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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
미야지마 히로시 지음 / 강 / 199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양반은 생득적이거나 객관적인 기준에 의거한 신분이 아니라 사회적 생활 양식을 통해 구현되는, 도달 가능한 상위 계층을 일컫는다. 15~6세기에 걸쳐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린 재지양반(在地兩班)의 경우를 살펴보면, 먼저 윗대에서 중앙관료로 출세하거나 왕에게 사성(賜姓) 받은 조상을 시조로 삼은 동족 집단이 모여 집성촌을 형성한다. 이들은 노비를 부려 토지 개간사업을 벌이고 농서(農書)를 참조하여 생산력을 높임으로써 지역 경제의 중심에 자리잡는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향약이나 서원을 통해 자신들의 영향력을 공고히 하고, 하층 계급들을 단속하며, 가문의 영속성을 위하여 선대의 조상 숭배와 후대의 관료 진출을 반복적으로 결합하면, 양반의 서사(敍事)가 확립되는 것이다.
이처럼 조선 초기에는 반상(班常)의 경계가 유동적이어서, 출세한 개인이나 집안이 자신들을 단장(?)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며, 사회가 점차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이들 역시 지역 유지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게 된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자급자족형 소농을 중심으로 향리와 상민, 심지어 노비 계층까지 하나의 집안(家)으로 영속화 되면서 상위 계층으로 이동하고자 하는 열망은 더욱 커졌다. 일족의 계보를 보존하는 것보다는 일족의 당대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족보의 난립은 이를 잘 보여준다. 18세기 이후의 사회 전체의 양반 지향화는 서양 문물의 소개와 더불어 체제가 이완되는 전환기에 가속화되었던 바, 변혁을 거부한 것이 '기생하는 양반'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향리층은 원래 재지양반층이 형성되어온 모체 집단으로 16세기 중엽까지 양자의 구분은 상당히 애매했다. 그러나 재지양반층이 계층으로 형성되고 지역의 지배권을 장악해감에 따라 양자 사이에는 엄연한 격차가 생겨 향리층은 재지양반층으로부터 지휘•감독을 받는 존재로 전락해버렸다. ... 그들은 17~19세기를 통해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켜 양반층과 동등한 대우를 받기 위해 갖가지 활동을 벌여나갔다. 243-4)
양반이란 국가의 법제적인 제도로서 성립된 신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인지가 필요한 존재였다. 따라서 국가가 작성한 호적대장에 양반적인 직함을 가진 사람이 증가하고 있었다 해도 그것은 사회적인 신분 계층으로서 양반이 증가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유학`(幼學)의 증가는 양반 계층 이외 사람의 양반 계층을 향한 상승 지향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고, 양반적인 가치관•생활관이 하위 계층에까지 침투하고 있었음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258-9)
18세기 이후 재지양반층의 지방 사회에 대한 지배력이 차츰 저하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서술한 바와 같으나, 한편으로 그들의 지배력은 근대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뿌리깊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야말로 18세기 이후에 시작되는 사회 전체의 양반 지향화, 즉 양반적 가치관, 생활 이념의 하층 침투였다. 양반층의 지방 지배에 도전하려고 새로이 성장해온 계층도 그 목적은 양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양반으로 성장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동향은 19세기에 들어와 본격화되었는데 근대라는 시대도 기본적으로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오히려 사회의 유동화가 격렬해지는 근대에 들어와 사회 전체의 양반 지향은 한층 더 가속화되었다고 생각된다.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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