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군주 - 근대일본의 권력과 국가의례 이산의 책 26
다카시 후지타니 지음, 한석정 옮김 / 이산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김정일 현수막이 비에 젖는다면서 눈시울을 붉히던 북한 응원단 처녀들의 애타는 심정은 천황가家를 향한 일본 국민들의 만들어진 충성심과 판박이처럼 닮았다. 이 상징 조작은 실질적으로 그 형태가 복종에 기반한 봉건 군주를 표방하고 있는가, 아니면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지향하는가에 상관없이 근대 국가가 정교하게 구축한 매트릭스의 세계에서 벌어진다. 기술이 정서를 압도하여 국민 전체를 동일한 체험의 시공간에 집어넣을 수 있는 지금, 이것은 그들에게만 가능한 일도 아니고, 그들만 겪고 있는 일도 아니다.

메이지와 쇼와 천황은 신이자 인간이었고, 전통을 간직한 쿄토의 상징이자 문명을 개척한 도쿄의 심장이었으며, 정치를 초월한 신적 존재이자 국가 수반이었다. 그들은 메이지 근대론자들의 작업 속에서 만세일계의 역사와 팔굉일우의 미래를 한 몸에 지닌 존재로 거듭났다. 제국의 흥성기와 쇠망기 전체에 걸쳐 있는 그들의 일생은 국가의 영속을 대표하면서 '전쟁을 통한 평화'라는 형용모순을 어색함 없이 신념화하고 있었다. 그들은 국가의 수장으로서 '화려한 군주'의 삶을 누렸지만, 실상 제국주의 광신도들이 부리는 인형이었다.

특정 이념의 내면화는 통상적으로 생각하듯이 일방적으로 주입된 수동적인 과정이 아니라, 그 가르침을 통해 고양된 인식의 전환을 자각하는 계몽된(?) 인간의 자발적 체득이 중심 행위로 작용한다. 감시와 체벌에 반복적으로 시달리는 개인은 점차 외부의 강압이 아니라 내면의 감시와 체벌에 구속된 상태로 전락한다. 판옵티콘이 더이상 감방이 아니라 안식처가 되는 셈이다. 구조와 개인의 대립은 본성과 양육의 문제처럼 오래된 의문이지만, 근대 국가의 개인의 존엄을 지키는 방법은 구조의 개입을 제한하는 구조의 수립뿐이다.


초기 도쿠가와 정치체제하의 정치엘리트인 사무라이는 일반 민중, 이른바 우민(愚民)의 수동적인 순종에 만족했지만, 새로운 메이지 시대의 위정자들은 국가적 목표의 실현에 일반인의 적극적이고 정신적인 참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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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근대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이, 자유주의적인 구미 국민국가의 지도자들 못지 않게, 근대국가의 모든 문화기구가 대중을 계몽시키기 위한 메커니즘임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43-4)

순행은 무엇보다도 공간 통합의 의례였다. 영토를 가로질러 국경까지 다다름으로써, 순행은 군주라는 상징을 중심으로 영토가 공간적 일치를 이루었음을 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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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순행은 메이지 정부가 국토와 국민, 그리고 나라의 국경을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천황의 능력을 현실화하고 이를 믿게 하는 최초의 기회를 제공했다. 85-6)

공식 석상에서 행위의 중심인 메이지 천황은 유럽 군주의 것을 본뜬 마차를 타고 늘 서양식 군복을 입었다. 유럽에서 유행하는 최신 복장을 한 문무관들이 천황의 행렬을 뒤따랐다. 그리고 거대한 규모의 육해군과 무기들이 국가의 군사력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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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과 황실전범의 발포를 신성하게 만들고, 이 두 법에 초역사적인 기초를 부여한 뒤, 천황은 승복 같은 옷을 벗고 새 정전(正殿)에서 헌법을 하사하는 공개적 행사를 위해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147-9)

베네딕트 앤더슨은 공통의 국민공동체에 자신이 속한다고 상상할 수 있는 중요한 전제조건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의식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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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에 관해서 앤더슨은 인쇄자본주의의 발전과 소설이나 신문 같은 미디어를 통해서 이러한 동시성이 구성되었던 과정을 특히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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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말기에 전국적 교통, 통신망이 급속하게 발전하지 않았다면, 국가의례가 행해지는 동안 동시성의 의식이 생겨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252-3)

규율적인 정부가 강요하는 새로운 습관 및 신앙과, 민중생활의 오래되고 때로는 무질서하기까지 한 습관과 사고방식 사이의 이 긴장 속에서 다양한 국가장치—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와 병영—는 자신에 감시당하고 있다는 의식을 스스로 내면화시키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데 가장 효과적이었다. 이 의식은 일본 안에 감시의 사회가 창출되어 가는 과정에서 천황의 응시에 상응하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2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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