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 지배 사회 - 정치·경제·문화를 움직이는 이기적 유전자, 그에 반항하는 인간
최정균 지음 / 동아시아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들어가며


"순수한 의미에서의 이타적 동기의 발로에는 의식이 관여하므로 이는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지는 이기적 동기와 달리 우리의 뇌리에 남는다. 그리고 마음 이론을 통해 우리는 타인들의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위에 대해 분명히 이타적인 동기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일단 좋게 보이는 행동에 대해 순수한 동기가 있을 것이라고 믿어주는 것인데, 이는 그만큼 본인의 마음속에 있는 이타성에 대한 믿음이 굳건하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이 낭만주의적 환상 정도로 끝난다면 다행이다. 매우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 자연적, 생물학적 개체로서 우리 인간이 지닌 본연의 이기성에 대한 냉철한 성찰을 방해한다는 점이다. 이기적 유전자만으로 인간의 문화와 그 안에서 인간이 체득하고 드러내는 이타적인 모습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고, 모든 것이 유전자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기적인 유전자로 인해 발생하는 이기적인 행위까지 부정하거나 간과할 수는 없다."(14-5)


1장 가정: 사랑이라는 자기 기만


"1859년,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주어진 환경에 적합한 개체가 살아남는다는 자연선택 이론을 제시했다. 그러나 유전학에 대한 지식이 없던 당시에는 그 이론만으로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행위를 정확히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1964년에 발표된 윌리엄 해밀턴의 포괄 적합도inclusive fitness 이론은 이 문제를 유전학과 수학으로 풀어낸 것이었다. '포괄 적합도'란 개체 자신의 적합도뿐 아니라 그 개체가 유전자를 공유하는 혈연들의 적합도를 그 유전학적 근친도만큼의 비율로 포함해 합한 것을 말한다. 즉, 자기 자신을 1이라고 할 때 자식이나 형제들의 경우 각각 2분의 1로 계산한 적합도의 총합이 포괄 적합도이며, 모든 개체는 이렇게 계산되는 양을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행동한다는 것이 이 이론의 요지다. 전설적인 진화생물학자 존 홀데인이 〈형제 1명을 위해서는 죽을 수 없지만 2명 이상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고, 사촌이면 8명 이상이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을 이를 수학적으로 이론화한 것이다."(26-7)


"그런데 해밀턴의 이론을 조금 더 주의해 살펴보면, 엄밀하게는 부모와 자식 간에도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인간의 유성생식은 유전학적으로 다른 남녀가 만나 이루어지므로, 부모와 자식 간의 근친도는 0.5에 불과하다." "이러한 부모-자식 갈등은 자식이 태어나기 전부터 표출된다. 임신 중의 태아는 산모로부터 최대한의 영양분을 받으려고 한다. 태아도 당연히 포도당을 필요로 하는데, 이때 태아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포도당을 빼앗아 오기 위해 어머니의 인슐리 작용을 방해하는 물질을 분비한다. 흥미롭게도, 인슐린과 닮은 형태의 'IGF2'라고 불리는 이 단백질은 '유전체 각인'이라는 기작에 의해 오직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염색체에서만 만들어진다." "산모는 이에 대항해 인슐린을 더 많이 분비해 자신의 세포들로 포도당을 유입시키려고 하고, 태아는 IGF2와 같은 물질을 더 분비해 어머니의 인슐린을 방해하려는 줄다리기가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 바로 임신성 당뇨다."(29-30)


"우리 몸을 구성하는 체세포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온 유전자를 한 쌍씩 가지고 있지만, 정자나 난자와 같은 생식세포를 만들 때는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수정이 이루어졌을 때 한 쌍이라는 정상적인 개수를 유지할 수 있다. 바로 이 과정에서 유전자 재조합이 일어난다." "이것이 엄청난 진화적 이점인 이유는 이를 통해 여러 상황 속에서 하나의 후손이라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MHC는 우리 몸에 침투한 병원균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항원들과 결합해 그것들을 면역세포들에게 제시함으로써, 면역반응을 유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사람은 저마다 다른 MHC 변이를 가지고 있다. 그 변이의 형태에 따라 보다 잘 결합할 수 있는 항원의 종류, 즉 더 잘 대응할 수 있는 병원균의 종류가 다른 것이다.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는 MHC라는 유전자의 변이에 따라 짝짓기 상대나 배우자를 선택한다는 것이 쉽게 믿기지 않겠지만, 이는 MHC가 페로몬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35-7)


# MHC : major histocompatibility complex


"한편 《네이처 유전학》에 발표된 실험에서 한 가지 놀라운 점이 발견되었는데, 상대의 MHC로부터 근친도를 판별할 때 자신이 가진 MHC 가운데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변이를 기준으로 알아낸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경우에는 자신과 살고 있는 어머니가 일반적으로 자신을 실제로 낳아준 생물학적 어머니일 테니, 어머니의 그 익숙한 체취가 감지되면 상대가 근친임을 알아낼 수 있다. 그러나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의 경우에는 함께 살고 있는 아버지가 자신의 유전학적 아버지일 가능성이 적다. 유전학적으로 더 우수한 수컷의 아기를 낳아 양육에 더 헌신적인 수컷으로 하여금 키우도록 하는 것은 사람을 비롯한 많은 동물 암컷들이 가지고 있는 번식 전략 가운데 하나다. 따라서 아버지의 경우에는 함께 살고 있는 아버지의 체취에 대한 후각적 기준 대신 유전학적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MHC 유전자를 기준으로 상대가 근친관계인지를 판별하는 것이다. 아주 냉정하고 교묘한 진화적 계산이다."(38)


"유전자는 감정을 요동치게 하는 신경전달물질이나 페로몬과 같은 화학물질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짝짓기를 하도록 충동할 뿐 아니라, 심지어 유전적 조성에 따라 상대를 선별적으로 선택하게끔 유도한다. 다시 말해, 진화적 관점에서 결혼이란 자기 유전자의 50퍼센트를 후손에게 남기고 최대한 잘 살아남게 하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상대와 맺는, 욕망에 이끌린 거래다. 자연선택의 관심 대상은 유전자의 성공적인 번식이지 개체의 행복한 삶은 아니다." "인간과 동물의 짝짓기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비극은 유전자적 관점에서 한쪽에게 이익이 되는 전략이 다른 한쪽의 이익과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자식이 생존하는 데 부모 중 어느 한쪽의 기여가 필수적이라면, 아비와 어미 중 누가 먼저 양육의 책임을 저버리고 더 많은 자손을 만들고자 다른 상대를 찾아 나설지를 두고 갈등이 시작되는 것이다. 인간을 비롯한 많은 종의 경우에는 수컷이 아예 떠나버리거나 최소한의 투자로 여러 살림을 꾸린다."(40-1)


"그러나 출산과 양육의 '책임'을 떠안은 만큼 암컷은 '권리'라는 무기로 대항할 수 있다. 자연 세계에서 암컷에게 주어진 권리는 바로 짝짓기 선택권이다. 수컷은 때때로 생존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경쟁적으로 암컷에게 절박한 구애를 한다. 이때 어느 수컷을 선택할 것인지는 암컷의 몫이다. 번식에 대한 권한을 가진 암컷이 수동적인 경우는 거의 없고, 암컷의 선호도가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사실상 번식 활동은 암컷에 의해 좌우된다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암컷은 유전학적으로 더 우수한 수컷의 아기를 낳아 양육에 보다 헌신적인 수컷을 속이고 그 수컷이 키우도록 하는 전략을 취하기도 한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어머니에 비해 아버지에게는 함께 살고 있는 자식들이 자신의 친자식이라는 보장이 없다." "이에 따른 진화적인 본능은 현대인들에게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평균적으로 친조부모에 비해 외조부모가 손주들에게 더 많은 돈을 쓰는데, 특히 외할머니가 그러했다."(41-3)


"어쨌거나 유성생식은 다수의 다양한 자손을 낳아 번식 가능성을 높이기에 적합한 짝짓기 방식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아이들의 생존 가능성이 극적으로 높아지고 극소수의 아이만 낳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유성생식은 득보다는 실이 많은, 여러 종류의 갈등과 불행을 초래하는 나쁜 번식 방법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포괄 적합도를 최대화하고자 하는 부모들의 양육 본능은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했던 원시시대와 똑같은 상태로 남아 있다. 이것은 현대사회에서 많은 부모들이 다른 집 아이들보다 뒤처지지 않도록 한두 명의 자녀에게 무제한적인 투자를 하도록 만든다. 결국 부모의 양육 본능이란 유전자가 자신의 번식 성공을 위해 부모라는 아바타를 조종하는 강력한 동력인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문명화된 인간 집단에서 성행하는 유전자들은 부모의 사랑이라는 얼굴을 한 채로 자녀들에게 교육이라는 군비경쟁의 채찍질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45)


2장 사회: 혐오로 가장된 두려움


"생존에 가장 필수적인 능력 중 하나는 위험을 재빨리 알아채고 그에 대처하는 것이다. 이때는 복잡하고 정교한 이성적 판단이 아닌 단순한 감정적 대응이 훨씬 유리하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여기서 생겨난 정서적 기제가 혐오라고 본다." "문제는 다른 인간을 대상으로 안전 최우선의 전략으로서 혐오 기제가 사용될 때 그 상대에게 전가되는 비용이 때로는 너무나 크다는 데 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가 근거 없이 과잉 발휘되는 과정에서 선량한 상대의 인격 내지는 생명까지도 무차별적으로 해칠 수 있는 것이다. 혐오는 광범위한 감정으로서 오염이나 불결함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고, 물건이나 동물,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두 동일하게 취급한다. 즉, 사람을 향한 혐오와 물체나 동물에 대한 혐오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반응이 일어날 때 사람 간의 상호작용에 관여하는 뇌 영역은 마치 우리가 물건을 대하고 있다는 듯이 비활성화 상태로 남아 있다."(57, 60-1)


"혐오는 특정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불특정 다수로 이루어진 집단이나 부류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확장되는데, 이는 모든 것을 분류해서 받아들이려는 사고 체계 때문이다."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차별적 태도를 정량적으로 측정하기 위해 사용되는 방법으로는 '암묵적 연합검사'가 있다. 이 검사에서는 좋아하는 대상과 긍정적인 단어가 연합되고 싫어하는 대상과 부정적인 단어가 연합되는 정도가 자판을 누르는 반응속도에 의해 측정된다. 안종차별과 관련된 암묵적 연합검사 결과를 보면, 평소 인종차별적인 태도를 의식적으로 가지지 않던 참가자들조차 아프리카인과 부정적인 단어를 무의식적으로 결부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더구나 이 실험은 타 인종에 대한 노출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여러 인종에 대한 경험이 많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이런 편견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실험에 임하더라도 결과에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61-2)


"이렇게 인종에 대한 차별이 엄연히 인간의 의식 안에 존재하고 있음에도, 사회과학에서는 인종이라는 것이 생물학적 근거가 없는 사회적 개념일 뿐이라는 믿음이 마치 정설처럼 자리 잡고 있다. 그 시발점이자 이를 직접 뒷받침하는 거의 유일한 연구 결과가 1972년 리처드 르윈틴이 발표한 논문인데, 그 내용인즉슨 7개의 인종에 대해 17개의 유전자 변이를 분석한 결과 인종 내에서의 차이가 85퍼센트를 설명하며 인종 간의 차이는 15퍼센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박으로 지적된 바와 같이, 인종 간의 차이는 개개의 독립적인 변이를 통해서가 아니라 여러 변이가 이루는 연관 관계의 구조를 통해서 드러날 수 있다. 이 논리는 DNA 분석 기술의 발전에 따라 실제 관측 데이터로도 입증되었다." "세계적인 유전학자 데이비드 라이크의 말처럼, 비록 선한 의도라고 할지라도 인종 간의 생물학적 차이를 거부하는 것은 오히려 과학적 발견이 인종주의자들에 의해 이용될 근거만 제공해 줄 뿐이다."(62-3)


"이와 유사한 예가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에 대한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페미니스트이자 저명한 인류학자인 세라 블래퍼 허디는 『여성은 진화하지 않았다』에서 인류 역사에 모계사회가 지배적인 시기가 있었다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믿음이 인류학과 고고학의 증거들로 뒷받침되지 않는 환상일 뿐이라고 냉정하게 폭로한다. 여성 우월적인 모계사회는 현재까지도 발견되지 않았다. 현대사회에서도 생물학은 여전히 여성의 편이 아니다." "국제 학술지 《네이처 신경과학》에서 발표된 연구에서는, 임신 중에 사회적 인지를 담당하는 뇌 부위의 크기가 줄어드는데 이러한 뇌 구조의 변화가 출산 2년 뒤까지도 지속된다는 결과가 나타났다. 이는 뇌세포 연결망의 가지치기를 거치며 어머니의 뇌가 아이의 양육에만 특화되도록 바뀌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결국 생물학적 진화는 직업인으로서의 현대 여성들의 능력을 신체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인지 기능과 사회성의 측면에서 훼손시킴으로써 차등적 차이를 만들어 내고 있다."(63-4)


"편도체는 공포와 불안의 감정을 주관하는 뇌 기관이다. 인간의 뇌에 자리 잡은 편도체는 피와 전쟁으로 얼룩진 역사에서 생존 투쟁을 위해 중추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편도체가 만들어 내는 혐오라는 감정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물체를 모두 동일한 생물학적 과정으로 처리한다. 이러한 비인격적 혐오가 고정관념과 편견을 통해 사회적 낙인으로 확장되고, 특히 다른 인종이나 집단에 대한 공격성으로 발휘될 때, 독일 나치나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것과 같은 전쟁과 야만적인 학살이 발생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공격성에 대응해 살아남기 위해 편도체와 교감신경을 활성화해야 했으므로, 이것은 다시금 혐오를 강화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편도체에서 보낸 자극에 우리 몸의 모든 부위가 신경학적으로 서로 교감하며 함께 반응한다는 의미로 이름 지어진 교감신경이지만, 한 인간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생리학적인 교감이 다른 인간과의 정서적인 교감을 가로막는 역설적인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69)


3장 경제: 자본주의 세상의 번식 경쟁


"'신고전파' 경제학의 심각한 오류는 경제학적 경쟁이 아닌 생물학적 경쟁이라는 변수가 빠져 있다는 점이다. 한계효용 이론에서는 생산자 혹은 공급자 간에 이루어지는 완전경쟁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생물학적 개체들은 생산자가 아니라 소비자다. 이들의 기본적인 속성은 생산이 아니라 생존과 번식을 위한 자원의 소비에 있다. 간혹 식물을 생산자로 비유하기도 하지만, 식물은 스스로의 생존과 번식을 위한 것 외에는 어떠한 부가적인 가치도 만들어 내지 않으므로 경제학적 생산자로 볼 수 없다. 단지 동물에게 강제로 소비당하는 것뿐이다. 또한 한계효용 이론에서는 소비자가 주변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의사결정 단위로서 자신의 한계효용이 0에 이르면 소비를 멈추는 합리적이고도 독립적인 개인이라고 가정한다. 하지만 생물학적 소비자들은 결코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무한한 번식 욕구와 경쟁 심리를 지닌 비합리적인 사회적 개체들이다."(82-3)


"로버트 프랭크는 『경쟁의 종말The Darwin Economy』에서 〈지금부터 100년 뒤에 경제학자들에게 경제학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물어보면 대다수가 찰스 다윈이라고 대답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신고전학파의 자유시장 신봉자들은 오늘날의 경제학자들에게 경제학의 아버지로 꼽히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개념을 도용해 각 개인이 자신의 이득을 자유롭게 추구할 때 사회 전체에도 최선의 결과가 주어지는 균형 상태에 도달한다고 주장하지만, 다윈의 진화론적 체계에서는 생물학적 소비자들의 '한계limit가 없는 한계marginal 효용'으로 인해 종 전체가 다 함께 몰락하는 일도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학자 프레드 허쉬가 정의한 지위재positional goods, 즉 (주로 생존이라는 목적을 갖는 물질재material goods와는 달리) 그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얻게 되는, 혹은 그렇다고 믿어지는 사회적 지위가 더 중요한 재화가 바로 이 같은 값비싼 과시의 군비경쟁의 대상이라고 프랭크 교수는 지적한다."(90-1)


"생존이란 번식 시점까지 살아 있느냐 살아 있지 못하느냐, 즉 0과 1의 이분 체계인 반면, 번식은 많이 낳으면 낳을수록 좋은 다다익선 체계이며 주변의 경쟁자들에 비해 수치적으로 더 많이 낳는지가 중요한 비교우위 체계다." "이와 같이 번식을 위한 경쟁은 필연적으로 자원 획득 경쟁으로 이어진다. 생태학에서는 생물들 간에 자원을 놓고 벌어지는 경쟁을 크게 간섭 경쟁과 착취 경쟁으로 분류한다. 간섭 경쟁이란 다른 개체들이 자신의 영역에 침입하거나 서식지 내의 자원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며 자원을 '독점'하는 경우다. 많은 조류들이 자신의 둥지 주변을 물리적으로 방어해 다른 새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이것이 간섭 경쟁의 대표적인 예다. 반면 착취 경쟁은 이러한 직접적인 상호작용은 없지만 일부 개체들이 제한된 자원을 '선점'함으로써 다른 개체들이 자원을 이용할 기회를 간접적으로 빼앗을 때 일어난다. 기본적으로 자연의 자원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착취 경쟁은 자연 곳곳에서 일어난다."(84, 93)


"'값비싼 신호'란 생존에 불리한 조건에서도 살아남을 만큼 건강하다는 것을 광고하는 과시 행동을 가리킨다. 과거에는 없었으나 현대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작동하는 값비싼 신호 중 하나는 학력이다. 학력은 특히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많은 현대인들이 얻고자 하는 대표적인 지위재 중 하나다. 그래도 고등교육만큼은 사회에서 실질적인 가치의 생산에 기여하지 않을까?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예를 들어 '스위스 패러독스'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산업화된 스위스의 대학 진학률이 다른 잘사는 나라들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현상을 일컫는데, 이는 교육의 생산성 향상 효과가 얼마나 낮은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장하준 교수는 이것이 고등교육의 주된 목표가 생산성과 관련된 지식과 기술의 전수보다는 고용 시장에서 피교육자들의 순위를 매기는 데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즉 고등교육을 받고 높은 연봉을 받는 고급 인력들이 그만큼의 가치의 생산보다는 착취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101-2)


"생물학적 개체들이 만들어 내는 경제학의 세계는 신고전학파의 이론과는 상반되거나(한계효용의 비체감), 아예 설명되지 않는다(가치 착취 현상). 그럼에도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1870년대 이후로 주류 경제학의 기초가 된 것은 사실 그것이 수학을 도입하며 자연과학의 엄밀함을 흉내냄으로써 얻은 권위에 기인한다." "지금의 자본주의 세상을 보면, 경제 현상이 자연과학의 원리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은 틀림없는 듯하다. 문제는 생물학적 경제 주체들이 따르는 자연의 원리가 앨프리드 마셜의 수학이 아니라 윌리엄 해밀턴의 수학이라는 점이다. 마셜의 수학은 시장경제가 자연스럽게 우리를 균형으로 이끈다고 주장했으나, 해밀턴의 수학을  따르는 경제는 우리를 극단적인 불균형으로 이끈다. 배불러 터지는 극소수와 불만족스러운 대다수로 양분화된 지금이 세상이 도래한 것은, 자유시장 신봉자들이 주장하듯이 경제가 온갖 제도로 인해 자연적으로 돌아가지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나도 자연적으로 잘 돌아가서다."(112-3)


4장 정치: 자연스러운 보수, 부자연스러운 진보


"2011년 연구에서 자기공명영상MRI을 이용해 90명의 뇌 구조를 살펴본 결과, 진보적 성향이 강할수록 전측대상피질의 회색질 부피가 큰 반면 보수적 성향이 강할수록 편도체의 회색질 부피가 크다는 것을 발견했다. 2013년 연구에서는 위험이 동반된 의사결정 과제를 수행하는 82명의 뇌를 기능성 MRI로 검사한 결과 보수 성향의 참가자들이 편도체를 더 많이 사용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공포와 혐오는 기본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편도체는 이 두 반응을 모두 주관한다." "2018년 연구에서는 총 93명의 뇌 MRI 분석을 통해 편도체의 크기가 클수록,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현 상태status quo를 합리화하는, 즉 기성 체제가 정당하거나 바람직하다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사회운동이나 시위에도 잘 참여하지 않았다. 이러한 경향은 실험 참가자가 사회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는지 불리한 위치에 있는지와 상관없이 일관적으로 나타났다."(121-2)


"최근 뇌신경과학에서는 확장된 편도체가 주목을 받고 있다. '확장된 편도체'란 편도체의 중심핵에서 분계선조침대핵까지 이어진 여러 뇌 부위를 통틀어 일컫는데, 이 부위는 특히 정상적인 불안과 공포만이 아니라 병적인 반응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졌다." "사실 인류학자 헬렌 피셔는 그동안의 많은 연구 결과들을 종합하며 세로토닌이 보수적 성향의 기저에 있을 것으로 추측한 바 있다. 즉, 세로토닌 수치가 높은 사람들은 사회적 규범을 따르고 위험을 피하려는 경향이 강하며, 이론적이고 복잡한 것보다 구체적이고 분명한 것을 선호하며, 질서와 권위를 중시하고 종교적 성향이 강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여러 동물실험 결과, 세로토닌은 특히 사회적 위계질서와 높은 연관성을 보였다. 반대로 피셔는 진보 성향을 만들어 내는 신경전달물질로는 도파민을 지목했다. 도파민은 보상 회로를 주관하는 신경전달물질로서, 도파민의 분비가 높을 때 동물들은 새로운 것을 탐색하는 행동을 보인다."(124-5)


"교감신경은 생존에 위협이 되는 상황에서 작동하므로, 교감신경이 민감한 사람은 스트레스는 받을지언정 위험한 환경에서 잘 살아남을 수 있다." "세로토닌 활성이 실제로 번식에서 유리했다면 세로토닌을 강화하는 변이가 집단유전학 분석에서 양의 방향의 선택압을 보여야 한다. 실제로 신경전달물질 유전자들을 집단유전학으로 분석한 결과, 세로토닌 전달체인 5-HTT가 여러 연구에서 일관성 있게 양의 선택을 받은 대표적인 유전자 중 하나로 나타났다. 다시 말하면, 높은 세로토닌 활성이 진화적으로 유리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집단유전학으로 입증된 것이다." "한편 도파민 수용체에 있는 7R 변이는 인간의 진화 역사에서 최근에 발생했는데, 새로운 것을 탐색하는 성향의 장점과 위험성의 공존으로 인해 균형 선택을 받아온 것으로 보인다. 정치 성향과 유전자 변이 간의 상관관계를 조사해보니, 실제로 도파민 수용체의 7R 변이를 지닐 경우 진보적인 정치 성향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 밝혀졌다."(127-8)


# 균형 선택balancing selection : 어떤 유전자 변이가 유리한 상황에서는 점점 많아지다가 상황이 바뀌면 반대로 줄어들기도 하면서 특정한 빈도를 유지하는 양상을 가리킨다.


"문명과 문화가 생물학적 진화에 미치는 영향은 현대 유전학의 주요 관심사 가운데 하나인데, 이는 저개발 국가와 선진국 사이에서 잘 드러난다. 즉, 진화적 적합도를 측정하는 지표인 생애 번식 성공률이 저개발 국가들에서는 주로 전염병이나 영양 결핍으로 인한 어린아이들의 사망률에 의해 좌우되는 데 반해, 선진국에서는 자녀를 얼마나 낳는지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즉 전염병이나 영양 결핍에 취약해서 사라졌어야 할 다른 변이들과 마찬가지로 진보적인 성향의 변인들은 문명의 발달 덕분에 자연선택에 역행해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앞으로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문명이 더 진보하고 생존과 번식에 대한 진화적 압력에서 인간이 더 자유로워지면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렇게 이기적 유전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인간이 때로는 자연적인 본성의 윤리적 부당함에 대해 깨닫고, 그 깨달음은 사회에 전파하고, 그것을 사회 안에서 구현하기 위해 투쟁한다는 점이다."(143-4)


5장 의학: 아프고 늙고 죽어야만 하는 이유


"유전자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기적'이다. 첫째는 개체들 간의 문제로서, 유전자가 자신을 실어 나르는 개체로 하여금 다른 개체들을 따돌리고 생존과 번식에 성공하기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이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겪는 인간들의 경쟁과 갈등으로 인한 비극이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는 개체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로서, 유전자가 개체의 행복과 안녕과는 상관없이 오직 자신의 번식에만 유리하게끔 작동한다는 점이다. 질병과 노화 그리고 죽음, 즉 인간의 육체가 겪는 모든 생물학적 고통이 바로 여기에 기인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는 이 변이들이 목적 없이 우연히 발생한다는 점이다." "이기성은 유전자의 본래적 속성이 아니며, 다만 우연히 생겨난 이기적인 변이들만이 경쟁에서 살아남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진짜 문제는 '유전자는 왜 이기적인가'라기보다는 '서로 경쟁할 수밖에 없는 변이들이 왜 생겨났는가'라고 볼 수 있다."(149-50)


"이에 대한 답으로 《사이언스》와 《네이처》에 발표된 연구들을 참고할 수 있다. 이 연구들에 따르면, 자연 세계에는 일부 DNA 복구 유전자가 고장 난 탓에 많은 변이를 발생시키며 번식해 가는 개체군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생명에 적대적이며 요동치는 환경에 적응하는 데 특히 상당한 이점을 가진다. 이는 의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병원균들이 항생제와 같은 의약품에 대한 내성을 이러한 방식으로 발달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최초의 생명이 탄생한 35억 년 전부터 지금까지 모든 생명체는 가혹하고 불안정한 환경에서 살아왔다. 이러한 환경에서, 부족한 자원을 DNA 교정과 복구에 크게 투자하면서 자신과 유전학적으로 동일한 자손을 만들며 천천히 번식하는 개체군은 끝까지 대를 이어갈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 반대로, 에너지와 자원을 DNA 복제와 세포 분열, 즉 번식에 집중함으로써 유전학적으로 저마다 다른 다양한 자손을 빠른 속도로 만들어 낸 전략은 성공했을 것이다."(154-5)


"이와 같이 집단이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결국 자기 자신의 소멸과 다른 변이의 탄생을 맞바꾸는 유전자들의 '희생'이 필요하다. 이런 방식으로 다양한 변이들이 많이 생겨나야 혹독하고도 변동하는 환경에서 집단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유전자가 스스로 선택한 이타적인 결정이 아니라, 환경의 압력에 의해 강제된 유전자들의 희생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돌연변이는 유전자의 의도에 반해 무작위적으로 발생하고, 또한 다양성의 확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방치된 것이기 때문이다(이는 3장에서 언급한 집단선택설, 즉 집단을 위해 이타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변이들이 많은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유리하다는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다양성을 보존하는 것은 생태계 유지의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다양성 그 자체가 선하거나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생물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자연이 얼마나 생명체에게 적대적인 환경인지를 말해주는 방증이다."(155-6)


"영국 뉴캐슬대학교 톰 커크우드 교수가 《네이처》 논문에서 지적했듯이, 자연 세계에서는 추위, 굶주림, 감염, 포식자와 같은 환경적 위험 요소로 인해 기대 수명이 워낙 낮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수명을 유지하기 위한 불필요한 메커니즘은 진화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최근 《네이처 생태학과 진화》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나이가 들수록 정자 형성 과정에서 생기는 돌연변이를 복구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즉, 자연적인 기대 수명을 벗어나면 더 이상 DNA 복구 기능이 활발하게 사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렇게 나이에 따라 감소되는 DNA 복구 기능의 문제가 체세포에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노화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다. '일회용 체세포' 이론에 따르면, 제한된 자원과 에너지는 그나마 생식세포의 유지에 사용되고, 번식으로 이어지지 않는 그야말로 일회용일 뿐인 체소포들은 더더욱 관리를 받지 못한다." "체세포에 일어나는 돌연변이가 노화를 통해 죽음을 초래하는 가장 대표적인 경로가 바로 암이다."(162-3)


"면역학적 측면에서 일어나는 노화 역시 자연환경의 문제로 귀결된다. 노화에 관한 면역학적 이론에 따르면, 면역체계가 점차 자기 자신과 외래 물질을 구별하는 능력을 잃어감에 따라 개체 자신의 정상적인 세포들을 공격하고 파괴하는데, 이것이 노화의 원인 중 하나다. 즉 병원균과 싸우기 위해 활성화된 면역세포들이 피아 식별 능력을 잃고 그 부작용으로 자신의 숙주세포들을 공격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는 의학에서 이야기하는 자가면역질환의 발단이다." "면역계의 노화 문제는 또 있다. 우리 몸에는 흉선 혹은 가슴샘이라는 조직이 있는데,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면역세포의 하나인 T세포가 양성되는 곳이다." "어린 시절 활발하게 작동하던 가슴샘 조직은 나이가 들수록 크기가 줄어들고 기능도 위축된다. 따라서 가슴샘이 기능하지 않으면 추가적인 T 세포 양성 업이 사실상 그때까지 훈련된 T 세포들만을 가지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고령자들은 감염 질환에 훨씬 취약해진다."(167-9)


6장 종교: 인간은 태어나지 않는다


"사회진화론은 '자연주의적 오류'의 대표적 사례 중 하나다. '자연주의적 오류'라는 용어를 만든 조지 에드워드 무어는 자연적 속성과 윤리적 속성이 별개라는 차원에서 자연주의적 오류를 정의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보통 그가 정의한 것과는 약간 다른 의미, 즉 어떤 사실로부터 부당하게 당위를 이끌어 내는 것을 의미하기 위해 쓰인다. 데이비드 흄이 그런 오류를 비판한 적이 있는데, 그는 그렇다/존재한다is 또는 그렇지 않다/존재하지 않는다is not 등의 사실 명제로부터 그래야 한다/마땅하다ought 또는 그래서는 안 된다/마땅하지 않다ought not 등의 가치 명제를 도출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인종 문제를 다루는 방식도 한 가지 예가 된다. 리처드 르윈틴이 취한 방식, 즉 인종차별에 대한 대응으로써 아예 인종을 생물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개념으로 보고자 하는 것은 '자연에 인종은 존재하지 않으므로(사실 명제), 우리도 인종을 구분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가치 명제)'는 논리에 기대는 것이다."(208-9)


"진화론을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면서도 사실과 당위를 구별하고 자연주의적 오류를 극복해야 함을 명확하게 인지한 대표적인 이가 바로 토머스 헉슬리다. 그는 진화론에 반대하는 이들과의 격한 논쟁을 감수하면서까지 다윈의 이론을 널리 알리고 발전시키고자 하면서도, 자연에는 도덕적 목적이 없으며 도덕은 철저히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진보적이며 개방적인 사고를 지닌 헉슬리는 제도적으로 사회를 개선하고 올바른 윤리를 확립해야 함을 설파했고, 실제로도 정치 제도의 개선, 과학 교육의 발전 등을 위해 사회 여러 방면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그는 '자연이 그러하므로 우리도 그래야 한다'가 아니라, '자연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발 더 나아가 '자연이 그러하므로 오히려 우리는 그러지 않아야 한다'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자연은 우리의 모범이 아니라 반면교사다. 즉, 자연에는 인종 간의 차이와 그로 인한 차별이 존재하므로 오히려 우리는 인종에 따른 차별을 행하지 않아야 한다."(209)


"경제학적 공정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소위 '초대교회'라고 불리는, 초창기 기독교가 추구한 경제 공동체의 모습은 암시하는 바가 크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사도행전」 2:44-45)〉"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고린도전서」 12:21-23)〉 생물학적 개체들이 모인 집단이 마치 하나의 유기적인 몸, 즉 개체처럼 움직인다면 이들은 집단으로서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몸의 일부, 즉 몇몇 약한 개체가 손상되거나 실패하면 몸 전체, 즉 집단의 적합도는 약화되고, 반대로 취약한 개체들을 돌보면 집단의 적합도는 향상된다. 상당히 생물학적인 비유다."(224-5)


"바울의 이러한 공동체주의는 이방인 포교라는 목적 뿐만 아니라 인종, 신분, 성별의 차이를 포용하는 공동체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2장에서 인종, 신분, 성별 따위를 넘어서는 사랑의 정반대 개념, 즉 혐오의 진화적 기원이 생존을 위해 작동하는 두려움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고린도전서」 13장과 함께 사랑에 대한 대표적인 장이라고 할 수 있는 요한일서 4장에는 이와 관련한 상당히 심오한 묘사가 담겨 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4:18)〉 물론 그 맥락은 다르겠지만, 인간의 진화와 심리에 대한 생물학적 지식 없이 기록된 성서에서 사랑의 반대편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미움이나 증오가 아닌 두려움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성서는 특별히 사회적 낙인의 대상을 상징하는 과부, 고아, 나그네에 대한 보호와 배려를 이곳저곳에서 강조한다."(226-7)


"결국 성서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 성서는 자연을 신으로 섬기던 인간들을 불러내 예수를 모범으로 삼아 스스로 신이 되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의 자연적 본능은 여전히 종교적인 신을 만들어 내거나 추종하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사이비 교주를 따르고 숭배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어떤 이들은 이런 자들 가운데에서 〈나는 신이다〉라고 선언하며 그들을 지배한다. 이것이야말로 신성모독이다. 성서가 말하는 '신성'은 이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인간으로서 예수가 보여준 것과 같은 신성을 발휘하려면, 자연에서 신성을 벗겨낼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서 자연성을 벗겨내고 그것에 저항해야 한다. 번식욕과 혐오를 넘어서는 사랑, 차별과 배제가 아닌 포용과 연대, 착취와 탈취가 아닌 가치의 창조와 나눔을 추구해야 한다. 자연의 속박에 고통스러워하는 많은 이들을 해방시키고, 우리의 후손에게 더 공정하고 진보된 세상을 물려주며, 인류가 오래도록 생존하고 번성하도록 해야 한다."(238)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연의 창조주 따위는 없다. 그런데 성서에서 '종교적 도금'을 벗겨내고 나면, 우리는 그곳에서 진짜 주인공을 만나게 된다. 그렇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다. 인간이 바로 창조주다. 아담으로 대표되는 자연적 인간이 아니라, 예수의 형상을 본받아 따르려는 신적 인간이 그들이다. 인간이 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창세기」 1장의 선언은 예수의 형상을 본받는 이들을 통해 비로소 실현된다.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건 가상의 인물이건, 예수라는 한 인간을 통해 드러나는 정신을 따라 자연의 모든 것을 다스리며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는 창조의 사명을 부여받은 것이 인간이다. 그러므로 창조란 태초에 일어난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바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인류가 존재하는 한 끝없이 진행되어야 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는 진화라는 과정을 거치며 이 자연 속에 우연히 던져진 우리 인간이 이 무의미한 우주에서 의미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다."(238-9)


나가며


"이 책에서 우리는 그 무엇보다 인간을 여러 형태로 속박하고 있는 것이 다름아닌 자연이라는 것을 여러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내고 싸워야 할 자연이라는 적이 외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안에 있는, 유전자가 심어놓은 본성 역시 자연의 일부다. 어쩌면 과학의 힘으로 외부의 자연과 싸우는 것보다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이를 토대로 자기 자신과 벌이는 내적 갈등과 도덕적 투쟁이 훨씬 힘든 작업일 수 있다." "물론 각 개인의 계몽으로 충분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 개인의 실천을 기대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할 것이다. 다시 말해, 지역, 국가, 국제사회의 구성원들의 합의와 그에 기반한 법적,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고는 많은 경우 충분한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잘 확립된 법과 제도는 그 자체로 효과적인 계몽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물론 그것에 이르는 길은 평탄하지 않겠지만 그 투쟁은 궁극적으로 사회 전체의 인식을 통째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24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맹자의 땀 성왕의 피 - 중층근대와 동아시아 유교문명 대우학술총서 신간 - 문학/인문(논저) 603
김상준 지음 / 아카넷 / 201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머리에: 동아시아 유교문명과 인류 보편적 가치


"'맹자의 땀'은 장례 풍습이 생기기 이전에 들판에 방치된 부모의 처참한 시신을 목격한 고대인이 땀을 흘리며 괴로워했다는 『맹자』의 구절에서 가져온 것이다. '성왕의 피'란 요순우탕 등 유교 성왕(聖王)의 행적을 기록한 『서경』의 감추어진 이면에서 발견한 핏자국, 왕권을 둘러싼 폭력을 말한다. 유자들은 이 '성왕의 피'를 한사코 지우려 했다. 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군주를 창조하려 했던 것이다. 결국 '맹자의 땀'은 유교의 윤리적 기원을, '성왕의 피'는 유교 비판성의 기원을 풀어주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한편에는 폭력의 독점자인 군주의 성스러움이, 다른 한편에는 폭력에서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완벽하게 도덕적인 이상적 군주의 성스러움이 날카롭게 대립한다. 이 책은 유교 교리의 핵심인 성왕(聖王)론의 논리 내부에서 그 대립을 추출해낸다. 여기에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유교 종법(宗法)론의 내밀한 본질이 드러나고, 2000년 유교정치를 특징짓는 모럴폴리틱의 내적 작동 원리가 밝혀진다."(23-4)


제1부 중층근대와 유교


1장 중층근대성: 근대성 이론의 혁신


"기왕의 근대성 개념은 막스 베버에 의해 가장 압축적으로 제시되었다: 계산 가능하게 조직된 자유노동에 기초한 합리적 자본주의, 이를 가능하게 한 제도적 중추로서의 합리적 법과 행정체계(관료주의), 그리고 이와 선후를 이루면서 진행되는 과학, 문화, 예술, 종교, 경제, 정치 영역의 합리화(rationalization)와 분화(differentiation). 이는 그의 『종교사회학논총』의 유명한 「저자서문」에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한마디로 집약하면 전 사회의 합리화고, 그 기본축은 ①합리적 자본주의, ②합리적 법-행정 체계(법치국가), 그리고 ③합리적 사회분화다. 베버는 이 셋이 완전한 수준에서 일체가 되어 나타난 곳은 〈서구, 오직 서구에서만〉이라고 했다(상동 : 13). 그래서 베버의 근대성론은 서구근대성론이다. 보편사적 의미를 갖는 근대성은 오직 하나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서구에서 발전한 근대성이다. 하지만 베버의 정의는 역사적, 지리적으로 국지적일 뿐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근대성의 전면(全面)을 포괄하지 못한다."(52)


"재정립된 근대성 개념은 중층근대성론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그것은 고전적 근대성 개념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할 것인데, 그러자면 ①'합리화'만으로 국한될 수 없는 근대성의 다원적 에토스와 ②서구만이 아닌 비서구 근대의 역사적 경로의 다양성을 포괄해주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개념은 베버의 근대성 규정이 빠뜨린 사항들을 하나씩 추가해가는 방식으로는 결코 획득될 수 없다. 다양의 추가는 무한할 것이고, 무한정 늘어난 항목들은 개념화 자체를 불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무의미하게 만든다. 보편을 지향하는 개념화는, 반대의 방향, 즉 서구/비서구 근대의 다양한 경로를 포괄적으로 검토한 후, 그 다양의 공통 근거를 한 단계 높은 추상을 통해 포착하는 방향으로 나간다. 베버의 근대관은 그 속에서 하나의 하위 범주가 될 것이다." "그러한 대안적 정의로서의 근대성이란 〈성속聖俗의 통섭 전도顚倒, 즉 성이 속을 통섭했던 세계에서 속이 성을 통섭하는 세계로의 이행〉을 말한다."(55-6)


"'성속 통섭 전도'는 종교사회학에서 말하는 세속화 테제(secularization thesis)의 합리적 핵심을 보존하지만, 기존의 세속화 주류 테제와의 차이점은 성(聖) 차원의 존속을 명확히 한다는 점이다. 성속은 불가분의 상관관계에 있고 이 점은 우리가 인간인 이상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다만 그 통섭 질서가 변화했을 뿐이다. 속이 성을 통섭한다는 것의 철학적 핵심은 이성을 그 한계 속에서 고찰한다는 칸트의 언명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한계 속에서 고찰한다는 칸트의 언명은 한계 너머를 버린다는 소극적 의미가 아니라, 한계의 고찰 속에서 이성의 역능이 고양된다는 적극적인 의미였다. 푸코는 칸트의 이러한 언명을 〈현재를 문제화하는 시각〉이라고 요약했다. 이는 현재의 질서, 또는 이미 알려진 것[旣知] 너머로 부단히 확장되는 비판성, 성찰성의 심화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미지성(未知性)의 접면(接面)에서 발생하는 스파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적, 윤리적 고양의 근원이 되고 있다(김상준, 2009)."(57-8)


"우리가 보기에 초기근대의 최초의 표출 양상은 서유럽이 아니라 중국 송원 연간의 사회경제적, 정치문화적 전개 양상에서 풍부하게 발견된다. 그 특징은 절대주의적 통치권의 확립과 비판적 권위를 확보한 학인-관료 집단의 형성,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농촌 수공업의 성장, 수력 양수기, 수력 풀무, 대형 방저기 등의 기계 발명과 코크스 제련 등 철강 부문에서의 혁신 등에서 보이는 다양한 기술혁명과 초기 공업화, 도시, 교통, 화폐 및 금융, 상업 및 무역 영역의 인프라 발전이다. 그 기반은 송대에 이루어졌고 몽골제국은 그 성취를 흡수하여 당시로는 가공할 만한 수준의 전쟁, 행정, 건설, 교역 역량을 갖춘 세계체제를 구축했다." "송원 연간에 관찰되는 초기근대의 증좌들을 성속 통섭 전도라는 틀로 볼 수 있는 가장 매크로한 근거는 이 시기가 한-당으로 이어졌던 중국 고대 제국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었던 시기였다는 점이다. 근대주권의 초기 형태 역시 동아시아에서 선행하고 있었던 것이다."(45, 63-4)


"정주학(또는 주자학)의 이기론(理氣論)은 이러한 정황 속에서 출현했다. 이-기의 명확한 준별이 새롭다. 한당 시기까지 중국적 사유에서 이 양자는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다. 세계는 천(天, 유교), 진(眞, 불교), 도(道, 도교)의 신성함 속에 잠겨 있었다. 즉 성이 속을 통섭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정주학에서 세계는 기로 이루어지고 기에서 이(理)가 분리된다. 정주학에서 이는 내면화된 윤리 개념이다. 이제 이는 기의 바다 속에서 힘써 탐구하여 찾아야만 하는 대상이 되었다. 이제 자연과 사회질서가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것으로 표상되지 않고 그 속에서 작동되어야 할[所當然] 이의 원리가 발견되고 구성되어야 한다." "윤리학자로서 주희는 이가 현세의 사물과 현상에 '당위'로서 관철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현세의 질서는 늘 이로부터 이탈하고 폭주할 수 있다고 보았다. 정주학에서 이의 궁극적 담지자는 현세의 힘을 대표하는 군주의 황통(皇統)이 아닌 윤리적 지향을 대표하는 학자의 도통(道統)에 있었다."(66)


2장 맹자의 땀: 인류 진화와 도덕적 몸의 탄생


"〈먼 옛적[上世] 어버이[親]를 장례 지내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그 어버이가 죽자 바로 들어 골짜기에 버렸다. 다른 날 그곳을 지나다 보니 여우와 이리가 뜯어먹고 파리와 모기가 빨아먹고 있었다. 이마에 진땀이 나고 흘겨는 보나 차마 바로 보지는 못했다. 땀이 난 것은 다른 사람[의 눈] 때문이 아니었다. 마음의 중심이 얼굴과 눈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돌아와 흙과 풀로 덮었다.(『맹자』 「등문공 上」)〉" "(이야기의 주인공은) 갑자기 내면에 발생한 이상한 그 감정 앞에 스스로 아주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죽은 어미?' '죽은 아비?' '어디에?' 이런 새로운 질문들이 아직은 초보적인 언어 형태로 혼란스러운 머릿속에 불현듯 떠올랐을 것이다. 분명히 죽고 없는 부모가 '여기 이곳'에 느껴진다. 기억의 단순한 기계적 잔영이 아니다. 땀과 충격, 모종의 희미한 죄의식을 유발하는 특이한 무엇이 그(녀)를 흔들었다. 〈감관적·물리적 세계 밖의 또 다른 차원이 인간의 의식 안에 불쑥 출현한 것〉이다."(96-7)


"여기서 중요한 점은 '몸의 변화'가 아니라 보편윤리, 세계종교라는 '특이한 사유 구조의 출현'이다. 물론 '맹자의 땀'도 '특이한 사유 구조의 출현'을 동반했다. 이 원형적 성(聖)의 영역이 비상하게 고양되어 고도화된 것, 그리하여 전적으로 새로운 사고 유형이 마치 기적처럼 출현했던 것이 야스퍼스가 말하는 기축시대다. 기축시대에 탄생한 보편윤리, 세계종교의 공통적 핵심은 무엇인가? 그 바탕에는 맹자의 땀에서 시작된 종교성의 원형이 있다. 그 종교성은 감관세계, 물질세계를 상대화시켰다. 그런데 이 단계까지는 내가 아직 그대로 있다. 다만 내가 바라보는 눈앞의 세계와는 또 다른 차원의 세계를 상정함으로써 눈앞의 세계를 상대화시킨다. 반면 보편윤리, 세계종교는 '나'라는 생각 자체, 즉 자아를 상대화시킨다. 자아를 단번에 인류 전체, 우주 전체라고 하는 고도로 추상적인 개념과 등치시킨다. 자아를 인류 전체, 우주 전체 안에 녹여 무화(無化)시켜버리지만, 바로 이를 통해 초월적 자아로 부활한다."(103)


"그러나 성(聖)의 탄생이 보편윤리, 세계종교를 출현시킨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聖)의 위기' 때문에 가능했다." "'성의 위기'란 두 측면을 갖는다. 하나는 위기적 상황, 다른 하나는 위기의식, 그 모두의 배경에는 고대 도시, 고대국가의 출현이 있다. 윤리종교의 창시자, 성인 개인 중심의 접근은 이러한 문화적 공통성에 대한 이해로 보완되어야 한다." "고대 과학, 고대 재정, 고대 행정, 고대 병참의 술과 학이 발전한다. 필자는 이러한 현상을 인류역사상 '최초의 세속화(the first secularization)라 불러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보편윤리, 세계종교가 탄생했다. 여기서 근대적 사유는 매우 가깝다. 우리는 여전히 그 시대의 윤리적, 종교적, 철학적 문헌을 읽고 현재성을 느낀다. 기축시대의 보편윤리와 세계 종교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근대다. 그래서 필자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세속화'가 발생했던 그 시대를 원형근대기(proto-modern era), 그리고 그 시대의 에토스를 원형근대성(proto-modernity)이라 부른다."(107-8)


"성과 속이 분리되었다 함은 양자가 서열적 질서에 따라 재배치되었음을 말한다. 이 최초의 재배치에서 우월한 위치에 선 것은 단연 성(聖)의 영역이었다. '성의 위기'에 임하여 인간의 초월적 각성을 비상하게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성의 영역을 극점까지 끌어올림으로써 속의 영역과의 차별성을 분명히 했다고 해도 좋다. 그리하여 고양된 성의 질서가 불완전한 속의 질서를 섭리적으로 통괄, 또는 통치하는 관계가 형성된다. 성이 속을 통섭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최초의 성속 통섭 관계 즉 '통섭Ⅰ'이고, 이 통섭 관계가 원형근대의 핵심적 특징이다." "그러나 아직 '통섭Ⅰ'의 단계는 신화 시대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다. 특히 대중종교, 민간신앙 속에서 그렇다." "물적 현상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합리적,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여러 물적 현상을 신성한 힘의 개입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그러나 물적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깊어질수록 성의 영역은 물적 세계로부터 퇴각한다."(112-4)


"'통섭Ⅱ'의 세계는 물질계, 속(俗)의 영역의 우월적 독립을 전제한다." "현상계의 즉물적 표면에 더 이상 성의 영역은 자리를 찾지 못한다. 스피노자의 신은 이 아포리아의 새로운 해결 방식이었다. 그는 자연 자체가 신이라 했지만, 즉물적 현상 자체를 신과 등치시켰던 것은 아니었다. 자연의 흐름 안에 깊이 숨은 궁극적 완전성, 즉 그가 이성이라 불렀던, 자연에 내재한 궁극적 섭리를 신과 등치시켰던 것이다." "주희의 현상계 역시 단연 기로 꽉 차 있는 세계다. 물적 세계의 압도성이 명확해질수록 이학(理學)은 물적 세계의 숨은 내면을 향해 더욱 깊어갈 수밖에 없다. 성의 영역이 물적 현상 내면 깊이 숨을수록 그 영역의 논리를 찾는 노력은 더욱 치열해지고, 그 결과 찾아진 성의 속성은 더욱 추상화되고 순수해진다. 역설적이지만 또한 필연적인 귀결이다. 그리하여 이제 성의 영역은 '공간 밖의 공간', '시간 밖의 시간'에 그 거처를 찾아야 했다. 파스칼의 말대로 신은 숨었다. 그 결과 성속의 통섭 관계는 역전된다."(114-5)


3장 성왕의 피: 폭력과 성스러움, 유교적 안티노미


"〈유교는 종교와 사상, 정치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이 세 원이 중첩되는 지점의 중심에 유교의 성스러운 왕, 그리고 성스러운 왕의 행위의 표상인 예(禮)가 존재한다.〉 모든 심원한 교의의 중심에 안티노미가 존재하듯, 유교 교의의 중심, 즉 성왕과 예의 이념에도 역설이 존재한다." "안티노미란 필연적으로 없어야 하는 곳에 반드시 있는, 동시에 마찬가지로 명백한 존재 속에서 절대적인 부재가 도출되어야만 하는 상황을 말한다. 이는 병렬이 아니라, 병렬의 절대적인 불가능성, 절대적인 모순이다. 폭력과 성스러움이 그것이다. 폭력과 성스러움이 안티노미로 맞서는 지점이 바로 슈월츠가 말하는 종교적·윤리적 초월이 발생하는 지점이다." "폭력과 성스러움은 이제 애매한 또는 심원한(?) 양가성에 의해 병립하거나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배제, 대립, 투쟁한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구체적인 역사적 진행 과정 속에서 살피려 한다. 그 역사적 시례는 유교의 예론과 성왕론의 출현, 즉 유교적 안티노미의 출현의 역사다."(124-6)


"유교적 안티노미의 정화(精華)는 유교 경전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요임금이다. 〈임금님은 경건하시고 총명하시고 우아하시어 늘 평안하시었다. 지극히 공손하고 겸손하시어 그 빛이 사방에 이르고 그 높은 격이 하늘과 땅에 미치시었다. 큰 덕을 높이 밝히시어 아홉 족속으로 하여 서로 친하고 화목하게 하시니 백성이 평안하고 밝게 되어 만방이 서로 돕고 화해롭게 되었으며 어리석은 백성들이 모두 따랐다. (『서경』 제1장 제1절, 「요전(堯典)」)〉" "이처럼 한 점 폭력의 티끌조차 존재하지 않는 현세의 군주에 대한 묘사는 참으로 전례를 찾기 어렵다. 유대 민족의 신인 야훼 자신은 전쟁 신이다. 그는 분노하는 신이고 이교도에 대한 몰살을 명령하는 신이다. 고대 이집트, 바빌로니아,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인도의 신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인간의 희로애락을 초인적인 스케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신적(神的)일 뿐이다. 유교적 안티노미의 핵심은 바로 이 지점에 모아지고 있다."(127-8)


"유교에서는 요순과 삼대(三代)를 구분한다. 요순은 최선의 시대요, 삼대는 차선의 시대다. 삼대란 우임금이 세운 하(夏)나라, 탕임금이 세운 은(殷)나라, 무임금이 세운 주(周)나라, 세 왕조의 시대를 말한다. 물론 우-탕-무 임금 모두 성왕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일정한 성스러움의 서열이 존재하는 것이다." "어떤 결함이 있기에 차선의 시대라고 하는가. 탕왕과 무왕이 새 왕조를 개창하기 위해서는 앞선 왕조를 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마지막 왕을 시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문제는 유교이념에 커다란 도전과 긴장을 준다. 성왕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도입된 천명(天命)이라는 개념은 그래서 항상 이념적 문젯거리다. 우왕에게도 문제는 있다. 그는 요임금, 순임금과는 다르게 그의 아들에게 왕위를 넘겼다. 사정(私情)의 혐의가 있다." "이제 안티노미는 내부에서 이념적으로 갈등하기 시작한다. 폭력의 정당화라고 하는 이념적 조작이, 안티노미의 분투가 시작된다."(132-3)


"유교는 초월적 내세가 존재하지 않고, 그렇다고 인도적-불교적 방식으로 인과응보의 윤회를 믿지도 않으며, 조로아스터적인 선악의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유교에서 이러한 초월적 조정 논리 또는 조정 기관은 과연 무엇인가? 어디에 있는가? 유교는 이 문제를 두 가지 축으로 풀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성인 군주라는 이념의 창출이고, 둘째는 예의 강조다." "따라서 유교에서의 초월적 조정 기관은 이 세계 밖의 어떤 곳이 아니라 요순우탕이 살았던 바로 이 세계 내에 존재하며, 요순우탕의 그 완벽한 모습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유교에서 예란 성왕들이 세상을 다스렸던 행위 양식을 말한다. 예란 우주의 질서 또는 도의 무늬의 결에 맞게[節文] 행위하는 것[履]을 말한다. 따라서 예란 이 불완전한 세계의 배경에서 항상 살아서 실현되고 있는 우주의 올바른 질서에 자신과 나라를 맞추어나가는 행위 양식이다. 이러한 현세 내에서의 간극이 바로 유교에서 초월적 긴장이 스파크를 일으키는 지점이다."(146-7)


"〈유교는 전통의 고삐를 잡기 위해서 전통을 이용했다.〉 과거의 군사적 친족 질서를 새로운 윤리적 의미 구조에 따라 재해석하고 재편했다. 이러한 새로운 윤리적 질서 안에서 군왕과 가부장은 더 이상 군사적 지도자, 자의적 절대자일 수 없다. 부자와 군신의 관계는 군사적 질서가 아닌 윤리적 질서에 의해 새롭게 규정되어야 한다. 전통 속에서 전통을 변환시켜야 한다. 〈전통의 이름으로 전통을 바꾸어야 한다.〉 이 노선은 현실에 아주 잘 들어맞았다. 역사 속에서 유교의 승리를 보장해준 원천이었다. '군사적 친족주의에서 윤리적 친족주의로'. 이 전환에서 본체는 남았지만 성격은 바뀌었다. 그 본체는 친족주의인데, 〈친족주의의 핵심은 벤자민 슈월츠가 고대 중국에서 정립된 '문명적 정향'이라고 강조했던 조상숭배〉다." "결국 유교의 승리에는 그만한 대가가 있었다. 조상 숭배를 윤리화해서 천하를 장악했지만, 바로 이 승리는 진관다오가 〈초안정구조〉라고 불렀던, 항구적 보수성의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155-6)


"명목상 유교 국가의 주권은 절대적으로 군주 일인에 귀속된다. 그러나 유교 국가의 성스러운 군주는 폭력의 행사에서 철저히 배제됨으로써 비로소 군주일 수 있다. 주권의 자리는 텅 비어 있다. 스스로의 목숨을 군주 앞에 가장 무력한 모습으로 내던져 그 빈자리를 지키는 자가 유자다. 〈참된 유자는 자신의 피를 뿌려 성왕의 피를 지운다.〉 직간(直諫)하는 유자의 피를 손에 적신 왕이 성왕일 수 없다. 스스로의 피로 현실 군주를 권좌에서 지우고 그 자리에 한 점 폭력 없는 이념왕을 세우는 자, 바로 유자다. 그들 이념 속의 성왕은 오직 '시간 밖의 시간', '공간 밖의 공간'에만 존재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시공 속에서 가장 거룩한 '왕위 없는 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국가주권은 누군가를 절대적 희생자로 찍어 이를 법 밖의 예외로 설정할 수 있는 힘, 예외 권력이다. 그러나 유자는 스스로 호모 사케르를 자임함으로써 자신을 예외적 권력, 바로 국가주권의 숨은 주인으로 환골탈태한 특이한 호모 사케르다."(167-8)


제2부 유교세계의 작동 원리


4장 유교정치의 키워드: 모럴폴리틱


"유교 경전과 예법의 수호자라고 할 수 있는 유학자들이 정치의 주축이 되었던 유교에서는 윤리-도덕과 정치의 분리란 언어도단에 불과했다." "중세 유럽에서는 '두 개의 칼' 이론이 출현한다. 교황의 칼과 황제의 칼이 이것이다. 이 중 교황의 칼이 황제의 칼보다 우월하다. 유교사에서는 '두개의 통(統)' 이론이 등장한다. 하나는 성인의 계보[道統]이고 다른 하나는 군왕의 계보[王統]이다. 성인의 도통(道統)은 신성하고 순수하다. 반면 군주의 왕통(王統)은 항상 폭력에 오염될 위험 아래 있다. 도통은 왕통을 계도(啓導)하고 정화(淨化)하여야 한다. '교황의 칼'이나 '유자의 도통 정치'라는 말 자체가 모럴폴리틱 자신이 이미 권력이 되었음을 말한다. 정치권력의 궁극적 힘의 근거는 폭력이다. 따라서 모럴폴리틱의 승리의 순간, 그 정점에서 윤리-도덕은 자신의 반대물인 물리적 폭력에 의존하게 된다. 종교적 이단(異端) 규정과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낙인은 동서 세계에서 극단적 폭력의 예고였다."(187-8)


"윤리도덕과 예법 질서를 근간으로 하는 유교적 모럴폴리틱의 현실 표현은 다양하다. 먼저 경전 강론을 통해 군주와 세자에게 성인군주관을 학습시키는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이 있다." "제도화[臺諫]되어 있는 간쟁은 경연과 서연에 비해 보다 직접적인 형태의 모럴폴릭틱이지만 아직 종합적이지는 않다. 정치 행위는 적과 동지만이 아니라 연합 또는 중립화의 대상이 존재할 때 종합적인 것으로 된다. 유교정치에서 이러한 종합적인 정치 상황은 정국을 장악한 유학자층이 서로 다른 당파로 분립하여 서로 경쟁할 때 형성된다. 이 경우 대립하는 당파들과 군주 사이에는 복잡하고 끊임없이 유동하는 동맹, 중립화 관계가 형성된다. 이러한 당파 투쟁 중에도 새로이 왕위를 계승한 군주의 정당성 문제를 놓고 격돌하였던 예송은 가장 종합적인 정치 행태이며 동시에 가장 높은 수준의 모럴폴리틱의 전형이었다. 예송에서는 여러 당파의 예론, 경학이 충돌할 뿐 아니라, 경연의 공간과 간쟁의 수단 역시 빈번히 동원된다."(199-201)


"주희의 『주자가례』는 종법 논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정이-주희 종법론의 특징은 엄격한 형식성, 의례성이다. 인정(人情)과 상황(狀況)에 따른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다. 왕가라 하여 그런 원칙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엄격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야만 강력한 왕권을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권의 자의적 행사를 제약하는 입헌주의적 구속은 유교세계에서 특별히 강했다." "종법 계승 원리의 핵심은 항렬과 생물학적 출생순에 의해 결정되는 종자에 의해 대종의 제사권이 이어져간다는 것이다. 종자가 없을 때는 입후(入後)로 대신한다. 일반 사가(私家)에서도 이 원리를 엄격히 지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왕가에서는 특히나 어렵다. 왕위 계승에는 흔히 심각한 정치투쟁이 따르기 때문이다. 왕자의 난이 벌어지고 골육상잔의 피가 뿌려지기도 한다." "권력의 생리가 강하게 작용하여 항상 유동적일 수밖에 없는 왕권 계승의 현실과 지극히 엄격하게 사전 결정된 종법원리는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208-9)


5장 유교의 예는 어떻게 사회를 규율했는가?


"종교적 가르침은 대개 신성(神聖)의 규정에 관한 부분과 행위의 규율에 관한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이 양자는 뒤섞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 두 영역이 모든 윤리종교의 전통 내에서 분명히 구분되어왔다는 점이다. 전자는 신성에 관한 관념적 논의(베버에 따르면 '이념'에 해당하는 것)에 집중하는 반면, 후자는 해당 사회의 전통적 관습을 깊이 흡수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우리는 전통적 관습을 흡수한다는 후자의 이 특징이 우리가 말한 몸의 기억, 습관의 행위 코드를 윤리종교 교리가 흡수한 것으로 이해하며, 이러한 점이 이념적 이해(利害)가 작동하는 주요한 원리가 되었다고 본다. 유교에서도 이러한 구분은 분명히 확인된다. 정주학의 언어로는 도체(道體)론과 예론이라 구분할 수 있는 범주 구분이 유교의 경전들 내부에 오랫동안 존재해왔던 것이다. 유교의 예란 유교의 윤리적 명령을 전통적 제도와 행위 양식과 뗄 수 없이 결합시킨 몸의 기억을 통한 윤리적 행위 코드라고 정의할 수 있다."(246-7)


"베버에게 물질적 이해(또는 수단합리성)와 이념적 이해(또는 가치합리성)는 근본적으로 화해 불가능한 동기이다. 전자는 경제-정치 영역과, 후자는 종교-윤리 영역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념적 이해가 인간의 행위에 행사하는 힘은 카리스마가 가지는 윤리적 명령의 힘과 함께 그 카리스마적 명령이 제도화, 일상화되어 만들어진 전통과 습관의 힘이 합쳐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념적 이해가 물질적 이해와 연관되는 까닭은 전통화된 제도는 이미 물질적 이해의 강력한 구현체가 되기 때문이다. 전통화된 종교적-윤리적 제도는 물질적 이해의 향수자이면서도 그 제도에의 복종을 요구하는 지시 근거, 힘의 동력은 항상 물질적 이해와의 긴장에서 찾는다. 유럽 중세교회의 면죄부 판매는 현세적, 물질적 이해 추구의 죄를 사(赦)해주기 위해 시작되었고, 조선에서 향약(鄕約)을 통한 신분 위계의 강화는 미풍과 윤리의 명분 아래 이루어졌다. 인간의 행위를 발진시키는 이념적 이해의 동력은 복합적이고 역설적이다."(256-9)


"유교 창건자들이 섬세한 도덕-윤리적 체로 세심하게 걸러낸 예는 이제 단순히 구복적 행위(履)와 제의일 뿐 아니라 동시에 이념[理]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새로운 윤리적 정언명령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졌고, 그 성격은 무조건적이며 반(反)경제적이다. 한갖 떠도는 세객(說客)이 열강의 군주들 앞에서 자신의 생사를 돌보지 않고─베버의 용어를 빌리자면, 〈행위의 결과에 대한 고려 없이 오직 윤리적 명령에 따라〉─서슴없이 그들을 비판하였던 맹자의 모습은 분명 구약에 나온 예언자들의 카리스마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념'은 역사의 철로 방향을 바꾸어놓을 수는 있어도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그 위를 지속적으로 달릴 추동력까지 제공하지는 않는다. 이념이 현실의 힘으로 전화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몸이 움직이게 해야 한다. 바로 행동[履]하도록 하는 것, 바로 예의 힘이 필요하다. 실로 유교의 윤리혁명은 인간의 몸을 움직이도록[履] 하는 예라는 제도를 통해서만 역사의 철로를 달리는 동력이 되었다."(261-2)


"유교 창건자들의 경전 편집 과정이 전통적 자료를 뜯어고치는 방법이 아니라 윤리적 기준에 따라 체로 걸러내는, 즉 전통적 재료를 윤리적 기준에 따라 선별 재건축하는 방법(述而不作)을 취했던 것처럼, 예 역시 똑같은 경로를 밟았다고 할 수 있다. 즉 조상신에 제사를 지내는 오랜 전통과 그 안에 담긴 기복적 동기를 윤리적 예를 건축하는 잴로 일단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다만 그 재료가 윤리적 목적에 부합하도록 그 의미를 재구성하였다. 공자는 〈조상의 제사를 올릴 때는 선조가 계신 듯이 하였고, 신에 제사를 드릴 때는 신이 계신 듯이〉(『논어』 「팔일(八佾)」하여 전통적 행위에 충실하였지만 동시에 〈괴이하고 폭력적이며 귀신에 관한 것은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로 상고적 제의의 원시적 폭력성과 샤먼적 요소에 대해 뚜렷한 선을 그었다. 그리하여 예란 단순히 기복적 성격을 넘어서서, 사적 욕망을 극복하고 유교 윤리성의 요체인 인(仁)으로 돌아간다는 윤리적 목적을 띠게 되었다."(262)


6장 유교 노블레스 오블리주: 여성적 절의와 도덕권력


"유자가 가진 것은 충신의 붉은 마음[丹心]과 의와 문(文)뿐이다. 〈죽음 앞에 지키고자 하는 것을 바꾸지 않는 것, 이 정신이 바로 유자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지조(志操)다.〉 이 지조의 정신에는 폭력에 대한 원천적 반항과 함께 무인의 결사적 투쟁 도덕이 묘하게 혼합되어 있다. 이미 말과 칼을 박탈당한 신분으로서 그들의 명예를 견지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하게 남은 방법은 이렇듯 반폭력의 정치사상과 결사적 저항 정신의 결합이었던 것이다." "유자 집단은 본래부터 무력 수단을 박탈당한 신분이었다. 그렇기에 이러한 신분적 상황을 폭력 행사 자체에 대한 철저한 윤리적 반대의 교리를 세우면서 극복했다는 점에서 법가 등의 현실 정치파와는 크게 다르다." "유자란 법가 사상가들과는 다르게 현실 정치의 냉혹한 승자들을 위한 마키아벨리적인 전략전술 서비스 대신 그러한 패도 정치를 맹렬히 규탄하는 길을 택함으로써, 칼의 권력이 아닌 도덕의 권위, 즉 니체의 용어로는 사제 권력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었다."(280-2)


"주로 춘추전국시대의 여성에 관련된 일화를 편집해놓은 책인 『열녀전』의 한 대목을 보면, 남자인 구자(丘子)가 아닌 그의 부인이 유자의 도리인 명예로운 죽음을 설파하고 있다." "고대사에서 여성들의 처지란 강한 폭력을 가진 승리한 전사의 획득물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힘의 논리 앞에 명예 의식을 가진 여성들이 맞서서 오직 맨몸으로 그 힘을 도덕적으로 이겨내고 복수할 수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살이었던 것이고, 이러한 여성의 매운 절개를 두고 칭송하여 절의(節義)라 하였다. 폭력의 위협 앞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맹렬히 저항한다는 유자의 덕목과 명예로운 신분 의식을 가진 여성들의 절의란 완전히 동형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유자들의 이념인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여성적 절의와 완전히 부합한다. 유자들의 정조(情操)와 명예로운 신분층 여성의 감성이 예사롭지 않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287-8)


"죽음에 대한 감연한 태도, 고결한 죽음의 명예는 신분적 특권주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여기서 죽음이란 도덕적 위계의 정상에 이르려는, 도덕 전쟁의 승자가 되려는 필사적인 투쟁 수단이기도 하다. 민주적 평등 의식이 완전히 정착하기 이전의 사회에서 신분적 위계는 동시에 도덕적 위계이기도 했다. 신분적 위계란 또한 혈통적 위계다. 신분=혈통=도덕의 위계는 삼위일체를 이룬다. 이 삼위일체는 종교적 언어로 승화되면서 우주론, 도통론으로 확장된다. 유교사회의 경우, 유학자들의 도덕정치는 동시에 신분정치요 혈통정치였다. 이 삼위일체는 종법정치로 종합된다. 유교에서 종법적 질서는 폭력적 찬탈, 즉 정통성이 없는 정치적 폭력을 예방하는 이념 구조였고, 효와 충이 동형 구조로 결합하는 유교적 봉건성, 유교적 종교성의 핵심이었다. 『열녀전』 속의 숱한 절의녀들과 송시열을 한 줄로 묶는 공통성은 종법적 혈통, 종법적 국가, 종법적 신분 구조에 대한 신성한 믿음이었다."(292-3)


제3부 동아시아 초기근대의 전개 양상


7장 잊혀진 지구화: '긴 12세기'와 동아시아 초기근대혁명


"송대 이전의 중국은 여전히 고대적(한대까지), 중세적(남북조 및 당까지) 귀족체제였다. 송대에 새로운 신분 상황이 전개된 핵심적인 이유는 귀족 지배 체제의 경제적 근거인 장원 체제가 해체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당 왕조 때까지 중국의 농민들은 유서 깊은 귀족들의 장원에 예속되어 있었다. 이러한 귀족-장원 체제는 위진남북조의 대변동 이래 지속적으로 타격을 받아왔다. 특히 유목 민족이 중원에 내려와 왕조를 세우고 지배 세력이 되었던 것이 전통적인 귀족 세력을 무력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 왕조의 붕괴와 그를 이은 5대10국의 상황은 이러한 전통적 귀족세력의 몰락에 최후의 결정타를 가했다. 그 결과 송대에는 전통적 귀족 장원 체제가 무너지고 그를 대신한 지주-전호 체제가 성립했다. 이후 대다수 중국 농민의 기본적인 신분-계급 상황은 귀족 농장의 예속농민이 아니라 일정한 소유권-경작권을 보유한 다수의 소농-소작농의 상태였다."(309-10)


"전통적 귀족체제가 해체되면서 왕권을 분점할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래서 중국사에서는 송대 이후에 '절대주의적 황권'이 수립되었다고 말한다." "절대주의라고 하여 왕권에 대한 견제와 비판이 소멸하였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견제와 비판은 보다 견실한 원리원칙 위에 더욱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귀족 권력 분점 체제에서의 견제와 비판이란 체계적인 교의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전통적으로 규정되고 분배된 주권 지분의 계보와 계서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절대적 황권이 수립된 체제 속에서의 비판이란 그러한 절대적 황권이 행사되어야 할 정당한 방식이 무엇이어야 되겠는가를 논하는 훨씬 체계적이고 철학적인 교의에 의거한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한 교의가 바로 정주학, 넓게는 송학(宋學)이었고, 그러한 역할을 담당할 새로운 주체가 조정과 재야의 사대부층이었다. 그래서 송대에 이르면 사대부라는 말는 문화적·학술적 능력을 입증한 관료이자 향촌의 주도 계층을 뜻하게 되었다."(311-2)


"한·중·일 공히 지배적인 주류 입장이었던 기왕의 해석에 따르면, 주자학은 유럽 중세 아퀴나스 신학에 비견되는 신(聖 또는 理) 중심의 억압적 도덕학이고 중세적 신분 질서를 옹호하는 보수적 관학이었다. 그러나 정주학은 오히려 기(氣), 즉 속(俗) 우선의 교의였다. 따라서 정주학이 최초로 정립한 이기론(理氣論)은 '통섭Ⅰ'이 아니라 '통섭Ⅱ'와 그 원리가 같다. 우선 현상, 물질, 자연이라는 기의 질서[俗]를 자명한 사실로 전제한다. 이는 그 편재하는 기의 세계의 내부에 숨어 있다. 반면 '통섭Ⅰ'에서는 성스러운 질서가 현상, 물질, 자연, 인간의 전면(全面)을 속속들이 압도한다. 아퀴나스의 세계가 그렇다. 신의 섭리가 모든 사물 운행에 선명하고 압도적으로 각인되어 있다." "송대 이전의 '천즉도(天卽道)'의 세계관에서 도는 모든 자연사물과 인간사를 주재하면서 자명하게 드러나 있다. 반면 정주학에서 자명하게 드러나 보이는 것은 기일 뿐이다. 이는 격물치지-성의정심 전력하여 찾아야 할, 안으로 숨은 원리가 되었다."(322)


"물론 관학이 되기 이전까지 탄압의 대상이었던 정주학이 후일 관학이 되었다는 역설이 있다. 그리고 송대 이후 중국이 특이한 비신분 사회였다 하더라도 주-노, 군-신, 귀-천의 신분적 구분의 관습과 제도는 존속했던 것이고, 관학으로 된 주자학이 이러한 현실 신분 관행의 이데올로기적 정당화 수단으로 활용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에 대한 반발과 비판이 주자학 내부에서 끊임없이 이어져왔음을 아울러 보아야 한다. 그들 교의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 압도적으로 강한 현세 권력에 맞서 목숨을 건 비판을 피해가지 않았던 순교적 전통,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강조하면서 과거(科擧)를 위한 공부에 곤혹스러움과 거부감을 느꼈던 흐름, 그리고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될 수 있다[개인위성(皆人爲聖) 또는 개민위성(皆民爲聖)]는 모토를 가지고 교의를 대중 속으로 확산시키려 했던 흐름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측면을 송대 정주학 이후의 유학에서 전면적으로 발현되는 특징이다."(323)


8장 유교사회 영구정체론, 아시아적 생산양식론 비판


"중층근대성론의 시대구분의 양대 축은 성속통섭 전환(통섭Ⅱ)과 성속통섭정립(통섭Ⅰ)이다. 그러니까 중층근대성론의 기본적인 시대구분은 둘이다. '통섭Ⅱ'의 시대는 현재와 이어져 있고, 현재가 그 일부인 '역사적 근대'이고, 통섭Ⅰ의 시대는 '역사적 근대 이전'이다. 그러나 이 두 시대가 전혀 별개는 아니다. 둘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다. '통섭Ⅰ'의 정립과 함께 '원형 근대성'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플라톤이나 공맹, 성서나 바그바드기타, 금강경 등 '통섭Ⅰ'의 핵심을 담은 텍스트들은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이 접했을 때도 모종의 강렬한 현재성을 가지고 다가온다. 이 텍스트들 속에서 모종의 '현재성'을 느낀다 함은 그 역시 현 시대와 닿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형 '근대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성속의 통섭 관계가 오늘날의 그것과는 뒤집어져 있기 때문에 시대감각의 차이를 느낀다. 따라서 이 현대성을 '원형(proto)' 근대성이라 부르고, 그 원형 근대의 시대를 근대가 아닌 근대 이전으로 분류한다."(361-2)


"그런데 '통섭Ⅰ'과 '통섭Ⅱ'의 정립 사이에 유라시아 차원에서 중대한 변화가 발생했다. '통섭Ⅰ'의 원리가 구축(構築)했던 고대 세계가 크게 변형되었다. 로마와 한(漢) 제국의 붕괴, 이슬람의 흥기에 따른 고대 중동, 아프리카, 페르시아 세계의 해체와 재편이 그것이다. 이 현상은 '통섭Ⅰ'의 고대 질서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주변부에 위치해 있었던 중앙아시아 스텝 유목민과 아랍 중동의 원거리 상업 부족이 크게 강성해지면서 세력권을 주변 여러 문명권으로 확대해간 대이동 과정과 맞물려 있었다. 유럽 중세와 중국의 남북조, 수당, 5호10국 시대, 그리고 이슬람의 흥기와 확장의 시대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시대의 원리는 '통섭Ⅰ'의 연장에 있고, 이 점에서 세계윤리종교로서의 이슬람은 정확히 '통섭Ⅰ'의 원리를 새롭게 구현했다. 그러나 이 시기는 고대적 체제가 해체 재구성되고 유라시아 전반에 분권적 현상이 두드러졌다는 점에서 '통섭Ⅰ'과 '통섭Ⅱ'를 잇는 중간적 시기로서의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362)


"중층근대성론의 고대-중세-근대(초기근대-본격근대)의 시대구분은 유럽근대의 자기인식을 위해 정립했던 기존의 고대-중세-근대 구분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유럽근대의 자기인식으로서의 근대'란 고대 그리스 로마 문명으로의 복귀라는 인식이었다. 이 관점에서 근대는 오직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만 기원하였고, 이를 계승한 서유럽에서만 완성되었으며 완성된 이후 비서구로 확대되어나간 것이 된다. 반면 중층근대성론의 근대는 '통섭Ⅰ'의 원리의 '뒤집힘'을 말하지, '통섭Ⅰ'의 원리로의 '복귀'를 말하지 않는다. 또한 '통섭Ⅰ'이든 '통섭Ⅱ'든 유라시아 문명, 더 나아가 인류사 전체에 해당하는 현상으로 본다. 다시 말해, '통섭Ⅰ'의 정립이든 '통섭Ⅱ'로의 전환이든, 고대-중세-근대의 시대구분이든, 일국사적 또는 지역사적 맥락이 아니라 지구사적 문명 교호의 맥락에서 본다. 따라서 중층근대성론의 시대구분만으로도 아시아 사회가 변화 발전 없이 정체(停滯)해 있었다는 편견은 충분히 기각할 수 있다고 본다."(362-3)


# 새로운 사회구성체 유형

1. 교환양식의 유형 요소 : 호혜의무형, 분권국가형, 집권국가형, 상품시장형, 중심형, 주변형, 반주변형

2. 생산양식의 유형 요소 : 공동체적, 노예적, 예농적, 소농적, 임노동적 유형

※ 1과 2에서 추출한 요소들이 결합하여 특정 사회구성체를 형성한다.


9장 동아시아 유교소농체제


"토지의 한계생산성이 지극히 높은 수도작(水稻作, 물 대는 논에서의 벼농사) 농업이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주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은 송대의 강남 개발 이후이다." "토지의 한계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한정된 토지의 토질 개량을 위한 부단하고 집중적인 노동 투여가 요구된다(시비, 객토 등). 물대기, 피뽑기, 김매기, 때에 따라 틈새 농지에 윤작하기 등도 매우 집약적이고 세심하게 계획된 노력을 투여해야 한다. 요즘 말로 하면 다임무 수행(multi-tasking) 농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수도작 농업에서는 대체로 거의 모든 작업이 개별 가족 단위의 집약적 노동 투여에 의해 이루어졌다. 물론 농업시대의 소농생산은 가뭄이나 수해, 또는 국가의 과도 착취에 의한 생존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여기에 대응하는 마을 공동체 단위의 상호 협력과 부조(扶助)의 망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렇듯 가족 노동이 사회적 생산의 안정적 거점이 되었다는 점이 동아시아 '소농사회' 성립의 가장 중요한 물질적 근거였다."(378-9)


"1979년 중국은 집단농장-기계화-대규모 경영을 핵심으로 하는 농업정책의 기조를 농민 각호에 자작 경작지를 허용해주는 방향으로 크게 전환하였다. 주지하듯 농업생산은 크게 신장되었고, 여기에 향진기업(농촌공업)이 결합하였다. 그 결과는 대단한 성공이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소농생산과 농촌공업의 결합이라는 이 기본 틀은 중국사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라 지극히 오래된 모델이라는 사실이다. 이 모델이 안정된 틀을 갖추어 역사에 최초로 부각되었던 곳 역시 중국 남송의 강남 지역이었다. 당시 강남 농민들은 벼농사 소농경작(2모작, 3모작)을 하면서 동시에 베짜기, 양잠, 유채·사탕수수 재배 등의 다양한 부업을 통해 상업적 수공업망에 연계되었다. 도시에는 상당히 큰 규모의 도자기, 비단, 면직, 차 생산 단위가 형성되기도 했다. 이러한 소농+초기공업의 결합망은 국내외의 광범한 교역망 안에 포섭되어 있었다. 이러한 양상은 16세기경부터 조선과 일본에서도 유사하게 진행되었다."(382)


"동아시아 수도작 지역의 소농은 유럽의 인클로저와 같이 강력한 외압에 의해 급격하게 대규모로 농토에서 내몰린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중국에서는 이미 송대부터 자립적 소농이 형성되었고, 명청시대를 거치면서 농토에서 추방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안정적으로 정착했다. 조선과 일본에서 이와 유사한 과정은 16세기 이래 19세기까지 진행되었다. 이러한 '안정적 소농생산체제'가 동아시아 소농체제론의 요점이다. 소농을 농토에 안정적으로 정착시키려 하는 정책은 선진(先秦) 시대부터 뚜렷이 관찰되는 동아시아 문명의 공통 특징이다. 소농에게 부칠 땅을 주어 생산을 계속하도록 하는 것을  유교는 '항산(恒産)'이라 불렀고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 이를 기본 정책 방향으로 유지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유교소농체제'를 '소농항산(恒産)체제'라 부르기로 한다. '소농항산체제'는 19세기 후반 이래 급격한 사회변동 속에서도 동아시아 지역에 의연히 존재해오는 특징이다."9383-4)


"사대부층은 수도작 농법을 선진적으로 전파하고 농지 확장을 적극적으로 주도한 생산주도층이기도 했다. 이들은 생산성이 높은 이모작 농법을 권장하고 황무지 및 산간 농지 개발과 강변 및 해안 농지 간척을 주도했다. 이모작 농법은 적시에 물이 충분히 공급되지 않으면 한 해 농사를 몽땅 망쳐버릴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따라서 저수지와 관개시설이 매우 잘 정비되어야 한다. 당시에 이러한 고도의 토목공사를 위해서는 잘 정비된 관료 기구와 민간 유력자의 총합된 힘이 동원되어야 했다. 일면 관료요, 일면 지방 유력자인 사대부의 이중적 존재 양식은 이러한 관과 민의 힘의 총합이라는 요청에 잘 부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결국 '유교경제' 또는 '유교적 소농체제'라고 하였을 때의 '유교'란 정주학을 말하는 것이며, 이는 유교경제를 수도작 소농경제로 국한하여 말하는 것이 된다. 바로 이 '동아시아 수도작 소농경제'='유교경제'가 20세기 후반 이후 동아시아 경제 도약의 역사적 근거를 이루고 있다."(388-9)


제4부 조선 후기 유교 근대의 다이내미즘


10장 1659년 기해예송의 전말과 유교 국민국가의 태동


# 기해예송 : 1659년 5월 4일, 효종이 돌연 서거하자 효종의 의붓어머니이자 인조의 둘째 왕비인 자의대비 조씨가 장례에 입을 상복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 송시열은 1년 기년복을, 윤휴는 참최 3년복을 주장했고, 치열한 논쟁 끝에 최종적으로 송시열의 주장이 채택되었다.


"유교에서는 매년 사자(死者)의 기일에 사자와 다시 만나는 기제(忌祭)의 중요성이 매우 크다. 조선 유자들이 크게 중시했던 『주자가례』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사당(詞堂) 항목은 사자와 남은 자손이 일상생활에서 항상 접촉하고 만나게 되어 있음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아울러 유교에서는 상례조차도 다른 종교의 그것에 비해 남은 친족들과의 사회학적 연결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을 압축적으로 요약하고 있는 것이 유교 종법에서 말하는 오복지친의 개념이다. 오복지친이란 사자의 상례에 사자를 위해 입는 참최, 자최, 대공, 소공, 사마의 다섯 가지 상복을 입어야 하는 가까운 친척으로서, 그 구분은 사자와 조상자(弔喪者)와의 친족적 관련 정도에 따라 이루어진다. 결국 사자는 상례를 통해 그의 친족들과 그가 남긴 자손들의 친족적 계보와 서열을 엄밀하게 재확인하는 것이며, 이러한 의례를 통해 사자와 그의 친족, 자손들은 윤리적이며 동시에 사회적으로 다시 묶이게 되는 것이다."(413-4)


"1666년 3월 23일, 유세철 등 영남 유생 1000여 명이 서명한 장문의 상소가 올라왔다. 기해년 복제 논의에서 송시열의 설을 격렬히 탄핵하는 내용이었다. 주로 허목의 설에 윤선도와 윤휴의 의론을 섞은 것이었다. 당시 남인 예론의 결정판이라 하겠다. 당시 조선 사회는 향촌 단위까지 유교 네트워크가 잘 발달되어 있었는데 영남 유림은 남인 세력이 강했다." "17세기 말엽 조선에서 형성된 유교적 공론 네트워크는 정보 회전의 폭과 속도에서 당시 유럽에 비해 결코 못하지 않았다. 예송논쟁 과정에서 조선의 유교정치는 전국화(nationalize)되었고, 근대적 수준의 유교적 공론장이 탄생했다. 12~13세기 송대에 처음 출현했던 초기근대 유교 공론장의 수준을 크게 뛰어넘는 것이었다. 17세기에 이런 수준의 전국정치(national politics), 담론정치(discourse politics)가 행해지고 있던 나라가 조선 말고 또 있었을까? 문화 상황이 달라 동렬 비교는 곤란하지만, 격렬한 혁명과 내전이 벌어지고 있던 영국 정도가 아니었을까."9438-9)


"근대적 의미의 조선형 민족의식의 시작은 호란 이후의 소중화(小中華) 의식이었다. 그 이전 왜란의 영향도 있었다. 그 결과 중국과도 일본과도 다르다는 민족 단위의 독립 차별 의식이 분명했다. 이 소중화 의식은 일부 척화파 사대부만의 관념적 사치가 아니었다. 민간에 널리 파고 들어간 대중의식이었다. 기해예송을 계기로 유교적 담론이 대중화, 세속화된 형태로 향촌으로, 그리고 양인, 노비층으로까지 퍼져나갔다. 그 결과 반상(班常) 신분제도의 선명한 구분선이 모호해지고 흔들린다. 13장에서 말하는 '유교적 평등화 과정'이다. 그렇듯 평범한 장삼이사(張三李四)들에게까지 대중화, 세속화한 유교가 '대중유교'다(제14장)." "그렇다면 이 시기 조선에는 국민국가(nation state)가 분명히 태동하고 있었다고 말해야 한다. 개념 일반과 종차(differentia)를 감안하면 조선형 국민국가, 또는 유교적 국민국가 되겠다. 그 출발점을 굳이 명시해본다면, 조선에 본격적인 전국정치가 출현했던 기해예송 연간이었다."(443)


11장 유교군주와 근대주권: 윤휴, 정약용, 정조


"기해예송 당시 백호 윤후의 입장은 우암 송시열, 미수 허목과 판이하게 달랐다. 왕위에 오른 자가 적장자냐 아니냐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왕위에 오른 자는 그의 친족적 서열과 무관하게 전왕의 대통을 잇는 적장자가 된다. 따라서 왕이 죽었을 때는 가장 높은 상복이자 적장자에 대한 상복인 참최 3년복을 마땅히 입어야 한다. 이것이 백호의 주장이었다. 허목이나 송시열에게 '친족례=가례'와 '왕례=방국(邦國)례'의 원칙은 서로 다를 수 없었던 반면 윤휴는 마치 알렉산더 대왕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칼로 쳐 끊어버린 것처럼 이 둘을 날카롭게 끊어버린다. 정치적으로 보자면 서인(우암) 대 남인(미수·백호), 즉 1년설과 3년설이 대립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보면 윤휴의 시각과 송시열, 허목의 시각이 대립하고 있다. 〈우암 대 미수의 대립선은 정통적인 종법논리 안에서의 다툼일 뿐〉이다. 반면 〈백호 대 우암·미수의 대립선은 종법논리와 종법을 넘어서는 초종법논리 사이의 대립〉이다."(466-7)


"존존(尊尊)과 친친(親親)이란 예론의 전문용어인데, 쉽게 말하면 존존이란 정치적 상하 관계를 말하고 친친이란 혈연적 유대 관계를 말한다. 현대의 시각에서 보면 존존이란 공적 윤리에, 친친은 사적 윤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교 종법제에서는 이 둘이 분리하기 어렵게 뒤섞인다. 종법제란 원래 제후가(諸候家), 즉 왕가의 친족법으로서 왕권승계에서 장자계승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원리다. 따라서 부자 관계란 군신의 존존 관계이면서 동시에 부자의 친진 관계일 수밖에 없다." "이 친친 존존의 원리를 기해예송에 적용하면, 우암·미수 양인은 친친 존존이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고 본 점에서는 같다. 반면 백호는 이 둘을 떼어버렸다." "백호 견해의 강점은 이렇듯 거친 파열에 있다. 존존과 친친의 원리 사이의 불화를 교묘하게 봉합하려 하지 않고 거칠게 터트려버린 채 그대로 두고 있는 것이다. 백호 의론의 적극적인 의미는 정치윤리와 친족윤리 간의 분리를 위한 개념적 물꼬를 튼 데 있다."(467-9)


"존존과 친친 원리의 분열, 왕례와 가례의 분열이 시사해주고 있는 핵심적인 의미는 국가주권에서 공적인 성격이 부각되고 사적인 측면이 퇴조한다는 데 있다." "백호와 다산처럼 군주복제를 '위천왕참'의 원리에 귀속시키면 적장(嫡長)을 따지는 가례 원칙이 끼어 들어올 틈이 없어진다. 이로써 군주의 주권은 그의 적통성(嫡統性)과 장서(長庶) 문제, 즉 친족적 구속력으로부터 해방된다. 군주의 주권에서 사적, 친족적 성격이 탈색되어감에 따라 공적, 정치적 성격은 강화된다. 이로써 군주의 주권은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된다. 종법이나 기타 다양한 관습으로 왕권을 규제했던 유가의 이데올로그들은 그들의 교육에 순치된 군주를 '무위지치(無爲之治)의 성군'이라 불렀다. 그러나 종법과 관습으로부터 군주를 해방시키려는 다산은 역대의 진정한 성군은 모두 힘써 일하여 미래를 개척한 '유위지치(有爲之治)'의 군주들이었다고 주장했다. 다산과 백호가 그린 군주는 바로 그러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군주였다."(474-5)


# 위천왕참爲天王斬 : 왕을 위한 상복은 모든 이에게 최고의 상복인 참최 3년복 뿐이라는 『주례』의 한 구절


"이렇듯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군주의 배면에 백호와 다산이 동시에 강조하였던 〈세상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주재(主宰)하는 인격신적 상제(上帝)〉라는 후광을 띄워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연결이다. 백호와 다산은 군주의 주권은 결코 나누어가질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분명히 왕좌의 일인에게로 . 모주권이 집중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인에로의 사유화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그 '일인'이란 친족적, 전통적, 정치적인 입지, 서열, 채권·채무 관계와 무관한 개인이다. 즉 현세적 관계망들과는 무관한, 그것들을 초월한, 추상적인 개인이다. 이러한 초월적 지위는 군주의 사적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의 공적 권능과 정의를 위해서 군주에게 부여된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 시각에서 보면 이러한 군주의 초월적 지위가 사적인 것이었겠지만, 절대군주론자, 일반 인민의 시각에서 보면 사적인 것을 배제한 순수히 공적인 것으로 된다. 근대적 의미의 공개념이 여기서 모습을 드러낸다."(475-8)


"정조의 안정된 치세는 숙종, 영조와 같은 군주가 궂은 일을 치워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숙종의 환국정치와 영조의 탕평정치는 송시열류의 왕권 견제 세력의 힘을 크게 약화시켰다. 숙종기 거듭된 숙청과 재숙청의 순환 속에서 많은 기개 높은 유자들이 목숨을 잃었고, 정치판에서 영원히 배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즉위하였기 때문인지 정조에게는 현종이 송시열에게 품었고 숙종이 윤휴에게 품었던 바와 같은, 사림의 영수들에 대한 두려움에 가까운 존경의 마음이 애초부터 별로 없었던 듯하다. 정조 자신의 높은 학문 수준도 이를 부추겼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이들 사림과 당파의 영수들을 지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다소 깔보면서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정조는 스스로 군주스승(君師)을 자부하고 군주도통(君主道統)설을 주창했다. 〈군주 자신이 모든 유자의 스승이고, 공맹정주의 도통을 군주인 자신이 계승했다는 것〉이다. 송시열이 들었다면 기함하여 뒤로 넘어질 일이다."(486-7)


"숙종, 영조를 거치면서 기해예송 때 현종을 두렵게 하고 또 분노케 하였던 조정의 이중권력, 대간(臺諫)의 견제권력은 사실상 무력화되어 있었다. 정조 대에 이르면 윤휴가 일찍이 주창했고 후일 정약용이 지지했던 대간폐지론은 이미 이론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아울러 재야를 지배하던 유림세력, 그리고 이 세력의 공론의 대표자로 존중받던 '산림(山林)'의 권위도 현저히 추락했다. 그 결과 조정은 군주 일인의 의지에 조종되었고, 지방도 국왕이 직접 챙기는 직할관리 대상이 되었다. 유교국가의 '상층유교(high confucianism)' 세계가 이렇듯 현저하게 변모해가는 동안, 사회의 밑바닥에는 '대중유교(mass confucianism)'의 새로운 파고가 높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영·정조가 만들어낸 이러한 만천명월형 중앙집중 정치 시스템의 열매는 조정의 몇몇 척족 집안의 손아귀로 넘어가고 말았다." "정조 밑에서 정치를 배운 순조의 장인이자 시파의 영수인 김조순과 그 가문 일족이 이제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491-2)


12장 〈온 나라가 양반 되기〉: 조선후기 유교적 평등화 메커니즘


"평등을 철학적 차원에서 보면 평등 지향성과 신분 지향성은 분명 모순이다. 칸트가 말하는 평등은 도덕적 자율성(moral autonomy)이 내면화된, 그리하여 사회적 층위가 인격적·도덕적 층위로 침하되지 않는 자유로운 시민으로서의 평등이다. 따라서 평등 의식의 수준이 높을수록 사회적 차등 의식은 약화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평등을 사회학적 차원에서 보면 이 둘이 꼭 모순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례 관계가 될 수도 있다. 평등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신분 경쟁도 치열하다는 말이다. 내가 뛰고 있지만 내 옆의 그가 더 빨리 뛰면 나는 뒤떨어진다. 그러니 더 열심히 뛰어야 한다. 평등 의식과 차등 의식은 여기서 비례적 상승 관계에 있다. 평등 지향과 신분 지향이 동시에 강한 사회는 한국만이 아니다. 다만 한국에서 특이하게 그 상승 관계가 강한 것뿐이다." "봉건적 신분은 세습되어 미리 고정되어 있으므로 오히려 신분 경쟁이 지극히 약하다. 봉건적 신분이 해체될수록 신분 경쟁이 강해진다."(495-6)


"16~19세기는 동서를 막론하고 '시장=상업경제'가 활성화되고, 그 결과 경제력을 갖춘 신흥 세력이 부상했던 시대다. 19세기 전반의 프랑스인으로 대귀족 출신 정치가이자 지식인이었던 토크빌은 17~18세기의 프랑스와 19세기 미국의 사회상을 비교 분석하면서, 이들 시대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을 〈사회적 조건의 일반적 평등(general equality of social conditions)〉 경향이라 하였다. 그 결과 〈상층과 중간층의 사람들이 너무나도 서로 비슷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동아시아도 상황은 비슷했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시장=상업경제'가 강화되어 상업농-도시상인층의 사회적 지위는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었다. 장시가 크게 증가하고 화폐경제가 확대되었던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종의 평등화 현상이 발생했는데, 이는 초기근대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사회에서 관찰되는 현상이다. 그러나 상층 신분 인구 비율이 60~70퍼센트에 이르는, '온 나라가 양반 되기'는 오직 조선 유교사회 특유의 평등화 현상이었다."(501)


# 유교적 평등화의 3단계 과정

1. 16세기에 주류 이념으로 정착된 성리학적 예론은 17세기에 예송 논쟁을 통해 강력한 정치투쟁의 수단으로 벼려진다. 예를 통한 정치투쟁이 전국화했고, 예론에 내재한 평등적 예관(禮觀)에 향촌 사족에게 전파된다.

2. 18세기에 들어서면 향촌 사회에 신양반층이라 할 수 있는 '신향(新鄕)'이 대거 출현한다. 구향과 신향 사이의 신분 투쟁을 향전(鄕戰)이라고 하는데, 이 향전을 통해 양반층이 인구학적으로 확장되는 계기를 이룬다.

3. 향전의 본격화에 뒤이어 노비의 속량, 탈주가 가속화, 대규모화하면서 노비 수는 급감한다. 이들 탈주 노비들은 타향으로 흘러 들어가 양인 행세를 하고 한 발 더 나아가 양반 행세를 하면서 향전의 한 축을 이룬다.


"노비 출신의 사람들이 지배 신분으로 환골탈태를 모색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 양반의 신분은 상당 부분 사회적인 인정(recognition)에 근거했던 것이니만큼, 이들 나름의 각고의 노력을 통해 실제로 사회적 인정을 획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온 나라가 양반 되기'가 단지 상층 신분에 대한 무비판적인 선망만으로 전개되었던 것은 아니다. 신분 상승의 압력이 거세어갈수록, 이 경주에 '신분 제한 없이' 모든 사람들이 뛰어들게 될수록, 신분 체제 자체에 대한 냉소, 회의, 부정 역시 점차 그리고 급격하게 확대되어갔다. '유교적 평등화' 과정에는 양적인 의미에서 많은 사람들이 양반으로 비슷해진다는 '신분적 평등화'뿐 아니라 신분제 자체에 대한 부정이 확산되어가는 '반(反)신분적 평등화' 역시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무차별적 평등화에 대한 냉소가 내면의 평등화나 질적 평등화로 승화되어가는 것은 더 긴 시간을 요하는 역사적 숙제로 남았다."(532-3)


13장 동학(東學): 대중유교와 인민주권


"'유교적 평등화 과정'은 유교 국가의 몰락 과정이면서 동시에 유교 대중 전파의 전례 없는 성공 과정이기도 했다. 양반이 면세 특권을 독점하고 있었기에 양민과 노비의 부세와 요역 그리고 신공(身貢)에 의존하고 있었던 조선은 양인과 노비 신분의 인구 감소에 따라 쇠멸해갈 수밖에 없었지만, 동시에 위신 있는 유교적 풍속과 관행은 양민과 노비층 안으로 깊고 넓게 확산되어갔기 때문이다. 유교적 풍속과 관행을 철저히 익히고 흉내내는 길이야말로 신분 상승의 요로였다. 그래서 이미 많은 조선 후기 신분사 연구자들이 밝힌 바 있는 양반 신분(유학, 향임, 생원 등)의 급증 현상은, 동시에 유교의 급격한 대중화 과정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즉 조선 후기 사회에 모습을 드러낸 대중유교(大衆儒敎, mass confucianism)란 느슨하게 열린 양반 신분의 말단을 차지하고 있는 다양한 신분층과 이 층 바로 밑에서 이 층과의 빈번한 접촉을 통해 밀접한 영향을 받고 있었던 양인과 노비층이 맹렬하게 흡수했던, 대중화된 유교다."(554-5)


"최제우가 바라보는 당대는 도덕군자가 지벌과 가세로 결정되는 세상, 어진 사람은 궁박하며, 몹쓸 사람이 부귀를 누리는 사회다." "이로써 정주학적 질서가 현실의 신분 질서에 부여한 도덕적 권위, 신성함의 위광이 부서진다. 그 반대물인 부도덕과 타락의 대상이 된다. 한편으로는 유교적 신성함이 부정되고 회의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숨어버린 신성을 찾는 구도(求道)의 열정이 뜨거워진다. 이 회의와 열정을 천재적으로 통합한 것이 최제우고 그의 동학이다. 조선 후기 사회에서 유교의 대중화 현상 자체가 유교의 정통적 신념들 간의 불구대천의 투쟁을 역사적 전제로 한다. 그 투쟁의 격렬함을 통해 지배 질서에 남긴 성스러운 자국들을 스스로 지워간다." "이 회의와 냉소의 확산과 병렬하여, 지배 체제의 외곽에서 발생한 두 가지 흐름의 열정이 있었다. 하나는 위로부터의 다른 하나는 아래로부터의, 전자는 유교적 원리주의 즉 위정척사 운동이고, 후자는 유교적 대중주의, 즉 동학운동이다."(558-9)


"현실의 지배 질서의 표면에서 철저히 부서진 신성함의 거소는 어디가 되어야 할 것인가. 지벌 가세 없고 문필 없는, 가장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 깊은 속이다. 현세의 성공과 평판, 즉 현세가 그리고 있는 지벌과 가세라는 외양의 결은 더 이상 신성한 뜻의 표출이 아니다. 여기서 신성한 뜻은 현실 질서의 이면으로 퇴각한다. 〈신성함이 숨는다. 노심초사 전전긍긍 힘써 찾고 모셔야 할 아지 못할 손님과 같은 존재로(시천주). 인간의 심사 깊은 곳으로. 그곳에 신성한 하늘이 있다(인내천)〉. 최제우의 인내천-시천주 사상은 유교에 내재한 평등사상을 더욱 근본화시킨 것이다. 사람 안에 신성함이 내재한다는 사상은 원시유교에서부터 존재했던 발상이며, 정주학에서 특히 강조되었던 사상이기도 하다. 하늘의 신성한 뜻이 내린 사람 또는 받은 사람이 유교에서 말하는 성인(聖人)이다." "명나라 왕양명의 제자들은 〈온 거리가 성인으로 가득하다〉 하였다. 이는 최제우의 〈민 누구나 요순(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말과 아주 가깝다."(559)


"백호와 다산의 정치신학적 국체관은 유럽근대 초입의 절대주의 사상의 근거가 되었던 '정치신학(政治神學)'과 흡사하다. 그러나 백호와 다산의 정치신학적 국체관은 근대적 주권론의 시각에서 보면 아직 미완성이다. 신성한 군주만 있을 뿐, 신성한 인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신성한 인민이 등장하면서 정치신학은 점차 근대 공화주의와 민주주의로 전환해간다. 〈국가주권(the sovereign, sovereignty)의 신성한 몸체의 주체가 군주에서 인민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동학은 바로 그 '신성한 인민'을 창조했던 것이 아닐까?" "동학군의 정치관은 최소한 백호-다산이 꿈꾸었고 정조가 어느 정도 실행해 보였던 능동적인 유교정치를 의미하고, 여기에는 이미 근대적 정치로 향하는 동인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봉기한 동학군 자신이 새로운 정치적 힘, 능동적 정치의 몸체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럼으로써 초기근대의 절대주의적 정치신학을 넘어 근대적 인민주권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565-7)


14장 결론: 21세기 문명의 흐름과 유교의 재발견


"중층근대성론은 근대성의 중층 구성을 말했다. 여기서 '중층'은 비동시적인 것들의 '병존'과는 크게 다르다. 먼저 중층근대성론은 근대성의 세 층위, 즉 원형근대성, 식민-피식민근대성, 그리고 지구근대성, 그 어느 것도 비동시적이라고, 서로 다른 시간이라고 하지 않는다. 모두가 동시에 존재하는 하나다. 서로 삼투되고 절합(切合, articulate)된 하나의 전체로만 이 시점의 근대성, 근대가 존재하고 진행하고 있다." "유교적 자산은 이미 오늘 이 공간 안에 도착하여 중층근대의 전체 구성 안으로 들어와 있다. 그래서 근대를 넘어서야 한다고 하든, 또는 근대가 더욱 심화되어야 한다고 하든, 그것은 중층근대 속에 녹아 있는 유교적 자산을 동시에 딛고 넘어설 때 비로소 가능하다. 우리 현실에서 유교만 잘라내서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은 단순히 시공의 직관, 과학의 상식에 위배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 배경에는 더 깊은 '윤리적 문제'가 있다. 그것은 시간에 대한 차별 문제다."(574-5)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의 차이란 관측자의 위치나 운동 속도에 따른 상대적 차이일 뿐이다. 그 차이는 인간사에서 부단히 상쇄되는 극미량의 차이일 뿐이다." "인류문명사에는 늘 상대적인 주도 세력이 있어왔다. 이 주도 세력은 늘 바뀌어왔고, 주도 세력과 그렇지 않은 세력 간의 차이는 그다지 현격하지 않았다. 그 차이가 두드러지게, 폭발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이후다. 유럽의 독주, 세계 식민지화가 진행되었다. 운동 속도에 따른 시간의 상대적인 차이를 절대 시간의 차이라도 되는 것처럼 왜곡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서로 다른 시간에 살 뿐 아니라, 서로 질적으로 다른 창조물로 생각했다. 나는 축복받은 인간, 문명인이고, 저들은 저주받은 야만인, 비인간이라 보았다. 문명인과 야만인이 사는 공간은 천국과 지옥처럼 질적으로 다르다. 시간 역시 꼭 같다. 그러나 하늘은 수많은 타인을 지옥에 떠밀어놓고 홀로 승천하는 천사를 결코 반기지 않으신다."(578)


에필로그: 동아시아의 여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적 - 1606-1923 호구기록으로 본 조선의 문화사
손병규 지음 / 휴머니스트 / 200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롤로그 그리 오래지 않은 전통(傳統)


"조선시대 이전부터 현재까지 한국에서는 줄곧 호적을 작성해왔다. 식민지 초기 민적까지는 동거하며 경제생활을 함께 하는 자들이 '현주소'로 기재되었다. 이에 반해 현재의 호적은 혼인·출산 및 양자결연으로 맺어지는 가족이 거주·이동을 불문하고 본적(本籍)으로 기재된다. 호적의 이러한 특징은 식민지 당국에 의해 1920년대에 제도적으로 확립되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두 가지 모두 주민등록제도라 할 수 있지만, 조선시대의 호적과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호적은 사실 이름이 같을 뿐, 가족을 파악하는 방법은 서로 달랐다." "대한제국기의 호적은 구래의 신분제적 인민파악을 포기하는 대신에 호의 대표자를 '호주'라 명시하여 호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호주 한 사람에게 한정하였다. 나아가 식민지시기의 호적은 가족 자체를 호로 파악하면서 남성 연장자를 유일한 호주로 내세웠다. 호적상의 기재양식으로 볼 때, 가장이 권위를 갖는 '가부장제적' 틀은 근대사회로 다가갈수록 더욱 선명한 모습을 드러낸다."(16-7)


1부 호적을 찾아서


"동아시아의 전제국가는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것이 없고, 영토의 경계 내에 왕의 신하─혹은 백성─가 아닌 자가 없다[普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라는 통치이념에 기초하여 성립되었다. 천자 혹은 왕은 지배질서의 꼭대기에 서서 영역 내의 모든 토지와 인민을 왕권으로 상징되는 전제국가에 복속시켰으며, 왕의 백성은 왕의 땅을 골고루 나누어 받아 삶을 영위하는 대신에 그 은혜에 보답하여 왕에게 생산물을 바치거나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호적은 이러한 왕도사상의 통치이념에 입각하여 작성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고구려 고국천왕(故國川王)이 관의 곡식[官穀]을 내어 백성 가구(家口_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등적으로 빌려주고[賑貸], 추수 후에 관에 환납케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조선시대의 환곡(還穀)과 마찬가지로 조사된 호구의 규모에 따라 진휼하였음을 보여준다. 백제에도 점구부(點口部)라는 부서가 있어서 국가의 호구파악이 제도화되었음을 짐작케 한다."(27-8)


"『고려사(高麗史)』는 「식화지(食貨志)」에 호구조항을 별도로 설정하여 인종 13년(1135) 이후의 호적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 첫머리가 〈나이 16세에 '정'이 되어 비로소 국역에 복무하며, 60세에는 '노'가 되어 그 역을 면제받는다. 주·군 등의 지방행정관청은 매년 호구를 헤아려서 호부에 보고하는데, 징병과 요역은 호적에 기초하여 차출하는 것이 원칙이다〉로 시작된다. 징병과 노동력 차출이 호적을 작성하는 주요한 목적이었던 것이다. 한편, 「식화지」의 전제(田制)에는 전국의 토지를 '정'을 단위로 분급하는 제도가 나와 있다. 〈토지를 직역에 따라 고르게 분급하여 백성이 생계를 꾸리게 하고 국가의 재정에 사용하도록〉 한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직역(職役)'이란 관직과 군역을 포함하여 국가의 공공업무를 수행하는 국역을 말한다. 또한 주인이 없는 땅은 직역이 없는 자로 하여금 〈호를 세워서 국역에 충당〉 함으로써 배분되었다. 토지배분의 근거가 되는 직역이 호를 단위로 설정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31)


"호적은 실재하는 주민을 가족관계에 기초하여 등재하는 주민등록이다. 여기에 부계와 모계의 계보를 기재하는 호적양식은 한국 이외의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중국 청대의 특수관할지역 호적인 『한군팔기인정호구책』에 남성 호주 한 사람에 한해 부와 조의 이름이 적힌 것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고려시대 이후 한국호적에 사조─호주부부의 사조(四祖), 즉 부·조·증조·외조(父·祖·曾祖·外祖)의 인적사항을 지칭한다─를 기재한 것은, 당말 이후 중국에서는 의미를 상실해 간 직역제와 노비제(奴婢制)가 한국에서는 고려시대 이후에도 계속해서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고려왕조는 직역에 따른 토지와 노비의 배분을 제도적으로 유지하였으며, 과거응시와 관직임용시에도 직역과 신분을 확인하였다. 양반 신분에 해당하는 자의 호적에 호주의 직역과 함께 호주부부의 '세계(世系)'를 기록하도록 하였는데, 문종 9년(1055)에는 호적에 이 세계를 등록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 과거응시를 제한하기도 하였다."(34-5)


"조선 초기의 호적은 고려시대의 호적과 같이 족보 등에 기록되어 있으며, 호적의 양식도 고려의 호적양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 지역의 호적을 책자로 묶은 호적장부 원본으로는 1606년의 『산음장적(山陰帳籍)』이 현존하는 최고(古)의 것이다." "조선 후기의 호적은, 고려시대의 양반호적이 부계나 모계의 세계를 번잡스럽게 기록한 것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주호부부에게만 사조를 기재하고 그 이상의 사조기록은 생략하였다. 조선 전기를 거치며 양반에게 주어지던 신분적인 특권이 위축되어 갔으며, 관직자는 국가의 공공업무를 수행하는 직역자의 하나로 존재하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는 양인이면 누구나 호적에 주호부부의 사조만 기재하는 것으로 일률화되었으며, 노비의 경우에는 신분적 귀속을 밝히기 위해 부모와 소유주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주호부부에게 사조를 기록하는 양식은 조선시대 말기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신분제도가 여전히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9-41)


"1675년에 다섯 호를 하나의 통(統)으로 묶는 「오가통사목(五家統事目)」이 반포됨으로써 이후의 호적대장에는 통호제도가 도입되었다. 다섯 호를 1통으로 묶고 통마다 통주(統主)를 두는 제도는 이미 조선 초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호적에는 그러한 통호제도가 적용되지 않고 있었다." "1678년에 작성된 『경상도 단성현 무오식년 호적대장』부터는 통번을 주어 다섯 호를 1통으로 편제하고 통마다 통수(統首)를 두었다." "또한 단성현 호적대장에 '신호(新戶)'라 하여 새롭게 등재되는 호가 대거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호구파악이 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임란과 호란 양란 이후 국가통치체제를 재정비하면서 17세기 초의 호적상에 대폭 감소했던 호구수를 이전 단계의 수치로 회복시키고 나아가 그 수준을 능가하는 증가를 도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중앙정부가 지방주민을 파악한 결과 드러나는 호구수일 뿐, 현실적으로 인구가 증가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41-2)


2부 조선의 주민등록


"신등면 단계의 안동 권씨 동계공파 종택에서 특이한 형태의 '준호구(准戶口)'를 발견하였다. 준호구는 흔히 '호구단자(戶口單子)'로 통칭되기도 하는데, 엄밀히 말해서 양자는 다르다. 지방애서는 군현마다 행정구역내 주민들에게 호구단자를 내게 하여 우선 면리별로 모았다. 면리별로 모은 호구단자를 '호적중초(戶籍中草)'라 하고 여기에 기초하여 다시 군현내 면리 전체를 포함하는 장부로서 '호적대장(戶籍大帳)'을 만든다. '준호구'는 주민이 호구등재상황을 확인하려 할 때, 이 호적대장에 준하여 관에서 발급하는 문서이다. 따라서 호구단자는 호적을 작성하는 첫 단계의 문서이고, 준호구는 호적작성의 결과를 증빙하는 마지막 단계의 문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호구단자를 받아 호구장부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호적대장에 기재될 결과를 이 호구단자에다가 직접 수정하여 돌려주기도 한다. 호구단자가 준호구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양자를 구별하지 않고 그저 '호구단자'라고 통칭하기도 한다."(73)


"권두망 호의 두 가지 준호구 가운데 하나는 권두망 부부와 세 명의 자식, 권두망이 소유한 노비들을 기록한 것이다(준호구A). 다른 하나는 권두망의 둘째 아들이 권덕형의 신상만을 기록한 것이다(준호구B)." "준호구A의 호적에는 호의 대표자인 권두망과 처 이씨, 솔하 자식인 덕형과 안형, 그리고 밑으로 노비들이 등재되어 있다." "솔하 노비에게는 이름과 나이, 출생 간지를 기재하고 사조를 다 채우지는 않더라도 부모의 이름과 함께 부모의 신분을 기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종모법(從母法)'이라 하여 노비가 원칙적으로 어미의 주인에게 귀속된다. 노비에게 부모를 기재하는 것은 노비의 소유관계를 분명히 하려 한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앞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은 노비가 호의 일원으로 등재되었다는 사실이다. 노비가 '호'라고 하는 '법제로서의 가족'에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등재된 점은, 조선시대 호적의 호가 근대 이후의 호나 가족과 확연히 다른 개념임을 보여주는 부분이다."(75, 79-80)


"호적작성에 관한 조선시대의 법률은 대단히 엄격하였다. 일호일구(一戶一口)라도 빠진 것이 발견되면 해당 주호는 물론, 수령 이하 호적작성에 관여했던 자들을 엄중히 처벌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중앙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제시한 원칙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는 호구수의 증감이 있더라도 지역 단위로 내려오던 수치를 크게 넘나들지 않았다. 정약용(1762~1836)도 모든 호구를 파악하는 '핵법'과 지역마다 주민의 납세능력에 따라 호구수를 조절하는 '관법'이 있다고 하여, 이것을 호적작성의 이원적인 원칙으로 이해하였다. 식년(3년)마다 작성하여 중앙으로 올리는 호적에는 사실상 '관법'이 적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식년마다 호구조정에 따라 호적장부에 새롭게 첨가되거나 호적장부에서 빠지는 호가 생기는데, 호적장부에서 빠지는 호를 '낙호(落戶)'라고 한다. 낙호가 되는 데에도 돈을 내야 했다. 낙호로부터 거둔 재화는 호적작성과 공동납부를 운영하는 비용으로 쓰였다."(96-7)


"족보는 가계(家系) 계승에 있어 혈연적인 부자관계보다 양자를 통한 부자관계를 중시한다고 할 수 있다. 이때의 '부(父)'는 생부(生父)가 아닌 계부(繼父), 즉 '생물학적 부'가 아닌 '사회학적 부'인 셈이다." "권두망 가계보다 범위가 넓은 권시준 계파를 살펴보면, 16~19세기에 출생한 남성이 대략 2,700여 명이며 이 가운데 계자로 기재된 자는 370여 명이다. 17세기 후반 이후로 10명에 한두 명은 계자인 셈이다." "가능한 한 가까운 혈연 안에서 양자를 취하려는 경향도 계속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계자 이외에 손자나 증손을 계손(系孫), 계증손(系曾孫)으로 세우는 경우도 생겼다. 또한 생부와 계부, 생부와 조부, 생부와 증조부의 계보를 동시에 잇는 '양가봉사(兩家奉祀)'도 나타났다. 계자를 확정하는 시기가 늦어지더라도 반드시 후계를 연결하려 하였으며, 되도록이면 가까운 혈연에서 연거푸 계자를 세우고 급기야 부나 조와 함께 숙부나 종조(從祖)의 계보까지 잇게 함으로써 후계가 단절되는 상황을 방지했다."(107, 113-5)


"족보에는 정실(正室) 배우자와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적자녀(嫡子女)를 중심으로 계보를 기록한다. 측실(側室)은 족보에 등재되지 않으며, 이들이 낳은 첩자녀(妾子女)도 족보등재에 소홀하였다. 첩자녀를 등재할 때에는 적자녀와 구별하기 위해 '서자(庶子)' 혹은 '서녀(庶女)'라 표시한 뒤 당대나 2세에 한해 등재할 뿐, 그 후의 계보는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나 후대의 족보 중에는 첩자녀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명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후손의 계보도 대대로 등재하는 경우가 있다. 이들 계보는 이 시기에 이미 서파가 아니라 적파로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인 첩에게서 낳은 자식을 '서자녀(庶子女)'라 하고, 천인 즉 비(婢) 출신 첩에게서 낳은 자식을 '얼자녀(孼子女)'라 하며, 이들 모두를 '서얼(庶孼)'이라 통칭한다. 족보에 등재된 첩자녀는 대부분 서자녀이며, 얼자녀는 족보등재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호적에는 이 서얼자녀와 그 후손들이 기록에서 배제되지 않고 적자녀와 나란히 등재되었다."(133)


"양반들에게 혼인은 가문이라는 사회집단 간의 교류를 의미한다. 이때 여러 가지 기준을 만들어 집안마다 차등을 두었으니, 이것을 '반격(班格)'이라 한다. 혼사(婚事)는 두 가문의 격이 맞아야 했다. 하혼, 상혼이라 하여 어느 한 쪽의 격이 낮고 높음을 따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같은 양반가문의 혼인관계에서 두 가지 경향을 감지할 수 있다. 반격을 맞추기 위해 혼인처를 한정하는 경향과 반격의 조건을 조정하면서 혼인네트워크를 확대하는 경향이 그것이다. 전자는 (일정 지역 내에서) 한 집안과 중복된 혼인관계를 맺는 경향이다." "한편, 계층적 결합을 위해 혼인관계를 지역적으로 한정시키고 그 내부의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반격을 맞추고자 하나, 혼기 찬 모든 자식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며, 반드시 그럴 필요도 없었다. 가문 내에 몇몇만 통혼을 하여도 곧바로 지역 주도세력들의 혼인네트워크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안동 권씨 가문도 교류관계를 지역 내외, 반격 내외로 확산시키고 있었다."(139-41)


"1750년 권덕형의 호적에는 서자가 마침내 '유학'을 직역명으로 써서 호적상으로는 적자부부와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에도 얼자는 여전히 '업유'를 직역명으로 쓰고 그의 처도 여전히 '성'으로 호칭되었다. 얼자부부가 서자부부와 같이 호적기재상 적자부부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그들이 사망한 이후의 일이다. 1759년의 호적대장에는 얼자부부가 사망하고 대신 그들의 아들이 주호로서 호를 승계하고 있다. '업유'라는 직역명을 사용하던 얼자와 그의 처부, 즉 장인은 아들의 사조기록에 모두 '학생(學生)'으로 기재되었다. '학생'이란 '유학'을 직역명으로 사용하던 자가 사망하였을 때 붙이는 명칭이다." "서얼 본인과 그 처뿐만 아니라, 그 후손이나 사조의 신분표기도 한 단계 높아진 것이다. 권덕형의 서얼부부는 18세기 전반기를 거치면서 호적상으로는 적자부부와 구별되지 않는 기재양식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적자의 후손들이 주도하여 작성한 족보에는 이들과 그 후손들이 끝내 등재되지 못하였다."(144-5)


# 유학(幼學) : 과거를 보기 위해 당분간 군역을 면제받은 자를 일컫는다. 그러나 과거를 보지도 않으면서 늙어 죽을 때까지 호적에 유학을 직역명으로 기재하는 자들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호의 대표자를 일반적으로 '주호(主戶)'라고 불렀다. 18세기에 반포된 호적작성원칙에는 주호승계에 관해 다음과 같은 원칙이 제시되어 있다. 〈과부로서 집안일을 주관하더라도 아들이 장성하면 아들을 주호로 삼는다.〉 여기서 '과부'는 남편이 사망하여 남편 대신 호적상 주호로 등재된 여성을 말한다. 이 주호승계의 원칙에는 여성이 주호로서 존재할 수 있지만 가능하면 남성을 주호로 세우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그러나 이 규정에서는 남편이 사망하면 그 처가 남편을 대신해 집안을 경영하는 현실도 엿볼 수 있다. 국가는 현실을 인지하고 여성이 호적에 호의 대표자로 등재되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들이 장성하여 호의 대표자로 호적에 등재되더라도 실제로는 그의 어머니가 집안일을 주도하였다. 호적작성원칙상의 규정과 달리 16세를 넘은 아들이 같은 호에 있어도 어머니가 계속해서 그 호의 대표자로 등재되는 현상은 이러한 사회현실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175-6)


3부 호적의 직역


"조선왕조는 국가 차원에서 민으로부터 두 가지 형태로 노동력을 징발하였다. 호를 단위로 인정을 징발하는 요역과 개별 인신에게 직역을 부과하는 신역이 그것이다. 그것을 아울러 국가의 역, 즉 국역(國役)이라 한다. 국역은 원칙적으로 양인에게 부과된다. 호적에 등재된 호구 자체와 개개의 직역은 모두 국역이라는 개념으로 파악되었다. 단성현의 호적에서는 향청 혹은 향교, 서원(書院)에 소속되어 그 기구의 역을 지는 자들의 명칭이 호적상의 직역으로 파악되었다. 이것은 향중의 역이 점차 호적상에 표면화되어 이중적인 역체제가 '국가의 역'으로 일원화되는 경향을 말해준다." "조선왕조의 통치체계는 중앙정부에 권력이 집중되는 관료제에 입각하면서도 자치적인 공공단체의 병존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통치체계 위에 중국에서 유래한 양천신분제와 국역제도를 얹어 놓았다. '역'에 대한 모호한 개념과 서로 다른 인식은 조선의 사회현실에서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193-4, 198)


"군역은 번을 서든 노역을 하든 아니면 군포를 바치든 간에 각 국가기관의 인적 재원으로 확보되었다. 그런데 중앙정부가 각 기관의 역종별 군액을 파악하고 통제하는 한, 군역은 중앙정부가 각 국가기관에 배당한 재원이라 할 수 있다. 각 국가기관은 지방에 거주하는 양인을 자기 기관에 소속시키고 그자에게서 군역을 징수하는 권리를 중앙정부로부터 위임받은 셈이다. 그러나 각 기관들은 중앙정부로부터 인정받은 군역 역종 외의 새로운 역종을 창설하거나 역종마다 배당된 군액을 넘어서서 자체적으로 군역을 확보하였다. 국가의 각종 권력기관은 군역자 총수에서 빠져나가는 궐액을 메우기가 어려워지자 이를 극복할 방법을 강구하였다. 부병하거나 노역을 담당한 군역자가 싼값에 다른 사람을 사서 군역을 대신케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는 데 급급한 소속기관들로서는 이러한 사실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국가기관 스스로가 군포의 부담을 줄여 군역자를 유인하기에 이르렀다."(208-9)


"본래 국역은 양인에게 부과되는 '양역(良役)'이 원칙이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노비가 호를 구성하고 군역을 지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에 굳이 양인의 군역을 운운하는 것에서도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반추할 수 있다." "숙종 초기에 호적조사를 강화하거나 군역을 확대적용하는 조치를 취한 것은 국가기관들의 군역확보 노력에 부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의 자의적인 활동을 일류적으로 통제하려는 중앙정부의 의도가 내재되어 있었다. 각 기관이 군역대상자 한사람 한사람의 부담능력을 따지는 게 아니라 군역부담을 낮추는 등의 방법을 써서 무작위로 군역자를 확보하는 상황에 대해, 중앙정부가 나서서 군역을 질 만한 가족인가를 조사하고 우선 양인으로 규정되는 자들을 군역에 충당토록 하였기 때문이다. 개개의 인민에게 양천신분과 국역이 선행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양역'정책을 거치면서 신분제가 적용되고 그 원칙이 재정립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210-2)


"각종 국가권력기관의 사모속(私募屬)은 군역의 정액작업과정에서 엄격히 금지되어 왔다. 그러나 일반 군역을 피해 자발적으로 서원에 입속하는 자들이 있었고, 서원은 이들을 안외의 원속으로 파악해 두고 수시로 관안의 액내 원속으로 확정해 받으면서 인적 재원의 총액을 유지할 수 있었다. 17세기 말부터 서원 소속의 양정에 정족수를 부여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18세기 중엽 마침내 중앙정부는 원속을 비롯한 '읍소속'에 대해 정족수를 부여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후 이들의 공식적인 수치가 증대한다. 중앙정부가 지방관청 산하 제기구의 자체적인 소속자 확보활동을 묵인하였기 때문이다. 중앙정부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활동이 정규의 액수로 공식화되어 전반적으로 파악될 수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인적 재원에 대한 파악을 중앙집권화하는 진로임에는 틀림이 없다. 역에 대한 지방자치적 운영과 중앙집권적 통제는 이러한 방식으로 상호 결합되어 조선 말기까지 지속되었다."(254)


"사노(私奴)는 전쟁시에 군역자의 궐액을 메우기 위해 예비적으로 파악될 뿐이었다. 1606년의 호적장부에는 사노로서 군역을 지는 자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후 중앙과 지방의 각종 국가기관이 사노를 기관에 소속시켜 인적 재원으로 확보하기 시작하였다. 군역자는 각종의 명칭으로 중앙기관과 지방군영, 지방관청에 소속되었다. 그들은 지역을 방위하는 병사로, 기관의 집무담당자로, 혹은 병사와 기관의 재정을 지원하는 자로 군역의 의무를 수행하였다. 이에 대해 중앙정부는 각종 국가기관들의 임의적인 군역자 액수 증설행위를 막았다." "사노에게 군역을 부과하는 기관은 주로 지방의 군사기관이었다. 양인은 우선적으로 중앙기관의 군역자로 소속되었기 때문에 지방군은 사노로써 부족한 군액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이후 지방군을 양인으로 확보하려는 정책이 시행되어 사노에게 지방군역을 부과하는 비율이 점차 감소하기는 하였으나,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상당수의 사노 군역자가 존재하였다."(272)


"노비는 출생과 더불어 국가에 의해 법제적인 신분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노비에 대한 사적인 징수권이 항상 안정적으로 확보된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노비에게 국역이 부과되는 등, 국가권력의 통제로 말미암아 상전들은 노비의 신공수취를 위협받았다. 여기에 사노 군역자의 군역가가 양역자의 반으로 낮게 책정되면서 노비신공의 부담도 점차 낮아졌다. 군역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이것은 사노를 군역자로 확보하기 위한 방편이었으며, 상전의 입장에서는 불안한 노비소유권을 그나마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이었다. 사노 군역자의 입장에서는 군역부담과 노비신공부담을 합하면 양역자의 군역부담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노비와 양인이 이렇게 동등한 부담을 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양자의 경제적 상황이 크게 차이나지 않으며, 양천신분의 구분도 모호한 상황이었음을 의미한다. 사노 군역자를 둘러싸고 국가와 상전이 타협할 수 있었던 것이 단지 군역제도상의 문제에서 기인한 것만은 아니라는 뜻이다."(282)


"양반이라는 계층은 지역사회의 인식에 기초하여 설정되는 것으로, 전국규모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지역의 양반이 다른 지역에서도 반드시 양반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었다. 국가적·법제적인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양반가문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스스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야 했다. 그것은 일방적인 권력행사나 경제력만으로는 이룰 수 없었다." "19세기 호적은 실제로 양반이 증가한 것이 아니라 양반을 지향하는 자들이 증가한 결과를 보여준다. 호적상에 양반이 즐겨쓰는 직역명을 붙이고 그 호의 부녀에게 씨 호칭을 쓰며, 노비까지 한두 명 등재하는 호 구성이 일반화되어 갔다는 사실은 바로 양반흉내를 내는 호적기재가 정형화된 것임을 의미한다." "조선 전기에는 이런 양식이 상층계급에 한정된 호구양식이었는지 모르지만, 19세기에는 모든 인민에게 균등하게 적용될 수 있는 형식이 되어 갔다. 국가는 호적상의 직역기재를 통해 백성을 고르게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한 듯싶다."(304-5)


4부 호적의 변화와 가족


"대한제국성립 직전인 1896년 9월에 '호구조사규칙(戶口調査規則)'과 '호구조사세칙(戶口調査細則)'이 공표되어 실시되었다. 새로운 호구조사는 1897년 이후 1907년에 이르는 광무년간(光武年間) 내내 계속되었다. 따라서 호구조사규칙에 의거하여 작성된 호적표를 통칭 '광무호적(光武戶籍)'이라 한다." "호구조사규칙이나 세칙에서 표명하는 호구조사방법은, 호적표의 양식을 관에서 일률적으로 민에게 나누어주면 호마다 가족상황을 기록하여 관에 납부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호를 단위로 호구표를 작성한 뒤 중간에 지역 단위의 자치적인 호구조사를 거치지 않고 민이 직접 관에 신고토록 한 것은 소위 '실호실구(實戶實口)'를 파악한다는 호구파악의 대원칙을 재천명하는 동시에 현실화하려는 방안이었다. 이전부터 지역을 단위로 내려오던 호구수에 맞추어 등재 여부를 조정하고 일정한 통호번지수에 따라 하나의 장부에다가 연이어 호를 기재하는 종래의 호적기록관례와는 다른 방법이 제시된 것이다."(331-2)


"중앙정부는 호적표 작성을 통해 호주를 분명히 하고 한 호에 등재되는 구성원을 제한하려 하였다. 거기에는 호수를 늘리려는 호구정책상의 현실적인 의도가 깔려 있었다. 당시 재정과 관련된 개혁은 지방재정을 중앙으로 집중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정규의 조세와 더불어 지방에서 자율적으로 징수, 소비하던 모든 재원을 토지와 호에 부과하여 결호세(結戶稅)로 통일하고, 이를 국고수입으로 삼아 중앙재무기관이 일괄적으로 재분배하는 것이 그것이다. 호의 규모를 일정하게 제한하여 잘게 분쇄하고 그런 호를 가능한 한 늘리면서 호에 대한 책임을 호주 한사람에게 확정지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지역내 호구 총수를 맞추기 위한 기존의 호구편제와는 달리 생활공동체로서 실제로 동거하는 가족을 하나의 호로 파악하고자 했다. 즉 호세징수와 관련하여 호수를 최대한 늘리려는 의도에 앞서 현실상의 가족과 인구를 있는 그대로 조사하려 한 것이 갑오개혁의 호구파악방안이었다."(335-6)


"1909년 통감부는 (호적을 새로 명명한 이름인) '민적(民籍)'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민적법을 발표하여 새로운 민적조사를 시행하였다." "명치유신(明治維新) 직후인 1870년만 해도 일본은 종래에 지방마다 제각기 시행해 온 '인별장(人別帳)' '종문개장(宗門改帳)'에 준하여 일본 국내의 호구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폐번치현(廢藩置縣)'으로 지방행정구역을 중앙집권화한 뒤인 1872년에야 비로소 전국규모의 호적을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소위 '임신호적(壬申戶籍)'이다. 초기의 명치호적에는 화족(華族), 사족(士族)과 같은 족적(族籍)을 기록하였으나, 점차 모든 신분층에 일률적인 호구양식을 부여해 나갔다. 명치호적은 호구를 정기적으로 재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한번 작성한 후에는 호구의 변동사항만을 확인하는 장부였다. 호 구성원의 개별적인 변동사항이 발생할 때마다 수시로 호적을 갱신하였다. 조선의 민적은 이러한 명치호적의 양식에 준하여 작성되었다."(355-7)


"1910년대 중엽의 민적법은 전호주가 사망하였을 때에 한해서 호주가 게승되며 장남은 분가할 수 없다고 규정하게 된다. 이 규정은 호주승계 및 분가와 관련하여 식민지 당국이 잘못 인식한 조선의 관습에 근거를 두었다. 1914년 총독부 경무과 민적계에서 편찬한 『민적요람(民籍要覽)』에는 민적법상 '분가를 허락하지 않는 자'에 대한 조항에 상속과 관련된 조선의 관습이 언급되어 있다. 〈장자상속주의를 취하는 조선에서 장남은 가(家)를 상속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분가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나아가 장남 이외의 자라도 〈조선에서 여호주(女戶主)는 어쩔 수 없는 경우에 예외적으로 인정한 것이므로 여자의 분가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성은 분가에 의한 호주권의 취득, 즉 새로운 가족을 형성할 권리를 제한받은 것이다." "결국 민적법은 조선의 관습을 인정한다는 미명하에 관습의 이름을 빌려 일본의 호적법을 식민지 조선의 인민파악에 적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374-6)


"일본 명치정부의 호적은 1898년 이후 본적지주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명치 초기 호적법에는 호주가 호적변동사항에 대해 신고하는 것 외에 호주의 호에 대한 권리나 의무를 명시하지 않았다. 그런데 1898년에 민법이 성립함에 따라 사권(私權)으로서 호주의 권리와 의무가 분명해졌다. 이에 따르면, 호주는 가족 구성원의 입적 및 제적에 대한 권리와 거주이전에 대한 명령 및 거부권을 갖는다. 가족이 이에 따르지 않을 때에는 그에게 양육비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며, 제적시킬 수 있다. 이러한 일본 호적법의 전환과정이 그대로 조선의 민적법에 적용되어 간 것이다." "본적지주의에 근거한 호적제도는 유동적인 인구를 혈연적인 가족에 근거하여 파악함으로써 인구등재 누락을 최소화하는 인민파악방법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범죄자에 대한 파악이나 그 가족에 대한 연좌제 적용이 쉬워져 국가가 인민을 장악하기가 용이하다는 점에서 국가주의적 혹은 식민지적인 성격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376-9)


"여러 족보가 작성되던 1920년대는 이미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민에 대한 국가적 신분규정이 사라진 때이다. 그러나 동성동본의 혈연집단을 형성하려는 족보의 편찬은 전보다 더욱 활발해졌다. 당시의 출판물 가운데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족보와 개인의 문집(文集)이다. 문집은 개인의 한문학 및 성리학 수양과 동류배와의 교류를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도 상층계급이 갖추어야 할 교양의 하나였다." "조선 후기의 족보는 부계 구성원의 정통성을 증빙함으로써 혼인관계의 정당성을 표명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동일 신분이 아니라면 부계 구성원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족보에는 부모의 신분적 구별에 의거하여 등재 여부가 결정되었다. 족보등재의 결정요인인 신분은 부모의 혼인관계에 기초하여 구분되었다. 말하자면, 족보는 통혼권(通婚圈)이라 하는 정당한 혼인범위 내에서 신분집단을 형성하기 위한 증빙자료였던 셈이다."(393)


에필로그 호적의 현주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역을 상상하다 - 조선 연행사절단의 연행록을 중심으로
거자오광 지음, 이연승 옮김 / 그물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1장 문헌 개설: 조선과 일본 문헌 중의 근세 중국사료


"중국으로 여행을 갔던, 특히 명나라와 청나라로 출사했던 조선 사신들은 『조천록(朝天錄)』이나 『연행록(燕行錄)』과 같이 중국에 대한 수백 종의 상세한 기록을 남겼는데, 이 문헌들은 대체로 '당시 사람들이 당시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조선의 관원이나 문인들의 관찰 기록이고, '외국인의 시선'으로 중국을 바라본 것이며, 특히 봉황성(鳳凰城)에서 북경까지 가는 길에 있는 중국 북쪽 지역의 정치·사회·풍속·인정 등을 관찰하여 기록한 것이다." "조선인들은 17세기 중엽 이후 청나라 풍속의 변화를 관찰하였는데, 이는 중국 사회의 내재적 변화를 뚜렷하게 드러내준다. 그 중에서도 조선인들이 특히 주목하였던 풍속의 변화로는 '상례에 음악을 쓰는 것(喪禮用樂)', 남녀 구별이 없는 것(男女無別)', 부처와 관공(關公)을 공경하여 제사지내는 것', '관원과 문인들이 상업에 종사하는 것' 등이 있는데, 이런 현상들은 전통을 고수해 왔던 조선인들의 눈에는 청나라의 심각한 사회 변화로 여겨졌다."(29-30)


"물론 조선인들의 기록들 가운데 일부는 '보고 들은 것[見聞]'이 아니라 '기억'이다. 조선의 관원이나 문인들이 전통적 중화, 특히 명나라 왕조에 대한 동경과 선망을 '역사기억'으로 바꾸었고, 이를 청나라와 대비시켜서 과거의 '중화문명'에 대한 찬양과 현실의 '오랑캐'에 대한 경멸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하나의 '중국'은 두 개의 분열된 '중국'으로 변해버렸다." "이는 결국 이미 사라진 명나라를 빌어 현실의 청나라를 폄하한 셈이다. 당연히 이렇게 애증이 분명한 기록은 진실한 역사라고 할 수 없지만, 오히려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이야말로 진실한 역사였다. 한국의 역대 개인 문집에는 시가(詩歌)·서발문(序跋文)·여행기[遊記]와 서신 등이 많이 있는데, 그 안에는 모두 한·당·송·명의 한족 중국에 대한 과장된 상상과 기억이 담겨 있으며, 청나라에 대하여 다소 고집스러운 편견과 이유 없는 멸시가 실려 있다. 다만 이러한 상상의 배후에는 수많은 역사가 간직되어 있으며, 수많은 감정이 함축되어 있다."(31-4)


제2장 시대적 배경: 17세기 중엽 이후 중국에 대한 조선의 관찰과 상상


"중국 역사의 시야에서 보자면 정릉(定陵)에 잠들어 있는 명나라 신종, 즉 만력제 주익균(1563-1620)은 기념할 만한 군주는 아니다. 그러나 조선의 역사기록 안에서 만력제는 극히 숭고한 명예를 누리고 있다. 만력 20년(1592)부터 26년(1598)의 전쟁에서 만력제는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여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점령되는 것을 막았으니, 그의 조치가 조선왕조를 구했던 것이다. 따라서 정묘년(1627)과 임신년(1632)에 조선이 억지로 청조를 받을어야 했던 뒤에도 조선 조정의 관리들은 여전히 '신종 황제께서 재건해주신 나라[神宗皇帝再造之國]', '신종 황제께서 살려주신 백성[神宗皇帝所活之民]'이라고 불렀으며 끝까지 명나라의 연호를 고수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만력제는 조선에서 성대하고 장중한 제사를 받았다." "명 왕조에 대하여 조선의 선비들은 항상 광범위한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친밀감은 조선 왕국의 문화를 명나라의 상징적 문화와 매우 깊게 연결시켰다."(58-60)


"조선인들은 왜 한족들이 그렇게 쉽게 만청에 귀순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강희연간에 청나라를 방문했던 이의현(1669-1745)은 자칭 명나라의 대장 상유춘(1330-1369)과 상우춘의 후예라는 상옥곤을 만나서는 〈당신은 명나라의 자손인데, 어찌 옛 명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습니까?〉라고 직접적으로 물었다. 그러나 상옥곤은 〈이미 다른 사람(=청나라)을 따르고 있습니다(已順他人也)〉라고 간단히 대답하였다. 이는 명나라만을 인정하려고 고집하던 조선인들에게는 매우 의아한 일이었다. 건륭연간에 북경에 출사했던 홍대용도 여전히 조선 역사를 탐문하러 왔던 엄성(1733-1767)과 반정균(1743-?)에게 〈앞선 명나라는 우리나라에게 재조의 은혜가 있다는 것을 당신들은 알고 있습니까?〉라고 솔직하게 물었다. 이와 같이 청나라 치하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황당한 이야기가 조선 사신의 입에서 나오자, 두 청나라 문인들은 아무 말도 대꾸하지 못하였다."(76-8)


"결과적으로 청나라 시기에 조선 지식인들은 마음속으로 중국에 가는 것이 천자를 알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연경으로 출장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사신들의 여행기 명칭은 대체로 〈조천朝天〉이 아니라 〈연행燕行〉으로 바뀌었다. 그들이 비록 공손하게 청 조정에 가서 하례했다고 해도 마음속은 울분으로 가득 했다. 한태동(1646-1687)은 자신은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모욕을 당하고 싶지 않으나 국왕의 일이기 때문에 정말로 부득이하게 간 것이라고 하면서, 〈낯선 외국에서 활동하면서 날마다 나쁜 놈들을 만나 능욕과 핍박을 받으니 매우 고통스럽다. 비린내 나는 오랑캐 조정에서 개돼지 같은 놈들이 주는 것에 고맙다고 엎드려 절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고 정말로 부끄럽다〉고 하였다. 건륭·가경 연간에 이르러 비록 명나라가 멸망한 지 이미 백여 년이 지났지만, 조선의 '대명(大明)'에 대한 역사기억은 여전히 이처럼 또렷하였다."(80-1)


"조선 지식인들이 청나라 학술의 역량을 무시했던 것은 명으로부터 청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사상적, 문화적 입장이 일관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홍대용이 말했던 바와 같이 조선 사인들의 마음속에서 주자의 학문은 〈올바르며 치우침이 없고, 진실로 공맹의 정통을 잇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 사신들은 청나라 문인들이 『춘추』를 논의할 때, 주희의 주장을 따르지 않으면서 '끝내 화이내외(華夷內外)에 대한 논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을 보고 고의로 다음과 같은 이의를 제기하였다. 〈문장은 아름답다고 할 만하나 성인 공자께서 『춘추』를 지으신 것은 오직 상하의 구분과 내외의 구별을 위한 것입니다. 지금 그러한 말씀이 전혀 없으시니 본지를 잃으신 것이라 하겠습니다.〉 당시 고증학이 풍미하던 한족의 독서인들이 주희가 한대의 『시서(詩序)』를 폐기한 것은 옳지 않다고 비판하자, 조선 지식인들은 〈조선은 오직 주자의 주해를 알 뿐 그 밖의 것은 알지 못한다〉고 강경하게 밝혀 말했다."(94-5)


"만약 중화를 중심으로 하는 이 문화적 일체감이 '동아시아 문화공동체'의 존재를 잠시 유지시킬 수 있었다면, 모든 것은 17세기 이후에 변화하기 시작했다. 먼저 일본의 경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7년 천주교 선교사를 축출하라는 법령을 발포하고 일본을 '신국(神國)'이라고 선포했다." "많은 중국의 지식을 배운 도쿠가와 시대의 학자들에게 '화하(華夏)'와 '이적(夷狄)'은 더 이상 지리상의 공간에 의한 구분이 아니었다. 중세기 불교의 '천축(天竺)·진단(震旦)·본조(本朝=日本)'로부터 생겨난 3국의 정립(鼎立)이라는 관념은 이 시기가 되자 점차 대등하다는 의식을 발생시켰으며, 일본인들은 자아인식을 강화해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청나라가 명나라를 대신한 이후, 일본인들은 고대 중국의 '화이' 관념을 끌어들여서 소위 '일본형 화이 관념'을 형성함으로써, 유가중국(儒家中國)에 대항하는 신도일본(神道日本), 야만족의 청나라에 대항하는 진정한 중화 문화라는 관념을 형성하였다."(106-7)


"조선인들은 자신의 국가에 대하여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중화문화의 교양을 받아들이고 중국을 경모하며 기꺼이 중국의 번속이 되고자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민족의 성격 내부에 잠재된 자존의 사상이었다." "그러나 본래 오랑캐에 속했던 만주인이 중국에 들어와 주인이 되자, 조선인들은 억지로 유지해오던 문화공동체에 대한 일체감과 충성을 바꾸어버렸다. 따라서 조선 사신들이 청나라에 출사할 때 그들은 문화가 다른 이국으로 가는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조선 문인들의 눈에 비친 '중국'은 두 개로 변해 버렸다. 하나는 역사상 일찍이 빛났던 '명나라'였고, 다른 하나는 현실 속에서 이미 타락해버린 '청나라'였다. 역사상의 중국과 현실의 중국이 조선 사신들의 마음속에서 분열되어 다시는 중첩되지 않는 두 개가 되었다. 그들은 문화상으로는 전자를 따르고, 정치상으로는 후자에게 신복하게 되었으니 이는 동아시아 사상사와 문화사의 특이한 풍경이었다."(108-9)


제3장 나라를 떠나면서 고향을 그리워함: 압록강변의 감회


"17세기 중엽 명청 교체 이후에 각종 연행 사신들의 기록 안에는 고국을 떠나는 슬픔이 가득했던 것 같다. 민진원(閔鎭遠)은 〈강을 건널 때에 오랑캐의 산은 음산하고, 압룩강 물은 검푸르게 보였다. 어찌 고국을 떠나는 심정을 억누를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절구를 읊었다. 오랑캐의 산은 막막하게 둘러쳐 있고, 압록강은 가득히 깊구나. 산이든 물이든 어디를 간들 상심하지 않겠는가!〉 왜 〈어디를 간들 상심하지 않겠는가!(無虛不傷心)〉라고 했던 것일까? 고국을 떠나면 곧 타국에 들어가는데, 그 타국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이미 '오랑캐의 땅'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는 명청 교체 이전과 정말로 다르다. 명나라 숭정 12년(1639) 심열(沈悅)이라는 조선의 관원은 명나라에 출사하기 전 의주에서 통군정에 올라서 말하기를, 〈통군정에서 화이(華夷)의 경계를 보니, 산은 제왕의 땅과 이어져 있구나!〉라고 하였으니, 조선을 오랑캐[夷]라고 하고 명나라를 '중화문명[華]'이라고 여겼던 것이다."(123)


제4장 오삼계(吳三桂)는 결코 강백약(姜伯約)이 아니다!


"강희 12년(1673) 겨울 11월 21일, 오삼계는 운남(雲南)에서 군사를 일으켜 자칭 〈천하도초토병마대원수(天下都招討兵馬大元帥)〉라고 했다." "조선 사람들이 오삼계 『격문』의 자기 표창을 반드시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은 아니라 해도, 여전히 오삼계가 반청 의거를 일으킨 것이라고 과장되게 상상하였다. 사실상 이는 단지 복명에 대한 조선인들이 품었던 내면의 희망을 드러낸 것에 불과했다." "강희 18년(1679) 3월에 마침내 오삼계가 패배하고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조선인들도 차차 〈오삼계가 형산(衡山)의 남쪽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대주(大周)라고 하고 홍화(弘化)로 개원(改元)하였으나, 원래 주씨(朱氏)를 세운 일은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경거망동하지 않았음을 남몰래 축하하며 다행이라 여겼다. 왜냐하면 오삼계가 '반청복명(反淸復明)'을 위하여 와신상담했던 강백약(姜伯約)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고, 대역무도하게 황제가 되려고 참월했던 자였기 때문이다."(147, 152, 156)


"오삼계와 그의 부하들이 군사를 일으켰던 것은 반드시 고국이 그리워 명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러나 김석주의 다음으로 김창업이 강희 51년 청나라에 출사했을 때, 그는 〈세인들이 모두 다 죽여야 한다〉고 했던 오삼계가 〈산해관을 열어 청군을 중원으로 들인 것이 죄인지〉 여부에 대하여 의혹을 느꼈다. 당시에 〈황성(皇城)은 이미 함락되고, 황제는 사직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며, 천하는 이미 멸망했기 때문에〉 오삼계는 스스로를 지킬 수도 없었다. 더욱이 역적 이자성을 죽일 수도 없었다. 따라서 〈만약 오삼계가 헛되이 의리를 지키면서 청나라 군사와 힘을 합치지 않았다면, 결국 이자성에게 패배하고 청나라 군사는 스스로 산해관을 넘어왔을 것이니, 천하의 일에 무슨 보탬이 되었겠는가?〉라고 여겼다. 그러나 김창업은 여전히 오삼계의 가장 중요한 죄과는 〈대명의 종실을 세우지 않고 천하를 실망시켰으며, 스스로 황제를 참칭하다가 결국 패멸하여 명분과 절의를 상실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170-1)


"시세는 결국 인력보다 강하며, 세월은 기억을 마모시키기 마련이다. 강희 말년에는 조선 문인들도 더 이상 오삼계에게 그다지 동정심을 가지지 않았다. 일찍이 오삼계에 대하여 지대한 호감을 품었던 임본유 역시 청 황제의 새로운 정치가 〈관대하고 어질며 훌륭한 덕을 갖추었고, 종족을 화목하게 한다〉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번의 난이 평정된 지 60년이 지난 후, 이 사건은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차차 잊혀가고 있었고, 한족 문인이든 조선 문인이든 그들의 마음속에서 오삼계는 이미 '두 마음을 품은 신하'나 '역적'임이 자명하게 되었다. 조선 문인들과 청나라 조정의 평가도 이미 더 이상 충돌을 일으키지 않았다. 비록 노이점(1720-1788)이라는 조선의 문인은 오삼계를 떠올리면서 우연히 한 왕실을 회복하려다가 죽은 촉한의 명장 강유(姜維)를 연상하였지만, 그 역시 오삼계는 강백약에 비할 수 없다고 했는데, 왜냐하면 오삼계는 〈결국은 산해관의 문을 열어 적을 들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173-4)


제5장 이역의 슬픔을 상상함: 200년 간 계문란에 대한 조선 사신들의 멀고 먼 상상


"대다수의 조선 사신들이 의식하든 못하든, 모두 계문란의 이야기를─강남 여자 계문란이 북방 오랑캐 땅으로 끌려가게 됨을 한탄하며 지었다는 제시(題詩)로서, 풍윤현(豊潤縣) 부근의 진자점(榛子店)이라는 객점 근방에 있는 한 인가의 담장에 쓰여있었다고 전해진다─명청 교체기의 역사적 단편이라고 상상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한 상상은 역사가 되어갔다. 그런데 이 무오년이 후금의 천명(天命) 3년, 즉 명나라 만력 46년(1618)이 아니라면, 이는 바로 청나라 강희 17년(1678)의 일이다. 그러나 만력 46년, 명나라는 산해관을 지배하고 있었으니 만주인들은 강남 여인을 심양으로 붙잡아갈 수가 없었을 것이며, 강희 17년은 명나라가 이미 멸망했고 청나라 사람들은 이미 명나라 사람과 북경 부근에서 싸울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면 계문란을 명청 교체기에 고통을 받은 사람으로 상상하거나, 이 시를 명청 교체기의 비극을 기록한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무언가 적절하지 않은 셈이 된다."(189-90)


"사실 사정은 매우 분명했다. 강희 22년(1683) 김석주가 진자점을 지나면서 이 시를 보았을 때, 그의 부사 유(柳)씨가 이미 이 집의 주인 여자에게 인사를 건네면서 물었고, 〈(주인 여자는) 5-6년 전에, 심양의 왕장경이 백금 70냥으로 이 여인을 사서, 이곳을 지나갔다고 상세히 이야기해주었다〉라고 하였다. 5-6년 전이면 마침 강희 17-8년 전후가 되며, 이때 붙잡힌 계문란은 아마도 바로 오삼계에 속했던 가속의 일부였을 것이다." "다만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 고집스러운 조선인이 강남 여인 계문란을 명나라 때 수재의 처로 만들었고, 만주(滿州)의 왕장경은 70냥의 백금으로 그녀를 사서 심양으로 데려온 사람으로 만들었으며, 이 사건을 명청 교체기 오랑캐가 중화를 어지럽힌 데에서 비롯된 비극으로 상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이 시가 있든 없든, 조선 사신들은 여전히 계문란 제시를 빌어 중국의 슬픔을 상상하였고, 여러 가지의 화답시를 가지고 만주인들에 대한 멸시를 드러내었다."(191-4)


"계문란에 대한 조선인들의 동정은 점차 약간의 불만으로 바뀌었다. 최초로 불만을 드러냈던 것은 강희 35년(1696) 북경에 출사했던 사은부사 홍만조(洪萬朝)였는데, 그는 『조계문란(嘲季文蘭)』에서 계문란은 진자점에서 오욕을 당했으나, 그저 담벼락에 〈영원히 마음이 아프다[萬古傷心]〉는 네 글자와 시 한 수를 썼을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문화적 소양과 시적인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녀가 독서하여 소양을 갖춘 여성임을 생각할 때, 반드시 취하고 버리는 구분을 깊이 살폈어야 했으나, 살기를 도모하여 모욕을 참았으니 끝내 뛰어내려 자진하는 절개는 본받지 못했다〉고 하면서, 이는 정말 애석한 일이라고 하였다." "조선인들에게 계문란은 이미 민족주의적인 이야기일 뿐 아니라 하나의 문화전통적 부호가 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계문란의 제시는 만이(蠻夷)가 중화를 짓밟았음을 규탄하는 것이고, 계문란이 자결했다면 그 전통의 가치를 더욱 분명히 드러냈으리라는 것이다."(199-200, 203-4)


제6장 밝은 촛불은 이유 없이 누구를 위해 사르는가?: 청대 조선의 조공사신 눈에 비친 계주의 안록산 묘와 양귀비 묘


"계주성 밖에 있던 안록산과 양귀비의 묘에 대한 관찰에서 조선인들의 역사 기억과 현실적 해석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조선인들은 우선 명 왕조의 문명을 떠올렸고, 이 문명이 실추된 것을 만주족의 탓으로 돌렸으며, 당시 이미 이적의 손아귀에 떨어졌던 중국에 대한 경멸감이 가득하였다. 그들은 한족 중국인들을 대신하여 이역의 슬픔을 상상하였고, 객관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인 태도로 이 기이한 제사를 해석하면서, 모종의 역사적 암시를 감추고 일말의 동정심을 가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경멸감과 동정심이 교차되면서, 그들은 옳은 일에 있어서는 결코 사양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스스로 중화문명의 정종(正宗)이 되었다고 상상했다. 이는 이상할 것이 없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대체했던 이래 조선인들은 일찍이 〈오늘날 천하에서 중화의 제도는 오직 우리나라에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조선인들은 당시 중국의 모든 기괴한 현상들을 보면서 그 탓을 모두 청나라에 돌렸다."(231-2)


제7장 명나라의 의관은 어디에 있는가?


"조선 사신들이 조선의 정식 의관, 즉 명대의 의관을 입고 북경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청나라 수도의 기이한 구경거리가 되었다. 청나라의 문화인들은 이미 한족의 의관이 익숙하지 않았기에, 낯설기만 한 것이 아니라 호기심도 느끼게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조선인들은 의복과 모자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유구와 안남의 사신들을 대면하면서 마치 높은 지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듯 스스로 정통이라고 여기는 오만함을 느꼈고, 일본인들에 대해서는 더욱이 자신의 복장이 명나라의 의관에 가깝다고 하여 자부심을 느꼈던 것이다. 이미 복색을 바꾼 청나라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들은 마음속 깊이 경시하였다. 그들은 청나라에 가면 늘 시험하듯이 명나라의 의관이 어떠했는지를 물었다. 이때 외국 사절들의 복장은 한족 중국인들로 하여금 지난 일을 떠올리면서 수치심을 느끼게 하였고, 명대의 의관을 한 조선인들은 한족의 전통적 의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상당히 자랑스러워하였다."(236, 259)


제8장 당자(堂子)에서는 혹시 등(鄧)장군을 제사하는가?


"산해관의 외부에서 떨쳐 일어났던 만주인들은 본래 샤머니즘을 신봉했기 때문에, 늘 제단을 마련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정실(靜室)에서 여러 신들의 패위(牌位)에 제사하는 전통이 있었다. 중요한 날에는 늘 그랬듯이 제사 의식이 성대하게 진행되었는데, 특히 정원 초하루가 그러했다." "이는 본래 만족의 의식이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만족의 황제가 전면적으로 '중국'을 상징하는 황제가 되자 한족의 전통적인 제사를 정식 규범으로 수용하고, 〈상주(商周)의 제도와 마치 부절을 합한 것 같다〉고 해석하고자 했으며, 그런 후에 비로소 〈억만 세의 바탕을 이어간다(綿億萬載之基)〉고 하였다." "조선 사신 서문중(徐文重)과 민정중(閔鼎重)이 이러한 기이한 현상을 목도했던 강희제 시대에 당자 제사는 정월 초하루에 이미 고정된 절차가 되어 있었다." "조선의 사신들은 줄곧 어떤 편견을 가지고 이것이 무엇인지, 왜 이렇게 비밀스러운 것인지, 또 왜 그렇게 바쁘게 지나가는지를 추측하였다."(276-7, 280-2)


"강희 9년(1670). 민정중(閔鼎重)은 청조의 황제가 일찍 가서 제사지내는 것은 등 장군인데, 등 장군은 청조와 맞섰던 명나라의 장군이고 사후에는 여귀가 되어, 〈그를 만나는 자들은 모두 죽고, 호인은 크게 놀라 두려워하게 되므로 묘를 세워 기도하는 것이다. 만주족이 연경에 들어간 후에도 역시 그만 두지 못하고 묘를 세워 존숭하고 받든다〉라고 이미 기록한 바 있다. 이러한 소문은 줄곧 지속되었으며, 점점 더 심하게 과장되어갔던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자기가 반만(反滿) 입장을 공개할 수 있는 만청시대가 되자, 조선인들은 점차 '당자'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반면, 한족 중국인들은 오히려 점차 '당자'의 역사적 상상으로 되돌아갔으니, 격렬한 민족 정서는 한족 중국인들과 조선인들로 하여금 입장을 바꾸게 만들었던 것 같다. 한족 중국인들은 〈당자에서는 등 장군을 제사 지낸다〉는 옛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내어 청 황제를 조롱했다."(284-5, 293)


제9장 뜻밖에 오랑캐의 수도에서 한족 문화의 위의(威儀)를 다시 보다: 북경에서의 연희(演戱)에 대한 조선 사신들의 관찰과 상상


"건륭과 가경, 그리고 도광연간(1821-1850)의 북경은 정말로 번화한 도시였다. 산해관 밖의 소슬함과 한기를 거친 후, 조선 사신들이 산해관을 지나 풍윤(豊潤)·소주(蘇州)·통주(通州)를 거쳐서 동직문(東直門)·조양문(朝陽門)과 동악묘(東岳廟)를 통하여 북경 성으로 들어오자, 오색이 찬란하여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의 풍경이 시작되었다. 어쩌면 이것은 일종의 '문화적 충격'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일기를 보면, 북경에서 가장 그들의 주의를 끌었던 것은 문화적 풍경이었다. 첫째가 유리창(琉璃廠) 책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다양한 서적이고, 둘째가 천주당의 서양인들 및 천주당에 있는 회화와 신기한 물건들이었으며, 셋째는 박학다식한 문화인들이었고, 넷째는 거리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마술[幻戱]', 즉 눈속임을 하는 절묘한 기교들이었다. 그밖에 눈에 띄는 것으로는 북경성 안의 연희 공연이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이는 단지 상연되는 연희일 뿐 아니라 중국을 관찰하는 자료가 되었다."(300)


제10장 이웃집의 낯선 사람: 청나라 중기의 조선이 서양을 대면하다


"관례대로라면 청나라는 조선 사신들과 서양 선교사들이 마음대로 접촉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금령은 금령일 뿐이었고, 호기심 많은 조선인들은 항상 스스로 천주당에 갔는데, 선교에 뜻이 있었던 서양인들 역시 언제나 주동적으로 이 청나라 동쪽 이웃의 사절들을 접촉하였다. 그들은 필담을 나누었을 뿐 아니라 서로 예물도 주고받았다. 강희로부터 옹정연간에 조선 사신들은 선교사로부터 각종 예물과 서적을 얻었고, 예의상 선물을 받으면 답례를 하는 이런 습관을 이후에도 여전히 이어져 갔다." "만남이 거듭되고 필담이 이어짐에 따라 조선인들은 얼마간 〈하늘 밖에 또 다른 하늘이 있는 것처럼, 알지 못하던 새로운 세계가 끝없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화의 밖에 또 다른 세계가 있으니, 이제 조선인들도 이런 이방에 대하여 호감을 갖게 되었다." "바로 이때 서양인과 조선인들이 멀리서 서로 바라보면서 가졌던 호감은 천주교가 조선으로 전파하면서 결국 막바지로 치닫게 되었다."(354-7)


"가경 10년(1805), 그때까지 천주교도들의 활동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청 조정 역시 마침내 상유(上諭)를 반포하여 서양인들이 서적을 간행하고 전교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이제 조선왕국과 청나라는 선교사에 대하여 외적인 국가의 문호와 내적인 마음의 문을 포함하여 전면적으로 문호를 닫았고, 그들의 선교 활동에 대해서도 전대미문의 엄격한 금지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는 단지 일시적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견고한 선박과 맹렬한 화포를 앞세운 서양인들은 결국 얼마 후에 조선과 중국의 봉쇄를 타파하였으니, 너희들이 국문을 잠그면 우리는 억지로 열겠다는 식이었다. 이는 일본의 쇄국이 마침내 개국으로 변화되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60년 이후인 동치 5년(1866), 정사(正使) 유후조의 조수였던 조선의 사신은 북경에서 새로운 하나의 장면을 보게 되었다. 이때, 즉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의 수도 북경은 더 이상 선교사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서양인들도 천주당에만 거주하는 것이 아니었다."(365-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과 중화 - 조선이 꿈꾸고 상상한 세계와 문명 돌베개 한국학총서 17
배우성 지음 / 돌베개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부 '위대한 청나라'와 '문명의 계승자' 사이에서


"인조가 청 태종에게 고두叩頭의 예를 행함으로써 병자호란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후폭풍이 만만치 않았다. 오랑캐로 여기던 청나라에게 왕이 머리를 조아렸다는 사실에 조선의 선비들은 분노했다. 패전의 상처는 강요된 조형물로도 남았다. '삼전도비'로 더 많이 알려진 '대청황제공덕비'가 그것이다. 앞면은 만주문과 몽골문, 뒷면은 한문으로 되어 있는데, 병자호란 당시의 상황, 조선의 잘못과 청나라의 시혜 등에 관한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다. 글을 지은 사람은 이경석(1595~1671)이다." "이경석의 손자인 이하성은 1703년(숙종 29)에 올린 상소에서 비석의 제작 경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주상께서 타이르시기를, '이는 바로 나라의 존망存亡이 달린 일이다. 뒷날 자강自强하는 일은 오직 내 몫이다. 다만 마땅히 문자文字는 그들 뜻에 힘써 맞추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신의 조부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군주의 욕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일신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고 여겨 은인하며 명령을 받들었습니다.〉"(33-4)


"청나라 입장에서 보면 이 비석은 만몽한을 아우르는 제국의 상징물이자, 청나라가 조선에 시혜를 베풀었음을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강희제는 서양 선교사들을 동원해 중국 전역을 천문측량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지도를 편찬하게 했다. 그것이 바로 〈황여전람도〉다. 이 지도는 옹정제와 건륭제 때 계속 수정되었다. 이 도엽 중에는 조선 전도도 들어 있다. 청나라가 조선을 직접 정복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조선 전도에서 비각이 빠질 수는 없을 것이다. 강희제 때 편찬된 판본에는 한강가에 만주어로 버이bei라는 지명이 적혀 있다. (삼전도비를 가리키는) 비碑를 뜻하는 한어의 음가를 만주어로 음차한 것이다. 옹정제와 건륭제 때의 판본에는 한강가에 (삼전도 비각을 기리키는) 비정碑亭이 보인다." "비석을 본 조선 지식인들에게 남은 것은 청나라에 대한 적대감이었다. 18세기에 만들어진 20리 방안 군현지도집에서도, 김정호의 지도집에서도 비각의 존재가 선명하다."(63-5)


"1666년(현종 7), 노년의 김수홍(1601~1681)은 마지막 남은 소망 하나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예론을 주장하는 것이 예치가 구현된 세상에 관한 비전을 제시하는 일이라면, 지도를 펴내는 것은 과거에 예치가 구현된 땅과 역사를 기록하는 일이다. 김수홍의 입장에서 보면, 그 땅과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현실에서 그런  땅, 그런 역사를 지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예론과 지도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천하고금대총편람도〉라는 지도의 제목은 김수홍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았으며, 지도를 통해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를 말해준다. '천하'는 당시의 세계, '고금'은 옛날과 오늘날, 즉 역사를 뜻한다. '대총편람'은 '망라하여 살펴보겠다'는 뜻이다. 김수홍은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와 그 역사를 한 장의 도면에 그리려 했다." "그는 단순히 중원대륙과 그 주변을 공간적인 차원에서 보여주려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중원대륙의 역사 가운데 기억하고 싶은 장면이었다."(66-70)


"김수홍은 〈천하고금대총편람도〉와 〈조선팔도고금총란도〉에서 고금의 지명과 그 땅에서 나온 인물을 기록했다. 그런데 이 두 지도 어디에서도 청나라의 존재감을 읽어낼 수 없다. 〈천하고금대총편람도〉의 '고금'古今은 역사적 인물과 당대의 인물을 뜻하지만, 적어도 '今'은 명대를 넘어 청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천하고금대총편람도〉에서 중원대륙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강조된 곳은 조선이다." "28수가 비치는 땅은 중원대륙이고 그 중원대륙에 중화문화를 꽃피울 수 있는 문화적 원형질이 내재되어 있다면, 조선이 소중화 혹은 중화문화의 유일한 계승자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중원대륙과 한반도를 잇는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28수의 기미 분야에 해당하는 유주幽州가 조선의 역사적 영토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가장 강력한 연결고리가 된다. 조선이 고조선을 계승했다고 생각하는 조선 지식인이라면 이제 기미 분야의 조선을 소중화 혹은 중화문화의 유일한 계승자로 설명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80-2)


# 28수 : 적도 부근의 28개의 별자리


2부 지리와 풍토론은 어떻게 중화관을 형성했는가


"원 간섭기의 고려 지식인들은 몽골을 중국 혹은 중화라고 부르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들은 몽골이 중원대륙을 지배하고 유교문화를 계승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명나라가 대륙의 주인이 되면서 상황은 복잡해졌다." "여말선초 유학자 집단을 대표하는 정몽주조차 중국 혹은 중화를 말할 때 형세와 명분을 두루 고려했음을 감안한다면, 당시 관료들이 대부분 형세론적 화이관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다만 정몽주가 천명을 빌려 중화를 설명하는 방식은 기억할 가치가 있다." "정몽주의 논리에 따르면, 원나라가 '스스로 파천을 자초한 의롭지 못한 나라'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형세 때문은 아니다. 더 이상 중원대륙의 패자가 아니기 때문에 중화가 아닌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중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파천을 자초했다는 의미다. 중화는 천명을 받은 의로운 자의 몫인 것이다. 정몽주에게 천명과 명분은 결코 형세를 치장하는 도구만은 아니었다."(93-6)


"그렇다면 고려는 화이의 틀로 설명할 수 있는가. 고려시대의 다원적 천하관은 다음 두 가지를 논거로 삼고 있다. 하나는 소천하 단위별로 풍토와 기질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고대의 강역을 역사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인식이다. 문화적 자주성과 유구한 역사에 대한 인식이 다원적 천하관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주목할 점은 다원적 천하론자들이 자국을 소천하로 설정하는 과정에서 지덕地德, 즉 지기地氣의 작용을 긍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의 건국자들은 고려시대의 자주적 유신, 나아가 다원적 천하관의 소유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풍토와 기질의 차이, 역사 계승의식 등을 물려받았다. 그들은 고려시대의 자주적 유신 혹은 다원적 천하관의 소유자로부터 풍토와 기질의 차이, 유구한 역사에 대한 자부심, 지덕의 작용을 긍정하는 정서를 이어받는 한편, 모화주의자 또는 화이론적 천하관의 소유자로부터 명분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의 중요성을 배웠다."(99-100)


"조선은 해외海外의 나라인가 아닌가. 한글 창제 당시 거론된 논점이다. 정인지(1396~1478)는 풍토風土가 다른 문자(漢字)를 빌려 조선의 소리를 표현할 것이 아니라 자기 소리를 표현하는 문자, 풍토에 맞는 문자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은 중화의 예악과 문물을 추구하는 나라지만, '외국'外國의 소리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외국'의 문자를 가지는 것이 맞다는 주장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훈민정음은 '외국'의 소리로 '외국'의 글자를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창제된 것이다." "정인지의 풍토부동론은 조선이 '외국'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정인지가 말하는 '외국'은 '중국에 대한 외국'이다. '외국'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을 '외'外로 만드는 중심으로서 중국이 전제된다. 풍토의 차이로 인해 다른 어떤 선택을 한다 하더라도 조선이 '이적'이 아니라 '외국'인 한, 그 선택은 중국과 외국을 아우르는 보편문화의 테두리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124-6)


"홍대용(1731~1783)은 '화'와 '이'의 구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공자가 바다를 건너와 구이九夷의 땅에서 살았다면 화제華制를 써서 오랑캐의 습속을 변화시켜 주나라의 도를 역외域外에서 일으켰으리니, 내외의 구분과 존양의 뜻이 스스로 마땅히 역외춘추에 있었으리라.〉 공자가 구이에 와서 살았다면 역외춘추가 내內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은 〈인간의 노력에 따라 누구나 중화가 될 수 있다〉는 말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 주장이다. 그러나 그 안에도 전제가 있다. 내와 외는 구분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분되어 있다. 구이의 땅을 역외라고 말하는 것은 중원대륙을 구역九域 혹은 구주九州의 땅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는 이미 이런 구분법을 인정한 것이다. 역외의 인간은 다만 역외에서 춘추를 구현할 수 있을 뿐이다. 거꾸로 말하면, 춘추가 구현된 그 땅이 여전히 역외인 한 역외를 구역 혹은 구주의 땅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지리적 중화관과 풍토부동론의 흔적이 엿보이는 대목이다."(164)


"풍토부동론은 조선이 '해외의 나라' 혹은 '방외의 별국'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그런 지리적 위치 때문에 풍토가 중국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이 해외의 나라라는 사실을 늘 그런 방식으로 해석해야 할 이유는 없다. 조선이 '해외의 나라'임에도 소중화인 것은 그 풍토가 중국과 동일하기 때문이라는 논리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하영(1741~1812)은 중화를 '동일한 풍토와 규모의 차이'로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조선이 소중화라고 불린 것은 기본적으로 예악과 문물이 중화를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꼭 예악과 문물만 그런 것은 아니다. 산천의 풍기 또한 비슷한 점이 있다. 다만 대소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소론계 지식인 이종휘(1731~1797)의 눈에 비친 조선은 예악과 문물이라는 역사문화적 전통을 계승한 나라이며, 명청 교체 후 중화문화를 유일하게 계승하고 있는 나라다. 공자가 말한 동주東周, 맹자가 말한 선국善國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그런 나라이다."(167-72)


3부 조선은 왜 만주 지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임고타林古打는 만주어 '닝구타'ningguta를 음차한 것인데, 조선 후기 사람들이 늘 만주족의 발상지로 기억했던 영고탑과 음가가 같다." "효종 대는 영고탑 회귀설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시점이며, 조선이 유일한 중화로 자신을 분식하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영고탑 회귀설은 寧古塔 혹은 寧固塔이 임고타를 대신해서 닝구타의 지명으로 굳어지는 시점에서 조선의 중화주의적 사고가 청나라의 운명적 멸망을 전망하는 쪽으로 이어지면서 탄생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청나라가 북경에서 영고탑으로 이동할 때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이 지점에서 조선의 서북 지역과 만주 일대의 지리에 대한 판단이 중요해진다. 조선 지식인들은 심양-길림(울라)을 거쳐 영고탑까지 가는 길이 험하고 먼 우회로인 반면, 조선의 서북 지방을 경유하는 길은 훨씬 완만한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그렇게 판단한 근거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만일 지리적 형세가 실제로 그렇다면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된다."(197-9)


"남구만은 청나라가 영고탑으로 돌아간다 해도 만주를 경유하는 쪽이 조선의 서북 지대를 경유하는 쪽보다 험하지도 않고 가까울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만주 지리서를 확보하고 싶어했다." "마침내 1697년(숙종 23)에 입수한 성경지에는 『대명통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지리 정보가 담겨 있었다." "숙종도 성경지를 보고 백두산 남쪽 자락과 관련된 기록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구만은 청나라가 성경(심양)에서 영고탑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지리적 여건상 조선을 경유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그 과정에서 몽골이 변수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까지 논증하지는 못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이이명도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조선 지식인들이 청나라의 운명적인 몰락을 예견하는 한 그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수는 없었다. 결국 성경지의 지리 지식이 보급되었지만 영고탑 회귀설은 그 뒤로도 오랫동안 위력을 발휘했다."(200-5)


"다양한 만주 지리서가 도입되면서 영고탑 회귀설은 차츰 약화되었다. 조선 지식인들은 늘 '오랑캐에게는 100년의 운세가 없다'고 말해왔고 또 그렇게 되기를 기대했지만, 이미 그 '오랑캐' 나라는 100년을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이 논리는 19세기까지도 완전히 불식되지 않았다." "1860년 서양 세력에 의해 북경이 함락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자, 조선에서는 서양의 침략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과정에서조차 영고탑 회귀설의 흔적이 보인다는 점이다. 1861년 훈련천총 윤섭이 방어책을 올렸다. 청나라가 서양 세력에 의해 중원에서 밀려난다면 반드시 요양遼陽 방면으로 동진東進하여 조선을 침략하리라는 주장이었다." "조선이 중화문화의 유일한 담지자라고 생각하는 한, 청나라는 아무리 번성한 문물을 가지고 있어도 본질적으로 늘 타자일 수밖에 없었다. 영고탑 회귀설이 1860년대까지 그 그림자를 드리웠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220-1)


4부 변경과 역사적 고토는 어떻게 인식되었는가


"청나라 때 편찬된 만주 지도와 지리서들은 조선이 당면한 정치적 이슈를 해결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그런데 학술적인 관점에서 볼 경우 다른 문제들이 있었다. 이 문헌들에서 소개된 정보들은 조선이 백두산과 북만주에 대해서 알고 있던 지식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이만부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성경지의 기록을 비교하면서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제외하고는 백두산에서 흘러나가는 물줄기에 대한 설명이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이만부에 따르면 압록강과 두만강은 국경이어서 조선 사람들이 보고 들을 수 있는 데 비해 그 위쪽은 전문傳聞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에 청나라의 기록과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정계 이후 조선 지식인들은 백두산과 그 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여러 고지도 중에는 토문강과 두만강의 수원을 별개로 보거나 분계강을 설정한 것이 적지 않다."(267, 272-3, 285-6)


"이익은 단군과 기자에 의해 이어져오던 정통이 기준箕準에 의해 삼한三韓으로 연결되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삼한정통론은 안정복을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만일 삼한정통론을 승인한다면, 요하 일대 혹은 북만주 일대에서 자국 고대사의 흔적이 발견된다고 해서 그 중요성이 모두 똑같지는 않다. 그것이 단군조선이나 기자조선이라면 중화와 정통의 맥락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고구려나 부여나 발해라면 사정이 다르다. 요동과 북만주에서 아무리 넓은 영토를 차지했더라도 이 나라들은 정통이 아니다." "송시열은 고토故土가 어디까지인지, 나아가 고토를 회복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왜일까. 청나라에서 1684년(숙종 10)에 처음 간행된 성경지는 송시열이 죽던 1689년(숙종 15)까지 조선에 수입되지 않았다. 만주 지리서를 본 적이 없는 송시열에게 고토의 영역을 자기 시대의 위치값으로 고증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300)


"고토에 관한 이슈는 백두산 정계定界 문제로 이어진다. 이익은 정계 때 두만강 이북 700리에 있는 선춘령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두만강의 원류만을 찾으려 한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토문강의 원류를 찾아서 경계를 따진다면 선춘령을 포함한 넓은 지역이 조선의 영역이 될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니 당시 당국자의 잘못이 크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고토론자의 면모다. 그러나 그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그다음부터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것을 갑자기 찾으려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닌 데다, 방수防守의 부담이 장래에 큰 걱정거리가 되리니, 반드시 영토를 넓히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지금 사대事大하여 도움이 되는 데다가 변방의 근심이 사라졌으니, 그 땅을 얻으려 하다가 도리어 문제를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익의 제자였던 안정복 역시 정계 문제에 대해 이렇게 덧붙였다. 〈왕자王者의 다스림은 덕에 힘쓰는 것이다. 땅에 힘쓰는 것이 아니다.〉"(301-3)


"이종휘(1731~1797)는 이익이나 안정복처럼 고토 회복에 무심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신채호가 높이 평가할 정도로 적극적인 고토 회복론자였다." "이종휘의 논설 「취요심」은 그가 고토를 어떤 맥락에서 보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많은 시사를 준다. 이종휘가 이 글에서 집중적으로 다룬 고토는 요심, 즉 요동 지역이다." "이종휘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이 요동을 오랫동안 치지도외置之度外해온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가 요동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단순히 그곳이 고토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천하에 변란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이 땅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요심을 취하지 않으면 양계兩界를 보존할 수 없고, 양계를 보존할 수 없다면 '동국'東國 또한 그에 따라 이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종휘에게 고토는 조선이 이적으로 변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데 필요한 장소다. 이종휘의 고토 회복론이 재래의 화이론에 기반한 것이라는 평가는 그런 점에서 옳다."(305, 309)


"이종휘에게 고토 회복은 오랑캐로부터 중화문명 국가 조선의 문화를 지키기 위한 행위다. 이 점에서 고토를 말하면서도 덕치德治를 강조한 이익이나 안정복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 고토 회복을 영토 확장의 문제로만 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분계강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분계강을 주장하는 모든 논자들은 분계강을 자국 고대사의 중심무대로 보지는 않았다. 그들은 분계강이 변경 혹은 국경이 되어야 한다고만 말했다. 분계강이야말로 순수하게 영토적인 아젠다였다." "1884년 지견룡이 올린 상소에 따르면, 국경을 넓히는 일은 자강을 위해 필요한 일이며, 자강은 내수를 위한 전략이다. 국경을 넓히는 일이야말로 곧 내수를 위한 선결 과제가 된다. 지견룡의 논리는 '외양外攘을 위해서 내수해야 하고 내수를 위해서는 군주의 공구수성恐懼修省이 가장 중요하다'는 시대적 논법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 그는 자신이 '세계 각국이 대소를 따지지 않고 교섭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다."(323)


5부 중국 밖의 세계와 지리적 시야의 확대


"조선이 처음부터 유구(오늘날의 오키나와)를 중화문화 국가로 여긴 것은 아니었다. 유구가 재상의 자제들을 명나라에 보내 공부하게 한 사실은 이미 조선 초기에도 알려져 있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유구의 문화는 일본적이거나 비유교적이며, 심지어 야만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조선 초기의 소중화 의식은 당시의 조공책봉 관계와 모순되지 않았다. 그러나 명청 교체 이후 조선 지식인들의 의식 속에서 청나라와의 조공책봉 관계는 언젠가는 극복해야 할 굴레였을 뿐이다. 버거운 현실일 뿐 지향해야 할 세계는 아니었다. 그런 청나라와 조선이 세계를 보는 방식이 같은 수는 없는 일이다. 청나라는 자신을 중심으로 한 조공책봉 관계에 기초해 세계를 이해하려 한 반면, 조선은 중화문화적 정체성을 기준으로 세계를 보려 했다. 유구라는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에도 그런 차이가 그대로 반영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조선 지식인들은 유구 문화 자체가 얼마나 중화적인가에 더 관심을 쏟았다."(351-2)


"이덕무가 하이도(오늘날의 훗카이도)에 주목한 것은 일본이 하이도를 경유해 조선을 침략할지 모른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은 오래전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하이도를 통해 조선을 치려 했다고 말해왔으며,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들은 일본인들로부터 어렵지 않게 이런 견해를 듣게 되었다. 이덕무는 경험적으로 볼 때 이 주장은 근거가 약하다고 판단했다. 유사 이래 왜구는 규슈와 쓰시마 일대로 들어와 조선의 서남해안을 노략질했으나 동해안은 그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덕무에 따르면 일본의 지형이 사람'인'人 자 혹은 들 '입'入 자와 같아서 조선의 동해와 남해 두 바다를 마주하고 있지만, 동해 쪽은 파도가 높고 바람이 많아서 군사적인 근심거리는 없었다 한다. 그러나 이덕무는 표류인의 진술을 통해서 하이도가 지금의 연해주와 매우 가까우며, 조선의 함경도와도 멀지 않다고 생각했다.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생각보다 지리적으로 가까워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361)


"1402년 조선에서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이하 강리도)는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등 구대륙 전체를 망라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확대된 세계 안에는 여전히 지리적 중화관이 내재되어 있다. 단순히 중원대륙의 크기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중원대륙의 서쪽 전체가 극도로 왜곡된 현상 역시 지리적 중화관이 작동한 결과이다. 〈강리도〉는 새로 알게 된 넓은 세계와 전통적인 중화세계관이 모두 표현된 도면이었다." "〈강리도〉가 '넓은 세계'를 꿈꿀 수 있게 해주는 그림이자 통치의 정당성과 이념을 보여주는 자료로 여겨졌지만, 거부감을 불러일으킬만한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지도에는 한자의 의미가 통하지 않는 번역 지명이 무수하게 등장했다. 이 번역 지명들 중 대부분은 명나라 중심의 국제질서, 나아가 그 안에서 설명되는 '천하'와 어울리지 않는 점이 있었다. 번역 지명이 주었을 거부감이 희석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이문異聞을 넓힌다'는 정서였다."(379, 399)


"이문은 신기한 이야기나 믿기 힘든 이야기이며, 또 사실관계를 확정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나라 안에서 일어났던 이야기이거나, 명 중심 국제질서의 안팎에 있는 나라들에서 전해진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때로 그것은 현실의 조공책봉 체제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곳에 관한 이야기, 혹은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문은 조선에서 신뢰의 대상이 된 적이 없었다. 유교적 합리주의자라고 해야 할 조선 지식인들로서는 사실관계를 확정할 수 없는 어떤 논의도 공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점은 따로 있다. 성리학적 세계관이나 가치관과 정면으로 충돌한다고 공인되거나 혹은 이단으로 판명되지 않는 한, 어떤 종류의 이문이라도 그 존재 의의가 부정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명나라 중심의 국제질서보다 넓은 영역을 보여주는 〈강리도〉가 제작된 점, 그 사본들이 16세기까지도 계속 복제된 점은 모두 '이문을 넓힌다'는 말의 정당성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399-401)


6부 세계의 인식과 지리적 중화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한역 서구식 세계지도는 중국인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중에는 '서양'(대서양과 소서양)도 들어 있었다. 정화의 항해를 계기로 중국의 조공권에 편입된 수많은 인도양 국가들을 '서양'으로 부르던 중국인들은 당연히 마테오 리치가 말하는 서양이 그 일부인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마테오 리치가 말하는 '유럽으로서의 서양'은 사실상 중국인들이 말해왔던 인도양 국가로서의 서양과 달랐으며, 그런 의미에서 완전히 새로운 곳이었다. 그러나 사이四夷 관념을 버리지 않는 한 중국인들은 마테오 리치의 서양을 어떤 식으로든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청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유럽으로서의 서양은 새로운 이역, 인도양 국가로서의 서양은 전통적인 이역이었을 뿐이다. 『대청일통지』는 사이四夷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으로서 새로운 이역, 즉 유럽으로서의 서양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 새로운 이역과 전통적인 이역과의 구분선은 여전히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416-8)


"이수광이 『지봉유설』에서 말한 서양은 구미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서양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단어였다. 그가 말한 불랑기국이 오늘날의 포르투갈에 해당한다고 해서 이수광이 '유럽을 말하려 했다'고 본다면 그것은 난센스다. 이수광이 말하려 한 것은 유럽 국가 포르투갈이 아니라 타이의 서남쪽 바다에 있는 해양국가 포르투갈이다. 영결리국과 남번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지봉유설』에서 언급한 외국 가운데 구라파국을 제외한 그 어느 나라도 유럽 국가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이수광이 유럽을 어설프게 알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유럽으로 표상되는 '넓은 세계'에 관한 지식을 자기 나름의 스토리 구조 안에 담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를 이미 알고 있는 땅에서 시작되는 몇 갈래의 '땅끝'으로 설명했다. 철전鐵甸에서 이어지는 '북쪽 땅끝', 회회국에서 시작되어 불랑기국을 거쳐 영결리국에 이르는 '서쪽 땅끝', 그리고 확대된 서역 끝자락으로서의 구라파국 등이 그런 것들이다."(449-50)


"그렇다면 이수광의 세계관이 보통의 유학자들과 같았다고 보아도 좋은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이수광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은 세계를 결코 중국과 조선 중심으로만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중화문화를 '문명의 발상지'인 중국이나 '소중화'인 조선만이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점에서 그런 면모가 엿보인다. 그는 전통적인 지리 관념을 변형하고 재해석해서 세계를 설명하려 했다." "〈이 북황의 바깥으로 어찌 또 『삼재도회』에 적혀 있는 세계와 같은 곳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가 '세계'世界라는 말을 구사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당시 '세계'라는 단어는 십방十方을 의미하는 불교적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삼재도회』에 실려 있는 도면 가운데 규모 면에서 거기에 해당하는 것은 서구식 세계지도인 〈산해여지전도〉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는 서구식 세계지도를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천하'적 규모와는 다른 어떤 세계의 존재 가능성은 열어두고 싶었던 것이다."(451-2)


"조선 사회에서 서구식 세계지도가 보급되기 시작한 17세기는 신선설神仙說이 대두했다가 쇠퇴하는 시기였으며, 명청 교체에 따라 중화관념이 변해가는 시기이기도 했다. 노장사상 혹은 신선설은 이미 16세기부터 주목받았다." "17세기 초에는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 양생설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이수광은 유학자이면서도 무위자연과 자기절제를 강조하는 도교의 양생설에 심취해 있었으며, 노자와 장자의 글도 편견 없이 평가했다. 그러나 개방적 학풍의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하던 신선설은 곧 강화되어가던 중화주의에 묻혀 쇠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사회에서 중화와 이적, 정통과 이단을 구분하는 문제가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이수광의 노장적 취향은 이단 학문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조식(1501~1572)과 서경덕(1489~1546)의 문하생들은 입지가 약화되어 독자적인 그룹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 양생설이나 도교적 취향은 학문적으로 더 이상 용인되기 어려웠다."(473)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지식인들이 추연이나 육합을 거론하거나, 땅과 바다의 관계에 대한 『중용』과 『주자어류』의 차이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서구식 세계지도 때문이었다. 서구식 세계지도를 전통적인 직방세계의 바깥, 혹은 그것과 질적으로 다른 세계를 묘사할 수 있는 동양 고대의 모델을 통해서 이해하려 한 그들은 그 세계상을 연상시키는 단어들을 신선적·도교적 문헌에서 발견했다. 서구식 세계지도는 신선설이 쇠퇴하는 바로 그 시점에서 도교 계통의 문헌이 다시 주목받는 근거가 되었다." "'바다 밖에 땅이 있다'는 세계 구성을 인정하는 것은 결국 서구식 세계지도의 세계상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동시에 성현이 말한 진실을 재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서구식 세계지도가 보급되면서 도교적 문헌이 재발견되고 바다 밖에 땅이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상황은 매우 독특하고 흥미로운 도면으로도 표현되었다. 사람들은 이 도면을 '천하도'天下圖라고 불렀다."(473-4)


# 추연 : 전체 세계는 아홉 개의 주로 나뉘어 있고, 각 주는 비해라는 바다가 둘러싸고 있다고 주장한 전국시대 음양가의 사상가, 육합 : 십이간지를 배합한 방위 개념으로도 사용되지만, 일반적으로 상하와 사방을 의미하는 용어


7부 중화세계관이 그린 마지막 궤적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소중화로서 혹은 '조선 중화'로서 자신을 설명하려고 할 때 그 출발점은 늘 기자였다. 물론 '공자가 구이의 땅에서 살고 싶어했다'는 『논어』의 기록도 자주 인용된다. 송시열은 공자가 동방을 문명의 땅이나 살 만한 곳으로 여겼다고 보았다." "제후국 조선이 가진 문화의 전통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공자보다 오래된 인물, 그리고 제후로서 조선을 문명화한 인물이 필요했다. 기자는 그렇게 '재발견'되었다. 논리적으로 본다면 명청 교체 후 조선이 간직한 중화문화는 공자의 문화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기자의 문화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1910년 연해주에서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을 결성했던 유인석이 여전히 기자를 중시했던 것은 그가 중화문화의 보편성을 첫 번째 가치로 여겼기 때문이다. 유신석의 사례에 비추어본다면, 1910년대 연길 이주자 사회의 유학 지식인들이 기자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자기 자신을 중화문화의 계승자로 간주하지 않았음을 뜻한다."(522-3)


"공교孔敎가 공자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인 한 당연히 유교문화권 안에서는 공유될 수 있는 자산이다. 그러나 김정규에게는 공자가 '화'華와 '한'韓에 공유되고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화와 한이 엄연히 별개라는 사실은 더 중요했다." "조선의 유학 지식인들은 예외 없이 중화세계의 보편적 가치를 굳게 믿었다. 궁극적으로 그들이 추구한 것은 중화세계의 재건이었다. 김정규의 스승인 유인석도, 그리고 심양에서 동북삼성공교회를 설립한 이승희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김정규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교지회를 통해 이주자 사회의 유학 지식인들을 결집시키고 그 아이들에게 '조국'을 잊지 않게 하는 일이었다. 보편적 가치인 공자의 가르침은 그에게는 '조국'이라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었을 뿐이다. 신학문은 제대로 된 손가락 역할을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아야 하며, 그 손가락이 제대로 된 손가락인지도 살펴야 한다. 김정규의 인식은 그런 것이었다."(539-43)


"조선과 기자를 지우려 했던 김정규, 조국 정신에 입각해 귀화를 반대하던 김정규, 신학문에 대해 투쟁하던 김정규, 그리고 공자로 조국을 가리키던 김정규. 이는 그와 문제의식을 같이 했던 1910년대 연길 이주자 사회의 유학 지식인들의 생각이기도 하다." "그러던 차에 이주자 사회에도 3·1운동의 기운이 꿈틀거리면서, 연길과 연해주를 아우르는 독립군을 조직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국면 전환의 기회를 맞은 김정규는 이주자 사회의 유학 지식인들을 결집하여 의군義軍을 편성하고, 연해주 의병 세력과 제휴하여 의군부 결성을 추진했다." "그에게 '의'란 '충후예의한 민족'의 특징을 반영하는 것이며, 그에게 '소중화'란 제후국의 표상이 아니라 '의를 간직한 민족'의 아이콘일 뿐이다. 대성중학교의 설립을 주도한 김정규는 단 한 번도 '대한국'의 백성이 아닌 적이 없었다. 공자를 들어 조국을 가리키는 것. 김정규에게 공자와 대종교, 나아가 중화와 중화세계는 그런 의미였다."(543-5)


"조선을 현실의 중화로 여기면서도 중원대륙에 중화국가가 들어서기를 기대하는 정서는 송시열에서 이항로까지, 다시 이항로에서 최익현까지 면면히 이어졌다. 그러나 최익현이나 유인석은 송시열과 전혀 다른 정치적·문화적 환경에 있었다. 그들은 일본의 침략과 서세동점이라는 새로운 위기 상황에서 조선과 중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구현해야 했다." "최익현에게 당시의 세계는 두 개의 패러다임이 충돌하는 현장이다. 개화하고 경쟁하려는 야만의 패러다임과 개화하지 않고 중화 질서를 지키려는 문명의 패러다임이 그것이다. 그 갈림길에서 공법 질서를 버리고 중화 질서를 택한 것은 그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중화 질서를 택하지 않는 일본을 규탄하기 위해 그가 구사한 논리가 흥미롭다. 아무리 개화하고 경쟁하는 공법 체제라 하더라도 일본이 그 질서 안에서나마 생존하길 바란다면 (중화 질서의 이론적 근거인) 신의와 도라는 보편적인 원칙을 승인해야 한다는 것이다."(563-5)


"최익현은 오랜 시간 적대적 타자였던 청나라를 어떻게 전략적 제휴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지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이 문제를 누구보다 깊이 생각한 사람은 유인석이었다. 유인석이 청나라를 전략적 제휴의 대상으로 본 것은 동양과 서양의 대결이 펼쳐지는 상황에서 중화세계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금수의 도전을 물리치기 위해 이적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는 상황 논리다." "'자주독립'할 수 있게 된 상황이라면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 능력이 있는데도 '중국'을 섬긴다면 사람들의 의혹을 풀기 어렵지 않겠는가. 누군가 이렇게 물었다. 이 질문에는 서구 국가 시스템과 공법 체제라는 틀이 전제되어 있다. 결국 문제는 '자주독립'할 것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서구 국가 시스템과 공법 체제하의 세계 질서를 인정하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다. 중화세계 재건의 당위성을 믿는 유인석은 '자주독립'이라는 용어가 전제하는 그 틀 자체를 거부했다."(566-8)


"유인석에게 세계란 중화를 본질로 삼는 가치적인 질서이며, 동시에 위계적인 질서여야 한다." "유인석은 궁극적으로 일본의 반성을 전제로 동아시아 문명권을 건설하려 했다. 표면적으로는 왜양일체론을 견지했던 최익현이 일본의 반성을 전제로 동아시아 삼국의 연대를 희망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두 사람 모두 동아시아 문명권과 서양이 대립하는 전선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동아시아 문명의 주체에 대한 아이디어가 같지 않다. 유인석은 청나라에 대해서는 전략적 제휴의 대상 그 이상으로 여기지 않았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확장된 화동華東의 일원이 될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중화문화를 보존해온 조선, 중원대륙에 들어설 가상의 중화국가, 반성과 성찰이 전제된 일본이 이루게 될 '확장된 화동'이야말로 '유교적 동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화는 조선왕조를 앞뒤로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라고 해도 좋다. 유인석의 '유교적 동양'은 그 중화론이 그려낸 궤적의 끝자락을 장식했다."(568, 57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