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역사 - 삼국편
임용한 지음 / 혜안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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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3세기까지도 삼국은 부족연맹 사회였다. 전쟁이 벌어지면 이들은 각기 자신의 군대를 끌고 집결하고, 그들의 서열에 따라 편제되었다."(20) 이런 군대는 국지전에서 강한 단결력을 발휘하지만, 부족 간의 이해가 다르기 때문에 국가 규모의 전투에서는 뚜렷한 한계를 노출한다. 삼국은 군의 편제와 전술을 일원화하기 위해 신분제도와 경제 체제를 포함한 전체 사회의 개조작업을 벌였다. 한반도의 패권이 걸린 임진강, 한강 유역을 놓고 벌어진 "고구려(고국원왕)와 백제(근초고왕)의 공방전은 요동을 두고 벌어진 중국과 고구려의 전쟁과 마찬가지로 삼국 간에 피할 수 없는 대립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알렸다.(80) 


소수림왕의 개혁을 물려받은 광개토대왕이 백제의 북쪽 국경인 예성강으로 치고 내려오자 위기에 몰린 "백제와 신라는 왕실 간의 결혼으로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저항했다." 절대 우위의 고구려가 처한 어려움은 한반도가 너무나 "좁은 반도인데다가 동쪽 땅의 1/3은 산악지대"이기 때문에 "백제나 신라 어느 쪽을 치든지 충청도를 경유"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백제를 공격하면 신라군에게, 신라를 공격하면 백제군에게 보급로가 노출되는 것이다."(97) 고구려는 "광개토왕의 대정복전과 장수왕의 (백제) 위례성 함락"이라는 기념비적 성과를 거뒀지만, 고구려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수,당과의 치열한 전쟁으로 국력을 소진하는 불운에 시달렸다.


거센 공격에 시달리면서도, 국가 체제를 정비한 백제(성왕)는 서기 551년 한성과 주변의 5군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한성이 백제에게 점령되자 한강 이남에 진출했던 고구려군"의 배후가 위험에 노출되었고, 결국 신라의 북진을 차단하기 위해 죽령과 조령 일대에 배치한 부대를 철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땅은 백제의 소유가 되지 못했다." 곧바로 소백산맥을 넘어 진격한 신라군이 "손쉽게 죽령 이북의 10개 군을 차지"하고 넘어와, 한강 하구에서 "성왕을 살해함으로써 신라와 백제는 단단히 원수가 되고 말았다." 백제는 "한강을 되찾기 위해서는 먼저 신라를 쳐서 괴산, 보은, 충주 지역을 빼앗아야 한다는 피맺힌 교훈을 배웠다."(125-6)


"고구려가 수와의 전쟁에 돌입하자 백제는 신라에게 맹공을 가했다. 수 양제의 침공이 있었던 진평양 33년(611년)에 요충이던 가잠성(위치 미상)이 백제 수중에 떨어졌고, 46년(624년)에는 함양 등지의 여러 성이 다시 백제에게 넘어갔다."(126) 그러나 신라는 전투에서 더 많이 패하면서도 한강 유역을 지켜냈다. 그 이유는 고구려가 요동에 발이 묶여 남방공략에 전념하지 못하는 사이, 신라는 남한강 수로를 통해 "어떤 나라보다도 한강 전선에 신속하게 병력과 물자를 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131) 


7세기는 삼국 항쟁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선덕왕 7년(638년)에는 고구려의 남하 거점인 고량포 지역을 방어하는 칠중성(파주군 적성면)이 고구려에게 함락되었다. 신라로서는 "북쪽 대문이 열린 셈이었다."(233) 위기의 때를 맞이하여 신라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진골 내부를 장악한 진골전통과 대원신통, 가야파 세 세력이 김춘추를 축으로 하는 결혼 동맹을 맺어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이들은 고구려와 백제의 대공세를 자신들의 힘으로 버틸 수 없음을 자각하고, "적극적으로 대당외교에 매달렸다. 그리고 2년 후에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이 시작된다."(248)


고구려는 수의 맹공을 견뎌냈지만, 대륙을 재통일한 당은 "고구려를 그대로 놓아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180) 5호 16국 시절 대륙을 교란한 이민족 왕조는 "광개토왕 이전의 고구려처럼 부족체제의 작은 집단에서 출발"한 세력들이다.(230) 흩어져 있던 북방 유목민이 결집하면 큰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중국 왕조에게, 요동방어선을 장벽으로 삼아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강국 고구려는 그냥 두고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642년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서 평양성 전투의 영웅이던 영류왕(건무)을 토막쳐서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자, 644년 당은 이를 구실 삼아 고구려 원정에 나섰고, 고구려를 거의 패망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고구려 공략에 실패하자 당은 신라 무열왕 7년(660년)에 전격적으로 백제 파병을 결정하고,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대군을 한강 유역으로 보낸다. "신라도 여기에 맞추어 경주와 한산주의 군대 5만을 동원했다."(259) 안타깝게도 "백제에겐 요동방어망에 비견할 만한 요새지대가 없었다. 특히 당군의 진격로였던 서해안에서 부여로 진출하는 길목은 잘하면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낮은 평원지대였다.(272) 예상 외의 위기는 시간을 다투는 싸움이었다. 불운하게도 일본과 지방의 구원군이 도달하기도 전에 8월 2일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는 무너졌고, 소정방은 "9월 3일 의자왕 일행을 데리고 당으로 귀국했다."(270)


665년 8월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한 "(신라의) 문무왕과 (당의) 유인궤는 공주 취리산에서 만나 백제 평정을 기념하는 제사를 지내고 양국 간에 맹약을 맺었다."(286) 이로써 신라가 한강 이남의 패권을 확고히 거머쥐게 되었다. 666년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세 아들 간에 권력다툼이 벌어지는데, "이것은 형제간의 분열이 아니라 고구려 지배층의 분열이었다."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맏아들 남생이 "당에 망명할 때 국내성 이하 6개 성, 10만 호가 그의 세력권 아래 있었고, 목저성 등 부여쪽 3개성이 그의 편에 붙었다."(287)


공식적으로 고구려는 668년에 망했다.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을 흡수하여 물자와 병력 부족을 만회한 신라군은 "백제에 주둔했던 유인궤와 당의 영웅 설인귀의 군대를 혈전 끝에 격퇴하여 어쩌면 평양지역의 총독이 되기를 원했던 설인귀의 마지막 꿈을 좌절시켰다. 동이(東夷)의 땅을 완전히 차지하려면 또다시 엄청난 대전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당은 신라와 곧 화해하였다." 이민족 군대와 연합했다는 사실 때문에 삼국통일은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200년에 걸친 지독한 갈등의 최대 희생자는 백성들이었다. 지친 백성들을 위하여 100년 동안의 평화가 그들에게 주어졌다."(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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