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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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해도 좋지만, 여전한만큼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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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데모크라시 일본 근현대사 4
나리타 류이치 지음, 이규수 옮김 / 어문학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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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데모크라시는 메이지 헌법 체제에 대항하여 러일전쟁 이후부터 1920년대까지 벌어진 정치적 자유 획득 운동을 가리키며, "국가적 가치에 대한 비국가적 가치의 자립화를 특징으로 한다."(294) 그 첫걸음은 포츠머스 강화조약에 배상금이 포함되지 않자, 도쿄 히비야 공원에 군집한 대중이 내무대신 관저와 강화에 찬성한 국민신문사를 불태우면서 7일 동안 격렬하게 항의를 벌인 히비야 방화사건(1905.9.5)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러한 사태가 '국민'이라는 이름 아래 수행"된 것이다. "번벌과 압정에 대한 비판은 '국민'이라는 이름 아래 팽창주의적인 국권"을 요구하는 형태를 띄었으며, 이는 내셔널리즘과 결합된 '제국'의 데모크라시였다.(24-5)


'민본주의'는 요시노 사쿠조가 데모크라시의 번역어로 삼은 말이다. "당시 데모크라시에는 '민주주의'라는 또 하나의 번역어가 있었는데, 이 뜻은 '국민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다'는 것으로 군주국 일본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배척당했다. 요시노는 민본주의를 주권의 존재가 아니라 주권 운용의 개념으로 받아들여, 정치의 목적을 '일반 인민의 이복(利福)'에 두었고, 정책의 결정은 '일반 인민의 의향'에 따르는 것이라 말했다." 다시 말해, "주권은 천황에게 있다는 것을 전제로 '인민을 위한' 정치, '인민의 의향'을 중시하는 정치로서 민본주의를 제창한 것이다."(45-6) 국가를 앞세운 민본주의 논의는 '안으로는 입헌주의, 밖으로는 제국주의'를 주창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러일전쟁 이후 시베리아 출병과 매점매석 등으로 쌀값이 폭등하자, "물가의 등귀와 생활난이라는 말이 잡지와 신문에 자주 등장"하고 민심이 악화되었다. 생활고가 야기한 쌀소동 사태는 정당 정치를 낳아 최초의 본격 정당 내각인 하라 내각이 탄생(1918.9.29)한다. 하라 내각은 선거 자격을 직접국세 10엔에서 3엔 이하로 낮추어(1919.5) 유권자 수를 "134만 명에서 286만 명"으로 늘리고, "소선거구제를 도입하여 의원정수를 381의석에서 466의석으로 늘렸다."(116) 여당인 정우회와 야당인 헌정회는 모두 적극적으로 지역 이익의 도입을 도모하였고, "국가에 의해 사생활 영역에 대한 합리적 개선이 시도되어 근대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국민'의 육성이 촉구되었다."(120)


쌀소동 이후, 사회개조를 주장하는 움직임은 네 가지 조류로 나뉜다. 첫째는 "정당정치의 확대와 민의 존중을 주장"한 민본주의 논의의 진전이고, 둘째는 사회주의 운동의 복권이다. 셋째는 "일본과 천황을 전면에 내세워 '국체'에 입각한 개조를 추구한 국가주의 단체" 운동이었고, 넷째는 국가와 시정촌이 주도한 새로운 사회 편성 시도였다.(130) 데모크라시 논의가 여전히 '국민'을 근거로 이루어졌지만, "노동자와 농민, 차별받는 사람들에게도 1920년 전후의 시기는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이 시기에는 노동조합이 다수 조직되어 가와사키 조선소와 야하타 제철소의 노동쟁의를 비롯해 아시오와 히타치 광산 등 쟁의 건수도 늘어났다."(147)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식민지 조선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3·1운동이 일어나자 하라 내각은 "헌병경찰제도를 폐지하고 대검(帶劍)을 중지"시켰으며, "다음 해에는 통치 방침을 '문화의 발달과 민력(民力)의 충실'로 변경하여 '문화통치'를 추진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사신문> 등 조선어신문도 창간되었다."(176) 도쿄제국대학에서 니토베 이나조의 뒤를 이어 식민정책강좌를 담당한 야나이하라는 전제적 착취나 동화 정책이 아닌 "자주 노선에 입각하여 별개의 '역사적 사회'를 지닌 조선인과 협동하는 방향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이 역시 "조선과 일본과의 '제국적 결합'을 견고하게 만들기 위한 식민지 통치론"에 불과했다.(181-2)


관동대지진(1923.9.1) 당시 "조선인 학살에 직접 관여한 자가 '민중'이었다는 사실은 식민지 사람들을 차별, 배제하면서 그들에게 공포의 심성을 품은 제국 사람들의 존재 양태를 보여준다." 그간 정부를 향해 각종 소요를 일으키던 잡업층은 "자신들의 일자리가 빼앗길 수도 있다는 불안을 진재 사태 속에서 분출"하였다.(202) "개인주의의 진전과 모더니즘 문화의 대두, 사회운동의 전개"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공격받았고 내셔널리즘이 강화되었다. '국체'와 '순풍미속(醇風美俗)'을 전면에 내세워 도시화에 따른 문제를 해결하고 국민 통합을 일궈내려는 움직임은 "1923년 11월 내려진 '국민정신작흥조서(國民精神作興詔書)'로 집약되었다."(205)


1925년 기요우라 내각이 착수한 '보통선거―치안유지법 체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통치기구가 재편성된 것의 귀결이었다. 귀족원과 추밀원 개혁, 노사관계와 소작관계의 입법화 등 하라 내각 이후의 사회 재편성과 관련된 일련의 흐름이 보통선거법과 치안유지법으로 체계화되었다." 이는 "정당을 '정치적 지배계급의 하나의 분지(分肢)'로부터 '국가 의지 결정의 중심'으로 만든 개변"이었고, 한편으로는 한층 확대된 선거권 부여(25세 이상의 제국신민 남성에게 선거권 부여)를 통해 "사람들을 '국민'으로 자각시켜 주체적으로 국가와의 일체화를 촉구"하려는 움직이었다. "통합(보통선거)과 배제(치안유지법)를 통해 선별적으로 '국민화'를 도모한 것이다."(239)


다이쇼 천황이 사망(1926.12)한 후 출범한 다나카 내각의 초점은 무엇보다 '외교 문제'였다. 다나카 내각이 동방회의에서 발표한 '대지정책강령(對支政策綱領)'은 만몽 지역을 중시하여, "제국의 권리 이익과 재류방인의 생명 재산이 침해될 염려가 있을 때에는 '단호한 자위 조치'에 나선다는 내용이었다. 또 중국으로부터 만주 지역을 분리하는 '만몽분리론'도 제시되었다. 여기서 헌정회의 외교정책이었던 협조외교(시데하라 외교)는 무단 외교(다나카 외교)로 전환되었다."(255) 아울러 치안유지법을 개정하여, "국체변혁의 죄에 최고형을 사형으로 상향 조정하고, 대상 범위를 '결사의 목적 수행을 위해서 행동하는 자'로 변경"하는 등 자의적 규정을 부가했다.(262)


하마구치 내각(1929.7.2) 시기에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사상과 운동을 되살리면서 기존 사회관계의 개량을 시도한 관료들이 출현했다. 관료들은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운동 주체인 '민중'(노동자와 농민, 여성)의 요구를 포섭하고 국가 주도로 사회개조를 실천할 수 있는 정책을 입안하여 실현하려고 노력했다."(266) 그러나 사회개조 운동이 급진화되면서, 노동쟁의와 소작쟁의가 늘어나고 "이와 병행하여 군부의 헤게모니가 대두할 징후"가 나타나자, 정당정치에 대한 회의가 확산되었다.(269) 이 모든 혼란을 집어삼킨 만주사변은 "대립과 대항의 존재를 해소하고 소거"시켰다. '끓는 조국애의 피, 일본에 넘쳐 흐른다!'는 <도쿄아사히신문>(1931년 11월 19일)의 표제어였다.(286-7)


※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 구분

(1) 러일전쟁기(1905년) ~ 제1차 호헌운동(1912~1913년) : 번벌(藩閥) 정치 타파를 내건, 전국적인 도시 민중 운동. 군비 확장 반대와 악세 폐지를 요구하면서 조슈번벌의 핵심인 가쓰라 타로 내각을 무너뜨렸다. 이는 일본의 민중운동이 천황제 정부에 승리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정당에 기초하지 않던 정부가 이제 천황의 조칙(詔勅)이라는 권위와 위세를 통해 권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의미를 지닌다. 운동을 주도한 계층은 러일전쟁 이후 자본주의 발전이 만들어 낸 비특권 자본가 계층과 ‘단나슈’로 일컫는 도시중간층이었다.

(2) 제1차 호헌운동 ~ 쌀소동(1918년) : 도시중간층을 기반으로 데모크라시 운동의 뿌리가 확대되어 각지에 보통선거 요구를 중심으로 한 자주적인 시민정치결사가 생겨났다. 요시노 사쿠조는 주권 운용을 민중의 의사결정에 맡긴다는 '민본주의'를 헌정의 기본 이념으로 설정하고, 구체적인 정책으로서 안으로는 보통선거와 정당내각제의 채용, 밖으로는 식민지 조선에서 자행된 무단적 침략정책의 포기를 주장했다.

(3) 쌀소동 ~ 제2차 호헌운동(1924년) :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근로대중의 정치적 자각이 고조되었고, 보통선거운동이 전국적 대중운동으로 전개되었다. 평화에 대한 요망도 제기되어 시베리아 출병은 국민적 지지를 얻지 못해 패배로 끝나고, 워싱턴회의를 통한 군비축소는 대중에게 환영을 받았다. 헌정회, 혁신구락부, 정우회의 호헌 3파에 의한 제2차 호헌운동은 정당정치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다. 그러나 정당정치가 1929년 세계대공황과 중국민족운동이라는 새로운 사태를 타개하지 못하자 점차 군부 파시즘이 대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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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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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참여정부 때,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가 발간되었다.


http://jeju43peace.or.kr/pages.php?p=4_2_1_1




이번 정부에서 5·18 민주화운동 진상보고서가 발간되길 소망한다.


http://ikbc.co.kr/jw_2ds/index.html?code=main_news_02&menu_id=56_65_73&uid=286562&mod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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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러일전쟁 일본 근현대사 3
하라다 게이이치 지음, 최석완 옮김 / 어문학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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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통상항해조약(1894.7.16)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탈아론'(1885)에서 주장하던 주요 목표 중 하나를 이루어냈다. 그것은 "자국 영토를 법으로 지배하는 근대 국가의 주권을 제한"하던 치외법권의 철폐이다. 치외법권의 철폐는 일본이 "구미와 대등한 주권 국가로 승인되었음을 의미한다."(73) 이로써 일본은 서구 열강을 따라잡는 행보를 맹렬하게 진행시킨다. 야마가타 아리토모 수상은 제국의회에서 열린 시정 방침 연설(1890.12.6)에서 '주권선'의 안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구역으로 ‘이익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식민지 대만과 세력권 조선을 발판으로 이후의 50년 동안을 군사력 확대와 전쟁으로 채색한다. 그 전환점이 청일전쟁이다."(79)


1894년 조선에서 갑오농민전쟁이 벌어지자 중의원의 내각 탄핵 상주안에 시달리던 이토 내각은 '이익선'에서 벌어진 외부 사태를 구실로 중의원 해산과 조선 파병을 결의하였다. 이토의 상주를 받은 천황은 "오야마 이와오 육상 등에게 '조선에 거류 중인 우리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병대를 파견하고자 한다'는 칙어를 내렸다."(85) 그러나 6월 11일 전주화약이 성립되어 농민군이 조기에 해산하자, 무쓰 외상은  "만약 무슨 일도 하지 않은 채 또는 아무 곳으로도 가지 못한 채 끝내 그곳에서 허무하게 귀국하게 된다면, 몹시 체면이 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책이 달성되지 못한 것이라면서, 한성에 진출한 군대가 '무슨 일'인가를 해줄 것을 강하게 요구하였다."(91)


이와 함께, 6월 15일 각의는 "1) 조선의 내정을 청일이 공동으로 개량하기 위해 양국에서 상설위원을 파견하여 지도한다. 2) 청국이 거부한다면 일본이 단독으로 개혁을 지원한다"는 내부 방침을 세우고 조선 문제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한다. "공사관 및 거류민의 보호라는 당초의 파병 목적을 변경하여, 청일 간의 교섭에 새로운 과제를 끼워 넣는 작전으로 전환한 것이다."(92) 오토와 스기무라는 조선정부로부터 "조선은 자주국이며, 청군은 조선의 요청으로 온 원병이므로 퇴거를 요구할 수 없다"는 회답이 올 경우에 자주국 조선에 청군이 간섭하는 것은 부당한 행위라는 구실로 개전한다는 계획을 세워두었다.(93)


※ 청일 전쟁의 전개 양상

한성전신국 절단 및 경복궁 공격(1894.7.23) - 풍도 앞바다 해전에서 청나라 함대 격파(7.25) - 청일 양국 선전포고(8.1) - 평양함락(9.16) - 일본의 황해 해전 완승(9.17) - 압록강 너머로 진출(10.25) - 여순 공략 개시(11.21) - 산동성 공략 및 위해위 요새 점령(1895.2.2) - 북양해군 항복(2.12) - 시모노세키 조약 조인(4.17) [조약 내용 : 조선 독립 승인 / 요동반도와 대만 할양 / 은 2억량 배상]


일본의 침략 야욕을 목도한 동학 농민군은 '녹두장군' 전봉준을 맹주로 삼아 10월 9일 2차 무장 봉기를 일으킨다. 일본은 1894년 11월부터 다음 해 4월 초순까지 동학 농민군을 본격적으로 탄압했다. "탄압 부대의 주력은 11월 초순에 도착한 후비 보병 독립 제19대대 등 2,700명의 일본군이었으며, 여기에 2,800명의 조선 정부군과 각지의 양반 사족 및 토호 등이 조직한 반동적인 민보군이 가담하였다." 촌 구석구석까지 몰아붙이는 섬멸 작전에 맞서, "5개월 동안 농민군이 치른 전투는 46차례이고, 농민군 참가 인원은 연 13만 4,750명으로 추정된다. 또 하나의 청일전쟁이었다."(103)


"청일전쟁은 청의 군사력이 약체라는 사실을 세계에 폭로하는 계기가 되었고, 동시에 열강에 대항할 수 있는 군사력이 아시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결국, "19세기 말 이후에 찾아온 아시아의 위기는 청일전쟁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122) 구미 열강이 사태 수습에 개입하자, 일본 정부와 군부는 청일전쟁 후의 정세를 감안하여, 남진론의 거점인 대만을 열강에게 넘겨주어선 안 된다는 합의를 도출한다. 이에 따라 일본은 말레이반도와 남양제도 진출의 근거지인 "대만을 사전 점령하고 청국의 할양을 요구"하는 화평조약을 모색한다. "마쓰카타는 이 의견서를 '천하 유식자의 공론'이라 하였고, 이토 히로부미도 '동감·동정'의 뜻을 전하였다."(132-3)


일본은 "7만 6천 명의 병력(군인 4만 9,835명, 일본인 군부 2만 6,216명)을 투입하여, 일본군 사상자 5,320명(전사자 164명, 전병사자 4,642명, 부상자 514명)을 내고, 중국인 병사와 주민 1만 4천 명을 살해한 끝에 대만을 획득하였다."(138) 진정으로 대만을 일본의 일부로 만들고자 했던 이사와 슈지(대만총독부 초대 학무부장)는 대만인들의 '정신을 정복'하는 일에 주력했다. 이사와의 구상은 본국에 재수입되어, 이념으로서의 '국어' 개념을 만들어낸다. 우에다 가즈토시는 "일본 전국에서 통하는 언어를 만들어 내는 일"을 당면 과제로 삼는 동시에 "조선인, 미국인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알아야 할 '동양 전체의 보통어'를 목표로 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156)


"청일전쟁 후 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은 무역과 금융 면에서 서구와 미국에 대해 러시아와 일본이라는 거대한 구매자를 제공했다는 의미도 갖는다. 이에 따라 구미는 1873년 이래의 대大불황에서 간신히 벗어났고 독일(1893년~), 영국(1895년~), 미국(1897년~)은 차례로 호황을 맞이하였다. 또 일본이 영국에 대량 주문한 군함과 대포는 영국에서의 동형함 제조 비용을 낮추었고, 실험 연구비도 일본에 전가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청일전쟁 배상금의 46%에 해당하는 1,753만 파운드가 런던에서 해외 지불 기금으로 이용되었으며, 그 대부분은 해외 군비 확장비로 쓰였다. 청일전쟁의 열매를 가장 잘 맛본 것은 대영제국이었다."(165-6)


청일전쟁 배상금에 시달리던 청국은 "1895년 7월 프랑스와 러시아의 공동 차관을 받아들였다(36년간 변제). 이어서 다음 해에는 영국과 독일도 1,600만 파운드의 공동 차관을 제공했다(36년간 변제). 재정 파탄에 이르게 된 청국은 일본에 갚아야 할 2억량의 배상금 때문에 여러 열강의 금융에 의존하는 구조로 변해 갔다."(244) 한편, 러시아 정부는 의화단 세력과의 충돌을 구실로 삼아, "1900년 7월 만주 파병을 개시하고 10월에는 전 만주를 점령하였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러시아와 "한국 문제만을 교섭해 온 방침을 버리고, 만주 문제와 한국 문제를 한 세트로 만들어(滿韓不可分) 서로가 만주와 한국을 완전히 확보한다는(滿韓交換) 새로운 방침"을 수립한다.(253)


1904년 러일전쟁이 시작되고, 만주의 요양, 사하, 봉천 등지에서 벌어진 육상전투는 일본의 우세로 끝났지만 대규모 병력 손실이 불가피했다. 봉천회전에서 퇴각하는 러시아군을 추격할 여력이 없던 일본 정부는 지구전이 될 "러일전쟁을 앞으로도 수행하기 위한 근거지 및 병참지로서 한국을 이용하기 위하여, 내정까지도 장악하는 보호국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277) 마침내 1905년 5월 동해 해전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맺어 러시아로부터 사할린을 할양 받고, 조선에 매진한다. 3차에 걸친 한일협약을 통해 조선의 내정,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1909.10)을 계기로 병합을 가속화하고 마침내 한국병합조약(1910.8.22)을 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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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권과 헌법 일본 근현대사 2
마키하라 노리오 지음, 박지영 옮김 / 어문학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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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1880년대에 민선의원 설립과 입헌정체를 주장한 자유민권운동에서 '민권'이란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말한다. 따라서, 자유민권운동은 "정부에게 '국민의 권리'를 요구하는 한편, 민중의 '객분客分' 의식을 불식시켜 '국민으로서의 자각'을 환기"시키고자 했다.(45) 후쿠자와 유키치가 "평등을 역설하고 학문을 장려"한 것도,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지닌 '국민'으로서의 자각"을 일깨우기 위해서였다.(41) 당시는 메이지 정부와 민권파, 그리고 민중의 3극 대립 상황이었는데, "민권파와 정부는 대립하면서도 '근대국가의 건설' '민중의 국민화'라는 큰 틀을 공유했고, 민중과 민권파는 지향하는 방향은 달랐지만 '반정부'라는 점에서 뜻"을 같이 했다.(50-1)


메이지 정부 내에서는 '천황의 친정 여부, 재정 및 헌법 문제'가 핵심 사안이었다. 이와쿠라는 천황 즉위시 원로원에서 "국헌을 준수한다는 서약을 하도록" (2장 6조) 규정한 1876년 헌법 초안이 헌법을 천황보다 상위에 둔다고 지적하고, 각 참의들에게 '우리 국체(國體)'에 걸맞는 의견을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영국식 입헌정치를 도입하려던 오쿠마 시게노부가 이토 히로부미를 위시한 세력에게 밀려 천황에게 파면당하는 '메이지 14년 정변'이 일어나고, 곧이어 마쓰카타 마사요시의 디플레이션 정책으로 농촌이 심각한 불경기에 빠지자, 정당 운동은 급속도로 쇠퇴한다. 현의회도 지역의 이해관계에만 집착하면서 "국회 개설 후 정치가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예비한다.(82-3)


천황 친정親政이 "천황 개인의 의사나 자질로 인해 정치가 좌우되고, 나아가 천황이 정치 책임을 지게 되는 빌미"가 된다고 생각하던 이토는 1885년 12월, "신분제와 태정관제를 폐지하고, 내각 총리대신과 9명의 국무대신으로 구성된 내각제를 발족시켰다."(200) 아울러 전국에 걸쳐 천황 순행을 실시하고, 궁중의례 등 천황과 관련된 전통을 만들어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세신궁은 "천황의 조상신 아마테라스 오미가미를 모시는 성지로 탈바꿈"(220)했고, 야스쿠니 신사도 재정비되었다. 이처럼 천황제는 "서양 문명과 입헌제, 의회제에 대항하기 위해 서구의 기준에 따르면서도 독자성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필요성에 의해 창출된 '새로운 전통'이었다."(223)


세이난 전쟁 이후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이 번갈아 나타나면서, "민중이 몸으로 느끼는 경제관념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이제 사람들은 "상업의 자유나 계약이 민중의 생활보다도 우선한다는 것, 윗사람의 도움이나 타인의 호의를 바라지 말고 자기와 가족의 힘만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곤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가 왔음을 실감하였다."(107) 1880년대 후반에는 "집단 내에서 명령받지 않더라도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규율을 지키며 노동하는 사람만이 근면한 사람이라는 문명국 표준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가혹한 노동 조건 속에서도 생활 수준 향상을 위해 열심히 노동해야 하는 '근대'의 막이 본격적으로 열린 것이다.(119)


※ 세이난 전쟁 : 정한론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가 1873년 조선사절단 파견을 둘러싼 집권세력 다툼에서 이와쿠라 도모미 등에게 밀려난 뒤, 사족 세력을 모아 1877년 반정부 투쟁에 나섰으나, 정부군에게 진압된 사건. 이후 반정부 운동이 자유민권운동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문명국을 동경하고 '탈아脫亞'의 길을 지향하던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서구 문명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지역은 미개하고 야만스러우며, 대등한 상대로 인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대두되었다. 오히려 "야만스럽고 미개한 사람들을 '문명'화시키는 것이 서구인의 역사적 사명이고, 식민지화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라는 논리"를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따라서 '영토, 권력, 국민'이라는 근대국가의 구성 요건을 갖추지 못한 지역은 만국공법에 따라 '무주지無主地'로 간주하며, "최초로 점유한 자가 소유권을 가진다는 '선점先占'의 논리가 국가 차원에서도 적용되어 식민지 지배가 정당화되었다."(124)


1875년 체결된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가라후토·지시마 교환조약)은 가라후토(사할린)를 러시아령으로, 지시마 열도(쿠릴 열도)를 일본령으로 정했다. 이 조약은 러·일 양국의 국민은 계속 거주할 수 있지만, '원주민은 현재 살고 있는 땅에 거주할 권리, 또 그대로 현재의 영주의 신민이 될 권리가 없다.'(조약 부록 제4조)고 규정하여, 3년 이내에 국적을 선택하고 이주할 것을 강요했다."(126)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한 조일수호조규(1876.2) 1조 역시 "중국의 조공 체계로부터 조선을 분리시키려는 의도"를 표명한 것에 불과하다.(143)


근대적 소유권은 "독립적인 개인에 대한 간섭을 배제하는 자유권이나 참정권의 기초가 되었으며, 동시에 토지와 주민을 국경선으로 에워싸고 배타적인 국가 주권을 근거로 내정 간섭을 거부하는 독립 국가의 논리"로 발전했다. 소유와 자유가 동일시되는 논리 하에서 자유민권운동은 "민권과 국권을 불가분의 관계라고 주장하는 국민주의 운동"으로 변모되었고, "문명화와 국민화를 강요"당한 대다수의 본토 민중들은 내국 식민지인의 처지로 전락했다. '욕망'의 시대인 근대는 이 과정이 "누군가로부터 강요당한 것이 아닌 자발적인 의지, 자주적인 선택"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강조하면서, 제도 수립과 정신 개조를 통해 국민들의 '욕망'을 끊임없이 환기시켰다.(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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