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의 로마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로버트 냅 지음, 김민수 옮김 / 이론과실천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로마의 지배 계층은 세 단계의 서열로 나뉘었다. 첫째는 사회, 경제적으로 가장 신분이 높은 원로원 계급이고, 둘째는 서열과 권력에서 원로원 계급에 뒤지는 대신 재산 축적에 몰두한 기사 계급이며, 셋째는 십인대十人隊 계급으로, 제국 전역에 걸쳐 마을과 도시의 관리를 책임졌다. 이들 아래에는 로마인의 99%를 차지하는 평민, 빈민, 노예 등이 각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엄청난 부자를 호네스티오레스honestiores [더 고귀한 자]라 부르고, 나머지 자유민을 휴밀리오레스humiliores [덜 고귀한 자]"라고 불렀는데, 이는 로마인들 스스로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사이의 사회경제적 단절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15)


중간계층에 속한 평민들은 "같은 계급의 사람은 대등하게 대하고, 자신보다 낮은 계급의 사람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이용하며, 자신보다 높은 계급에 있는 사람에게는 복종"하는 것을 생존 전략으로 체득했다.(16-7) 로마인들은 사람의 미래가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으며, 초자연적인 절대자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올바른 방법으로 올바른 일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신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비결"이라고 생각했지만, "신의 은혜를 입기 위해 지켜야 할 교리나 도덕률"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33) 로마의 법체계는 지배계층에 절대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에, "평민층은 법률 시스템에 적대적이었다."(56)


"폭력은 당시의 평민 남자들의 삶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고, 이들은 "다양한 상황에서 언제라도 자신들의 분노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표출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67) 평민 남자들은 "자신 (혹은 다른 누군가)의 노예를 때리고 강간했으며 정신적으로 학대했다. 또 자식 위에 철저하게 군림하여 마음대로 체벌을 가했다. 아내도 남편의 폭력 앞에서 달리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집 밖에서 개인 간에 분쟁이 벌어졌을 때는 대개 결투를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 당시는 명예를 중요시하는 문화였기 때문에 모욕을 당했을 때는 결투와 같은 강력한 형태의 자기주장이 허용되었다."(63) 따라서 사회 통합을 목적으로 종교 의식, 대중 오락, 사형 집행 등이 행해졌다.


평민 여자가 갖추어야 할 핵심 덕목은 "정절과 순결, 근면"이다. 여자는 "남자가 재산을 물려줄 수 있도록 자식을 낳아 주는 존재"에 불과했고, 법적 지위가 없었다. "여자는 투표를 할 수 없었고, 모든 고등교육에서 사실상 배제되었다."(89-90) 예외적으로 "세 명의 자녀(해방노예의 경우 네 명)를 둔 여자"는 법적으로 독립적인 주체가 될 수 있었지만,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죽는 일이 흔했고 여자들은 법률적 권리에 무지했으며 남자들은 청원서를 엄격하게 처리했다."(94-5) 지배층의 여자들은 "동반자가 아닌 장신구"로 취급되었고, 평민층의 여자들은 "집안 살림을 잘 돌아가게 하기 위해, 혹은 가족들 끼니를 굶기지 않기 위해 일손을 보탰다."(147)


로마인 대다수는 "기본적으로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사는 남녀 자유민"인 빈민층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0) 노예와 자유민을 합친 빈민의 숫자는 약 65퍼센트에 달했다. 러시아의 농업경제학자 알렉산더 차야노프의 '고된 노동 이론theory of drudgery'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은 일을 더 해 본들 그에 따른 수고를 상쇄할 만한 이득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서면 더 이상 일을 하지 않는다." 이처럼 "빈민층의 '게으름'은 자신의 가능성 없는 미래를 현실적으로 인정하는 그들의 태도 속에 깊이 박혀 있었다."(170-1) 빈민층은 사회 안에서 자신들의 예속적 위치를 기꺼이 받아들였고, 간혹 "권력을 가진 자들의 불공정한 처사"에 불만을 표시하곤 했다.(181)


노예의 수는 비교적 적었고, 그마저도 도시의 부유한 거주 지역에 집중되었다. 노예의 주 공급원은 전쟁 포로, 노예의 자식, 버려진 아이들, 강도나 해적의 인신매매 등이었으며, "노예들은 대부분 신체적 조건과 문화적 배경이 비슷했고 주인과 같은 언어를 쓰는 경우가 흔했다." 피부색이나 외형으로 노예를 구분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다른 시대와 달리 "고대 로마의 노예들에겐 이런저런 가능성들이 더 많이 열려 있었다."(198-9) 노예 반란은 로마 제정 이전에 막을 내렸는데, 전통적인 의미의 반란이 일어날 조건을 애초에 차단하고 노예들의 결속을 약화시킨 주요인은, "노예들 사이에서 질서 유지 책임을 맡은 또 다른 노예들"인 사일렌티아리silentiarii였다.(218)


해방노예는 "노예와 마찬가지로 '유한계급'인 귀족의 삶에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들은 단순히 노동력을 제공하는 차원을 넘어 지배계층이 거느린 노예 가운데 가장 성공한 노예의 본보기였다. 해방노예는 도시의 가정과 시골의 농장에서 집안일과 공적인 업무를 책임졌고, 장사나 사업에서는 주인을 대신해 재정적인 일을 처리했다."(257) 해방노예의 의무로는 "후원자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인물인지"를 증명해야 하는 관습적 불문율인 옵세퀴아obsequia와 오피시아officia, 그리고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이후 주인의 사업이나 다른 사무를 관리하는 방식을 구체적인 계약으로 정한 오페라에operae가 있었다.(267-8)


고대의 기준에서 보자면 로마 병사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 군대가 의식주를 해결해주었고, 일 년 내내 봉급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군대에 지원하려는 사람은 늘 넘쳐났다."(295) 로마 공화정 초·중기에는 농부를 군인으로 활용하였다. "농부는 쟁기를 내려놓고 집과 가족을 떠나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거나 때로는 오랫동안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군 복무를 하고 돌아와 다시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기원전 2세기 이후에는 장기간의 원정을 마치고 그에 따른 보상을 받기 위해 장군 곁에 남는 농부들이 많아졌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의 내전들"을 거치면서 군대는 "공동체를 떠받치는 근간이 아니라 분열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어 갔다."(320)


아우구스투스 이후 로마 군대는 대대적인 변화를 겪었다. 정기적인 대규모 징병으로 시민 가정이 해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군 복무 기간을 20~25년으로 늘리면서 매년 로마 시민 가운데 뽑아야 할 신병이 7천 500명으로 줄었다. 신병의 충성심은 오로지 황제만을 향했다. 예상 가능한 진급의 유형을 정해 놓은 다음 그에 따른 보상 체계와 고정적인 봉급, 제대 보너스가 자리를 잡게 되면서 시도 때도 없이 특별 보상을 기대하는 병사들의 심리를 원천봉쇄했다." 군대는 지역사회와 격리되었고, "군인들은 종종 자신이 태어난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배치되어 수년간 복무했는가 하면, 여생을 그곳에서 보내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322)


로마 시대 매춘은 "합법적인 행위였으며, 매춘부는 자신의 직업 때문에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았다."(352) 자유인 신분인 검투사의 삶은 위험천만했으나, "그런 위험은 검투사라는 직업의 매력과 명성, 부를 생각하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노예 신분의 검투사는 타의에 의해 검투사가 된 경우지만, 검투사 경력을 발판 삼아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그들에게 확실한 동기부여가 되었다."(423) 갈레노스는 "검투사들의 부상을 치료한 경험을 바탕으로 인체해부학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기도 했다.(416) 준법 시민과 무법자의 경계에 걸쳐 있던 산적과 해적은 재산을 추구하는 '일종의 사업가'였으며, 자신들의 "은신처에서 평등주의적인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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