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폐허에서 - 저항과 재건의 아시아 근대사
판카지 미슈라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19~20세기를 횡단한 서구 제국주의에 아시아가 대응한 방식은 대체로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자신들의 우월한 종교나 전통에 충실하면 섭리 혹은 순리에 따라 강성함이 돌아온다는 생각, 둘째, 전통 문화와 사회 질서를 보존하면서 그 위에 서구의 기술을 도입한다는 생각, 셋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벌어지는 국제 세계에서는 옛 것을 철저히 내버리고 서구 근대화를 압축 달성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들은 전통과 기술을 다루는 방식이 제각각이었지만, '국민국가'라는 서구의 제도를 사고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단결만이 압도적인 서구에 맞설 수 있다는 논리는 국가별 입장과 발전 수준의 차이 앞에서 와해되어 갔다. 범이슬람주의는 사회주의가 세계대전의 파도 속에서 국가에 포섭된 것처럼 권력의 자장 안에 머물렀고, 범아시아주의는 제국 일본의 야심이 선의를 집어삼키면서 사라졌다.

서구를 완전히 배척하거나 서구에 종속되어도 좋다는 몰아(沒我)는 서로를 침식했고, 유교나 불교, 이슬람을 내세운 도덕적 전통은 새로운 사회 체제의 중심 이념으로서의 유효성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아시아는 민주적 제도를 국가의 기본 조건으로 받아들였는가, 아니면 국가의 권위체로서의 성격만을 받아들였는가로 지형이 나뉘었다. 개인은 내면을 규율하는 체제를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국가는 부단히도 다원성을 희생시키고자 했다.

주어진 것과 쟁취한 것은 같은 것이라 해도 결국에는 같지 않다. 주어진 것은 쟁취하는 과정을 겪지 않으면 다시 빼앗기거나 변질되기 마련이다. 아시아는 제국의 습격에 맞서 오래된 제국을 재건하거나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에 몰두했다. 그러나 제국이 무너져내린 폐허에는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들과, 유령처럼 그 위를 배회하는 '종교'만이 남았다. 이 인공의 들판에 자라나는 쇠사슬을 처리하는 일은 오롯이 남은 자들의 몫이다.

아시아 세계 어디에서든 근대화는 두 가지 가장 영속적인 결과를 낳았다. 하나는 군 장교나 정부 관료, 새로운 전문직처럼 세속적이고 서구화를 지향하는 새로운 집단들의 힘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납세을 요구받은 일반 시민들, 서구인 때문에 영향력이 위태로워진 종교와 사회 엘리트, 당국이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는 상황에서 자신들 고유의 인종적 혹은 종교적 정체성을 깨달은 소수 집단들의 반발이었다. 103)

량치차오가 갑작스레 변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머문 메이지 시대 일본의 성공은, 권위주의 국가가 근대 국가를 건설하는 일에서 자유민주주의제보다 효과적일 수 있음을 입증했다. 유럽 국가들이 보호주의적 경제정책을 포용하고 더 강한 국가를 건설하는 쪽으로 움직이자,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초기에 도쿠토미 소호는 자유주의적 개혁론자였지만, 189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서구 국가들마저 개인의 권리를 포기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는 "대의제와 정당 내각"의 가치를 의심했다. 량치차오가 비스마르크의 독일에 구현된 국가주의를 갈수록 선호하는 일본인들의 지적 추세에 영향을 받은 것은 거의 불가피한 일이었다. 249-50)

도쿠토미는 많은 일본인들이 진심으로 믿었던 개전의 더 큰 이유를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는 앵글로색슨족이 동아시아를 잠식하고 강탈한 악랄한 선례를 근절하는 방법으로만 동아시아의 질서와 안녕, 평화, 자족을 성취할 수 있음을 동아시아의 인종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348)

서구화된 세속적인 탈식민 엘리트들은, 이슬람이 세속적 발전과 경제적 통합이라는 국가의 과업에 걸림돌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대개 이슬람 단체를 잔혹하게 탄압했다. 그러나 많은 나라들에서처럼 그런 근대화 노력이 실패했을 때, 또는 대중의 고통을 초래했을 때, 이슬람의 위세는 더 강해졌다. 374)

초기에 알레 아마드(1923~1969)는 이란 학생들을 서구 대신 일본과 인도로 보내서 서구 중독증에 대항할 수 있다고 여겼다. 동양에 중독된 이란인들이 서구에 중독된 이란인들과 균형을 이룰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이 계획에는 이슬람의 역할이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1962년에 당시 신생 국민국가이던 이스라엘을 방문했다가 국민들이 공유하는 종교에 기반을 둔 정치적 결속의 힘을 보고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
터키와 달리 이스라엘은 종교적•문화적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고도 근대적인 독립국가가 되었다. 385)

공산주의적 반제국주의자뿐 아니라 무슬림조차 배척하기 어려운 서구의 관념이 하나 있었다. 아시아 거의 어디에서나 탈식민 사회의 엘리트들은 유럽의 성공으로 보증된 그 관념을 받아들였다. 너그럽게 해방을 약속한, 자강과 긍지를 위한 그 혁명적 비책은 바로 국민국가의 제도와 관행이었다. 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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