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 없는 수단 - 정치에 관한 11개의 노트
조르조 아감벤 지음, 김상운.양창렬 옮김 / 난장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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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역사, 문학, 세 가지 학문의 초석(礎石)을 단순화해서 표현하면, 철학은 사유를 구축하고, 역사는 사실을 배열하며, 문학은 언어를 자유롭게 한다. 이것들은 각각 인간의 정신 자체와 정신의 표상물, 그리고 이 둘을 이어주는 매개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작업이다. 본래 하나의 학문이었으므로 굳이 '통섭'이란 이름으로 재규정할 필요가 없으며, 끊임없이 상호 교차를 시도하는 것이 낯설거나 부자연스러운 일도 아니다.

문제는 자신의 심장부를 개방하면서까지 다른 분야에 기대거나 영합하려는 태도이다. 정신에 대한 탐구를 특정한 사태와 합치시켜 설명하거나, 언어의 직조를 통해 멋들어지게 포장하는 일이 여기에 해당한다. '공존'과 '혼합'이 혼재된 곳에서는 영역을 구분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낡고 진부한 것으로 간주되기 마련이다. 선언이 사유를, 염원이 사실을, 수사가 논증을 대체한 자리에 쓰여진 글은 잊혀질 구호들로 가득하다.

~에서만 / 유일하게 / 전지구적 내전 / 역사의 종언 / 가로지르기 / 생명정치 / 구멍 / 진동 / 변형 / 분열 / 전복 / 저항 / 도래...

이 비장한 어휘들은 기성의 권위에 가려져 있던 소외 지대를 비춘다. 그들이 발견[발굴]한 현상들은 엄숙한 정의定義의 망토를 걸치고 과過대표된다. 복잡다단하게 얽힌 인과의 고리가 하나로 정리되면서 해석의 위력이 상상 속에서 증폭된다. 본래 있던 자리를 파국으로 내몰고, 균열된 틈에서 교배하며, 새로운 세계를 여는 이 어휘의 성찬은 사유를 앞질러서 성대한 축제를 연다. 그리고 사유가 도착하기 전에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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