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하게도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감정적인 열기는 수도꼭지처럼 잠가버릴 수가 없다.
적을 계속 발견해야 한다. 마음과 가슴은 소대나 분대처럼 바로 무장해제할 수 없다.
오히려 흰 증기를 뿜어내는
용광로처럼 식는 데 오래 걸린다.”
<다니엘서>, E. L. 닥터로, p.41
“지상에 묶여 있는 육신과 천상에 떠다니는 정신의 이중적 삶”을 주관하는 신의 기획은, 이성의 최종 기착지를 건설하는 산업 혁명의
쇠망치 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깨져나간 자아의 번뜩이는 창조력에 심취한 인간은 세계 끝까지
자신이 건설한 물질 문명을 목도하면서, 신이 거하지 않는 천년왕국의 도래를 확신했다. 이제는 광인(狂人)의 외침으로 들리는 이 강고한 이상주의는 자신의 영지가 가까운 미래에 포탄의 굉음으로
가득 차리라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안방에서 우주를 사유하던 광대한 정신이 그 우주를
눈 앞에서 확인하고자 조급히 달음박질 할 때, 역사는 마치 신이 예비한 것 마냥 깊은 심연의 절벽으로
허공을 메우고 있었다. 20세기 초의 유럽인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이 격차를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무오류성’을 확신한 지도자들은 기꺼이 리바이어던을 작동시켰고, 지도자의 ‘무오류성’에 열광한 대중은 기계 안으로 환호하며 들어갔다. 신이 그저 관망하는 세계에서, 강철의 바벨탑 꼭대기에 오른 무수한
이카루스들이 추락하고 있었다.
자유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과 더불어 파산 선고를 받았지만, 자유주의자들은 여전히 아름다운 시대(Belle Époque)를 향한 향수에 젖어 있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손’이 이해집단 간의 갈등을 조화로운 이익으로
변모시켜 공동체에 기여한다는 자유방임주의와 인간의 양심과 이성의 소리에 귀 기울여 국제정치 세계를 조율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성공을 믿었다. 그러나 필멸의 신은 자신에게 강제력을 발휘하는 상위 권위체를 반기지 않았기에,
‘도덕’에 호소하는 방패를 ‘민족’이라는 창으로 뚫어버렸다.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아 지식과 논리로 무장한
엘리트들은 대중의 탄생을 몹시도 경계했지만, 오만한 선택을 거듭하면서 세계 공황의 폐허에서 부활한 민족주의의
파국을 앞당기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근대를 끝장낸 ‘존재의
이행’을 가장 열정적으로 수행한 이들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인적
자원으로서의 개인(Menschen Material)’을 기꺼이 활용한 체제, 곧 파시즘이다.
근대 국가들이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한 제1차 세계대전은 엄밀히 말해, “동원된” 전쟁이 아니었다. 19세기
내내 유럽 각국은 풍요의 전제조건이 “자아를 팽창하고 타자를 억압하는 과정의 연속체”라는 명제를 꾸준히 실천하는 동시에 국지전을 통해 국가 간의 연합을 시험하고 강화해 나갔다. 자신과 타인을 경계 짓는 일에 익숙해진 시민은 국가의식을 내면화한 국민으로 거듭났고, 의심과 약속으로 위태롭게 엮어놓은 국가들의 동맹이 끊어지자 결연한 투쟁심과 환희에 가득 차 전장으로 달려나갔다. 그러나 무자비한 전쟁은 기대와 달리 승전의 희망을 들불처럼 집어삼켰고 피로 새긴 파국의 묘비(墓碑)를 도처에 세웠다. 무덤으로 변한 참호에 느닷없이 찾아온 종전은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실패의 훈장에 불과했고, 싸울 기력이 남아 있던 패전국의 군인들은 평화에 대한 갈망이 아니라 전우애로 위장한 복수심을 간직한 채 고국으로
돌아갔다.
베르사유 조약이 각국에 수립한 자유주의 정치 체제의 핵심 기구(apparatus)인
의회는, 인플레이션과 실업, 전비 채무와 국가간 무역망 파괴, 사회주의의 도전과 인종주의 등 만연한 경제적, 사회적 모순과 이념
대립에 무기력한 처사로 일관했다. 자유주의 체제는 다원성을 조화롭게 유지하는 일에 지나치게 관대했고, 권리에 도취된 정당들은 소통보다 대립에 연연하면서 정치 불안을 조장했다. 민주주의적
가치에 대한 경험과 확신이 없던 일반 대중들 역시 당면한 문제를 처리하는 데 미숙하기만 한 제도를 외면했다. 이탈리아의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내세운 전간기의 민주주의가 “굶주릴 자유”로
판명되자, 대중의 불만을 피해 우파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중립지대로 물러났다. 엘리트 집단은 권력을 위협하는 사회주의의 파괴력을 우려한 나머지, 무신론을
증오하는 가톨릭 세력과 손잡고 폭력에 대항하는 폭력으로 파시즘을 호출했다. 그렇게 무솔리니는 검은 셔츠단의
행진에 맞춰 로마에 무혈입성(1922.10)한 후에, 우파의
양보와 지지를 받아 의회에서 지배권을 확보했다.
이념 대립과 경제적 어려움이 한층 심했던 독일에서 무솔리니의 놀라운 성취에 주목한 이가 바로 히틀러였다. 그는 승전국의 가혹한 처사와 대공황이라는 부당한 운명이 어깨를 짓누르자 터질듯한 분노에 휩싸여 광장에 모인
군중을 현란한 연설 솜씨로 매혹시켰다. 군중은 무책임과 무능을 일소할 수 있는 체제를 원했고, 히틀러는 그들의 염원을 돌격대의 군사주의와 의회 입성의 민주주의에 적극 활용했다.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독일 정계의 우파는 히틀러를 통제 가능한 사냥개로 치부했지만, 히틀러는 총리 자리에 앉자마자 제국의회를 파괴하고 국가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쥐었다. 나치 독일은 정점에 홀로 선 “금발의 야수”의 의중을 헤아리려는 추종자들로 채워졌다.
이탈리아 파시즘이 교회와 왕의 권위를 인정하고 자신을 권위 있는 가장으로 자리매김한 반면, 나치 독일은 오로지 인민의 의지에 의존하면서 사법과 행정 체계를 전부 파괴하는 급진성을 내보였다. 그러나 파시즘은 두 나라의 전유물이 아니다. 민족 순수성을 회복하려는
열기는 전간기 유럽 정치권의 공통 화제였으며,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중동부 유럽의 민족주의를 자극하여
그 지역을 러시아와 독일의 패권 기도를 저지하는 완충 지대로 삼고자 했다. 국가를 유기체로 간주하고, 우월한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해 국가가 개인의 사생활을 관리한다는 생각은 정치적 성향을 가리지 않고 보편화된
상식이었다. 더구나 대중들은 의회 민주주의의 혼란이 아니라 파시즘의 열광적인 집회에서 생생하고 의미
있는 정치 참여를 경험했다. 하나의 집단, 하나의 민족으로
혼연일체가 된 개인들은 전체 안에서 해방감을 만끽했고, ‘자유인’이
되었다. 파시즘은 대중을 선동했고, 대중은 파시즘을 선택했다.
인종에 기반한 민족(Volk) 국가를 필두로 대륙 전체를 순수한 단일체로
정화하고자 했던 제3제국은 신성로마제국의 에피고넨이자, 예외로
체계를, 파편으로 중핵을, 지도자의 카리스마로 인민의 의지를
한데 엮어놓은 “히틀러 국가”였다. 나치즘은 결코 잠재울 수 없는 야생의 본성이 기술 문명의 정점인 국가 기구의 중심부로 돌진해 들어간 ‘통제된 야수성’의 발현이다. 이때의
통제는 순화나 억제가 아니라 하나의 목표를 향해 결집된 힘을 극대화하는 수단을 뜻한다. 그러나 순수한
이념을 승화시켜 야수성을 통제하고자 한 다른 방식의 시도가 있었으니, 그것은 가장 거대하고 가장 낙후된
제국, 러시아에서 발원한 ‘볼셰비즘’이다. 인종의 지도자(Führer)와 계급의 영도자(Vozhd)의 핏빛 무대가 마련되고 있었다.
니콜라이 2세가 퇴임하고 두마 의회가 해산(1917.2)됨으로써 러시아 군주정이 마감되자, 혁명 세력은 중간
계급과의 연대와 점진적인 개혁 노선을 주장하는 마르토프의 멘셰비키와 전쟁을 지속하겠다고 밝힌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무력으로 전복할 것을 주장하는
레닌의 볼셰비키로 나뉘었다. 러시아 자유주의자들이 유럽 자유주의자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으면서 헌법상의
문구에 집착하고 있을 때, 볼셰비키는 노동자들을 소비에트로 결집시키고 농민들을 평화 협정과 토지 소유로
유혹하면서 제국을 붉게 물들여갔다. 레닌은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인가?”라는 말로 요약되는 4월 테제를 천명하여 ‘권력 장악의 날’을 인위적으로 조성했고, 마침내 10월 25일
적위대가 동부 전선 배치를 거부하는 페트로그라드 수비대에 침투하여 주요 군사시설을 점령하면서 혁명의 깃발을 올렸다.
마르크스가 과학적, 역사적 필연성을 부여한 천년왕국을 최초로 실현했다는
자부심에 가득 찬 10월 혁명의 첫 세대들은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처럼 사회주의가 악을 소멸하고, 불행과 억압, 불평등과 부정이 없는 사회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살아남아야 한다’는
최우선 과제가 믿음을 온전한 현실로 정착시키기 위한 선결조건이었다. 혁명 정부가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고, 연합국들의 전후 유럽 분할 구상을 담은 비밀조약을 폭로하자 광활한 제국은 혁명의 반대 세력과 그들을 지원하는
외부 세력의 동맹으로 전운에 휩싸인다. 레닌이 국제주의에 호소하면서 유럽 각국의 사회주의 혁명을 촉구했지만, 윌슨이 꺼내든 ‘민족자결주의’의
매혹적인 음율은 러시아 혁명이 세계 혁명으로 전환되리라는 희망을 동토(凍土)에 꽁꽁 묶어두었다. 이념을 성취한 러시아
역시 하나의 국가에 불과했으며, 절박한 생존의 기로에 처한 그들이 세계 혁명에 완전히 헌신하는 것은
불가능한 임무였다.
내전은 혁명이 맞이한 1차 시험이었다. 먼저
사회혁명당이 세운 코무치(Komuch) 정부(1918.6)가
체코 출신의 전쟁 포로들을 끌어들여 볼가강 유역을 점령하고 혁명에 반기를 들었다. 11월에는 콜차크
제독이 영국의 지원 속에 백군(白軍)을 조직하여 우랄 산맥의
대도시 페름을 점령했고, 여기에 프랑스가 지원하는 안톤 데니킨의 ‘의용군’이 합류한다. 백군의 공세에 맞서 적군(赤軍)을 이끈 것은 역설적으로
국가 존립이라는 대의에 복무한 애국적인 군 장교들이었다. 참전 용사들은 전쟁이 사물의 내재적 질서이며,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역사 발전의 주요 단계라는 신념 아래 국가 수호에 나섰다. 볼셰비키는 “국민의 생명을 징발하여 국가의 생존을 도모”하는 ‘전시 공산주의’ 체제로
전환하여, 경제 붕괴를 감수하고 국가의 역량을 전선으로 모았다. 백군은
한 때 차리친과 하리코프, 키예프를 점령하면서 위세를 떨쳤지만 병력과 장비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농민들을 회유하라는 서방의 권고를 무시하다가 농민 빨치산인 녹색 군대의 게릴라 전법에 큰 피해를 입어 점차
소멸되고 만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향한 ‘중단 없는 혁명’이 재개되었다. 소련은 코민테른을 결성(1919.3)하여 세계 혁명을 재가동하려 했지만 야심은 오래지 않아 회의로 뒤바뀐다. 혁명의 국제화를 가로막은 최대의 걸림돌은 자신의 국가 이해와 충돌하지 않는 국제공산주의 운동을 조직하기 위해
반대 세력을 탄압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소련 자신이었다. 트로츠키도 노동조합 논쟁(1920.11)에서 노동 운동의 ‘국가화’를 통해 계급 전체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노동자의 독자성을 강조하던 기존 주장을 폐기했다. 소련이 혁명 정신을 부인하듯이 신경제정책(NEP)을 도입(1921)하자 국제 공산주의 운동은 사회민주주의로 발길을 돌려나갔다. 스탈린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분쟁을 이용하여 국가를 유지하기보다는 소련 자체를 강국으로 만드는 대업에 착수한다. 내전기에 반(反)혁명 세력을 타격하고 서구의 위협에 맞서던 혁명 의지는 군수 산업화와 농촌 집단화를
밀어붙이는 원동력이 되었고, ‘영구 혁명’은 허공을 떠도는
반혁명 유령과의 대결 구호로 전락했다. 자코뱅의 열정을 찬양하던 혁명은 자코뱅의 공포정치를 모방하고
심지어 혁신했다. 시민의 인간성 회복을 다짐하던 전위 세력은 관료제로 옷을 갈아입고 신민을 재생산하라는
명령을 주저 없이 공포(公布)했다. 혁명의 연속성은 국가의 품 안에서 잠들었다.
19세기 이후 ‘함선과 대포’의 그늘에 잠긴 아시아는 서구의 압도적인 힘에 대응하는 전략을 모색한 결과, 전통을
복원하여 예전의 강성함을 되찾아야 한다는 반동적 신념과 기존의 문화적, 사회적 토대 위에 서구의 기술을
도입해야 한다는 절충주의, 그리고 옛 것을 철저히 배격하고 서구화로 거듭나는 것만이 생존을 담보한다는
급진적 세속주의가 혼재된 상태였다. 아직 잃을 것이 많았던 초기에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이나 동도서기(東道西器)와 같은 온건한 개혁 조치가 호응을 얻었지만, 미흡한
진전을 질타하는 구체제의 반격과 제국주의의 침탈이 강화되자 점차 적자생존의 세계에 가장 성공적으로 적응한 권위주의 체제가 유력한 대안으로 떠올랐다. 아시아는 제국주의에 맞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였는데, 이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약소국을 응원하는 자유민주주의 선언으로 해석하고, 급속한 산업화 정책에 성공한
소련의 사회주의를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봤으며, ‘국민적 민족공동체’의
역량을 하나로 결집시킨 파시즘의 일체화를 옹호하기도 했다. 유럽이 혁명과 민족을
전선의 양쪽에 배치하여 힘의 균형을 도모하는 동안, 아시아는 근대의 모든 이념을 저항 운동의 촉매로
활용하는 대장정에 오른 것이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제국주의 열강의 대열에 합류한 일본은 그 위상에 맞게 국가 정책을 “안위에서 확장으로” 선회하면서, 표면적으로
자신을 서구 제국주의의 위선을 파헤치는 선구자로 자리매김했다. 단기간에 서구의 기술을 따라잡은 메이지
유신의 효율성은 정신을 개조하는 작업마저 압축적으로 달성해냈으며, 그 중심에는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일본의 이익이 곧 아시아의 이익”이라는 구호는, 태평양 전쟁의 패배로 빛이 바래질 때까지 ‘대동아공영권’과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정신으로 변모하면서 일본의 팽창 전략을 정당화했다.
아시아를 해방시키고, 세계를 천황의 발 아래 두기 위한 첫 걸음은 만주 정복이었다. 일본은 만주와 대륙의 역사적 연관성을 부정하면서 ‘만주(Manchuria)’라는 독립 명칭을 고집했고, 말을 널리 통용시킨
후에 해당 지역을 실제로 점령하는 전략을 구사하여 대륙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한다. 장제스는 만주사변(1931.9)을 계기로 일본의 야욕과 위세를 가슴 속에 확실히 각인하면서, 강성한
일본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인내와 외교, 지구전과 무저항주의를 고수하고 일본과의 분쟁을 국제무대로
끌고 가 해결하는 전술을 염두에 두었다.
노구교 사건(1937.7)에 말려든 장제스가 상하이로 진격하는 실책을 범하자, 일본은 곧바로 15개 사단을 증파하여 파죽지세로 동부지역을 점령해
나갔다. 일본인들은 선전포고도 없이 시작된 중일전쟁이 “중일
국교를 저해하는 잔존 세력의 토벌전이자, 기존 조약에 명시된 일본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보상 행위”라는 정부의 선전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중국 공산당은 장제스의
안내양외(安內攘外) 정책이 민족 상잔을 야기하여 일본을 이롭게
할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즉각적인 국공 내전 종결과 공동 항일 투쟁을 외쳤다. 일본 군부는 자력으로 중국의
숨통을 끊을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대륙은 지칠 정도로 넓었고, 국공
합작이 내부 분열을 봉합했으며, 열강들의 이해는 제각각이었다. 일본과
독일과의 우호 관계 수립은 소련의 대일 강경론과 영미 해군의 공동 전략을 초래하여 중일전쟁이 국제 분쟁으로 확대되는 단초를 제공한다. 폭주하는 야수성에 사로잡힌 일본이 태평양으로 야심을 확대하자 미국은 대일 금수조치를 취하고 미국 내 일본 자산을
동결하면서, 장제스 정부에 대한 군사 원조에 나섰다.
천황의 군대는 죽음 앞에서도 승리의 찬가를 올리며 진군했지만, 석유가 떨어진
군함과 탱크는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일본의 패전이 확실시되자 장제스는 공산당과의 결전에 조급하게 재돌입한다. 그러나 일본과의 전쟁 중에도 무자비한 강제 노동과 식량 공출을 벌이고, 마구잡이로
징집한 군인들이 전투에 나서기도 전에 죽는 일이 속출하자, 민심은 국민당에 등을 돌린 지 오래였다. 이와 반대로 공산당은 국공합작 기간 동안 토지몰수를 철회하는 대신 소작료를 인하하고 등급화된 과세 제도를 도입하여
빈곤층의 토지 소유를 확대하면서 민심을 장악해갔다. 아울러 지식인들을 농촌으로 내려보내 빈궁한 현실을
몸소 체험하게 하고, ‘보갑 상호책임제’ 같은 집단 통제
장치를 작동시켜 내부 결속을 놓치지 않았다. 국민정부의 불행은 상대가 외세가 아닌 같은 민족이라는 점과
폐허로 변한 국가를 재건하려는 혁명 의식은 물론 인민의 참여를 유도하는 정치적 급진성까지, 모든 저항
수단을 공산당에게 넘겨준 오만함의 결과였다. 만주에서 내려온 일본을 물리치고 대세를 장악했던 장제스는
만주로 올라가서 항쟁을 벌인 공산당에게 패했다. 그에게 만주는 모든 것을 주었다가 모든 것을 가져간
‘독립’ 지역이었다. 마침내
내전을 승리로 이끈 공산당은 천안문에 입성해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1949.10)한다.
일본은 옥쇄(玉碎, 쿄쿠사이)와 만세(萬世, 반자이) 정신으로 압도적인 물량의 우위를 점한 미국에 맞섰지만, 전쟁의 승패는 처음부터 결정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일본인들이 예정된
패배를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는 “견디기 힘듦을 견디고 참을 수 없음을 참아라”는 천황의 방송 문구에 집약되어 있다. 일본은 전쟁에 패한 것이 아니라
단지 전쟁이 끝난 세계로 이동한 것이며, 그곳은 여전히 천황이 지배하는 왕토였다. 천황은 신민들에게 자신의 도덕성을 본(本)으로 삼아 절대 긍정의 생활 태도를 내면화하라고 읊조렸으며, 거대한 전쟁을 견뎌낸 만큼 전후의
사소한 굴욕도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주문(呪文)을 되뇌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열도는 더 이상 일본인들의 땅이 아니었다. 미국의 야심가들은 자신 앞에 놓인 백지(白紙, tabula rasa)에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리라는 흥분에 도취되어 있었다. ‘푸른 눈의 메시아’가 점령한 폐허 속에서 생존 본능이 번성하고 찰나의 쾌락을 추구하는 도피 심리가 타올랐다. 지배와 피지배의 모순된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도 혁명적 반(反)문화를 칭송하는 입장과 현실참여를 좌절시키려는
반(反)혁명적 음모라는 입장이 공존했다. 미군정은 국가에 대립하는 ‘개인주의’ 정신을 배양하고자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세키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고통을 위로 받기 원하고 타인의 관심을 바라는 공동체 안의 ‘개인주의’이자 상위 권위체에 복속된 ‘개인’들이었다. 무엇보다 미군정의 제일 목표는 일본의 전쟁 의지를 영원히 제거하여 군국주의의 재등장을 막고,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방파제로서의 일본 재건이었다. 그 임무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자유로운 발언권과 세력 갈등이 인정되었지만, 일본인들 스스로 습득하는 민주주의의
혼란상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와 맞물려 미군정의 인내심을 가혹하게 시험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은 이념이
이상을, 지시가 갈등을 대체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가부장으로
변모한 미군정은 자신의 열등함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지식인 관료들과 협력하여, 천황제와 민주주의가 결합된
신(新)헌법을 제정한다. “입헌군주제와 절대 평화”의 휘광 아래 모인 일본인들은 희생(犧牲, 기세이)의 은총을 받아, 자신을 얽어 매던 전범의
사슬을 벗어 던지고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희생자의 가면을 집어 들었다.
한편, 한반도는 벼락처럼 열린
해방 공간을 누가 차지하는가를 두고 좌우파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공산주의자 현준혁이 해방 직후인 9월 3일에 암살된 사건은, 해방
후 한반도의 정치 지형이 테러의 칼날 아래 재편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했다. 신탁 통치 반대 운동(1946)은 좌우파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인 사건으로서, ‘즉시 독립’에 사활을 건 민족주의자들과 달리 ‘국제 결정’을 존중하는 사회주의자들의 악수(惡手)는 식민지 친일 관료들을 소생시켰고, 모든 정당성을 반공 아래 무릎 꿇렸다. 임정의 헤게모니를 위해 반탁운동을 주도한 김구가 철저한 반공주의자 이승만에게 막혀있는 동안, 미소공위를 지지하고 통일 정부 수립에 매진한 여운형과 한민당을 이끌던 장덕수가 차례로 암살(1947)된다. 남한 단독 선거를 전후하여 발생한 제주 4.3 항쟁과 여순 반란 사건(1948.10)은 제5열을 제거해야 한다는 명분을 제공했고, 대한청년단과 학도호국단 같은
광범위한 하부조직으로 뒷받침된 병영 국가의 길을 활짝 열었다. 마침내 상징적으로나마 이승만의 대항마
역할을 하던 김구마저 암살(1949)되자, 한반도에는 ‘꼭두각시’와 ‘괴뢰도당’이라는 증오의 언어만이 남아 왕국의 절반을 되찾기 위한 전운이 피어올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일본을 동아시아 전진기지로 재무장할 것을 결의한다. 요시다 시게루 총리는 정세 변화에 주시하면서 정치 개혁을 부르짖는 지식인과 군대 재건 및 천황 숭배에만 골몰하는
우익을 제치고 권력을 공고히 한다. 그는 경제 부흥을 민주주의 건설에 앞선 지상 과제로 내세우고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1951.9)을 맺어 일본을 미국의 집단안보체제에 편입시킨다. 미국이 수립한 평화 헌법을 무기로 경무장에 치중하여 국방비를 절감하고 경제 재건에 몰두한 요시다 내각은, 미국과의 연대가 안겨준 선진 기술 습득 기회와 세계 최대 시장 개방이라는 선물을 마음껏 누리면서 국제 무역
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전쟁 특수로 재건에 성공한 일본은 미군의 한반도 파병으로 생긴 치안
공백을 메운다는 구실로 창설, 운용되던 경찰예비대를 자위대법의 개정과 함께 자위대로 개편(1954.7)하면서, 경제력과 군사력 모두 명실상부한 2인자 자리를 향해 비상하기 시작한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국가 위의 국가’인 미국의 용인과 지원을 발판 삼아 수립된 국제 질서의
한 축이었다.
“우리 인간들은 너무 교만했어. 피투성이 과거를 이미 극복했다고 생각했지.
그러나 이제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는 현재를 성찰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어.”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p.415
중세가 신앙으로 빚은 연금술의 시대였다면, 근대는 신념으로 빚은 연금술의
시대였다. 야만을 문명으로, 인간을 기계로, 사적 자유를 공적 통제로 전환하려는 이 모든 시도의 주체는 바로 국가였다. 국가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주도하고도 살아남았으며, 전장의 상흔을 간직한 채 더 강력한 주권자로 돌아와 전후의
세계 질서를 조정했다. 한계 없는 자유가 파괴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자각한 개인들은 광장을 저버리고, 무관심의 방벽에 둘러싸인 생활 터전의 안락함을 즐겼다. 철의 장막을
마주한 국가들은 국가 전복이라는 경계선 안에서 벌어지는 돌출 행동을 포용하면서, 매혹적인 상품을 쏟아내고
든든한 복지 정책을 펼쳐 보여 자신이 ‘오래된 평화’의 적임자임을
증명해냈다. 국가 밖에서 공동체를 꿈꾸던 영혼의 해방은 더 이상 찾는 이 없는 퇴락한 신전의 메아리로
전락했다.
언어로 지은 집은 실체가 없으며, 무오류성을 가장하기 때문에 현실이 쇠퇴할
때 비로소 그 허구가 폭로된다. 언어는 인간의 입을 빌어 세계에 현현하며, 오류로 점철된 유한자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진리의 빛으로 자신을 위장한다. 국가야말로
가장 굳건한 언어의 구조물이며, 무오류의 화신이다. 현재에
고정된 이성은 비이성적 국가의 귀환을 비현실적인 상상으로 치부하지만, 국가는 실패의 폐허에서 부활하곤
한다. 가려진 국가의 야수성을 예감하는 통찰은 망각의 문을 두드리는 과거의 성찰에서 비롯한다. 이 미세한 균열은 실체와 이름의 엇갈린 위계 질서에 의문을 품는 사소한 저항이며, 붕괴의 조짐이 아니라, 전도(顚倒)된 세계의 추락을 경고하는 다른 언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