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희의 사유세계 - 주자학의 패권
호이트 틸만 지음, 김병환 옮김 / 교육과학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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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년 여진족이 중국 북방을 정복하여, 북송北宋이 몰락하자 "유가 지식인들은 충성과 절개를 지키지 못하였거나 심지어 오랑캐에게 몸을 의탁한 사대부들에게 큰 수치심을 느꼈다." "많은 유학자들은 문화와 도덕관을 부흥시키는 것이야말로 국가를 재건하고 외적의 세력을 축출할 수 있는 힘"이라는 생각 아래 "어떤 전통이 비로소 ‘도道’에 대한 정확한 해석인지, 어떤 전통이 유교 사회의 가치 기준이 될 수 있는지를 심도있게 토론하였다."(26) 그러나 고종은 "진회(秦檜, 1090-1155)의 주화파가 의견이 다른 인사들을 탄압하는 것을 용인하였으니, 특히 금과의 전쟁을 강경하게 주장하는 도학인사들을 배척하였다."(30)


이런 상황에서 "도학道學 인사들은 사회적·정치적·문화적 유대를 형성하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였으며, 사회 정치 문화를 개선함으로써 도덕가치를 부흥시키고 유학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서원은 도학 집단의 중요한 활동 중심이었으며, 그들은 서원에서 각종 예의 규범을 실행하였고 단체의 책임감과 응집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학생들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예를 행하고 제단 앞에서 유가의 성현과 선사先師들을 향해 향을 피워 공경을 다함으로써 도학 전통 내부의 연속성과 응집력을 강화했다. 도학 인사들은 서로 이끌고 도와주었으며, 관직 추천이나 승진 시에 특히 서로를 후원하여 훗날 그들이 매우 크게 성공할 수 있게 하였다."(15) 


대표적인 도학자인 정이는 "오늘날의 학자들은 세 부류로 나뉜다. 문장에 능한 자는 문사文士라 하고, 경전을 담론하는 자는 강사講師에 가까우며, 오직 도를 아는 자만이 바로 유학자이다"라고 말했다. 즉, "'도道'를 아는 학자만이 비로소 '유儒'라고 불릴 수 있으며, 전통적인 문학과 유가의 <오경五經>을 연구하고 익히는 것은 더 이상 유학자를 가늠하는 표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19) 이들은 구양수(歐陽修, 1007-1072), 왕안석(王安石, 1021-1086), 소식(蘚軾, 1036-1101)같은 문사형 인사들이나 전통 방식을 옹호하는 '세유世儒'에 맞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규정했으며, 그 중심에는 동시대 학인들과의 논쟁과 대립을 통해 도학 이론을 가다듬은 주희朱熹가 있다.


장구성張九成은 "불교가 유교의 기본인 삼강오상三綱五常을 파괴하고 윤리적 실천의 결핍을 초래한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불교는 참선 정좌에 만족하지만, 도덕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수신 양성을 그치지 않아 더욱 완전한 자아와 사회를 건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36) 호굉胡宏은 "앎[知]이 실천[行]에 앞선다고 독실히 믿었고, 불교가 유가의 ‘심心’과 같은 개념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고 여겼다. 호굉은 선종의 영향을 뿌리 뽑고 경전과 역사를 연구하여, 고대의 이상적 제도를 회복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38) 그는 일상생활 속에서 본심을 체득하는 수양 공부를 중시했으며, 수양을 통해 "인仁과 지智가 합일된 연후에야 군자의 학문이 성취된다"고 보았다.(45)


1160년대에 이르러, 주희는 "소식형제와 장구성 및 여본중이 유가경전과 노자, 장자, 붓다의 사상을 혼합"하여 "이단의 사설邪說이 차츰 발전하여 기세를 떨친다고 생각했다."(52) 장식張栻은 "그들도 사실 유가의 도덕을 따르지 않는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면서도, "그렇기에 ‘우리 도당[吾儒]’과 각종 이단의 가르침을 추구하는 무리들을 구분해 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57) 장식은 "유가의 기본인 가정·사회 윤리가 인간의 삶과 국가 생존의 근본"(63)이라 믿었으며, "반드시 격물格物의 수양 공부로 리理에 대한 인식을 강화해야만 비로소 주관적 편견을 피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67)


여조겸呂祖謙은 “한 스승만을 따르지 않았고 한 학설만을 추종하지 않”는 학문 방식을 통해 다른 도학파들의 사상을 결합하였다.(106) 그는 "모든 이들은 나름대로 자신만의 편견이나 선입견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편견의 원천이 되는 곳을 찾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고치기 위해 도덕적 노력, 즉 공부를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09) 그는 "풍속은 단지 우리들이 만든 것이다. 우리 스스로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풍속이 어떻게 좋아질 수가 있겠는가?”라면서, 학생들이 과거 시험에 적극적으로 응시하여, "정치의 중심지인 조정에서부터 사회를 변화시킬 것"을 요청했다.(118-9)


주희와 여조겸은 "불학과 도학과의 경쟁, 교육제도 개선 그리고 유학의 발양"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사회의 의식과 단결을 강화할 수 있는 서원 재건에 주력한다. 여조겸은 주희와 함께 "왕안석 신법 중 교육제도의 폐단을 비판하며, 학교교육이 과거科擧를 위한 문장연습에 치중하고 있는 점에 반대"하고, "유가경전의 학습과 도덕 교육을 강조"하여, 서원을 중심으로 "정이·정호와 장재의 학설을 심도있게 연구한다."(147) 주희와 여조겸은 "'천심天心'이 곧 '군자의 마음'이라고 여겼다." 주희는 "성인이 그 마음을 극진히 해서 천天과 본성을 알게 되고 만물과 합하여 일체가 될 때, 성인의 마음은 ‘천심’과 합하여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161)


1180년대 이후로 "주희는 정치적 함의가 짙은 ‘오당吾黨’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도학 동도同徒들을 지칭했으며, 그들의 문화적·정치적인 사명을 제시하여 간접적으로 조야의 여러 유생과 학인들을 향해 도전했다."(172) 그는 "흑과 백을 구별하지 않으면 옳고 그름을 논할 수도 없다. 함부로 ‘무당無黨’을 말하는 것은 도를 더 혼란하게 한다”고 하면서, 당을 구별하지 말 것을 제창하는 인사들을 질책하고, 도학에 한층 짙은 정치적 색채를 입혀나갔다. 주희는 "국내 학술의 폐단은 두 가지 설에 불과하다. 강서의 돈오頓悟와 영강의 공리주의인데, 만약 온 힘을 다해 이들과 쟁론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도는 밝아질 수 없다"는 말로 도학 내부에서 사상 논쟁을 벌여나갔다.(177)


진량陳亮은 "모든 원칙을 판단할 수 있는 추상적인 혹은 초월적인 표준은 없다고 여겼다."(223) 그는 주희의 불변하는 기본 가치에 직접적으로 도전하여, "도道가 역사 발전과 인류의 행위에 내재되어 있으며, 시간과 상황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237) 주희는 유일한 도를 바탕으로 모든 만물과 제도를 평가해야 비로소 “천지의 불변하는 이치와 고금에 통용되는 옳음을 나 자신 안에서 얻어”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영원히 존재하는 불변적 도덕규범의 도와 역사 속에서 단속적으로 실현된 도라는 함의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도를 구분한다." 주희가 보기에 "도道는 본래 소실된 적이 없고, 단지 인간이 도를 준수하지 못했을 뿐이다."(241-2)


주희가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학문 연구와 도덕 훈련을 강조한 것과 달리, 육구연陸九淵은 모든 사람이 "맹자가 말한 '본심'과 인의예지 '사단四端'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육구연은 "사단은 곧 마음이며,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것이 곧 마음이다. 사람에겐 모두 이 마음이 있으며, 마음엔 모두 이 이치가 있으니, 마음이 곧 이치理致”라는 말로 '심즉리心卽理' 사유를 전개하였다.(255) 주희는 "마음이 곧 리理"라는 논리는 불교도의 견해와 같은 것으로, 이는 경전經典 연구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소홀히 하면서, 쉬운 수양 방법으로 본심의 각성覺醒에 도달하려는 방식이라고 준엄하게 비판했다.


주희는 "지식에 매우 의미 있는 독자적 지위를 부여했으며, 지식이 도덕윤리의 기초라고 생각했다."(287) 그는 <대학大學>, <중용中庸>의 주석을 지으면서 자신이 공자와 맹자로부터 북송사자北宋四子에게 직접적으로 전승된 도통道統의 계승자임을 은연중에 암시하였다. 육구연은 "전통과 도통을 정의하는 주희의 권위를 의심"하면서, "동도同道들과 학문을 토론하여 ‘하나의 올바른 곳’에 도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300) 주희는 그의 말이 합당한 표준이 되지 못한다고 반박하면서도, "표준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주희는 육구연이 자기 마음속의 판단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전통적인 경전의 판단에 의거하지 않았다"고 공격할 뿐이었다.(299)


"1241년 1월, 송나라 이종은 칙령을 반포하여 정통 사상으로 도학을 전면 수용"하였다. 남송 정부가 입장을 바꾼 이유는 "몽고인들이 북방에서 공묘를 건설하고 과거제도를 시행"하는 등, 자신들이 "유가 문화를 후원하는 신정권이며 나아가 중국의 합법적인 통치자임"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315) 주희의 후학들은 자신들이 "대도大道를 혼란케 하는 학자와 대항한다고 자임하였다."(310) "주희, 주돈이, 장재 및 정씨 형제의 초상화가 공자사원"에 모셔졌고, 주희의 "<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註>는 도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 번영"시켰다고 공인되었다. "왕안석의 위패는 공묘에서 퇴출되고, 태학은 도통을 전수한 성인과 현인들에게 경의를 표할 것을 명령"받기에 이르렀다.(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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