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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가들 -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탄생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평점 :
프롤로그
1부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 : 고등시험 사법과 합격자들
고등시험 사법과 출신들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법조계에서 제1법률가군을 형성했다. "1937년 고등시험 사법과 합격자 17명 중 변호사시보를 거쳐 곧바로 변호사를 개업하거나 학계로 빠진 3명을 제외한 14명은 일제시대 조선과 만주에서 판검사를 지냈다." "고등시험 사법과 응시는 일제하에서 판검사를 해보겠다는 의도를 명백하게 드러낸 행위였다. 순수 변호사 지망생에게는 조선변호사시험이라는 다른 길이 열려 있었다. 판검사가 되려면 단순한 법률지식뿐만 아니라 일제통치에 대한 충성심도 보여줘야 했다. 그 과정을 통과한 사람들의 삶이 해방 이후 다양하게 갈린 것도 흥미롭다. 거칠게 평가하자면,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돌이킨 사람들은 예상한 것 이상의 불행을 맛보았고, 끝까지 개인의 안위만을 추구한 사람들은 기대한 것 이상의 영광을 누렸다. 전반적으로 그런 시대였고 어느 누구도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37-8)
"두 번의 옥고를 치른 사회주의 혁명가이자 당대의 손꼽히는 지식인 인정식이 1938년 발표한 전향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본제국을 경제상의 또는 정치상의 유일 절대의 맹주로 하는 동아의 재편성 과정은 실로 놀랄 만한 공전의 대규모와 미증유의 급격한 속도로 진행되어 아세아의 전지도를 변하"게 하고 있었다." "일찍이 선진문명에 눈을 뜬 윤치호도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기존의 다소 모호한 중립적 태도를 버리고 본격적인 친일의 길에 들어섰다." "1938년 조선인 육군특별지원병제도의 실시, 1940년 창씨개명, 1942년 징병제시행 결정으로 민족차별이 철폐되리라는 믿음도 생겼다. 모두 착시였지만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윤치호의 영향을 받았다. 몇몇 개인의 변화가 아니라 한세대 전체가 그 흐름에 몸을 실었다. 1937년 고등시험 사법과의 조선인 합격자들은 만주사변 이후에 시작된 그런 변화를 상징하는 사람들이었다."(40)
"광범위한 좌익인맥 덕분에 경북 안동의 가일마을은 일찍부터 '안동의 모스크바'로 불렸다. 1910년대 가일마을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지원한 항일조직 중의 하나가 대한광복회고, 1917년 대한광복회가 처단한 대표적인 친일파가 경북 칠곡의 부호 장승원이다. 해방후 수도경찰청장(수도청장)으로 좌익척결에 앞장선 장택상은 장승원의 아들이다. 김영재는 안동지역이 갖는 이런 독특한 정서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김영재의 경우를 보면 흔히 생각하듯 독립운동가, 친일파, 민주, 반민주 가문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일제시대에는 공부를 시킬 수 있는 가문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재력이 있는 집안이면 이 다양한 세력들이 공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학문을 최고로 여긴 전통 때문이었을까. 유서 깊은 독립운동가 가문이 일제 고등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자손에게 의외로 관대한 태도를 보인 것도 흥미롭다."(61-2)
김영재의 신원조회 당시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큰아버지 김응섭은 1931년에 결국 귀순을 택했다. "만주사변이 터진 1931년 이후에는 어떤 이유로든 상당수의 독립운동가들이 '생활'로 돌아왔다. 국내에서는 다른 선택지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김영재는 이런 우여곡절 끝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실무수습을 마치고, 1941년 1월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예비검사로 임명되었다. 정식검사로 발령받은 것은 그해 3월이다. 검사로 임용될 때에는 이미 '도요야마'로 창씨한 상태였다. 2년 뒤인 1943년 3월 평양지방법원 검사국 검사로 자리를 옮기면서 해주지방법원 검사를 겸직했고, 1944년 9월부터는 겸직을 면해 1년 후 평양지방법원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주에서 검사로 일할 당시에는 비전향 사상범의 감시와 통제를 담당하는 예방구금위원회 위원도 맡았다. 손꼽히는 독립운동가 가문의 아들은 이렇게 해서 확실한 친일검사로 자리 잡았다. 해방후 그의 삶은 더 복잡한 궤적을 그리게 된다."(65-6)
"(김영재와 고등시험 사법과 합격동기인 조평재가 평양에서 판사로 일하던 당시 돌보던) 조카가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한국은행 총재, 경제부총리를 지낸 조순이다. 한국전쟁 때 이충영과 강정택이 모두 납북된 후 강금복은 어려운 형편에서 4남 4녀를 키웠다고 한다. 서울대 법대교수로 일하다가 국무총리가 된 이수성, 영남대 정치학과 교수로 일하다가 국회의원을 지낸 이수인 형제가 그렇게 키운 자식들이다. 평양에서 허브 노릇을 한 김갑수는 훗날 진보당 사건의 주심 대법관으로 조봉암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홍석현 전 중앙일보사 사장의 아버지) 홍진기는 법무부 장관으로 조봉암의 사형을 집행했고, '4·19 원흉'에서 겨우 살아남은 후에는 삼성 이병철 회장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가 된다. 고형곤 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시에 국무총리를 지낸 고건의 아버지다. 인연은 좁은 바닥에서 이렇게 돌고 돈다."(85)
2부 이류에서 일류로 편입된 사람들 : 변호사시험 출신들
"변호사가 되는 여러 경로 중 조선인에게 가장 의미가 있었던 것은 (해방 후의 법조인력 충원기에 제2법률가군을 배출한) 조선변호사시험이다." "조선변호사시험 출신들 모두의 '아버지'뻘인 허헌 변호사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의 삶은 가장 주류에서 출발했으나 어느 시점부터 비주류로 밀려난 특정세력을 상징한다. 조선변호사시험 출신으로 해방공간에서 자취를 감춘 많은 사람들이 허헌 변호사와 직간접적인 관련이 있었다."(108-9) "대한제국 시절인 1907년에 변호사 등록을 한 허헌은 오랜 친구들, 고마운 인연이 모두 떠난 뒤, 일제시대 초기에 일어난 다양한 독립운동 사건의 변론을 맡으며 자기 몫을 담당했다. 3·1운동 민족대표 사건, 강우규 의사 사건, 김상옥 의사 사건, 조선공산당 사건, 원산총파업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3·1운동 변론에서는 심급상의 절차적 하자를 지적하여 재판을 공전(空轉)시킴으로써 일본인 판검사들이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115-6)
"일제시대 시행된 조선변호사시험은 이름 그대로 변호사가 되기 위한 시험이었다. 판검사가 될 수 없었던 대신 응시자격에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 독학자라도 이 시험만 붙으면 변호사가 될 수 있었다. 공부에 자신이 있는 청년들은 누구나 한번쯤 조선변호사시험을 꿈꾸었다. 심지어 '경성트로이카'의 한축이었던 전설적인 혁명가 이재유도 한때 조선변호사시험을 준비했다." "1928년 도쿄에서 4차 조선공산당 사건 관련자로 검거되어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사실무근이었기 때문에 면소되리라 믿고" 형무소에서 조선변호사시험을 준비했다. 그의 시험준비는 오래가지 못했다. 본인은 사실무근이라 주장했지만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위원으로 무려 70여회나 검속되었던 처지라 면소나 무죄를 받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1930년 11월 5일 경성지방법원은 이재유에게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했다. 이재유는 감옥생활을 통해 진정한 공산주의자로 거듭났다."(138-9)
"1936~40년의 불안정한 시기에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한 사람들 중에는 1945년 10월 11일 해방후 첫 판검사 임명에 포함된 사람이 많다. 조선변호사시험 출신들은 일제식민지 체제에서 판검사로 일하다가 해방을 맞이한 사람들과 입장이 달랐다. 일제시대에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 대신 친일의 오점이 적었다. 해방후 바로 판검사로 임용되기에 나이도 적절했다. 1941년 이후의 합격자들 중에는 태평양전쟁 말기 상황에서 변호사시보 과정을 제대로 마치지 못해 해방후에 당장 판검사로 임용될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선배 합격자들은 법원장이나 검사장 이상의 고위직을 받아야 하는 경력자들이라서 기존 판검사들과 자리싸움이 불가피했다. 1936~40년의 조선변호사시험 합격자들은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국가 건설에 법률가로 참여할 최적의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그중 적지 않은 변호사들이 우리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이러니다."(145)
3부 벼락처럼 찾아온 해방, 새로운 기회의 시대
"『법원사』의 공식기록에 따르면 1945년 10월 11일 미군정청은 전국의 일본인 판검사 전원을 일시에 퇴진시키면서 조선인 판사 39명과 검사 23명을 임명했다. 10월 11일이라면 사법부의 조선인 관료들이 임명되고 불과 이틀이 지난 시점이었다. 일본인들은 재판업무에서 배제하는 것은 그만큼 시급한 과제였다." "흥미롭게도 이날 퇴임자였던 장경근·민복기·민병성·신언한·이영섭·최윤모·김장호·박성대·정재환 등은 같은 날짜에 조선인 판검사로 임용되었다. 이원배만이 11월 19일에 인사가 났다. 민병성을 제외하면 결국 일본인명으로는 면직사령이 나고, 조선인명으로 다시 임명사령이 난 셈이다." "장경근은 이승만 정권에서 내무부차관, 국방부차관, 내무부장관 등을 지내며 온갖 반민주 반헌법적 행태에 관여했고, 4·19혁명 후 일본으로 밀항한 인물이다. 민복기와 이영섭은 훗날 대법원장을 지냈다."(183-5)
"10월 11일의 판검사 임용은 한국법조계 전체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조치였다. 10월 15일 미군정은 "미군 점령지역 내의 재판소 관리는 점령을 시작한 후 6주간 내에 완전히 조선인의 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라면서 "군정청 재판소 내에 전부 조선인으로 하여금 재판을 하는 권리를 허가하였다는 것은 약 반세기 이래 처음 보는 일"이라고 자신있게 선언했다. 실제로도 법원과 검찰은 다른 어떤 기관보다 빠르게 조선인의 손으로 돌아왔다. 당시 미군정은 조선인 변호사회의 간부들로부터 공직에 임명할 법조인명단을 전달받아 이를 기초로 판검사를 임명했다." "여러모로 순조로운 출발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수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친일판검사의 처리, 법률가의 절대적인 부족, 특정 정파의 주도권 장악, 통역권력의 등장, 북한에서 내려오는 법률가들의 처리 등이 대표적인 문제였다. 이 문제들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서로 뒤섞여 카오스를 만들어냈다."(187-90)
"1945년 11월 19일 이후에 이루어진 판검사 임명에서 가장 중요한 그룹은 일제시대 법원에서 일하면서 해방을 맞은 조선인 서기들이다. 해방 당시 변호사자격을 갖추지 못했던 이들, 이른바 '미자격자'들은 고등시험 사법과와 조선변호사시험 출신 '자격자'들에 이어 해방공간의 제3법률가군을 형성한다." "예나 지금이나 판검사 아래에서 공판조서, 증인신문조서, 피의자심문조서, 참고인진술조서 등을 작성하고 행정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직업이 서기다. 일반인들이라면 아마도 두 종류의 미자격자 중에서 (시보교육을 마치지 못한) 고시합격자들 쪽 손을 들어주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후 사법분야의 정책 결정자들은 서기들을 당장 임용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즉시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자격자인 고시합격자들에게는 정식으로 사법관시보 교육을 시키기로 했다. 이런 결정의 뿌리는 매우 깊다."(217-8)
"(서기 출신들의 판검사 임용은) 급한 불을 끄는 응급조치였다. 1947년부터는 사법관시보 출신들이 배출되면서 서기 출신의 임용비율은 많이 줄어들었다. 완전히 중단된 것은 아니어서 정부수립 후 1948년의 간이법원 판사시험, 1949년의 간이검찰청 검사보시험, 1952년과 1956년의 1회, 2회 판검사 특별임용시험 등을 통해 몇차례 더 서기 출신들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서기 출신들이 마지막으로 판검사로 임용된 것은 1958년 11월이다. 그해 12월부터는 8회 고등고시 사법과 출신들이 판검사에 임용되기 시작했다. 고시 8회는 108명이 합격하여 당시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대규모 법률가집단을 형성했다. 임용과 승진 때마다 화제가 되었던 고시 8회의 등장은 서기들의 특별임용제도가 완전히 종결되고 고시제도가 정착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경계선이 된다. 한시대를 끝낸 고시 8회의 대표자가 훗날 대법관, 국무총리, 대통령후보를 지낸 이회창이다."(224)
"1948년 정부수립 직전, 변호사법 제정을 놓고 서기 출신을 비롯한 미자격자들이 보인 격렬한 반응은 삼류 법률가로 밀릴 수 있다는 그들의 위기의식을 잘 보여준다. '판검사 특별임용시험'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한 오제도의 태도도 결국은 같은 맥락이다. 그들은 불안했다. 일을 통해서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초조감도 강했다." "건준에 참여한 대표적인 사회민주주의자 이동화는 1989년 김학준 교수를 만나 "자유당 정권에서 이른바 공안사건을 다루던 사람들 가운데 자신에게 열등감을 가진 어떤 사람이 자신을 끈질기게 괴롭혔다"라고 회고한다." "이동화를 잡아넣은 검사는 오제도와 조인구인데 조인구는 경성법전을 졸업하고 사법요원양성소 입소시험에 합격한 경우라 이동화의 묘사와 부합하지 않는다." "초창기 법조계 역사에서 종횡무진하며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오제도 검사의 내면세계를 이해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증언이다."(243-4)
4부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1946년 5월 16일의 인사로 퇴진한 사람들은 세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번째는 김계조 사건으로 촉발된 사법파동을 주도한 오승근 판사와 백석황 검사다. 판검사는 아니었지만 사법행정에 참여했던 강중인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들의 좌천은 좌익으로 의심되는 법률가들의 배제를 의미한다. 둘째는 구세대에 속한 법률가들이었다. 이종성은 1889년 경기도 출생으로 보성전문 법과를 졸업하고, 1922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해 변호사로 일했다. 구자관은 김병로와 비슷한 세대다. 원로에 속한 이들은 오승근과 백석황이 주도한 사법파동을 지지 또는 방조했다. 이들의 좌천은 항명에 대한 응징과 함께 세대교체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세번째는 미군정 초창기 사법을 주도한 '통역권력'의 2선 후퇴다." "김영희 법무국장대리의 퇴장은 일제시대 고등시험 사법과나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한 전형적인 법률가들의 복귀를 의미했다."(281)
# 김계조 사건 : 사업가 김계조가 조선총독부 자금을 끌어들여 시내의 미쓰코시 백화점에 댄스홀을 개장하고 직업여성을 모아 미군을 접대하는 사업을 추진하던 도중에, 김계조의 동업자인 김정목과 손홍원이 고발자로 나서, 댄스홀 개장의 숨은 목적이 바로 미군의 정보수집과 친일반미 정권 수립이라고 주장하면서 크게 비화된 사건.
"(퇴진 판사들의 공백을 메운) 김병로가 (사법부장으로) 전면에 등장함으로써 김용무 대법원장, 이인 검사총장과 함께 미군정시기 남한의 법조계를 이끈 이른바 '빅쓰리' 체제가 완성되었다. 일제시대 항일변론 활동을 통해 명성을 얻었고, 해방후 한민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미군정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동질(homogeneous)의 사람들이었다. 일제시대 때 김병로나 이인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허헌 변호사의 그룹은 완전히 배제되었다." "'빅쓰리' 체제의 완성으로 한민당의 보수성이 법원과 검찰에 그대로 이식되기 시작했다. 1946년 6월 9일 광주지방법원에서 김용무 대법원장은 "법원의 정치적 중립성이나 객관성을 언급하는 자는 사법부 관리로서 자격이 없다. 미군정의 정책에 반대하는 자나 신탁통치와 좌파이데올로기에 찬성하는 자는 그들의 범법행위를 증명할 만한 충분한 증거가 없더라도 엄중히 처벌해야 한다"라고 발언했다."(284-5)
"1946년 5월 15일 미군정청 공보부는 며칠전부터 소문만 무성했던 조선정판사 사건을 공식 발표했다. 서울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가 막 결렬된 시점이었다.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미군정에 대한 불만은 하늘을 찔렀지만 이미 철수를 시작한 미군은 상황을 통제할 충분한 인력을 갖추지 못했다. 조선인 군과 경찰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발표된 혐의사실은 다음과 같았다. 조선정판사에 남아 있던 지폐인쇄용 징크판을 김창선이라는 직공이 판매하려다가 경찰에 적발되었다. 경찰이 조사해보니 그는 이미 뚝섬과 조선정판사에서 위조지폐를 인쇄한 상태였다. 조선정판사에서만 1945년 10월 20일부터 여섯차례에 걸쳐 범행이 이루어졌다고 했다. 김창선의 자백에 기초해서 박낙종을 비롯한 조선정판사 직원 14명이 구속되었고, 조선공산당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 이관술과 해방일보사 사장 권오직이 수배되었다."(302-3)
"재판부가 김창선만을 따로 떼어내 피고인심문을 진행하자 다른 피고인들과 변호인단은 함께 재판을 받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와 같은 요구는 2회, 3회, 4회 공판 내내 계속되었지만, 양원일 판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김창선의 진술은 다른 피고인들의 유죄를 증명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증거였다. 다른 피고인들은 김창선을 반대신문하여 모순을 찾아낼 기회를 가져야 한다. '반대신문권의 보장'은 형사소송의 기본 중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이게 지켜지지 않으면 김창선의 진술은 증거능력이 없다. 양원일 판사는 김창선을 다른 피고인들과 분리함으로써 이런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8월 31일 7회 공판에 이르러서야 피고인들은 전원이 함께 재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미 김창선에 대한 법정의 조사를 마친 뒤였다. ... 공산당들이 위조지폐를 만들었다는 공소사실을 입증할 유력한 증인은 조선정판사 공장장이었던 안순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곧 참고인으로 변경되었다."(307)
"그의 진술은 단계마다 조금씩 달라졌다. 목격했다는 시간부터 오락가락했다. 명치좌(明治座)를 구경하고 밤늦게였다고 했다가, 일요일 정오라고 진술을 변경했다. 100원권 지폐를 인쇄하는 걸 보았다는 구체적인 정황도 매번 달랐다. 9월 18일 15회 공판에서 안순규는 자신의 과거 진술을 완전히 뒤집었다. 모두 고문에 의한 허위진술이었다는 새로운 주장이었다. 검찰은 그날 재판이 끝나자마자 안순규를 구속하고 위증죄로 기소했다. 안순규를 피고인으로 한 별도의 재판이 시작되었다." "이 주장과 관련해 변호인단은 10여명을 증인으로 신청했지만,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안순규는 검찰의 구형대로 10월 19일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본래 사건인 조선정판사 사건의 판결이 나오기 전에 파생된 사건인 위증죄 사건의 판결이 먼저 나온 것이다. 이례적인 일이었고, 이때 이미 조선정판사 피고인들의 운명은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308-9)
# 최종 판결 : 이관술·박낙종·김창선·송언필 무기징역, 신광범·박상근 징역 15년
"1963년에 출간된 『피로 물들인 건국전야』라는 책이 있다. '피로 물든'이 아니라 '피로 물들인'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적극적으로 건국전야를 피로 '물들인' 극우청년단체의 폭력성을 자랑스럽게 고백한 책이다. 저자는 김두한 자신이다." "용산역에서 파업 중인 전평 노조원들을 습격해 무력화시킨 무용담은 이 책의 핵심이다."(348) "스스로를 '백색 테러리스트'로 지칭한 김두한의 자서전은 납치, 폭행, 협박, 고문, 저격, 살인을 집대성한 범죄기록이다. 김두한의 고백이 그려내는 풍경은 오제도 검사 등이 설파한 '스파이전'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훨씬 거칠고 일방적이다. 어쩌면 김두한의 고백 자체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이야기를 17년 후에도 부끄러움 없이 털어놓을 수 있었던 우리 사회분위기인지도 모른다. 반대편이 모두 죽거나 사라진 후라서 아무 소리나 뱉어도 그만인 세상이었다. 그게 우리 역사가 되었다."(354-5)
"김두한의 고백이 경찰과 극우청년단체들의 밀착을 보여준다면,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장택상 저격사건을 본정경찰서의 실상을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흥미로운 사례다."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민애청 중앙지국 자위대책임자 임화(문인 임화와는 동명이인)는 나흘 뒤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다가 사망했다." "김두한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해방공간에서 벌어진 인권유린 사건들의 출처는 대부분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들이다. 별다른 죄책감 없이 본인들 스스로 좌익을 때려잡은 무용담을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가해 당사자인 현을성의 입으로 임화 고문치사 사건 당시까지 중부경찰서(본정경찰서)에 고문도구들이 있었고, 일상적으로 고문이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밝혔으니 이 부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공산당을 잡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정당화될 수 있는 야만의 시대였다. 같은 장소에서 앞서 진행된 조선정판사 수사만 예외였을까. 그럴 리 없다."(355-7)
5부 '법조프락치' 사건
"1948년 6월 20일 서울지방법원 민동식 판사는 최운하 과장과 박주식 서장이 무려 36회의 요정향응과 함께 각각 30만원과 25만원의 뇌물을 받고 무고한 사람을 구속해주었다는 혐의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6월 30일 최운하·박주식·강태섭을 송치받아 7월 3일 불구속 기소한 것이 바로 김영재 부장검사였다." "당시 공산당을 잡는다며 천하를 흔들던 최운하에게는 무척 모욕적인 경험이었다. 9월 22일 민판사는 최운하에게 무죄를, 박주식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돈을 건넸다는 강태섭만 1년 6개월의 실형을 받았다. 뇌물을 준 사람보다 받은 사람을 중하게 처벌하는 일반적 관행에 비추어볼 때 상당히 특이한 판결이었다. 최운하는 11월 8일 복직해 수도청 감찰과장을 맡았고, 1949년 6월 3일 반민특위에 다시 구속되었지만 곧바로 반민특위를 무력화시켰다. 반민특위의 중심에 섰던 국회의원 대부분은 '국회프락치'로 몰렸다. 보기에 따라서는 이보다 만족스러운 복수가 없었다."(415-6)
"1949년 8월 서울지방검찰청은 혼돈의 도가니였다. 오제도 검사는 '국회프락치' 사건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그 와중에 (김영재) 차장검사는 '남로당 프락치'로 구속되었다. 오제도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8월 28일경에는 김영재의 '상신서'가 김익진 검찰총장에게 전달되었다. 강석복에 대한 좌익 혐의 수사도 이때를 전후한 일이다. 이 정신없는 상황에서 검찰총장의 권유로 적지 않은 검사들이 사표를 제출했다. 대검찰청의 옥선진·엄상섭 검사, 서울고등검찰청의 김윤수·김달호 검사, 서울지방검찰청의 최대교 검사장, 강석복·박경재 검사, 법무부의 김병화 법무과장, 차영조 정보과장 등으로 대개가 과장, 부장, 차장으로 일하던 중견간부들이었다." "강석복·박경재·김달호·김병화·차영조 등 5명은 "직무태만 또는 남로당 프락치 혐의로 이미 기소된 김영재 사건과의 관련성이 농후"한 "권고사직"으로 해석되었다. 당시 검찰 전체의 인력규모를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세대교체였다."(424)
"세대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역교체였다. 서울지방검찰청 차장검사 자리는 9월 6일자로 이미 장재갑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이로써 서울지방검찰청의 공안라인은 이태희 검사장, 장재갑 차장검사, 오제도·선우종원 검사 등 평안도 출신으로 채워졌다." "이들의 상급자인 김익진 검찰총장은 (평양에서 판사를 거쳐 변호사로 일하다가) 해방 후에는 조만식 주도의 건준에 참여했다. 북한에서 신탁통치에 반대하던 그는 간첩혐의로 인민교화소에 잡혀가 7개월 형을 살고 나서야 뒤늦게 월남해 1948년 1월 1일 대법관에 임용되었다. 1949년 6월 6일 이승만 대통령이 그를 검찰총장에 발탁한 것도 이런 반공투쟁 경력을 인정한 결과였다. 평남 출신을 아니지만 거의 30년 가까운 세월을 평양에서 보냈다는 점에서 그도 역시 평안도 인맥으로 분류할 수 있다. 발언권이 센 중견검사들이 대부분 사표를 낸 후여서 평안도 세력을 견제할 사람들은 더이상 검찰에 남아 있지 않았다."(426-7)
"'적색 사법관' 사건으로 시작되어 1차와 2차로 확대된 일련의 '법조프락치' 사건들은 검찰의 떠들썩한 발표와는 달리, 1심 법원에 의해 대부분 집행유예 또는 무죄판결로 일단락되었다. 정부 수립 이전에 불법이 아니었던 남로당에 가입하거나 독서모임을 꾸렸던 일부 법조인들을 정부 수립 이후 뒤늦게 문제 삼아 기소한 것은 그 자체로 죄형법정주의 위반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건 내용 자체도 경미했기 때문이다. 법원의 일부 용감한 판사들이 이 잘못된 기소를 바로잡고자 나섰다. 항소심이나 대법원까지 이런 기조가 유지된다면 해방공간에서 벌어진 무리한 기소와 처벌들이 바로잡힐 수 있었다. 그러나 피고인과 검사 양측이 모두 1심의 결과에 불복하여 상소한 상태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태풍이 밀려왔다. 규모 면에서 이전의 어떤 태풍과도 비교할 수 없는 쓰나미, 바로 한국전쟁의 발발이었다."(472)
6부 한국전쟁이라는 쓰나미
"북한에서 월남하느라 초창기 경력에 손해를 보기는 했지만 김갑수는 기본적으로 양지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법무부에 정착한 후에는 요직인 법무국장을 거쳐 1949년 7월 법무부차관에 임명되었고, 1950년 3월에는 내무부차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후 피신한) 대전에서 김갑수는 장경근 국방부차관과 함께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만들었다. 비상사태를 맞아 적에게 협력한 사람들을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유기징역형에 처하는 대통령 긴급명령이었다. 살인, 방화, 강간, 중요시설 파괴, 중요물자 약탈 및 불법처분 등에 대해서는 사형 하나만 규정했다. 재판도 3심제가 아니라 1심 단독 종심(終審)으로 끝나도록 했다. 법령의 시행도 전쟁이 발발한 6월 25일로 소급되었다. 9·28 수복 이후 내내 논란이 된 대표적인 악법이다. 혼자 살겠다고 시민을 버려두고 도망친 최고위 공직자들이 대전에 자리 잡자마자 가장 먼저 이런 악법부터 제정한 것이 놀랍다."(478-9)
"9·28 수복 후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은 엄청나게 많은 피해자를 양산했다. 이 무시무시한 법령의 위헌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공개적으로 지적한 법률가는 유병진 판사가 거의 유일하다."(481) "9·28 수복 이후 10월 말경부터 서울에서 부역자 재판이 시작되었다. 유병진은 부역자들에 대한 처벌 자체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동의했다. 다만 "진짜 빨갱이로서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은 거개가 이미 도망"한 상태였다. 혹시 예외적으로 남아 있는 악질자들은 "우리의 원수이며 인류 공동의 적"이므로 당연히 처벌해야 한다. 그런데 그 이외의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유병진은 이 장면에서 아주 간단한 질문을 던졌다. "내가 만약 서울에 남아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유병진은 재판관의 양심으로 그들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요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483)
"1957년 12월 (차후에 『조선일보』의 극우논객이 되는)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학생 류근일이 서울대 교내신문에 「모색: 무산대중체로의 지향」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무산대중은 단결하라"는 식의 표현 때문에 류근일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구속되었다. 검찰은 아직 미성년이었던 류근일에게 징역 단기 2년 장기 3년을 구형했다. 유병진은 류근일에게도 무죄를 선고했다. 표현은 과격하지만 사회민주주의를 강조한 데 불과하고, 평화통일을 주장했다 하나 친구들과 토론 끝에 한 이야기일 뿐이며, 그가 소속된 신진회(新進會)도 국가반란을 꾀하는 단체가 아닌 학술모임으로 보인다는 이유를 붙였다." "1958년 7월 2일에는 진보당 사건의 조봉암과 양명산에게 각각 징역 5년을 선고하면서, 윤길중·김달호·박기출 등 나머지 피고인들 모두에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로 유병진도 결국 '공산 판사'로 몰렸고 뒤이어 판사 재임용에서 탈락했다."(486-7)
"오제도는 6월 28일 새벽 한강교가 폭파되기 직전에 간신히 한강을 넘었다." "9·28 수복이 되어 서울로 올라오니 부역자 처리가 최대 현안이었다. 오제도가 부산에서 미리 마련한 '부역자 처리요령'은 부역자를 심사하는 매뉴얼이 되었다. 군 정보기관 쪽에서는 김창룡이 오제도와 호흡을 맞춰 김갑수·장경근이 만든 법을 실행했다. 안문경·정희택 검사 등은 정보장교와 경찰관으로 심사반을 만들어 부역자들을 A, B, C급으로 분류했다. A급은 군법회의로, B급은 검찰청으로 송치하고, C급은 전원 석방했다. 잔류파 중에서 국회의원, 의사, 교수, 문화인 등을 처리하는 것도 오제도의 몫이었다. 그는 최대한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고 회고한다. 이 시절 오제도는 그야말로 부역자들의 생사여탈권을 한손에 쥔 신적인 존재였다. 오제도도 스스로를 '천하의 오제도 검사'라고 불렀다. 그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488-9)
"(도강파가 아니라는 이유로) 수복 이후 죄인 취급을 받으며 불쾌한 경험을 하기는 했어도 지하에 숨어 끝까지 붙들리지 않은 (반공) 법률가들은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인민군 점령 상황에서 일단 몸을 드러내면 협력을 피할 수 없었다. 협력하면 9·28 수복 후에 곧바로 부역자로 전락해 생사가 오가는 재판을 받아야 했다. 친구들을 따라 월북하거나 억지로 납북을 당하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었다." "(이때 몸을 피하는 데 성공한) 민복기·홍순엽·방순원은 모두 5·16 군사쿠데타 직후인 1961년 9월 1일 한꺼번에 대법관에 임명되었다. 서울고등법원장을 지내다가 1965년 세상을 떠난 김홍섭도 조금만 더 살았더라면 비슷한 영예를 누렸을 것이다. 정희택 검사는 5·16 군사쿠데타 이후 대검찰청 검사를 끝으로 검찰을 떠났지만, 12·12 이후 전두환의 부름을 받아 국가보위입법회의 법제사법위원장, 민주정의당 창당발기인, 11대 국회의원을 거쳐 감사원장과 언론중재위원장을 지냈다."(505)
"'법조프락치' 사건 관련자들은 전쟁 발발 당시 대부분 서울형무소에 수감 중이었다 인민군이 들어왔을 때 형무소에 갇혀 있던 이들은 피신할 방법이 없었다. 전쟁으로 항소심이 중단되었으므로 '국회프락치' 사건이든 '법조프락치' 사건이든 관련자들에 대해서는 유죄판결이 확정되지 못했다. 좌익으로 몰린 법률가들은 상급심에서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잃었다 대신에 여론재판이라는 전혀 다른 법정에서 영원한 유죄평결을 받았다. 이들이 실제로 프락치였는지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오제도와 선우종원 등이 퍼뜨린 '전쟁 발발 후에 인민군에 협력했거나 월북 또는 납북되었으면 그들은 과거에도 프락치가 틀림없다!'라는 논리가 공론의 장을 지배했다."(517-8) "'관제 빨갱이'들 중에서도 어떤 이들은 인공치하에서 적극적인 동조자로 나섰고, 어떤 일들은 지하로 숨는 길을 택했다. 이념 때문이 아니라 그저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누군가는 그게 맞아떨어졌고 누군가는 완전히 어긋났다."(521)
7부 1980년대까지 이어지는 '이법회'의 문제
"1945년 조선변호사시험의 예비시험 합격자는 68명이었다. 이들은 아마도 빠짐없이 (일본 천황의 항복방송이 나오던) 8월 15일의 필기시험에 참여했을 것이다. 여기에 예비시험을 면제받은 수험생이 추가되어 전체 필기시험 응시자는 200여 명이었다. 나름의 사연을 안고 1945년 8월 15일의 시험장을 지켰던 수험생 입장에서는 일본의 항복이든 해방이든 눈앞의 시험합격보다 더 중요한 과업은 없었다. 그런데 해방 당일 필기시험이 중단되었고, 수험생들은 귀중한 1년을 날릴 위기에 처했다. 변호사시험을 주관할 국가는 사라져버렸다. 새로운 국가는 도대체 언제 생길지 알 수 없었다. 1945년의 필기시험 응시자들은 조직을 만들어 이 위기에 대응하기로 결정했다. 교섭을 담당할 조직의 이름은 이법회 또는 의법회로 정해졌다. 이법(以法)은 문자 그대로 '법대로' 하자는 의미였고, 의법(懿法)은 법을 기리고 존중한다는 의미였다."(557)
# 응시자 전원(북한지역 외 106명)에게 변호사시험 합격증서를 교부하는 것으로 마무리
"해방후 첫출발부터 아예 시험에 합격한 적이 없는 다수의 법조인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법조계의 오랜 가십이자 스캔들이었다." "이들의 실체가 중요한 이유는 그 숫자 때문이다. 1922~44년 조선변호사시험의 전체 합격자는 164명이다. 여기에는 적지 않은 일본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고등시험 사법과나 행정과에도 합격해 변호사가 아닌 다른 길을 걸은 사람들도 많다. 1945년도에 합격증을 받았다고 알려진 106명은 22년 동안 시행된 이전의 전체 조선변호사시험 합격자 총수에 육박하는 엄청난 규모다. 그런 의미에서 이법회 회원들은 해방 직후 법조계 인력을 충원하는 가장 중요한 자원인 동시에 해결해야 할 부담이었다. 시험에 응시했을 뿐 채점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합격증을 받아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위상도 애매했다. 이들은 과연 1945년도 조선변호사시험의 합격자인가? 이 간단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558-9)
"유태흥이 학교를 졸업하던 1944년에는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고등시험 사법과가 실시되지 않았다. 조선으로 돌아와 응시한 조선변호사시험은 해방 당일에 중단되었다. 이법회를 통해 어렵게 합격증을 얻었고 동료들 중 일부는 그 합격증만으로 사법관시보를 거쳐 운좋게 판검사가 되었다. 유태흥은 거기에 끼지 못했다. 첫번째 기회를 놓친 이법회원들은 당연히 1946년의 사법양성소 입소시험과 1947년의 1회 변호사시험에 응시했다. 필기시험 면제라는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법요원양성소 입소시험도, 1회 변호사시험도 응시 당시에는 마지막 기회로 보였을 것이다. 이후의 시험이 다시 기득권을 인정해주리란 보장은 없었다. 구술시험만 합격하면 되는 두번의 기회를 연달아 놓쳤으니 유태흥에게 뼈아픈 실패다. 그가 통과한 2회 변호사시험은 이법회 출신에게 사실상 마지막으로 주어진 법률가자격 취득의 기회였다. 유태흥은 막차 중의 막차를 탔다."(580-1)
"(1차 사법파동에서 소장파 판사들의 큰형님 노릇을 자임한) 유태흥은 서울형사지방법원 수석부장판사로서 수사기관의 비밀구속영장 심사업무를 담당하는 동안 영장을 기각한 일이 거의 없는 것으로 유명했다. 비밀구속영장은 검사가 구속영장청구서를 법원 접수창구에 정식으로 접수시키지 않고 직접 형사수석부장판사에게 제출하여 발급받는 영장이었다. 언론에 알려지면 곤란한 정치적인 사건, 시국사건들이 많았다. 가끔은 소명자료가 부족하여 정식으로 청구하면 기각당할 것 같은 사건에 악용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유태흥은 독립성을 강조한 소장판사들과 기본입장이 다른 사람이었다. 이 부분을 포함시켜 전체를 조망하면 1차 사법파동 이후 유태흥이 보인 독특한 변화도 이해할 수 있다. 박정희의 입장에서 봤을 때, 독재에 저항한 소장판사는 당장 잘라내야 할 위험요소였지만, 자기 조직만 지키려는 판사는 잘 구슬려 함께 가야 할 동반자였기 때문이다."(585)
# 1차 사법파동 : 1971년 7월 28일 서울지방검찰청 공안부가 서울형사지방법원의 이범렬 부장판사, 최공웅 판사, 이남영 서기 등에 대해 피고인의 변호사에게 향응을 제공받았다는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한 사건. 관행화된 비리가 노출되자 법원 조직의 이익을 수호하려는 구성원들의 의지가 작동했다.
"정권에 밉보이기 딱 좋은 1차 사법파동의 선두에 서고도 유태흥은 아무런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다. 유신정권 아래에서 그는 서울형사지방법원장으로 영전했고, 뒤이어 대법관에 임명됐다. 전두환은 그를 '새 시대' 대법원의 얼굴로 선택했다. 전두환 시대의 법원은 어디 가서 정의를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조직이었다. 그 안팎에서 벌어진 온갖 어두운 행태의 중심에 유태흥이 있었다. 유태흥 대법원장의 재임기간에 일어난 어두침침한 사건들을 여기서 모두 거론할 수는 없다. 그래도 1982년의 장애인 법관 임용탈락 사건만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1982년 8월 대법원은 지체장애가 있는 지원자 4명을 법관 임용에서 탈락시켰다. 조병훈·김신·박찬·박은수 4명의 탈락자는 모두 소아마비가 있는 몸으로 1980년의 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1982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사람들이었다." "대법원장이 멀쩡한 법관후보자들을 '열패고'로 몰아넣은 것이다."(585-6)
# 파문이 확산되자 다음해인 1983년에 모두 판사로 임용
"'열패고'와 함께 유태흥의 삶을 설명하는 또다른 열쇠는 한국전쟁 중의 납북경험이다. 유태흥이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고 1년이 되기 전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유태흥은 평양 근처 탄광에 끌려가 지하 600미터 막장에서 세 달 동안 강제노동을 하다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단신으로 탈출했다. 천신만고 끝에 충남 홍성 집에 도착한 유태흥은 아버지가 이미 인민군에게 학살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유태흥이 군법무관으로 입대한 것은 그후의 일이다." "북한에 끌려갔다 돌아온 것은 자랑스러운 전력이 아니라 위험한 전력이었다. 자칫하면 위청룡처럼 간첩으로 몰려 한순간에 인생이 끝날 수 있었다. 현체제에 끝없는 충성을 바치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한번이라도 북쪽과 얽힌 사람들이 평생 안고 가야 할 무거운 짐이었다. 납북경험이 유태흥의 모든 걸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독재 세력과의 이상한 연대를 이해하는데는 확실히 도움이 된다."(593-4)
"한일협정 반대투쟁을 시작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기간 내내 홍남순은 광주지역에서 이루어진 거의 모든 민주화운동의 선두에 섰다."(596) "5·18 민주화 운동 때는 전남북 계엄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육군 고등군법회의와 대법원을 거쳐서 국방부장관의 확인으로 최종 확정된 형은 징역 7년이었다. 동기생인 유태흥이 대법원장이 되고 파안대소의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홍남순은 교도소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1981년 12월 25일 성탄절에야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유태흥과 홍남순은 약점을 지닌 채 법조인생활을 시작했다. 1945년에 중단된 조선변호사시험 출신이라는 사실은 자랑거리가 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 약점을 해결했다. 한 사람은 권력을 추구하면서 한 시대를 사법부의 암흑기로 만들었다. 다른 한 사람은 소박한 품성으로 이웃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살았다. 출발은 같았지만 삶의 여정과 종착역은 많이 달랐다."(598)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