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고대문명의 역사
루카 드 블로와 외 지음, 윤진 옮김 / 다락방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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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 왕정이 폐지되었을 때(BC 500년 경) 왕의 행정적 권한은, 후에 BC 367년 이후 집정관(consul)이라고 불리며 매년 선출되는 두 명의 행정관들에게 넘어갔다. 이 행정관들은 예전 왕의 임페리움을 나누어 가졌지만 그들은 서로의 행위에 대해 거부권을 가졌고, 또 임기가 일년으로 제한되었기 때문에 권한은 제약되었다. 임기가 끝난 뒤 불만을 가진 시민은 원한다면 항의서를 제출할 수 있었다.
두 명의 집정관은 두 명의 재무관(quaestor)의 보좌를 받았고, 예전의 왕들처럼 행정 문제에서 원로원의 자문을 받았다. 그들이 일반적으로 원로원의 권고를 따랐기 때문에, 원로원은 정치 문제에서 강력한 발언권을 가졌다. 민회의 결정은 원로원의 동의를 얻은 뒤라야만 법적 구속력을 가졌다. 191-2)

혈통귀족은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쫓아낸 뒤 로마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평민`이 그들의 권력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평민은 경계가 분명한 사회적 그룹이 아니었다. 부유한 평민과 적당한 재산을 가진 평민, 가난한 평민이 있었고, 그들이 종사하는 일도 달랐다. 부유한 평민은 혈통귀족 계급이 되는 길이 막혀버린 후에 로마에 왔거나 로마 시민단에 병합된 대지주들이었다. 적당한 재산을 가진 평민은 로마의 군사력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자영농과 상인이었다. 가난한 평민은 소농, 기능공 그리고 일용 노동자였다.
부유한 평민은 혈통귀족이 독점한 통치 엘리트로 인정받고 싶었고, 가난한 평민은 가혹한 채무법(채무자는 노예가 될 수 있었다)이 완화되기를 바랐다. 모든 평민—특히 가난한 사람들—은 주로 불문법에 의한 통치가 성문법으로 기록되고, 혈통귀족 행정관의 자의적인 행동이 견제되며, 평민들만의 모임인 평민회(Concilium Plebis)가 백인조회와 함께 공식적인 민회로 인정받는 것을 원했다. 200)

사태가 정말로 악화되어 모든 평민들이 모여 정치 생활에서 탈퇴할 것을 결의하고 로마의 군사 행동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자, 로마 귀족은 반란이 조용히 가라앉은 후에 정치적인 양보를 단행했다. 그 뒤 곧 벌어진 새로운 전쟁으로 인해 내부 문제들에 대한 관심이 다른 데로 돌려졌고, 전리품을 분배하고 식민지들에 가난한 시민들을 정착시키자 긴장이 상당히 완화되었다.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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