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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 위진남북조 ㅣ 중국의 역사
가와카쓰 요시오 지음, 임대희 옮김 / 혜안 / 2004년 3월
평점 :
1 기나긴 정치적 분열시대
1) 회수 이북은 강우량이 부족하고 넓은 개활지가 조성되어 있어 제국의 형성에 유리한 반면, 강남은 울창한 삼림이 지역을 구분하여 독립적인 소국 형태가 주를 이룬다.
2) 흉노匈奴•갈曷•선비鮮卑•저氐•강羌의 5호五胡를 중심으로 유입된 이민족은 화북의 한족과 공생하였고, 호족과 한족풍의 유목과 농경문화의 상호 교직을 이루어냈다.
2 중국문명권의 확대
1) 이민족의 압박은 한漢왕조를 무너뜨렸지만 동아시아 전체로 중국문명을 확산시켜 체제를 정비한 국가들의 성립을 촉진하였으며 불교가 중요한 매개역할을 하였다.
2) 서역과의 무역관계 및 문화전파는 비단길에 위치한 오아시스 국가들과 유목민족의 이해를 일치시켜주었고, 그렇기에 지배종족의 교체기에도 교류는 계속되었다.
3 귀족제 사회 형성의 서곡
1) 내면적으로 유가의 예를 닦고 외형적으로 평등한 자영농들의 수평적인 공동체였던 향촌은 유력집안의 호족화로 주종관계에 포섭되면서 점차 해체되기 시작한다.
2) 조정의 실권을 둘러싸고 외척과 환관의 쟁투가 치열했지만, 양쪽 다 자신들의 이권을 챙기려는 목적에서는 같았으므로 지방 호족의 강대화•영주화는 계속 진행되었다.
3) 유학자들은 청의清議운동을 조직하여 이들에게 대항하였고 2차례에 걸친 당고사건으로 세가 위축되었지만 뿌리는 향촌에 살아남아 지식인 기반을 계속 유지하였다.
4 귀족제 사회의 성립
1) 은일지사로서 향촌의 저항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한 당인이나 명사들은 황건의 난을 계기로 다시 정계에 진출하였고, 새세상을 열어줄 영주화된 호족들과 손을 잡았다.
2) 이들은 다양한 세력들간의 분열뿐만 아니라 협력을 모색하였고, 권력을 보좌하면서도 민民을 받든다는 명분으로 사회적 지위를 구축하여 귀족층으로 자리매김한다.
5 개발영주제적 사회
1) 강남은 자영농의 기반이 충분치 않아 재지호족이 흥성하였고 토착민의 정복과 편입 과정을 주관한 무장들의 둔전군을 중심으로 하는 개발영주적 체제가 형성되었다.
6 귀족제 사회의 정착
1) 화북의 혼란을 피해 강남으로 내려온 망명귀족들은 변변한 무력조차 없었지만 선진문화를 동경한 강남호족들의 열등감을 이용하여 그들을 분열시키고 군림하였다.
2) 강북 유민들은 해체된 둔전지에 정착하여 국경 방위를 책임지는 군단의 세력기반이 되었고 귀족과 군대의 야욕은 협력과 배신으로 엮이면서 동진東晉을 멸망시켰다.
7 귀족제 사회의 변용
1) 무인정권의 송나라 수립은 귀족세력의 퇴색과 여타 신분의 급상승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불안한 황실 내부의 끝없는 암투와 각종 권력 추종자들의 대두로 이어졌다.
2) 화폐경제의 발전은 귀족층의 특권을 역이용한 상인층의 지배력을 강화하였고 현실과 유리된 지배층은 형식적 문화와 종교에 심취하여 정치적 실행력을 잃어버렸다.
8 귀족제 사회의 붕괴
1) 현실감각을 상실한 귀족층은 각지에서 발흥하는 군부세력의 위세 앞에 몰락하였으며, 선양의식으로 치장된 쿠데타는 혼란수습과 안정, 불안의 고조를 되풀이하였다.
2) 인격적 주종관계가 사회의 작동원리인 시대는 지나가고 상업적 이해관계가 그 자리를 대체하면서 제국의 통합은 요원한 일이 되었고, 강남은 수隋양제에게 평정된다.
9 이민족 국가의 형성
1) 이민족들의 화북 지역 점령은 필연적으로 호족과 한족의 인적 결합과 문화적 융합이라는 일체성의 건설을 지향해야 하는바, 제도의 모방에 그친 국가들은 사라져갔다.
10 북위제국과 귀족제
1) 북위는 한족 관료를 대거 기용하여 종실과 부족들의 사적 권력 증대를 미연에 방지하고 삼장제와 균전법을 시행하여 부의 집중을 막고 충실한 국가재정을 유지하였다.
11 귀족제 국가에서 부병제 국가로
1) 북위는 황제의 적극적인 한족화 정책으로 문치가 확대되고 한족 사士층이 호족 무인들의 중앙 진출을 견제하면서 갈등의 골이 심화되어 마침내 동•서위로 분리되었다.
2) 서위는 부족연합의 자발적 전사로 구성된 부병제를 되살려 한인 귀족들이 무인 집단인 '훈귀'를 탄압하여 국경 방위가 허술해진 동위를 무너뜨리고 통일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