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일본 근현대사 5
가토 요코 지음, 김영숙 옮김 / 어문학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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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아우르는 일련의 분쟁에 대한 일본 정치인들의 시각은 '중일간의 국교 회복과 평화 정착을 저해하는 잔존 세력의 토벌전'이었고, 군부의 시각은 '조약에 명시된 일본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보상 행위의 연장'이었다. 여기서 국교 회복은 만주가 일본에 귀속된 지역임을 상호 확정하는 것이고, 조약의 이행은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중국과 맺어온 각종 이권의 보장을 뜻한다.

군부는 소련과 미국이라는 현실적이고도 잠재적인 적대 세력과의 일전에 대비하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열도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고도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 바로 만주(몽골까지 포함한)의 영구 점령이라고 판단했다. 가난한 농민과 도시 빈민으로 구성된 군대의 여론전은 국민들의 열광적인 정서를 적절히 자극했고, 정치권은 군부의 폭주에 때로는 당황하면서도 곧 적절한 수용과 전략적 이용을 모색했다.

본 저서는 만주를 둘러싼 일본의 군사적 도발과 외교적 수사, 경제의 총동원, 이념적 정당화까지 일체화된 군국주의가 어떠한 인간 행위자와 의사결정 구조를 통해서 점차 강고화되는지를 세밀하게 분석한다. 거기에는 정념의 선동과 대결하는 이성의 숙고가 아니라 오히려 그 진군을 뒷받침하는 '계산적' 이성의 모습이 가감없이 들어있으며, 달리기 시작한 열차는 스스로 브레이크를 거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만주사변은 1) 상대국 지도자의 부재를 틈타 일으켰다는 점, 2) 본래는 정치 간섭이 금지된 군인에 의해 주도된 점, 3) 국제법에 저촉된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국제법 위반이라는 비난을 피하도록 계획된 점, 4) 지역 개념으로서의 만몽의 의미를 끊임없이 확장시키고 있었다는 점, 이 4가지 특질을 가지고 있다고 보인다. 17)

(만몽개념의 확대 과정에서) 일본이 취한 방법은 우선 지역을 말로 표현하고 다음으로는 말에 표현되는 실태를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팽창시키는 방법이었다. 44)

이시하라라는 존재가 당시 사회에서 가졌던 의의는 세계 공황을 맞아 (만몽지역 확보를 통한 일본 국방경제의 자급자족정책 확립이라는) 군사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전쟁이 있을 수 있다고 단언하며 지구전은 두렵지 않다고 국민을 설득하는 선동성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국방비 부담 경감에서 오는 경제효과 때문에 군축에 찬성해 온 사람들은 `일본 내지에서 돈을 한 푼도 지출하지 않고`도 전쟁이 가능하다는 선동을 통해 조용히 이시하라에게 빠져들게 되지 않았을까? 124)

1920년 신 4국 차관단 교섭에서 일본 측이 만몽권익에 관한 열거적 제외를 영미 열강에게 요구할 때의 설명은 `우리 국방 및 국민적 생존`상의 필요라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국민적 생존이라는 말은 만몽을 제외하기 위한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29년 10월 24일 뉴욕 주식시장의 대폭락에서 시작된 세계 공황이 일본에 파급되자 현실은 이러한 수사를 밀어냈다. 138)

조르게는 중일전쟁을 통해 일본의 전력이 강화되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일본 육군은 중일전쟁을 하는 사이에 23만 명이 채 안 되는 작은 육군에서 독일이나 적군 규모의 큰 육군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중일전쟁까지는 기술상으로도 훨씬 뒤떨어져 보였으나 지금은 모든 근대 병기를 갖추어 기술상으로도 뛰어난 역전의 육군으로 변화했다.`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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