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에게는 기회주의를 넘어서는 면모가 있었다. ... 루마니아군은 오데사와 스탈린그라드에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 전투에 임했고, 편을 바꾼 뒤에는 똑같은 헌신성으로 독일과 헝가리를 공격했다. ... 루마니아인들은 오데사와 골타의 토착 유대인 10만 명을 학살했다. 유대인을 그 정도 차원에서 학살한 나라는 독일을 제외하고는 루마니아밖에 없다. 1056-7)
헝가리 유대인들은 1944년 중반까지 살아 있었다. ... 헝가리의 대량이송이 특별했던 마지막 측면은, 그 일이 비밀에 부쳐질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이송은 전세계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1104)
수용소 수감자들을 살려둔 일차적인 이유는 노동력을 착취하기 의해서였다. 물론 그것은 피살로 가는 중간 단계에 불과했다. 동유럽의 기동학살작전에서도 그랬듯이, 유대인은 죽음이 유예된 존재였을 뿐이다. 폴의 거룩한 표현을 빌리자면, "노동능력이 있는 유대인은 여행을 중단하고 군수노동을 해야 합니다." 1275)
(철저한 약탈의 해법은) 간단한 컨베이어벨트 체제에 있었다. 수감자 노동조가 이송열차와 플랫폼에서 짐 꾸러미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수합한다. 다른 노동조는 탈의실에서 귀중품과 옷을 수합한다. 여자들은 가스실 옆의 이발소에서 머리칼을 자르게 한다. 또 하나의 노동조가 시체의 입에서 금니를 뽑아내고, 다른 노동조는 소각실에서 흘러나오는 인간 지방을 화덕에 붓는다. 그렇듯 학살수용소에서 약탈과 살인은 단일한 절차로 통합되었고 동시화되었다. ... 이 모든 것은 "극도로 정확히 할 것"이라는 힘러의 지침에 따른 것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충분치 않을 정도로 정확히 하시오." 1309)
행정과정 전체를 보면 유대인의 파괴는 전쟁의 요구를 충족시키느라 이미 과부하된 관료기계에 새로 부과된 추가 업무였다. ... 철도 관리들은 매일같이 운행 가능한 차량을 배분하고, 과부하된 노선을 군대와 기업의 긴급한 요구에 맞춰 조정해야 했다. 그러나 군과 기업의 우선성에도 불구하고 학살센터에 보낼 차량이 부족해서 살아남은 유대인은 한 명도 없었다. ... 그들은 완전을 향하여 치달았다. 1405)
파괴과정의 "인간적 차원"은 파괴의 중요한 성공 요인이었다. 물론 그 "인간적 방법"이 희생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해자들의 안녕을 위한 것이었음이 강조되어야 한다. 독일의 관리들은 "과잉"과 "돼지만도 못한 짓거리"를 저지를 기회를 줄이기 위하여 항상 주의했고, 통제되지 않는 행동을 막는 동시에 살인자들을 짓누르던 심리적 부담을 누그러뜨릴 방법과 장치를 고안하기 위해 많은 연구를 수행했다. ... 모든 "인간적인 방법"의 진정한 목표는 효율성이었던 것이다. 1412-3)
전범재판이 시작되었을 때, 절반유대인 물리학 교수를 도와주었다거나, 유대인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좀더 오래 활동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거나, 혼합혼 부부의 주택 문제를 도와주었다는 증거를 말하지 못한 피고는 거의 없었다. 그 호의가 그들이 선행과 동시에 실시했던 파괴와 비교해서 너무도 사소했던 반면, 그 "선행"의 심리적 기능은 대단히 중요했다. 바로 그것을 통하여 그들은 "의무"를 개인적인 감정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었다. 그들은 "품격"을 보존했던 것이다. 1430)
중립은 타인을 돕는 위험과 비용은 부담하지 않으면서, 면전에서 상해를 가하는 가해자들을 편드는 도덕적 부담도 지지 않는 안전한 노선이었다. ... 사람들은 체포에 공개적으로 항의하지 않는 것과 위험에 노출된 희생자들을 돕지 않는 것을 손쉽게 정당화할 수 있었다.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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