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의 계보 - 한국인의 민족의식과 영토인식은 어떻게 변해왔는가
야기 다케시 지음, 박걸순 옮김 / 소와당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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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성은 타자(他者)를 통해 얻어지는 미덕이며, 우리와 타자 사이에 존재하는 교집합이다. "타자가 곧 객관성은 아니지 않는가"라는 우려는 '짐짓 그러한 체' 하는 소피스트(sophist)의 가면(假面)과, '역시 그러하다는' 데모스(demos)의 기우(杞憂)가 만나는 자리이다.

http://history21.egloos.com/v/2418101 (을파소의 역사산책, 조선 국경과 간도에 대한 간단한 정리)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는 인식은, 역으로 말하면 고구려의 옛 영역을 말갈이 부당하게 `점거`하고 있다고 하는 인식으로도 연결된다. 따라서 그 말갈(후의 여진)에 의해 `점거`된 고구려의 옛 영역을 회수하는 일은 통일신라 분열 후 `후삼국`의 전란을 겪으면서 `삼한`을 통일(재통일)했던 고려 태조(왕건)에게는 이른바 `북진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명분 중 하나가 되었다. 93)

본래는 별개로 창작되었던 해모수와 단군의 신화는 양자에 공통되는 천제의 아들이라는 속성을 매개로 이윽고 동일한 신격으로 결부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부여와 고구려, 백제의 건국설화가 통합되고, 단군(해모수)의 아들인 부루가 부여를 건국하고, 그 위에 한 사람의 아들인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마지막으로 주몽의 진짜 아들(혹은 양자)인 온조가 백제를 건국했다고 하는 일련의 계보가 성립하게 되었다. 144)

조선왕조의 성립은 단군시대의 예언에 의해 `수천 년 이전`에 이미 약속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예언이 실현되었던 조선시대에 들어서면 단군에 대한 계승의식은 한층 더 고조되었고, 단군에 대한 국가 제사가 단계적으로 정비되었다.
구체적으로는 먼저 1429년(세종 11년)에 평양의 기자묘 남쪽에 단군묘가 신설되었고, 단군과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이 합사되었다. 164-5)

(러시아의 남하로) 동북 변경의 쇄국정책이 사실상 파탄나자 유망민 무리는 함경도에서 연해주로, 또는 `간도` 방면으로 대량 유출되었다. 이 즈음 러시아의 남하에 대항해서 청나라 또한 종래의 봉금책을 철회했고, 동북부로 중국인을 보내고 개간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자 했다. 1881년(광통 7년) 청나라가 간도지역 개간에 정식 착수했을 때에는 이미 조선에서 온 대량의 유망민들이 그곳에서 경작에 종사하고 있었다.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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