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그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절판


하루의 첫 결심은 이랬다. 꿋꿋이 버티리라, 오늘은 아침에 양배추 수프와 빵을 다 먹어버리지 않으리라. 당장은 배가 고파도 저녁으로 조금은 남겨둬야지. 점심은 없었다. 그러니 일을 할 뿐 결심할 것이 없었다. 아침식사 때 꿋꿋이 버텼다면 저녁에 작업을 마치고 돌아와 두 번째 결심을 하게 된다. 꿋꿋이 버티리라, 아껴둔 빵이 잘 있는지 베개 밑에 손만 넣어보리라. 참고 기다리면 점호가 끝나고 구내식당에서 빵을 먹을 수 있다. 그때까지 두 시간도 더 걸리거나, 점호가 길어지면 더 걸릴지도 모르겠다.
아침에 꿋꿋하게 버티지 못하면 저녁에는 남은 빵은 물론 결심할 거리도 없었다. 나는 수프를 반 숟가락만 떠서 천천히 들이마신다. 한 숟가락씩 마실 때마다 침을 삼키며 천천히 먹는 법을 터득했다. 배고픈 천사가 말했다. 침을 삼키면 수프를 더 오래 먹을 수 있어. 또 일찍 잠자리에 들면 배고픈 시간이 줄어.-124쪽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목이 붓고 간질거려서 자꾸만 잠이 깼다. 눈을 감거나 떠도, 몸을 뒤척이거나 조명등을 노려보아도, 누군가 물에 빠진 듯 코를 골아도, 뻐꾸기 시계의 고무 벌레가 진동해도 밤은 축량할 길 없이 거대했다. 그 안에서 펜야의 하얀 아마포가 끝없이 펼쳐졌고, 그 아래 손에 닿지 않는 빵들이 가득했다.-125쪽

수용소를 나온 지 육십 년이 지나도 음식을 먹을 때면 너무나 흥분된다. 나는 온몸의 구멍을 모두 열어젖히고 먹는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먹는 것은 불편하다. 먹을 때 나는 독재자다. 입의 행복을 모르는 그들은 대화를 나누며 예의를 차리며 먹는다. 그러나 먹을 때 내 머릿속에는 여기 앉아 있는 우리처럼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찾아올 한방울 넘치는 행복이 스쳐간다. 머릿속의 새도우지, 숨결 속의 그네, 가슴 속의 펌프, 배 속의 대기실을 내주어야 할 그 순간.-276쪽

먹는 게 너무 좋아서 죽고 싶지 않다. 죽으면 먹을 수 없으니까. 나는 지난 육십 년 동안 나의 귀향이 수용소의 행복을 누그러뜨리지 못했음을 안다. 수용소의 행복은 그의 배고픈 입으로 오늘도 내 모든 감정의 한복판을 베어 문다. 내 한 가운데는 텅 비어 있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 매일같이 다른 허기가 생겨나 채워지기를 기다리지만 나는 그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 나는 누구에게도 곁을 내어줄 수 없다. 나는 배고픔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자부심이 아니라 겸허 때문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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