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 창비신서 143
노마 필드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199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책에는 1989년 히로히토 천황의 죽음을 전후하여 기성 질서에 맞선 세 명의 시민이 등장한다. 이등국민으로 취급하고 국가주의를 강요하는 본토에 맞서 일장기를 불태운 오키나와의 슈퍼마켓 주인, 자위대 복무 중 사망한 남편의 혼령을 신사에 합사하여 원치 않는 숭배의 대상으로 격상시킨 국가에게 소송을 건 아내, 그리고 천황의 전쟁 책임을 공개적으로 거론한 나가사키 시장이 그들이다. 일상은 침묵의 평화를 사랑하지만, 균열도 침묵하는 세계에서 터져나오기 마련이다.

다수는 다수의 의견을 갖고, 다수의 의견은 저절로 융합되지 않는 이질성을 띤다. 다양성은 존재 자체로 긍정적인 조화를 이루는 힘이 아니라, 공적 이해에 부합하는 공통감각(sensus communis)을 추출하고 그것을 합의의 장(場)에 올릴 수 있는 조정자를 필요로 한다. 공통감각을 지닌 다수가 참여한 공간이 그러한 균형을 필연적으로 요구하지 않거나 조정능력을 상실한 상태-가령, 사이버 세계-에서는, 이것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행위를 자유롭게 할 권리로 오인되곤 한다.

이 자유의 공간은 다수의 상식과 일상에 위배되는 행위를 불온한 것으로 치부한다. 조정을 시도하는 행위마저 편협한 의도로 간주하여, 사회 질서를 교란하는 위험 요소로 낙인 찍는다. 그것이 물질적 이득과는 멀고 정신적 각성에 가까운 것이라면 배척당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습속은 일상에 스며들어 있는 내면화 기제이며, 마치 본래부터 갖고 있는 것, 지켜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거기서 인간 선언을 한 천황이 죽어도 후대가 그 아우라를 이어받는다는 환상이 지속된다.


19세기의 정치가 이또오 히로부미가 탄식한 것은, 사회를 하룻밤 사이에 서양식으로 근대화시키기 위해서는 그 나름의 심리적 연료와 규율이 필요한데 그것을 공급해줄 만한 고유의 신앙체계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때 채택된 해결책이, 쿄오또의 궁정에서 그늘 속에 살고 있는 젊은 메이지 천황을 수도 토오꾜오로 끌어내어 서양식 군복 차림의 군주로서 전국에 현시(顯示)한다는 것이었다. 40)

슈퍼마켓 주인인 찌바나 쇼오이찌가 일장기의 강요에 저항한 것은 오직 현재에 대한 무관심이 과거를 망각하는 일과 맞물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81)

원폭기념관에서 내가 놀란 것은, 인간의 수난을 말해주는 사진이나 설명보다는 폭격을 받으면 온갖 건물들이 녹고 휘어지고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쪽에 비중이 더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253)

(천황의) 장례식이나 즉위식은 근대국가의 서로 모순되는 요소 즉, 합리성에 대한 요청과 신화적인 것에 대한 위험한 유혹이 분출하여 태평스러운 일상성의 표면에 균열을 일으킬 듯한 아슬아슬한 순간의 표본 같은 것이다.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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