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역사 2
임용한 지음 / 혜안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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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2년(태조 25) 거란은 고려와 친선과 우호를 도모하기 위해 30여 명의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러나 태조 왕건은 거란이 "동족인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국가이므로 이웃나라로 대접할 수 없다"(13)고 말하면서 사절단을 섬에 유배하고 낙타 50필은 만부교 아래 묶어서 굶겨죽였다. 왕건이 거란에 대해 강경일변도로 나간 이유는 후삼국 시절 발해 지배층이 대규모 유민을 이끌고 남하하여 자신의 정권 수립과 안정에 지대한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탈하면, 당장 "북쪽 국경이 동요하고, 서북지방과 서경이 동요"(19)하게 될 터였다.


그러나 "북방으로부터의 위협은 고려라는 신생 국가의 운명의 추를 바꾸어 놓을 만큼 거대하고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것은 큰 실책이었다. 거란과 여진, 만주족에 이르기까지 "소위 동이족에 속하는 민족들이 중원을 넘볼 때마다, 먼저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해동을 복속시켜 놓는 일이었다. 그들이 중국을 향해 서진하였을 때 배후를 찔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20) 피할 수 없는 전쟁에 단호히 맞서는 자세는 한반도에 자리잡은 국가의 숙명이지만, 거기에는 철저히 다져놓은 내실과 사전에 대비된 시기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거란은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키고, 다음 해에는 만리장성을 넘어 연운 16주를 차지하였다. 그들은 "지금의 북경지방을 중심으로 하북성 북부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하면서 "농경지역을 확보하고 한족 관리와 문화를 흡수"(22)한 대국으로 발돋움한다. 고려는 통일 후 47년 만인 "982년(성종 2)에 겨우 전국에서 12개의 대읍을 선정해 목사를 파견"(50)할 정도로 중앙의 장악력이 미비한 상태였다. 이러한 힘의 우열을 간과한 결과 초래된 "거란 전쟁은 한때 고려의 생명을 위협했고, 고려의 역사에도 큰 영향을 미친 길고도 치열한 전쟁이었다."(13) 


993년(성종 12) 8월, 소손경군이 기습적으로 압록강을 건넜다. 고려는 곧바로 "전국에 병마제정사를 보내 병력을 모집했고, 10월에야 겨우 군대를 편성했다."(89) 그러나 병사를 채우는 데 급급했던 조정은 주력을 동원한 방어전은 기획하지도 못한 채 항복협상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 때 거란의 공세가 고려와 여진의 동맹을 차단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서희는 강화회담에서 "압록강을 경계로 거란과 고려가 동시에 여진족을 공격하여 축출하고, 이 지역을 나누어 점령하자"는 제안을 내놓아 위기를 넘기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다.


994년(성종 13)부터 거란과 고려는 여진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누구보다도 이 지역(강동 6주)의 정략적 가치를 잘 알았던 서희는 "압록강에서 청천강에 이르는 통로 상의 요지를 점령"하고 성을 쌓아 북방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106) 1005년 고려에서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 목종이 쫓겨나고 현종이 즉위했다."(111) 송과 '전연의 맹'을 맺어 형님의 나라로 올라선 거란은 세력 다툼에서 밀려나 외부의 협력자를 원하는 고려 지배층의 분열과 협조를 기대한 듯 "사신을 보내 미리 침공 통보를 하고" 정벌에 나섰다.


거란은 11월 25일 통주성에서 강조의 주력부대를 섬멸하고, 12월 6일 곽주성마저 점령했다. 중앙정부와 갈등을 빚던 서경세력이 일찌감치 항복의사를 내비치자, 궁지에 몰린 현종이 강화를 청하려는 찰나, "극적으로 탁사정이 이끄는 동북군 본대가 서경에 도착했다."(146) 서경이 거란군의 치열한 공격을 받고 있던 12월 16일, 은밀히 흥화진의 포위망을 빠져나온 양규와 700명의 결사대가 곽주성 탈환 작전을 전격적으로 성공시킨다. "하룻밤 사이에 거란군은 압록강과 대동강 사이에 유일하게 마련해 두었던 중간기지를 상실했다."(162)


거란군은 "놀라운 기동력과 세련된 부대 운영으로" 전투에서 여러차례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압록강 이남에서 단 한 개의 성도 자신의 영토로 만들지 못했다. 오히려 거란의 침공과 (국왕 반대파인) 강조의 사망은 현종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는 결과를 낳았다."(190) 개경을 함락했지만 보급선이 단절된 거란이 철병하자 현종은 국가 행정망 조직에 전념한다. 그는 "거란의 3차 침입이 있던 1018년 무렵에는 전국의 행정망을 경京 4개, 목牧 8개, 부府 15개, 군 129개, 현 335개, 진鎭 29개로 편제"(201)하여 군현제의 기본 골격을 만들어냈다. 


어느 편도 승기를 잡지 못하고, 어느 편도 물러서지 않는 "전쟁을 끝내려면 획기적인 전기가 필요했다."(211) 소배압은 지루한 공방전을 끝내기 위해 개경 직공 작전을 구상하고, 1018년 9월부터 준비에 착수했다. 소배압 부대는 이번에도 과감한 기동력으로 개경 입구에 이르는 데 성공하지만, 현종이 도주를 택하지 않고 개경 사수를 천명하자 난관에 봉착한다. 1019년 2월 2일 거란군과 고려군은 귀주성 앞에서 일대회전을 벌인다. 주력부대가 공방을 벌일 때 김종현의 1만 병력이 거란군의 등 뒤로 연결된 태천-귀주를 잇는 길에서 나타났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포착한 고려의 병사들은 20년을 지속한 긴 전쟁과 고통의 종식을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232) 앞뒤로 협공 당한 "거란군 사상자와 포로가 수만 명이고, 살아서 돌아간 자는 겨우 수천 명이었다."(234) 처참한 패배를 당한 거란은 "고려와 여진을 평정하고 중원을 침공한다는 전략을 수정"하여 지금까지의 승리에 만족하기로 했다. "개경으로 귀환한 강감찬과 고려병사들은 거국적인 환영과 환대를 받았다."(235) 그러나 현실에 안주한 거란은 "제국을 형성해온 목표와 에너지를 잃어버리더니, 1122년 허무하게 멸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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