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권과 헌법 일본 근현대사 2
마키하라 노리오 지음, 박지영 옮김 / 어문학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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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1880년대에 민선의원 설립과 입헌정체를 주장한 자유민권운동에서 '민권'이란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말한다. 따라서, 자유민권운동은 "정부에게 '국민의 권리'를 요구하는 한편, 민중의 '객분客分' 의식을 불식시켜 '국민으로서의 자각'을 환기"시키고자 했다.(45) 후쿠자와 유키치가 "평등을 역설하고 학문을 장려"한 것도,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지닌 '국민'으로서의 자각"을 일깨우기 위해서였다.(41) 당시는 메이지 정부와 민권파, 그리고 민중의 3극 대립 상황이었는데, "민권파와 정부는 대립하면서도 '근대국가의 건설' '민중의 국민화'라는 큰 틀을 공유했고, 민중과 민권파는 지향하는 방향은 달랐지만 '반정부'라는 점에서 뜻"을 같이 했다.(50-1)


메이지 정부 내에서는 '천황의 친정 여부, 재정 및 헌법 문제'가 핵심 사안이었다. 이와쿠라는 천황 즉위시 원로원에서 "국헌을 준수한다는 서약을 하도록" (2장 6조) 규정한 1876년 헌법 초안이 헌법을 천황보다 상위에 둔다고 지적하고, 각 참의들에게 '우리 국체(國體)'에 걸맞는 의견을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영국식 입헌정치를 도입하려던 오쿠마 시게노부가 이토 히로부미를 위시한 세력에게 밀려 천황에게 파면당하는 '메이지 14년 정변'이 일어나고, 곧이어 마쓰카타 마사요시의 디플레이션 정책으로 농촌이 심각한 불경기에 빠지자, 정당 운동은 급속도로 쇠퇴한다. 현의회도 지역의 이해관계에만 집착하면서 "국회 개설 후 정치가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예비한다.(82-3)


천황 친정親政이 "천황 개인의 의사나 자질로 인해 정치가 좌우되고, 나아가 천황이 정치 책임을 지게 되는 빌미"가 된다고 생각하던 이토는 1885년 12월, "신분제와 태정관제를 폐지하고, 내각 총리대신과 9명의 국무대신으로 구성된 내각제를 발족시켰다."(200) 아울러 전국에 걸쳐 천황 순행을 실시하고, 궁중의례 등 천황과 관련된 전통을 만들어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세신궁은 "천황의 조상신 아마테라스 오미가미를 모시는 성지로 탈바꿈"(220)했고, 야스쿠니 신사도 재정비되었다. 이처럼 천황제는 "서양 문명과 입헌제, 의회제에 대항하기 위해 서구의 기준에 따르면서도 독자성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필요성에 의해 창출된 '새로운 전통'이었다."(223)


세이난 전쟁 이후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이 번갈아 나타나면서, "민중이 몸으로 느끼는 경제관념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이제 사람들은 "상업의 자유나 계약이 민중의 생활보다도 우선한다는 것, 윗사람의 도움이나 타인의 호의를 바라지 말고 자기와 가족의 힘만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곤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가 왔음을 실감하였다."(107) 1880년대 후반에는 "집단 내에서 명령받지 않더라도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규율을 지키며 노동하는 사람만이 근면한 사람이라는 문명국 표준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가혹한 노동 조건 속에서도 생활 수준 향상을 위해 열심히 노동해야 하는 '근대'의 막이 본격적으로 열린 것이다.(119)


※ 세이난 전쟁 : 정한론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가 1873년 조선사절단 파견을 둘러싼 집권세력 다툼에서 이와쿠라 도모미 등에게 밀려난 뒤, 사족 세력을 모아 1877년 반정부 투쟁에 나섰으나, 정부군에게 진압된 사건. 이후 반정부 운동이 자유민권운동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문명국을 동경하고 '탈아脫亞'의 길을 지향하던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서구 문명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지역은 미개하고 야만스러우며, 대등한 상대로 인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대두되었다. 오히려 "야만스럽고 미개한 사람들을 '문명'화시키는 것이 서구인의 역사적 사명이고, 식민지화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라는 논리"를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따라서 '영토, 권력, 국민'이라는 근대국가의 구성 요건을 갖추지 못한 지역은 만국공법에 따라 '무주지無主地'로 간주하며, "최초로 점유한 자가 소유권을 가진다는 '선점先占'의 논리가 국가 차원에서도 적용되어 식민지 지배가 정당화되었다."(124)


1875년 체결된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가라후토·지시마 교환조약)은 가라후토(사할린)를 러시아령으로, 지시마 열도(쿠릴 열도)를 일본령으로 정했다. 이 조약은 러·일 양국의 국민은 계속 거주할 수 있지만, '원주민은 현재 살고 있는 땅에 거주할 권리, 또 그대로 현재의 영주의 신민이 될 권리가 없다.'(조약 부록 제4조)고 규정하여, 3년 이내에 국적을 선택하고 이주할 것을 강요했다."(126)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한 조일수호조규(1876.2) 1조 역시 "중국의 조공 체계로부터 조선을 분리시키려는 의도"를 표명한 것에 불과하다.(143)


근대적 소유권은 "독립적인 개인에 대한 간섭을 배제하는 자유권이나 참정권의 기초가 되었으며, 동시에 토지와 주민을 국경선으로 에워싸고 배타적인 국가 주권을 근거로 내정 간섭을 거부하는 독립 국가의 논리"로 발전했다. 소유와 자유가 동일시되는 논리 하에서 자유민권운동은 "민권과 국권을 불가분의 관계라고 주장하는 국민주의 운동"으로 변모되었고, "문명화와 국민화를 강요"당한 대다수의 본토 민중들은 내국 식민지인의 처지로 전락했다. '욕망'의 시대인 근대는 이 과정이 "누군가로부터 강요당한 것이 아닌 자발적인 의지, 자주적인 선택"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강조하면서, 제도 수립과 정신 개조를 통해 국민들의 '욕망'을 끊임없이 환기시켰다.(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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