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플러 - 솔로몬의 성전에서 프리메이슨까지, 성전기사단의 모든 것
마이클 해그 지음, 이광일 옮김 / 책과함께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양질의 '성전 기사단' 음모론 해독제



기독교는 평화주의를 기초로 세워졌다. 교회는 어떤 상황에서도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해왔다. 그러나 교황들은 폭력의 완전 폐기라는 불가능한 이상을 추구하는 대신 11세기의 상당 기간을 폭력을 통제하고 배출하는 쪽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하느님의 휴전이라는 규정을 마련해 봉건 제후들 간의 분쟁을 최소화하려고 한 일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1차 십자군 전쟁을 시작할 생각을 한 것도 어떤 면에서는 공격 성향을 외부로 돌려 무슬림의 위협을 차단하려는 발상이었다. 123)

윌리엄의 진정한 불만은 서방의 지원 탓에 성전기사단이 우트르메르의 그 어떤 권력에도 매이지 않는 독립적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특헤 티레의 대주교로서 예루살렘 총대주교 물망에 오른 그가 대표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가 먹히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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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이 구원해야 할 동방이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때 기사단은 몰락을 향해 치달았다. 150-1)

(우트르메르의) 라틴계 지배자들은 늘 현금 부족으로 곤란을 겪었다. 세수의 대부분은 용병과 기사, 성채를 유지하는 데 들어갔다. 악순환이었다. 다시 말해 토지와 인력이 부족하니까 성채가 필요했는데, 성채를 지키고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이 토지의 생산력을 넘어섰다.
이런 상황에서 기사단이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원과 독립성을 확보하고 있었고 헌신적이었다. 이러한 점이 기사단이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요인이다. 177)

성전기사단은 유럽 최초의 금융업자 집단으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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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기사단은 출범 당시부터 국제적인 조직이었다. 그들은 성지 수호를 목적으로 내세웠지만 유럽에서 각종 지원이 왔다. 다시 말해 성전기사단은 유럽에 토지를 두고 있었고 거기서 십일조를 거두고 신앙심이 깊은 이들에게 헌금을 받았다. 성전기사단은 시장과 장터를 개설하는가 하면 부동산을 수익용으로 운용하고, 양모와 목재에서 올리브유와 노예에 이르기까지 온갖 물품을 거래했다. 시간이 가면서 성전기사단은 지중해 일대를 누비는 막강한 상선단을 조직했다. 188)

아사신파에 잘 대처한 유일한 조직은 성전기사단이었다. 성전기사단은 영속적인 법인체 성격이었기에 단원 한 두명이 암살당한다고 해서 위축될 조직이 아니었다. 208)

이단은 프랑스 국왕이 성전기사단을 재판정에 세울 수 있는 유일한 혐의였다. 따라서 성전기사단은 이단이어야 했다. 302)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성전기사단의 이상한 관행을 그저 입단 의식일 뿐이라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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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이한 전통은 신입 단원들에게 무슬림들에게 포로가 되어 가혹한 폭력을 당하거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침을 뱉으라는 협박을 당할 경우 같은 최악의 사태에 대비한 정신적 준비를 시키자는 취지였다. 315)

프로테스탄트 가운데 프리메이슨 석공들은 특히 구약 <역대기 하> 중에서도 솔로몬이 히람에게 성전 건축을 부탁한 부분과 신이 성전 규모와 관련해 제시한 상세한 치수들에 주목했다. 석공들은 각종 치수에 심오한 신학적 진리가 담겨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3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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