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생애와 사상
카이즈카 시게키 / 서광사 / 199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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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1(기원전 5~6세기의 역사적 의의)
기원전 5~6세기는 기존의 봉건제가 해체되었지만 이를 대체할 새로운 사회질서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혼란기였다.
1-2(주대의 봉건제와 종법제)
주대의 봉건제는 군주와 신하 사이의 봉건계약에 선행하는 동일 씨족의 구성원이라는 종법제가 바탕에 놓여 있다.
1-3(도시 국가의 성립)
이질적인 씨족 사회를 통합하기 위하여 주공에게 제사 지내는 종묘에 사직(토지신과 곡물신)을 기리는 제사 의식을 추가하였다.
1-4(도시 국가에 있어서 귀족 정치의 성립)
제사와 전쟁을 주관하는 씨족의 힘이 점차 강성해져서 卿-大夫-士로 구성된 귀족 사회를 이루었다.
1-5(노나라에 있어서 귀족의 과두 정치)
귀족들의 발흥은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점차 과두제에서 독재 체제로 이행하려는 기운을 품고 있었다.

2-1(공자의 탄생)
공자와 사마천 사이에는 400여 년의 시간 공백이 있어 생몰연도나 가족관계를 정확히 확정하기 어렵다.
2-2(공자의 조상)
송나라 왕족에서 비롯되는 공자의 부친 계보는 가공의 인물이 연계되어 있어 믿을 수 없다.
2-3(유년 시대의 환경)
부모를 일찍 여읜 공자의 유년 시절은 비천한 직업을 전전하며 현실의 모순을 체득하는 시간이었다.
2-4(공자가 받은 교육)
향당(鄉黨)의 소학에서 학문을 시작한 공자는 점차 내외의 긴박한 정세를 살피며 천하의 질서를 고민하게 된다.

3-1(상고주의)
되살리고 지향해야 할 옛 전통의 핵심은 인간을 중심에 두는 완성된 자아로서의 표상인 주공에 대한 경외심으로 표현된다.
3-2(현인 정치의 시대)
자산과 같은 현인 재상들은 점술이나 미신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의 능력과 의지에 바탕(성문법 제정 등)을 둔 정치를 펼쳤다.
3-3(선구자들에 대한 공자의 입장)
공자는 자산이 '겸손함과 윗사람에 대한 예와 인민을 위하는 마음을 지닌 군자의 덕을 갖추었다'고 평하였다.

4-1(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자각)
仁이란 사회적 관계 속에서 평생에 걸쳐 자각하고 실천으로 習해야 하는 덕목으로 군자가 갖춰야 할 본바탕이다.
4-2(종교로부터 학문의 해방)
공자는 神적인 권위를 빌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를 멀리하였지만, 신에게 제사하는 禮를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4-3(전통의 비판)
'옛 것을 받아들여 새 것을 이해'하는 공자의 방법론은 전통의 형성 및 변천이라는 역사적 맥락을 중시하는 발언이다.

5-1(덕치주의)
공자는 법이 선행하고 행위를 그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덕을 닦아 행위를 하면 순리에 맞는 법이 세워지리라 생각했다.
5-2(삼환의 과두 정치에 대한 반감)
군주의 곁에서 호가호위하는 귀족들이 예법마저 어지럽히는 지경(계씨의 팔일무)에 이르자 공자는 소공을 따라 齊로 망명한다.
5-3(제국 외유와 공자 학단의 형성)
천하의 질서가 고국과 마찬가지로 혼돈 상태임을 살펴 본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학파를 이루다.
5-4(개혁 운동에의 열의)
공자는 군주에서 제후로, 다시 가신으로 권력 이동이 가속화되자 반란 정권에 가담해서라도 현실 정치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5-5(개혁 운동의 실패)
삼환세력의 중심도시의 성벽을 허물고 사병을 혁파하려는 개혁 시도가 실패로 끝나면서 재차 유랑길에 오르다.
5-6(유랑의 길)
유랑길에도 자신의 이상을 받아줄 군주를 찾아 헤매었으나 시절이 이를 허락하지 않음을 깨닫고 돌아와 후진양성에 힘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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