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 어느 노비 가계 2백년의 기록
권내현 지음 / 역사비평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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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전 계층이 양반이 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면서 조선은 체제 변혁의 기운을 내부에서 흡수, 분산할 수 있었다. 귀족과 평민이 절대로 넘어갈 수 없는 단절의 관계라면 한쪽을 무너뜨리는 것만이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겠지만, 누구나 노력 여하에 따라 표면적으로라도 신분 상승의 가능성이 있다면 굳이 전복을 꿈꾸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테고, 설사 그러한 움직임이 있다고 하더라도 세력을 얻기 위한 조건의 목록이 길게 늘어났을 것이다.

조선은 시장경제의 활성화로 신분제가 사실상 사라진 명나라와 달리 주자학의 이상을 고수하면서 소농 중심의 정체된 자급자족 경제를 기본 원리로 삼았다. 신분 내의 유동성을 암묵적으로 허용하지만 신분제 자체는 여전히 유지하려는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셈이다. 전 계층을 '양반화'라는 정신 승리에 몰두하게 만든 이 구조는 외부와의 교류에서 생성되는 체질 개선을 가로막는 조선 내부의 통제된 변화라는 점에서 역설적이며, '폐쇄된 개방성'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상위 신분인 양반은 소수에 불과했고, 인구의 절대다수는 평민이나 노비 같은 하천민이었다. 그 가운데 많은 이들이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사회적 장벽을 뛰어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방향은 양반 기득권의 직접적인 해체가 아니라 모두 다 양반이 되는 독특한 길이었지만, 근대 이후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상당한 성취를 이루기도 했다. 9)

조선 왕조 후기의 최대 기근이라고 할 수 있는 경신대기근(1670~71, 현종 11~12년)과 을병대기근(1695~96, 숙종 21~22년)이 이 시기에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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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근으로 국가가 거두어들일 수 있는 세금이 크게 줄었지만, 굶고 병든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구휼 비용은 대폭 늘어났다. 이럴 때 관료들은 민간의 재력 있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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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기근이 잦았던 숙종 대에 정부는 노비 면천을 인정하는 문서나 통정대부 등에 임명하는 공명첩을 팔아 진휼 재정을 확보했던 것이다. 83-5)

양반을 지향했던 비양반층 출신들은 학문적 소양을 갖추는 것이 자신과 후손들의 사회적 성장에 미칠 영향을 잘 알고 있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 서당이 확산되면서 비양반층 자제들에 대한 교육 기회가 서서히 늘어난 것도 이와 관련이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근대 이후 새로운 교육제도와 학교에 대한 폭발적 관심으로 이어졌다. 교육을 받고 학문의 길로 접어드는 것은 그야말로 진정한 양반이 되는 과정이었다.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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