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뒤흔든 아편의 역사 - 15~20세기
정양원 지음, 공원국 옮김 / 에코리브르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아편이라는 말을 들으면 곧바로 '아편전쟁'을 떠올린다. 여기에는 음험한 속내를 품은 서양의 장사꾼들이 주인공이다. 그들은 중국인들을 아편에 중독시켜서 단결력을 와해하고, 도자기를 사들이는데 쓰인 은(銀)을 아편 밀수로 되찾으려는 계략을 꾸민다. 사회가 마비될 정도로 아편중독이 퍼지자 중국 당국은 아편 무역을 금지하지만 결과는 비참하다. 보스턴의 항구에서 바다로 내던져진 차(茶) 상자들은 아메리카의 독립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지만, 상하이의 항구에서 바다로 내던져진 아편 상자는 서양 제국주의의 포탄세례를 불러온다. '아편'에 담긴 사회적 의미는 약자를 탄압하고 갈취한 역사의 얼룩인 것이다.

선악구도가 명확한 이 통념은 여러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첫째로 아편은 서양 제국주의가 들여온 것이 아니다. 아편은 해양 무역이 활발하고 상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한 명대에 동남아시아를 거쳐 들어왔으며, 이미 의약과 미혼(迷魂)의 목적으로 상류층에서 소비되고 있었다. 아편은 집안을 방문한 손님에게 체면치레로 내놓는 귀한 상품이었으며, 담배 문화의 전래와 더불어 하류층으로 서서히 전파되는데 여기에 교제와 담소의 장(場)인 차 문화가 결합되면서, 점차 대중적인 문화 현상으로 자리를 잡았다. 상류층은 다기(茶器)를 수집하던 문화적 취향을 코담뱃대로 이어가면서 대중과 분리된 아편 문화를 고수했다.

둘째로 아편은 서양의 신기한 물건, 곧 양화(洋貨)에 대한 중국인들의 동경을 채워주는 상품이었다. 아편 문화가 강남을 거점으로 서서히 유행하고 있었지만, 대륙의 거대한 수요를 충족시키기에는 절대 물량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이때 인도에서 아편 생산 독점권을 얻어낸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서더 공장들'에서 거대하고 정교한 공정을 동원하여 아편을 공산품처럼 대량 생산해냈고, 여기에 중국인을 포함한 '지방 상인들'이 적극적으로 운송과 소매 판매에 가담하면서 아편 문화를 한 단계 도약시켰다. 1834년 개별적인 영국 상인들에게 자유 무역을 허용한 조치는 아편 밀수를 급증시켜 '아편전쟁'의 시발점으로 작용했다.

셋째로 아편이 훌륭한 환금작물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자 내륙의 농부들이 대거 재배에 나서면서 국내 생산이 비약적으로 늘어났고 항구 도시를 중심으로 화폐의 역할까지 담당했다. 넷째로 아편은 제국주의의 침탈만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침탈을 막는 중국 당국이 군제를 개혁하고 서구에 맞서서 개혁조치를 가능하게 해 준 주요 수입원이었다. 마지막으로 중화민국 시기에 이르면 일본이 대륙 침탈을 위한 재정 사업으로서 아편 재배를 활용하면서 민족 감정의 표적으로 지목되어 일시적으로 사그라들었지만, 일본 세력에 맞서는 국민당과 홍군도 역시 대륙을 장악하기 위한 재정 사업으로서 아편 재배를 적극 권장했다.

아편 문화는 강제로 중국 대륙에 이식된 바이러스가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자생적으로 뿌리를 내린 습속이었다. 물론 서양의 제국주의 세력이 아편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이를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적극 활용한 측면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아편을 애국주의의 상징으로서 악마시하는 현대의 관점은 역사를 단편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때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는가를 잘 보여준다. 저자는 아편의 일대기를 세밀하게 추적하면서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이나 부르디외의 구별짓기와 같은 현대 소비문화를 규정하는 이론 틀을 그대로 가져가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선대의 현실을 후대의 이론에 꿰어맞추는 오류를 범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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