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 - 격변의 시대, 영혼의 치유와 참된 행복을 찾아 나선 영원한 구도자
피터 브라운 지음, 정기문 옮김 / 새물결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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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때문에 우리는 악을 행하는가'라는 문제에 천착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대략 9년 동안 마니교의 '청문자'였다. "이방 도시들에서 마니교도들은 자기 분파원들의 집에서만 머물렀고, 지도자들은 로마 세계 전역에 퍼져있던 '세포'망을 통해서 여행했다. 이교도들은 공포의 눈으로 그들을 응시했고, 정통 기독교인들은 두려움과 증오의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들은 4세기의 '볼셰비키'였고 기독교 교회에 침투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외국에서 기원한 '제5열'이었으며, 그 시대의 종교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매우 급진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자들이었다. 그는 마니교도를 만난 후에 그들만이 이 문제에 답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67-8)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에서 선명한 확신을 얻었다. "나는 내 영혼과 그 영혼 위에 놓여 있는 육체를, 그리고 그것들이 세계가 창조된 이래 서로 원수였다는 것을 안다."(72) 그가 마니교에 집착한 것은 "마음속 깊은 곳에 오염되지 않는 완벽함이라는 오아시스를 간직하려는 갈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어떤 다른 본성이라는 생각을 여전히 갖고 있었기에 ···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하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 내 안에 있다고 생각한 다른 것을 비난하기를 훨씬 좋아했다." 그러나 사악함을 완전히 부정한 마니교는 그 대가로 "선을 매우 수동적이고 무능력하게 만들어버렸다."(75)


"마니교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마니교는 신자가 일단 '깨어나기만 하면' 자신의 본질적인 정체성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의 해방을 보증받을 수 있다고 약속했다. 마니교는 신자의 일부는 항상 오염되지 않은 채 있다고 가르쳤고, 자기 영혼의 축소될 수 없는 선한 재료들의 발생을 더욱 촉진하기 위해서 엄격한 의식儀式을 거행하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 확신은 이 분파 자체의 강력한 신화, 즉 선이 철저하게 버려졌고 악의 공격 앞에 무기력하다는 신화에 의해서 항상 침식당했다. 전혀 더러움이 없는 마니교의 신은 억압당하고, 훼손당하고, 망가져, 위태롭게도 전능함을 빼앗겼다."(77)


진리에 이르는 길이 탐구임을 깨닫자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로 향한다. "이제 나는 주교 암브로시우스를 향해 ··· 밀라노로 간다."고 그는 말했다.(105) 암브로시우스는 "사람은 그의 '영혼'이다. 육체는 단지 '누더기 의복'에 불과하다."고 가르쳤다. 하느님에게 돌아갈 때 영혼은 금에서 진흙을 떼어내듯이 모든 것을 벗어버려야 한다. "적은 바로 네 안에 있고, 네가 잘못을 범하는 이유도 네 안에 있으며, 내가 말하건대 우리들 자신의 내면에만 담겨 있다." "구약의 불투명하고 호감이 가지 않는 '문자' 이면에는 숨겨진 의미인 이 '심령spirit'이 일어나서 다른 세계로 날아가라고 우리의 심령을 부른다는 생각"이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관통하고 있었다.(121-2)


당시 밀라노를 지배하던 교양은 '탈-플로니노스적'인 것이었다. "기독교도들은 플라톤주의자들이 영적 우주의 구조를 훌륭하게 묘사한 것을 환영했다. 그러나 이교도 플라톤주의자들은 기독교의 구속救贖 신화(육화,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육체의 부활)를 자신들 스승Master의 권위 있는 가르침을 야만적으로 개작하는 것으로 간주했다."(147) 이제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주의의 명료한 영성spirituality을 보충할 규율을 찾아나섰다." 그가 "오, 비참한 사람인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누가 그를 자유롭게 할 것인가?"라고 말하는 사도 바울의 저술에 눈을 돌린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150-1)


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이 헛된 것으로 입증되었기에 계시된 '지혜'로 철학자들의 작업을 대체해야 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161) 그는 '잘 훈련된 영혼'을 통해 "우주 안에 있는 악의 의미"를 탐구하고, "영혼의 불멸을 '감히' 증명"하며, "삼위일체가 갖고 있는 '의미의 풍부함'을 숙고"하는 길로 들어서고자 했다. "회의주의자들이 그림자의 길이라고 주장한 철학하는 삶은 이제 빛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였다." 그에게 철학은 "가장 진실하고 숨겨진 하느님을 가장 명확하게 입증할 것을 약속하고, 마치 구름을 헤치고 찬란한 빛이 비추듯이 한 단계 한 단계 하느님을 보여"주는 적합한 사유 방법이었다.(175)


고향으로 돌아온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와 논쟁을 벌이면서 악의 문제에 새롭게 접근했다. "그는 순전히 심리학적 관점으로 인간의 의지 속에 악이 영속함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습관은 너무나 강력한 힘을 갖고 있어서 인간의 기억은 그것의 힘에 이끌려 작동한다. 과거의 행동에서 도출된 즐거움이 기억 속에 '강압적으로 자리 잡고' 영속화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영속화 과정을 직선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신비스러운 연약함에 의해' 과거의 모든 행동의 즐거움은 기억되고 반복되면서, 확대되고 변형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강압적인 습관이 이내 굳어진다. 이렇게 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을 내적 삶의 지속성에 속박된 존재로 보게 되었다."(213-4)


로마 세계에 안전한 기반을 마련한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의 기독교 신자들이 마주한 최대의 적은 "자신의 죄와 의심"이었다. "인생의 정점은 이제 순교가 아니라 과거의 위험한 것들로부터 개종하는 것이었다. 방황, 유혹, 죽어야 하는 운명에 대한 슬픈 생각, 진리 탐구, 이것들이 외면적인 안전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훌륭한 영혼의 자서전에 대한 주요 재료였다. 이교도 철학자들이 이런 경향의 '종교적 자서전'의 전통을 이미 만들었다. 4세기 기독교인들이 이 전통을 이었고, 그 전통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서 정점에 다다른다."(229) 다시 말해 "<고백록>은 자신의 과거를 현재의 직책을 위한 훈련으로 보는 사람이 쓴 바로 그런 책이었다."(232)


우리는 <고백록>에서 "인간 자유의 한계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새로운 인식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어린 불량배의 '이유 없는 행위'는 자유의지의 서글픈 전형이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오직 "자신을 거꾸로 내던질 뿐이다." 의지의 그런 파괴적인 행위에 의해서 인간은 창조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조차도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사람이 선한 것을 선택하고자 원할 때도 자신이 의식적으로 선택한 것을 전심으로 행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전의 행위들이 '습관의 사슬'을 만들고, 이 '습관의 사슬'은 삶을 '다른 사람의 수갑이 아니라 자기 의지의 쇠사슬'에 굳게 묶어버린다."(248)


아우구스티누스가 현재를 옭아매는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이라는 서사에만 주목했다면 <고백록>은 9권으로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긴 네 권을 더 썼다. 더 이상 개종으로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여전히 자기를 나타내야, 즉 가장 깊은 자아를 고백으로 털어놓아야 한다." <고백록> 10권은 자신을 '먼지와 재'라고 말하는 진부한 시대의 취향을 넘어 완전히 새로운 차원을 제시했다. 그는 죄와 유혹의 관점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본성의 관점에서 자신을 점검했다. 인간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유혹에 시달리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심지어 인간의 영혼조차도 모르는 영역이 있다."(255-6)


당시의 많은 주교들은 기혼자였고, 대토지를 소유했으며, 고전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런 사람들이 자신에게 걸었던 기대를 거부했다." 그는 자기 휘하의 사제들을 도시의 삶에서 의도적으로 격리시켰고, 오직 기독교의 성경만으로 교육했다. "그들은 결혼하지 않았고 경제적 관점에서 도시 생활에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 무리는 부에 대한 당대의 의식을 바꾸고자 했다. "후기 로마인에게 부는 과시적으로 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었다. 저금을 하는 것은 비천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과시적인 기부의 전통을 기독교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자선으로 유도하고자 노력했다."(281-2)


"311년 이래 아프리카 기독교인들은 교회의 이상적인 거룩함과 신도들의 실질적인 자질 사이의 현저한 차이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놓고 분열되었다." 도나투스파는 가톨릭에 반대해 "교회는 거룩함의 유일한 원천이기에 죄인이 참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교회는 완벽함과 거룩함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 교회는 '진정한 포도나무'이고, 따라서 포도나무처럼 철저하게 전지剪枝를 해야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가톨릭이 "정체성을 잃지 않고 세속을 흡수할 힘을 갖고 있다고 자신하는 무리의 태도를 대변했다." 이 정체성은 "역사 속에 장엄하게 작용하는 하느님의 '객관적인' 약속에, 그리고 성사의 '객관적인' 효력에 기반한다."(302-4)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를 신플라톤주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으며, 이에 따르면 교회의 거룩함은 주관적인 판단 대상이 아니었다. "그의 진실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하늘의 예루살렘'일 뿐만 아니라 또한 플로티노스의 형이상학적인 관념들의 색채를 깊게 띠고 있는 것이다. 지상에 있는 구체적 교회는 그 실체의 오직 불완전한 그림자일 뿐이다. 따라서 이 의식을 받아들이고 행하는 자들은 실체의 어떤 그림자를 따라서 그 거룩함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불완전하게' 노력하고 있는 자들이다. 따라서 교회의 의식들은 객관적이고 영속적인 정당성을 갖는다. 그 의식들은 거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주관적인 자질과 무관하게 존재한다."(314)


"410년 8월 24일,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이 일어났다. 알라릭이 이끄는 고트족 군대가 로마에 입성한 것이다. 지난 2년간에도 두 차례에 걸쳐 고트족은 그 신성한 도시를 포위했고, 기아에 지친 주민들로 하여금 인육을 먹는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로마는 사흘간 약탈당했으며 일부가 불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411) 이 사태로 카르타고의 권력 집단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들은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도나투스파를 관용하는 칙령을 성급하게 발표했다. 이 행동이 로마의 약탈 시기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을 좌우했다. 그는 자신의 도시에서 권위의 위기에 직면했다. 도나투스파의 폭력이 재개되었고, 그와 함께 가톨릭 신자들 가운데서도 종교적 '분열'이 되살아났다."(414)


"고트족의 포위는 도시 내에서 이교도들의 과시적인 반응을 야기했다. 반면에 가톨릭 주교는 잘못된 신들을 맹종하며 믿고 있는 로마인들은 단순히 그들이 받아야 할 대접을 받았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카르타고는, 제국의 관리들이 이교도 신들의 대신전을 말끔하게 제거해 버렸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전히 서 있었다." 주교로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온갖 비난을 반박하면서, 그가 "시민 사회의 진정한 기반이라고 믿었던 것, 즉 가톨릭 교회를 유지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내부의 적들에 맞서, "신의 권위를 통해 계시되고 적극적으로 강제되어야 하는 법"에 기반한 기독교 제국을 옹호했다.(415-6)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 극단론자들처럼 "로마의 약탈을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문명의 붕괴라고 여기면서 흡족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수동적이기를 거부했다. 그는 파괴만을 바라보지 않았다. '압착'은 긍정적인 결과를 목표로 하는 적극적인 과정이었다. 압착을 통해서 좋은 올리브가 자유롭게 큰 통으로 흐르게 된다." "이 세상은 짓누르는 재앙으로 인해 흔들리고, 옛 사람은 뿌리가 뽑힌다. 육체가 압착되고, 영혼은 깨끗하게 흐르는 기름으로 변한다."(418) 그는 제국의 회복력에 대한 믿음을 간직했다. 그의 성숙한 견해에 따르면 로마는 "벌 받은 것이지 대체된 것은 아니다."(420)


아우구스티누스는 "두 개의 이질적인 개념, 즉 권위와 다이몬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과거의 도덕사를 종교적인 역사로 변화시켰다. 따라서 로마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힘입지 못한, 그리고 인간 덕성의 부서지기 쉬운 조각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힘으로 인해 표류하게 된 공동체 이야기가 되었다." 그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신국론>이라는 장대한 드라마를 서술했다. "<신국론>은 '영광'에 관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로마의 과거로부터 영광을 끌어내서 인간의 손이 결코 미칠 수 없는 곳, 즉 '가장 영광스러운 신국'으로 투사했다. 로마인들이 자신들의 영웅들에게 돌렸던 덕목들은 다른 국가, 즉 신국의 시민들에게서만 실현될 것이다."(442)


<신국론>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에 관한 책이 되기는커녕 '모두가 공유하는 죽어야 하는 삶 안에서 우리의 일'이라는 주제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책이 되었다. 즉 신국은 이 세상 내에서 저 세상적이 되는 것에 대한 책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완벽을 추구했지만, 펠라기우스주의의 지독한 완벽주의를 혐오했다.(460) "아우구스티누스는 '오점이나 결점'이 없는 교회를 만들 수 있다는 펠라기우스파의 새로운 주장은 자신들만이 그런 교회에 속한다는 도나투스파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펠라기우스의 영향 하에서 시실리와 그 밖의 지역에서 생겨난 '완벽한' 기독교인 무리들을 관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494)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본성(자유의지)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펠라기우스파가 가톨릭 교회와 선량한 이교도 사이의 차별을 흐리게 한다고 생각했다."(497) 그들의 주장대로 "인간의 본성이 그렇게 완벽하다면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할 필요가 없으며, 주교의 축복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너의 믿음이 실패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특별히 하셨던 기도는 어떻게 되겠는가? 이 문서들(밀레비스와 카르타고 종교회의 문서들)은 펠라기우스파를 용인해주면 가톨릭 교회는 인간을 인간들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기구로서 행사하기 시작했던 거대한 권위를 잃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509)


429년 말경 "반달족의 대규모 군대가 에스파냐에서 서서히 마우레타니아 해안을 따라서 접근해왔다. 다음 해 그들은 누마디아를 약탈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교들에게 "양떼들 곁을 떠나지 말라고 요청했다. 반달족이 히포 근처로 다가옴에 따라 그는 그와 그의 회중들이 직면한 이 사태를 견뎌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는 '인내의 은총'은 하느님이 개인에게 주는 가장 큰 은총이라고 말했다."(575) 그러나 "가톨릭 주교들은 분열되었으며 사기를 잃었고, 그들의 양떼들은 수동적이었다. '로마 세계의 정복자'들에 직면해 그들은 순교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프리카에서 자신의 평생의 업적이 폭력으로 인해 파괴되는 것을 살아서 보았다."(6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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