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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과 문신 - 한국 중세의 무신 정권
에드워드 슐츠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11월
평점 :
일본의 막부 체제는 천황과 물리적인 거리를 두고 천황제를 상징적인 권위로 활용한 반면, 고려의 무신 정권은 중앙 집권적 군주제를 존속시킨 채 거기서 자신들의 안락을 추구했다. 왕권과 실권(實權)이 공존한 이 이중 통치는 문반(文班) 기구의 행정력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 독점이 새로운 체제 수립의 기틀로 작용하지 못했다.
무신 정권의 특징은 왕과 최고 권력자의 불편한 동거, 유교의 충(忠) 이념과 역성혁명의 내면 갈등, 권력 유지의 방편이었던 토지 개혁과 자신들의 재산 증식욕, 개인 숭배가 야기한 후계자의 숙청 작업 등 모순의 연속이었다. 그들은 여러 겹으로 체제 안정화를 시도했지만, 권력자의 혜안이 흐려지는 순간 모든 것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정변은 이전부터 시작되어 의종 때 격화된 정치적•사회적 갈등의 산물이었다. 독립하려는 의종의 모색은 역설적으로 그를 몰락시켰다. 그는 강력한 정적들을 괴롭혔다. 조정 관원•환관•내시의 방탕과 오만을 용인한 그의 방임은 문신과 무신의 분노를 불러왔다. 국왕과 그의 동생•모후 사이에 형성된 분열은 당시의 정치를 더욱 일그러뜨렸다. 견제할 수 있는 왕조의 정치 기구는 없었으며, 언론 기관의 간쟁—정치적 음모에 따라 고무되고 과도한 압력을 부과한 것이 분명한—은 무시되었다. 긴장이 커지면서 무신 지도자들의 불만과 문신 학자들의 환멸은 1170년의 무신의 난으로 융합되었다. 52)
고려 사회는 12세기 말엽 천천히 해체되었다. 새 무신 지도자들은 중방에 권력을 통합하고 문반 구조를 운영해 행정적 일관성을 지닌 외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중앙 조정은 통제력을 잃었다. ... 유학자들에게서 노비의 아들로 비판된 이의민이 1184년(명종 14)에 집권했을 때 모든 제한은 사라졌고 약탈과 절도는 당시의 기준이 되었다. 65-6)
최씨 정권의 약점 중 하나는 지도자 개인을 향한 충성을 정권 전체에 대한 헌신으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지도자마다 그 자신의 추종자 집단으로 둘러싸인 상황은 전체 구조에서 하위 집단끼리 권력을 다툴 가능성을 높였다. 최우는 이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군사적 적대 세력을 재빨리 배제시켰으며, 아버지의 충성스러운 부하를 유배 보내고 자신의 추종자들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197)
고려 귀족은 여러 이유에서 사찰을 후원했다. 진정한 독실함도 한 요인이었지만, 지배층은 상당한 경제적 이익도 얻었다. 그들은 불교의 한 종파에 가족 구성원을 출가시켜 승려는 일정한 의무에서 면제된다는 고려의 세법을 이용했다. 국가의 토지와 녹봉제도에서 승려에게 수익을 할당해주는 다른 조항 또한 이 가문들에 이익을 주었다. ... 후한 기부의 수혜자로서 교종은 점차 나라에서 가장 넓은 토지 소유자 중 하나가 되었다. 207)
사찰은 학교를 대신해 학습의 중심이 되었다. 이제현이 지적했듯이 젊은 유생들은 승려 문하에서 배우려고 사찰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상호 연구로 불교와 유교의 차이는 줄어들었다. ... 최씨 정권은 유학자와 선종의 활동을 후원해 이런 만남을 발전시켰고, 그 결과 13세기 후반 한국이 신유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예비했다. 224-5)
유교 사상은 왕조질서를 정당화했지만 최씨 정권의 다른 절반인 최씨의 사적 기구에는 아무런 존재 이유도 제공하지 않았다. 국왕과 문신이 포함되어 있는 왕조의 구조적 체제를 지지한 것과 마찬가지로, 최충헌이 유교를 지지한 것은 결국 그의 체제를 약화시켰다. 자신의 혁신에 어떤 형태의 이념적 지지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의 체제에서 결정적 약점이었다.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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