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 족청계의 형성과 몰락을 통해 본 해방 8년사 역비한국학연구총서 34
후지이 다케시 지음 / 역사비평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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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은 '국민적 민족공동체'라는 개념 안으로 노동계급의 정념을 집약하여 그들을 행동하는 정치적 주체로 재탄생시키며, 타자에 대한 배제와 무력 행사를 기반으로 삼는다. 민족자결주의에 고취된 제3세계는 파시즘을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수단이자 민족의 역량을 강조하고 일체화를 달성하는 기술로 수용하였으며, 민족정신의 함양을 어떠한 이념이나 체제보다 우선시했다.

한반도의 민족주의 일부에서도 파시즘을 자주적 민족주의의 방편으로 적극 받아들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을 결성한 이범석과 거기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안호상이다. 이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국가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대변되는 '경제적 제국주의'와 '영토적 제국주의'를 지양하고 민족 고유의 정신 아래에서 민족의 역량을 결집한 공동체였다.

이들은 민족을 피로 맺어진 자연적 산물이자 역사적 고난을 공유한 공동체로 규정하면서, 좌우를 모두 포섭하고자 노력했고, '지행합일' 사상을 강조하여 실천의 근간이 되는 육체를 통제하고 생활 전반에 대한 군사적 규율 강화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제3의 길로 포장된 파시즘이 냉전을 주도하는 현실 권력의 견제와 감시 아래에서 피어나리라는 것은 헛된 망상에 불과했다.

이들이 "민족의 통일과, 국민 균등의 복리, 세계 평화에 기여"라는 원대한 구상으로 제시한 '일민주의'는 민족의 허약한 역량과 냉전 체제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결여한, 머리만 웃자란 갓난아기의 꿈이었다. 해방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순진한 자기 중심주의를 삼킨 것은 미군정의 위력을 적극 수용하고 이용하면서 자신의 야망을 실현해가던 거대한 산, '이승만'이었다.


1960년대에 제3세계 국가들에서 나타난 이데올로기적인 경향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nationalist socialism)"라고 표현되기도 했는데, 30년대부터 형성된 흐름이 냉전이 시작된 뒤에도 제3세계에서 지속된 것이다. 흔히 제3세계주의(third worldism)라 불리는 흐름은 대체로 좌익적 경향이 강한 것이었지만, 민족의 일체성이나 지도자를 강조하는 측면에서는 파시즘과도 공통적인 지점들이 존재했다. 29)

정신 훈련 중에서 제일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이 승강기식인데, 입소한 날부터 졸업하는 날까지 매일 아침저녁 국기와 단기의 승강기식을 거행했으며 음악에 맞추어 애국가, 단가를 합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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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석은) 국기 승강식이 무질서하고 산만한 것은 "국기에 대한 숭경심, 따라서 국가 관념과 민족의식이 박약하다는 것, 즉 민족적 결속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여실히 들어내는 것"이라며 국기에 대한 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37)

양우정은 스스로의 전향 경험을 떠올리면서 공산주의를 비판하는데, 1930년대에 전향을 선언했을 때와 다른 것은, 가족의 연장선상에 있는 민족을 국가와 일치시킬 수 있는 상징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과거에 전향했을 때 찾지 못한 `지도자`가 드디어 주어진 것이다. 양우정의 전향은 `지도자` 이승만을 매개로 완성되었으며, 1930년대에 천황제를 매개로 고바야시 모리토가 전향자운동을 추진했듯이, 양우정 역시 이승만을 앞세우면서 전향 공작에 앞장서게 된다. 237)

양우정은 일민주의의 핵심인 동질성을 자본주의 비판, 즉 자본주의의 산물로서의 계급 분열에 대한 비판과 그 변혁에서 찾으려고 한 데 반해, 안호상은 그 동질성을 변혁을 통해서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핏줄`이라는 이미 주어진 것에서 찾는 것이다. 일민주의가 내포할 수 있었던 변혁적 요소는 안호상에 의해 거의 제거되고 말았다. 265)

반공주의 논리의 변화 역시 족청계의 부활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족청계의 반공주의는 민족주의를 통해 내부적 계급모순을 `(적색) 제국주의`에 대한 적대로 치환시키는 파시즘적 논리에 의한 것이었는데, 족청계 제거 직후부터 반공주의 논리로서 오히려 `제3세력`과 결부될 수 있는 민족주의를 경계하고 진영 논리를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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