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대연쇄
아서 O. 러브죠이 지음, 차하순 옮김 / 탐구당 / 198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여기 자족하는 신이 있다. 그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간 너머에 펼쳐진 영원을 주관하면서 세계 만물의 운행에는 일체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의 우주는 최상의 가능성을 실현한 세계이고, 우연적 가능성이 닫힌 불변의 세계이다. 필연적인 질서에 순응하는 피조물들은 평온한 안식을 주는 자신의 자리에 굳건히 머무른다.

여기 생성하는 신이 있다. 그는 만물의 창조자요, 존재 이전의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이전을 주관한다. '생의 약동'에서 풀려나오는 무한한 다양성은 불완전한 현재를 완전한 미래로 이끌고 가려는 정열의 표상이다. 세계의 아름다움은 빈틈없는 연쇄의 정합성이 아니라 체계 통일의 충동 그 자체에서 길어올려진다.

인과관계의 형이상학적 변주곡인 <존재의 대연쇄> 관념은 이러한 두 신의 면모를 모두 안고 고대 희랍의 초월적 사유에서 중세의 신을 향한 믿음을 거쳐, 근대의 자연과학과 낭만주의까지 뿌리를 내리며, 최초의 원인을 갈구하는 이성의 욕구를 자극하거나 안식처로의 도피 심리를 충족시켜 주는 사유로서 작동하였다.

이성과 충동이 맞물린 <존재의 대연쇄> 관념은 구조의 안정성으로 인해 오히려 신성과 더욱 멀어진다. 논리적으로 이해가능한 신과 전지전능한 신 관념의 공존은 '닫히고 열린 문'처럼 형용모순이다. 이것은 신의 존재를 설명하기에는 알맞은 역설이지만, 체계 일반을 향한 인간의 의지를 꺾기에는 미진한 회유책이었다.

비록 <존재의 대연쇄> 관념이 지닌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모순을 재배치하여 한쪽에 편입하거나 화해를 모색한 시도는 모두 실패로 마감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흩어져 나온 무수한 잔해들은 "한 신념의 효용과 그 타당성이 서로 독립적 변수"라는 저자의 말을 입증해주는 확고한 사례로서 사상사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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