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국의 탄생과 유산 - 제국 일본의 교두보
오카베 마키오 지음, 최혜주 옮김 / 어문학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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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는 민간 정부의 관리 아래에서는 전쟁을 억제하는 조직이지만 자율권을 획득하는 순간 전쟁을 촉발하는 조직으로 변모한다. 군대가 국가의 주축이 되면 외교적 협상 전략을 군사적 점령 전략으로 치환하려는 유혹에 쉽게 빠지며, 국가의 전 역량을 전쟁 수행에 쏟아붓는 하나의 선택지에 올인하게 된다. 전쟁은 그야말로 생명을 불살라 승리를 쟁취하려는 한 판 도박이기 때문에 실패할수록 오히려 매몰 비용에 대한 집착을 강화시킨다.

2•26 사건으로 일본 군부는 정부의 통제력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야망을 현실화한다. 동북 군벌 장쭤린을 폭사(1928)시키고, 유조호 사건(1931)을 조작하여 만주사변을 일으킨 것은 정부의 묵인과 방조를 넘어 미래를 창조하려 했던 관동군의 테러행위였다. 군사 기지를 방불케 하는 만주국의 체제는 태생부터 예견되어 있었으며, 전쟁만을 위한 총체적 착취로 달궈진 총구를 식힐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파괴뿐이었다.


사이토 내각은 만주국에 특명전권대사를 파견하여, 관동군 사령관에 이 전권대사와 관동주 행정의 지도감독권을 겸임시킨다는 편법을 고안해냈다. 만주국에 대한 지도는 군사령관 겸 전권대사의 `내면적 통할 아래 주로 일본계 관리를 통해` 행하도록 되었다. 이것이 군사령관의 내면지도권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50)

이 시기의 국제정세는 예상한 바와 달리 일본에 매우 유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제국주의국은 대공황 이래 내외에 많은 문제를 안고, 또 소련은 전력을 다해 5개년 계획에 따른 국내 건설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침략에 적극적인 간섭을 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미국 국무장관 헨리 스팀슨은 일본에 대해 강하게 나오는 것은 도리어 군부를 자극하는 결과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영국은 중국에 동정적이었지만 반면, 일본의 행동이 중국의 반제국주의운동을 누르는 것이라고 기대했다. 72-3)

태평양 전쟁 하의 만주국은 불충분하게 치우친 산업구조를 책임진 채, 증산과 대일수송의 증대만이 냉엄하게 추구된 셈이 된다. 그것은 경제통제와 민중동원의 끝없는 확대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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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준비를 위해 시작한 만주산업개발 5개년 계획은 오히려 전쟁 때문에 그 모순을 깊게 하여, 전쟁 가운데 붕괴해 갔던 것이다. 122)

대본영은 1944년 9월, 대소전략을 지구持久 수세로 180도 전환하여, 관동군의 작전계획을 전면적으로 변경하도록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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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군의 약체화는 동군의 무력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만주국의 지배 체제를 근본으로부터 흔드는 것이었다. 더구나 과거에는 정예의식이 강했던 만큼, 이 현실은 또한 관동군의 내외에 걸쳐 비합리성과 비인간성을 증대시켜, 만주국 지배에 폭력적 성격을 강하게 했다. 165)

이 (동북 지방) 침략을 추진한 것은 군부, 특히 관동군인데 일본의 지배층과 정부는 때로 군부와 생각이 달랐음에도, 이러한 형태로 중국을 지배하게 된 것에 결코 반대하지 않고, 결국 모든 기정사실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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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내에서는 만주사변과 만주국 성립을 발판으로 군부의 정치상 발언권이 강해져, 파시즘이 대두해온다. 2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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