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이것저것 소설을 읽으면서 다시금 문학에 반영되는 국가별 정서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특히 '불안'이라는 개념이 지역마다 독특한 형태로 피어오르는 장면들은 묘하게 매혹적이다.러시아의 인물들은 압도적으로 덮쳐오는 외부의 '불안'에 휩싸이면 곧 무릎을 꺾고 만다. 존재를 무화시키는 광활함 앞에서 왜소한 개체는 그저 우왕좌왕, 엉뚱한 행동을 반복한다. 고민하고 사유할 겨를도 없이 휩쓸려가는 내면의 혼란은 희화된 몸짓과 일그러진 표정으로 나타난다.일본의 개인들은 한없이 안으로 침잠한다. 그들은 '불안'이 사회에 뿌리를 대고 있음을 감지하지만 그 얼굴을 직시하지 않는다. 개체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불안'은 수시로 미움의 구름이 되어 주변에 내린다. 성찰하면서 공존한다. 눈 먼 자들의 도시와 같은 음습함이 감돈다.미국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불안'은 완전한 건조상태다. 일본이 습기를 머금어서 축축하다면 미국은 황야의 삭풍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바싹 메말라있다. 사시사철 끝나지 않는 건기 같다. 건드리면 바로 부서질 것만 같은 이 뼈만 남은 공룡은 그러나 여전히 살육기계로 작동한다.프랑스는 '불안'마저 탐미한다. 죽음충동과 공포, 대립과 우울 등 '불안'에 내재되어 있는 온갖 부정적인 인간 감성을 경이의 눈으로 대하며 완전히 거기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메스로 뒤집어보고 갈라보고 해체하면서 세포의 흐르는 점액질을 맛본다. '불안'을 형상화한다.중국의 '불안'은 대단히 고전적이다. 거대한 힘에 휩쓸려가는 개인의 절규라는 점에서 러시아와 닮았지만 중국의 개인들은 분산되어 있지 않다. 전통적 공동체를 유지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으로 묶여 있으며 죽음마저 그 안에서 집단적으로 맞이한다. 함께 살고 함께 죽는다.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오랫동안 고요한 호수로만 떠다니다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바다로 나선 신세다. 급격하게 몰아친 폭풍우에 휘말려 짧고 굵직하게 바다를 표류하다 간신히 어느 해안가에 도착해서, 이제 살았나 싶었지만 어째 여기가 섬이 아닌가 하는 '불안'이 엄습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