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 폭풍 속에서 뿌리와이파리 알알이 4
에른스트 윙거 지음, 노선정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전간기 독일 최대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인 이 작품에는 1차 세계대전의 지리한 참호전 속에 스러져 간 죽음이 하나하나 기록되어 있다. 어처구니없는 죽음, 손쓸 새도 없는 죽음, 끈질긴 비명을 동반한 죽음이 책갈피마다 건조하게 말라붙어 있다. 흔히 생사는 모든 욕구의 원천이므로, 죽음을 회피하려는 심리가 무엇보다 강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수긍할 수 없는 패배를 더 큰 치욕으로 받아들였으며, 무기력한 잿빛의 일상을 거부하면서 히틀러의 길을 예비했다. 전쟁은 죽음을 초월한 생이었고, 운명을 장악한 환각의 장이었다. 독일인들은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하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아직까지 나의 죽음이 아니기 때문이며,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전쟁이 판돈을 모두 잃은 그들을 이미 완전히 파괴했기 때문이다.



이런 짧은 정찰들은, 목숨을 거는 용기가 있어야 하는 일이었지만, 전쟁에서는 용맹심을 기르고 참호 생활의 단조로움을 깰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 병사에게, 지루한 것보다 나쁜 것은 없다. 111)

대피호 바깥에는 겨우 소년 티를 벗었을까 말까 한 아까의 영국 병사가 관자놀이에 총을 맞고 쓰러져 있었다. 총탄은 그의 두개골을 비스듬히 뚫고 지나갔다. 그는 아주 편안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나는 억지로 그를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애썼다. 이젠 더 이상 `너 아니면 나`의 상황이 아니었다. 그 뒤에도 나는 그를 자주 생각했고, 해가 가면 갈수록 더 자주 그를 떠올렸다. 국가가 살인의 책임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준다고는 하나, 우리의 회한까지 가져가지는 못한다. 우리는 슬픔을 감내해야만 한다. 슬픔과 후회는 꿈속 깊이까지 들어와 박혔다. 299)

대전투는 내게도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는데, 그것은 내가 그때부터 이 전쟁에서 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먼 미래를 건 운명의 시간에 한꺼번에 모여들었던 군대들과 갑작스럽고도 충격적으로 촉발된 폭력은, 나를 난생 처음으로 초개인적인 영역 깊은 곳으로 인도했다. 그것은 그동안 겪은 모든 경험과 달랐다. 그것은 일종의 비밀의식이었다. 그 비밀의식은 내게 두려움으로 불타는 방들을 열어서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를 그 안으로 이끌었다. 316)

총에 맞았다는 사실을 인식함과 동시에 총탄이 내 생명을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
...
이상하게도, 이 순간은 내가 아주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내 인생을 통틀어 몇 안 되는 순간 가운데 하나다. 그때 나는 번갯불이 번쩍하듯이 내 인생의 가장 깊은 의미와 형식을 파악했다. 나는 지금 이곳에서 모든게 끝나야 한다는 데에 놀랐고, 그것을 믿을 수 없었지만, 그 놀라움은 어쩐지 마음이 평안하고 거의 즐겁기까지 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고는 마치 내가 돌덩이가 되어 격류의 수면 저 아래로 깊이 가라앉는 것처럼 포화 소리가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곳은 전쟁도 증오도 없는 곳이었다. 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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