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쇼 데모크라시 일본 근현대사 4
나리타 류이치 지음, 이규수 옮김 / 어문학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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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데모크라시는 메이지 헌법 체제에 대항하여 러일전쟁 이후부터 1920년대까지 벌어진 정치적 자유 획득 운동을 가리키며, "국가적 가치에 대한 비국가적 가치의 자립화를 특징으로 한다."(294) 그 첫걸음은 포츠머스 강화조약에 배상금이 포함되지 않자, 도쿄 히비야 공원에 군집한 대중이 내무대신 관저와 강화에 찬성한 국민신문사를 불태우면서 7일 동안 격렬하게 항의를 벌인 히비야 방화사건(1905.9.5)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러한 사태가 '국민'이라는 이름 아래 수행"된 것이다. "번벌과 압정에 대한 비판은 '국민'이라는 이름 아래 팽창주의적인 국권"을 요구하는 형태를 띄었으며, 이는 내셔널리즘과 결합된 '제국'의 데모크라시였다.(24-5)


'민본주의'는 요시노 사쿠조가 데모크라시의 번역어로 삼은 말이다. "당시 데모크라시에는 '민주주의'라는 또 하나의 번역어가 있었는데, 이 뜻은 '국민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다'는 것으로 군주국 일본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배척당했다. 요시노는 민본주의를 주권의 존재가 아니라 주권 운용의 개념으로 받아들여, 정치의 목적을 '일반 인민의 이복(利福)'에 두었고, 정책의 결정은 '일반 인민의 의향'에 따르는 것이라 말했다." 다시 말해, "주권은 천황에게 있다는 것을 전제로 '인민을 위한' 정치, '인민의 의향'을 중시하는 정치로서 민본주의를 제창한 것이다."(45-6) 국가를 앞세운 민본주의 논의는 '안으로는 입헌주의, 밖으로는 제국주의'를 주창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러일전쟁 이후 시베리아 출병과 매점매석 등으로 쌀값이 폭등하자, "물가의 등귀와 생활난이라는 말이 잡지와 신문에 자주 등장"하고 민심이 악화되었다. 생활고가 야기한 쌀소동 사태는 정당 정치를 낳아 최초의 본격 정당 내각인 하라 내각이 탄생(1918.9.29)한다. 하라 내각은 선거 자격을 직접국세 10엔에서 3엔 이하로 낮추어(1919.5) 유권자 수를 "134만 명에서 286만 명"으로 늘리고, "소선거구제를 도입하여 의원정수를 381의석에서 466의석으로 늘렸다."(116) 여당인 정우회와 야당인 헌정회는 모두 적극적으로 지역 이익의 도입을 도모하였고, "국가에 의해 사생활 영역에 대한 합리적 개선이 시도되어 근대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국민'의 육성이 촉구되었다."(120)


쌀소동 이후, 사회개조를 주장하는 움직임은 네 가지 조류로 나뉜다. 첫째는 "정당정치의 확대와 민의 존중을 주장"한 민본주의 논의의 진전이고, 둘째는 사회주의 운동의 복권이다. 셋째는 "일본과 천황을 전면에 내세워 '국체'에 입각한 개조를 추구한 국가주의 단체" 운동이었고, 넷째는 국가와 시정촌이 주도한 새로운 사회 편성 시도였다.(130) 데모크라시 논의가 여전히 '국민'을 근거로 이루어졌지만, "노동자와 농민, 차별받는 사람들에게도 1920년 전후의 시기는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이 시기에는 노동조합이 다수 조직되어 가와사키 조선소와 야하타 제철소의 노동쟁의를 비롯해 아시오와 히타치 광산 등 쟁의 건수도 늘어났다."(147)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식민지 조선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3·1운동이 일어나자 하라 내각은 "헌병경찰제도를 폐지하고 대검(帶劍)을 중지"시켰으며, "다음 해에는 통치 방침을 '문화의 발달과 민력(民力)의 충실'로 변경하여 '문화통치'를 추진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사신문> 등 조선어신문도 창간되었다."(176) 도쿄제국대학에서 니토베 이나조의 뒤를 이어 식민정책강좌를 담당한 야나이하라는 전제적 착취나 동화 정책이 아닌 "자주 노선에 입각하여 별개의 '역사적 사회'를 지닌 조선인과 협동하는 방향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이 역시 "조선과 일본과의 '제국적 결합'을 견고하게 만들기 위한 식민지 통치론"에 불과했다.(181-2)


관동대지진(1923.9.1) 당시 "조선인 학살에 직접 관여한 자가 '민중'이었다는 사실은 식민지 사람들을 차별, 배제하면서 그들에게 공포의 심성을 품은 제국 사람들의 존재 양태를 보여준다." 그간 정부를 향해 각종 소요를 일으키던 잡업층은 "자신들의 일자리가 빼앗길 수도 있다는 불안을 진재 사태 속에서 분출"하였다.(202) "개인주의의 진전과 모더니즘 문화의 대두, 사회운동의 전개"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공격받았고 내셔널리즘이 강화되었다. '국체'와 '순풍미속(醇風美俗)'을 전면에 내세워 도시화에 따른 문제를 해결하고 국민 통합을 일궈내려는 움직임은 "1923년 11월 내려진 '국민정신작흥조서(國民精神作興詔書)'로 집약되었다."(205)


1925년 기요우라 내각이 착수한 '보통선거―치안유지법 체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통치기구가 재편성된 것의 귀결이었다. 귀족원과 추밀원 개혁, 노사관계와 소작관계의 입법화 등 하라 내각 이후의 사회 재편성과 관련된 일련의 흐름이 보통선거법과 치안유지법으로 체계화되었다." 이는 "정당을 '정치적 지배계급의 하나의 분지(分肢)'로부터 '국가 의지 결정의 중심'으로 만든 개변"이었고, 한편으로는 한층 확대된 선거권 부여(25세 이상의 제국신민 남성에게 선거권 부여)를 통해 "사람들을 '국민'으로 자각시켜 주체적으로 국가와의 일체화를 촉구"하려는 움직이었다. "통합(보통선거)과 배제(치안유지법)를 통해 선별적으로 '국민화'를 도모한 것이다."(239)


다이쇼 천황이 사망(1926.12)한 후 출범한 다나카 내각의 초점은 무엇보다 '외교 문제'였다. 다나카 내각이 동방회의에서 발표한 '대지정책강령(對支政策綱領)'은 만몽 지역을 중시하여, "제국의 권리 이익과 재류방인의 생명 재산이 침해될 염려가 있을 때에는 '단호한 자위 조치'에 나선다는 내용이었다. 또 중국으로부터 만주 지역을 분리하는 '만몽분리론'도 제시되었다. 여기서 헌정회의 외교정책이었던 협조외교(시데하라 외교)는 무단 외교(다나카 외교)로 전환되었다."(255) 아울러 치안유지법을 개정하여, "국체변혁의 죄에 최고형을 사형으로 상향 조정하고, 대상 범위를 '결사의 목적 수행을 위해서 행동하는 자'로 변경"하는 등 자의적 규정을 부가했다.(262)


하마구치 내각(1929.7.2) 시기에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사상과 운동을 되살리면서 기존 사회관계의 개량을 시도한 관료들이 출현했다. 관료들은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운동 주체인 '민중'(노동자와 농민, 여성)의 요구를 포섭하고 국가 주도로 사회개조를 실천할 수 있는 정책을 입안하여 실현하려고 노력했다."(266) 그러나 사회개조 운동이 급진화되면서, 노동쟁의와 소작쟁의가 늘어나고 "이와 병행하여 군부의 헤게모니가 대두할 징후"가 나타나자, 정당정치에 대한 회의가 확산되었다.(269) 이 모든 혼란을 집어삼킨 만주사변은 "대립과 대항의 존재를 해소하고 소거"시켰다. '끓는 조국애의 피, 일본에 넘쳐 흐른다!'는 <도쿄아사히신문>(1931년 11월 19일)의 표제어였다.(286-7)


※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 구분

(1) 러일전쟁기(1905년) ~ 제1차 호헌운동(1912~1913년) : 번벌(藩閥) 정치 타파를 내건, 전국적인 도시 민중 운동. 군비 확장 반대와 악세 폐지를 요구하면서 조슈번벌의 핵심인 가쓰라 타로 내각을 무너뜨렸다. 이는 일본의 민중운동이 천황제 정부에 승리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정당에 기초하지 않던 정부가 이제 천황의 조칙(詔勅)이라는 권위와 위세를 통해 권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의미를 지닌다. 운동을 주도한 계층은 러일전쟁 이후 자본주의 발전이 만들어 낸 비특권 자본가 계층과 ‘단나슈’로 일컫는 도시중간층이었다.

(2) 제1차 호헌운동 ~ 쌀소동(1918년) : 도시중간층을 기반으로 데모크라시 운동의 뿌리가 확대되어 각지에 보통선거 요구를 중심으로 한 자주적인 시민정치결사가 생겨났다. 요시노 사쿠조는 주권 운용을 민중의 의사결정에 맡긴다는 '민본주의'를 헌정의 기본 이념으로 설정하고, 구체적인 정책으로서 안으로는 보통선거와 정당내각제의 채용, 밖으로는 식민지 조선에서 자행된 무단적 침략정책의 포기를 주장했다.

(3) 쌀소동 ~ 제2차 호헌운동(1924년) :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근로대중의 정치적 자각이 고조되었고, 보통선거운동이 전국적 대중운동으로 전개되었다. 평화에 대한 요망도 제기되어 시베리아 출병은 국민적 지지를 얻지 못해 패배로 끝나고, 워싱턴회의를 통한 군비축소는 대중에게 환영을 받았다. 헌정회, 혁신구락부, 정우회의 호헌 3파에 의한 제2차 호헌운동은 정당정치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다. 그러나 정당정치가 1929년 세계대공황과 중국민족운동이라는 새로운 사태를 타개하지 못하자 점차 군부 파시즘이 대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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