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쿠의 질문을 이어받아 결론을 선취해보자면 버냉키는 재정 정책을 동원하지 않고 오직 변형된 통화 정책만을 구사하여 대공황 이후의 최대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나오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임박한 위기 앞에서 그가 사용한 방법은 전통적인 금리 조절 정책과 더불어 연방준비위원회가 자금시장의 최종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 역할을 하겠다는 메시지를 시장에 공식적으로 전달하여 심리적 공황 상태를 안정시킨 후에, 추가로 '양적 완화' 정책을 도입하여 본격적인 경기 부양 단계로 실물 경제를 이양시키는 것이었다.리처드 쿠가 '구성의 오류'를 말했듯이 버냉키 역시 파국이란 '자기실현적 예언'의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모두가 하나의 생각에 집착하는 순간 그것이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는 연방준비제도의 역사적 연원이 패닉의 순간에 구원투수로 등판하여 양질의 담보를 확보하고 있는 금융기관을 대상으로, 거품을 유발한 영업 활동에 대해서는 범칙 금리를 부과하되 아낌없이 대부를 제공하여 시장 기능을 정상화시키는 '배저트의 원칙'임을 강조한다. 2008년에 그가 취한 주요한 행동은 바로 연방준비제도의 전통적 역할인 셈이다.시장 심리는 안정됐지만 금리가 이미 제로 수준에 도달한 상황에서 경기를 진작시킬 만한 전통적인 통화 정책 수단이 바닥나자 버냉키는 후속 조치로 '양적 완화(quantiative easing)'정책을 도입한다. '양적 완화'는 달러를 찍어낸다는 일반의 오해와 달리 각 은행들이 연준에 개설한 지급준비금 계좌를 통해 자신들이 보유한 재무부 증권과 패니 및 프레디의 주택담보대출 관련 증권을 연준에 매각하고 유동성을 공급받는 방식이다. 이 지급준비금은 연준의 대차대조표 상에만 존재하고 시중에 유통되지 않는 비현금성 통화의 형태이다.이제 시장은 연준의 대량 매입으로 물량은 감소하고 가격은 상승한 국채 대신에 민간의 회사채와 여타 증권으로 관심을 전환하게 되며, 그러한 상품들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수익률의 인하-특히 장기금리의 안정화-와 민간 경기의 활력을 기대하게 된다. 일련의 금융 정책과 더불어 버냉키가 중시한 것은 시장 참여자 및 일반 시민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다. 그는 연준의 목표와 정책 계획을 투명하고 정확하게 전달하여, 시장이 여기에 보조를 맞춰 나간다면 '자기실현적 예언'이 긍정적인 버전으로 실현되리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그렇다면 쿠의 재정 정책 처방은 잘못된 조언이었을까. 일본의 거품 붕괴와 2008년 금융위기는 사태의 주요 주체에서 차이점을 보인다. 일본의 경우는 자산 가치의 급락이 대차대조표에 심대한 타격을 안긴 기업 전체의 위기였다면, 2008년에는 무리하게 주택 대출을 받은 가계와 이를 유동화 자산으로 만들어 판매하고 대량으로 보유한 '금융기관'의 실패였다. 양자가 엄격히 분리되지는 않지만 제조업은 재정을 투입하여 실물 경제를 조정하는 것이 효과적이고, 금융 기관은 경색된 자금 흐름을 뚫고 신뢰를 재구축하는 게 급선무이다.버냉키는 물러났지만 저금리 기조의 유지라는 연준의 자세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연준은 실업률의 회복과 물가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을 때까지 정책 방향을 수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지만, 실물 경제는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는 주식시장만큼의 활기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오랜 기간의 장기 금리 관리를 통해 경제 주체들의 위험추구성향을 고취하면서도 실물 경제의 부양에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한 통화 정책을 '유일한 대응 수단the only game in town'으로 인식하는 연준의 한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