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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조선으로 - 해방된 조국, 돌아온 자들과 무너진 공동체
이연식 지음 / 역사비평사 / 2024년 10월
평점 :
프롤로그
1장 해방 조선의 민낯
"해방 후 남한에서는 일본인 유곽 및 요정 업주들이 이른 시기에 돌아간 덕분에 조선인 업자들이 이권을 쉽게 차지할 수 있었다. 38도선을 넘어 유입된 중국·만주 귀환자와 초기 월남민, 그리고 부산항을 통해 들어온 일본·동남아·태평양 등지의 귀환자들은 일본인이 경영하던 대규모 공창과 요정을 거머쥔 조선인 업자들에게 영업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더없이 고마운 '먹잇감'이었다." "여기에 살길이 막막한 도시 빈민, 해외 귀환자, 그리고 월남한 여성들이 이들 공창의 값싸고 풍부한 무한 공급원으로 부상하자 관련 업자들은 쾌재를 불렀다. 해방 후에도 이렇게 고급 요정과 유곽이 전국적으로 늘어가자 여성계에서는 창기들의 발목을 잡고 있던 무리한 몸값(전차금)을 말소하고 여성의 공공연한 인신매매를 금지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미군정은 1946년 5월 법령 제70호를 공포했다. 하지만 이들은 그곳을 나와도 달리 살아갈 방도가 없었으므로 변형된 형태의 공창과 사창으로 다시 흡수되기 일쑤였다."(24-5)
"해외 귀환자들은 초기 정착 단계부터 적절한 구호가 이루어지지 않자 기존의 빈민 집단에 더하여 해방 공간의 새로운 빈곤층으로 자리 잡았다. 그로 인해 이들은 모국 사회로부터 강한 경계와 배척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특히 대규모 재해가 발생하거나 역병이라도 돌면 이들은 영락없이 애꿎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다." "가뜩이나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해외 각지에서 도착한 귀환선에서 콜레라 환자가 발생하였고,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역병이 도는 바람에 총 1만 181명의 사망자를 내었다. 그 역병의 시발점이 단지 '귀환선'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전에 돌아온 사람들마저 '병균 덩어리' 취급을 감수해야만 했다. 기존 주민들은 이들이 해외나 타지에서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도 천운으로 여길 만큼 귀환선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가 따위에는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었다. 이들에게는 오로지 사람들이 해외에서 들어올수록 삶이 더욱 팍팍해져만 갔다는 부정적 경험만이 쌓여갈 뿐이었다."(32)
"1947년 7월 무장한 경찰대가 예고도 없이 마포구 대흥동의 제2 전재민 수용소로 들이닥쳤다. 규정 체류 기한을 넘긴 자들에게 퇴소를 명령했으나 귀환자들이 말을 듣지 않자 수용소장이 급기야 경찰을 부른 것이다. 어떻게든 버티려는 자들과 이들을 끌어내려는 자들이 서로 옥신각신하는 사이 한 임산부가 경찰에게 폭행을 당했다. 그러자 수용소의 귀환자들이 경찰들을 향해 한꺼번에 달려드는 바람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1947년 6월 14일 제2수용소의 명도신청서를 제출한 사람은 바로 숭문상업학교의 이사장 방응모였다. 방응모는 잡지 『조광』의 발행인이자 조선일보 9대 사장을 지냈으나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그는 친형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양자로 삼았다. 방재윤의 아들들이 바로 최근까지 조선일보 사주를 지낸 방일영과 방우영이다." "이처럼 숭문상업학교 교사 이전 과정에는 조선일보의 인맥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 영향으로 조선일보 입사 시험은 으레 이 학교에서 치르곤 했다."(41, 45)
"열악한 모국의 정착 환경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한 결실을 거둔 사례도 있었다. 귀환자와 월남민의 전재민 노점 시장으로 시작한 낙원시장의 성공 사례가 대표적이다. 탑골공원 뒤에 자리 잡은 이 시장 터는 과거 총독부가 방공용 소개지로 지정했기 때문에 해방 초기만 해도 상권이 전혀 형성되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나 유입 인구가 증가하면서 이곳이 전재민 시장 후보지로 선정되면서 기존의 도시 빈민, 해외 귀환자, 초기 월남민들이 모여들면서 번성하였다. 이곳의 노점상도 처음에는 하루 벌이로 연명하던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1948년 상인 조합을 결성하였고, 1949년에는 조합원이 약 4,500명 규모로 증가하자 출자를 통해 인사동 고려청년회관에서 낙원시장주식회사 창립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주민들 사이에 〈해외 귀환자와 월남민은 하나같이 드세고, 억세다.〉라는 이미지가 각인되기도 했는데, 이들이 어떻게든 서울에 정착하려면 그토록 모질게 버텨내는 길밖에 없었을 것이다."(52-3)
"1946년 12월 말 장충단 수용소에는 약 2,400명이 있었다. 그런데 전재동포원호회 중앙본부에서 직원을 파견해 실태를 조사한 결과, 그 가운데 약 1,700명이 영양실조와 동상을 안고 있었고, 겨울로 접어든 뒤로는 매일 평균 7~8명이 죽어 나갔다. 이런 사태를 이미 예견하고 있던 남한의 주요 정당 및 사회단체는 시내에 산재한 13개 대형 '적산 요정'이라도 시급히 개방해 이들의 동사를 막아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서울시는 12월 23일까지 반드시 이들을 입주하게 하겠다고 약속만 해놓고 별다른 설명도 없이 개방을 연기했다." "전재 동포들은 구 일본인 소유 건물을 두세 채씩이나 차지해 졸부가 된 사람들로 인해 낮에는 미군이 버린 잔반을 뒤지며 구걸하고, 밤에는 한강 다리 아래에 움집을 파거나 거리를 전전했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만성화되어 해방 후 약 3~4년 동안 겨울마다 되풀이된 귀환자와 월남민의 아사 및 동사 관련 보도는 시간, 장소, 인물만 바꿔도 또 다른 완벽한 기사가 될 정도였다."(54-6)
2장 해방 후에도 이어진 지독한 인연
"'전재민'들은 시기별로 각기 다른 남하 동기와 집단 구성을 보였다. 1945년 말까지는 과거 총독부의 병참기지화 정책에 따라 '북선개척北鮮開拓'을 위해 동원되었다가 다시 돌아온 본디 남한 출신의 귀향민(Returnee)과 생활난으로 남하한 사람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1946년에는 만주에서 유입된 사람은 줄어든 반면, 북한 통치 체제에 불만을 품은 반체제 집단의 유입이 급증하였다. 따라서 이들 중에는 고학력의 지주, 대상인, 의사, 법률가, 교사, 종교인, 친일파, 구 식민 관료 출신자들이 많았고, 남하 후에는 나름의 공동생활체를 꾸리기도 했다." "북한은 1946년도만 해도 자발적인 집단 남하를 '사회 정화' 차원에서 반겼다. 그러나 1947년 7월부터 남북 및 미소 간의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생활난'을 이유로 한 월남민 증가는 곧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반증하는 구실로 악용될 수도 있고, 이제 막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의 인적자원이 누수된다는 판단에 따라 38도선을 굳게 잠그기 시작했다."(73-4)
"해방 후 귀향민·월남민과 함께 38도선을 넘어 유입된 중국 본토와 만주 방면의 귀환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규모였다. 이 가운데 만주 귀환자들은 해방 후 급격히 고조된 중국의 배타적 내셔널리즘으로 인해 현지에서 일군 토지와 재산을 몰수당한 채 추방되거나 국공내전으로 불안해진 거류 환경 때문에 돌아온 사람이 많았다. 특히 1946년 가을 무렵부터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가 진출하면서 피해가 급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한정서와 이데올로기적 중상에 노출된 채 방치된 조선인에게 귀환은 곧 생환을 위한 유일한 선택지였던 셈이다. 한편 부산항 등을 중심으로 한 해안 루트는 주로 일본과 태평양 방면으로 동원된 사람들의 귀환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대개 식민지배 말기에 징용 등의 '강제 동원'으로 인해 해외에 단기간 거류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이들은 해방 직전부터 밀항을 시도할 만큼 모국 귀환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해방 후 불과 두세 달 사이에 대거 유입되었다."(74-7)
"천황의 항복 방송 이후 1945년 9월 초순 미군이 진주하기까지 일본인들의 동향은 '뱅크런'과 '집단 패닉'이란 키워드로 집약할 수 있다. 이 무렵 일본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은행으로 달려가 예금부터 찾고 가재도구까지 급하게 팔아치운 뒤 모두들 먼저 돌아가겠다며 밀선을 섭외할 수 있는 부산항 일대로 몰려갔다. 이렇게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뒤 어수선한 분위기가 잦아들 무렵 『경성일보인세화회회보』 창간호가 나왔다. 발간사는 〈우리들의 친구 조선의 기쁨을 우리의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동아시아의 발전을 위해 우리도 협력하자〉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것은 당시 일본인 사회가 조선인들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새삼 느끼게 된 '긴장감'을 반영한다. 동시에 '공생'을 모토로 한 내용들이 많았다. 그래서 초기에 세화회에서는 잔류 쪽에 무게를 두면서 영주를 바라는 사람들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가동하기도 하였다. 수강 신청자가 몰려 대박을 터뜨린 'YMCA 조선어 강좌'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113-4)
"1945년 10월에는 군정 당국의 일본인 공식 송환 계획이 발표되었다. 이처럼 잔류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이제는 '재산 처리'가 최대의 관심사로 부상했다. 이제는 한가하게 조선어를 공부하거나 아이들 교육 문제 따위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어른들은 미군의 간섭과 단속이 더 강화되기 전에 밀선이라도 구해서 조선에서 어렵게 일군 돈과 재산을 최대한 안전하게 반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이 시기 회보에 〈부모는 사유재산이나 저금통장보다도 아이들 문제를 중시해야 한다〉라거나 〈일본 밀항을 중지하라〉 등의 기사가 등장했겠는가. 이것은 그만큼 일본인 집단 안에서 〈어차피 돌아가야 한다면 재산이라도 챙겨 가자〉라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러한 관심을 반영하듯 세화회 소식지도 10월 중순부터는 일본인 사유재산 처리에 관한 내용들을 늘어갔다. 즉 해방 후 두 달이 지나서야 경성의 일본인들은 비로소 조선을 '이국' 내지 '타자'로서 인식하게 된 것이다."(115-6)
"한편 남한에서는 총독부와 일본 군대 등 식민 기구가 관리하던 국공유 재산은 물론이고 개인과 법인의 민간인 재산을 '귀속재산(적산)'이라고 불렀다. 해방 후 그 처리를 둘러싸고 이것은 '조선'에서 '조선인'의 고혈을 짜낸 결과이니 해방 후 신국가 출범을 앞두고 사회 전체가 공유하고 공익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과, 그 재산을 임차하거나 구매하기를 원하는 개인이나 법인에게 불하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양분되었다. 이 문제는 결국 한일 양 지역의 미군 점령 통치 아래서 발생한 만큼 남한의 주한 미군정과 일본의 연합국총사령부가 일찍이 정리했어야만 할 문제였다. 하지만 점령군은 이 문제를 단독으로 처리할 권한이 없었고, 최종적으로 미국 정부는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면 한일 양국이 알아서 처리하라고 발을 뺐다. 그 결과 이것이 불씨가 되어 해방 후 양국이 국교를 재개하는 과정에서 각기 '청구권'과 '역청구권'을 주장함으로써 한일조약 체결이 지연되는 주된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한 것이다."(117)
3장 탐욕과 죄악의 판도라 상자, 적산가옥과 고급 요정
"송환을 앞둔 일본인들이 생산 시설을 파괴하고 원료나 재고품 등의 물자를 빼돌리거나 폐기한 배경에는 우선 조선인 노동자들이 전개한 '자주관리운동'에 대한 반감이 강하게 작용했다. 아울러 이러한 행위는 조선에 자본과 기술을 투자한 일본인 자본가 입장에서 보면 패전이라는 비상사태를 맞이해 그나마 영업 손실을 줄여보고자 한 '자본 철수' 및 '물품 회수'라는 측면이 공존했다." "이처럼 현금 확보를 위한 자산 처분과 물품의 방매는 기계 등 생산 시설의 파괴와 원료 및 제품의 망실로 이어졌으므로, 해방 후 적산 기업(귀속 기업)은 만성적인 자금난과 원료난에 직면했다." "당시 남한 사회는 이러한 행위를 일종의 건국 방해 행위로 받아들였다. 왜냐면 이러한 생산시설 등은 해방 후 신국가 건설 과정에서 적산(귀속재산)으로 엄격히 관리해 반드시 공익적 차원에서 재활용되어야만 하는 사회적 자산인데, 이렇게 일본인들이 자국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재산 밀반출을 위해 의도적 파괴를 일삼았기 때문이다."(129-31)
"그렇다면 이러한 사태는 단지 일본인 송환이 지연되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문제였을까. 결코 아니다. 남한의 제 정당 및 사회단체, 그리고 학계에서는 일본인들이 항복 방송을 듣자마자 벌인 일련의 행동을 지켜본 뒤, 이러한 끔찍한 사태를 예상하고 다양한 경로로 일본인 소유 재산을 당장 '동결'해 자유 매매를 금지하고, 이들이 보유한 화폐를 공공 기관에 '등록·예탁'시켜 국가(남한에 수립될 임시정부나 군정 당국)가 철저히 '관리'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하지만 미군은 진주 후 이러한 남한 사회의 권고를 무시한 채 1945년 9월 25일 일본인 사유재산의 매매(미군정법령 제2호)를 허용함으로써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탐욕과 죄악의 판도라 상자를 기어코 열고야 말았다." "미군정은 1945년 10월 초 법령 제10호를 발표해 일본인은 당국의 허가 없이는 자신이 등록된 정회町會로부터 반경 10킬로미터 이상의 이동을 금지했지만, 그저 말로만 그칠 뿐 이를 어겨도 단속할 의지나 여력이 없었다."(131-3)
"이때를 틈타 송환 국면에서 돌아가는 일본인과 계약서를 위조하거나 명의를 도용해 건물의 소유권이나 점유권(사용권)을 독차지한 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대개 구 일본인 부동산의 매매를 비롯해 식량 등 생필품의 사재기, 반출입 금지 품목의 밀수 등을 통해서 갑자기 떼돈을 번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도량하게 된 주된 원인은 미군정의 일본인 사유재산 매매 허가와 그 뒤를 감당할 수 없었던 허술한 관재 행정에 있었다. 미군정이 비록 법령 제33호를 통해 뒤늦게나마 기존의 매매 거래를 무효화했다고는 하지만, 두세 달 사이에 이미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부정 거래를 적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시 미군정 관재 당국은 뒤늦게나마 구 일본인 부동산을 조사해 각 물건별로 임대차계약 체결을 통한 공정 관리를 표방했으나 해당 물건의 수효조차도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애초부터 그 상자는 열어보지도 말라고 신신당부한 조선학술원 백남운의 경고를 무시한 대가는 생각보다 너무 컸다."(139-40)
"1946년 11월 20일, 서울 돈의동 명월관에서 김린이金麟伊라는 자칭 사업가가 최선이라는 기생 등 4~5명을 거느린 가운데 20여 명의 '신사 숙녀'와 함께 질펀하게 술판을 벌이다가, 취기가 오르자 모종의 경로로 들여온 포르노를 틀어놓고 향락의 끝을 맛보았다는, 일명 명월관의 도색영화 상영 사건이 터졌다." "4~5명이 모여 고급 요정에서 즐기면 대략 6~7천 원이 들었는데, 명월관에서는 20여 명이나 어울렀으니 김린이에게 부과된 벌금 5천 원은 한차례 술값보다도 훨씬 적은 돈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급 요정은 군정 관료, 해방의 혼란을 틈타 돈을 번 신흥 자산가, 그리고 정치 브로커 등 건국을 방해하는 '매국노들의 소굴'로서 깊이 각인되었다. 이것은 근대 이래 에로(エロ, erotic), 구로(グロ, grotesque), 넌센스(ナンセンス, nonsense)가 고급 요정과 포르노를 매개로 해방 공간에서 새로운 형태로 재현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말 그대로 어찌 이보다 더 '선정적이고, 기괴하며, 지각없는 처사'가 있겠는가."(145, 151-2)
"당시 사건을 취재한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 문제안의 회고는 결국 미군정의 조선인 관료들이 미군에게 향응을 제공하고자 돈 많은 사장이나 장사치에게 '물주' 노릇을 시켰다는 이야기이다. 미군을 접대한 대가는 어떤 중요한 정보나 이권이었을 터이니, 그 떡고물을 조선인 관료와 물주 노릇을 한 자들이 적당히 나눴다는 이야기가 된다." "일본인이 남기고 간 부동산 등의 자산을 법망의 빈틈을 이용해 손에 넣었거나, 위험을 무릅쓰고 광역에 걸친 밀수와 암거래를 통해 번 돈으로, 이들은 미군정의 조선인 관료와 미군을 상대로 고급 요정에서 '물주' 노릇을 해가며 더 큰돈을 벌 수 있는 내밀한 정보를 캐고자 했다. 또 만일에 발각될 경우에 대비해 경찰 및 사법계 요로에 후원금을 상납해 일종의 보험을 드는 방식으로 후사를 도모했다. 요정은 이렇게도 도색영화와 주지육림, 그리고 명기들의 춤사위를 맛보며 이들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해주는 고마운 공간이었으니, 어찌 추레한 전재민에게 내줄 수 있었겠는가."(162, 167)
4장 해방 조선에서 출세를 하려면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해방과 건국이란 시공간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극한의 '양극화'가 사회 전면으로 파급된 시기였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조적인 사회현상이 부유층 자제의 '유괴'와 극빈 가정 유아의 '밀장密葬'이다. 즉 부잣집 아이는 부모의 금품을 노리는 유괴범들의 손쉬운 표적이 되기 일쑤였다. 반면에 가난한 집 아이는 병들거나 굶어 죽어도 부모가 장사 치를 돈조차 없어 매장은 고사하고 허름한 거적 등으로 말아 인적이 뜸한 외진 곳에 버려지는 일이 적잖았다. 이것은 일견 정반대의 상황으로 비칠지는 모르지만 결국 '고르지 못한' 공동체 안에서는 그 구성원이 금수저이든 흙수저이든 결과적으로 그 누구도 결코 편안하게 지낼 수 없다는 것을 매우 거칠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1949년 11월 종로 2가 동양루 사장 아들의 유괴 및 살해는 어린이 유괴 사건의 서막을 알렸다. 이 교동국민학교 유괴 사건으로 뒤숭숭하던 차에 1950년 1월 24일에 다시 청파동 여야 유괴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190-2)
"그런데 뜻밖에도 이 사건으로 주목을 받은 사람은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병원으로 달려온 피해 어린이의 큰아버지, 즉 김형민 전 서울시장이었다. 피해 어린이가 전 서울시장의 조카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더욱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뒤이어 온갖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 사건에서 주목할 대목은 바로 김형민이 조카딸을 병원에서 퇴원시켜 데려다준 그 '집의 위치'이다. 왜냐면 당시 피해 어린이가 살고 있던 '청파동1가 58번지' 일대는 김형민의 시장 재임기는 물론이고 퇴임 후까지도 끊임없이 재기된 이른바 '대규모 적산 가옥 스캔들'의 진원지였기 때문이다." "유괴 사건 직전해에 불거진 1949년 당시 '적산 가옥 부정 처리'사건은 언론이 주목한 초대형 사건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그 뒤로 관련 소식이 끊겼다. 그것은 이 사건의 사후 처리와 관련해 매우 '강력한 윗선'의 개입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정황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내용이 현재 제헌의회 국회 속기록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194-6)
"1949년 12월 제헌의회 법사위원회에서는 건국 후 국가기관의 주요 조직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면서 법무부에서 제출한 '검찰청법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제5회 57차 회의의 핵심 의제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검찰과 경찰 사이의 '수사권 조정(일원화)', 그리고 검찰 산하 중앙수사국의 설치 및 '사법경찰관(현 검찰조사관)'의 감독권 행사 문제였다. 국회 법사위원장 백관수의 주재로 열린 법안 검독회(검토회)에서 법무부장관 권승렬은 〈현재 검찰(검사)은 187명에 불과하지만 경찰은 무려 5만 명이나 된다. 현재는 내무부 산하의 경찰총장이 사실상 수사권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하지만 중범죄자들에 대한 처벌은커녕 수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검사들이 중앙수사국 사법경찰관을 통해 수사 과정 일체를 지휘하고 기소까지 완결할 수 있는 법안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법무부장관은 그 근거로 1948년 7월의 서울시장 김형민에 대한 경찰의 허술한 '수사 기록'을 제시했다."(196-7)
"당시 검찰 조사에 따르면 김형민은 '미군 통역관' 시절에 적산 가옥을 매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가 이 막대한 현금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석유 장사' 덕분이었다." "당시 석유(가솔린)는 연합국총사령부가 관할하는 모든 지역에서 매우 엄격하게 통제받는 일등 관리 품목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김형민이 단순히 배급망의 말단 기구나 대리점을 운영한 것이 아니라 이 품목의 배급과 유통을 총괄하는 '지배인(manager)'이었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그 자리를 얻기까지는 미군정 관재 담당 관리와 상당한 교감이 오갔을 것이다. 즉 이것은 통역관으로서 그가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이권이었던 셈이다." "검찰 조사에 따르면, 김형민은 후암동의 서울시장 공관으로 이사하면서, 해방 후 함께 석유 사업을 하다가 상공부에 공직자로 들어간 동생들('친척들')에게 청파동의 구 일본인 가옥 10채를 매각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선우종원 당시 검사가 집중적으로 캐고자 한 혐의도 이 대목이었을 것이다."(208-12)
"일본인들은 용산 지역을 사대문 안과 달리 순전히 일본인들의 노력으로 새롭게 발견하고 개발한 지역이라고 인식했다. 철도 부지 및 군용지 수용 과정을 보면 일단 사유지의 경우 논밭과 대지, 가옥, 분묘 등을 합해 '89만 7,534원'을 보상가로 추산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평당 채 2전이 되지 않는 돈만 지불했다. 이것은 당시 일본인이나 다른 외국인 보상비의 1/60에 불과했다. 조선인들은 당연히 강력히 반발했지만 일본 헌병대는 무력으로 진압했고, 보상도 하지 않은 채 갈월동, 남영동, 후암동 일대의 조선인 주민을 용산중고등학교 뒤편의 산기슭 너머, 즉 108계단 위 해방촌, 보광동, 이태원 쪽으로 밀어냈다." "결국 김형민이 사들인 청파동의 10채나 되는 가옥은 해방촌과 이태원 쪽으로 밀려난 조선인 원주인 땅 위에 지어진 것이었다. 해방 후 사회적으로 공유되어야 할 재산이 미군정이 잠시 자유 매매 거래를 허가한 그 짧은 사이에 돈 있고 발 빠른 사람들 손에 들어갔던 것이다."(225, 228)
5장 비정하기만 했던 나의 조국, 조선
"해방 공간의 상층부는 미군정 관재 행정 중앙부처(재무부/상공국)─대행기구(각 시도 귀속재산관리처 혹은 조흥은행 등)─정계·경찰·사법─자본가(기성사업가·신흥투자가·밀수업자·유통업자·알선업자 등)로 이어지는 정·관·재계의 다층적인 카르텔 구조를 띠고 있었다. 해방 공간의 다양한 카르텔은 내부에 균열이 발생할 때 비로소 공동정범共同正犯의 큰 그림이 밝혀지곤 했다. 그 내막이 집중적으로 드러난 시기는 대략 1947년도부터 1948년의 정부 수립을 전후한 때였다. 막대한 '눈먼 돈'을 굴릴 수 있는 자리, 즉 이제 곧 수립될 새 정부의 최고위 관직이나 '알짜배기' 자리를 차지하고자 경쟁이 과열되거나, 분배 결과에 누군가 불만을 품었거나, 비밀 엄수의 묵계를 깨뜨린 배신자가 나올 때 비로소 그 추악한 모습을 드러냈다. 귀속재산 처리를 둘러싼 뇌물 수수 사건 보도가 매일 같이 이어지자, 사람들은 재판 결과와 상관없이 으레 '의혹'이 제기되면 곧 '기정 사실'로 믿기 시작했다."(243-6)
"고급 요정이나 유곽 외에도 빌딩과 같은 덩치 큰 귀속재산의 경우는 미군정기에 시작된 잡음이 심지어는 박정희 정권기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63년에 삼성 계열의 신세계가 인수한 남대문의 동화백화점(구 미쓰코시백화점 경성지점, 현재 신세계백화점)이다. 해방 후 이 건물의 초대 사장(정식 불하 이전의 관리인, 영업권자)은 김계조였다. 그는 총독부 고위 관료와 친일 정부 수립을 모의하고 미군을 대상으로 한 공작의 일환으로 국제문화사 댄스홀을 설치했다는 의혹을 산 '김계조 사건'의 장본인(배구자의 남편)이었다. 그가 이 사건으로 수감이 되자 '관리인' 자격이 박탈되었다. 그래서 차기 사장(관리인)으로 이두철이란 자가 나타난 윤상균, 지희철과 함께 이곳을 공동 인수했다가, 1948년 1월 두 사람을 밀어내고 사업권을 독차지하였다. 그는 백화점에 입주한 업주들의 가게 보증금을 일방적으로 올려 원성을 샀고, 종업원 월급을 상습적으로 체불해 종업원 노조의 파업 투쟁이 끊이지 않았다."(247)
"그가 곤경에 처할 때마다 도와준 고마운 인물이 '친일 고문 경찰'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닌 노덕술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이다. 그래서 노덕술이 정부 수립 후 1948년 말부터 반민특위에 의해 지명수배되어 은신하는 과정에서 이두철은 그를 자택에 숨겨주기도 했다. 노덕술이 효창동, 번지수로는 '청파 2가'에 있는 이두철 집 안방의 병풍 뒤에서 체포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집 또한 1930년대 중후반 청파동과 갈월동 일대의 문화주택단지 분양이 붐을 이룬 시기에 들어선, 도로변의 구 일본인 소유 가옥이었다. 앞서 4장에서 등장한 김형민 시장이 미군정 통역관 시절에 사들인 10채의 집들과도 지척에 있었다. 이처럼 구 친일 자본가(박흥식)와 구 친일 고문경찰((노덕술), 미군 통역관 출신의 관료(김형민), 그리고 신흥 투기꾼(이두철) 등의 카르텔은 구 일본인 재산을 매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직간접적으로 연을 맺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해방 공간의 고난도 퍼즐을 구성하고 있던 조각들인 셈이다."(247-8)
"1945~1946년 동절기를 지나면서 해방 직후 반짝했던 사회적 환영 분위기가 사라지고, 귀환자들의 지속적인 유입과 방치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했다. 그 결과 1946년 초봄의 해빙기를 기점으로 귀환자들의 만주 재이주, 일본 재밀항에 관한 보도가 늘어갔고, 기사의 제목도 점차 자극적으로 변화했다. 그만큼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왔건만 열악한 정착 환경과 주변의 싸늘한 시선에 '오만정'을 떼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동북 삼성의 만주 당국은 해방 후 조선인들이 전란이나 박해를 피해 빠져나간 뒤에 텅 빈 한촌이 되어버린 농지를 다시 일궈야만 했기 때문에 이들의 재유입을 환영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남한의 물가고와 이기지 못해 일본 밀항을 시도한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보도한 단발 기사는 흔하다. 그러나 「빙설氷雪 같은 동포애」라는 기사는 남한 사회의 미흡한 구호와 사회적 냉대가 이들을 현해탄으로 내몰고 있다며 경제 외적인 요인을 적시했다. 즉 몸도 힘들었지만 마음까지도 다친 것이다."(269-73)
"일본과 남한은 각기 연합국총사령부와 미군정의 점령 체제 아래 있었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는 정부와 의회가 있었고 간접 통치를 실시했기 때문에 귀환 문제와 관련해 일본 측의 입장을 맥아더사령관에게 전달하거나 요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한의 경우는 아직 정부도 수립되지 않았고 과도입법의원은 구호 정책도 입안하지 못했다. 게다가 미군정은 연합국총사령부의 하위 기관이었으므로 남한 현실에 맞는 적절한 조치를 독립적으로 취할 수도 없었다. 즉 해외 귀환자나 월남민은 250만 명이나 되었지만 남한은 이들을 구호할 법적인 근거조차 마련하지 못한 무정부 사회(혹은 이중 권력 국가체)였다." "이후에도 일본은 귀환자 구호를 위한 '제도'에 관한 논의가 공적으로 이루어졌고, 귀환자도 의회에 진출하여 독자적 정치 세력화를 이루어 요구 사항을 제도적으로 관철하려는 등의 움직임을 보였다. 반면에 한국은 귀환자의 정착을 위한 미군정의 제도적 노력도 부족했고, 귀환자들의 정치 세력화에도 한계가 있었다."(283-5)
에필로그
"1959년부터 1984년까지 무려 '9만 3,349명'의 재일동포가 북송선에 올랐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해방 후 재일동포는 취직은 물론이고 자녀 교육, 영세자영업자에 대한 특별금융 지원, 공공주택 입주에 이르기까지 민족 차별을 감수해야만 했다. 아울러 조선의 말과 역사를 가르치는 민족학교를 불법으로 규정해 해방 후에도 노골적인 '동화와 배제'를 강요했다. 건강, 그리고 '꿈'을 잃게 되면 우리네 삶도 맥이 빠지는 법이 아니던가. 일본에서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던 이들이 북송선에 올랐다. 바로 그 빈틈을 공략한 것이 한국전쟁으로 인구가 줄어 전후 복구 인력이 필요했던 북한이었다. 특히 남한으로 유출된 '(월남민)인재'가 많아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자 북한 당국은 한반도 밖에 있는 '동포 사회'에 눈을 돌렸다. 그 결과 대략 1950년대 중반부터 북한 당국은 일본의 '민족학교'나 '명문대'에 다니던 재일동포 학생들에게 '김일성(조총련) 장학금'까지 지원하며 '북한은 지상낙원'이라는 환상을 퍼뜨렸다."(290-2)
"일본 정부는 북한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눈엣가시'같은 재일동포를(1959년 당시 60만 7,533명 규모) 남한이든 북한이든 자발적으로 데려가 준다면 그야말로 감사할 일이었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점령 통치 아래서 연합국총사령부의 송환 정책에 불만이 많았다. 조선 등 식민지에 있던 일본인은 패전 국민이라며 징벌적 차원에서 '일괄 송환'했지만, 일본에 있는 조선인은 '거주지 선택권'을 허용한 것이 내내 마뜩찮았다. 이런 상황에서 재일동포는 식민 통치와 관련해 '과거사'가 거론될 때마다 일본의 치부를 드러냈고, 정치적으로도 일본공산당이나 사회당과 함께 반정부 운동에 앞장섰다. 게다가 복지 재정도 갉아먹었다. 1955년 현재 재일동포의 생활보호 비율은 일본 평균의 10배였다. 물론 이들의 가난은 과거 식민 통치 이래로 일본 사회의 뿌리 깊은 차별로 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들을 복지 재정이나 갉아먹는 '기생충' 취급을 하며 어떻게든 추방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292)
"한편 이승만 정권은 절대다수가 남한 출신인 이들 재일동포가 차별 속에서 기본적인 인권과 생활권마저 침해당하는 상황에서 도움을 주기는커녕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지닌 '60만 동포'를 오로지 '반공'이란 잣대로 모두 '빨갱이'로 몰아 이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말았다." "심지어 남한, 북한, 일본의 '동상이몽' 속에서 국제적십자사는 이것을 '거주지 선택권'을 존중한 '귀국'이라며 교묘히 '인도주의'로 포장하며 바람잡이 역할을 했다. 결국 북송은 해방 이전 한일 간의 식민 지배 과정에서 배태된 제국 내 지역 간 이민족의 이주민 문제가, 해방 후 귀환 국면에서 깔끔하게 해결되지 못한 결과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일동포를 추방하려던 일본 정부의 배제 논리를 바탕으로 하여, 한국전쟁 후 재일동포를 단지 〈전쟁 피해를 복구하고 이념 및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전취해야 할 수단〉으로만 인식한 남한과 북한의 근시안적이고 왜곡된 재외동포관이 맞물려 빚어진 '인재'이자 '참사'가 곧 북송이었다."(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