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사라지지 않는 로마, 신성로마제국 - 실익과 명분의 천 년 역사
기쿠치 요시오 지음, 이경덕 옮김 / 다른세상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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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은 (서)로마의 멸망으로 분열된 유럽 각지에 뿌리를 내린 교회를 중심으로 대륙의 조각을 맞추는 구심점이 되고자 했으니, 이것은 신의 뜻을 받들어 모실만큼 경건하면서도 강력한 세속 권력을 필요로 했다. 레오 3세 교황의 명민한 정책(800년 경, 위조된 '콘스탄티누스 기증장'에 근거한 황제 서임권)과 오토대제의 야심(900년 경, 귀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비세습적이고 전국적인 교회조직을 활용)이 맞물린 것은 역사의 필연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결합은 마냥 행복한 동거가 아니었다. 황제를 제어하려는 교황의 의도와 교회를 장악하려는 황제의 통치는 '신성한' 그 무엇이 아니라 충돌할 수밖에 없는 세속적 지배욕의 산물이었다. 황제의 권력은 막강했지만 세월의 힘 앞에서 영속성을 잃었고, 교회의 권력은 숨죽인 듯 보였지만 끈질기게 살아남아 위력을 발휘했다. 이것은 근대 이후의 통치 권력과 관료 권력의 긴장과도 같아서 서로 다투면서 의지하는 순망치한의 관계와 같았다.


당시(900년 경) 독일 왕국은 부족 연합보다 조금 나은 정도로, 통일 국가에 어울리는 전국적 행정조직은 꿈과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카를 대제가 선물로 남긴 전국적인 조직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교회 조직이었다. 오토는 통일 국가 수립을 위해 이 조직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성직자를 국가의 고급 관료로 등용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그 무렵 인근의 대귀족에게 침식당해 경제적으로 곤궁해진 많은 교회 영지와 수도원 영지를 보호하는 데 힘썼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 영지에 관세의 권리, 시장의 권리, 화폐 주조의 권리까지 부여했다. 이렇게 되자 교회의 영지는 백작의 영지가 지니고 있던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교회의 우두머리인 주교의 영지는 성직자 독신제도에 묶여 있어 세습이 불가능했다. 57)

1122년 하인리히 5세와 교황 칼리스투스 5세 사이에 보름스 협약이 체결되었다. 성직자의 서임권은 교황에게 있다는 내용이 담긴 협약이었다. 그레고리우스 7세가 시작한 서임권 투쟁은 이렇게 교황 쪽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러나 이들의 갈등이 절정에 이른 시기는 전락이 시작되는 때이다. 황제 권력의 실추는 동시에 교회 교황 정치의 종언이 시작된 것이기도 했다. 독일 제후들은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이익을 위해 교황과 결탁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레고리우스 7세가 이상으로 생각했던 신권 정치 시스템을 받아들일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86-7)

독일 삼백 제후에게 각각 동맹권이 있다는 것은 신성로마제국이 완전히 시체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때문에 이것을 정한 베스트팔렌 조약은 일반인들 사이에서 `신성로마제국 사망 진단서`라고 불렸다. 이제 신성로마제국은 신성하지도 않았고 로마적인 요소도 없었으며 제국도 아니었다. 230)

그들(제국을 꿈꾸는 황제들)의 개인적 주체성은 역사를 실제로 움직이는 사회적•경제적 시스템의 변천에 농락당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의 정체성이 이런 역사 구조의 그물망 속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결코 자각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 작은 그물망 속에서 자기들의 세계제국 이야기를 환각처럼 바라보았다. 그런 그들을 각성시키고 세계제국 환상을 포기하게 만든 것은 그들의 주체성을 훨씬 능가하는 그들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이고 압도적인 주체성의 등장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나폴레옹이었다. 2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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