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
김호동 지음 / 까치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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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초기 기독교 사회의 이단 논쟁에서 패배한 네스토리우스교는 동서교역을 독점하고 있던 소그드 상인들의 발길을 따라 동방 세계로 전해져 당唐의 수도 장안에까지 이르게 된다. '격의불교'처럼 현지화 과정을 거친 그들은 儒佛道 三敎와 습합되어 본래의 모습을 다소 잃어버렸지만 서방 세계에 기독교 국가에 관한 몽상을 심어주기에는 충분했다.

각색된 전설을 접한 서구인들이 이슬람 세력을 징벌하는 동방의 '사제왕 요한'에 관해 막연한 환상과 기대를 품고 있었다면, 동양인들 역시 서왕모(西王母) 설화나 불교의 '서방정토'와 같은 관념을 통해 오래전부터 서방을 이상향으로 그리고 있었다. 미지의 것에 대한 동경과 신포도를 바라보는 두려움은 지리상의 발견 이전의 보편적인 정서였다.

12세기를 피로 물들인 징기스칸의 대大정벌은 대륙을 하나로 이어붙였고, 동방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던 서구 세계가 그 실체를 본격적으로 탐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비록 그것은 종교적으로 채색된 환상들이 물거품으로 사라지는 현실을 목도하는 과정이었지만, 이 때의 만남에서 축적된 지식들은 대항해 시대를 예비하는 열쇠로 남았다.

동방 기독교는 지배층의 변심과 교역의 중단 등으로 점차 세력이 감소했으며, 흑사병의 창궐과 이슬람 제왕 티무르의 잔혹한 정벌은 그들의 생존을 결정적으로 위협했다. 가혹한 현실은 신을 향한 믿음을 회의(懷疑)의 제단 앞에 무릎 꿇렸다. 욥(Job)이 아니었던 네스토리우스 교도들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자취에서 세계사가 탄생하고 있었다.


1145년 사제왕 요한에 대한 소식이 처음 전해진 지 300년 만에 비로소 그들이 그토록 열망하던 꿈, 즉 요한의 왕국을 찾으려는 소망은 마침내 실현되었지만, 그들이 찾아낸 것이 기대했던 결과와는 너무나 달랐다. 그러나 그동안 들였던 노력의 대가는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침내 동방세계에 대한 확고한 지식과 대항해의 시대로 들어가는 열쇠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16)

중국의 경교화景敎化가 언어와 관습이 다른 멀고 먼 이역에서 하루 빨리 전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가의 적극적인 보호를 받으며 수많은 중국민들이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는 종교적 개념을 표방할 필요가 있었고,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변신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 변신은 결국 `중국화`, 즉 유불도, 삼교의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었다. 153)

그들(소그드 상인)은 유목민들이 사는 초원으로도 진출하여 교역을 하면서 그들을 개종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몽골 제국이 출현하기 전에 네스토리우스교는 이미 초원 여러 곳에 견고한 발판을 만드는 데에 성공했고, 씨족, 부족 단위로 생활하는 유목민들은 수령의 결정에 따라서 집단적인 개종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케레이트나 나이만 혹은 웅구트와 같은 유목집단들이 대거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그것이 바로 서구에서 사제왕 요한의 전설을 잉태시킨 모태가 된 것이다. 172)

흥미로운 사실은 유럽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서아시아에서도 특히 수도원이 (흑사병으로부터) 극심한 타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우선 체계적인 의료기관이 부재한 상태에서는 그나마 교회나 수도원과 같은 종교시설에서 초보적인 치료조치를 취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감염된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들 수밖에 없었고, 역병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정신적 안식처로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곳을 찾았기 때문이다. 2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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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의 탄생과 유산 - 제국 일본의 교두보
오카베 마키오 지음, 최혜주 옮김 / 어문학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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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는 민간 정부의 관리 아래에서는 전쟁을 억제하는 조직이지만 자율권을 획득하는 순간 전쟁을 촉발하는 조직으로 변모한다. 군대가 국가의 주축이 되면 외교적 협상 전략을 군사적 점령 전략으로 치환하려는 유혹에 쉽게 빠지며, 국가의 전 역량을 전쟁 수행에 쏟아붓는 하나의 선택지에 올인하게 된다. 전쟁은 그야말로 생명을 불살라 승리를 쟁취하려는 한 판 도박이기 때문에 실패할수록 오히려 매몰 비용에 대한 집착을 강화시킨다.

2•26 사건으로 일본 군부는 정부의 통제력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야망을 현실화한다. 동북 군벌 장쭤린을 폭사(1928)시키고, 유조호 사건(1931)을 조작하여 만주사변을 일으킨 것은 정부의 묵인과 방조를 넘어 미래를 창조하려 했던 관동군의 테러행위였다. 군사 기지를 방불케 하는 만주국의 체제는 태생부터 예견되어 있었으며, 전쟁만을 위한 총체적 착취로 달궈진 총구를 식힐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파괴뿐이었다.


사이토 내각은 만주국에 특명전권대사를 파견하여, 관동군 사령관에 이 전권대사와 관동주 행정의 지도감독권을 겸임시킨다는 편법을 고안해냈다. 만주국에 대한 지도는 군사령관 겸 전권대사의 `내면적 통할 아래 주로 일본계 관리를 통해` 행하도록 되었다. 이것이 군사령관의 내면지도권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50)

이 시기의 국제정세는 예상한 바와 달리 일본에 매우 유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제국주의국은 대공황 이래 내외에 많은 문제를 안고, 또 소련은 전력을 다해 5개년 계획에 따른 국내 건설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침략에 적극적인 간섭을 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미국 국무장관 헨리 스팀슨은 일본에 대해 강하게 나오는 것은 도리어 군부를 자극하는 결과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영국은 중국에 동정적이었지만 반면, 일본의 행동이 중국의 반제국주의운동을 누르는 것이라고 기대했다. 72-3)

태평양 전쟁 하의 만주국은 불충분하게 치우친 산업구조를 책임진 채, 증산과 대일수송의 증대만이 냉엄하게 추구된 셈이 된다. 그것은 경제통제와 민중동원의 끝없는 확대뿐이 없었다.
...
전쟁준비를 위해 시작한 만주산업개발 5개년 계획은 오히려 전쟁 때문에 그 모순을 깊게 하여, 전쟁 가운데 붕괴해 갔던 것이다. 122)

대본영은 1944년 9월, 대소전략을 지구持久 수세로 180도 전환하여, 관동군의 작전계획을 전면적으로 변경하도록 지시했다.
...
관동군의 약체화는 동군의 무력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만주국의 지배 체제를 근본으로부터 흔드는 것이었다. 더구나 과거에는 정예의식이 강했던 만큼, 이 현실은 또한 관동군의 내외에 걸쳐 비합리성과 비인간성을 증대시켜, 만주국 지배에 폭력적 성격을 강하게 했다. 165)

이 (동북 지방) 침략을 추진한 것은 군부, 특히 관동군인데 일본의 지배층과 정부는 때로 군부와 생각이 달랐음에도, 이러한 형태로 중국을 지배하게 된 것에 결코 반대하지 않고, 결국 모든 기정사실을 인정했다.
...
일본 국내에서는 만주사변과 만주국 성립을 발판으로 군부의 정치상 발언권이 강해져, 파시즘이 대두해온다. 2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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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세계의 만남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45
마리우스 B. 잰슨 지음, 장화경 옮김 / 소화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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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일본 정신의 개화(開化)가 개화(開花)하기 시작한 분기점을 짚고 있다. 우리에게 남은 질문은 그 정신이 제국주의를 거쳐 군국주의로 만개(滿開)하는 분기점이 어디인가이다.


18세기 번역 시대의 막을 여는 진정한 계기가 되었던 것은 권두에서 언급했던 (스기타 겐파쿠 등이 1771년에 인체 해부를 참관한 후에 네덜란드 책을 번역한) 에도의 역사적인 해부서였습니다. 49)

스기타 겐파쿠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 시작된 번역 운동과 그것으로 촉발된 교육 및 학문의 실증적 연구의 융성은 이미 변하고 있었던 낡은 세계관의 붕괴를 상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막부의 붕괴를 촉진하는 매체로 작용하였던 것입니다. 57)

(제1차 세계대전기 일본의 육군 지도자들은) 새로운 국제 경쟁에서 승리는 경제력을 통합적으로 계획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만약 세계의 경제 자원이 서구의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어 일본의 참여가 거절 당한다면, 일본도 자원 탈취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을 세세하게 정리한 사람은 육군 대장 이시와라 간지입니다. 123)

"이 같은 상황에서 싸움을 피한다면 필시 망국에 이를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서 싸운다고 해도 또한 망국을 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싸워도, 싸우지 않아도 망국이라면, 싸워서 구사일생의 활로를 찾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싸우지 않고도 당하는 망국은 정신까지 송두리째 망하는 영원한 망국이 될 것으로 이미 운명지어져 있다." (태평양전쟁 전, 해군 대장 나가노 오사미)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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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계보 - 한국인의 민족의식과 영토인식은 어떻게 변해왔는가
야기 다케시 지음, 박걸순 옮김 / 소와당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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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성은 타자(他者)를 통해 얻어지는 미덕이며, 우리와 타자 사이에 존재하는 교집합이다. "타자가 곧 객관성은 아니지 않는가"라는 우려는 '짐짓 그러한 체' 하는 소피스트(sophist)의 가면(假面)과, '역시 그러하다는' 데모스(demos)의 기우(杞憂)가 만나는 자리이다.

http://history21.egloos.com/v/2418101 (을파소의 역사산책, 조선 국경과 간도에 대한 간단한 정리)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는 인식은, 역으로 말하면 고구려의 옛 영역을 말갈이 부당하게 `점거`하고 있다고 하는 인식으로도 연결된다. 따라서 그 말갈(후의 여진)에 의해 `점거`된 고구려의 옛 영역을 회수하는 일은 통일신라 분열 후 `후삼국`의 전란을 겪으면서 `삼한`을 통일(재통일)했던 고려 태조(왕건)에게는 이른바 `북진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명분 중 하나가 되었다. 93)

본래는 별개로 창작되었던 해모수와 단군의 신화는 양자에 공통되는 천제의 아들이라는 속성을 매개로 이윽고 동일한 신격으로 결부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부여와 고구려, 백제의 건국설화가 통합되고, 단군(해모수)의 아들인 부루가 부여를 건국하고, 그 위에 한 사람의 아들인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마지막으로 주몽의 진짜 아들(혹은 양자)인 온조가 백제를 건국했다고 하는 일련의 계보가 성립하게 되었다. 144)

조선왕조의 성립은 단군시대의 예언에 의해 `수천 년 이전`에 이미 약속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예언이 실현되었던 조선시대에 들어서면 단군에 대한 계승의식은 한층 더 고조되었고, 단군에 대한 국가 제사가 단계적으로 정비되었다.
구체적으로는 먼저 1429년(세종 11년)에 평양의 기자묘 남쪽에 단군묘가 신설되었고, 단군과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이 합사되었다. 164-5)

(러시아의 남하로) 동북 변경의 쇄국정책이 사실상 파탄나자 유망민 무리는 함경도에서 연해주로, 또는 `간도` 방면으로 대량 유출되었다. 이 즈음 러시아의 남하에 대항해서 청나라 또한 종래의 봉금책을 철회했고, 동북부로 중국인을 보내고 개간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자 했다. 1881년(광통 7년) 청나라가 간도지역 개간에 정식 착수했을 때에는 이미 조선에서 온 대량의 유망민들이 그곳에서 경작에 종사하고 있었다.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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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고대 - 아시아연대총서 5
이성시 지음, 박경희 옮김 / 삼인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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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러일 전쟁(1904~05년)에서 승리한 일본이 자신들의 만주 침략을 학문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했던 일련의 시도에서 비롯했다. 일본은 발해 문화의 종속성과 비주체성을 강조하여 만주가 특정 국가의 영토가 아니라는 사실을 부각시켰고, 이후 한국에서는 식민사관에 대한 반작용으로 발해, 신라의 남북조 개념을 정립한다. 즉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세운 한민족 국가이므로, 통일에 대한 환기와 전망을 동시에 제공하는 한반도의 고대사라는 관점이다. 중국 역시 자신들의 입장에 맞추어 발해를 말갈족이 세운 지방 정권으로 간주하면서, 다양한 소수 민족의 자립성을 희석시키고, 하나의 중국 안에 그들을 자리매김하려는 의도를 보여주었다.

동아시아 삼국의 고대사는 근대 국민 국가의 성립 추이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1900년대를 전후하여 일본의 팽창 정책 속에서 '만들어진' 학술 연구와 그 대립항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처럼 고대란 실제로 존재했던 사실(事實)이 아니라 현대가 주목하는 토양에서 비로소 자라나는 사실(史實)인 것이다. 현대의 시각을 과거에 투영하는 행위 자체를 문제삼는 것은 과거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착각에 불과하다. 다만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만들어진 고대' 자체가 아니라 그 만듦의 의도와 해석의 본류이다. 고대사 발굴이 현재를 과거로 밀어 내는 것인가, 과거를 현재로 당겨 오는 것인가는 그 과정 전체를 또 하나의 역사로서 기록하는 성실함에 달려있다.


대체로 남북한이나 중국의 역사학계에서의 고대 일본상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근대 일본이 `현재`를 투영하여 과거 속에서 읽고 만들어 낸 일본상(자화상)의 구속을 받는다. 자기와의 관계 속에서 일본을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 할 때 근대 일본의 해석 도식이나 평가 기준이 전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아시아 각국에서의 국가 이야기는 근대 일본의 태내에서 자라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3)

광개토왕비문은 적어도 고구려 멸망(668년) 후부터 1200여 년 동안 그와 같은 텍스트(동아시아 삼국 전체에 중요한 역사적 유물)로서 주목받은 적이 결코 없었으며, 그 의미를 찾아내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에 `발견`되자마자 역사 저편에서 홀연히 소생했다는 것이다. 37)

박시형은 발해가 조선사에 편입되지 않으면 안 되는 근거로, 민족적으로도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고, 더욱이 남(쪽)의 신라와 발해가 서로 `동족`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강조하였다.
...
그러므로 이러한 점을 논거로 한 이상 이는 필연적으로 삼국 시대 이전에 한민족으로서의 동질성•동일성이 존재해 있었음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자체의 논리적 요청에 의해 초래된 변화였다. 91-2)

역사적 세계로서의 동아시아 세계란 역사적인 검증 차원 이전에 1960년대의 정치적 현실에 입각한 지역 설정이었던 것이다. 중국•한국•베트남•일본 네 나라가 동아시아 세계를 구성하는 지역으로 명확하게 의식된 것은 그러한 시대 배경과도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159)

앤더슨에 따르면 제국주의자들은 식민지 국가의 유적 건설자와 당대 식민지 원주민은 같은 종족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
유적은 복원되어 주변 시설과 함께 설치됨으로써 원주민에게 자신들이 장기간에 걸친 위업을 이룰 능력도 자치 능력도 결여되어 버렸음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223)

(시바 료타로의 논의에는) 법가의 나라 -> 문명 -> 합리적 -> 상품경제 -> 자유•개인 -> 근대 자본주의라는 흐름 속에서 근대 일본의 성공 이야기가 자리 잡고 있으며, 이에 대해 중국•한국은 유교의 나라 -> 문화 -> 불합리 -> 억상(抑商)정책 -> 가족주의 -> 대정체라는 대칭 항목으로서 묘사, 일본과는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작업이 시도되고 있다.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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