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발흥 - 사회과학자의 시선으로 탐색한 초기 기독교 성장의 요인
로드니 스타크 지음, 손현선 옮김, 이현수 감수 / 좋은씨앗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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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개종의 역사에서, 흔히 통용되는 인상은 "기독교의 성장이 3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급격히 가속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지수 곡선이 보여주는 다소 이례적인 특성 때문에 '기적적으로 보이는' 성장기에 불과하다.(24) 우리가 기독교 개종 흐름을 통상적인 신흥종교의 성장 속도에 맞추어, "매 10년당 40퍼센트의 속도로 성장했다고 가정하면 100년도에는 7,530명의 기독교인이 존재했을 것이며 200년도에는 21만 7,795명의 기독교인이, 300년도에는 629만 9,832명의 기독교인이 있었을 것이다."(22-3) 따라서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은 대대적이고 폭발적인 도약의 물결을 일으킨 원인이 아니라 이에 대한 대응으로 보는 게 바람직하다."(28) 기독교 성장률이 4세기부터 급격히 둔화된 이유는 "별다른 것이 아니라 그저 제국에 더 이상 전도할 사람이 남아있지 않아서"라는 추정이 가능하다.(32) 


아울러 "기독교로의 집단 개종이 군중이 자발적으로 전도자에게 반응하면서 일어났다는 주장은 개종 프로세스의 구심점이 교리의 흡입력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과학은 교리의 흡인력은 매우 부차적인 역할을 한다고 본다. 대다수의 사람이 새로운 신앙이 전하는 교리에 큰 애착을 가지게 되는 것은 개종한 이후라는 것이다."(34) 이는 기존 관계에 애착 정도가 낮은 사람들의 일탈 행위로 설명할 수 있다. 통일교 개종자의 사례를 살펴보면, "문선명 교인들이 전도하기 위해 접촉했던 사람들 가운데 입교한 사람은 '구성원에 대한 대인적 애착'이 '비구성원에 대한 애착'보다 컸던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개종의 본질은 이데올로기의 추구나 포용이 아니었다. 개종의 본질은 한 사람의 종교적 행동을 친구나 가족 구성원의 종교적 행동과 일치하도록 조정하는 것이었다."(37) 


"새로운 신앙의 성공적인 창시자들은 전형적으로 그들과 이미 강력한 애착관계가 형성된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갔다." 통념과 어긋나는 개종의 또다른 측면은, 종교성이 낮은 집단에서 개종이 더 큰 성과를 거둔다는 사실이다. "현대 미국의 신종교(cult) 집단으로 개종한 사람의 다수는 그들의 부모가 종교적 소속이 없었다고 보고한다." 이것을 이론적 명제로 기술하면, "신흥종교 운동은 주로 종교적으로 소극적이며 불만이 있는 사람들과, 가장 순응화된(세속화된) 종교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들로부터 주로 개종자를 모집한다."이다.(40-1) 개종 운동의 폭발적인 성장은 "운동이 성장함에 따라 비례적으로 그 운동의 사회적 표면적이 늘어나기 때문"이며, "대부분의 신흥종교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는 이유는 재빨리 폐쇄적이거나 반半 폐쇄적인 네트워크로 변하기 때문이다."(43)


"초기 교회가 훌륭한 데이터가 존재하는 다른 모든 신종교 운동과 같았다면, 초기 교회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아니라 좀 더 기득권층에 기반을 둔 운동이었다."(60) 근대 과학의 성장과 더불어 기독교의 가르침에 문제 의식을 가진 이들이 교육 수준이 높은 자들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헬라와 로마의 과학과 철학이 부상하자 이교도의 가르침에 문제가 생겼고 이것 역시 교육받은 자들이 먼저 간파했다." 즉, "종교적 회의론은 기득권층에서 가장 만연한다." 이들은 "기성 브랜드의 신앙에 확신이 없음을 '무교'로 표현"하지만, "반反기성적 신비주의, 주술, 종교 교리를 믿는 것에 관심을 표할 가능성이 '가장 큰' 집단이기도 하다." 문화 혁신을 초기에 수용하는 이들은 "수입이나 학력 면에서 평균을 훨씬 웃도는 수준"이며, "신흥종교는 항상 ‘새로운 사상’을 의미"한다.(66-7)


기존 통설에 따르면, "유대인에 대한 선교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발흥은 달성되었다." 그러나 "1세기부터 2세기 초반까지 교회 성장의 출발 기반을 제공한 것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으며, 이뿐 아니라 최소한 4세기까지 유대인이 계속 기독교 개종자의 중요한 원천이었으며, 유대계 기독교는 5세기까지도 여전히 비중 있는 존재였다."(81-2) 2차대전 이후 해방된 유대인 공동체가 주변부에 머물렀듯이, "사람들이 두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경우, 모순이나 상호 압박이 생기고 타 집단에 소속되었다는 이유로 각 집단에서의 지위가 낮아"지는 주변화 현상이 나타난다. 이때, "사람들은 주변적 위치를 탈피하거나 해소하기 위한 시도"(86-7)하게 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명제는, 사람들이 "이미 익숙한 기성 종교(들)과 문화적 연속성을 보유한 새로운 종교를 더 수월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90)


"잠재적 개종자가 자신의 문화적 유산을 상당 부분 보전하면서도 새로운 것을 일부 첨가하기만 해도 된다면 전환 비용은 최소화"된다.(90) "디아스포라 유대인 네트워크는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을 수적으로 크게 압도"했으며, "도시에 주로 거주했고, 빈곤한 비주류 집단이 아니었다."(93-4) 또한, "헬라파 유대인 가운데 다수는 이미 민족적 의미에서는 유대인이 아니고 종교적인 의미에서만 유대인인 상태였다." 헬라파 유대인은 헬라 문화를 포용했지만 "영적인 게토에 갇혀 '야만인'의 한 부류로 인식"되는 것에 모멸감을 느꼈으며, 따라서 "유대인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헬라 사회 속으로 완전히 편입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어떤 절충과 통합이 시급히 요구"되었을 것이다.(94-5) 이들은 "비교적 현세적이고 절충적이며 세속적"(97)이었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일 준비가 가장 잘 된 집단이었다."(100)


"165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통치기에 가공할 역병이 로마 제국 전역을 강타했다."(115) "고전 사회가 이런 재난에 의해 지축이 뒤흔들리고 희망을 잃는 일이 없었더라면 기독교가 지배적인 신앙으로 부상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역병 초기부터 "기독교의 사랑과 선행의 가치관은 사회 봉사와 공동체 결속으로 현실화되었다. 재앙이 닥쳤을 때 기독교인은 더 훌륭하게 대처했고, 그 결과는 '월등히 높은 생존률'이었다." 기독교인의 월등한 생존율은 "기독교인이나 이교도 모두에게 “기적”으로 비쳐졌을 것이고, 이는 개종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또한 "기독교의 사회적 네트워크가 보여준 우월한 생존률로 말미암아 이교도가 유실된 애착관계를 기독교인과의 새로운 애착관계로 대체할 가능성이 훨씬 더 커졌다."(117-9)


기독교 교리의 독특한 점은 "고도로 '사회적인' 윤리 강령을 종교와 결부"시켰다는 것이다. 이교도들은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서로 사랑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발상"을 낯설어했다. "실제로 하나님이 희생을 통해 그의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처럼 인간은 '서로를 위해' 희생함으로써 인간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했다. 아울러 이런 책임은 가족과 부족의 유대를 넘어 실상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 모든 자들"(고전 1:2)에게로 확장되어야 했다. 이것은 가히 혁명적인 생각이었다."(134-5) 결국, "기독교인은 죽음을 불사하는 역량을 발휘했을 뿐 아니라 사망할 확률도 훨씬 적다는 걸 누구나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이는 대규모 개종으로 이어졌다.(141)


"그레코-로만 사회에서는 원치 않는 여아와 기형 남아를 유기하는 것은 합법적이었을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용인되었으며 사회 전 계층에 걸쳐 빈번하게 행해지던 일이었다."(151) 기독교는 "모든 형태의 영아 살해와 낙태를 금지함으로써 이교도 가운데 존재했던 성비 불균형의 주 원인을 제거"했으며, 이는 여성 사망률 감소와 더불어 기독교 공동체의 '여초女超 현상'을 초래했다.(154) "여성에 대한 보다 호의적인 시각은 기독교인이 이혼과 근친상간, 외도, 일부다처제를 죄악시했다는 데서도 드러난다."(160) 아울러, "기독교인 여성은 비교적 상당히 늦은 나이에 초혼을 했으며 배우자 선택권도 훨씬 넓었다. 이교도 여성이 종종 사춘기 이전에 혼인과 동시에 성관계를 강요당했음을 볼 때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162)


"여성이 공급 부족인 세계에서 혼령기의 기독교 여성이 기독교 남성 수를 크게 초과했다. 그리고 기독교인은 딸을 불신자와 결혼시킬 때 신앙을 저버릴 염려를 별로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통혼은 흔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개종 매커니즘에 관해 아는 바로는 이런 통혼은 2차 개종으로 귀결되었을 것이다." 높은 비율의 족외혼은 기독교가 폐쇄적인 신자 공동체로 전락하지 않고, '개방형 네트워크'로 활력을 유지한 비결 중의 하나이다. 게다가 당대의 출산력이 대체수준(replacement levels, 총인구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출생률)을 하회하는 가운데, "기독교의 출산력은 이교도의 출산력을 크게 상회했을 가능성이 크며 이 역시 그레코-로만 사회의 기독교화에 일조했다."(176-7)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성서의 명령을 지켰던 기독교인들의 "출산율은 이교도보다 훨씬 높았으며 사망률은 훨씬 낮았다."(179)


'도시 규모'도 기독교화에 영향을 주었을까? 피셔에 따르면, "절대치의 인구가 많을수록 일탈적 하위문화 형성에 필요한 '임계치'를 모집하기가 더 쉽다."(203) 당대의 도시들은 좁은 면적과 높은 인구밀도를 보였으며, "무질서, 사회 해체, 불결함, 질병, 비참함, 공포, 문화적 혼돈"이 어우러진 장소였다.(224) 잦은 신착자 유입은 "사회 통합을 가로막고, 일탈과 무질서"를 초래했으며, 내부의 인종 분열이 사회통합을 저해했다.(237) 안정된 애착관계의 네트워크가 부실한 가운데, 도시인들은 위험과 절망, 증오가 만연한 일상생활을 견뎌내야 했다. "그들은 틀림없이 안식과 희망과 구원을 갈망"했을 것이다. "노숙자와 빈민으로 가득 찬 도시에서 기독교는 구제뿐 아니라 희망도 제공했다." 기독교가 제공한 확장된 가족 공동체는 "도시의 삶을 더 잘 견뎌낼 수 있게 하는 새로운 문화였다."(241-2)


"(기독교를 탄압한) 유세비우스가 보기에도 순교자의 용맹과 절개는 기독교가 가진 미덕의 방증이었다. 실제로 많은 이교도가 깊은 인상을 받았다."(246) "간증은 사람들이 간증자의 주장을 믿는다고 해도 간증자에게 돌아갈 상대적 실익이 별로 없거나 손해 볼 일이 많을 때 그 설득력이 배가된다. 따라서, 종교 지도자들이 그들의 종교적 섬김에 대한 대가로 낮은 수준의 물질적 보상을 받을 때 그들의 신뢰도는 더 높아진다." 동일한 논리를 순교에 적용할 수 있다. "순교자는 가장 큰 신뢰를 받는 종교적 가치의 표방자다. 그리고 이 점은 순교에 자발적 측면이 있을 때 더욱 그러하다. 배교를 선택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고문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한 사람은 그 종교에 상상을 초월하는 지고의 가치를 부여하며 또한 그 가치를 다른 사람에게도 전한다."(260)


에드몬슨은 "베드로가 (로마로) 되돌아가 기꺼이 순교했다는 소식을 접하는 사람마다 아무리 요동하는 자라도 마음과 양심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고찰했다. 베드로로 대표되는, "60년대의 순교자들은 대속의 증거인 예수의 고난에 자신들의 고난을 더함으로써, 재림 예언의 실패와 소수의 개종자라는 위기를 해소했다."(280-1) 기록된 대부분의 사건을 보면, "순교에 직면할 정도의 역량은 집단적으로 생성된 헌신 가운데 특출난 경우에 해당되며, 지명도 있는 구성원들이 순교에 엄청난 지분 가치를 거는 결과를 초래했다. 순교는 공개적으로 행해졌을 뿐 아니라 종종 대규모 구경꾼들 앞에서 이루어졌다. 준비 기간 중에 순교의 문턱에 선 사람들은 열렬하고 직접적인 예찬의 대상이 되었다."(268-9) 순교는 대중들에게 기독교에 가입하는 행동을 '훌륭한 거래'로 인식시켜 주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교의 무기력과 이교 자체의 취약점으로 인해 기독교에 상당한 확장 기회가 열렸다."(303) 1세기 제국의 다원성은 '과잉' 수준이었다. "다양한 새로운 신들이 제국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대거 유입되었으며 그 결과 E. R. 도즈의 말처럼,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대안이 무더기로 쏟아졌다."(295) 그러나 이교도의 신들은 기독교의 신과 여러모로 달랐다. 폼페이의 신성모독적인 그라피티가 시사하듯이 "고전 신화에는 신들이 종종 심심풀이로 인간에게 못된 짓을 하는 이야기들로 넘쳐난다. 아더 다비 녹크는 이런 신들을 숭배하며 진실한 믿음을 가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고찰했다."(298-9) 반면, 기독교의 신은 그리스 판테온의 신들처럼 변덕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선과 악의 두 가지 범주로 구분된 초자연적인 상태를 관장하는 '합리적인 신성'이었다.


"고전시대 철학자들은 자비와 동정심을 병리학적인 감정으로, 그러니까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해야 할 성격상의 결함으로 간주했다. 자비란 '노력하지 않은' 자에게 도움이나 위안을 제공하는 것이므로 정의와 상반되었다. 그러므로 '자비는 실상 전혀 이성의 통치를 받지 않으며' 인간은 '자비라는 충동을 절제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기독교는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자비가 주요한 미덕이며 자비로운 신이 인간에게도 자비로울 것을 요구한다고 가르쳤다."(317) 기독교는 '민족성(ethnicity)을 완전히 탈피한' 통일성 있는 문화를 제시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기독교인 가운데에는 민족성이 점차 희석되고, 새롭고 보다 보편적이며 실로 세계시민적인 규범과 관습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319) "기독교가 개종자에게 선사한 것"은 바로 그들의 '인간성'이었다.(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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