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에서 인터넷까지 - 기술은 어떻게 사회와 역사를 변화시켜 왔는가
토머스 J. 미사 지음, 소하영 옮김 / 글램북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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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프로젝트에 복무하고 권세 가문의 전시나 궁정 오락을 위해 발현된 르네상스 시대 기술의 독창성과 특별한 성격은 '궁정시대의 기술(1450-1600)'이라는 말로 집약된다. "다빈치와 그의 동료 기술자들을 고용한 도시국가들과 궁정은 산업 또는 상업적 기술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그들의 꿈과 열정은 오직 전쟁, 도시건설, 궁정오락, 그리고 왕조의 위엄을 보여주는 데만 치중했다."(40) 따라서 궁정 기술자들 간의 방대한 지적 교류는 동료들의 모임 내에서만 공유되었고 다음 세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통치자의 몰락 혹은 통치자의 문화 파괴와 같은 사회체제 분열은 기술 전통의 지속성을 떨어뜨리며 세대 간의 공유를 단절시켰다. 기술의 변화는 영구적으로 쌓여있지도, 지속하지도 못한 채 조각조각 흩어졌다. 기술에 있어 영구적이고 계승 가능한 전통은 인쇄술과 원근법이 만들어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중유럽의 광산업에서 나타났다."(61)


인쇄술의 발전과 종교개혁, 그리고 정치적 문화적 독립체인 네덜란드의 등장과 국가 간 무역 분쟁은 대륙이 교역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당시의 기술 발전은 자본주의적 성향을 띄었지만 산업적이지는 않았던 '상업시대의 기술(1588-1740)'이다. "혁신적 선박설계, 수입 가공 등과 같은 금융 혁신을 일으킨 다수의 기술은 마차 공격대, 궁정 오토마타와 화려한 궁전들이 르네상스 기술의 상징으로써 왕권의 비전을 표현했던 것처럼 상업적 필요 때문에 발전되었다."(72) 당시 발트 해는 화물 용량이 아니라 선박의 갑판 면적에 따라 통행세를 부과했기 때문에, 네덜란드의 플류트 선박은 전형적인 강화 구축을 포기하고 "선박 안에 더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도록, 갑판 면적을 최대한 줄여서 설계했다."(81) 17세기 중반 일본의 나가사키에서 예멘까지 닿았던 무역 루트는 "상품거래, 공공 외환은행, 주식 거래를 포함하는 상업 자본주의 기관들에 대한 네덜란드의 대대적인 혁신에 기인한다."(85)


르네상스기 궁정 후원 시대와 비교했을 때보다 "훨씬 다양한 상인들과 무역업자, 조선업자, 선박 주인, 설탕 정제 산업 관계자들, 섬유제작자 외 많은 사람이 부를 창출해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였고, 이는 상업시대 기술의 성격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네덜란드 상업시대를 다른 시대와 구분하는 것은 바로 부를 창출하는 기술과 기법들이다. "다른 그 어떤 시대나 장소에서도 대형화물을 싣는 상선들이나 공장 같은 청어 어선, 내륙 도시들과 연계된 분주한 대형 항구들, 교역의 부가가치, 주식과 상품을 거래하는 거래소, 공공소유 선박, 청어, 양모, 한때는 튤립 거래를 위한 선물시장을 포함하는 세계적 금융기관의 정교화는 찾아볼 수 없었다."(103-4) 각각의 교역품 분야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생산량, 고임금, 고품질 수송"을 지향한 네덜란드의 상업기술은 "많은 생산량, 저임금, 낮은 생산품질을 강조하던 초기 산업기술과 극명히 대조되었다."(96)


영국의 부상(1740-1851)은 산업 지형도를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영국 역시 산업혁명 전 단계에는 "대개의 노동자가 작은 가게에서 일하거나, 건축, 양모, 가죽 등의 전통적인 산업에 종사"했지만, 런던을 위시하여 점차 산업화의 길로 나아갔다.(110) 1800년 무렵, 런던 인구의 3분의 1이 제조업에 고용되면서 "도시는 그 어떤 공장 도시보다 더 많은 증기기관을 사들였다. 1850년이 되자, 런던은 4개 대형 공장이 있는 도시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제조인력을 보유하게 되었다."(112) 거대한 "산업화 규모와 자본의 막대한 상승, 인력 비용절약, 기술 혁신, 그리고 시장집중, 제품별 특화의 풍성함, 공급 산업 등의 전형적인 특징들"을 극적으로 담고 있던, 맥주 양조산업은 "산업과 위생, 소비, 농업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들며 런던이 산업도시로 가는 길목을 제공했다."(116-7) 포터 흑맥주 양조업자들은 빠르고 열정적으로 "노동력을 절약하는 기계화와 산업시대의 논리"를 도모했다.(120)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런던과 달리 면직물 기술자들이 거주하던 맨체스터는 "빠른 성장 속도가 개념의 열쇠였다." 1770년 맨체스터 인구는 3만 명에 불과했지만, "이후 인구는 한 세대를 보낼 때마다 2배로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1851년에 이르자 그 수치는 30만 명에 육박했다."(128-9) 1825년, 맨체스터에는 방적 회사와 창고 회사가 결합한 통합 방적/직물 기업형 회사가 총 38개 존재했다. "도시의 섬유산업 규모는 1851년 정점을 찍었으며 이와 관련된 해당 노동자 수는 5만 6천 명을 육박했다. 아울러 이 해에 처음으로 천을 마무리하는 직업, 방직기계를 만드는 직업, 주택 건설과 기타 제조업 등에 관련해 고용된 총 노동자의 수가 단순히 옷감을 만드는 노동자의 수를 뛰어넘었다. 이 시기부터 성장은 단순히 한 도시의 산업에 의존했다기보다는 그 지역 전체의 면직물 공장들에 의존했다. 맨체스터에서 염색과 표백 제조 산업 또한 섬유산업의 특화 보조 산업으로 함께 성장했다."(136) 


철강산업의 중심지였던 셰필드에는 공장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다. 셰필드의 기술자들은 "집에 작은 사무실 혹은 방을 두고 이름이 새겨진 도장 하나만 있으면 제조사를 설립할 수 있었다. 연삭, 경화, 연마, 손잡이 혹은 자루 제조, 심지어는 스템프를 식별하는 일과 같이 나이프를 만들거나 날카로운 도구를 만드는 데에 필요한 모든 숙련된 노동은 거리에 널려 있는 숙련된 작업자의 가게를 방문해야 살 수 있었다." 소규모 제조사의 형태를 갖춘 "업체들은 낮은 자본, 빠른 회전율, 그리고 유연성에 대한 강점을 누렸으며 무엇을 하든 적절한 것들을 고르고 선택할 수 있었다."(145-7) 이처럼 산업혁명은 다양한 경로를 밟아 나갔다. 런던에서는 인구 집중을 통한 동시다발적인 산업 활동이, 맨체스터에서는 단일 산업에 종사하는 대규모 공장체계가, 셰필드에서는 고품질 철강 제품을 생산하는 분야별 지역 네트워크가 중점적으로 발전했으며, 다양한 보조 산업이 함께 성장했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19세기 중반, 산업화된 국가들은 해외 식민지 통치라는 신사업에 눈을 뜨면서, '제국의 도구들(1840-1914)'을 발전시켜 나간다. "발명가, 기술자, 무역상, 자본가, 정부 관료들은 국내의 용광로나 섬유산업에서 해외 식민지 개발을 위한 증기선, 전신, 철도를 향해 급속도로 관심을 돌렸다."(161) 그러나 제국주의가 착취한 수익은 식민지에서 수시로 벌어진 반란들을 진압하는 "군사비용뿐만 아니라 제국 관리들의 교통, 숙소, 식량, 연금 비용"으로 대부분 새어나갔다. 제국주의의 수혜를 받은 집단은 "무역상이나 투자가, 군 장교, 또는 관료들" 같은 일부 계층에 국한되었다. 제국주의 시대의 기술 발전은 상업 및 산업 시대와 달리 "빠르고 편리한 수송과 신속하고 안정적인 의사소통, 그리고 무엇보다도 풍부하고 효과적인 군사력을 보장"하는 데 집중됐다.(164) 일례로, 엄청난 연료를 소비하여 상업적인 이용가치가 떨어지던 증기선은 인도와 런던 간의 연결고리를 강화했으며, 아편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식민지에 깔린 전신과 철도망도 같은 목적에 복무했다. 미국에서는 원주민들을 제압하기 위해, 캐나다에서는 자치주들의 연합 조건으로, 남아프리카에서는 영국의 단일 식민지 건설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철도가 건설되었다. 제국 기술의 주목적은 수익이 아니었다. "값비싼 증기선이나, 지나치게 화려했던 기관차, 넓은 폭의 이중 철도, 그리고 멀리 뻗어 나가는 전신과 전신망을 보면 명백히 알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제국주의가 단순히 이전의 상업이나 산업시대의 연속 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며, 제국주의는 오히려 기술자들의 주목적을 산업과 경쟁하거나 심지어 대체시키는 일에 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증기선, 공작기계, 기관차, 철 그리고 면직물을 내다 팔 수 있는 확실한 식민지 해외시장을 가지고 있었던 영국 기업가들은 떠오르는 경쟁자들과 경쟁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 때문에 장기적인 측면에서 영국의 세계 경쟁력 하락이 가속화되었을지도 모른다."(201)


'과학과 시스템(1870-1930)'의 발전은 산업사회의 특징을 확연히 바꿔놓았다. 사회주의자들의 소망과는 달리 "기술을 통해 안정을 찾은 '체계적 자본주의'는 그들의 예상을 벗어났다. 이 시기의 기술자, 특히 과학 기반 산업에 종사하는 기술자는 아예 새로운 시스템을 개발하기보다는 존재하는 시스템을 개선하고, 안정시키고, 견고하게 만드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특허법, 기업 소유권, 산업연구소, 그리고 공학 교육 등을 동반한 시스템 안정을 향한 노력은 산업사회를 변모시켰다. 그리고 바로 이 시대에 '기술'이라는 용어가 장치의 집합, 산업의 복합체, 그리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추상적인 힘이라는 오늘날의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205-6) "산업과학자와 과학기술자는 거대한 시스템에 순응하려는 노력과 시스템의 질서정연한 확장을 위해 기술적인 문제들을 해결"(232)하는 데 주력했고, 시스템의 혁신은 "전기, 전화, 자동차, 가전제품, 실내 장식, 라디오 등 거대 소비자 시장을 형성했다."(243)


모더니즘(1900-1950)은 근대주의를 대표하는 재료들인 강철, 유리, 콘크리트에 주목했다. "이탈리아의 미래파는 모더니즘에 열렬한 기술 중심적 세계관을 불어넣었고, 네덜란드의 데 스틸 회원들은 근대적 재료의 미학적 가치를 표현했으며, 독일의 바우하우스는 이론과 실제의 통합을 달성했다. 근대적 재료가 곧 근대 문화의 기초라는 마리네티의 주장─강철로 건축 중인 집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은 미래파의 유산 중 하나였다."(259-60) 모더니즘은 "근대 기술사회의 필연성을 반영하는 순리적인 발전 양식으로 표방되었으나, 모더니즘을 주류로 이끄는 운동은 충분히 정치적이었다." 모더니즘은 1920년대 도시 주거단지건설 계획으로 발전했지만, 1930년대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억압에 시달리다가, 1940년대 이후 사회주의적 뿌리를 상실한 미학적 모더니즘으로 넘어갔다. 이후 "모더니즘의 구체적인 해석은 CIAM, 현대미술관, 그리고 다른 유행을 선도하는 단체의 중요한 홍보대상으로 전락했다."(286)


"1950~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군의 지원으로 기업들은 '첨단기술'을 발전시켰다. 이들 기업이 바로 IBM, 보잉, 록히드, 레이시언, 제너럴 다이너믹스, MIT와 같은 주요 군수산업체이다."(291) 기술이 상상을 초월하는 '파괴의 도구(1936-1990)'를 낳기 시작했다. 2차례의 원폭 투하로 막을 연 원자력 시대의 기술 경쟁은 대부분 "장거리 폭탄과 대륙간탄도미사일, 다탄두미사일(MIRV)과 같이 공격용 대량살상무기"에 집중됐다.(315) 그러나 핵무기 군비경쟁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은 미국과 소련의 재정을 심각하게 갉아먹었고, 1960년대에 이르면 국방부조차 연구 예산을 맞춰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IPTO(정보처리기술국)에서 개발, 보유하고 있던 인터넷 관련 기술이 군용 통신망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1964년 RAND 기업보고서에 나온, 분산 처리되는 통신망 개념은 폐쇄된 군사시대의 지휘 통제기술을 넘어, 개방적이고 고객 지향적인 네트워크 기술로 이어졌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국제 표준화를 촉진한 팩시밀리, 표준화된 음식과 노동 관행McJobs, 단일화된 미국 문화McWorld로 대변되는 맥도날드, 전세계 어디서나 접근 가능한 인터넷은 기술과 문화에 대한 사람의 생각을 결정하는 강력한 힘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2001년 9·11일 테러가 발생하며 세계화의 확장도 끝나버렸다."(377) '테러와의 전쟁'은 세계화라는 유토피아를 끝장냈으며, 안보 기술 시대를 선도하고 있다. 과도한 보조금 정책으로 더 많은 화석연료 소비를 부추기는 에탄올 산업은 지속불가능한 에너지 정책의 표본이며, 통합된 단일 시스템이 가져오는 정보 리스크는 지정학적 불안정과 더불어 세계화의 부작용을 낳는다. 이처럼 기술은 자연발생적인 현상이 아니라 사회·문화·경제적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세계를 재구성하는 힘이다. 기존의 기술과 실천 관행이 새로운 대안을 봉쇄하고 기각시키는 현상을 어떻게 극복하는가가 향후 기술 발전의 방향을 좌우하는 핵심 요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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