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중국사를 말하다 - 문명과 야만으로 본 중국사 3천 년
줄리아 로벨 지음, 김병화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장성은 유목민의 남하를 차단한다는 본래의 의도를 한 번도 달성하지 못한 채, 과도한 인력과 재정 낭비를 유발하여 역대 왕조의 기반을 꾸준히 잠식했다. 애물단지로 전락하던 장성이 부활한 것은 근대에 들어서이다. 서구와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이라는 환란을 이겨낸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서사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민족의 위대한 기상을 투영한 만리장성(The Great Wall)을 재발견했다. 굴기하는 중원의 호령은 현재 남아있는 장성이 명대에 개축된 것이라는 사실을 외면한 채 달에서도 보이는 인공물이라는 환상과 진시황의 유물이라는 오래된 신화에 집착했다.

중국인들의 심상에 그어진 장성은 세계가 자신들을 향하고 있다는 중화 사상의 부활을 촉진한다. 이것은 유목민의 '일시적'인 점령은 가능하지만 결국에는 그들을 중국의 자식으로 변모시켰다는 자신감의 부활이며, 서구의 기술 역시 그렇게 중국화 할 수 있다는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의 내면화이다. 장성은 영양분을 선별해서 받아들이는 세포막처럼 받아들이는 대상의 자격을 직접 규정한다. 그래서 경계를 차단한 채 외부를 단정하는 대륙은 언제나 충분히 넓지 않다. 문제는 "과거의 영화를 현재에 재현하라"는 망상이 비단 그들만의 착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무관심하던 중국인들이 성벽에 관심을 보이고 열광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 중국에서 명확하게 인식된 어떤 요구를 채우기 위한, 완전히 도구적인 관점 때문이었다. 즉 실패한 혁명, 내전, 기근, 외침, 질식할 듯이 광범위한 빈곤 등 20세기의 힘든 시절을 견뎌내고 민족적 자부심을 간직하기 위해 중국의 과거에서 역사적 위대함의 상징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25)

흙을 다져 쌓던 예전과는 달리 벽돌과 석재로 만들어져 현재 우리가 보는 것 같은 형태를 갖춘 만리장성이 16세기 중반에서 후반 사이에 마침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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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추가된 이 성벽의 동북부 구간은 6000킬로미터에 달하는 전체 구조물을 대표하는 전시용 구간으로서 돌과 벽돌로 된 구조물이 험준한 산지의 능선을 휘감고 올라가는 모습으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바로 그 구간이다. 286)

중국의 문을 활짝 열고 근대 서구의 기술과 투자를 받아들이자고 제안하면서도 쑨원은 중국인들의 상처받은 민족적 자존심을 달래주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 쑨원은 민족적 자존심을 충분히 진작할 수 있도록, 확실하게 삼차원적인 상징물을 찾았다. 중국의 전통이 기술적 천재성과 역동성을 발휘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 증거이면서도 충분히 추상적이고 역사적으로 모호한 것, 그래서 특정한 사실을 연상시켜서 쓸데없이 문제를 일으킬 위험이 없는 것이어야 했다. 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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