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헤로도토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484년에 출생했다. 그가 ‘역사’에서 다룬 페르시아 전쟁의 주요 무대인 테르모필라이 회전과 살라미스 해전은 기원전 480년에 벌어진 일들이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글을 저술한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된 후에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소문과 이야기, 서로 엇갈리는 정황들을 자신의 추론이라는 연결고리로 엮어 한 편의 지도를 작성한 것이다.

그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형식을 탈피하고 산문 양식으로 시대를 기록하겠다는 포부를 내비쳤지만 글에 담긴 자신의 목소리를 의식적으로 제거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즉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건조한 ‘역사적 서술방식’이 다소 결여되어 있지만 ‘역사적 주제의식’은 갖추고 있는 과도기적 특징을 보여준다. (史料의 관점에서 엄밀하게 정보를 다루는 태도는 투퀴디데스부터 출발한다)

주요한 형식적 특징들을 살펴보면 첫째, 헤로도토스는 자신의 의견과 사실을 구분하고 직접 들은 이야기와 건네 들은 정보를 구분하고 있다고 전제하지만 그것을 담은 문체는 에세이에 가깝다. 따라서 탐사보도라는 자신의 언명이나 후대의 평가가 주는 엄정한 측량과 계측이라는 뉘앙스보다는 사실과 추론의 역학관계를 솜씨 좋게 다루는 입심 좋은 이야기꾼의 인상이 한결 진하다.

둘째, 저자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마치 소설을 쓰는 것처럼 모든 지역과 인물과 사건의 속내를 최대한 자세하게 밝혀내고 있다. 이러한 기법은 독자들에게 현장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켜 무심결에 신뢰성을 부여하게 한다. 특히 현대인들에게는 마치 리포터가 카메라를 들고 전장과 작전 상황실을 오가며 찍은, 적절한 나레이션을 삽입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인상을 안겨 준다.

셋째, 열성적인 탐험가이자 관찰자였던 헤로도토스는 자신이 평생에 걸쳐 수집한 정보들을 하나도 버리고 싶어하지 않은 듯하다. 그 결과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시작된 책의 2/3 가량이 그와 거의 무관한 풍속 보고서로 채워져 있다. 이는 저술의 완결성을 해치고 분량 배분에 실패하게 만든 요인이지만 역설적으로 고대인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달해 주는 의의를 갖는다.

역사적 기록물의 측면에서도 주목할만한 부분들이 있는데, 첫째, 당대가 신화적 관념에서 서서히 벗어나 인간 사회의 제도와 역학 관계가 발산하는 영향력을 실감하는 변혁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투의 승리를 위해 인신공양을 하거나 내장점을 치는 등 야만과 문명이 공존하는 공간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신은 떠났어도 신탁의 위력은 사후적으로 공인되고 있는 것이다.

둘째, 현명한 조언자인 데마라토스가 스파르테를 떠나 페르시아에 충성을 하게 된 계기나 텟살리아인들이 오로지 포키스인들에 대한 적대감에서 페르시아에 부역하는 상황 등을 통해 하나의 큰 사건 안에서도 다른 이해관계에 얽힌 작은 사건들이 별도로 운행되고 있음을 잘 짚어준다. 정혼 약속 때문에 아카이오이족이 합심하여 참전한 트로이 전쟁의 낭만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마지막으로,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확립된 ‘헬라스인’들의 정체성과 결속감을 들 수 있다. 헤로도토스가 아테나이 사절단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듯이, 서로 투닥거리면서도 개성을 지닌 도시국가들이 존망의 위기를 맞이하여, 점점이 떨어져 있던 자신들이 실로 순망치한의 운명 공동체이며 페르시아인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언어와 관습을 지니고 있다는 자각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이 발견은 일인 군주 치하의 예속을 거부하고 자유의 위대함을 천명한 대목과 함께 그리스 사회의 빛나는 문명화를 대변하지만 흡사 신의 장난처럼 거대한 적을 물리치고 난 후에 싹튼 사회적 오만함은 그 토대를 완전히 뿌리 뽑아버렸다. 페르시아 전쟁의 놀라운 승리는 그리스를 단결시켰지만 자신들의 힘을 과신하게 만들었고 종국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끔찍한 내전을 불러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