 인한 시험적 공격으로 인해 해당 지역의 민간인이 다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205-7)


9장 남한지역 대량폭격


"미 극동공군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는 B-29기를 북한지역 전략폭격과 차단작전에만 활용할 예정이었으나, 지상전의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자 B-29기를 남한의 지상군 '교전지역'까지 불러들였다. 유엔군사령관 맥아더는 지상군의 수세상황에 맞서 공군의 근접지원작전을 매우 강조했다. 특히 파병시기가 가장 빨랐던 미 제24사단이 위험에 직면하자 7월 9일 맥아더는 B-29 중폭격기 전부를 출동시켜 악전고투하는 지상군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폭격기사령부 B-29기들의 근접지원작전이 절정에 이른 시점은 1950년 8월 중순이었다. 8월 중순 북한군은 낙동강전선을 돌파하여 부산을 점령할 목적으로 낙동간 북안의 경북 칠곡군 왜관읍 주변에 병력을 결집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8월 13일 극동공군사령관을 자기 사무실로 불러 적의 대병력이 집결하고 있는 지역을 B-29기 '전부'를 동원하여 융단폭격하라고 지시했다."(229-30)


"극동공군은 1950년 7월 한강 남안을 따라 최초로 폭격선을 설정했는데, 이 폭격선이 유엔군 후퇴와 함께 결국 낙동강 인근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스트레이트마이어는 조종사들에게 폭격선 남쪽의 목표물 공격시에는 공격 이전에 적극적으로 목표물을 확인할 것을 요구했지만, 폭격선 북쪽의 목표물에 대해서는 제한없는 공격을 허락했다. 폭격선은 전선의 남하와 함께 남쪽으로 이동했고, 제한없는 공격의 범위는 남한지역 전반에 걸쳐 점차 확장되었다." "(열차, 차량, 탱크, 병력의 이동을 막기 위한) 남한지역 교량 공중공격은 필연적으로 많은 민간인 희생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포화를 피해 길을 떠난 민간인들이 피난행로의 병목과도 같은 교량에 대거 운집한 상황에서 북한군의 전선 진입을 차단하고자 했던 유엔 지상군과 공군은 피난민들에게 사전 경고 없이 교량을 폭파하곤 했다."(238-40)


제4부 초토화정책


"(중국군의 참전 가능성 여부를 묻는 질문에) 맥아더의 대답은 단호했다. "거의 없습니다. (···) 우리는 한반도에 우리의 공군기지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만약 중국이 평양으로 밀고 내려오려 한다면 최악의 대량학살(greatest slaughter)이 벌어질 것입니다." 트루먼은 "대량학살"이 벌어질 것이라는 맥아더의 발언에 특별히 토를 달지 않았다." "중국군이 참전할 경우 최악의 대량학살을 벌이겠다는 맥아더의 발언은 실제 1950년 11월 초 중국군의 한국전쟁 참전이 공식화되면서 구체적인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1950년 11월 5일 맥아더는 북한의 모든 도시와 마을을 군사목표로 간주하는 '초토화정책' (Scorched Earth Policy)을 명령했다. 이후 한국전쟁 발발 이래 워싱턴의 정밀폭격정책에 따라 금지되어오던 B-29기의 소이탄 투하가 한반도 상공에서 현실화되었다. 1950년 겨울, 유난히 추웠던 북한 도시와 농촌의 눈밭 위에 불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268-9)


10장 초토화정책의 결정


"중국인민지원군의 본대는 한국군이 평양을 탈환했던 바로 그날, 10월 19일 저녁부터 안둥(지금의 단둥), 장전하구, 지안을 통해 압록강을 건너 각각 신의주, 삭주, 만포진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최초로 한반도에 진입한 중국인민지원군은 제13병단 예하 4개 군 12개 사단을 포함해 총 병력 26만명에 달했다. 애초 이들은 예상방어지역을 확보하여 일정기간 방어 후 공세로 전환한다는 작전방침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작전방침은 유엔군의 북한지역 전진 방식에 조응하여 급속히 변경되었다." "모든 유엔군 부대들은 성과달성을 위해 마치 국경선까지 경주대회라도 하듯 정신없이 전진하면서 적에게 자신의 취약점을 고스란히 노출시켰다. 중국군은 이렇듯 고립된 상태로 접근해오는 유엔군 부대들을 개별적으로 철저히 "각개격파"해나갔다. 1950년 10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중국군을 만난 미군과 한국군은 여지없이 그 병력의 상당수를 잃었다."(282)


"(초토화정책을 결정한) 맥아더는 (만주 국경 8킬로미터 이내 지역을 폭격에서 제외한) 합참의 지시에 즉각적으로 반발했다. 그는 만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인력과 물자가 유엔군에 "엄청난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고 위협하며, 합참 명령의 즉각적인 재검토를 요구했다. 같은 날 맥아더는 합참에게 보내는 다른 전문을 통해 병력 증원을 요청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궁지에 몰리거나 여태까지 얻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다시 한번 협박했다. 결국 합참은 "기존에 계획했던 신의주 표적과 압록강 철교 끝부분을 포함하는 국경 인근 북한지역 폭격을 허용한다"고 맥아더에게 전문을 보냈다. 합참은 국경지역 폭격을 허용하는 전문에거 "미국의 국익 차원에서 볼 때 한반도 분쟁을 국지화하는 게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표현을 추가했다. 그러나 해당 전문에서 '한국인들을 위해' 민간지역 폭격에 신중해야 한다는 표현은 어디에도 없었다."(290)


11장 불타는 눈밭


"(2차대전기 일본 도시지역에 투하된) M-69는 석유를 기본으로 하는 소이탄인 반면, (한국전쟁기 도시지역에 주로 투하된) M-76은 석유와 금속의 장점이 넓은 방사성(放射性)과 분말금속 소이탄 매개체의 화력상승효과가 합해진 강력한 무기다. M-76 내에는 '굽'(goop)이라는 마그네슘과 원유의 화합물이 들어갔다. 분말 마그네슘과 만난 석유는 진한 농도의 반죽 덩어리로 변한다. 불타는 마그네슘은 으레 강철도 녹일 수 있는 섭씨 1980도까지 온도가 상승하기 때문에, 굽은 목조건물뿐만 아니라 차량·열차·철로·공장 등의 파괴에도 유용한 폭탄원료였다. 마그네슘은 물과 융합되면 폭발성이 있는 수소 등의 가스를 형성시키기 때문에 진화도 어렵다. 불타는 마그네슘은 밝은 불꽃을 내며 인체에 해로운 흰색의 산화마그네슘 연기까지 형성시킨다. 신의주폭격 사진에서 유난히 하얗던 연기는 산화마그네슘의 존재를 증명한다."(303-4)


"미공군은 극도로 인화성이 강한 소이탄을 도시지역에 투하한 후, 화염이 수일 동안 불탈 수 있도록 (도시주민들을 목표로 삼은) 기총소사를 쏟아부으면서 진화작업을 방해했다. 진화작업의 방해를 위한 또다른 활동은 소이탄 투하 직후의 도시 전지역에 대한 시한폭탄 투하였다. 국제연맹 조사단은 미공군 폭격기들이 주로 소이탄 투하 후에 시한폭탄을 투하했다고 주장한다. 조사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시한폭탄은 다양한 시간대에 폭발했는데, 낙하 후 20일 이후에 폭파하는 것들도 있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1950년 8월과 11월 극동공군은 남북한 도시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비인도적인 시한폭탄을 무차별적으로 투하했던 것이다. 작전은 민간인을 희생시키고 그들 사이에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주요한 목적으로 했다. 북한주민들은 기총소사 및 시한폭탄이 두려워 소이탄의 화염을 감히 끌 엄두를 못 냈다."(307-8)


"제12전폭대대 F-51 전폭기편대들의 임무보고서는 중국군 개입 이후 미공군 전폭기들의 작전양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폭기 편대들은 적 병력이나 보급품을 찾아내기 위해 각별히 애쓸 필요가 없었다. 이들 대부분은 임무구역에서 적 병력이나 보급품을 수색하다가, 적절한 목표물을 발견하지 못하면 해당 구역 내의 마을과 도시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적 병력이나 보급품의 존재 유무는 중요하지 않았다. 민간인 거주지역은 그 자체로 훌륭한 공격목표였다. 기지로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마을은 탑재한 무기를 모두 "소진"할 수 있는 좋은 목표물로 인식되었다. 실제 대부분의 전폭기 임무보고는 회항 직전의 마을 폭격에 대한 묘사에서 "공격"(attack)이나 "폭격"(bomb)이라는 표현 대신 "소진"(expend)이라는 표현을 빈번히 사용했다. 전폭기들은 탑재한 무기들을 마을에 모두 쏟아붓고 난 후에야 기지로 돌아왔다."(312)


제5부 협상하며 죽이기


"1953년에 접어들며 미공군은 더이상 값어치 있는 목표물을 찾아낼 수 없는 북한의 도시와 농촌 지역을 향해 폭격의 강도를 한층 더 높이기로 공식적으로 결정했다. 민간지역을 향한 대량폭격을 통해 정전회담장에 정치적 압력을 행사한다는 소위 '항공압력전략'이 더욱더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같은 결정은 대부분 토굴생활로 어렵사리 살아가던 북한 도시와 농촌의 무고한 민중들에게는 또다시 커다란 재앙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폐허 아래 지하 토굴마저도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하게 된 것이다. 전쟁이 끝나는 시점까지 생존은 모든 북한주민들의 최대 당면 과제가 되었다. 정전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은 양측 대표들은 공히 인도주의적 원칙을 내세우며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강력히 호소하고 있었지만, 협상기간 내내 폭격을 견뎌내야 했던 북한주민들에게 2년의 협상 기간은 그저 비인도적인, 생존을 위한 투쟁의 기간에 불과했다."(336)


12장 기계와 인간의 전쟁


"한국전쟁기 미공군 작전사를 다룬 기존의 연구들은 정전협상이 시작된 후 1년여의 기간(1951년 6월~52년 6월)을 철도차단작전의 시기로 정리한다. 실제 이 시기 북한지역 철도차단은 미공군의 가장 중요한 군사목표 중 하나였다. 38선 인근의 전선에서 싸우는 공산군은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식량과 무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기에 열차는 가장 중요한 보급품 이동수단이었다." "북한이 화물과 여객 수송에서 (각각 90퍼센트와 62퍼센트를) 철도에 절대적으로 의지하게 된 역사적 배경에는 과거 일제의 대륙침략정책에 따른 대대적인 철도부설정책이 자리잡고 있었다." "일제는 철도건설에서 군사적 측면을 중요하게 고려하여 항만집중적이고 남북종단적 성격을 띤 철로를 건설했다. 물론 이 같은 특징은 일본의 전쟁수행뿐만 아니라 북한의 한국전쟁 수행과정에서도 주효하게 활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339-40)


북한지도부는 말 그대로 철도 및 교량 복구사업에 전쟁의 사활을 걸었다. "1951년 8월부터 12월까지의 스트랭글작전과 1952년 3월부터 5월까지의 쌔처레이트작전으로 대표되는 미공군의 집중적 차단작전은 사실상 '기계와 인간의 전투'에 다름없었다. 전선이 고착되고 전투 자체가 1차대전기의 참호전처럼 치열하게 전개되는 상황 속에서 후방으로부터의 원활한 보급은 전쟁의 사활을 가르는 문제가 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유엔군은 일본과 남한의 후방지역으로부터 보충병력, 물자, 무기를 어려움 없이 공급받을 수 있었지만, 중국군과 북한군은 미공군의 북한지역 폭격으로 인해 후방에서 또다른 치열한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후방의 북한주민들도 미공군의 폭격으로 인해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는데, 특히 야간 철도복구와 노무활동에 종사하기 위해 상당수가 밤낮을 바꿔 살아야 했다."(347)


13장 항공압력전략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북한지역 폭격피해에 대해 직접 보고했던 1952년 7월은 극동공군작전사에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7월의 북한지역 공습은 기존의 차단작전과는 상이한 목적하에 수행되었다. 극동공군은 차단작전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기존의 폭격전략에 큰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소위 '항공압력전략'(air pressure strategy)이라는 전략개념이 이 시기부터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항공압력전략은 공군력에 가해진 기존의 정치적·군사적 제한요소를 해제시키고, 오히려 공군력을 '정치적 압력수단'으로 직접 활용하는 새로운 개념의 공군전략이었다."(359) "(랜돌프와 메이오는 '항공압력전략'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철도와 노반을 가장 낮은 수위에 배치했다. 동시에 중요 목표물 리스트를 새로 작성했는데, 그 첫번째는 "보급품"(supplies)이 제시되었고, "후방의 병력과 인력"(rear area troops and manpower)과 "도시와 마을의 건물들"이 주요 타깃으로 추가되었다."(361)


"극동공군은 항공압력전략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공산측 지도부와 주민들에게 심리적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첫번째 타깃으로서 북한지역의 수력발전소에 주목했다. 수풍·부전·장진·허천·부영·금강산 등의 수력발전소들은 일본 최고 기술자들이 20년 이상의 공사기간을 통해 수립한 당대 최고 수준의 시설들이었다. 이들은 한반도 전력의 90퍼센트 이상을 생산해냈다." "1952년부터 미공군 정보보고서들은 북한의 산업시설들이 전국적으로 분산된 지하시설을 통해 재건되고 있다는 분석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극동공군은 지하갱도를 따라 재건된 북한 산업시설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동시에 산업시설 직접 파괴가 아닌 동력원 파괴가 좀더 효율적인 작전으로 부상했다. 동력이 없는 암흑 속에서 북한의 생산시설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었다. 수력발전소의 파괴는 어느새 극동공군의 시급한 해결과제로 부상하고 있었다."(363-4)


"1950년대 미공군 역사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미 제24사단장 윌리엄 딘의 묘사를 인용했다. "공산군의 마을 보급품 집적소(supply dumps)와 '예전에 건물들이 존재했던 흔적만이 남아 있는 눈 덮인 공터'에 대한 딘 장군의 묘사는 이 같은 보급품(supply), 병력(personnel), 통신센터(communication centers) 파괴의 실질적 영향력을 잘 보여준다." 딘은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폭격피해의 대상을 그저 "소도시"(towns)와 "마을주민"(villagers)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에 작성된 수많은 미 극동공군의 문서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전후 미공군은 여전히 북한의 도시와 농촌 폭격을 보급품 집적소, 병력, 통신센터에 대한 공격으로 묘사했다. 전쟁기에도 적극적으로 정당화되었던 미공군의 비인도적 군사작전에 대한 묘사가 전후 미군의 공식 역사에서 더욱 치밀하게 합리화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였다."(382-3)


맺음말 극단의 기억을 넘어 평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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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과 1950년대 -하 역비한국학연구총서 16
서중석 지음 / 역사비평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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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피해대중과 극우반공체제


1절 조봉암의 피해대중론과 농민


"조봉암은 제헌국회 초기부터 인민에 대한 권력의 횡포를 경계하였다. 그는 헌법제정시 경찰이 하고자 하면 어떤 구실로든지 양민을 구금할 수 있어 신체의 자유가 없는 상태이므로 그에 대한 제한은 오직 현행범에 국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봉암은 1952년 8·5정부통령선거에서 제시한 10가지 정견에서 네번째로 "억지로 반대파를 공산당으로 만들려는 죄악적인 파쟁을 근절할 것"을, 여섯번째로 "독재적 경향이 빚어내는 질식 상태에서 모든 국민을 해방시키고 관권남용을 방지함으로써 민폐를 일소하고 동시에 국민의 기본권리를 절대적으로 옹호할 것"을 내세웠다. 이 두 조항에서 조봉암이 강조하고자 한 것은 극우반공독재에 의하여 반대파가 공산당으로 몰리고 있고 인민이 질식상태에 처해 있다는 점이었다. 네번째도 그러하거니와, 여섯번째의 독재적 경향이라는 것도 우회적 표현일 뿐, 극우반동독재를 가리킨 것이었다."(535-6)


"〈피해대중은 단결하라〉는 구호는 평화통일 구호와 함께 1956년 5·15정부통령선거 결과가 말해주듯 극우반공세력을 궁지에 몰아넣었고, 더욱이 그들은 직접 피해대중을 양산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피해'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피해대중의 단결, 피해대중을 위한 정치의 주장은 평화통일론 다음으로 심한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공격에 대하여 진보당 내에서도 (구호의 재검토를 요청하는 식의) 동요가 있었다." "사상검사 오제도는 조봉암이 처형당하기 직전에 쓴 글에서, 진보당이 강령에서 매판자본을 비판하고 언론·출판의 자유를 제한한다고 지적한 것은 북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호소문과 같고, 조봉암이 1956년 11월 진보당 발당대회 개회사에서 진보당은 광범한 근로대중을 사회적 기반으로 하는 피해대중의 전위대라고 표현한 것은 북의 노동당 규약에서 조선로동당은 조선노동대중의 이익의 대표이며 옹호자라고 말한 것과 같다고 주장하였다."(539)


"농민들이 가장 시달린 것은 군관계나 경찰에 대한 부담이었다는 점을 특히 유의하여야 한다. 군·경 관계자나 관공리, 유력자들, 각종 형태의 백수건달들이 권력을 믿고 또는 권력과 결탁하여 사복을 채우거나 '생활비'를 조달한 방법이 정부수립 이후 기부금 또는 잡부금으로 통칭되었다는 점도 잡부금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예산상의 이유 못지않게 이 부분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잡부금의 징수대상이 주로 농민이라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권력을 많이 거머쥐었건 적게 가졌건 '힘센 자'들은 각종 위협에 떨고 있는 농민들을 주대상으로 하여 잡부금을 거두었다.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운 농민들이었지만, 무서운 세상을 목도하였던 그들은 살아야 했기 때문에 짜면 나오게 되어 있었다. 정약용의 '애절양(哀折陽)'은 조선후기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산골 대통령'(지서 주임을 가리키는 말) 앞에 농민은 무력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548)


2절 학살


# 학살 : 전투원 혹은 조직적으로 활동하는 총기 소지자가 비전투원 곧 민간인을 법적 절차를 밟지 않고 살해한 행위


1 인민군, 빨치산(무장대), 좌익단체 소속원에 의한 학살


"북한은 남한점령정책의 일환으로 반혁명세력의 숙청을 도모하였다." "시·군 내무서-면 분주소(分駐所)-리 자위대로 이어지는 정치보위국 산하 치안조직은 숙청의 핵심부서였다. 주요 대상자는 악덕 지주, 경찰, 공무원 등과 전향하여 보도연맹 간부로서 좌익탄압에 앞장섰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에 대한 숙청은 북의 법령을 기준으로 한 면단위 '인민재판'에 의하여 주로 이루어졌으나, '즉결처분'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후퇴시에는 정치보위부에서 처형을 결정하였고, 입산하여 제2전선을 조직한 후에는 당이 직접 판정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숙청과 학살의 자행은 경찰과 우익단체에 의하여 저질러졌던 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 생존한 보도연맹원이나 학살당한 보도연맹원 가족의 보복이 그러하였다. 인민군 남하 이후 보도연맹원과 그 가족들은 경찰은 물론 그 가족과 반장, 구장까지 인민재판에 부쳐 공개'처형'하였다."(562)


"경기도 고양군 금정굴 사건은 가장 널리 알려진 학살-보복학살의 악순환이 일어난 사건이다. 금정굴 양민 대량학살극은 9월 20일경 우익계 학생들이 만든 비밀결사인 태극단 동지회원 38명을 '처형'하면서 발생하였다. 이들은 내무서를 공격하려다 발각되었는데, 내무서원들은 총알을 아끼기 위하여 죽창으로 이들을 학살하였다고 한다. 곧 유엔군과 국군이 들어와 수복이 되자 이제는 치안대, 경찰, 태극단에서 대대적인 좌익색출에 나서 수백 명에서 1천 명에 이르는 주민들을 잡아다 9월 말부터 12월까지 금정굴에서 학살하였는데, 어린아이와 여자들이 상당수 있었고, 좌익가족이 많았던 것으로 유족들은 증언하였다. 금정굴 발굴에서 1995년 10월 6일 지하 15m 지점에 이를 때까지 유골수가 모두 1,500여 점에 이르렀고, 그 가운데는 온전한 형태의 두개골 150점이 포함되어 있어 희생자의 규모를 가늠하게 하였다."(566)


2 군·경찰·우익청년단체·우익인사에 의한 학살


1. 제주 4·3 학살

2. 여순사건 등에서의 학살

3. 전쟁 직후 형무소 수감자, 보도연맹원 등에 대한 학살

4. (인민군을 가장한) 나주경찰부대의 학살

5. 미군에 의한 학살

6. 수복 후 주민집단학살 (거창양민학살 등)


"놀라운 것은 (제주 4·3 학살과 더불어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간인 대량학살이라는) 엄청난 참극을 가져오게 한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단체가 법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국민보도연맹은 이승만이 억압적 조치와 관련하여 종종 사용하였던 대통령령에 근거한 것도 아니었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경부터 준비하여 6월 5일에 발족되었다. 오제도의 말을 빌면, 이것을 기획한 것은 오제도 등 사상계 검사였고, 이들이 내무부, 국방부, 법무부 등과 김준연 등 '사회지도자'들의 동의를 얻어 실시한 것이었다. 일제가 준전시통제에 들어가면서 1936년에 공포한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 1937년에 만든 '사상보호단체'인 대화숙(大和塾), 1938년에 출범한 시국대응전선(全線)사상보국연맹 등을 상기시키는, 수십만 명의 인권을 철저히 통제하는 조직을 법도 없이 만들었다는 것은 법 위에 군림하는 파시즘적 국가관에서 나온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602)


3절 학살의 원인과 책임


"주민집단학살에 대하여 죄의식을 갖지 않게 된 데는 누적된 관행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그것과 깊숙이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해방 후 경찰과 청년단원들한테 만연하였던 '테러의 습성화'와 (공권력이 테러를 방조·조장하는 차원을 넘어 테러와 구별되지 않는 '공권력의 테러화'를) 들 수 있다. 여운형은 해방된 지 3일밖에 안 된 8월 18일에 해방의 정치공간을 특징짓는 테러를 당하였고, 그 후 십수 차례의 테러를 당하다가 비명에 갔는데, 규모가 크고 지속적인 테러는 1945년 12월 29일 반탁투쟁의 와중에서 좌익계의 대변지인 조선인민보사에 대하여 자행되면서부터 있게 되었다. 초기 반탁투쟁기에 테러가 얼마나 심각하였는가는 1946년 1월 7일 한민당, 국민당, 인민당, 공산당 등 4당의 민족문제 해결을 위한 중대한 합의사항 두 가지 중 하나로 이 문서 후단에 쓰여 있는, 테러행위를 절대 반대하고 테러단체가 자발적으로 해산할 것을 요망한다는 것에 잘 집약되어 있다."(656)


"한민당과 무소속 의원들이 여순사건 발생에 대하여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담화를 내고 내각을 개조하라고 요구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하여 정부가 책임지라는 것은 어불성설일 뿐더러 공산당의 편을 드는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이승만의 정신상태와 11월 5일 발표한 담화의 정신상태를 비교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어린아이, 특히 여학생이 여수에서 어느 정도 좌익에 가담하였는지는 증언에 따라 엇갈리지만, 설령 무기류를 들고 좌익편을 들었다고 하여, 인정(仁政)을 중시하는 동양의 전통을 무시하더라도, 왜 어린아이 또는 여중생이 가담하였는지는 불문에 부치더라도, 노대통령으로서 어린아이, 여중생들에 대하여 타이르는 대신 남녀·아동까지도 일일이 조사하여 불순분자는 제거하라고 지시할 수가 있을까. 이러한 지시가 김종원 같은 장교들한테 내려갔을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인지 이승만은 생각지 않았을까. 한국인은 무서운 사람을 대통령으로 두고 있었다."(668)


# 담화 내용 : 〈그 중에 제일 놀랍고 참혹한 것은 어린아이들이 앞잡아기 되어 총과 다른 군기(軍器)를 가지고, 살인, 충화(衝火)하는 데 여학생들이 심악(甚惡)하게 한 것과 ····· 남녀 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


"한국전쟁기 학살과 관련해서 먼저 중요시해야 할 것은 전쟁 초기 패전의 문제이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외쳤으면서도 전쟁에 제대로 대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선 큰 책임을 저야 한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미국의 의심을 사 절실히 군비증강이 필요한 시기에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에서 거의 경찰력이나 다름없는 군대를 만들도록 제한하게 하였다. 이승만은 북진통일론에 걸맞게 군대를 정비하지 않았다.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낙루장관' '지당장관'으로 잘 알려진 사람으로 김구 살해의 배후로 자주 지목되어온 인물인데, 국방에 대해서는 아주 무능하였다. 총참모장 채병덕 또한 김구 암살사건, 국회프락치사건 등에 등장하는 인물로 이승만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였지만, 군 지휘에 무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휘체계가 문란하였고, 군대훈련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으며, 병사들은 부패 속에 입을 것, 먹을 것이 부족하였고, 매질과 기합에 시달려 사기가 저상되어 있었다."(668-70)


"주민집단학살이 일어날 수 있는 소인은 미군정에 의하여 마련되었다." "미군정은 친일경찰을 이용하여 미군정에 비판적이거나 미군정과 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여러 단체 또는 정치세력을 억압하였다. 그리고 극우적 정치세력은 이들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승만의 경찰통치는 이러한 미군정의 경찰에 의한 강권·억압통치를 그 인원과 함께 그대로 상속받은 것이었다. 커밍스가 이승만의 억압통치는 한·미 공동작품이었다고 말한 것은 적절한 평이었다." "미군정은 (친일경찰의 억압과 횡포가 한국인들의 거센 원성과 각종 소요를 유발한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군·경이 포함된 친일파를 부분적으로라도 제거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심지어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을 한민당·이승만 측의 반대를 무릅쓰고 4개월 만에 간신히 통과시켰을 때, 군정장관 딘 소장은 이것을 공포하기를 거부하였다."(692-4)


"미군정이 1945년 9월 한국에 설치되자마자 친일파, 그 중에서도 악질 친일경찰을 대거 등용하여 활용한 것도, 극우청년단체의 테러를 묵인하고 방조한 것도, 제주도에서의 미군 최고 지휘관인 브라운 대령이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라고 말하고, 미군이 제주도에서 초토화작전을 지시하고 방조한 것도, 유럽전선 예컨대 프랑스, 독일이나 이탈리아전선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독일이나 이탈리에서 나치나 파시스트를 연합군의 보조로서 이용할 수 있다는 것도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미국정부가 제주도 주민집단학살, 한국전쟁기의 주민집단학살에 대하여 대처하는 데 가장 중요시해야 할 것은 미군·미군정·미국정부 일부 관계자들의 이와 같은 비인간적, 반문명적 사고이다. 그것은 미국 등 연합국이 뉘른베르크나 도쿄 재판에서 보여주었던 정신적 자세를 한국에서의 주민집단학살에 대해서도 명백히 보여줄 것을 요구한다."(709-10)


4절 피해대중과 극우반공체제의 형성


"극우반공체제와 극우반공이데올로기는 학살, 테러, 감옥, 고문 격리로부터 산출된 공포의 산물이었다. 폴 뢰쾨르는 "결코 망각해서는 안될 사건들에는 공포가 결부되어 있다"라고 말하였지만, 그 말은 아우슈비츠의 유태인수용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학살당한 사람들의 가족과 그것을 목도하고 들은 바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경남 거제도 앞 지심도에서 총알을 퍼부었는데도, 경찰이 쏜 총알에 보도연맹원 3~4명씩을 묶었던 철사가 끊어져 살아남은 이학근은 항상 입버릇처럼 "겪지 않은 사람은 그 공포를 모른다"고 되뇌었다고 한다. 그러한 공포는 학살당하였던 모든 사람들이 가졌던 것일 뿐만 아니라, 그들 가족과 친지의 것이기도 하며, 그 현장 부근에 있었거나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의 것이기도 하다. 수십 년간 언젠까지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후자를 '기억의 공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713)


"피해의식은 사회의식이나 가치관을 굴절시키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심한 역전현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부모가 학살당하는 등 극우반공세력 또는 극우반공체제로부터 심한 피해를 입은 사람들 중에는 모순되게도 더 극단적으로 극우적 행태를 보이고, 극우반공세력의 일원이 되고자 하며, 극우반공체제 수호에 앞장서기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717) "'기억의 공포'를 새롭게 해주고, 억울하고 불법적인 학살행위의 피해자에게 오히려 공포가 따라다니는 것을 실감케 하는 것이 연좌제였다." "극우반공체제하에서 한 사람이라도 '좌경세력'이나 '불온분자'가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으로 지목되면 집안에서건 마을에서건 따돌림을 받고 격리되어야 했다. 경남 남해의 보도연맹원들은 한밤중이건 농사일이 바쁜 대낮이건 지서에서 소집하면 수시로 달려가야 하였으나, 누구 하나 불평하거나 반항하지 않았다는 증언이 실려 있다. 불평 그 자체가 바로 빨갱이임을 확인시켜주는 분위기 때문이었다."(719)


"국가보안법이 경직되게 운용되던 극우반공체제하에서는 일종의 국가보안법체제라고 할 만한 현상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근현대사에 대하여 무지를 강요한 일이었다. 국가보안법체제에서는 북에 대해 사실을 아는 것이 범죄가 될 수 있었다."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에서 이적표현물이라는 조항, 곧 북을 이롭게 한다는 조항을 확대해석하면 걸리지 않는 경우가 드물었다. 가지고 있는 사회·인문과학서적도 그러하였고, 정부 비판도 그러하였다. 과거의 기록물을 지니고 있는 것도, 해방 전후사를 증언하는 것도 그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친일파나 민족해방운동에 관한 연구도 제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6월민주항쟁 이전에 현대사는 물론, 근대사 연구가 제대로 안된 이유의 하나도 여기에 있었고, 다른 이유들도 대개 그것과 연관되어 있었다. 한국인은 자신의 근현대사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정체성을 상실한 인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725)


5절 부역자 문제, 인민군 점령 및 군·경에 의한 피해와 극우반공체제


"전쟁 전이나 그 후도 성격이 비슷한 면이 많았지만, 전쟁이 절호의 기회나 되는 것처럼 전쟁기에 극우세력의 권력남용과 정경유착에 의한 재산·자산 축적은 부분적 현상을 넘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한국형 자본주의의 한 단면으로 극우의 재산축적 메커니즘이었다. 사상검사였던 엄상섭 의원이 경찰이 치안비용 명목으로 주민의 재산갹출을 강요하여 불응하면 빨갱이라는 죄명을 붙여서 함부로 체포, 감금한다고 지적한 것도 하급단위에서 그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김광준 의원은 좌익계 가족이라 해서 토지 등 재산을 빼앗고, 토지이전 등기에 응하지 않으면 좌익이라 해서 구타하고 죽이는 일도 있는데, 모 경찰서장은 그것이 위법행위임을 확신하지만 적법적으로 처단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적법적으로 처리하면 서장이 빨갱이라는 말을 듣게 되고 또 자리를 유지해나가기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었다."(760-1)


"이승만·자유당 정권의 테러가 반은 어용 관제단체, 깡패 등에 의존하여 거칠게 자행되었고, 거친 동원체제였는 데 비해, 군부의 정보장교들이 주도한 정보 정권이 박정희 정권에 와서 테러는 막강한 조직들에 의하여 관리되고 행사되어 훨씬 더 제도화·조직화되었으며, 그만큼 세련되고 빈틈이 없었다. 국가의 동원력 또한 그러하였다. 행정국가 또는 과대성장국가가 주도한 극우반공체제는 이승만 정권 시기보다 더욱 잘 작동되었다." "이 시기 극우반공체제는 유신체제의 등장과 함께 갑자기 강화된 '사상범'의 전향 강요, 재일교포유학생간첩단사건 등과 같은 류의 '간첩단'사건, 긴급조치, 사회안전법의 역할도 유의하여야겠지만, 더 중요하게는 전체주의적인 방식으로 반공교육이 사회와 교육기관 등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 시기 반공교육은 북진통일운동 이래의 전통을 이어받아 감성에 강한 자극을 주는 정의적(情意的) 충동이 중심을 이루었다."(805-6)


"학살과 관련된 양 극단의 대조적인 현상(적개심 고취와 공포의 침묵)은 박정희 사적 권력의 영속, 곧 유신체제 영속을 위한 기제로 작동되었다." "박정희 유신체제에서 김일성 가짜설이 한 예가 될 수 있겠지만, 무지와 왜곡의 집적화·체계화 현상은 한층 뚜렷해졌다. 해방 전후에 부모가 무슨 일을 하였으며 어떤 이유로 학살당하였는지 자식조차 모르는 사회가 되었고, 왜 자신이 극우적 반공이데올로기의 맹신자가 되었는지 반문해볼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조봉암이 그랬던 것처럼 희생자-피해대중의 눈으로 진실의 역사를 보려고 한다든가 희생자-피해대중과 연대를 가지려고 하는 것은, 현기영의 표현을 빌린다면 소등해버린 자정 이후의 먹칠 같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니 그것은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낯선 이질의 세계였다. 한국인은 현대 역사가 실종된 역사상실의 시대에 잡초처럼 모래알같이 그렇게 살았다. 그만큼 자아로부터 소외된 불구적이고 분열된 삶이었다."(8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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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과 1950년대 -상 역비한국학연구총서 15
서중석 지음 / 역사비평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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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조봉암의 정당조직 활동과 대통령선거


1절 한국전쟁기 정당조직 활동과 제2대 정부통령 선거


"이 시기(1951년경) 조봉암의 신당 구상은 상당히 규모가 있는 것이었다. 조직면으로는 그가 중시한 원내의원들도 상당수를 조직대상으로 하여 끌어들이는 작업을 벌였지만, 무엇보다도 농민과 노동자층을 당의 조직으로 끌어들이려 시도한 것이 주목된다. 신당을 조직하는 데 농민이 여전히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1950년대 초반에 전국적인 농민조직으로 농민회의를 출범시켰던 것이다. 또 조봉암의 '자유사회당 비밀서클'과 관련 있는 인사들 가운데는 중도파나 혁신계, 족청계 인사들도 있었지만, 노동계와 농민단체 간부들이 적지 않았다. 노동자, 농민 등 민중을 정당조직으로 끌어들이려 시도한 것은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 등 좌익정당을 제외하고는 처음이었다. 이승만의 자유당이 노동자 농민정당을 표방하기도 하였지만, 조봉암 신당의 그것과는 성격이 달랐다." "조봉암의 신당은 조직면에서도, 표방한 논리에서도 짜임새가 갖추어져갔지만, 이승만의 탄압으로 신당 창당은 불가능해졌다."(45-6)


# '대남간첩단 사건'을 조작하여 신당준비사무국 책임자 이영근을 비롯한 실무진들을 옭아매는 방식으로 탄압


"조봉암이 (1952년 제2대) 대통령후보 출마를 선언하였을 때 이시영과 신흥우도 후보 출마를 포명하였다. 민국당 측에서는 조봉암의 단독대결이 야측을 대표하게 만들고, 조봉암을 키워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조봉암이 야측에서 나오는 후보가 없어서 자신이 나선 것이라면, 이시영이 대통령후보로 나섰을 때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봉암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조봉암은 처음부터 대통령에 출마할 의사가 있었던 것이다. 제3세력으로서 크게 제약을 받아오던 조봉암이 그러한 기회를 중시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러나 이승만의 단일후보 소망을 깬 것만 해도 용서받기 어려웠을 터인데, 극우반공체제 하에서 이승만 같은 사람과 대결하여 대중의 지지를 받으려는 의지를 가졌다는 것은 정치생명, 나아가 자연인으로서의 생명마저 위협받을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조봉암은 돌이키기 힘들 길을 선택하였다. 그의 정치이념과 야망이 그 길로 가게끔 하였다."(58-9)


"김성주는 1953년 6월 25일 헌병총사령부(헌총)에 연행되어, 9월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김성주의 죄목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조봉암 등과 사회민주당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정치제도로서는 구미식을 택하나 경제적으로는 자유경제체제를 버리고 계획경제를 수립하려 한 것이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하는 집단을 구성하였다는 것이다. 두 번째 죄목은 1952년 8·15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대통령을 살해할 것을 모의하였다는 더욱 터무니없는 내용이었다." "나중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4월 16일 김진호 중령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중인 김성주를 헌총 취조시로 끌고가 고문을 하다 사망하자 헌총 취조관들에 의하여 비밀리에 암매장되었다. 김성주는 19세 때 중국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였고, 1946년에는 평안청년회와 그 후신인 서북청년회 조직에 참여하여 극우반공활동을 벌인 인물이다." "그가 비명횡사한 것은 조봉암과의 관련 때문이었다."(77-9)


2절 범야신당운동과 진보당추진위원회


"1954년 11월 27일에 표결된 '사사오입' 개헌안은 이승만 권력의 절대화를 초래하였다. 그와 함께 도시화 현상 속에서 늘어나는 도시민, 그 중에서도 교육받은 층은 이승만 정부의 실정에 사사오입개헌을 연결시켜 생각하였고, 그것은 서울 등 대도시에서 강한 반이승만·반자유당 정서를 증폭시켰다. 또한 이승만의 무소불위의 행위에 위협을 느낀 야당계 의원들은 대동단결된 거대 신당을 만들기 위해 결집하였고, 이로 인하여 은퇴중인 조봉암을 다시 정치의 장으로 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그토록 만들려던 신당이 가능하게 되는 역설을 가져왔다. 사사오입으로 개헌안이 통과되었다고 번복 주장된 지 2, 3일만에 야당의원들은 호헌동지회를 구성하였고, 호헌동지회에서는 신당을 강력히 추진하기로 하였다."(82) "후에 이 신당 결성의 주류가 되는 보수세력은 민주당을 조직하였고, 그것의 대항세력이 되는 대동혁신세력의 일부가 진보당 결성에 참여하였다."(86)


# 보수파가 조봉암 합류를 결사반대하면서 통합 신당 무산


"호헌동지회가 분열된 원인은 헤게모니 문제, 이데올로기 문제, 오랫동안 쌓였던 감정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당의 주도권 문제에 민국당 내 극우세력은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부산정치파동을 겪으며, 그리고 휴전협정 체결시의 포로석방 문제에 대한 조병옥의 이승만 비판 등으로 민국당 내 극우세력은 계속 수세에 몰려 당의 실권을 신익희 등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이러한 당내의 조류에다 장면을 중심으로 한 원내자유당 흥사단계가 들어오고, 호헌동지회 내 민주대동파가 조봉암과 함께 들어오면, 조병옥, 김준연 등의 한민당 정통파는 당의 운영에서 밀려날 가능성이 많았다. 민국당은 계속 위축되어 신당이라는 인기있는 새 말로 갈아타야만 정치생명이 살아날 수 있었지만, 새 당의 영도권에서 밀려나서는 안되었다. 당의 주도권 문제는 다음해인 1956년 정부통령 선거 후보문제와 직결되어 있었다."(96-7)


3절 1956년 5·15 정부통령 선거


"신익희 후보의 사거 다음날 민주당은 "다시 대통령후보를 지명하여 싸우고 싶으나 법적 불비로 그 길이 두절되었고, 본당 이외의 대통령후보자는 그 정치적 행상이나 노선으로 보아 그 어느 편도 지지할 수 없으므로, 부득이 정권교체로서 우리 당의 정강정책을 구현하려던 초지의 관철은 후일로 미룬다"고 성명하였다." "민주당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익희 지지표가 조봉암 쪽에 가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나왔다. 5월 9일 김준연은 "대통령후보자인 조봉암 씨를 지지할 수는 도저히 없으므로 이승만 박사를 지지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라고 천명하였다." "같은 날인 5월 10일 장면 부통령후보는 "대통령후보 없이 부통령후보만이 선거전에 임하는 것이 명분상 불합리한 일이라고 일부에서는 말하나, 우리나라의 헌법상 부통령의 직위는 대통령을 보필하는 것만이 그 임무의 전부가 아닌 만큼 부통령후보만이 선거전에 임하는 것도 아무런 모순이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피력하였다."(126-8)


"신익희가 5월 5일 사거하였으므로, 진보당은 그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여야 했으나, 5월 6일경부터 거의 선거운동을 할 수가 없었다. 중앙 간부진이 각도 유세반을 편성하여 마지막 유세를 하고 선전유인물을 배포하려 하였지만, 선거방해로 할 수가 없었다. 충남반의 박준길, 강원반의 이명하 등은 현지에 내려간 직후 테러를 당하고 유인물을 빼앗겼으며, 경남반의 전세룡은 의령에서 경찰서장실로 연행되어 경고를 받고 쭃겨왔다. 진보당 경북도당 선전부장 이병희는 5월 6일 3명의 괴한에게 납치되어 "선거자금 출처가 어디냐"며 고문, 폭행을 당하여 실신하였다. 위기를 감지한 조봉암은 11일경부터 잠적하여 일체 소재가 밝혀지지 않았다가 5월 17일 선거결과가 확정될 무렵에야 진보당 사무실에 나타났다. 한 신문은 이 무렵 진보당 당본부가 선거운동을 멈춘 것 같았고, 간부들 얼굴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한적한 분위기였다고 보도하였다."(146)


"5·15선거의 부정에 대하여 가장 충격적인 증언을 한 사람은 4년 후에 치러진 3·15정부통령선거의 주무장관이었던 최인규이다." "최인규의 자서전에 따르면, 강원도에서 이승만과 이기붕의 표가 90% 이상 나온 것으로 발표되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고, 유권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군인들의 70% 이상이 조봉암한테 투표하였다는 것이다." "1960년 3·15부정선거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면이 있다. 5·15정부통령선거 이후 이승만 정권이 잇달아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고 3·15선거에서 이승만은 그의 소망대로 단일후보가 되었으며, 정국이 경색되어 장면 후보의 부통령 재선은 아주 어려웠는데도 상식을 초월한 부정선거가 치러진 것이다. 이승만 자존심의 심각한 상처, 장면이 부통령이 됨으로써 맛보았던 자유당의 낭패감과 위기의식, 5·15선거가 총체적으로 보여준 민심 또는 '민의', 이승만과 자유당 스스로가 느꼈던 비도덕성과 열패감은 모두 다 5·15정부통령선거와 연결되어 있다."(153-4)


"1956년 8월 8일에 실시된 시·읍·면의회 의원선거와 시·읍·면장 선거, 8월 13일에 실시된 서울특별시 및 도의회 의원선거는 5·15선거 이후 치러진 첫번째 선거였는데, 부산·경남지방에서는 대부분의 민주당원들이 시의원 등에 입후보 등록조차 못할 정도로, "관념적으로 생각될 수 있는 온갖 방법이 천하의 이목을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공공연히 대담하게 자행"되었다. 9월 28일에는 부통령에 취임한 지 겨우 한 달이 넘은 장면에게 두 가지 사건이 발생하였다. 국회에서는 자유당에 의하여 한편으로는 부통령의 계승권을 말살하기 위한 개헌방안이 모색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對장부통령 경고안이 발동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날 (당분간 몸조심해야 할 것이라는 조봉암의 경고대로) 장면 부통령은 민주당전당대회에서 피격당하였다." "총을 쏜 범인의 배후에는 자유당 간부와 이익흥 내무부장관, 김종원 치안국장이 있었고, 김종원은 법정구속되었다."(165-6)


4절 진보당 창당


# 1956년 11월 10일 진보당 발당대회 개최


"진보당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당국에서는 갖가지 방법으로 탄압하였고 잔혹한 테러를 사주하거나 방조하였다. 진보당의 조직활동은 그야말로 칼날 위를 걷는 형극의 길이었다. 진보당에 대한 테러나 탄압에 민주당은 침묵을 지켰고, 언론도 조금밖에 취급하지 않았다.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공공적 사회적 조직이나 기구가 진보당한테는 없었다. 진보당은 창당되고 얼마간은 사무실조차 얻기가 어려웠다."(199) "진보당과 당원들에 대한 탄압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이 극악했는데, 백주에 테러, 납치, 감금, 매수뿐만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생존의 터전을 짓밟아버리기 일쑤였다. 신문광고란에는 거의 매일같이 강압과 조작에 의한 진보당 탈당성명이 끊일 새 없었다. 전남도당 결성대회에 즈음하여 일어난 심야의 가정침입 테러를 알게 되었을 때, 그래도 진보당원으로 활동하겠다는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확고한 신념과 대단한 용기, 때로는 가족 전체의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지 않았을까."(203)


"자유당, 민주당의 선거법 협상도 조봉암-진보당의 활동을 옥죄었다. 이른바 협상선거법은 선거공영제를 채택한다는 구실 밑에 선거운동을 전반적으로 제한하였다." "조병옥과 민주당이 자신을 지켜주고 키워준 『동아일보』 등 언론으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야당에게 불리한 선거법을 자유당과 합작하여 통과시킨 데는 이유가 있었다. 투개표에서 참관인 권한을 확대하고 야당도 비율에 따라 선거위원회 위원으로 참가하게 한 것은 민주당에게는 유리하였지만, 군소정당에게는 불리하였다. 선거운동 관계 부분은 권력을 업은 자유당에게 무제한의 자유를 준 반면, 민주당에게도 불리하였지만 군소정당에게는 특히 악랄한 규정이었다. 이 선거법은 진보당 등 혁신계를 봉쇄하는 데, 그리고 무소속 당선을 막는 데 유리하게 되어있었다. 급속히 민심이 이반되어가고 있는 자유당을 부축해주어 기존의 극우정당 일변도로 의회를 편성하려는 민주당의 야합이 개재되어 있었던 것이다."(204-5)


"1958년 1월 초순 치안국 자문위원 홍원일이 사태의 심각함을 직감하고 권대복과 함께 조봉암을 찾아가 해외망명을 권하였다. 조봉암은 자신도 진보당 탄압 정보를 들었지만, 혼자 편하자고 망명이나 도주를 할 수는 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두 사람은 이기붕이 출마할 서대문구에 입후보하겠다는 성명을 신문에 내라고 권유하였다. 이기붕 출마 에정지구에 입후보하겠다고 하면 노골적인 탄압을 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간부 중 일부가 그 문제는 상무위원회에서 결정할 일이라고 해서 상무위원회 소집절차를 밟고 있었는데, 1월 12일 새벽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일제 검거가 있었다. 조봉암은 이때 은신중이었는데, 동지들의 체포소식에 도망을 가면 무고한 혐의가 사실화될 것이고 애꿎은 동지들만 희생될 것이라고 말하며, 1월 13일 오전에 전화를 걸어 자진출두하겠다고 전하였다. 진보당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206)


"진보당에 대한 여론재판 또는 언론 테러는 사건의 규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근민당 재건사건에서보다 훨씬 길고 또 심하였다. 먼저 1958년 1월 12일 새벽 진보당 간부들을 일제히 검거하기 전날인 1월 11일, 서울지검 조인구 검사는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을 북괴의 남침 구호로 단정하여 엄단할 방침이라고 발표하였다. 이어서 언론은 조봉암이 북괴로부터 공작금조의 인삼이 든 상자를 받을 때 그 속에 든 괴뢰의 지령문을 보고 불태워버렸다느니, 조봉암 집 비밀장소에서 불온문건을 찾아냈다느니, 김일성 지령 실천을 위한 7인위원회를 구성한 사실을 장건상, 김성숙 등이 증언하였고, 조봉암도 간첩과 접선하여 야합한 사실을 시인하였다느니, 또 박정호, 김경태, 정우갑 등 14명의 간첩이 진보당 확대지령을 받고 남파되어 조봉암과 직접 협의를 하였다느니, 박정호, 장건상도 진보당의 비밀당원임이 드러났다느니 등등으로 연일 보도하였다."(208)


1958년 7월 2일 유병진 재판장은 불법무기 소지 혐의 등으로 조봉암에게 5년을, 나머지 진보당 간부들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2심 재판은 1·4후퇴 때 월남하여 대검찰청 오제도 검사 등의 주선으로 판사로 복직된 김용진이 맡았다. 10월 25일 재판장은 양명산이 1심 판결에서 고개를 숙이고 인정하였던 것을 2심 재판에서 대부분 부인하였는데도 1심 재판에서의 진술을 인정하여 조봉암과 양명산에게 사형, 다른 진보당 간부들에게 3년 내지 2년 징역을 선고하였다. 재판장은 앙명산 피고인이 2심에서 부인한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고 검찰의 기소사실을 모두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화통일 자체가 문제시되었고, 불고불리(不告不理)의 원칙까지도 무시하고 공소사실에도 없는 '혁신정치의 실현' '수탈 없는 경제체제' 등도 유죄의 증거로 내세웠다." "1959년 2월 27일, 대법원(주심 김갑수 대법관)은 조봉암과 양명산에게 사형, 다른 진보당 주요 간부들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213-5)


"기본적으로 미국은 한국이 극우반공주의자들의 통치를 받는 것에 이의를 갖고 있지 않았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냉전체제가 흔들리지 않기를 바랐는데, 조봉암의 정치이념이나 정책은 그것을 교란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경제정책에서도 미국의 자유주의와 대립되었으며, 민족자주의 지향은 미국의 대한정책과 충돌할 수 있었다." "대법원 판결 직후 조봉암은 가족과 면회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법이 그런 모양이니 별 수가 있느냐. 길가던 사람도 차에 치어 죽기도 하고, 침실에서 자다가 자는 듯이 죽는 사람도 있는데 60이 된 나를 처단해야만 되겠다니 이제 별 수가 있겠느냐. 과히 상심하지는 말아라." 재심이 청구되었으나, 상고심을 맡았던 재판부가 다시 재심을 맡았고, 1959년 7월 30일에 기각되었다. 변호인들이 다시 재심을 청구하려고 준비중인 7월 31일 오전, 4월혁명을 8, 9개월 앞둔 시점에 조봉암은 전격적으로 처형되었다. 그의 나이 60이었다."(218)


# 동아시아 냉전 체제를 교란할 수 있는 조봉암의 정치이념이나 경제정책 그리고 민족자주 지향에 대한 우려


2장 조봉암-진보당의 평화통일론


3장 사회민주주의와 1950년대


2절 조봉암-진보당과 사회민주주의


"조봉암과 진보당 관련자료는 한결같이 소련을 비난하고 미국을 옹호하였다. 특히 조봉암이 1954년에 쓴 「우리의 당면과업」에서나 1955년에 쓴 「내가 본 내외정국」에서 더욱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졌던바, 그것은 그 이후의 것과 약간 대비를 이룬다. 그리고 그러한 반소 친미의 입장은 진보당 강령에서도 확연하였다. 「우리의 당면과업」과 「내가 본 내외정국」은 후자가 더욱 심하지만 냉전적 사고가 적잖이 들어있다. 전자에서 조봉암은 "미국의 존재는 20세기 자유주의자들의 희망의 원천이 되고 있으나, 크레믈린의 세계침략의 야망은 날이 갈수록 도를 가할 것이며, 그 자들의 평화의 '탈'은 내부정리와 전쟁준비를 위한 시간 쟁취에 불과한 것"으로 일축하였고, 나아가 후자에서는 미국을 "세계 자유진영의 모범적인 기사로서····· 공산침략을 격파하고 공산당 모략을 분쇄하고 공산권 내의 인민들을 해방시킬 세계 자유진영의 선봉대"로 위치지었다."(368)


"조봉암은 스탈린과 그의 일당이 북한괴뢰로 하여금 불의의 침략전쟁을 도발시켰고, 그리하여 크레믈린의 충복인 북한 공산도당은 좌익적인 동족상잔의 전쟁을 야기하여 그들의 괴뢰성과 민족반역성을 완전히 폭로하였다고 북의 공산주의자들을 단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진보세력으로 하여금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걷게 하였고, 미국과의 긴밀한 유대를 필요로 한다고 지적하였다. 곧 우리 민족은 해방 후 공산치하에서 쓰라린 생활경험과 처참한 전쟁의 심각한 체험과 무능 부패한 사이비 민주정치하에서의 곤궁한 생활경험을 통하여 진정한 민주주의 곧 사회적 민주주의에 입각하여야 한다는 하나의 새로운 정치적 사상적 결론 내지 확신에 도달하였고, 이 강토에다 민주적 평화적으로 사회적 복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유엔 및 반공 서방세계의 영도자인 우리의 위대한 맹방 미국과 긴밀히 제휴 협력하여 국제공산주의의 무력적 위협을 배제하여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369)


# 그 외에도 제3세계가 주도하는 반둥회의에서 반식민주의와 비동맹주의 주창


3절 사회민주주의 경제정책


"이승만과 그 추종자들은 진보세력뿐만 아니라 극우보수세력도 공산당으로 모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김성수, 김준연, 조병옥 등 민국당 간부들을 군과 경찰에 잠입하였다는 조작된 남파간첩과 연결지으려던 1950년 4월에 있은 대한정치공작대사건은 너무나 치졸한 작품이었다. 치졸성은 1952년 5, 6월에 발표된, 아이러니컬하게도 대한정치공작대사건의 하수인들을 검사로서 취조하였고, 장면 국무총리의 비서실장이었던 선우종원 등을 대한민국정부혁신 전국지도위원회라는 국제공산당사건 등으로 몬 것이나, 같은 시기 그와 유사한 사건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민국당 간부 못지않게 극우반공주의자로서 이승만 일민주의의 이데올로그였던 안호상도 자유당 내에서의 족청계 숙청의 여파로 1954년 6월 부산 민병대훈련 강조기간 기념대회 축사에서 대한민국이 부패하였다는 등의 연설을 한 것이 빌미가 되어 국가보안법 피의자가 되어 재판을 받았다."(448-9)


4절 결핍성 국가에 대한 대안-근대적 국가의 형성을 위하여


조봉암은 '봉건성'을 '전근대적인 것' '비정상적인 것' '비민주적인 것'이라는 의미로 파악한다. "해방 후 봉건성이 온존한 것은 식민잔재 또는 파행성으로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제 식민통치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일제는 한국인의 민족의식·자주독립의식, 그것과 표리관계에 있는 근대적 인간의식, 시민의식을 갖지 못하게 하거나 말살하기 위하여 동화정책·황국식민화정책을 군국주의 파시즘 주입과 병행하여 강행하였다. 그와 함께 향교나 명륜회, 그 밖에 봉건적 유지층의 보호 육성책 등을 통하여 충효사상, 숭조사상, 경로사상 등 봉건적 덕목을 장려하였고, 식민통치와 대립되지 않는 한 봉건적 인습이나 인간관계를 개혁하려 하지 않았다. 수신 교과서는 물론 역사 등의 각종 교과서도 시기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봉건 덕목과 군국주의 덕목을 주입시키는 데 비중을 두었다."(459)


"일제의 식민통치가 한국을 근대적으로 발전시킬 인적 요소를 쇠잔시켰다는 점도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인은 일제강점하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사람조차 적었고, 중등교육을 받은 숫자는 한국에 와 있는 일본인들의 중등교육 이수자 숫자와 비슷하였다.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하여 한국에 있었던 몇 안되는 공립전문학교에 한국인은 20~30%밖에 입학할 수 없었다. 한국인은 행정면에서건 전문기술자로서건 간부직 지휘자급에 있었던 자들이 소수였고, 친일파들은 근대적 시민의식, 인간의식이 결여되어 있어서, 해방 후 한국을 근대 사회로 변화시키는 데 제약이 되거나 역작용을 하였다. 반면 뛰어난 품성과 지성을 갖춘 사람들의 다수는 사회운동 또는 민족해방운동에 뛰어들었던바, 인적 자원이라는 면과 연결지어 생각할 근대 사회로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전문자질을 갖추는 데 어려운 면이 없지 않았다."(460)


"경제의 파행성 못지않게 근대적 국가를 갖추는 데 심각한 어려움은 정치와 행정에도 있었다. 조봉암과 진보당은 기회 있을 때마다 관기확립과 행정빈곤의 해결을 주장하였는데, 그 이후도 비슷하였지만 1950년대에 한국의 행정은 한 사람을 정점에 두고 관기가 흐트러진 채 부패, 무능, 직권남용, 아부, 정실이 상호 사슬을 이룬 사인(私人) 대 사인의 관계로 처리되는 거대한 사적 권력체계였다. 한국의 관료는 전문직 관리계층으로 조직화되기 이전의 상태에서 집권세력의 수족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그와 표리관계에 있는 것이 봉건적 관습의 잔존이라고도 볼 수 있는 관존민비였다. 조봉암이 말한 대로, 관존민비 사상은 실제 면에서 강력히 작동되고 있어 대민봉사를 슬로건으로 내세웠지만 관료들은 지배계급으로 군림하며 어느 곳에서나 오만하고 존대한 태도를 보였고, 일반서민들은 관료를 두려워하였다."(468)


"공무원 사회에 관존민비, 부정부패, 직권남용, 아부, 무능, 정실이 만연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그 중의 하나는 이종극이 지적한바 인플레에 의한 물가고등과 박봉에 있었다. 특히 경찰직과 같이 민원에 직결된 하급직책은 봉급이 아주 낮아 부정한 짓을 하라고 조장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진보당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공무원, 특히 경찰관수를 대폭 줄이고 예산낭비를 줄여 공무원의 생활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하였고, 자유당과 민주당에서도 그와 비슷한 약속을 하였다. 인허가에서 원조물자, 원조달러의 배분, 융자, 귀속재산 불하 등에 관리의 자의가 개재하기 쉽다는 것도 이와 같은 풍토를 만드는 데 기여하였다. 이것 또한 진보당과 민주당에서는 계속 문제점으로 지적하였고, 자신들이 정권을 잡으면 유해무익한 간섭·허가제도를 일소하겠다고 다짐하였다. 인허가제 등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것이지만, 과대한 중앙집권화와 관료조직의 비대화도 그와 같은 풍토를 조성하였다."(472)


5절 사회민주주의의 계급적 기반의 제약


"진보당에 노동운동 관계자들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조봉암이 말한 바대로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대한노총은 대체로 극우 성향이 강한 데다가 정부수립 후에는 이승만의 영향하에 놓였고, 1952년 조선방직쟁의 이후에는 더욱 어용화되었으며, 자유당의 '기간조직'이자 외곽조직에 지나지 않았다. 조봉암의 진보당에는 민련 등 중도우파가 꽤 많이 들어왔지만, 대한노총 내 중도우파 또는 혁신파 간부들이 전쟁 때 의문의 죽음을 하거나 실종된 것도 진보당에 노동운동 관계자의 참여가 적은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진보당이 진보당 정책 중 '노동문제'에서 노동운동이 부패한 관료와 자본가들에 의해 농단되고 있고, 노동조합이 그들의 어용단체화하고 있는 현상을 시급히 개선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노동문제에 대하여 원론적인 주장을 한 것에 머문 것은 기본적으로 진보당이 노동운동이나 노동조직에 관여할 수 있는 통로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기 때문이었다."(489)


# 농민조직도 노동조합과 마찬가지로 국가권력에 예속된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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