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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대가 - 기후위기와 물가 그리고 명제국의 붕괴 ㅣ 너머의 글로벌 히스토리 8
티모시 브룩 지음, 박찬근 옮김 / 너머북스 / 2024년 11월
평점 :
서문_ 물가사 연구자로서 나의 이력
"1640년대 초반 '소빙하기Little Ice Age'라 불리는 장기간의 전 지구적 기온 하강이 중국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시기는 천문학자 애니와 월터 마운더를 기리기 위해 '마운더 극소기Maunder Minimum'로 명명되었습니다. 이들은 지구의 기온 하락과 태양 흑점 활동의 감소 사이의 연관성을 가설로 제시했으며, 이 기간을 1645년부터 1715년으로 추정했습니다." "명대 중국의 소비문화와 사회적 투자에 집중하면서, 저는 물가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물가 자료를 찾아보던 중, 저는 읽고 있던 텍스트에서 고개를 들 때마다 소비의 역사가 저를 물가사뿐 아니라 기후사로도 이끌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물가가 상승하여 기록가들이 기록할 필요성을 느꼈던 시기가 바로 기후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책에서 종합해 제시하는 내용은 단순한 명대 물가사를 넘어, 명나라 사람들과 그들에게 불리하게 변한 기후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가 물가를 매개로 어떻게 형성되는지 설명합니다."(11-2, 18)
1장 천치더의 이야기
"천치더陳其德는 명대 최악의 재난이 닥친 시기를 묘사한 두 편의 회고록을 남겼다. 〈사람들의 마음이 방종으로 기울고 하늘이 그 풍요를 싫어하리라고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눈 깜짝할 사이에 무자년(1588)이 도래했다. 폭우가 내려 우리를 적셨고 멀고 가깝고를 막론하고 사방을 거대한 진창으로 만들었다. 이듬해인 기축년(1589)에는 천리에 이르는 땅이 메말랐다. 두 달 동안 강이 바짝 말랐고 강바닥에는 잡초만 무성했다.〉 1588년과 1589년은 폭우와 심한 가뭄이 이어진 대규모 자연재해의 시기였다. 유학자인 그에게 이러한 이중 재해를 설명할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불러온 인간의 잘못을 찾는 것이었다. 그의 관점으로 볼 때 만력 초기의 풍요로움이 사람들의 도덕적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폭우와 가뭄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하늘의 경고였다. 천치더는 이 경고의 심각성을 정량화하고자 쌀 가격으로 돌아온다. 그는 쌀 가격이 1두당 은 1.6냥으로 치솟아 원래 가격의 네 배에서 다섯 배까지 올랐다고 썼다."(27-8)
"물가 상승의 경제적 결과는 시장이 문을 닫는 것이었다. 사회적 영향을 참혹했다. 〈부유한 가정도 하루에 두 끼의 밀가루 죽만 먹고도 충분히 배부르다 했고, 대다수는 하루에 한 끼로 버텨야 했다. 남편은 아내를 버리고, 아버지는 자식을 버렸으며, 각자 생존을 위해 흩어졌다. 쓸 만한 물건들이 시장에 쌓여 있었지만, 그것들을 사용할 수 있었던 사람들 중 절반은 가격을 물어본 후 그냥 지나쳤다. 아름다운 장식품에 대해서는 아무도 멈춰서 가격을 물어보지 않았다. 아, 사람들이 빈곤함이 얼마나 심했는지!〉 담보로 삼을 것이 없어져서 전당포마저 문을 닫았다. 아직 특튼해서 일할 수 있는 농민들은 농작물을 심으러 나갔지만, 그들이 삼자마자 메뚜기 떼가 나타나 모든 싹을 갉아먹었다. 그 후 전염병이 발생했는데, 아마도 페스트였고 인구의 50~60퍼센트가 감염되었다. 자살이 이어졌고, 천치더는 이를 '관棺에 들었다就木'고 표현했다. 그리고 〈나무가 없었던 자들은 파리들이 애도해 주었다〉고 했다."(29-30)
"천치더와 그의 동시대인들은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고 믿었고, 물가도 마찬가지로 변하지 않기를 바랐다. 사람들은 물가가 공급과 수요에 따라 계절적으로 변동하지만,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물가가 원래의 수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가 안정을 위한 열망은 가격이 〈공평해야平〉 한다거나 안정되어야 한다는 언어로 표현되었다." "가장 이상적인 세상은 번영하고 자급자족하는 마을들 사이에 〈곡물이 풍부하고 가격이 공정하여, 수탉의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울려 퍼지는〉 곳이었다. 이 모델에 따르면, 〈사람들은 적절한 이익을 얻기 위해 물건을 멀리까지 운송하는 번거로움에 직면해서는 안 된다.〉 쉬광치徐光啓의 말이다. 쉬광치의 의도는 상업 교환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몇몇 유교 근본주의자들이 했을 수도 있듯이, 상업 교환이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혜택을 가져다주고 공정한 가격을 유지하는 시스템을 상상하는 것이었다."(37-9)
"물가를 안정적이고 공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단순하게 긍정적인 혜택이 아니라 정의의 행위라는 관점은 17세기 영국의 무역 옹호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 제라드 드 말린스가 1622년에 쓴 상업 관행에 관한 편람에서 〈하나의 것이 다른 것을 초과하는 불평등〉을 선호하기보다는, 가격 책정은 〈둘 모두를 평등하게 만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1635년에 포목상인 윌리엄 스콧은 가격이야말로 공정한 시스템에서 물건들의 진정한 척도다라고 선언했다. 〈시간이 사업의 척도인 것처럼, 가격은 상품의 척도다. 만약 가격이 물건의 가치를 초과하거나, 물건의 가치가 가격을 초과한다면, 정의의 평등은 상실된다.〉" "명나라 사람들은 공급과 수요가 공정한 가격을 결정하는 논리를 이해했지만, 그들은 이 메커니즘을 추상적인 정의의 작동보다는 개인적 덕의 행사 측면에서 더 생각했을 것이다. 시장을 정의의 자율적 생성자로서 인정하는 것은 명나라 관찰자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논리는 아니었다."(40-1)
2장 태평한 날들? 만력 연간의 가격 체제
"하이루이海瑞의 이야기는 그가 춘안의 지현으로 재직하고 있었을 때부터 시작한다. 이 빈곤한 도시는 저장성에 위치하고, 성도 항저우로부터 상류 쪽으로 먼 거리에 있었으며, 행정적으로는 현縣이 아닌 청廳이었다. 청은 통치하기 어려운 지역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행정 단위였다. 1558년 하이루이가 이곳에 부임했을 때, 지역 유력자들이 자신들의 토지 소유와 납세 의무를 기록에서 제거하기 위해 관청의 관리들을 위협하거나 매수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이루이의 개혁 중 하나는 관이 필요로 하는 상품과 서비스에 대해 시장 가격 이상으로 지불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지역의 공급자들에게 상품과 서비스의 대가를 과다 청구할 수 있다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으며, 그의 부하들에게는 공급자들이 시장 가격 이하로 판매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지시했다. 이러한 조치는 가격의 공개적 명시를 필요로 했다. 하이루이는 각 항목을 변경할 때 지불해야 할 금액을 명시하여 비용 절감을 시도했다."(82-4)
"1509년 선방沈榜이 베이징 완핑에 지현으로 부임했을 때 그 역시 재정적 혼란과 회계 부실에 직면했으나, 중앙 정부와 황실이 해당 직책에 부과한 부담 때문에 구체적인 상황은 하이루이와 매우 달랐다. 부임하자마자 선방은 관청에서 지출해야 하는 비용이 6,000냥인 반면 금고에는 겨우 52냥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회계 감사만이 위기를 극복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선방의 회계 감사 목표는 연간 현 예산을 작성하고 〈수입을 측정〉하여 〈지출을 결정〉하는 명나라 회계의 기본 원칙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감사 결과를 확정하기 위해, 그는 모든 자료를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선방의 안내서는 다른 어떤 명나라 출판물보다 더 많은 가격을 기록했다. 한 상급자는 〈현의 지출에 관한 장들은 그 정도가 너무 상세해서 서기들이 부당 이득을 취할 여지가 없다〉며 감탄했다. 그의 『완서잡기』는 버찌부터 변기, 범죄자를 구속하는 족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가격을 빠짐없이 기록하였다."(85-6)
"은 1냥은 일반 사람들에게 상당한 금액이었으며,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구분하는 지불 가격이었다. 은 1냥은 일반적으로 거래의 최소 금액으로 여겨졌다. 상하이에 거주하던 판윈돤潘允端은 1590년에서 1592년 사이에 가정부에게 지불한 금액을 그의 일기에 기록했는데, 은 4냥에서 10냥의 범위였다. 판윈돤은 1592년에 천원陳文과 그의 아내에게 은 8냥을 지불했다. 도장업자인 구시우顧秀와 그의 아내에게는 1588년에 단 2냥을 지불했는데, 1588년은 심각한 기근이 든 해였기 때문에 부부는 자신들을 팔아 생존하는 것이 굶어 죽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수 있다." "은 1냥은 심각한 범죄를 유발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금액이었지만, 그 이상이라면 어떤 범죄든 일어날 수 있었다. 1610년 후반 장시성의 한 불교 사원이 모금 활동을 할 때 기부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 위한 최소 기부액을 은 2냥으로 설정했다. 은 1냥은 부처님의 후원자로서 공개적으로 인정받는 영예를 얻기에 충분하지 않았다."(95-7)
"만력 연간의 품위 있는 가정은 연간 약 23냥 이상을 생활비로 지출했고, 최저 생계 수준의 가정은 14냥 조금 넘게 필요했다. 이 추정치는 1595년 푸젠성 해안의 일화로 어느 정도 뒷받침된다. 송대 신유학자 주희를 기리기 위해 그의 사당을 방문한 한 지부는 주희의 후손 두 명이 사당 관리를 맡으면서 극심한 빈곤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들은 사당 부지에서 직접 리치와 채소를 재배해 연간 동전 1만 문을 수입으로 얻었다. 동전 800문당 은 1냥으로 환산하면, 은으로 측정된 수입은 12.5냥이었다. 이들을 위해 지부는 토지를 구입하기 위한 소규모 모금 프로젝트를 조직했다. 토지는 연간 쌀 30석의 수입을 가져왔다. 그중 5석은 건물 수리비로 따로 두고 나머지 25석은 후손들에게 수입으로 주어졌다. 1석당 은 0.5냥으로 계산하면, 후손들이 받은 곡물은 12.5냥이 되어 그들의 수입을 기존의 두 배인 25냥으로 늘렸다. 이 조치는 이들을 최저 생계 수준에서 품위 있는 생활 수준으로 향상시켰다."(112-3)
3장 은, 물가, 그리고 해상 무역
"은을 수요가 있는 곳으로 이동시켜 최적의 조건으로 상품을 구매하고, 그 상품을 수요가 있는 시장으로 운송 및 판매하여, 그렇게 얻은 은이 처음 지출한 은을 초과하는 이익을 얻는 것은 중상주의자의 꿈이었다. 상품 교환을 부를 증가시키는 메커니즘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무역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당시 중국 문서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 아이디어가 낯설었기 때문이 아니라 무역을 옹호할 수 있는 공공 영역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 상인들은 그들이 다루어야 할 대중이 없었고 상인 자신들의 견해와 거래 내용을 그들만 알았으며, 거래가 완료되면 경쟁자나 호기심 많은 세금 당국자들이 추적할 수 없도록 문서 흔적을 남기지 않고 파기했다." "명대 후기에는 외국 무역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화하여 사적 부가 공공선과 경쟁하고 또 위협한다는 기존의 유교적 관점을 재고해야 한다는 주장도 등장했다. 외국 무역이 모든 사람들의 부를 증가시킴으로써 실제로 공공선에 기여한다는 것이다."(180-1)
"1639년 4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왕조의 붕괴가 5년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 푸위안추傳元初는 숭정제에게 상소문을 올려 1638년에 다시 부과된 해상 무역 제한 조치를 해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상소문은 널리 주목을 받았다. 푸위안추는 해적 문제를 인식했고, 해안을 폐쇄하는 것이 해적을 차단하는 매력적인 수단이라는 점을 이해했다. 서쪽으로는 동남아시아인들이 중국에서 수요가 있는 산단목, 후추, 상아와 같은 사치품을 제공했으며, 동쪽으로는 필리핀의 유럽인들이 은을 가지고 있었다. 두 집단 모두 자신들이 가진 것과 직접 생산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중국과 무역을 원했다." "특히 푸위안추는 외국인 구매자들이 후저우의 비단 직물과 징더전의 도자기를 원한다고 지적했다. 양쪽 모두 이익이 컸기 때문에 해금은 무역을 범죄화하고 이익을 밀수업자들에게 넘기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달성하지 못했다. 푸위안추는 해상 무역을 재개하지 않으면 귀중한 관세 수입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81-3)
"1639년 명나라는 큰 곤경에 처해 있었다. 10년 전에 중국 전역에 걸쳐 기온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이 추위가 시작되고 8년 째인 1637년에는 대부분 지역에 가뭄까지 덮쳐 1644년까지 이어진 치명적인 상황이 전개되었다. 푸위안추의 고향인 푸젠은 1639년에 기근에 시달렸고, 이어서 1640년에 전염병이 발생했다. 이 재난들은 재정과 생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관리들이 어떠한 정책을 채택해야 할지에 대한 불확실성을 불러일으켰다. 국경 봉쇄가 합리적인 대응이라고 생각한 이들에 반대하여, 푸위안추는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은 조정이 가장 마지막에 취해야 할 조치라고 주장했다. 그는 푸젠성 주민들 사이에 널리 퍼진 빈곤, 그리고 북방 국경의 군대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고갈된 지방의 재정에 대해 언급했다. 국가는 자금이 필요했고, 사람들은 수입이 필요했으며, 무역은 둘 다를 위한 길을 열어 주는 것이었다. 결국 푸위안추의 견해는 관철되지 않았다."(185-6)
"'마젤란 교환'이라고 불리는 개념에 따르면, 은은 멕시코 아카풀코에서 마닐라로 대량으로 운송되어 그곳에서 중국 제품과 교환된 후, 장저우로 이동하여 명나라 경제에 침투했다. 실상은 이와 달랐다. 첫째, 이론보다는 사실의 차원에서 아메리카보다 아시아, 특히 일본에서 중국으로 더 많은 은이 도달했다. 둘째,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무역로를 따라 운항하는 마닐라 갤리온선이 중국 상품과 아메리카 은의 교환을 위한 중요한 통로를 만들었지만, 명나라에 도달한 은은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간 후 동인도회사와 같은 기관에 의해 아시아로 재운송되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명나라 경제는 유럽 전체 경제와 거의 동등할 정도로 충분히 컸기 때문에 유입된 은을 상업적 교환 시스템에 통합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불안정해지지는 않았다." "나의 주장은 전 지구적 무역이 아니라, 전 지구적 기후가 명나라의 곡물 가격을 치명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것이다."(189-91)
4장 기근 시기의 곡물 가격
"명조가 창건된 1368년에 황제는 절도죄 처벌 수위를 정할 때 참조할 수 있도록 가격 평가 목록을 작성하라고 명령했다. 절도의 처벌은 도난당한 물건의 가치에 기초하여 결정되었다. 이 목록에는 다섯 가지 곡물의 가격이 포함되어 있다. 가장 비싼 것은 1두당 은 3.125푼(동전 31.25문)의 가격인 쌀이다. 다음으로 밀이 1두당 2.5푼(동전 25문)이다. 세 번째로 가격이 높은 것은 좁쌀과 콩으로, 각각 1두당 2.25푼(동전 22.5문)이다. 목록에 있는 가장 저렴한 곡물은 1두당 1.5푼(동전 15문)의 수수와 1.25푼(동전 12.5문)의 보리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것들을 인간이 섭취하기에 적합한 식품으로 여기지 않았다." "1608년 마드리드 상인 페드로 데 바에자는 광둥의 쌀 가격이 3.5푼에서 4푼 사이라고 보고했다. 놀랍게도 이 가격 범위의 하한선은 2세기 반 전의 평가보다 겨우 0.25푼 높다. 천치더 역시 만력 연간 초반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곡물 1두의 가격이 3푼에서 4푼이었다〉고 주장했다."(197-8)
"최악의 기근이 닥치면 사람들이 유랑과 굶주림에 이르고, 그 너머로는 도적질과 심지어 식인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모든 종류의 극단적인 물가 기록이 나타났다. 한 가지 유형은 부모가 자식을 파는 가격이 극단적으로 하락하는 것이다. 곡물로 환산된 소년의 가격은 2두에서 3승升까지 내려갈 수 있었다. 또 다른 극단적인 사례는 곡물 가격이 너무 비싸져 먹을 것이 사람이 되는 경우였다. 식인 행위를 유발하는 가격은 장소, 시간, 상황에 따라 달랐다. 1588년 허난성의 한 현에서는 곡물 가격이 1두당 동전 200문이 되면 식인 행위가 시작되었다. 같은 현에서 1640년에 기근이 발생했을 때는 좁쌀 가격이 1두당 동전 1,500문에 이를 때까지는 기아 상태의 사람들이 식인 행위에 돌입하지 않았다. 같은 성의 다른 지역에서는 한 해 전 메뚜기 떼가 창궐했을 때, 1두당 은 1.5냥(150푼)에 이르자 인육을 먹기 시작했다. 산둥성의 한 지방지는 1640년에 인육을 먹기 시작한 가격을 은 2냥으로 기록했다."(206)
"1597년에서 1598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베이징에서 대운하를 따라 남쪽으로 여행한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는 겨울 기온의 심각성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겨울이 시작되면 중국 북부의 모든 강들이 너무 단단하게 얼어붙어 그 위를 항해할 수 없게 되고, 마차가 그 위를 지나갈 수 있다〉고 관찰했다. 그는 이것이 〈타타르의 눈 덮인 산들과 가까워서〉 그럴 것이라고 추측했다. 마치 한파가 예외가 아니라 특정 지역의 영구 조건인 것처럼, 중국 우주론의 관점으로 보면 하늘이 작용이라기보다는 땅의 작용인 것처럼 말이다. 리치가 북반구 온도가 전 세계적으로 떨어지기 직전인 1577년에 유럽을 떠나지 않았다면, 중국의 추운 날씨에 대한 지역적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명의 마지막 반세기 동안 이례적으로 온난한 기온으로 기록된 해는 1602년 한 해뿐이었고, 23년 동안 이상 한파가 기록되었다. 1629년에 기온이 더욱 떨어져 1644년과 그 이후까지 비정상적으로 낮은 상태를 유지했다."(225-6)
"기후 변화로 농부들은 논밭에서 곡식을 재배하는 데 필요한 적정 온도와 강수량을 잃었다. 이러한 상황은 명대 사람들의 생존 가능한 한계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흉작으로 인해, 보관한 곡물 가격이 비현실적으로 높아졌다. 가뭄은 농경지뿐만 아니라, 곡물 상인들과 국가가 곤경에 처한 지역으로 식량을 운반할 수 있게 해 주던 운하도 메마르게 했다. 기후 변화는 단순히 물가 상승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곡물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전체 시스템을 변화시켰다." "기근 곡물 가격은 명나라의 멸망을 설명하지는 않지만, 기후를 배제한 상태에서 숭정 연간의 마지막 위기를 서술하는 것은, 셰익스피어의 말을 인용하자면, 〈바보가 들려주는 이야기로, 소리와 분노에 가득 차 있으나 아무 의미도 없다.〉" "다른 지도자나 다른 정부는 위기를 완화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냈을 수도 있지만, 곡물이 논밭에서 자라지 않을 때에는 거의 무의미한 가정이다. 가격 체제가 무너졌듯이 정치 체제도 무너졌고, 둘 다 회복되지 않았다."(241-2)
5장 숭정 연간의 가격 급등
"예멍주葉夢珠는 상하이 남서쪽의 소지주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 가문의 시골 집은 쑹장과 상하이 사이의 농촌에 위치했다. 그의 회고록인 『열세편』(세간에 대한 조사)에서 예멍주는 그의 어린 시절인 숭정 연간부터 1693년까지의 지역 역사를 재구성했다. 세심하게 구성되고 정확하게 쓰인 이 책은 만주족 통치의 첫 50년 동안을 대상으로 양쯔강 삼각주의 민족지와도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제7권 '식화食貨(음식과 물품)'에서 예멍주의 관심사는 인구나 세금이 아닌 상품의 가격에만 있다. 그는 주제에 대한 일반적인 서술로 시작한다. 〈상품 가격은 안정적이지 않으며, 이는 고대부터 그러하다. 지난 30여 년 동안 어떤 물건의 가격이 그 이전의 수십 배, 심지어 수백 배까지 오를 수 있다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뿐만 아니라 비싼 것이 저렴하게, 저렴한 것이 비싸게 변하는 등, 헤아릴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났다.〉 천지더가 만력 연간에서 회상하려고 했던 목가적인 단순함은 숭정 연간 예멍주의 삶에는 없었다."(264-5)
"예멍주는 1632년의 가격을 처음 언급한다. 〈그때 백미는 1두당 동전 120문, 혹은 은 10푼이었다.〉 앞 장에서 보았듯이. 16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표준 기근 가격이 바로 1두당 동전 100문이었다. 1632년에는 기근 시의 쌀 가격이 일상적인 정상 가격이 되었다. 예멍주는 쌀 가격이 변덕스러운 원인 중 하나가 은전비가(은과 동전의 교환 비율)의 변동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위조꾼들이 동전을 녹여 더 저질의 것으로 재주조하여 발생했다. 일부 연구자들은 은전비가 상승이 동전의 가치 하락 때문이 아니라 1640년대 아메리카로부터 은 유입이 감소하여 중국 내 은가가 상승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멍주는 이 논쟁에 대해 아무런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더 타당한 접근은, 은을 가진 사람들이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해 은을 유통 시장에서 거두어 축장할 경우, 지역 경제에서 유동성이 부족한 시기에 더 많은 동전을 유통시키고자 동전 위조가 발생한다는 것이다."(266)
"청대의 관점이 아닌 명대의 관점을 채택한다면, 예멍주의 물가 자료가 보여 주는 것은 17세기 말에 가격이 재안정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1640년대의 가격을 기준으로 삼으면 반 토막이 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상 물가보다 두 배 수준이다. 모든 상품 가격이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운송과 장거리 상업 네트워크에 의존해 경제성을 유지해야 했던 면화와 같은 원자재는 인건비에 의해 가격이 저하되었다. 예멍주의 물가 자료가 17세기 내내 긴 파동을 그리며 움직였다고 본다면, 그 파동은 시작 지점보다 훨씬 높은 가격 수준에서 진정되었다. 그러나 예멍주의 회고록이 보여 주는 것은 파동이 아니라, 숭정 연간의 기근이 가격급등을 일으켰고 이것이 진정되거나 익숙한 균형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17세기 말의 가격은 정상이 아니라 '새로운 정상new normal'이었다. 이 새로운 정상 가격은 비용을 변화시켜 생활 수준을 저하시키고 가계 경제에 심각한 부담을 주었다."(275)
"명나라가 중국 역사 속으로 점점 묻혀 가면서 '숭정 위기'의 충격은 잊혔고, 재앙의 원인은 자연적 요인에서 인간적 요인으로 전환되었다. 18세기가 되자 많은 논평가들이 명대를 되돌아보며 더 나은 시절로 여기기 시작했다. 양쯔강 삼각주 북쪽에 있는 양저우부의 1733년 지방지의 편찬자는 17세기를 지나 16세기로 시선을 돌려, 가격이 급격히 상승하는 그의 시대와 달리 〈가격이 적당하고 풍속이 소박했던 순진한 시기〉로 상상했다. 만약 명대가 (고대 그리스의) 이상적인 아르카디아였다면, 곡물 가격은 자신의 시대에 만연한 노골적 상업화와 옛 방식을 버린 것에 대한 교훈적인 이야기의 소재가 되어야 했다. 이 18세기 저자에게도, 우리가 다루었던 당시의 관찰자들에게도, 설명은 도덕적인 것이어야 했다. 경제를 체계적으로, 즉 직면한 물가 충격을 더 높은 차원에서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도덕이었다. 기후는 하늘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체계였다."(278-9)
후기_ 기후와 역사
"명나라의 몰락 원인은 전통적으로 정치적 파벌주의, 행정 실패, 세수 감소, 농촌 반란 등으로 서술되어 왔으며, 이 모든 것은 도덕적 실패라는 더 큰 판단에 의해 가려졌습니다. 청 제국이 명나라 영토를 침략하고 점령할 수 있었던 원인이 명나라가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이 서사는 단순히 청조로의 왕조 전환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입니다. 이 서사를 작성하고 승인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정복자들이었습니다." "'숭정 위기'를 특징짓는 것은 곡물 가격이 충격적으로 상승한 시기에 북쪽 국경 너머의 잘 조직된 무장 세력이 식량 부족에 시달리며 공격의 시기를 가늠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숭정 연간 관리들의 도덕적 실패를 왕조의 붕괴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많은 관리들이 공공의 이익을 희생하며 개인의 부와 안전을 우선시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당대인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조건에 직면하면서 그렇게 행동했던 것입니다."(2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