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가들 -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탄생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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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부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 : 고등시험 사법과 합격자들


고등시험 사법과 출신들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법조계에서 제1법률가군을 형성했다. "1937년 고등시험 사법과 합격자 17명 중 변호사시보를 거쳐 곧바로 변호사를 개업하거나 학계로 빠진 3명을 제외한 14명은 일제시대 조선과 만주에서 판검사를 지냈다." "고등시험 사법과 응시는 일제하에서 판검사를 해보겠다는 의도를 명백하게 드러낸 행위였다. 순수 변호사 지망생에게는 조선변호사시험이라는 다른 길이 열려 있었다. 판검사가 되려면 단순한 법률지식뿐만 아니라 일제통치에 대한 충성심도 보여줘야 했다. 그 과정을 통과한 사람들의 삶이 해방 이후 다양하게 갈린 것도 흥미롭다. 거칠게 평가하자면,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돌이킨 사람들은 예상한 것 이상의 불행을 맛보았고, 끝까지 개인의 안위만을 추구한 사람들은 기대한 것 이상의 영광을 누렸다. 전반적으로 그런 시대였고 어느 누구도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37-8)


"두 번의 옥고를 치른 사회주의 혁명가이자 당대의 손꼽히는 지식인 인정식이 1938년 발표한 전향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본제국을 경제상의 또는 정치상의 유일 절대의 맹주로 하는 동아의 재편성 과정은 실로 놀랄 만한 공전의 대규모와 미증유의 급격한 속도로 진행되어 아세아의 전지도를 변하"게 하고 있었다." "일찍이 선진문명에 눈을 뜬 윤치호도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기존의 다소 모호한 중립적 태도를 버리고 본격적인 친일의 길에 들어섰다." "1938년 조선인 육군특별지원병제도의 실시, 1940년 창씨개명, 1942년 징병제시행 결정으로 민족차별이 철폐되리라는 믿음도 생겼다. 모두 착시였지만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윤치호의 영향을 받았다. 몇몇 개인의 변화가 아니라 한세대 전체가 그 흐름에 몸을 실었다. 1937년 고등시험 사법과의 조선인 합격자들은 만주사변 이후에 시작된 그런 변화를 상징하는 사람들이었다."(40)


"광범위한 좌익인맥 덕분에 경북 안동의 가일마을은 일찍부터 '안동의 모스크바'로 불렸다. 1910년대 가일마을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지원한 항일조직 중의 하나가 대한광복회고, 1917년 대한광복회가 처단한 대표적인 친일파가 경북 칠곡의 부호 장승원이다. 해방후 수도경찰청장(수도청장)으로 좌익척결에 앞장선 장택상은 장승원의 아들이다. 김영재는 안동지역이 갖는 이런 독특한 정서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김영재의 경우를 보면 흔히 생각하듯 독립운동가, 친일파, 민주, 반민주 가문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일제시대에는 공부를 시킬 수 있는 가문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재력이 있는 집안이면 이 다양한 세력들이 공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학문을 최고로 여긴 전통 때문이었을까. 유서 깊은 독립운동가 가문이 일제 고등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자손에게 의외로 관대한 태도를 보인 것도 흥미롭다."(61-2)


김영재의 신원조회 당시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큰아버지 김응섭은 1931년에 결국 귀순을 택했다. "만주사변이 터진 1931년 이후에는 어떤 이유로든 상당수의 독립운동가들이 '생활'로 돌아왔다. 국내에서는 다른 선택지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김영재는 이런 우여곡절 끝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실무수습을 마치고, 1941년 1월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예비검사로 임명되었다. 정식검사로 발령받은 것은 그해 3월이다. 검사로 임용될 때에는 이미 '도요야마'로 창씨한 상태였다. 2년 뒤인 1943년 3월 평양지방법원 검사국 검사로 자리를 옮기면서 해주지방법원 검사를 겸직했고, 1944년 9월부터는 겸직을 면해 1년 후 평양지방법원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주에서 검사로 일할 당시에는 비전향 사상범의 감시와 통제를 담당하는 예방구금위원회 위원도 맡았다. 손꼽히는 독립운동가 가문의 아들은 이렇게 해서 확실한 친일검사로 자리 잡았다. 해방후 그의 삶은 더 복잡한 궤적을 그리게 된다."(65-6)


"(김영재와 고등시험 사법과 합격동기인 조평재가 평양에서 판사로 일하던 당시 돌보던) 조카가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한국은행 총재, 경제부총리를 지낸 조순이다. 한국전쟁 때 이충영과 강정택이 모두 납북된 후 강금복은 어려운 형편에서 4남 4녀를 키웠다고 한다. 서울대 법대교수로 일하다가 국무총리가 된 이수성, 영남대 정치학과 교수로 일하다가 국회의원을 지낸 이수인 형제가 그렇게 키운 자식들이다. 평양에서 허브 노릇을 한 김갑수는 훗날 진보당 사건의 주심 대법관으로 조봉암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홍석현 전 중앙일보사 사장의 아버지) 홍진기는 법무부 장관으로 조봉암의 사형을 집행했고, '4·19 원흉'에서 겨우 살아남은 후에는 삼성 이병철 회장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가 된다. 고형곤 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시에 국무총리를 지낸 고건의 아버지다. 인연은 좁은 바닥에서 이렇게 돌고 돈다."(85)


2부 이류에서 일류로 편입된 사람들 : 변호사시험 출신들


"변호사가 되는 여러 경로 중 조선인에게 가장 의미가 있었던 것은 (해방 후의 법조인력 충원기에 제2법률가군을 배출한) 조선변호사시험이다." "조선변호사시험 출신들 모두의 '아버지'뻘인 허헌 변호사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의 삶은 가장 주류에서 출발했으나 어느 시점부터 비주류로 밀려난 특정세력을 상징한다. 조선변호사시험 출신으로 해방공간에서 자취를 감춘 많은 사람들이 허헌 변호사와 직간접적인 관련이 있었다."(108-9) "대한제국 시절인 1907년에 변호사 등록을 한 허헌은 오랜 친구들, 고마운 인연이 모두 떠난 뒤, 일제시대 초기에 일어난 다양한 독립운동 사건의 변론을 맡으며 자기 몫을 담당했다. 3·1운동 민족대표 사건, 강우규 의사 사건, 김상옥 의사 사건, 조선공산당 사건, 원산총파업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3·1운동 변론에서는 심급상의 절차적 하자를 지적하여 재판을 공전(空轉)시킴으로써 일본인 판검사들이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115-6)


"일제시대 시행된 조선변호사시험은 이름 그대로 변호사가 되기 위한 시험이었다. 판검사가 될 수 없었던 대신 응시자격에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 독학자라도 이 시험만 붙으면 변호사가 될 수 있었다. 공부에 자신이 있는 청년들은 누구나 한번쯤 조선변호사시험을 꿈꾸었다. 심지어 '경성트로이카'의 한축이었던 전설적인 혁명가 이재유도 한때 조선변호사시험을 준비했다." "1928년 도쿄에서 4차 조선공산당 사건 관련자로 검거되어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사실무근이었기 때문에 면소되리라 믿고" 형무소에서 조선변호사시험을 준비했다. 그의 시험준비는 오래가지 못했다. 본인은 사실무근이라 주장했지만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위원으로 무려 70여회나 검속되었던 처지라 면소나 무죄를 받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1930년 11월 5일 경성지방법원은 이재유에게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했다. 이재유는 감옥생활을 통해 진정한 공산주의자로 거듭났다."(138-9)


"1936~40년의 불안정한 시기에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한 사람들 중에는 1945년 10월 11일 해방후 첫 판검사 임명에 포함된 사람이 많다. 조선변호사시험 출신들은 일제식민지 체제에서 판검사로 일하다가 해방을 맞이한 사람들과 입장이 달랐다. 일제시대에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 대신 친일의 오점이 적었다. 해방후 바로 판검사로 임용되기에 나이도 적절했다. 1941년 이후의 합격자들 중에는 태평양전쟁 말기 상황에서 변호사시보 과정을 제대로 마치지 못해 해방후에 당장 판검사로 임용될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선배 합격자들은 법원장이나 검사장 이상의 고위직을 받아야 하는 경력자들이라서 기존 판검사들과 자리싸움이 불가피했다. 1936~40년의 조선변호사시험 합격자들은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국가 건설에 법률가로 참여할 최적의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그중 적지 않은 변호사들이 우리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이러니다."(145)


3부 벼락처럼 찾아온 해방, 새로운 기회의 시대


"『법원사』의 공식기록에 따르면 1945년 10월 11일 미군정청은 전국의 일본인 판검사 전원을 일시에 퇴진시키면서 조선인 판사 39명과 검사 23명을 임명했다. 10월 11일이라면 사법부의 조선인 관료들이 임명되고 불과 이틀이 지난 시점이었다. 일본인들은 재판업무에서 배제하는 것은 그만큼 시급한 과제였다." "흥미롭게도 이날 퇴임자였던 장경근·민복기·민병성·신언한·이영섭·최윤모·김장호·박성대·정재환 등은 같은 날짜에 조선인 판검사로 임용되었다. 이원배만이 11월 19일에 인사가 났다. 민병성을 제외하면 결국 일본인명으로는 면직사령이 나고, 조선인명으로 다시 임명사령이 난 셈이다." "장경근은 이승만 정권에서 내무부차관, 국방부차관, 내무부장관 등을 지내며 온갖 반민주 반헌법적 행태에 관여했고, 4·19혁명 후 일본으로 밀항한 인물이다. 민복기와 이영섭은 훗날 대법원장을 지냈다."(183-5)


"10월 11일의 판검사 임용은 한국법조계 전체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조치였다. 10월 15일 미군정은 "미군 점령지역 내의 재판소 관리는 점령을 시작한 후 6주간 내에 완전히 조선인의 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라면서 "군정청 재판소 내에 전부 조선인으로 하여금 재판을 하는 권리를 허가하였다는 것은 약 반세기 이래 처음 보는 일"이라고 자신있게 선언했다. 실제로도 법원과 검찰은 다른 어떤 기관보다 빠르게 조선인의 손으로 돌아왔다. 당시 미군정은 조선인 변호사회의 간부들로부터 공직에 임명할 법조인명단을 전달받아 이를 기초로 판검사를 임명했다." "여러모로 순조로운 출발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수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친일판검사의 처리, 법률가의 절대적인 부족, 특정 정파의 주도권 장악, 통역권력의 등장, 북한에서 내려오는 법률가들의 처리 등이 대표적인 문제였다. 이 문제들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서로 뒤섞여 카오스를 만들어냈다."(187-90)


"1945년 11월 19일 이후에 이루어진 판검사 임명에서 가장 중요한 그룹은 일제시대 법원에서 일하면서 해방을 맞은 조선인 서기들이다. 해방 당시 변호사자격을 갖추지 못했던 이들, 이른바 '미자격자'들은 고등시험 사법과와 조선변호사시험 출신 '자격자'들에 이어 해방공간의 제3법률가군을 형성한다." "예나 지금이나 판검사 아래에서 공판조서, 증인신문조서, 피의자심문조서, 참고인진술조서 등을 작성하고 행정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직업이 서기다. 일반인들이라면 아마도 두 종류의 미자격자 중에서 (시보교육을 마치지 못한) 고시합격자들 쪽 손을 들어주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후 사법분야의 정책 결정자들은 서기들을 당장 임용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즉시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자격자인 고시합격자들에게는 정식으로 사법관시보 교육을 시키기로 했다. 이런 결정의 뿌리는 매우 깊다."(217-8)


"(서기 출신들의 판검사 임용은) 급한 불을 끄는 응급조치였다. 1947년부터는 사법관시보 출신들이 배출되면서 서기 출신의 임용비율은 많이 줄어들었다. 완전히 중단된 것은 아니어서 정부수립 후 1948년의 간이법원 판사시험, 1949년의 간이검찰청 검사보시험, 1952년과 1956년의 1회, 2회 판검사 특별임용시험 등을 통해 몇차례 더 서기 출신들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서기 출신들이 마지막으로 판검사로 임용된 것은 1958년 11월이다. 그해 12월부터는 8회 고등고시 사법과 출신들이 판검사에 임용되기 시작했다. 고시 8회는 108명이 합격하여 당시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대규모 법률가집단을 형성했다. 임용과 승진 때마다 화제가 되었던 고시 8회의 등장은 서기들의 특별임용제도가 완전히 종결되고 고시제도가 정착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경계선이 된다. 한시대를 끝낸 고시 8회의 대표자가 훗날 대법관, 국무총리, 대통령후보를 지낸 이회창이다."(224)


"1948년 정부수립 직전, 변호사법 제정을 놓고 서기 출신을 비롯한 미자격자들이 보인 격렬한 반응은 삼류 법률가로 밀릴 수 있다는 그들의 위기의식을 잘 보여준다. '판검사 특별임용시험'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한 오제도의 태도도 결국은 같은 맥락이다. 그들은 불안했다. 일을 통해서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초조감도 강했다." "건준에 참여한 대표적인 사회민주주의자 이동화는 1989년 김학준 교수를 만나 "자유당 정권에서 이른바 공안사건을 다루던 사람들 가운데 자신에게 열등감을 가진 어떤 사람이 자신을 끈질기게 괴롭혔다"라고 회고한다." "이동화를 잡아넣은 검사는 오제도와 조인구인데 조인구는 경성법전을 졸업하고 사법요원양성소 입소시험에 합격한 경우라 이동화의 묘사와 부합하지 않는다." "초창기 법조계 역사에서 종횡무진하며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오제도 검사의 내면세계를 이해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증언이다."(243-4)


4부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1946년 5월 16일의 인사로 퇴진한 사람들은 세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번째는 김계조 사건으로 촉발된 사법파동을 주도한 오승근 판사와 백석황 검사다. 판검사는 아니었지만 사법행정에 참여했던 강중인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들의 좌천은 좌익으로 의심되는 법률가들의 배제를 의미한다. 둘째는 구세대에 속한 법률가들이었다. 이종성은 1889년 경기도 출생으로 보성전문 법과를 졸업하고, 1922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해 변호사로 일했다. 구자관은 김병로와 비슷한 세대다. 원로에 속한 이들은 오승근과 백석황이 주도한 사법파동을 지지 또는 방조했다. 이들의 좌천은 항명에 대한 응징과 함께 세대교체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세번째는 미군정 초창기 사법을 주도한 '통역권력'의 2선 후퇴다." "김영희 법무국장대리의 퇴장은 일제시대 고등시험 사법과나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한 전형적인 법률가들의 복귀를 의미했다."(281)


# 김계조 사건 : 사업가 김계조가 조선총독부 자금을 끌어들여 시내의 미쓰코시 백화점에 댄스홀을 개장하고 직업여성을 모아 미군을 접대하는 사업을 추진하던 도중에, 김계조의 동업자인 김정목과 손홍원이 고발자로 나서, 댄스홀 개장의 숨은 목적이 바로 미군의 정보수집과 친일반미 정권 수립이라고 주장하면서 크게 비화된 사건.


"(퇴진 판사들의 공백을 메운) 김병로가 (사법부장으로) 전면에 등장함으로써 김용무 대법원장, 이인 검사총장과 함께 미군정시기 남한의 법조계를 이끈 이른바 '빅쓰리' 체제가 완성되었다. 일제시대 항일변론 활동을 통해 명성을 얻었고, 해방후 한민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미군정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동질(homogeneous)의 사람들이었다. 일제시대 때 김병로나 이인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허헌 변호사의 그룹은 완전히 배제되었다." "'빅쓰리' 체제의 완성으로 한민당의 보수성이 법원과 검찰에 그대로 이식되기 시작했다. 1946년 6월 9일 광주지방법원에서 김용무 대법원장은 "법원의 정치적 중립성이나 객관성을 언급하는 자는 사법부 관리로서 자격이 없다. 미군정의 정책에 반대하는 자나 신탁통치와 좌파이데올로기에 찬성하는 자는 그들의 범법행위를 증명할 만한 충분한 증거가 없더라도 엄중히 처벌해야 한다"라고 발언했다."(284-5)


"1946년 5월 15일 미군정청 공보부는 며칠전부터 소문만 무성했던 조선정판사 사건을 공식 발표했다. 서울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가 막 결렬된 시점이었다.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미군정에 대한 불만은 하늘을 찔렀지만 이미 철수를 시작한 미군은 상황을 통제할 충분한 인력을 갖추지 못했다. 조선인 군과 경찰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발표된 혐의사실은 다음과 같았다. 조선정판사에 남아 있던 지폐인쇄용 징크판을 김창선이라는 직공이 판매하려다가 경찰에 적발되었다. 경찰이 조사해보니 그는 이미 뚝섬과 조선정판사에서 위조지폐를 인쇄한 상태였다. 조선정판사에서만 1945년 10월 20일부터 여섯차례에 걸쳐 범행이 이루어졌다고 했다. 김창선의 자백에 기초해서 박낙종을 비롯한 조선정판사 직원 14명이 구속되었고, 조선공산당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 이관술과 해방일보사 사장 권오직이 수배되었다."(302-3)


"재판부가 김창선만을 따로 떼어내 피고인심문을 진행하자 다른 피고인들과 변호인단은 함께 재판을 받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와 같은 요구는 2회, 3회, 4회 공판 내내 계속되었지만, 양원일 판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김창선의 진술은 다른 피고인들의 유죄를 증명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증거였다. 다른 피고인들은 김창선을 반대신문하여 모순을 찾아낼 기회를 가져야 한다. '반대신문권의 보장'은 형사소송의 기본 중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이게 지켜지지 않으면 김창선의 진술은 증거능력이 없다. 양원일 판사는 김창선을 다른 피고인들과 분리함으로써 이런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8월 31일 7회 공판에 이르러서야 피고인들은 전원이 함께 재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미 김창선에 대한 법정의 조사를 마친 뒤였다. ... 공산당들이 위조지폐를 만들었다는 공소사실을 입증할 유력한 증인은 조선정판사 공장장이었던 안순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곧 참고인으로 변경되었다."(307)


"그의 진술은 단계마다 조금씩 달라졌다. 목격했다는 시간부터 오락가락했다. 명치좌(明治座)를 구경하고 밤늦게였다고 했다가, 일요일 정오라고 진술을 변경했다. 100원권 지폐를 인쇄하는 걸 보았다는 구체적인 정황도 매번 달랐다. 9월 18일 15회 공판에서 안순규는 자신의 과거 진술을 완전히 뒤집었다. 모두 고문에 의한 허위진술이었다는 새로운 주장이었다. 검찰은 그날 재판이 끝나자마자 안순규를 구속하고 위증죄로 기소했다. 안순규를 피고인으로 한 별도의 재판이 시작되었다." "이 주장과 관련해 변호인단은 10여명을 증인으로 신청했지만,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안순규는 검찰의 구형대로 10월 19일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본래 사건인 조선정판사 사건의 판결이 나오기 전에 파생된 사건인 위증죄 사건의 판결이 먼저 나온 것이다. 이례적인 일이었고, 이때 이미 조선정판사 피고인들의 운명은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308-9)


# 최종 판결 : 이관술·박낙종·김창선·송언필 무기징역, 신광범·박상근 징역 15년


"1963년에 출간된 『피로 물들인 건국전야』라는 책이 있다. '피로 물든'이 아니라 '피로 물들인'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적극적으로 건국전야를 피로 '물들인' 극우청년단체의 폭력성을 자랑스럽게 고백한 책이다. 저자는 김두한 자신이다." "용산역에서 파업 중인 전평 노조원들을 습격해 무력화시킨 무용담은 이 책의 핵심이다."(348) "스스로를 '백색 테러리스트'로 지칭한 김두한의 자서전은 납치, 폭행, 협박, 고문, 저격, 살인을 집대성한 범죄기록이다. 김두한의 고백이 그려내는 풍경은 오제도 검사 등이 설파한 '스파이전'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훨씬 거칠고 일방적이다. 어쩌면 김두한의 고백 자체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이야기를 17년 후에도 부끄러움 없이 털어놓을 수 있었던 우리 사회분위기인지도 모른다. 반대편이 모두 죽거나 사라진 후라서 아무 소리나 뱉어도 그만인 세상이었다. 그게 우리 역사가 되었다."(354-5)


"김두한의 고백이 경찰과 극우청년단체들의 밀착을 보여준다면,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장택상 저격사건을 본정경찰서의 실상을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흥미로운 사례다."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민애청 중앙지국 자위대책임자 임화(문인 임화와는 동명이인)는 나흘 뒤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다가 사망했다." "김두한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해방공간에서 벌어진 인권유린 사건들의 출처는 대부분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들이다. 별다른 죄책감 없이 본인들 스스로 좌익을 때려잡은 무용담을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가해 당사자인 현을성의 입으로 임화 고문치사 사건 당시까지 중부경찰서(본정경찰서)에 고문도구들이 있었고, 일상적으로 고문이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밝혔으니 이 부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공산당을 잡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정당화될 수 있는 야만의 시대였다. 같은 장소에서 앞서 진행된 조선정판사 수사만 예외였을까. 그럴 리 없다."(355-7)


5부 '법조프락치' 사건


"1948년 6월 20일 서울지방법원 민동식 판사는 최운하 과장과 박주식 서장이 무려 36회의 요정향응과 함께 각각 30만원과 25만원의 뇌물을 받고 무고한 사람을 구속해주었다는 혐의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6월 30일 최운하·박주식·강태섭을 송치받아 7월 3일 불구속 기소한 것이 바로 김영재 부장검사였다." "당시 공산당을 잡는다며 천하를 흔들던 최운하에게는 무척 모욕적인 경험이었다. 9월 22일 민판사는 최운하에게 무죄를, 박주식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돈을 건넸다는 강태섭만 1년 6개월의 실형을 받았다. 뇌물을 준 사람보다 받은 사람을 중하게 처벌하는 일반적 관행에 비추어볼 때 상당히 특이한 판결이었다. 최운하는 11월 8일 복직해 수도청 감찰과장을 맡았고, 1949년 6월 3일 반민특위에 다시 구속되었지만 곧바로 반민특위를 무력화시켰다. 반민특위의 중심에 섰던 국회의원 대부분은 '국회프락치'로 몰렸다. 보기에 따라서는 이보다 만족스러운 복수가 없었다."(415-6)


"1949년 8월 서울지방검찰청은 혼돈의 도가니였다. 오제도 검사는 '국회프락치' 사건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그 와중에 (김영재) 차장검사는 '남로당 프락치'로 구속되었다. 오제도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8월 28일경에는 김영재의 '상신서'가 김익진 검찰총장에게 전달되었다. 강석복에 대한 좌익 혐의 수사도 이때를 전후한 일이다. 이 정신없는 상황에서 검찰총장의 권유로 적지 않은 검사들이 사표를 제출했다. 대검찰청의 옥선진·엄상섭 검사, 서울고등검찰청의 김윤수·김달호 검사, 서울지방검찰청의 최대교 검사장, 강석복·박경재 검사, 법무부의 김병화 법무과장, 차영조 정보과장 등으로 대개가 과장, 부장, 차장으로 일하던 중견간부들이었다." "강석복·박경재·김달호·김병화·차영조 등 5명은 "직무태만 또는 남로당 프락치 혐의로 이미 기소된 김영재 사건과의 관련성이 농후"한 "권고사직"으로 해석되었다. 당시 검찰 전체의 인력규모를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세대교체였다."(424)


"세대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역교체였다. 서울지방검찰청 차장검사 자리는 9월 6일자로 이미 장재갑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이로써 서울지방검찰청의 공안라인은 이태희 검사장, 장재갑 차장검사, 오제도·선우종원 검사 등 평안도 출신으로 채워졌다." "이들의 상급자인 김익진 검찰총장은 (평양에서 판사를 거쳐 변호사로 일하다가) 해방 후에는 조만식 주도의 건준에 참여했다. 북한에서 신탁통치에 반대하던 그는 간첩혐의로 인민교화소에 잡혀가 7개월 형을 살고 나서야 뒤늦게 월남해 1948년 1월 1일 대법관에 임용되었다. 1949년 6월 6일 이승만 대통령이 그를 검찰총장에 발탁한 것도 이런 반공투쟁 경력을 인정한 결과였다. 평남 출신을 아니지만 거의 30년 가까운 세월을 평양에서 보냈다는 점에서 그도 역시 평안도 인맥으로 분류할 수 있다. 발언권이 센 중견검사들이 대부분 사표를 낸 후여서 평안도 세력을 견제할 사람들은 더이상 검찰에 남아 있지 않았다."(426-7)


"'적색 사법관' 사건으로 시작되어 1차와 2차로 확대된 일련의 '법조프락치' 사건들은 검찰의 떠들썩한 발표와는 달리, 1심 법원에 의해 대부분 집행유예 또는 무죄판결로 일단락되었다. 정부 수립 이전에 불법이 아니었던 남로당에 가입하거나 독서모임을 꾸렸던 일부 법조인들을 정부 수립 이후 뒤늦게 문제 삼아 기소한 것은 그 자체로 죄형법정주의 위반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건 내용 자체도 경미했기 때문이다. 법원의 일부 용감한 판사들이 이 잘못된 기소를 바로잡고자 나섰다. 항소심이나 대법원까지 이런 기조가 유지된다면 해방공간에서 벌어진 무리한 기소와 처벌들이 바로잡힐 수 있었다. 그러나 피고인과 검사 양측이 모두 1심의 결과에 불복하여 상소한 상태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태풍이 밀려왔다. 규모 면에서 이전의 어떤 태풍과도 비교할 수 없는 쓰나미, 바로 한국전쟁의 발발이었다."(472)


6부 한국전쟁이라는 쓰나미


"북한에서 월남하느라 초창기 경력에 손해를 보기는 했지만 김갑수는 기본적으로 양지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법무부에 정착한 후에는 요직인 법무국장을 거쳐 1949년 7월 법무부차관에 임명되었고, 1950년 3월에는 내무부차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후 피신한) 대전에서 김갑수는 장경근 국방부차관과 함께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만들었다. 비상사태를 맞아 적에게 협력한 사람들을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유기징역형에 처하는 대통령 긴급명령이었다. 살인, 방화, 강간, 중요시설 파괴, 중요물자 약탈 및 불법처분 등에 대해서는 사형 하나만 규정했다. 재판도 3심제가 아니라 1심 단독 종심(終審)으로 끝나도록 했다. 법령의 시행도 전쟁이 발발한 6월 25일로 소급되었다. 9·28 수복 이후 내내 논란이 된 대표적인 악법이다. 혼자 살겠다고 시민을 버려두고 도망친 최고위 공직자들이 대전에 자리 잡자마자 가장 먼저 이런 악법부터 제정한 것이 놀랍다."(478-9)


"9·28 수복 후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은 엄청나게 많은 피해자를 양산했다. 이 무시무시한 법령의 위헌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공개적으로 지적한 법률가는 유병진 판사가 거의 유일하다."(481) "9·28 수복 이후 10월 말경부터 서울에서 부역자 재판이 시작되었다. 유병진은 부역자들에 대한 처벌 자체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동의했다. 다만 "진짜 빨갱이로서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은 거개가 이미 도망"한 상태였다. 혹시 예외적으로 남아 있는 악질자들은 "우리의 원수이며 인류 공동의 적"이므로 당연히 처벌해야 한다. 그런데 그 이외의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유병진은 이 장면에서 아주 간단한 질문을 던졌다. "내가 만약 서울에 남아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유병진은 재판관의 양심으로 그들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요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483)


"1957년 12월 (차후에 『조선일보』의 극우논객이 되는)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학생 류근일이 서울대 교내신문에 「모색: 무산대중체로의 지향」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무산대중은 단결하라"는 식의 표현 때문에 류근일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구속되었다. 검찰은 아직 미성년이었던 류근일에게 징역 단기 2년 장기 3년을 구형했다. 유병진은 류근일에게도 무죄를 선고했다. 표현은 과격하지만 사회민주주의를 강조한 데 불과하고, 평화통일을 주장했다 하나 친구들과 토론 끝에 한 이야기일 뿐이며, 그가 소속된 신진회(新進會)도 국가반란을 꾀하는 단체가 아닌 학술모임으로 보인다는 이유를 붙였다." "1958년 7월 2일에는 진보당 사건의 조봉암과 양명산에게 각각 징역 5년을 선고하면서, 윤길중·김달호·박기출 등 나머지 피고인들 모두에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로 유병진도 결국 '공산 판사'로 몰렸고 뒤이어 판사 재임용에서 탈락했다."(486-7)


"오제도는 6월 28일 새벽 한강교가 폭파되기 직전에 간신히 한강을 넘었다." "9·28 수복이 되어 서울로 올라오니 부역자 처리가 최대 현안이었다. 오제도가 부산에서 미리 마련한 '부역자 처리요령'은 부역자를 심사하는 매뉴얼이 되었다. 군 정보기관 쪽에서는 김창룡이 오제도와 호흡을 맞춰 김갑수·장경근이 만든 법을 실행했다. 안문경·정희택 검사 등은 정보장교와 경찰관으로 심사반을 만들어 부역자들을 A, B, C급으로 분류했다. A급은 군법회의로, B급은 검찰청으로 송치하고, C급은 전원 석방했다. 잔류파 중에서 국회의원, 의사, 교수, 문화인 등을 처리하는 것도 오제도의 몫이었다. 그는 최대한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고 회고한다. 이 시절 오제도는 그야말로 부역자들의 생사여탈권을 한손에 쥔 신적인 존재였다. 오제도도 스스로를 '천하의 오제도 검사'라고 불렀다. 그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488-9)


"(도강파가 아니라는 이유로) 수복 이후 죄인 취급을 받으며 불쾌한 경험을 하기는 했어도 지하에 숨어 끝까지 붙들리지 않은 (반공) 법률가들은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인민군 점령 상황에서 일단 몸을 드러내면 협력을 피할 수 없었다. 협력하면 9·28 수복 후에 곧바로 부역자로 전락해 생사가 오가는 재판을 받아야 했다. 친구들을 따라 월북하거나 억지로 납북을 당하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었다." "(이때 몸을 피하는 데 성공한) 민복기·홍순엽·방순원은 모두 5·16 군사쿠데타 직후인 1961년 9월 1일 한꺼번에 대법관에 임명되었다. 서울고등법원장을 지내다가 1965년 세상을 떠난 김홍섭도 조금만 더 살았더라면 비슷한 영예를 누렸을 것이다. 정희택 검사는 5·16 군사쿠데타 이후 대검찰청 검사를 끝으로 검찰을 떠났지만, 12·12 이후 전두환의 부름을 받아 국가보위입법회의 법제사법위원장, 민주정의당 창당발기인, 11대 국회의원을 거쳐 감사원장과 언론중재위원장을 지냈다."(505)


"'법조프락치' 사건 관련자들은 전쟁 발발 당시 대부분 서울형무소에 수감 중이었다 인민군이 들어왔을 때 형무소에 갇혀 있던 이들은 피신할 방법이 없었다. 전쟁으로 항소심이 중단되었으므로 '국회프락치' 사건이든 '법조프락치' 사건이든 관련자들에 대해서는 유죄판결이 확정되지 못했다. 좌익으로 몰린 법률가들은 상급심에서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잃었다 대신에 여론재판이라는 전혀 다른 법정에서 영원한 유죄평결을 받았다. 이들이 실제로 프락치였는지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오제도와 선우종원 등이 퍼뜨린 '전쟁 발발 후에 인민군에 협력했거나 월북 또는 납북되었으면 그들은 과거에도 프락치가 틀림없다!'라는 논리가 공론의 장을 지배했다."(517-8) "'관제 빨갱이'들 중에서도 어떤 이들은 인공치하에서 적극적인 동조자로 나섰고, 어떤 일들은 지하로 숨는 길을 택했다. 이념 때문이 아니라 그저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누군가는 그게 맞아떨어졌고 누군가는 완전히 어긋났다."(521)


7부 1980년대까지 이어지는 '이법회'의 문제


"1945년 조선변호사시험의 예비시험 합격자는 68명이었다. 이들은 아마도 빠짐없이 (일본 천황의 항복방송이 나오던) 8월 15일의 필기시험에 참여했을 것이다. 여기에 예비시험을 면제받은 수험생이 추가되어 전체 필기시험 응시자는 200여 명이었다. 나름의 사연을 안고 1945년 8월 15일의 시험장을 지켰던 수험생 입장에서는 일본의 항복이든 해방이든 눈앞의 시험합격보다 더 중요한 과업은 없었다. 그런데 해방 당일 필기시험이 중단되었고, 수험생들은 귀중한 1년을 날릴 위기에 처했다. 변호사시험을 주관할 국가는 사라져버렸다. 새로운 국가는 도대체 언제 생길지 알 수 없었다. 1945년의 필기시험 응시자들은 조직을 만들어 이 위기에 대응하기로 결정했다. 교섭을 담당할 조직의 이름은 이법회 또는 의법회로 정해졌다. 이법(以法)은 문자 그대로 '법대로' 하자는 의미였고, 의법(懿法)은 법을 기리고 존중한다는 의미였다."(557)


# 응시자 전원(북한지역 외 106명)에게 변호사시험 합격증서를 교부하는 것으로 마무리


"해방후 첫출발부터 아예 시험에 합격한 적이 없는 다수의 법조인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법조계의 오랜 가십이자 스캔들이었다." "이들의 실체가 중요한 이유는 그 숫자 때문이다. 1922~44년 조선변호사시험의 전체 합격자는 164명이다. 여기에는 적지 않은 일본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고등시험 사법과나 행정과에도 합격해 변호사가 아닌 다른 길을 걸은 사람들도 많다. 1945년도에 합격증을 받았다고 알려진 106명은 22년 동안 시행된 이전의 전체 조선변호사시험 합격자 총수에 육박하는 엄청난 규모다. 그런 의미에서 이법회 회원들은 해방 직후 법조계 인력을 충원하는 가장 중요한 자원인 동시에 해결해야 할 부담이었다. 시험에 응시했을 뿐 채점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합격증을 받아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위상도 애매했다. 이들은 과연 1945년도 조선변호사시험의 합격자인가? 이 간단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558-9)


"유태흥이 학교를 졸업하던 1944년에는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고등시험 사법과가 실시되지 않았다. 조선으로 돌아와 응시한 조선변호사시험은 해방 당일에 중단되었다. 이법회를 통해 어렵게 합격증을 얻었고 동료들 중 일부는 그 합격증만으로 사법관시보를 거쳐 운좋게 판검사가 되었다. 유태흥은 거기에 끼지 못했다. 첫번째 기회를 놓친 이법회원들은 당연히 1946년의 사법양성소 입소시험과 1947년의 1회 변호사시험에 응시했다. 필기시험 면제라는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법요원양성소 입소시험도, 1회 변호사시험도 응시 당시에는 마지막 기회로 보였을 것이다. 이후의 시험이 다시 기득권을 인정해주리란 보장은 없었다. 구술시험만 합격하면 되는 두번의 기회를 연달아 놓쳤으니 유태흥에게 뼈아픈 실패다. 그가 통과한 2회 변호사시험은 이법회 출신에게 사실상 마지막으로 주어진 법률가자격 취득의 기회였다. 유태흥은 막차 중의 막차를 탔다."(580-1)


"(1차 사법파동에서 소장파 판사들의 큰형님 노릇을 자임한) 유태흥은 서울형사지방법원 수석부장판사로서 수사기관의 비밀구속영장 심사업무를 담당하는 동안 영장을 기각한 일이 거의 없는 것으로 유명했다. 비밀구속영장은 검사가 구속영장청구서를 법원 접수창구에 정식으로 접수시키지 않고 직접 형사수석부장판사에게 제출하여 발급받는 영장이었다. 언론에 알려지면 곤란한 정치적인 사건, 시국사건들이 많았다. 가끔은 소명자료가 부족하여 정식으로 청구하면 기각당할 것 같은 사건에 악용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유태흥은 독립성을 강조한 소장판사들과 기본입장이 다른 사람이었다. 이 부분을 포함시켜 전체를 조망하면 1차 사법파동 이후 유태흥이 보인 독특한 변화도 이해할 수 있다. 박정희의 입장에서 봤을 때, 독재에 저항한 소장판사는 당장 잘라내야 할 위험요소였지만, 자기 조직만 지키려는 판사는 잘 구슬려 함께 가야 할 동반자였기 때문이다."(585)


# 1차 사법파동 : 1971년 7월 28일 서울지방검찰청 공안부가 서울형사지방법원의 이범렬 부장판사, 최공웅 판사, 이남영 서기 등에 대해 피고인의 변호사에게 향응을 제공받았다는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한 사건. 관행화된 비리가 노출되자 법원 조직의 이익을 수호하려는 구성원들의 의지가 작동했다.


"정권에 밉보이기 딱 좋은 1차 사법파동의 선두에 서고도 유태흥은 아무런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다. 유신정권 아래에서 그는 서울형사지방법원장으로 영전했고, 뒤이어 대법관에 임명됐다. 전두환은 그를 '새 시대' 대법원의 얼굴로 선택했다. 전두환 시대의 법원은 어디 가서 정의를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조직이었다. 그 안팎에서 벌어진 온갖 어두운 행태의 중심에 유태흥이 있었다. 유태흥 대법원장의 재임기간에 일어난 어두침침한 사건들을 여기서 모두 거론할 수는 없다. 그래도 1982년의 장애인 법관 임용탈락 사건만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1982년 8월 대법원은 지체장애가 있는 지원자 4명을 법관 임용에서 탈락시켰다. 조병훈·김신·박찬·박은수 4명의 탈락자는 모두 소아마비가 있는 몸으로 1980년의 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1982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사람들이었다." "대법원장이 멀쩡한 법관후보자들을 '열패고'로 몰아넣은 것이다."(585-6)


# 파문이 확산되자 다음해인 1983년에 모두 판사로 임용


"'열패고'와 함께 유태흥의 삶을 설명하는 또다른 열쇠는 한국전쟁 중의 납북경험이다. 유태흥이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고 1년이 되기 전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유태흥은 평양 근처 탄광에 끌려가 지하 600미터 막장에서 세 달 동안 강제노동을 하다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단신으로 탈출했다. 천신만고 끝에 충남 홍성 집에 도착한 유태흥은 아버지가 이미 인민군에게 학살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유태흥이 군법무관으로 입대한 것은 그후의 일이다." "북한에 끌려갔다 돌아온 것은 자랑스러운 전력이 아니라 위험한 전력이었다. 자칫하면 위청룡처럼 간첩으로 몰려 한순간에 인생이 끝날 수 있었다. 현체제에 끝없는 충성을 바치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한번이라도 북쪽과 얽힌 사람들이 평생 안고 가야 할 무거운 짐이었다. 납북경험이 유태흥의 모든 걸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독재 세력과의 이상한 연대를 이해하는데는 확실히 도움이 된다."(593-4)


"한일협정 반대투쟁을 시작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기간 내내 홍남순은 광주지역에서 이루어진 거의 모든 민주화운동의 선두에 섰다."(596) "5·18 민주화 운동 때는 전남북 계엄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육군 고등군법회의와 대법원을 거쳐서 국방부장관의 확인으로 최종 확정된 형은 징역 7년이었다. 동기생인 유태흥이 대법원장이 되고 파안대소의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홍남순은 교도소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1981년 12월 25일 성탄절에야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유태흥과 홍남순은 약점을 지닌 채 법조인생활을 시작했다. 1945년에 중단된 조선변호사시험 출신이라는 사실은 자랑거리가 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 약점을 해결했다. 한 사람은 권력을 추구하면서 한 시대를 사법부의 암흑기로 만들었다. 다른 한 사람은 소박한 품성으로 이웃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살았다. 출발은 같았지만 삶의 여정과 종착역은 많이 달랐다."(598)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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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대학의 조센징 - 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 그들은 돌아와서 무엇을 하였나?
정종현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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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현해탄을 건너는 청년들


"조선인 유학생들은 '식민지(인)/제국(엘리트)'의 사이에서, '출세'와 '지시' 사이에서, '일본인화의 과정'과 '조선인 된 슬픔' 사이에서 분열했다. 이런 특성 때문에 식민 권력은 조선 청년들의 일본 유학을 조선 지배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친일적인' 엘리트의 양성 과정이면서 역설적으로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 세력을 육성하는 '조선 독립운동의 수원지(水源池)'라며 골치 아파했다." "('출세'와 '지사'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하나의 논리가 '동족을 위한 출세' 혹은 '실력양성론'이었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식민지 관료가 된 많은 제국대학 출신들은 자신의 '출세'를 고통에 신음하는 식민지 동족을 구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합리화했다. 유능한 행정 관료가 되어 동족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고, 올곧은 사법 관료가 되어 억울한 일을 당하는 동족을 보살폈다는 변명은 해방 이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던 알리바이다."(18-9)


1장 제국대학, 근대 일본의 엘리트 육성 장치


"근대 일본은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출신 엘리트들이 이끌어온 관료제 국가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일본의 군부 파시즘을 지탱한 것도 도쿄제국대학 엘리트의 관료 카르텔이었다." "가토 다카아키, 와카쓰키 레이지로, 하마구치 오사치, 히로타 고키, 히라누마 기이치로 등 패전 이전 일본 근대사의 고비를 장식한 민간 정치인 총리 대부분이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출신이었다. 패전 이후에도 한국전쟁을 '신이 내린 선물'이라며 전후 부흥을 이끈 요시다 시게루, '쇼와의 요괴'로 불리며 만주국을 경영했고 전후에는 총리로 미·일 안보 조약을 개정한 기시 노부스케, 그의 동생이자 핵확산금지조약 체결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사토 에이사쿠, 레이건·전두환과 함께 한·미·일 보수 정권의 트라이앵글을 형성한 나카소네 야스히로 등 일본 현대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총리들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출신이었다."(28-9)


"1918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학생들을 중심으로 정치 동아리인 '신진카이(新人會)'가 창립되었다. 이 동아리는 마르크스주의 연구회로 이곳 출신들의 일부는 이후 일본 공산당의 지도자가 된다." "1933년 (신진카이의 핵심 인물이던) 사노 마나부는 옥중 전향성명을 발표하여 소련의 지도를 받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일본 천황제의 특수성에 맞는 일국사회주의로 자신의 사상을 전환하겠다고 선언한다. 이 옥중 성명의 충격은 컸다. 사노를 따라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전향했다. 전향한 사람 대부분이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의 정치 동아리 '신진카이' 출신이었다. 또 전향한 신진카이 회원 대부분은 제1고등학교 출신이었다." "후지타 쇼조는 이들을 "제도 통과형 수재"라고 정의했다. 그들은 한순간도 국민적 지도자의 지위에서 멀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들은 비록 이념을 바꾸었지만 자신들이 국민을 지도한다는 내적 일관성에서는 벗어난 적이 없었다."(32-3)


2장 조선인 교토제국대학생, 제국의 사업가가 되다


"김연수는 도쿄의 아자부중학교와 교토의 제3고등학교를 거쳐 1921년 조선인 최초로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다. 일본 유학 11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형이 주도해서 만든 경성방직의 2대 사장이 되어, 영등포 일대는 물론이고 국경 너머 만주에서도 방직공장을 늘려나갔다." "친형인 고려대 설립자 김성수의 그늘에 가려졌지만, 김연수는 식민지 시기 명실공히 조선을 대표하는 기업가였다. 그는 경성방직, 남만방적, 삼양사 등으로 사업체를 늘려가며 한국 최초의 거대 기업 집단, 곧 '재벌'을 일구었다. 이제는 익숙한 '재벌'이라는 용어는 1932년 급성장하는 고창 김씨가의 사업체에 기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김연수의 '경방'은 삼성과 현대, SK, 한화 등이 창업자들이 자기 사업을 막 일구기 시작할 때 선망의 대상이었던 한국형 재벌의 기원이었다. 김연수는 '조선인 본위'의 근대적인 공업을 육성하는 것이 조선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다."(41)


"해방 이후 김연수는 그의 생에에 짙은 얼룩으로 남아 있는 전시체제기의 각종 직함과 헌금, 학병 권유 등의 활동 때문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구속된다. 김연수는 무죄로 방면되는데 이때 재판부의 논리가 흥미롭다. 재판부는 김연수가 "결코 민족정신을 버리지 아니한 증좌"로 첫째, 경제인으로서 '민족자본' 경성방직을 운영하고 일본 자본과 타협하지 않았다는 점. 둘째, 많은 인재에게 장학금을 주어 민족의 동량으로 키웠다는 점. 셋째, "경방 자본의 표시인 각 주권이 무궁화의 회란에 태극기를 모사하여서 간절히 민족혼을 상징한 점과 경방의 생산 광목 선전 포스터에서 역시 태극기를 상표로 한 사실 등"을 거론하고 있다. 재판부가 내세운 무죄판결의 근거들은 민족과 제국 사이에 걸쳐 있던 김연수의 삶과 경성방직이라는 기업이 지닌 애매함과 복잡함을 잘 보여준다."(45)


"사람에게 투자하는 것은 형 김성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성수에게 와세다대학 유학비를 후원받은 이광수와 여러 조선 지식인들은 문화적 민족주의 운동에서 김성수의 업적과 애족심을 칭송하는 글을 기고하여 후원에 보답했다. 민족의 이익과 자기 가문의 사업을 합치시키고, 그러한 논리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민족 엘리트들과 적극적으로 경제적·정신적 유대를 맺은 것이 이 형제의 성공 비결 중 하나였다. 전시체제기에 들어서면서 이들은 민족의 이익과 일본 제국의 이익이 다르지 않다는 입장에 서게 된다. 민족의 이익은 몰라도, 적어도 이들 가문의 이익과 제국의 이익은 배치되지 않았다." "야마구치고등학교를 거쳐 1942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한 (김연수의 둘째 아들) 김상협은 해방 이후 가업 중 하나인 고려대 총장과 문교부 장관을 거쳐 전두환 군사정권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했다."(53-4)


3장 누가 제국대학으로 유학을 갔는가


# 일본 '내지'의 제국대학을 선호한 까닭

1. 일본 지방제국대학이나 식민지 제국대학에 비해 교육과 설비 수준이 월등함

2. 일본인과 경쟁할 수 있는 지반을 확보하여 차별을 일거에 극복하고자 하는 열망의 산물

3. 제국의 중심부는 식민지에 비해 억압 강도가 덜한 유연한 공간


"식민지의 귀족들은 일본 화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고, 천황가의 후손이나 귀족 자제가 다니던 학습원(學習院)을 거쳐 제국대학에 진학했다." "한일병합 직후 '조선귀족령'에 의해 작위가 수여된 사람은 모두 일흔여섯 명이었는데, 작위 거절과 반납으로 인해 실제로 작위를 받은 사람은 모두 예순여덟 명이다." "김호규는 자작 김성근의 손자로 도쿄제국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조선 귀족 시국 단체인 '동요회' 이사를 지냈으며, 조선총독부 촉탁으로도 일했다. 민덕기는 휘문고보 교주인 '자작' 민영휘의 증손자다.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농업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식민지 재계에서 활동하며 풍문여고를 설립했다. 해방 이후에는 '적산 기업'인 삿포로맥주를 불하받아 '조선맥주주식회사(지금의 하이트맥주)'를 설립하여 사장이 된 인물이기도 하다. 휘문고와 풍문고는 여전히 민씨 집안 중심의 재단이 운영하고 있다."(73-4)


4장 관비 유학, 가난한 조센징에게 건넨 제국의 장학금


"우장춘의 삶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데 가담한 아버지를 둔, 한국 사회의 입장에서는 '악질' 친일파의 자식이다. 그가 관비 유학생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의 옛 동지들인 당대 친일파들의 도움 덕분이었다. 농학부 실과를 졸업한 후 그는 일본 농림성의 농업시험장인 '코노스'와 교토의 다키이 종묘주식회사 농장에서 일본 국가를 위해 '농림 1호', '교토 3호' 등 무와 배추의 개량종을 개발했다. 1950년 우장춘은 가족을 모두 일본에 남겨두고 홀로 한국에 건너와 일본에서의 경험을 활용하여 한국형 무, 배추, 감귤, 무병감자, 벼의 개량을 통해 한국 농업의 기틀을 마련했다. 1959년 죽기 직전에 우장춘은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공훈을 기려 정부는 안익태에 이어 두 번째 문화훈장을 우장춘에게 수여했다."(84)


"'내선융화'라는 제국의 슬로건을 진심으로 믿고 그것을 실현하려는 민간 차원의 노력이 있었다. 그 민간 유지들은 제국 일본의 가치를 식민지인에게 적극적·조직적으로 전파하고 심어주려 했다. 일본 제국을 유지하고 나아가 더 확장해야 한다는 사명감, 식민지인을 제국의 일원으로 지도하고 교화하려는 동기, 자발적으로 헌신하고 정열적으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볼 때, 그들은 서구의 식민지 선교사(colonial missionary)와 흡사한 존재였다." "식민지 조선의 여자 유학생들을 체계적으로 지원한 야나기하라 기치베는 "장래 조선인의 지도자가 될 사람들을 일본 문화 아래서 교양시켜 그들 자신을 융화의 이음쇠가 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지당한 일이라고 확신"했다." "(제국의 유지들이 조선인 유학생들을 문화적으로 감화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교육'을 통해서 일본식 교양을 내면화하는 것이었다. 학비 지원은 그러한 교육을 지속시키고 제국의 후의를 각인시키는 가장 유력한 방법이었다."(86-7)


"그렇지만 (도쿄의 일본인 유력자들이 주요 후원자였던) 자강회 장학금의 수혜자가 그들의 의도대로 성장했는가는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해방 이후 농림부 차관을 지내며 북한 방식의 토지개혁안을 주장한 농업경제학과 강정택, 사회주의 관련 활동으로 구속되었다가 해방 이후에는 북한 보건의료 체계 수립의 산파가 된 의학과 최응석, 조선공산당과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탄압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사위였지만 남로당의 비밀당원이었다고 전해지는 경제학과 채항석, 해방 이후 진보적 활동을 하다가 월북한 사회학과 신진균 등의 도쿄제국대학 조선인 유학생들은 자강회 입장에서 보면 '빨간 속을 감추고' 장학금을 받아먹은 '먹튀'로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진흙 속에서도 연꽃이 피듯이, 제국의 장학생 중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해방 후 남북한에서 자기가 습득한 지식으로 각자의 공동체에 기여하는 삶을 살았다."(94-5)


5장 기숙사에서 제국 엘리트의 정체성을 익히다


"고등학생들은 일반 사회를 '족까이(俗界)'라고 불렀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3년 동안 속계의 유혹 없이 공부하는 것이었다. 이 속계는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대가족주의와 치안유지법(반공법)으로 다스리는 사회였다.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에는 속계에는 없는 '독서와 사상의 자유'가 있었다. 교우회와 선거를 통해 뽑은 대표들이 운영하는 기숙사에서 학생들은 '자유와 자치'를 습득했다." "조총련 부의장을 지낸 백종원은 가나자와의 4고 시절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이 서로 인격을 존중하는 기풍 속에서 우정을 나누었다고 기억한다. 독서회 사건에 연루된 조선인 학생들을 경찰이 검거하자 일본인 기숙사생들이 항의하며 저항했고, 이들의 우정은 전후 일본 사회로 이어졌다. 또래 집단 중에서도 특출한 소년들만이 격리된 시공간에 모여서 미래의 리더가 될 것이라 격려받으며 생활하면 어떻게 될까? 이러한 환경은 선민의식을 지닌 특권적인 집단을 형성시켰다."(100-1)


6장 제국대학의 교수들은 누구인가


7장 총독부 '나리'가 되어 돌아온 조센징들


"제국대학 출신의 유능한 총독부 관료들은 만주로 진출하여 대륙 침략의 첨병이 되었다. 민생단을 조직하여 참혹한 풍파를 일으킨 도쿄제국대학 출신의 박석윤을 비롯한 적지 않은 제국대학 출신들이 만주를 누비고 다녔다. 최남선의 매제이기도 한 박석윤은 1922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유학하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부사장을 거쳐 만주로 건너갔다. 박석윤은 이주한 조선인의 이익 보호를 명분으로 일본에 우호적인 자치 조직 '민생단'을 조직했다. 그가 뿌린 공작의 씨앗은 1930년대 만주 공산 유격대 내에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일본 스파이 혐의로 숙청되는 이른바 '반민생단 투쟁'의 원인이 되었다." "만주국의 대다수 조선 관료들은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에 가입했다. 박석윤이 본부 총무로 활약한 이 후원회에서는 항일 조선인을 '선비(鮮匪)'라 부르며 그들을 토벌하는 관동군을 적극 지원했다."(144-5)


"총독부 관료 중에서도 사법 관료, 즉 판사와 검사는 더욱 특별한 존재였다." "조선인은 조선총독부 당국자에게 '사상운동' 혹은 항일 민족운동과 어떠한 관련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받지 않고서는 사법관으로 임용될 수 없었다. 총독부 판검사 경력이란 한마디로 총독부가 보증한 친일파의 증명서였다. 그들은 총독부 체제에 저항한 동족에게 실형을 구형하거나 판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법관 경력을 비정치적인 영역으로 특화하거나 동족을 위한 행위로 합리화한다. 이를테면 총독부 판사 이충영을 옹호하는 가족의 논리는 한 사례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덕형의 후손인 이충영은 도쿄제국대학 법률학과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 사법관시보를 거쳐 함흥지법과 광주지법 판사 등을 역임했고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그의 후손들은 모두 사회적으로 성공했다. 서울대 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맏아들 이수성을 비롯하여 나머지 세 아들도 모두 국회의원 및 교수가 되었다."(146-7)


"총독부 이력을 '준비론'으로 합리화한 농림부 장관 임문환, 내무부 장관과 자유당 정책위원장으로 3·15 부정선거를 주도한 장경근, 조봉암에게 사형을 판결한 대법관 변옥주 등 식민지 행정·사법관을 거쳐 해방 이후에도 승승장구한 너무나 많은 이들이 있다. 그들 대다수는 식민지 경력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축적한 사회자본은 다시 그 후손들의 사회적 신분으로 상속되었다. 제국대학과 식민지 관료라는 사회자본이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가 지난 1997년과 2002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이다. 그는 본가·외가·처가가 획득한 제국대학, 고등문관시험, 식민지 관료라는 사회자본의 종합적 구현체다. 이회창의 할아버지는 충청남도 예산의 지주다. 이회창의 백부는 교토제국대학 교수 이태규이며, 아버지는 경성법학전문학교 출신으로 총독부 검사서기를 거쳐 해방 이후 검사를 역임한 이홍규다."(151-2)


"이회창의 외가는 담양의 만석꾼 지주 집안이다. 외삼촌인 김성용은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한 후 일본 군수성 관료를 역임했다. 김성용 등 이회창의 외삼촌 3형제는 모두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모인 김삼순은 훗카이도제국대학 식물학과 출신의 농학박사다. 이회창의 장인은 1942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고 해방 이후 대법원장 직무대행 및 대법관을 지낸 한성수다. 한성수의 장남인 한대현도 헌법재판관을 지냈다. 알다시피 이회창도 대법관을 역임했다. 이처럼 이회창의 본가·외가·처가는 구한말 이래 지주 집안이면서 제국대학과 고등문관시험, 관료라는 제국의 사회적 신분 상승의 주요 장치를 공유하고 있다."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은 계층의 사람들은 현대사회 각 분야에서 두드러질 가능성이 더욱 크다. 이러한 좋은 배경을 타고난 것이 그 개인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것의 역사성은 문제 삼아야 한다."(152-3)


8장 식민지인, 과학기술을 통해 제국의 주체를 꿈꾸다


"식민지인들에게 과학이란 무엇이었을까? 앞질러 결론을 말하자면, '과학'은 차별을 극복하고 세계적 수준의 학문 주체로 비약할 수 있다는 환각을 제공했다. 식민지인은 삶의 전 영역에서 차별을 겪었다." "그러나 과학기술은 분야만큼은 상황이 달랐다. 이태규와 리승기가 차례로 모교인 교토제국대학 이학부와 공학부의 교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태규와 리승기의 제국대학 교수 임용 소식에 식민지 저널리즘은 열광했다. 이태규가 프린스턴대학으로 연수를 떠났다가 돌아오거나 리승기가 '합성 1호' 같은 인조섬유를 발명한 일은 조선인의 자긍심을 높이는 업적으로 곧바로 보도되었다." "식민지 저널리즘은 과학 내용보다 그 성취가 얼마나 '세계적 수준'이며 그를 통해 어떤 사회적 성공을 이루었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식민지에서 과학은 스포츠 내셔널리즘과 유사한 기능을 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세계적 과학자는 민족의 울분을 풀어준 스포츠 스타와 비슷한 방식으로 소비되었다."(162-3)


9장 제국의 지식으로 제국에 저항한 사람들


"1917년 옌지(延吉)의 명동촌에서 태어난 송몽규는 민족주의 정서가 충만한 공동체에서 성장했다. 송몽규의 삼촌인 송창빈은 홍범도 부대에서 싸우다 전사한 독립군이었다." "1937년 4월 지린성(吉林省)의 대성중학교에서 학업을 재개한 송몽규는 1938년 4월에 윤동주와 나란히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합격했다. 그리고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2등으로 졸업했다. 1942년 봄 송몽규는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제국대학 입학 시험을 치르고 문학부에 선과생으로 들어간다." "송몽규는 1943년 7월 '재(在)교토 조선인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으로 윤동주와 3고 학생 고희욱 등과 함께 체포되어 1945년 3월 7일에 스물아홉의 나이로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한다." "공개된 판결문에 따르면, 송몽규는 "징병제도가 언젠가 조선이 무장 실력을 갖춰 독립하는 데 유리할 것"이라는 정치적 발언을 했고, 윤동주는 일제가 조선어 과목을 폐지한 것을 비판하는 등 조선 문화 보존에 관한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178-80)


"박영출의 반일 의식은 집안 분위기가 깊은 연관이 있었다. 아버지 박인표는 동래군 기장면의 대지주로 1910년대에 백산상회의 안희제 등 기장·양산 지식인들과 함께 '광복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1917년경에는 김두봉 등과 함께 합자회사 고려상회를 인수·운영하며 독립운동 조직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생물의 진화·발전에 흥미를 가졌던 이과 학생 박영출은 마르크스 서적을 읽으면서 인간 사회의 진화·발전을 규명하는 경제학 전공으로 방향을 틀어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에 진학한다. 대학 시절을 거치며 박영출은 반일 의식과 운동에 대한 열정이 더욱 커졌다." "1934년 봄, 졸업과 함께 귀국한 박영출은 이관술을 통해 1930년대 좌익운동의 핵심이었던 이재유를 만나 '조선공산당 경성재건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하다 검거된다. 이후 1936년에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8년 8월 옥사했다. '곰'과 같은 우직함과 불꽃같은 열정으로 일관한 삶이었다."(182-4)


10장 금녀의 영역, 제국대학으로 유학 간 여성들


"(한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 네 명 중 한 명인) 신의경은 1927년 이화여전을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호쿠제국대학 법문학부에서 서양사를 전공했다." "식민지 말기 전시동원체제가 더욱 강화되면서 신의경은 신사참배와 '황국신민서사(맹세)' 등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 행위를 하지 않기 위해서 모든 공직 활동에서 물러나 가정에서 은둔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린 데에는 월남 이상재의 감화가 영향을 미쳤다. 1921년 당시 감옥에서 나온 신의경을 위로하며 이상재는 "작은 감옥에서 큰 감옥으로 나왔구나."라는 말을 남겼다. 그녀는 월남의 말에 깨달음을 얻어 나라가 독립될 때까지 더욱 험난한 길을 걸어야겠다고 각오했다고 한다. 해방 후 미군정이 1946년 12월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의장 김규식)을 발족시키자 신의경은 여성 의원으로 참여했다. 해방기에 신의경은 김규식과 일정한 관련을 맺고 활동하며 그의 정치 노선을 지지했다."(204-6)


"김삼순은 1929년 경기공립고등여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33년에는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 이과를 졸업한다. 졸업 후 귀국하여 진명여자고등사범학교와 경기공립고등여학교에서 6년여 동안 수학과 화학 교사로 있었으나 식을 줄 모르는 학구열로 다시 일본으로 떠난다. 1939년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 연구과 수료 후 1941년 훗카이도제국대학 식물학과에 입학하여 1943년에 졸업했다. 그녀의 나이 서른넷이었다." "김삼순은 1972년 '한국균학회'를 창설하고 초대 및 2대 회장을 역임했다. 당시는 양송이를 제외하고 대부분 야생 버섯만을 따다 수출하던 시절이었다. 김삼순은 일본에서 종균을 들여와 한국에 맞는 느타리버섯 인공재배법을 농가에 보급하여 한국 버섯 산업의 기틀을 마련했다. 김삼순은 여든한 살의 나이에 한국의 야생 버섯들을 정리한 《한국의 버섯도감》(1990)을 출판하는 등 아흔한 살로 죽을 때까지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211-2)


11장 식민지인들의 제국대학 동창회


"1920년대 당시 교토제국대학 학생들은 도시샤대학 유학생들과 함께 교토학우회의 주축을 형성했지만, 제국대학생이라는 특권 의식은 없었다. 제국대학에 대한 자부심이야 있었겠지만 당대 분위기가 그것을 억눌렀다. 1920년대 유학생 사회는 학력·출신·계급 등을 뛰어넘는 평등 의식이 강했고, 무엇보다 반일 의식이 넘쳤다."(223) "민족운동, 사회운동과 연관되어 있던 교토학우회의 성격은 193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급격하게 변한다. 제국대학 학생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만주사변 이후 식민지인이라는 자각과 운동성은 약해졌고 팽창하는 제국 엘리트로서의 자의식은 점점 강화되었다."(229) "1940년대의 일본 제국주의는 더 이상 조선이 식민지가 아니라 제국의 동등한 한 지방이라고 선전했다. 제국대학 조선인 유학생은 '식민지 출신의 유학생'에서 '지방에서 올라온 수재'가 되었다. 식민지인이라는 자의식은 사라졌고, 시골 출신의 수재로서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 하는 문제만 남게 되었다."(233-4)


12장 제국대학 유학생들은 해방 후 무엇을 하였나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를 위원장으로 1945년 12월 17일 처음 모인 '행정연구위원회'는 약 70명의 총독부 고등문관 출신들로 조직된 임시정부 산하 단체였다."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자신들을 중심으로 한 과도정부를 세우려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국가를 운영할 구체적인 방안도 행정조직도 없었다. 이에 임시정부는 행정 경험이 있는 총독부 조선 관료들 중심으로 '행정연구위원회'를 설립하고 산하에 국토계획, 행정조직, 법제, 재정, 보안 등 총 19개 전문위원회를 만들었다. 행정연구위원회는 한마디로 임시정부가 집권하기 위해 꾸린 건국준비위원회(인수위원회)였다." "신익희는 식민지 시기 행정 경험자들을 '처벌'의 대상이 아니라 국가 건설을 위한 '조력'의 대상으로 포용하는 실용주의자의 면모를 보인다. 나쁘게 보자면, 친일파를 활용하여 국가 운영의 틀을 고민한 점에서 이승만의 노선과 근접해 있었다. 총독부 고등문관들에게 '행정연구위원회'는 복음과도 같았다."(237-8)


"임시정부 행정연구위원회 산하 헌법분과위원회는 1946년 1월 중순부터 3월 1일 사이에 여섯 차례 회합을 통해 헌법 초안을 작성했다. 이것이 1단계 헌법 초안으로 이른바 〈한국헌법〉이라고 불린다. 행정연구위원회의 헌법 초안을 주도한 사람은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출신으로 조선총독부 농상과장을 지낸 최하영이었다." "1948년 5·10 총선 이후 정부 수립 일정이 구체화되자 행정연구위원회는 자신들의 1단계 헌법 초안인 〈한국헌법〉을 검토하는 작업을 재개했다. 이때 신익희의 권유로 유진오가 합류했다. 대략 1948년 5월 14일부터 5월 31일까지 10여 차례 회합하여 2단계 초안인 〈유진오-행정연구위원회〉 공동안이 마련되었다."(240) "행정연구위원회의 핵심 성원들은 이 과정을 거쳐 신생 대한민국 권력의 중추로 되살아났다. 최하영은 제1공화국의 심계원장(감사원장)이 되었고, 장경근은 이승만 정부에서 내무부 차관과 국방부 차관, 내무부 장관, 자유당 정책위원장 등 요직을 역임했다."(242)


"사사오입 개헌 파동에는 잘 배운 엘리트들의 곡학아세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개헌 부결과 가결 사이를 오간 국회 부의장 최순주는 연희전문학교 상과를 나와서 미국 유학 후 도쿄제국대학 대학원에서 공부한 엘리트다. 연희전문학교 교수, 조선은행 총재, 재무부 장관을 거쳐 국회 부의장으로 재임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개헌을 관철시키겠다고 호언했다. 자연인(인간)을 정수가 아닌 소수로 나눌 수는 없다며 엄숙한 '생명 존중'의 논리로 사사오입을 강변한 이재학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총독부 산하 충청북도 사회과장과 단양군수 등을 역임했다. 수학적 권위로 불려 나온 대한수학회장 최윤식 서울대 교수는 도쿄제국대학 이학부 수학과 졸업생이었다." "(자유당의 주장이 억지에 불과하다는) 자명한 상식을 석학인 최윤식은 애써 외면함으로써 자신의 프로필에 이전과는 다른 의미의 '최초' 타이틀을 추가했다. 그는 해방 이후 '최초로' 정치 권력에 부역한 과학자가 되었다."(245-6)


13장 남한의 지식 재편을 주도하다


"패전 이후 일본으로 돌아간 경성제국대학 일본인 교수들을 중심으로 1950년 10월 조선학회가 창립된다. 이들은 해마다 학회를 개최하고 논문집을 간행했다. 1961년에 열린 12회 조선학회는 열 명의 한국 학자들을 초청했다. 해방 후 한국과 일본 사이에 이루어진 첫 번째 공식 학술 교류였다. 한국 학자들의 항공료와 체재비를 지원한 건 뜻밖에도 조선학회가 아니라 미국의 아시아재단이었다." "당시 미국은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 공산주의 블록에 대응하는 냉전 전략을 수립하고, 이러한 전략의 현안인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박정희 정권에게 압박했다. 텐리에서 조선학회가 개최되던 같은 시간에 도쿄에서는 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12회 조선학회는 미국이 주선한 한일 학술의 국교 정상화였던 셈이다." "한국 학자들의 좌장 이병도를 비롯하여 최호진, 김두헌 등 참석자 대부분은 식민지 시기 일본 유학생이었거나 경성제국대학 졸업생이었다."(268-9)


"그렇지만 막상 학술회의가 시작되자 이들은 자신들이 공유했던 제국의 '조선학'이 해방 이후 새롭게 재편되었음을 자각했고, 서로 달라진 위치에서 발화했다. 식민사학의 원흉으로 지목되곤 하는 이병도의 개막 강연은 다분히 민족주의적이었다. 삼국시대 고분에 대한 강연에서 이병도는 고구려·백제·신라의 능묘가 중국과 변별되는 독자적 구조와 형이상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신라의 고분은 "중국 역대의 능묘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신라만의 독특한 것으로, 서양의 이른바 스톤 서클(stone circle) 류의 발달된 형태로 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고대 한국문화의 독자성과 주체성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지니는 보편성을 '서양의 스톤 서클류의 발달된 형태'로 이해하는 논법에서 한국문화를 서구적 보편성과 연결하려는 이병도의 욕망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일본 제국의 '조선사' 연구자였던 이병도는 미국 헤게모니 아래의 '한국사' 학자로 전신했다."(270)


14장 북한 지식 제도를 확립한 제국대학의 졸업생들


"출범 당시 김일성종합대학은 제국대학 지식의 연장 속에 있었지만, 불과 1~2년이 지나지 않아 소련식 지식으로 급격히 재편성되었다. 황장엽은 김일성종합대학에서의 지식 재편과 세대교체를 상징하는 사례다. 그는 식민지 시기 평양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주오대학 야간부를 다니다 삼척의 시멘트 공장에 징용되어 1년 6개월간 노역을 했다. 해방 이후 모교인 평양상업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조선노동당에 입당, 1948년 중앙당학교 이론반에서 소련 교과서로 철학 집중 강습을 받는다. 이후 황장엽은 김일성종합대학 연구원(대학원)에 진학하여 1년 만에 소련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949년부터 모스크바종합대학 철학연구원에서 4년간 유학했다. 1953년 11월 귀국한 그는 김일성종합대학 철학 전공 교수 및 철학 강좌장을 거쳐 10년 후인 1963년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이 되었다. 일본 유학생 황장엽은 소련 유학을 통해 새로운 지식의 헤게모니를 획득할 수 있었다."(288-9)


에필로그 '제국대학 유학'의 역사화를 위하여


"우리 사회는 제국대학을 민족주의에 토대를 둔 도덕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데 아주 익숙하다. 물론 그 책임의 대부분은 제국대학 유학생들에게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유학생 대부분은 일본 제국-식민지 체제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총독부 행정-사법 및 식산은행과 관립학교 등 식민지 국가 기구의 각 영역에서 그들은 제국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유용한 부품으로 작동했다. 그러한 사실을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부정적 요소 때문에 제국대학이라는 지식 제도와 관련된 근대 한국의 경험을 도덕적인 이분법으로 모두 '악'이라 규정하고 그것을 '적출'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다. 한국 근현대의 지식과 문화, 제도는 솜씨 좋은 외과의사가 좋은 세포만을 남겨두고 암 덩어리를 도려내듯, '일본적인 것' 혹은 '미국적인 것'을 발라내면 '민족적인 것'만 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러한 본질주의야말로 가장 위험한 사고일지도 모른다."(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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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과 변용 - 한국 경제개발계획의 기원
박태균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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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1장 서로 다른 길, 그러나 공통된 목표


"1950년대는 전통시대로부터 50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고, 식민지의 강압정치와 그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이 교차되었던 일제강점기와 함께 좌우 대립에 의해 격정적 회오리가 몰아쳤던 해방정국으로부터 10년도 되지 않은 시대였다. 따라서 이 시기 지식인들의 경제체제에 대한 관념은 전통시대,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정국의 영향이 그대로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의 과정에서 대부분의 정치세력들은 독립 이후 새롭게 건설해야 할 국가에서는 정부가 경제질서에 대한 개입을 통해 효율적인 경제발전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경제목표로 제기하였다." "1940년 10월 임시정부가 발표한 대한민국 임시 헌법을 보면 경제조항 내에 '국민의 기본생활을 확보할 계획경제의 수립', '대규모의 주요공업, 그리고 광산의 국영 또는 국가관리', '토지사유의 제한과 농민본위의 경작권 확립', '공장의 경영, 관리의 노동자대표 참여' 등의 조항이 있다."(28)


"1920년대 이후 제국주의에 반대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입된 공화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1930년대 이후의 사회민주주의 이론 및 일본과 독일의 국가사회주의 이론이 한국사회에 쉽게 수용되었던 것은 전통적 '공'개념과 대동주의의 사상적 기반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30년대부터 해방 직후까지 우익진영과 좌익진영의 경제정책은 토지 국유화, 대규모 생산기관의 국영, 경제적 활동에 대한 경제적 통제라는 공통적 내용을 담았다. 물론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의 '공'개념이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과 평등한 분배의 문제를 강조하였던 반면, 1950년대의 '공'개념은 효율적인 경제성장을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이것은 1950년대 서구의 후진국 경제개발론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국가가 경제질서에 개입함으로써 효율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해야 한다는 1950년대의 사회적 공감대는 경제개발계획이 입안·실행될 수 있는 중요한 사회적 요인이었다."(34-5)


"한국전쟁과 북한의 성공적인 복구과정은 남한에서 경제개발계획의 필요성의 사회적 공감대로 형성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지만, 1950년대의 보다 큰 충격은 미국의 대한원조 감소였다. 1950년대 미국은 '뉴룩정책New Look'을 채택하면서 후진국에 대한 군사·경제 무상원조를 삭감하였고, 1957년을 기점으로 하여 개발차관기금을 설치하면서 유상차관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감축을 위한 논의와 미국의 공적 자본을 대신한 개인기업의 사적 자본 투자를 강조한 것은 미국의 대한원조를 감축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39) "원조의 감축과 함께 또 하나 주목된 것은 무상원조에서 유상차관으로의 전환이었다. 개발차관기금은 무상원조와는 달리 이자와 원금을 갚아야 하며, 차관 계약시 채권자측에서 제시하는 조건에 맞는 계획을 제출하고 이 계획이 승인되어야만 차관을 받을 수 있었다. 정부 관료와 정치인들은 차관을 승인받기 위하여 계획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기 시작하였다."(41)


"1950년대를 통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제개발론은 '민간주도형' 경제개발론이었다. 민간주도형 경제개발론은 경제개발계획의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정부가 자유시장체제를 보조하는 역할만 하고 민간기업이 계획을 주도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간으로 하였다. 1950년대 이승만 정부는 경제질서에 적극적인 통제를 가하였고, 이를 통해 정경유착을 통한 부패가 만성화되었다. 이러한 이승만 정부의 정책 때문에 한편으로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사상적 축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이승만 정부의 강력한 경제통제에 저항하는 수단으로서 자유주의 경제이론이 활성화되었다. 이들은 경제후진 현상이 정부의 강력한 간섭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민주당 신파와 함께 민간주도형 경제개발론을 주장한) 『사상계』 그룹의 핵심적인 주장은 경제 민주화와 외자의 적극적 이용이었다. 경제 민주화에서 가장 문제가 된 부분은 정부 통제의 완화와 자유경쟁적인 기업풍토의 조성이었다."(50-1)


# 『사상계』 필진들의 특징 : 미군정하에서 사회주의적인 경향의 교수들이 대학에서 쫓겨나거나 월북한 후 경제학계의 주류로 등장한 경제학자들. 환율 현실화로 원조에서 파생된 세입을 증대하고, 기업이 자율적 경쟁력을 갖추는데 무게중심


"국가주도형 경제개발론자들은 양적인 성장보다는 산업구조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들이 주장한)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과 내포적 공업화는 서로 다른 개념이면서도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양자는 모두 산업화 전략을 대외무역보다는 내부 경제구조의 균형발전에 두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외부 자본에 종속적이지 않은 경제구조를 만들어 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즉, 외부 경제와 단절된 경제구조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적으로 중공업과 경공업, 그리고 농업을 균형되게 발전시켜 외부로부터의 수입을 대체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경제적 민족주의라는 용어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박희범은 〈'아랍에 낫세르주의'가 있다면 '한국에는 한국주의가 있다'〉고 강조하였으며, 최문환은 〈그들(구미)의 과제가 곧 우리의 과제가 아니다〉라고 표현하였다." "이 경향의 경제학자들에게 소위 '근대화'는 고유의 민족문화와 구미 합리주의의 적절한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56)


# 국가주도형 경제개발론자들의 특징 : 해방 직후 사회주의 계열의 교수들에게 가르침을 받아 해방 이후 대학을 졸업한 경제학자들. 외자도입보다는 내자 동원을 통한 민족자본의 형성, 대기업의 국유 또는 국영화에 무게중심


"1950년대 혁신운동을 주도했던 세력들은 서구의 사회민주주의적 방식을 경제개발의 이상적인 모델로 상정하였다. 이들의 경제사상을 잘 보여주는 것은 진보당의 경제정책이다. 진보당의 사회민주주의적인 지향은 1950년대의 세계정세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였다. 즉, 〈자본주의의 자기수정적 경향〉, 그리고 후진국의 〈민족적 자주독립〉과 〈국내 건설 촉진〉을 위한 노력을 1950년대의 주요한 세계정세로 인식하였다." "진보당에서 주장하는 소위 '사회적 민주주의'의 핵심은 자본주의 경제질서의 모순과 무정부성을 지양하기 위하여 경제에 대한 계획과 통제 정책을 적절하게 배합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교통, 체신, 운수, 은행 등 중요 산업부문과 거대 기업체를 국유화하며, 국가자본과 외국원조에 의해 필요한 산업부문을 신설하고 이를 국유화 또는 국영화할 것을 주장하였다."(61-3)


# 사회적 민주주의자들의 특징 : 경제개발 과정에서 통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일본과 관계를 정상화하게 되면 일본 경제에 예속될 가능성을 경계하는 데 무게중심


"주목되는 점은 서로 다른 경제개발론들 사이에서 공통된 내용들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선 1950년대와 1960년대의 경제개발론은 모두 정부가 경제질서에 개입하는 '경제개발계획'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고 있었다. '민간주도형' 경제개발론자들도 정부가 개입하는 경제개발계획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었으며, 정부의 '보이는 손' 역할을 어떻게 하면 최소화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고민이었다. 이들이 국가와 관료의 경제질서 개입에 강력하게 반대했던 것은 이승만 정부를 통해 나타났던 비정상적인 행태 때문이었지, 정부 개입의 불가피성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 이후 정부의 경제질서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신고전주의적 입론들이 경제학자 및 관료들 사이에서 확산되었고, 1970년대 후반부터 경제안정화 정책의 일환으로 정부의 역할 축소를 위한 논의가 제기되었지만, 정부가 일정한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는 신화는 국민들 사이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67-9)


# 경제개발론들의 주요 공통점

1. 안정보다 성장 강조 : 미국이 원하던 통화가치 조절에 따른 인플레이션 안정화보다는 투자를 통한 생산공급의 확대로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자는 입장

2. 투자 산업부문에서 농업 강조 : 농업부문을 2차 산업 발전을 위한 기반이나 전제조건으로서만이 아니라 산업 발전의 기본 원리로 강조

3. 균형성장론 적극 수용 : 식민지 체제하에서 수립된 불균형적이고 왜곡되었던 산업구조를 혁파하여, 산업 부문별로 자립적이고 균형잡힌 성장 강조

4. 실업문제와 민족자본 부족 절감 : 생산력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위장실업(잠재실업)과 경제개발계획의 전제조건인 자본축적의 방법 고민


2장 현상유지정책에서 근대화론으로: 미국 대외정책의 전환


"1953년부터 집권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한편으로는 한국전쟁 이후에 나타난 미국의 저개발국 원조정책의 변화, 즉 경제부흥을 위한 원조에서 군사원조로의 변화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이것은 첫째로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가 한국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1949년 경제협조처 원조를 위한 자금 승인을 의회에 요청하면서 '한반도에서 남한의 자립되고 안정된 경제가 아시아의 등불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였지만, 한국전쟁은 이러한 인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즉, 경제적인 안정을 통해서 봉쇄를 강화하겠다는 정책이 후퇴한 것이다." "이제 경제원조만으로 저개발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공산주의의 확장정책을 봉쇄할 수 없다고 평가하기 시작했다. 둘째로 미국의 자체 재정 문제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해서 늘어난 미국의 재정을 줄여야 했고, 이의 일환으로 '건전한' 재정을 목표로 한 뉴룩정책 하에서 대외원조 역시 감축되기 시작하였다."(117-8)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역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국제학, 지역학, 정치학 등에서 먼저 나타났는데, 저개발국가의 역사, 문화, 그리고 사회구조의 다양성과 서구사회와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는 지적에서부터 출발하였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식민지의 경험, 민족주의·중립주의·공산주의로의 편향성, 그리고 현대화된 조직으로서 군대의 중요성 등이다. 또한 미국식 보편주의에서 벗어나 미국식 민주주의를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그대로 대입시키려는 경향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서유럽 중심의 보편주의에 비해 진보적인 견해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의 기준으로 볼 때 비민주적인 저개발국의 군부정권에 대한 지원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이론적 배경을 제공하였다. 제3세계의 정치체제를 서구정치에 그대로 대입하지 말고 문화적 상대주의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1960년대의 파이와 헌팅턴의 연구 역시 이러한 경향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131-3)


# 로스토우의 근대화론

1. 군사 원조에 치우친 미국의 대외원조 재고는 저개발국의 경제성장을 저해하고 전체주의적 성향을 뒷받침한다.

2. 냉전의 축이 유럽에서 아시아로 이동(중국의 공산화, 비동맹 움직임, 민족주의 게릴라 운동 등)하고 있다.

3. 경제 원조는 군사 원조에 비해 미국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저개발국 국민들의 자신감을 고양시킬 수 있다.


"로스토우는 미국의 대외원조정책에서 "위대한 전환"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로스토우의 경제개발원조론은 군사원조나 소비재 원조에 비하여 상당히 많은 액수의 자금이 필요했지만, 미국이나 서구의 경제에 대한 기여가 가능하다는 점으로 원조자금의 증액을 합리화하였다. 로스토우가 강조한 경제개발원조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강조한 사적자본에 의한 투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자본"에 의한 "장기간의 계획된" 원조를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선진제국의 국가재정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로스토우의 제안에는 "무상원조" 대신에 저리低利이기는 하지만 "유상차관" 형식으로 원조 수단을 바꾸어야 한다는 점을 중요한 전제로 하였다. 또한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이나 일본 같은 산업화된 국가들이 계속 발전할 수 있는 국제적인 경제활동의 환경을 창출하는 것〉을 주요한 목적으로 내세웠다."(146-7)


"로스토우는 저개발국의 식민지 경험을 경제성장 가능성의 중요한 전제로 상정하였다." "저개발국가들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식민지적인 경험으로 형성된 사회간접자본이며, 이것이 도약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강력한 '민족주의'를 형성시켰다는 것 역시 로스토우가 지적하고 있는 저개발국 또는 제3세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외부의 침입이 민족주의를 태동하였지만, 그것이 후진국 근대화의 힘을 추동할 수 있는 최고의 동력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파악하였다." "로스토우는 민족주의에서 유발되어 국민적 단합에 기반을 둔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민국가의 확립이 경제개발계획의 실행에서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민족주의의 이용은 다른 한편으로 민족주의를 이용하려고 하는 '공산주의의 음모'에 대한 대응이며, 민족주의가 적대화되지 않도록 근대화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방안이었다."(148-9)


"사회개혁에 대한 로스토우의 주장과 관련하여 눈에 띄는 것이 후진국 내의 지배세력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즉, 전근대적인 생산관계와 연결되지 않은, 그리고 해당 지역에서 가장 근대화된 기구와 관련이 있는 계급이나 계층을 새로운 사회지배 엘리트로 등장시키는 사회개혁이 경제개발원조의 가장 중요한 조건의 하나로 제시되었다. 새로운 정치지도력은 '젊고, 농촌 출신'이 바람직하며, 이러한 새로운 지도력은 지식인-상인-군인 연합이 되어야 한다고 설정하였다. 그럴 때 이들이 전근대적인 생산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사회개혁을 수행하면서 근대적 산업화에 더욱 매진할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지도력의 창출에서 군대조직, 또는 군인이 차지하는 중요성이 특히 강조되었다." "로스토우는 1950년대를 통해 등장한 군부정권의 군사 엘리트들은 공산주의적인 성향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하였다."(152)


3장 안정에서 성장으로: 1960년대 초 미국의 대한정책 변화


"1956년 이후 송인상으로 대표되는 전문관료들이 경제정책을 입안할 수 있는 지위에 오르게 되자, 미국은 새로운 관료의 등장과 함께 경제개발계획을 위한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고 보았다. 아울러 부흥부 산하의 산업개발위원회 설치와 1959년의 경제개발 3개년계획 작성을 경제개발계획 실행을 위한 긍정적인 움직임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긍정적인 인식과는 달리 1958년 이후의 지속적인 경제성장률 하락은 경제개발계획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또 다른 원인이 되었다. 1958년 이후 미국은 인플레 억제 목표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 인식하였고, 한국전쟁 이후 한국 경제에 나타난 유일한 긍정적인 신호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의 억제와 미국의 원조 감소는 다른 한편으로 경제성장률 저하를 가져왔고, 민주당 정권 시기에 이르러서는 경제성장률이 2.3%까자지 하락하였다. 1959년 미 대사관 관리들은 처음으로 경제성장률의 저하로 성장을 위한 계획이 필요하다고 보았다."(244-6)


"경제 상황 못지않게 미국이 주목했던 것은 정치, 군사 상황의 변화였다. 미국의 대한정책은 1945년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내적, 국제적인 상황에 따라 내용이 변화되었지만, 한반도가 중국공산당과 일본 사이에서 '완충지대'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군사적인 의미와 미국의 대한정책의 성패가 자유세계의 이데올로기적 전쟁의 '상징'으로서 역할을 한다는 정치적인 의미는 변하지 않는 기본적인 목적이었다." "정치·군사적인 관점에서 특히 중요하게 다루어진 것은 한국의 정치·사회적 안정 여부였다. 한국 내부의 정치적 불안정은 이데올로기의 전시장으로서의 한국이 외부로부터가 아닌 내부에서 붕괴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한국전쟁 기간의 '부산정치파동'을 통하여 한국의 정치적 불안정이 세계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절감하였던 미국은 1950년대 후반의 정치적 불안정이 미국의 대한정책을 실패로 몰아갈 수 있는 중대한 문제로 인식하였다."(247)


"미국의 군사·정치적 상황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지적되어야 할 부분은 북한의 상황 변화에 대한 인식이다. 1950년대를 통해 북한은 성공적으로 전재 복구를 이루었으며, 북한의 경제성장 역시 남한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미국은 북한이 경제 상황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데올로기적 전시장'인 한반도에서 사회주의 체제인 북한에 비해 경제 성장이 미흡하였던 남한의 상황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남한의 지식인들 역시 북한의 경제발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였고, 경제개발계획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주요한 원인의 하나였다. 미 국무부는 1962년 경제기획원의 경제개발계획안에 대해 7.1% 성장률을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였지만, 미 국무부 스스로가 새로운 정책결정 과정에서 남한이 북한보다 더 높은 경제성장률을 이루는 것이 중요한 경제적 목적의 하나임을 분명히 하였다."(252)


"케네디 행정부의 대한정책 변화는 1950년대의 대한정책과 비교하여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한국 정부가 경제개발계획을 입안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시해야 하며, 미국은 경제개발원조를 통해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점이 우선적인 정책으로 설정되었다. 특히 대한원조에서 외국인 민간투자의 역할을 더 이상 강조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1950년대의 정책과 비교할 때 가장 큰 차이점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특징은 새로운 정책이 전반적인 사회적 개혁을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사회개혁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부분은 한국의 사회개혁이 단지 제도개혁에 그쳐서는 안 되고 정신개혁이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고 지적한 점이다. 여기에는 〈국가지도자들에 의한 국가의 목표와 이상의 규정과 대중적 선언〉, 〈학생, 지식인, 그리고 언론과의 보다 나은 관계 유지〉, 그리고 〈한국의 이미지 제고〉 등이 포함되어 있다."(259-60)


"미국의 대한정책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변화는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해야 한다는 부분이 1950년대에 비하여 더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1962년 5월에 나온 한일관계와 관련된 국가안보회의에 제출하기 위해 마련된 문서에서는 한일관계를 빨리 정상화해야 하는 이유로서 ①한국의 빠른 경제개발계획을 위해 일본의 원조가 필요하다는 점, ②수출을 위한 일본 시장이 필요하다는 점, ③자유세계의 단합과 아시아의 힘을 막는 중요한 장애물이 제거되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④북한 공산주의 정권과의 점증하는 심각한 경쟁에서 한국 정부의 권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 등이 지적되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④번 항목이다. 만약 일본이 남한만을 대상으로 한일협정을 맺을 경우 북한에 비하여 남한의 정통성이 더 강화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즉, 한일협정은 이 시기 대한민국 정부의 권위를 높여주는 방안의 하나로 논의되었던 것이다."(262-3)


"1964년부터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입안을 위한 미국인 고문, 특히 콜의 역할은 매우 시사적이다. 이전의 주한 미국대사관이나 원조관련 기관의 미국인 관료들이 대체로 경제전문가라기보다는 관리형 관료였던 데 비하여 1961년 민주당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을 위한 고문으로 내한했던 울프 박사와 콜 박사는 경제개발론 및 대외정책 전문가였다." "1964년 군복만 벗은 민간인 박정희를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는 시점에서 미국은 새로운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새로운 관료들을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 중반 이후 경제개발계획의 입안과 실시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한국은 1956년부터 경제개발계획을 입안하였는데, 계획의 입안과 실시가 힘을 받기 시작한 시기는 미국의 대한정책이 변화하기 시작하는 1961년이었고, 본격적인 실시가 가능했던 시기는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의 대한정책을 입안하는 부서에 새로운 관료들이 자리잡기 시작하는 1964년이었다."(272-3)


4장 경제개발계획과 그 수정


"1962년 1월 발표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중요한 특징은 두 가지이다. 첫째로 산업화 전략이 균형성장론과 수입대체산업화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산업화 전략에서는 핵심사업에 중점적으로 투자하는 방식의 불균형성장론을 따르고 있지만, 목표에서는 수입대체산업화와 산업 간의 균형성장이 제시되었다." "아울러 군사정부의 계획을 이전 계획과 비교할 때 나타나는 또 하나의 공통점은 산업별 계획이 병렬적으로 나열되어 있으며, 단기간에 작성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시의 경제관료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 부정확한 통계와 계획입안에 참여한 경제학자, 경제관료들이 풍부한 경험과 높은 수준의 이론을 겸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둘째로 내자 동원이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이전 계획이 자본축적을 위하여 외자의 적극적인 이용을 강조한 점을 고려하면 내자동원 강조는 국가주도형 경제개발론자들이 주도한 군사정부 경제개발계획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320-3)


# 계획안 발표 이후 진행된 내자 동원 정책의 실패

1. 금리 인상 : 예금금리를 대폭 인상해서 저축을 유도하였지만 엄청난 통화팽창에 따른 인플레이션 발생

2. 증권 시장 활성화 : 경제침체 속에서도 주가가 큰 폭으로 상승하면서 중앙정보부가 정치자금 조성

3. 통화개혁 : 환화와 원화를 10:1의 비율로 설정한 '긴급통화조치법'을 기습적으로 시행했으나 미국의 반발로 폐기


"내자 동원 실패는 통화개혁이나 증권파동의 처리과정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미국의 압력이나 정치적 부정의 개입 때문이기도 하지만, 군사정부가 당시의 경제현실을 무시한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이었다. 1959년부터 시작된 경기침체와 1960년과 1961년 환율의 현실화, 그리고 공공요금 인상에 따른 인플레이션 때문에 일반 국민들에게 산업자금을 동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통화팽창과 인플레이션은 계속되었지만, 일반 국민들의 손에 들어오는 자금은 없었고, 이것은 곧 소비 위축에 따른 생산능력의 감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반 국민의 돈으로 내자를 동원한다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경제시책이었다. 부정축재자 처리과정을 통해 은행을 장악하였지만, 시중자금이 경색된 상황에서 정부가 민간으로부터 투자자금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채시장의 자금 역시 예상했던 것만큼 은행에 많이 유치되어 있지 않았다."(325-6)


"미국은 군사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이 비현실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졌다고 비판하였다." "정부의 과도한 역할에 대한 반대는 내자를 동원하여 경제개발계획을 수행하고자 하는 군사정부의 정책에 대한 불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외자를 이용한 불균형적인 경제개발이 저개발국을 자본주의 경제체제 내에 묶어둘 수 있다는 로스토우의 근대화론과, 내자동원 및 수입대체산업화를 주장하는 군사정부의 균형성장론은 서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또 다른 불만은 군사정부가 정책을 발표하기 전에 미국과 '사전 협의'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었다. 이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성격이 짙게 깔린 것이었다. 미국은 사후 승인이 아니라 계획입안과정에서 협의를 통해 미국의 정책에 적합한, 또는 미국이 판단하기에 실행가능한 계획을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은 '합의된 5개년계획'이 나오기 전에는 경제개발계획을 위한 원조가 불가하다는 방침을 군사쿠데타 직후 결정하였다."(330-1)


"1962년 11월부터 군사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수정작업에 착수하였다. 이 시점에서 미국이 군사정부에 요구한 사항은 제철소와 종합기계제작소 건설을 비롯한 수입대체산업화 전략의 포기와 수출 증대를 위한 중소기업 지원, 계획의 입안과 실시과정에서 사기업의 역할을 제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군사정부는 1963년 4월 본격적인 수정작업에 착수하여, 민정이양 선거 후인 1964년 2월 '보완계획'을 발표하였다." "보완계획과 같은 시기에 발표된 '제3년차 계획' 역시 민간부문 강화를 강조하였고, '합리적인 경제질서 확립'을 위해 공공부문의 비중을 낮추어나가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즉, 한국의 〈공공부문 비중이 타 자유진영제국가에 비하여 컸〉다는 점을 전제로 하여 정부기업의 한정과 민간기업의 지원 및 체질 개선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제시하였다. 또한 '안정기조 위에서의 개발계획 추진'은 민간부문의 활성화와 함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원칙의 하나로 제시되었다."(336-7)


"저개발국의 산업개발 형태를 수출주도형으로 전환하는 것은 케네디 행정부의 후진국 정책에서 나타나는 특징의 하나였다." "수출주도형 강조는 한국 정부의 재정수지 적자를 줄임으로써 미국의 대한원조를 감축할 수 있다는 점과 환율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는 이점이 함께 고려된 것이었다. 품질이 좋지 않은 한국제품이 수출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원화의 평가절하가 필수적이었다." "미국의 압력은 경제개발계획의 내용 수정에만 그치지 않았다. 1963년부터 1966년까지 자유무역체제를 지향하는 경제정책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1964년의 환율조정과 역逆금리제도 채택, 수출진흥을 위한 세제 개편, 1965년 이후 청와대에서 수출진흥확대회의 개최, 1967년 수입자유화 확대를 위한 네거티브 시스템 도입 등은 1963년 이전의 경제정책과는 정반대였다. 미국은 이 과정에서도 군사정부와 군사정부의 뒤를 이은 박정희 정부의 경제정책 수정 및 개혁 과정에 일부 개입하였다."(338-9)


# 역逆금리 : 통화불안 때의 평가변경이나 고금리를 노리고 외자가 유입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비거주자의 예금에 대해서 마이너스의 금리를 부과하는 것.


"보완계획 성립은 미국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었지만, 계획 자체의 내용을 보면 박정희 정부가 특정 부분에서 이전 계획의 특징들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제철소와 종합기계제작소 등 많은 양의 외화를 필요로 하는 산업은 제외되었지만, 수입대체를 목적으로 하는 비료, 정유, 시멘트 산업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산업목표로 남아 있었다." "실제 경제계획의 실행과정에서도 군사정부는 부정축재자 처리과정을 통해 수입대체를 목적으로 하는 산업에 중점 투자가 이루어지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또한 보완계획은 전체적으로도 1950년대의 중요한 담론이 되었던 균형성장론적인 성격을 담고 있었다. 수출이 이전에 비해 강조된 것은 사실이지만, 가장 우선적인 목표로 설정되지는 않았다." "미국이 중소기업 중심의 정책을 강조하였고, '보완계획' 내에도 중소기업 진흥을 위한 수출정책이 포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부는 대기업 중심정책을 고수하였다는 사실 역시 중요하다."(340)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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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탄생 - 시대와 대결한 근대 한국인의 진화
최정운 지음 / 미지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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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한국인의 정체에 접근하는 문제


"근대 소설문학이 표방하는 사실주의(realism)란─사회과학에서의 '현실주의(realism)'와는 달리─주어진 현실을 재삼 반복하고 운명으로 확언하는 과다 반복의 보수주의의 신파조 담론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사실주의는 아직은 없는 것, 없는 인물을 있을 수 있는 존재로 상상하여 흡사 이미 있는 존재로 포장하여 제시할 수 있는 언어 체계이며, 더 나아가 그 새로운 존재가 과연 현실 속에서 서식이 가능한지 실험하고 모색함으로써 주어진 현실의 대안을 시도할 수 있는 언어 체계이다." "근대 문학의 규범으로서의 사실주의는 결코 유토피아주의의 반대항이 아니다. 오히려 사실주의적 근대문학은 '영구 혁명'의 의미를 갖는다. 사실주의는 현실을 부정하는 이상의 광기를 길들이는 담론이다. 근대 소설문학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인물뿐만 아니라 존재하기를 고대하는 인물, 나아가서 존재할 수도 있는 인물 등 다양한 종류의 인물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22-3)


2장 홍길동과 성춘향


"홍길동이 큰 규모의 재물을 약탈하며 '활빈당 행수 홍길동'이라는 글을 크게 남긴 것이나 백성들에게 재물을 나누어준 것은 모두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홍길동이 백성들에게 재물을 나누어준 목적에 대해, 빈궁하고 불쌍한 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라거나 도와주기 위해서라는 교과서적인 답을 내놓는 것은 작가의 의도와 맞지 않는다.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세종 시대라는) 조선의 전성기였다.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불만을 표출한다든가 정치 사회적 질서가 붕괴되고 있다는 사실은 나타나지 않는다. 홍길동은 작가 허균이 이전에 제시했던 '호민(豪民)'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이른바 주로 정론에서 논하는 이 작품의 사회적 문제의식은 일제 치하의 지식인들이 그들이 처한 상황으로 미루어 발명한 것이지 원작의 의미는 아니었다. 『홍길동전』은 전근대적 영웅 소설로서 쓴 작품이었다."(40)


"단적으로 『홍길동전』은 동명왕 전설을 조선 후기라는 공간에서 반복시킨 신화(神話)였다. 홍길동은 무엇보다 하늘이 정해준 운명을 타고난 영웅이었고, 어렵사리 집을 나서자 밝은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가 허균은 잘 알려진 대로 당시에 서양갑 등 서자 출신의 친구들과 가깝게 지냈고 그들의 불만과 울분에 익숙한 처지였다고 전한다. 잘난 사람이 조선에서 서자로 태어났다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역성혁명으로 스스로 왕이 되려는 반역의 길이 아니라면─옛날 동명왕처럼 새 나라를 만들어 왕조를 새로 여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는 누구나 수긍하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해결책이었고, 이에 그 길을 상상해서 만든 초현실적인 스토리, 그것이 바로 『홍길동전』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홍길동은 '덕(德)'과 '인(仁)'의 미덕도 갖춘 마음이 넉넉한 진정한 영웅이 되었다."(42-4)


"홍길동이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처지라는 그의 '주제가'로 유명하듯이 춘향 또한 특이한 사회적 신분이 그녀의 정체성의 출발점이다. 춘향의 어미는 퇴기 '월매'이고 아버지는 양반인 '성 대감'이다. '기생의 딸'이라 불리고 기생으로 취급받기도 했지만, 춘향은 동시에 '양반집 규수'였다. 본인과 그 어미는 양반의 생활 양식을 고수하며 살았고 춘향은 기생 일을 절대로 하지 않았다. 춘향이 어려서부터 서책을 가까이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계급적 조건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춘향의 신분 조건은 애매하고 논쟁적인 문제였다. 춘향의 미모는 이러한 사회적 신분의 애매함으로 인해서 더욱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신분의 애매함은 춘향과 그 어미가 그녀의 미모를 활용하여 극복해야만 하는 열등감이자 약점이며 평생의 숙제였다. 그녀의 이런 신분 조건이 없었다면 그녀의 아름다움은 이야깃거리가 될 필요도 없었고 희대의 사랑도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51)


"성춘향이라는 소녀는 천하일색의 미인에다 이몽룡 한 사람에게 정열적인 사랑에 빠져 정절을 목숨으로 지키고, 자신의 신념을 어떤 상황에서도 뚜렷하고 강하게 표현하는 당찬 근대적 여인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전통문화의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까지 갖추고, 자아를 확신하는 여인이었다. 춘향이란 인물의 등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춘향이 원용하고 있는 사상적 기반인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한편으로는 사회의 신분 제도와 각종 계서제를 정당화하여 봉건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의 도덕성과 존엄성의 문제를 나라와 학문의 궁극적 목적으로 제시하여 오히려 근대화의 가능성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춘향의 출현은 조선이라는 중세 국가의 심각한 동요를 보여주긴 하지만) 성춘향 역시 끝까지 근대적이지는 못했다. 결국 그녀도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정경부인이 되어 신분 상승을 완성하고, 전통의 품안으로 회귀하고야 말았다."(61-2)


3장 신소설의 인물들과 그들의 세상


"우리의 공식적인 국문학사에서도 신소설은 묘한 역사적 단계로 이해되고 있다. 전근대 소설과 구분되고 근대 소설과도 구분되는데, 보통은 문학적 수준이 결여된 수준 낮은 작품들로 이해된다. 사건의 진행이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우연한 사건들이 수시로 끼어들며, 스토리는 복잡하고 정신없이 전개되고, 또 인물들의 이야기를 표현함에 있어 '우여곡절', '기구한 운명'이라는 말 외에 다른 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얼핏 개연성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여성 인물들이 빈번하게 자살을 시도하는 등 과도한 흥미 위주의 전개에 이르기까지 여러 이유로 신소설들은 역사 발전에서 비정상적인 단계로 취급되어왔다." "(을사조약 체결 1년 후인) 1906년에 신소설이 나타난 것은 뜬금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소설들을 유심히 읽어보면 그간 전혀 알지 못했던 대한제국의 현실이 담겨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71-2)


"이인직과 이해조의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당시의 현실, 즉 사회는 붕괴되고 개인으로 흩어져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모습이야말로 신소설이라는 새로운 이야기의 형태가 우리 역사에서 나타난 원인이었다. 루카치에 따르면 근대 소설은 "세계가 신에게 버림받았다"는 관념에서 출발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신소설도 죄악으로 가득 찬 사회, 망한 나라, 타락한 세상이라는 판단에서 출발하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전무후무한 '신소설'이라는 문학의 장르가 나타난 것이었다. 근대 소설로서 신소설의 또 하나의 특징은 대부분의 경우 결코 행복하지 못하고 극도로 고단하고 참담한 인생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해피엔드로 끝맺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신소설이 전대미문의 참담한 이야기들을 엽기적으로 그려낸 작품들이었기 '해피엔드'는 더더욱 절실했을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이 더 독한 한(恨)을 풀어내야 했다."(102)


"홉스적 자연상태에서는 사회의 일관된 문화가 붕괴된 상태이며 따라서 개인들이 어떻게 만들어져야 한다고 규정하는 문화의 핵심적 구조가 작동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최고의 선택은 한반도를 떠나는 것 특히 유학이었고, 그다음은 자신의 개화된 의지를 증명하는 자살이었다. 이런 선택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서 약자들이야말로 가장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약자들은 피해자로서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했다. 거의 삶을 포기한 사람들이든 그런 대로 살아 보겠다고 애쓰는 사람들이든 그들은 작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악행에 서슴지 않고 가담해야 했다. 영악해야 했고 교활해야 했다. 자신의 모습을 숨기기도 하고 상대를 기만해야 했다." "근대 사회 또는 근대성이란 다양한 얼굴을 갖지만, 한반도에서는 중세가 망가지고 흩어진 파편들로서의 개인들이 근대로 나타났다. 거기에서 처음 발견된 근대의 생명체는 속 빈 넝마 인형 같은, 인물성이 부정된 '피해자 여성'들뿐이었다."(131-3)


"이렇게 사회가 붕괴되고 모든 윤리가 파괴된 시대에 이르자 기존의 사회문화와 전통문화 전체가 부정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 시대에 오면 그간 구한말을 통해 지배력을 유지했던 '위정척사(衛正斥邪)'나 '수구(守舊)'는 급격히 힘을 잃고 '개화'가 지배적인 흐름으로 부상한다. 이 흐름은 갑오경장부터 뚜렷했다. 신소설 작품들의 경우는 노골적으로 친(親)개화 입장이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기존의 문화는 비참한 현실의 주범이었다. 이런 경향은 중국에서도 사회가 붕괴된 현상을 증언하던 루쉰의 『광인일기』에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세상이 '예교(禮敎)' 때문에 나타났다고 하며 중국의 유교 전통을 통째로 부정한다. 구한말의 마지막 시기에는 서구 문물, 지식과 사상들이 뚜렷한 의미와 용도도 묻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수입되었다. 20세기 초에는 서구의 '신학문'은 위기에서 구원을 위한 카리스마적 존재로 나타났다."(134-5)


"이미 1880년대부터 조선에서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이룩하여 천황이 권력을 잡은 후 국가가 일변하여 나날이 발전하고 백성들의 삶도 개선되어 태평성대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143) "이 시점에서 조선과 일본과 만주가 한 나라로 합쳐야 한다는 생각은 결코 민족주의적 사상을 배반하는 것이 아니었다. 충분한 힘을 전제로 유럽의 민족 국가 체제를 생각하던 19세기 후반 마치니 식 유럽의 자유주의적 민족주의 사상을 연상시킨다. 모든 민족은 대소를 막론하고 국가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1917년에 발표한 '14개 조항' 이후의 사상이었다." "이인직의 소설에서 개화주의뿐만 아니라 친일 사상은 노골적이었다. 그의 소설에서 수구, 전통문화를 고집하는 인물들은 예외 없이 완고하고, 무지하고, 폭력적인 '악당'들이었다. 이인직은 여러 곳에서 조선의 개화를 강하게 희구했지만, 여러 요인으로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입장이었다."(146-7)


"1908년 직전에는 '민족'이라는 말이 쓰였어야 할 자리에 '인종', '종족'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었다." "동포는 '우리끼리', 주체의 하나임을 표현한 말인데 반해 '민족'은 우리를 밖에서 보고 지칭하는 객관적인 보통 명사였다. 물론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한민족', '조선민족' 등 보통 명사 앞에 고유 명사를 붙인 말이었다. 결국은 '민족'이라는 말을 선호하고 선택하게 된 것은 '민(民)'이라는 말로 정치적 의미를 부가한 종족의 뜻을 나타냈기 때문이었다. 이때 정치적 종족으로 말했다는 것은 당시 우리의 정체성을 어떤 국가에 대한 소속 의식을 떠나 규정했다는 의미이고, 이는 기존의 국가 즉 대한제국의 존재를 정체성에서 지워버렸음을 뜻한다. 즉 민족은 특정한 국가와는 직접 관계를 부정하며 일반적인 국가, 말하자면 앞으로 만들 국가와의 관계를 긍정할 뿐이다. 우리의 정체성이 적어도 언어 차원에서 현재와 같이 이렇게 표현되기 시작한 것은 1908년 초였다."(157)


"신소설들이 쓰이던 시대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최저점이었다. 이 시절 우리의 모습은 너무나 부끄러워 꽁꽁 가려야만 했다. 여러 의미에서 이 시대는 현대 대한민국의 연원이었고 금단의 성지(聖地)였다." "우리는, 현대 한국인은 이 '지옥 같은' 시대의 자연상태의 불구덩이에서 태어났다." "자연상태의 고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오래된 정체를 부정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선택했던 인공의 정체를 다시 부정해야만 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오래된 '조선인'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결코 같은 '조선인'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긴 이중 부정의 여정을 거쳐 돌아온 모습은 '민족'으로, 또한 '한민족'으로, 비슷해 보이지만 새로운 모습이었다. 우리는 개인으로서, 집단으로서 이 자연상태의 불구덩이에서 단련되어 태어났다. 그러나 이 정체는 틀에 불과했다. 그 내용은 이제부터 채워나가야 했고 민족의 본질을 얻기 위한 기갈(飢渴)이 시작되었다."(172-3)


4장 초기 민족주의자의 두 초상


"『무정』의 주인공 '이형식'과 『꿈하늘』의 주인공 '한놈'은 각각 작가 이광수와 신채호의 분신이라고 일반적으로 평가된다. 말하자면 '이형식'과 '한놈' 두 인물은 각기 두 진영(개화민족주의와 저항민족주의)의 민족주의자들에게 애정 어린 그리고 자신들과 진배없는 인물이자 인격적으로 하자 없이 말끔한 인물이다. 그리고 두 인물 공히 경험적으로 관찰된 한국인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이상주의적으로 '이런 인물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해서 창조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인물의 최대의 공통점은 모두 외롭고 고독한 개인이라는 것이다."(179) "그런가 하면 두 인물의 조건은 대칭적이었다. 『꿈하늘』의 한놈은 아무런 뚜렷한 능력도 기술도, 남과 다른 어떤 조건도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 "반면 『무정』의 이형식은 처음부터 경성학교 영어 선생으로 더운 유월 오후의 땡볕에 여학생을 가르치러 초빙되어 김 장로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181-2)


"이형식의 '내면'이라는 공간 장치는 이형식으로 하여금 특정한 여성에 대한 욕망과 사랑이 서서히 깊어지고 넓혀져 결국은 익명의 대중, 특히 민족에 대한 사랑으로 변화하도록 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었다. 이것이 근대 서구 문학 기법인 '내면'을 도입한 의미이자 용도였다. 욕망과 사랑은 인간의 생명력과 이성(理性)을 활성화시키며 특정한 관계에 있지 않은 이성(異性)에 대한 욕망과 사랑일 경우에도 못지않은 결과가 나타나며 이것이 바로 민족에 대한 사랑으로 전환되는 주요 메커니즘이다. 에로스와 아가페는 다른 종류의 사랑이며 에로스에서 아가페로의 전환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지만 춘원은 이것을 『무정』에서 이형식이라는 근대인의 내면에서 추동되는 정교한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해내었다." "이형식의 민족주의는 이론에서 가슴으로, 사람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서, 삶으로서의 민족주의로 접어든 것이다."(203-5)


"민족을 위해 필요한 지식은 그냥 '앎'으로서의 지식이 아니라 해외에서, 미국에서 배워 와야 하는 특정한 형식을 갖춘 지식이었다." "당시 조선의 전통적 사회 질서는 완전히 붕괴되고, 기존의 지배 계급이 초토화된 상태에서 이광수를 위시한 개화민족주의자들은 어떻게 조선 사회에 굳건하게 자리를 잡을 것인가가 핵심의 문제의식이었다. 공석이 된 지배 계급의 자리를 개화민족주의자들이 차지하는 일은 바로 현안이었고 어떤 명분과 어떤 전략으로 지위를 인정받을 것인가가 문제였다. 물론 신지식인들이 지배 계급의 위치를 요구함에 있어서 전과 같은 명분을 내세울 수는 없었다. 그들이 내세울 명분은 그들은 우리 민족을 구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해외에서 들여와 가르쳐 줄 사람들이라는 주장이었다. 서양에서 배워올 지식의 타당성과 위대함은 바로 그 지식을 만들고 활용하는 서구 제국들의 부강함이 증명하고 있다."(249-50)


"거의 동시대에 쓰인 단재의 『꿈하늘』은 전체적으로 대단히 대조적인 작품이다. 근대 소설이라기보다는 구소설의 형태로 쓰였지만 이는 고도로 의도적인 것이었다. 당시의 개화된 세상의 조선인들의 이성적 판단을 부정하고 전통적인 의로운 조선인 투사를 만들어내기 위해 꿈의 세계로 가서 신의 명령에 따라 전쟁에 임하는 전사를 창조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작품은 시대착오적인 작품이었다. 구한말에 등장한 저항민족주의가 개화에 근거한 근대적 사상이었다면 이 시대 조선인들을 민족이라기보다는 우선 전사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일제 시대에는 '개화'에서 '위정척사'의 사상으로 회귀하던 것처럼 보인다." "결국 한놈이라는 민족주의 전사는 어떤 역사적 현실에 위치해 있지도 않으며 현실 사회 속의 어떤 자리에도 뿌리내리고 있지도 못하다." "한놈이라는 인물은 단재가 '백지(白紙)'로서 제작한 민족주의자가 갓 태어난 모습이었다."(254-5)


"1910년대에 나타난 초기 민족주의자의 두 초상의 공통점은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의 형식을 채울 내용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각자 민족을 위해서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요건을 갖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조건의 부재의 아쉬움을 아프게 느끼고 있었다. 이형식은 미국 유학을 통해서만 얻어올 수 있는 지식─'지식'이라는 이름의 부적(符籍) 또는 물신(物神)─이 없고, 이것을 가지러 미국 유학을 갈 기회를 갈구하고 있다. 또한 한놈은 신의 명령에 복종하고 신의 꼭두각시가 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구원의 없음, 외로움을 괴로워하고 있다. 무엇이 없음(不在)을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달리 표현하면 그것을 욕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초기 민족주의자들은 밖으로부터 얻어와야 하는 것들을 갖지 못해 뼈저리게, 고통스럽게 목말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식과 구원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다. 그들은 욕망하는 존재였지만 그 욕망하는 것, 아직 없는 그것이 무엇일지는 알지 못했다."(255-7)


5장 만세 후에 찾은 인물들


"3·1운동의 심층에서 우리 민족 대다수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우리 '민족'임을 '만세'로 고백하고, 피눈물로 회개하고, '한 민족'됨을 뼛속 깊이 느꼈다. 그들은 민족이라는 거대한 본류에 합류하였고 다시 태어났다. 그날이 1919년 3월 1일이었다. 3·1운동을 통해 '우리 민족은 하나다'라는 대명제가 요지부동으로 확립되었다."(262-3) "3·1운동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민족'이라는 실체가 어마어마한 규모로 우리 눈앞에 한때 강림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반면 뒤이은 1920년대는 이제 그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상실감의 시대였다. '3·1운동은 실패했다'는 평가는 이러한 허탈감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민족주의는 이제 진짜 '운동'을 현실적으로 시작해야 하는 단계가 되었다. 1920년대 국문학, 근대 단편 소설문학의 과제는 우선 우리 민족이 다다라야 할 기준을 제시하는 것, 그리고 민족의 현재 그리고 앞으로 만들어가야 할 바람직한 상을 그려내는 것이었다."(265-6)


"김동인은 인간을 나누는 포괄적인 기준으로 인간의 '약함'과 '강함'을 독창적으로 제시했다. 도덕과 윤리의 문제를 포함해서 인간의 모든 문제는 약함에서 비롯되며 약함에서 벗어나 강해지게 되면 자연스레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이러한 발상은 단연 니체적 시각이었다. 나아가서 김동인이 '약한 인간', '타락한 인간', '망가진 인간'을 이해하고 이러한 비극의 핵심 원인으로서 '허영(虛榮)' 즉 남의 눈, 시선에 집착하는 문제를 제기한 것은 물론 서양 문학에서 도입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문학사에서 이러한 문제 제기는 김동인만의 독창적인 것이었다." "말하자면 김동인이 제기한 개인의 강함, 약함의 문제의식은 당시에 유행하던 (민족) '개조'의 문제의식에서 도출된 것이 아니라 독창적인 근대의 문제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또한 이 주제는 자신이 완성시킨 내면을 드러내는 고백체로 다루기에 최적의 문제였다."(312-3)


"김동인은 자신이 그간 몸담아왔던 개화주의적 입장에 대해 과감하게 회의를 던지고 다음 단계로 스스로 도약한 작가였다." "그의 작품에서 내면(內面)을 장착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약한 자들이다. 약한 자들이 왜 약한 자가 되었는가를 이해하는 데 안성맞춤의 장치가 바로 내면이었다. 1920년대 말부터 김동인은 강한 인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원하던 강한 자는 대부분 내면이 없는 존재, 내부가 들여다보이지 않는 '블랙홀 같은', '괴수 같은' 존재였다. 가끔 이런 강한 인물들이 나타난다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길들일 수 없는 존재였고 따라서 우리의 일부가 될 수 없는 존재, 우리가 흉내낼 수 없는 존재였다. 이제 문제는 내면이 있는, 내면이 장착된 지식인으로서 강한 인간을 만날 수는 없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심각한 문제는 당시에 우리 지식인들 앞에 던져진 과제였다."(318-9)


6장 대도시 지식인의 출현


"1930년대에는 민족의 존재 양태의 관념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20세기 초반에 한국인이 신소설에 최초로 나타났을 때, 우리가 그런 처참한 상태로 내버려지게 된 배경에는 바로 공동체의 분해, 공동체의 상실이 있었다. 이때부터 우리 민족은 '공동체 상실'에 시달리며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 개인으로 생존에 매달려왔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면 조선의 지식인들을 품고 있는 공간은 전혀 새로운 공간이었다. 그곳은 대도시 문명의 익명의 '대중사회'였다. 대부분 공통적으로 생계를 위해 모여들어 이해의 기반 위에서 서로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사는 이익 사회(Gesellschaft)였다. 어느 틈엔가 조선 지식인들은 전과는 전혀 다른 생태(生態)를 갖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1930년대는 "땐쓰", "스포츠" 열풍이 몰아닥쳤고 육체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였다. 따라서 지식인들은 패리어(pariah), 즉 일종의 폐쇄적 소수 종족으로 전락해가는 상황이기도 했다."(328)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나오는 구보를 포함한 (룸펜형) 지식인들이야말로 물질주의적인 대도시에서 소외(疎外)의 화신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외를 느끼겠지만 소외를 하소연하는 것은 바로 이 지식인, 대도시 문명에 한 발만 딛고 있는 지식인들의 의무이다. 그들은 한 발은 대도시 안에 딛고 나머지 한 발은 그 밖에 딛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대도시 문명─그리고 자신을 소외시키는 대도시 문명─이라는 서식처를 비판적으로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바라본다. 그들은 자신들이 묘한, 이중적 존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월급쟁이'와 '노는 계집'들 사이에서 이들과 구별하며 동시에 동감하며 위치를 찾는다. 구보를 포함한 대도시 지식인들은 특이한 생태에서 태어난 새로운 종자였다. 대도시에서 태어난 존재들이지만, 그 자신의 서식처를 결코 떠나지 못하면서도 동시에 매일매일 경멸하는 종자였다."(348)


"1930년대의 모더니스트 소설들은 식민지 조선에서 지식인이 다시 태어나던 신화였다. 근대 지식인의 환경은 단연 모든 문화가 집결하는 대도시일 수밖에 없었다." "1930년대의 서울은 결코 식민지의 삶에 안주한 평온한 공간이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지식인들은 춘원이 생각했던 민족의 선생이라는 지위를 포기하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소설가로, 지식의 생산자로 다시 태어났다. 모든 경제적 보상을 포기하는 이 선택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괴로운 것이었다. 예술가의 삶이란 힘들고 괴로운 것이었다. 이상의 『날개』는 한때 좌절했던 지식인이 다시 생명력과 열정을 회복하는 신화적 생체 실험이었다. 1930년대는 정치적으로는 평온한 듯 보이는 시기였지만 조선의 지식인들은 새로운 삶을 찾아 자신들의 새로운 싸움을 시작하던 시기였다. 이제는 지식의 중개상이 아니라 창조자로서의 싸움이었고 이 길은 고난의 길이었다."(369-70)


7장 새로운 전사의 창조


"심훈의 『상록수』에서 동혁을 뜨겁게 사랑하면서도 민족과 농민에 대한 의무감으로 자제하며 뜨겁게 일하다 과로로 숨진 채영신은 결국 부활하여 우리 모두의 몸속에 돌고 있으며, 그 누구보다도 박동혁의 몸속에, 골수에 섞여서 영원한 생명의 힘을 주게 되었다." "1933년 이광수의 『유정』이 발표되자 강한 조선인을 만드는 비결(秘訣)이 드디어 공표되었다.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랑으로 욕망과 이성의 갈등이 시작되고 두 힘 사이에 상승 작용이 일어난다. 그리고 두 힘을 최대한으로 확대시켜 그 사람을 죽게 한다. 그러면 그 죽은 이의 영혼은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과 주변 사람들을 강하게 만들 것이고, 그들은 끝까지 싸우는 불멸의 전사가 된다. 이것이 바로 그 비결이었다. 이는 결코 복잡한 과정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심훈은 최초로 이를 간파한 천재였고 『상록수』에서 멋지게 활용하여 불멸의 전사들을 민족 운동의 전선에 바로 배치하였다."(425-6)


"1930년대 중반이 되면 조선에서 사랑의 의미는 전적으로 변화하였다. 사랑은 행복을 위하여 이성과 행복한 교제를 하는, 그런 일이 아니었다. 사랑은 뜨겁게 그러나 끝없이 자제해야 하는 일이며, 이는 행복한 삶을 만드는 것이라기보다는 강한 인간, 강한 의지로 끝없이 참고 이루는 인간을 만드는 더욱 진지한 일이었다. 사랑은 고통스럽지만 보람 있고 생산적인 일이었다."(426-7) "춘원은 개인적으로 그가 스승으로, 아버지처럼 모시던 도산 안창호가 일제에 체포되자 칩거하여 창작에 몰두하였고, 그 성과가 바로 『유정』이었다. 물론 이는 예술 작품이었지만 동시에 수많은 강한 조선인을 독서에서, 교육에서 찍어낼 수 있는 공정(工程) 또는 '틀'의 발명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일제 후기 식민지 조선에서 생겨난 새로운 흐름, 사랑의 새로운 관념은 춘원의 업적이자 우리 근대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429-30)


8장 민중 영웅의 창조


"벽초 홍명희가 창조해낸 임꺽정은 백정이라는 천한 자리에 잘못 태어난 영웅이라기보다는 하늘이 조선 사회의 제일 밑바닥 자리를 임꺽정에게 점지해 준 것이었다. 원래 그는 백정 계급의 대표로서 백정을 포함한 천한 계급들을 규합해서 계급 투쟁을 벌이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임꺽정은 한 번도 백정 일을 한 적이 없었다. 나아가서 그는 백정이기에 사회의 밑바닥 계층으로 온갖 숨를 받지만 백정으로서의 삶의 방식이 그의 의식에 미친 영향은 전혀 없었다. 그는 물론 백정이라는 직업, 즉 소 잡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나 직업의식도 전혀 없다. 그에게 백정임은 사회의 밑바닥이라는 추상적 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천한 백정이었지만 (어린 이순신을 만나기도 하고 자신을 찾아온 퇴계를 문전박대하는 등) 조선 팔도의 산천과 인물들을 섭렵했다. 임꺽정은 계급적인 인물로 출발했지만, 전국적이고 민족적 의미를 갖는 인물로 발전하는 가운데 탈계급화 되었다."(448)


"임꺽정이 맞닥뜨려 싸워야 할 조선이란 세상, 투쟁의 대상으로서 현실은 그렇게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조선의 타락한 문화가 그를 타락시키지 못하란 법은 없었다. 이에 자연인으로서의 꺽정을 보호하는 장치로 설정된 것이 바로 그의 반지성주의였다. 임꺽정의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글을 못 배웠다는 것이다. 청석골에는 모사(謀士)인 서림 외에도 몇몇 두령들이 언문을 읽었지만 대장인 임꺽정은 언문도 읽지 못했다. 그가 글을 못 배운 것은 백정이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글방에 가서 아이들과 선생이 백정이라고 업신여기는 데 화가 나서 양반집 아이들을 패주고 선생의 '면상'에 책을 내던지고는 나가지 않았다." "글공부는 조선 문화의 나쁜 점으로 임꺽정이 싸워야 할 적들의 핵심적인 문화였고 임꺽정은 가까이해서는 안 될 문화였다. 천상의 이인들은 임꺽정을 반지성주의로 무장시켰던 것이다."(451-2)


"벽초는 어려서 한학(漢學)을 배우고 일본에 유학할 당시 서양 문학을 섭렵하여 당대 최고 지성인으로,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ia)'로 자신을 규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벽초에게 반지성주의는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수많은 이념과 지식에 대한 혐오감과 더불어 자신이 무기력한 지식인임에 대한 자괴심과 부정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임꺽정은 벽초가 '내가 차라리 ~라면'이라 스스로 말하면 가설적으로 만들어 낸 '다른 자아(alter ego)'였다. 그렇다면 반지성주의는 벽초라는 지식인이 자신의 '다른 자아'인 임꺽정을 창조하며 그의 몸에 힘들여, 억지로 새겨준 격률인 셈이다. 임꺽정의 반지성주의는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민중'이라는 유령의 속성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임꺽정은 벽초의 '또 다른 자아' 즉 그의 개인적 심리 작용의 산물이며 벽초가 자신의 피조물의 몸에 새겨 넣은 인위적이고 가상적인 양심(良心)이었다."(501-2)


9장 결론


"(지식인들이 자신의 노력에 회의를 갖고,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품은) 반지성주의야말로 해방 이후 우리 민족끼리의 목적 없는 잔인한 싸움을 부추겼을지 모른다. 나아가서 강한 조선인을 향한 지식인들의 노력은 다른 대가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민족의 본질을 찾는 선택의 핵심은 1920년대 춘원이 제안했던 도덕성 회복을 통한 '민족 개조' 계획을 기각한 것이었다. 이 선택을 우리가 비난할 수는 없겠지만 당시 '홉스적 자연상태'의 상처가 생생한 상황에서 도덕성의 문제를 제쳐놓고 강한 조선인을 추구한다는 것은 사회적 조건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결코 비켜갈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도덕성 문제는 한국인이 '해방'되었을 때 한국인의 첫 번째 특징으로 조우하게 될 문제였다. 해방된 한국인들은 아직도 너무나 거칠었고 여전히 박탈감에서 '힘'의 추구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1930년대 춘원을 위시한 조선 지식인들이 이룩한 '강한 조선인' 추구의 대가였을지 모른다."(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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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경제 신화 해부 - 정책 없는 고도성장
박근호 지음, 김성칠 옮김 / 회화나무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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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서


제1부 아시아 나라들의 발전경로와 공업화


1장 1960년대 초기의 아시아경제


"미국의 원조에 의존한 경제재건은 소비재가공부문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는데, 1950년대 후반에 이미 국내시장이 포화상태가 되어 한국의 면공업도 상대적인 정체에 빠지게 된다. 이 때문에 한국정부는 해외시장을 개척하고 주한미군에 더 많은 면제품을 납품하고자 했다. 이에 더해 한국정부는 1957년 수출 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수출증대에 역점을 둔 각종 지원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원조가 1957년을 정점으로 감소세로 돌아서자, 소비재공업부문만이 아니라 재정과 무역수지 적자의 보전까지도 미국에 전면적으로 의존해온 한국경제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고, 이는 곧 경제성장의 둔화로 나타났다. 1957년에는 전년의 성장률이 1.3%로 낮았던 까닭에 8.8%라는 성장률을 달성했지만, 그 이후로는 정체가 지속되어 58년 5.5%, 59년 4.4%, 60년에는 2.3%까지 성장률이 하락했다. 1958년 이후에는 소비재산업의 정체와 농업부문의 부진이 겹치면서 한국경제는 심각한 불황에 빠져들었다."(39)


# 한국경제의 초기조건 : 아시아 국가들과의 비교(1964년)

1. 눈에 띄게 낮은 소득수준 : 국민소득 85달러로 필리핀이나 말레이시아의 절반에도 못 미침

2. 산업별 국민소득에서 농업부문의 비율이 높고 제조업부문이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를 점유

3. 노동분배율 수준이 상당히 낮았을 뿐 아니라 하향하는 경향을 나타냄 : 한국 28.4%, 대만 44.9%, 필리핀 41.6%

4. 소비성향(소득에 대한 소비지출의 비율)이 현저히 높고 저축성향은 낮음 : 평균소비성향 98.2%, 평균저축성향 1.9%

5. 엥겔지수가 상대적으로 높아 잠재적 공업제품시장의 확대 가능성 축소와 내수부진 초래 : 한국의 엥겔지수 67%

6. 외국원조 축소로 기계설비의 수입재원 확보가 난관에 봉착 : 한국 11%, 태국 20.4%, 말레이시아 17.6% (이상 고정자본투자율)

7. 수출규모가 현저히 작음 : 한국 1억 2000만 달러, 필리핀 7억 7000만 달러, 스리랑카 3억 9000만 달러 (이상 수출총액)


"1955년 봄에 개최된 반둥회의가 국제사회의 정치·경제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반둥회의는 미국과 소련의 대외정책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쳐 자본주의사회와 사회주의사회가 군사적 경쟁이 아닌 경제적 경쟁을 통해 체제의 우월성을 다투는 시대로 이끌었다. 반둥회의를 계기로 발전도상국들이 정치적으로 부상하게 된 반면, 경제민족주의(Economic Nationalism)도 점차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이후 세계경제는 불황에 빠져 있었고, 많은 발전도상국들이 심각한 경제부진에 시달리고 있었다. 불황은 발전도상국들의 주요 수출품이던 1차 산업제품의 가격하락이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시작되었고, 선진공업국과 발전도상국 간의 경제적 격차가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른바 '남북문제'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런 이유로 반둥회의에서는 발전도상국의 '경제개발'이 긴급한 과제로 강조되었고, 국제경제협력을 호소하는 목소리들이 높아졌다."(67-8)


"이 같은 국제사회의 정치경제적 환경 속에서 미국 역시 발전도상국의 '경제개발'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원조정책을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57년 5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미 의회에 보낸 대외원조특별교서에서 새로운 대외원조정책을 제안했다. 미국의 새로운 원조정책의 기조는 첫째, 기존 1년 단위의 무상원조방식을 장기 유상원조방식으로 바꾸어 증여를 차관형식으로 전환한다. 둘째, 이전의 프로젝트 원조방식 대신 국가개발계획을 지원하는 방식을 도입하고, 피원조국의 발전능력과 자조노력 정도를 중시한다. 셋째, 경제원조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우선순위 방식으로 원조를 배분하고 대규모 원조를 통해 피원조국의 경제적 자립을 지원한다. 한마디로 '선택과 집중'이라고 부를 만한 방침을 세운 것이다." "전환된 미국 원조정책의 가장 큰 특징은 발전도상국의 경제개발과 더불어 지리적으로 아시아 지역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71-2)


"아시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경제원조 흐름은 동아시아와 남아시아로 구분해서 살펴보아야 하는데, 특히 남아시아에 대한 원조증가를 면밀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에 대한 원조 누계액은 변경 전 44억 달러에서 변경 후 58억 달러로 증가했지만, 남아시아는 11억 달러에서 67억 달러로 6배 이상 증가하여 누계액에서 남아시아가 차지하는 비중 역시 7%에서 30%로 급증했다. 동아시아의 비중이 27%에서 26%로 약간 감소한 것과는 대조적이다."(73-4) "또 한 가지 고찰해야 할 것은 미국의 원조정책이 인도 중심으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에 대한 원조감소는 단순한 양적 문제가 아니라 미국 대외정책에서의 '지위변화'라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원조공여의 기준으로 볼 때, 이 문제는 인도의 개발능력이나 자조노력이 우수하다고 평가된 반면, 한국은 '우수하지 못하다'고 여겨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76)


# 밀리컨·로스토 제안

1.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분리하고 경제원조 실행기관을 신설한다.

2. 정책의 연속성을 도모하기 위해 장기원조를 공여한다.

3. 경제원조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피원조국의 흡수능력을 중시한다.


"미국의 전환된 원조정책은 한국정부의 경제정책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국가개발계획을 중시하는 미국의 방침에 따라 한국정부 또한 장기적인 개발계획을 수립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승만 정권은 1959년 4월 자립경제 기반 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개발 3개년계획(60~62년)'을 수립했다. 이 계획은 미국정부의 권고에 따라 구상된 것이었다. 계획의 담당자였던 이기홍(당시 부흥부기획국 기획과장)은 "미국의 원조가 급감할 것으로 예상되는 1957년 중반부터 AID 관리가 한국정부 정책담당자(김현철 부흥부장관)에게 장기경제개발계획안을 작성해 제출하도록 강력하게 권고"했다고 설명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1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62년부터 이를 실행했다. 이는 미국정부에게 쿠데타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특히 지원과 원조를 확보하기 위한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급조된 것이었다. 미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경제개발계획이 아니라 '쇼핑목록'에 불과하다는 평가였다."(81)


2장 전환점, 1965년


"베트남전쟁이 미국의 대외원조정책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베트남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동아시아 지역이 경제원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확대되었다. 미국의 대아시아 경제원조 동향을 살펴보면, 60년대 후반 들어 남아시아의 비중은 현저하게 감소한 반면, 동아시아 지역의 비중은 확대되고 있다." "베트남전쟁이 확산되면서 아시아로의 편중 경향은 군사원조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미국의 대아시아 군사원조액을 살펴보면, 동아시아에 대한 군사원조 누계액은 60년대 전반(1961~65년) 약 39억 달러에서 후반(1966~70년)에는 107억 달러로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군사원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전반기 49%에서 후반기에는 거의 82%까지 확대되었다. 동아시아 나라들은 이러한 대규모 군사원조를 통해 군사비 부담을 줄이고, 재정상황을 개선할 수 있게 되어 이를 경제개발자금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90-2)


"아시아를 둘러싼 국제경제환경이 동아시아 지역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환되면서 동아시아의 경제발전이 촉진될 수 있었던 반면, 남아시아 지역에는 불리해져 경제발전의 족쇄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 지역은 60년대 전반에 이미 연평균 6.6%의 성장을 달성하며 남아시아 지역의 성장률 3.9%를 넘어섰다. 60년대 후반 들어 동아시아 지역은 성장률이 9.8%까지 증가해 성장 속도가 빨라진 반면, 남아시아 지역은 2.2%로 감소했다." "베트남전쟁의 효과였던 경제원조의 확대를 통해 동아시아 나라들은 수입대체공업화에서 수출지향공업화로 전환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 나라들에게 베트남전쟁은 자립적 경제발전에서 외향적 경제발전으로 변모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남아시아 나라들에게는 대외의존형 경제발전 경로에서 '내향적' 전략으로 방향이 전환되는 발판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96-7)


제2부 정책 없는 고도성장


3장 고도성장의 시대로


"1960년대 전반기(61~65년)와 후반기의 연평균성장률을 비교해보면, 전반기가 6.2%였던 데 반해, 후반기는 11.1%로 높은 성장률을 나타내고 있다. 60년대 초까지 한국경제는 '빈곤의 악순환'에 빠져 있었고, 그래서 60년대 후반의 고도성장은 '한강의 기적'이라 부를 만큼 놀라운 변화였다.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산업구조의 변화이다. 60년대 후반 고도성장을 주도했던 것은 2차 산업과 3차 산업의 발전이다. 산업별 평균성장률을 보면, 60년대 후반 1차 산업의 평균성장률이 3.3%였던 데 반해, 2차 산업은 20.0%, 3차 산업은 13.1%였다. 제조업 역시 21.3%라는 높은 성장률을 나타냈다. 이러한 실적 차이는 각각의 산업부문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에도 영향을 미쳐 산업구조의 변화를 초래했다." "한국의 산업구조가 이렇게 급속하게 전환될 수 있었던 것은 제조업의 비약적인 성장 덕분이었고, 이러한 변화는 65년 이후에 뚜렷하게 나타났다."(123-5)


"60년대 초 한국의 원자재 수입은 미국으로부터의 무상원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일의존도가 28%에 불과했지만, 65년 이후 급속도로 증가해 70년대 초에는 58%에 달했다. 그중에서도 수출용 원자재는 절반가량을 대일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한국의 공업화는 일본으로부터의 우수한 기계도입과 고품질의 수출용 원자재 및 중간재 수입 등을 통해 촉진되었고, 그 결과 생산과 수출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생산재 수입을 통해 고정자본을 형성하고 공업화를 촉진시켜 공업제품을 해외시장에 수출한 뒤 이렇게 획득한 외화로 다시 생산재의 수입을 늘린다는 순환메커니즘이 구축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일본에서 수입한 원자재와 중간재, 자본재를 한국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조립가공한 후 완제품을 미국시장에 수출하는 이른바 '성장의 트라이앵글'이다. '성장의 트라이앵글'은 수출지향형 공업화의 발전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127-8)


4장 수출정책의 과대평가 : 수출계획 FIT&GAP 분석


"1964년 5월, 정부는 환율을 달러당 127.5원에서 256.53원으로 인하하고 65년 3월, 환율제를 고정환율에서 변동환율제로 전환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외국환에 대한 여러 가지 개혁조치들이 한국정부의 의도가 아니라 미국정부와 IMF의 유인책에 의해 실시되었다는 사실이다. 미국과 IMF는 외환정책의 개혁을 담보로 한국에 차관을 공여했다. 1964년 5월 단행된 대폭적인 환율인하 역시 미국에 의해 유도된 바가 컸다. 사실 수출지향형 공업화에서 환율현실화정책이 실시되는 것은 절실하고 중요한 문제였다."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는 "미국이 한국에 원화의 평가절하와 통화긴축을 충고했고 한국정부는 이 충고를 받아들여 실행에 옮겼다. 5월 3일 실행된 원화가치 재평가는 금년도 미국이 지원하기로 한 총 7500만 달러 중 1000만 달러의 원조금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기록했다. 이는 미국이 환율현실화정책에 개입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146-7)


# 변동환율제 도입(1965.4)은 IMF 차관과 연계


"제1차 3개년수출계획은 수출확대를 통한 외화사정 개선이라는 정책의 실현을 목표로, 1965년에서 67년까지 본격적으로 실시된 장기수출계획이다. 그것은 국제수지 위기에 직면해 있던 한국정부로서는 수입에 필요한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서라도 피할 수 없었던 선택이었다. 또 수출산업을 발전시키고, 외화획득의 증대를 도모해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은 자립경제를 확립할 수 있는 기본적인 수단이기도 했다." "제1차 3개년수출계획의 입안은 대폭 지연되어 그 시안이 수립된 것은 1964년 12월 30일에 이르러서였다. 1965년 2월 16일에 수정안이 제출되었지만, 재수정을 거듭해 최종계획안은 1965년 3월 16일에야 확정되었다. 1965년부터 바로 시행하려고 했지만 시기를 맞추지 못한 것이다. 제1차 3개년수출계획이 경제장관회의에서 의결된 것은 1965년 7월 20일이었는데, 이러한 모습은 한국의 수출정책을 평가할 때 긍정적으로 지적되곤 하는 과감성과 거리가 멀다."(151-2)


5장 전자산업과 정책 없는 발전


"무역수지 악화라는 딜레마를 극복하고, 기간산업을 육성하며, 자립경제를 확립할 수 있는 기본적인 수단은 외화획득을 증대시켜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이었다. 제2차 개발계획은 공업화를 위한 자본재 수입을 확대할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필요한 재원을 스스로 조달하기 위해서라도 대폭적인 수출증가가 필요했다. 한국정부는 외화획득 증대라는 지침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1967년부터 71년까지 실시될 '제2차 5개년수출계획'을 급작스럽게 단행했다. 제2차 5개년수출계획은 제1차 3개년수출계획(1965~67년)의 마지막 해였던 1967년에 시작되었는데, 제2차 경제개발계획의 실시와 보조를 맞추기 위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제2차 수출계획이 경공업제품의 수출에 기반을 두고 있어 수출품목 역시 생사류나 직물류 같은 섬유제품이 중심이었고, 텔레비전이나 트랜지스터, 집적회로(IC) 같은 전자제품의 수출계획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227-9)


"라디오와 전기기기의 목표액은 1971년 1392만 달러로 1965년의 실적 190만 달러에 비해 7.3배 크게 증가되었다. 수출총액에 대한 비중도 1965년 1.1%에서 71년에는 2.5%로 커졌다. 한국정부는 라디오와 전자기기의 수출확대에도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품구성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수출증가율을 보면, 다른 수출특화상품들보다 우선순위가 높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수출규모를 보면, 라디오와 전기기기의 목표액은 면직물(4900만 달러)의 약 4분의 1, 생사(4485만 달러)의 3분의 1, 도자기(2800만 달러)의 2분의 1에 지나지 않았고, 수출규모는 통조림(어패류와 양송이) 1486만 달러나 고무제품 1450만 달러, 공예품 1270만 달러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이었다. 라디오와 전기기기가 통조림이나 고무제품, 공예품 등처럼 대규모 자본투자나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 가공도가 낮은 잡화공업부문과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230-1)


"한국의 전자산업은 60년대 후반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해나갔지만, 이 시기에 전자산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육성계획이 명확하게 추진된 것은 아니었다. 제2차 개발계획은 자립경제와 중공업의 기반확립을 기본목표로 삼았을 뿐, 전자산업에 대한 명확한 육성계획 등은 제출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제2차 개발계획에 전자산업 육성계획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에 전자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전자산업의 발전 과정을 되짚어보면, 전자산업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67년부터였는데, 전자공업진흥법은 1969년 1월에 가서야 제정되었고, 이를 기초로 '전자공업진흥 8개년계획'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각종 지원제도와 같은 구체적인 실시방안들이 제출되는 등 본격적인 육성·지원이 시작된 것은 그 이후였다. 이는 한국의 전자산업이 (정부 주도의) 본격적인 지원정책이 실시되기도 전에 이미 성장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232)


제3부 고도성장의 보이지 않는 손


6장 수출주도형 성장과 바이 코리아 정책


"1960년대는 미국정부의 통상정책이 보호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던 시대였다. 한국 상품이 미국시장에서 지위를 높여가던 시기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보면, 이는 기이해 보인다. 미국의 국제수지가 1958년부터 만성적인 적자상태에 빠지면서 이른바 달러위기가 초래되자, 미국정부는 다방면에 걸쳐 국제수지개선책 혹은 달러방위책을 강구했지만 근본적인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아 해마다 대폭적인 적자가 지속되고 있었다. 1960년 11월, 미국정부는 해외달러지출을 절감하기 위해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 정책을 내놓았고, 63년 7월에는 대외군사지출·대외원조를 줄이거나 이자평형세(interest equalization tax)를 시행했으며, 65년 2월에는 금융계와 산업계에 해외투자·융자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미국정부가 한국에 대해서만큼은 바이 아메리칸 정책을 완화해 적용하고, 심지어 우대정책을 실시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이다."(256-7)


"(이른바 '바이 코리아(Buy Korea) 정책'으로 전환한) 미국정부는 1965년 5월 열린 박정희-존슨 정상회담을 시작으로 한국과의 무역을 우대하는 정책을 강화해나갔다. 박정희-존슨 공동성명에서 미국은 한국의 수출 진흥을 지원할 것임을 밝혔는데, 기본적인 결정사항과 관련된 비밀조약이 양국 간에 체결되었다는 사실이 공개된 외교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박정희-존슨 정상회담의 한·미공동선언문에 명시된 한국의 안보 및 경제발전과 관련해 별도의 '각서'가 체결되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각서에는 북한이 경제발전을 성공적으로 이루었고, 군사력을 강화해나가고 있는 한반도 정세와 전망을 고려할 때 한국이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명기되어 있다. 한국의 안보라는 측면에서도 한국의 경제적 도약과 군사력 강화는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 미국이 지속적으로 협력한다는 내용이었다."(258)


# 한미 합의 사항

1. (비공개)

2. 한국의 장기적인 경제발전을 위한 미국의 지원

3. 한국의 수출확대를 위한 미국의 지원

4. 한·미상호군사협정 강화

5. 한국인 이민자의 농장노동자 수용

6. 한국의 아프리카 기술지원 프로그램에 대한 미국의 재정적 지원


7장 전자산업의 진흥과 바텔기념연구소


"미국인 직접투자는 발전단계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미국의 자본과 기술이 없었다면, 한국의 전자산업은 비약적인 성장을 달성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은 196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기술혁신에 나섰고, 민간기술의 낙후성을 극복하기 위해 일본과 미국으로부터 새로운 설비와 선진기술을 도입했다. 그 배후에는 정부주도의 활발한 연구개발 활동이 있었고, 그로 인해 산업계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기술의 수준이 높아질 수 있었다. 한국의 전자산업은 1960년대 후반 일본에서 도입한 기술을 이용하여 텔레비전을 조립생산하면서 출발했지만, 같은 시기에 이미 트랜지스터나 다이오드, 집적회로(IC)와 같은 반도체의 연구개발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텔레비전 같은 기초산업을 육성함과 동시에 당시 최첨단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반도체 연구개발에도 나서고 있었다는 사실은 다른 발전도상국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만의 독특한 경험이라 할 수 있다."(274-5)


"1966년 6월 한·미협정을 근거로 한국과학기술원(KIST)과 바텔기념연구소 간에 자매결연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사실도 지적해두어야 한다. 이 협정에 의해 바텔기념연구소에 다음과 같은 지원업무가 부여되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① KIST의 창설 업무와 건설계획에 대한 지원, ② 상임연구원 모집과 기술훈련에 대한 지원, ③ 연구시설 및 기기 선정에 관한 협력, ④ 기술정보 제공, ⑤ 연구 및 조사프로젝트를 위한 전문가 파견 등이었다. 바텔기념연구소 소장이 KIST 이사회 구성원으로 참가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이는 KIST가 바텔기념연구소에 축적된 연구개발 역량과 노하우를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게 지원해 줄 최고의 스폰서를 얻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한국정부는 KIST의 연구활동이 한국의 산업계에서 신뢰를 구축할 수 있을 때까지 바텔기념연구소의 지원 임무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요청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미국외교문서에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281)


"특징적인 사실은 1967년 3월 8일에 경제과학심의회의에서 심의, 검토된 '전자공업육성방안'이 한국정부에 의해 독자적으로 작성, 입안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 방안은 실제로 (바텔의 주도로 16개 산업기술부문을 점검한) 산업실태조사보고서와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일치하고 있어서 사실상 바텔기념연구소가 정책을 수립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 시기 산업정책은 관료적 통제의 색채가 확실히 강했지만, 정부 내에 전자분야의 정책과 관련해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할 부서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자산업에 관한 정책 수립이나 검토·조정 등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전자산업은 당시 최첨단 산업의 하나였고, 한국에는 전자분야를 전공한 대학교수나 과학기술자 그리고 최신기술정보 등의 자원이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한국이 전자산업의 육성을 독자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했다."(307-8)


8장 미국국가안전보장과 쇼윈도전략


#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요인

1. 유인 요인(pull factor) : 자유세계지원군(FWMAF) 병력 모집이 각국의 소극적인 자세로 난관에 부딪히고 전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한국군 파병 규모 확대

2. 추진 요인(push factor) : '베트남 특수'와 '파병에 대한 보상'으로 받아낼 수 있는 경제적 원조

※ 기대 효과 : 경제성장, 한·미관계 강화(방치에서 밀월관계로 급반전), 군 전투력 향상 등


"박정희 대통령과 존슨 대통령 그리고 미국정부 고위관계자들과의 회담결과, 한·미 두 나라는 단순한 우호를 넘어 전략적 파트너 관계로 급속하게 발전했다." "방미 당시 대통령비서실이 대미교섭을 위해 작성한 「한·미 양국의 현실적 입장과 박 대통령의 방미목표」에는 군사쿠데타정권의 정당화, 한·미관계의 강화 그리고 '한국의 쇼윈도화' 등이 열거되어 있다. ① 현 정권과 한국국민에 대한 미국정부의 절대적인 신임과 지지를 확보한다, ② 극동에서 한국을 민주주의의 '쇼윈도'로 만든다는 미국정부의 확약을 받아내고, 그에 대한 실질적인 지지를 획득한다, ③ 한·미 간 여러 현안들을 고차적으로 해결한다, 혹은 조기해결을 위한 미국 대통령의 약속을 받아낸다는 등의 내용이다. 여기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한국을 '쇼윈도'로 만든다는 구상이 외교정책의 주요한 버팀목 가운데 하나로 자리하고 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지원과 미국정부의 확약을 모색했다는 것이다."(338-9)


"여기에서 강조해두어야 할 것은 미국정부가 한국의 '개발독재체제' 강화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사실이다. 그 배경으로는 다음의 두 가지 사항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미국은 베트남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박정희 군사독재 체제를 유지해야만 했다. 미국의 '더 많은 깃발' 캠페인이 파탄을 맞이한 가운데 유일하게 박정희 정권만이 베트남파병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둘째, '한국모델'은 공업화를 경제개발의 중심으로 두고 설계되었는데, 그 개발체제의 필수적인 담당자를 군사정권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계획수행 능력을 갖춘 안정된 정권이야말로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으로 이끌어 '한국모델'을 성사시킬 수 있다는 것이 미국 측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따라서 미국정부가 '한국모델'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박정희 군사정권을 안정화시키고 나아가 장기화시키는 것이 전제조건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로스트노선'이었다."(346-7)


종장 한국의 고도성장을 어떻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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