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달러 종말의 허구
곽수종 지음 / 메이트북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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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는 말 | 달러가 흔들릴 때 문명도 전환점에 선다


문명의 전환, 혹은 대변화의 시작은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을 보인다. 첫째, 총·균·쇠의 강도가 거세진다. 총은 전쟁, 균은 질병의 파괴력, 쇠는 산업과 과학 기술의 발전을 의미한다. 석기에서 청동기·철기로의 전환, 풍력에서 석탄·석유로 이어진 내연기관의 발명 등이 그 사례다. 둘째, 강대국은 스스로 무너진다. 여당의 실수를 먹고사는 야당처럼, 강한 세력이 자충수를 두어 몰락한다. 내부 균열이 심각해지면 천재지변이나 인접 강국의 침략으로 붕괴된다. 셋째, 경제에서 버블 붕괴는 대공황을 낳지만, 정치에서 패권 붕괴는 질서를 무너뜨리고 권력 자체를 사라지게 한다. 권력이 없으면 질서도 유지될 수 없다. 영국 파운드의 몰락이나 달러의 부상은 필연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달러의 몰락도 필연은 아니다. 기축통화는 운명이 아니라 선택의 결과다. 달러가 몰락한다면 그것은 미국 스스로 자초한 재앙일 것이다. 경제 패권의 붕괴는 재건이 가능하지만, 정치 패권의 붕괴는 국가의 쇠멸을 뜻한다. 8)


◆ CHAPTER 1 트럼프의 오독: 달러 패권이 불안하다


대다수 공화당 사업가들과 달리, 트럼프는 세계를 착취 대상이 아니라 미국을 이용하는 ‘호구(the patsies)’로 바라본다. 1987년, 트럼프는 <뉴욕타임스>와 두 개 신문에 전면광고를 실었다. ‘미국 국민에게(To the American People)’라는 제목의 공개서한에서 그는 일본·사우디아라비아 등 미국의 군사적 보호를 받는 국가들에 군사비를 청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고는 결국 “우리 위대한 나라가 더 이상 조롱 당하게 놔두지 맙시다(Let’s not let our great country be laughed at anymore)”라는 문장으로 끝맺었다. 트럼프의 정치적 메시지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는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그 시기는 ‘골디락스(Goldilocks) 경제’라 불리며 풍요와 낙관이 공존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까지 미국에서는 국가 방위 예산은 패권국으로서 당연히 부담해야 할 대가이고, 무역은 그 보상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1991년 소련의 붕괴는 이러한 믿음을 확인시켜주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14)


억만장자 기업가 레이 달리오(Ray Dalio)는 저서 『세계질서의 변화』에서 제국 쇠락 초기에 나타나는 공통된 정서를 경고한다. “제조업 부활”을 외치는 트럼프 대통령은 정작 청정에너지와 반도체 같은 첨단 기술 프로그램을 축소하고 있으며, 세계 곳곳에서 미국의 소프트 파워를 스스로 약화시키고 있다. ‘산업과 상업이 떠난 자리에 자본만 남는다’는 사실은 제국의 종말을 알리는 징후임을 그는 모르는 듯하다. 미국은 이제 관세나 무역 압박만으로는 중국의 국가 주도 전략을 꺾을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실제로 중국은 전략을 더욱 강화하고 있으며, 첨단 산업에서의 지배를 위해 ‘맨해튼 프로젝트’에 버금가는 집중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물론 중국도 부동산 침체와 고령화 같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회의론자들의 예측과 달리, 중국은 매번 돌파구를 마련하며 국가 주도 체제를 유지해왔다. 반면 트럼프 전 대통령의 관세 집착은 오히려 중국 중심 세계의 부상을 앞당길 뿐이다. 17-8)


냉전 이후 미국의 대중 외교 접근은 미국 지도자들이 더 이상 전략적 외교가 필요하지 않다고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90년대에는 더 이상 경쟁할 강대국이 없었고, 구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은 이전의 그 어떤 강대국도 상상할 수 없었던 우위를 누리고 있었다. 워싱턴은 경쟁국의 행동을 조율하는 대신, 그들을 자유주의 사회로 바꾸려는 더 야심찬 목표를 추구했다. 오늘날 강대국 간 경쟁은 다시 돌아왔고, 체제 간 전쟁도 현실적인 가능성이 되었다.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미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방법은 간명하다. 전략적 외교로 회귀해야 한다. 아르키다모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쟁을 암시하지도, 굴복을 암시하지도 않는 어조(a tone not too suggestive of war, nor again too suggestive of submission)”로 적들과 교섭해야 하며, 그로부터 확보한 시간을 이용해 동맹과 국내 자원을 전쟁을 위한 더 나은 상태로 준비시켜야 한다. 당연히 그 목적은 전쟁을 피하는 데 있다. 31-2)


◆ CHAPTER 2 달러의 매력과 균열: 기축통화의 힘과 한계


달러의 진정한 특수성은 ‘거래 지배력’에 있다. 국제 차입·대출의 명시 통화가 달러이고, 무역 청구서도 달러로 작성된다. 미국 내 유통 화폐 가치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100달러 지폐 중 약 3분의 2가 해외 보유라는 사실은 ‘대마불사’에 가까운 저변 수요를 보여준다. 왜 이렇게 많은 외국인들과 국가경제가 미 달러화를 사용할까? 찰스 킨들버거(Charles Kindleberger)는 미 달러화의 역할이 영어의 국제 공통어 역할과 유사하다고 설명한다. 많은 이가 쓰기 때문에 더 쓰게 되는 네트워크 외부성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언어·통화의 특별한 역할은 주로 민간의 선택에 기초한다는 사실이다. 누가 강제해서 쓰는 것이 아니다. 관세 위협으로 달러 사용을 강제할 수 있다는 발상은 과대망상을 넘어 정책 오류다. 오히려 상시적 처벌 관세는 달러의 명성과 신뢰를 훼손할 수 있다. 미국의 경제·외교적 영향력은 ‘대체로 이성적이고 책임 있는 국가’라는 평판에서 나온다. 그 평판이 흔들리면 달러의 네트워크 기반도 약화된다. 58)


달러화는 사실상 공짜 돈이자 일종의 무이자 대출(making an interest-free loan to us)이다. 미국 달러화를 사용한다고 해서 사용료를 받지는 않기 때문이다. 해외에 얼마나 많은 달러가 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적어도 50조 달러 이상을 해외에서 보유중이라면 이는 곧 무이자 대출 규모와 같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해외가 미국에 달러로 대출을 해줄 때 미국 재무부 채권을 매입하든 미국 내 자산에 투자하든 달러로 거래된다는 이유만으로 전통적으로 낮은 이자율이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또한 전 세계가 미국 금융 시스템을 활용하기 때문에 미국의 차입 비용과 이자율은 약 0.5~1% 낮아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미국 주택 매입자의 대출 금리가 타국보다 낮게 형성될 수 있다. 그러나 달러 수요가 공급보다 많아 더 많은 차입이 필요하다면, 당연히 시장금리에 따라 높은 금리를 지불해야 한다. 따라서 미국이 0.5~1%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차이이자 특혜다. 61)


“전 세계가 달러를 광범위하게 사용함으로써, 미국이 수입하는 것은 싸지고 수출하는 것은 비싸진다”는 주장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구조적 무역수지 및 경상수지 적자를 지적할 때 즐겨 쓰는 논리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투자 자산시장과 소비재 시장을 혼동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미국에서 더 저렴한 것은 달러 강세 때문이 아니라, 미국 시장이 더 완전경쟁에 가깝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산업 기반과 제조업 일자리를 잃은 것은 금융 자금이 대규모로 유입되어 달러 가치가 과대평가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중국은 자국 통화를 낮게 유지해 미국 수출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값싼 수입품으로 미국 시장을 잠식했다는 주장을 덧붙인다. 요약하자면, 달러의 지배적 위치가 미국 제조업을 약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주장은 근거가 빈약하거나 시대착오적인 경우가 많다. 결국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간단히 말해 설득력이 부족하다. 63)


지금 달러를 지탱하는 것은 연준(Fed), 즉 미국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을 급격히 높이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실제로는 평균 2% 정도의 인플레이션을 목표로 삼고 있다. 미국 소비자 물가가 2% 수준에서 안정되면, 세계 각국의 통화정책도 이에 연동되어 안정적으로 운용된다는 경험이 지난 30년간 축적되었다. 이를 위해 동원된 수단이 미국 재무성 채권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스티븐 미누신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인 듯 보이는 ‘100년 만기 0% 국채 매입’ 구상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미국 달러화의 기축통화 지위를, 미국과 거래하는 모든 국가경제가 함께 보장하라는 요구였다. 인류 문명사에서 독립적인 중앙은행의 설립은 매우 중요한 발명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통령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이자율을 낮추는 것이다. 조 바이든도, 오바마도 모두 금리를 낮추길 원했다. 투자를 늘리고, 주택을 구입하고, 은행 대출을 쉽게 만들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 얘기는 결국 트럼프 시대를 향해 가고 있다. 68)


미국은, 더 정확히 말하면 트럼프 대통령은, 금융 시스템을 점점 더 노골적이고 공격적으로 무기화하고 있다. 속되게 표현하면 “빚은 못 갚으니 채권자가 알아서 해라, 미국은 책임이 없다”는 태도다.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과 달리 미국은 강력한 카드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주 좋은 상태”에 있다고 믿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형편없다”고 고백하는 것 역시 위험하다. 이 모순된 상황에서 찾을 수 있는 중간점은, ‘달러는 아직 강하지만 미국 경제는 불확실하다’는 해석일 것이다. 달러가 강하다는 것은 여전히 세계경제가 달러 지배력의 우산 아래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 독점적 지위가 오히려 미국의 악화된 경제와 불확실한 달러의 미래를 드러내는 역설이 되기도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빌리면, “달러는 약해야 하지만 동시에 기축통화로 절대 흔들려선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달러가 동시에 약하고 강하길 원한다. 69-70)


가능한 시나리오는 둘이다. ‘디폴트’는 아니다. 하나는 인플레이션이다. 인플레이션은 채무자에게 유리하다. 이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려면 트럼프가 부채의 실질가치를 낮출 정도로 통화 확대를 지지하는 인물을 연준 의장에 임명해야 한다. 인플레이션 시나리오를 현실화하려면 트럼프가 쓸 수 있는 또 다른 카드가 있다. 부채를 민간에 떠넘기는 ‘금융 억압’이다. 이런 조치에는 장단점이 있다. 금리가 급등하면 정부 이자비용이 폭증하고 달러 가치가 급락한다. 달러 가치가 하락하면 미국은 앞으로 부채에 더 높은 이자를 내야 한다. 여전히 ‘주요 통화 1위’ 지위는 유지하더라도, 달러에 대한 도전이 잦아지면 국가 안보에도 영향을 준다. 제재 수단의 효능이 약해지고, 정보 수집 능력에도 타격이 간다. 변화는 하룻밤 사이에 오지 않는다. 인플레이션 위기는 점진적이고, 달러의 위상 하락도 느린 불꽃처럼 진행된다. 달러 위상이 떨어지는 국면에서 팬데믹이나 또 다른 위기가 닥치면, 그때서야 사람들은 변화를 실감할 것이다. 73-4)


◆ CHAPTER 3 달러 패권의 흔들림: 종말인가, 전환인가


21세기 독재자들은 대개 선거를 통해 권력을 얻는다. 과거 카스트로나 피노체트가 야당을 폭력으로 억압했다면, 오늘날 독재자들은 공공기관을 정치 무기로 바꾸고 법 집행·세무·규제 기관을 동원해 반대자를 압박한다. 이를 ‘경쟁적 권위주의(competitive authoritarianism)’라고 한다. 형식상 정당이 선거에 참여하지만, 집권자의 조직적 권력 남용으로 야당에게 불리한 환경이 조성되는 체제다. 헝가리, 인도, 세르비아, 터키 등이 이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베네수엘라 차베스 집권기에도 같은 양상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떤가? 권위주의로 넘어섰는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간단한 기준은 ‘정부에 반대하는 비용’이다. 정부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데 앞장선 시민들이 ‘정부로부터 보복을 당할 수 있다’는 현실적 두려움 때문에 한 번 더 주저해야 하는 순간, 그 국가는 이미 민주주의 국가라 부르기 어렵다. 이 기준에 따르면 미국은 이미 ‘경쟁적 권위주의’로 넘어갔다고 할 수 있다. 96-7)


문제는 ‘이 체제를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연준을 공격하며 금리 인하를 요구하고, 결국 미국 경제의 모든 열쇠를 쥐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가족들이 무차별적으로 뛰어든 암호화폐 사업과 해외 순방에서의 이해상충적 사업 추진은 ‘미국판 마르코스’를 연상케 한다. 이는 미국 경제와 달러 패권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키고, 글로벌 패권 몰락의 전조가 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미국 사회가 이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미온적인 대응만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치인·CEO·로펌 파트너·언론 편집장·대학 총장 등은 민주주의 수호를 원하면서도, 정부 위협 앞에 회유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들은 “3년만 버티자”는 자기보호 전략에 몰두하며, 주주·예산·규제·소송 위험을 피하려 한다. 그러나 이런 작은 굴복은 권위주의를 강화하는 ‘유화정책(appeasement)’의 치명적 논리다. 권력은 단순히 힘으로만 강화되지 않는다. 저항할 수 있는 사람들이 침묵하거나 타협할 때 강화된다. 99-100)


채권시장은 경제 전망과 정책 환경에 대한 불확실성을 반영한다. 보통 장기 금리가 높은 이유는 중장기 성장 가능성을 가정하기 때문이지만, 이번 경우는 다르다. 관세로 인한 인플레이션 우려와 미국 채권 매도세가 겹치면서, 가격은 떨어지고 그 역수인 금리는 상승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채권의 ‘안전자산’ 지위가 흔들리면, 글로벌 투자자들은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하게 된다. 미 연준이 트럼프의 요구를 받아들여 한 번에 1%p 금리를 내린다 해도,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투자자는 없을 수 있다. 재정적자가 GDP 대비 120%를 넘어서면서, 채권 이자율 급등이 다시 이자 비용 증가로 이어지고, 이는 모기지 금리 상승으로 연결되어 기업과 가계에 큰 부담을 준다. 이를 두고 미국 자산 수요 감소와 매우 높은 적자를 고착시키는 재정 절차의 경직성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경직성이 자산시장을 불안하게 만든다. 커져가는 부채 부담은 채권 투자자들의 불안을 자극하며, 미국의 부채 유지 비용을 끝없이 상승시킨다. 105, 108)


신흥국 투자자들은 이 상황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수익률 상승 → 이자 비용 증가 → 부채 확대 → 통화 완화 정책 의존’이라는 전형적인 금리 악순환 때문이다. 이는 결국 물가 상승과 금리 인상, 그리고 채권 수익률 상승이 반복되는 ‘신흥시장 함정’이다. 지금 미국(그리고 일본 역시)은 그 함정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일본도 2025년 9월 기준 장기 국채 수익률이 급등했다. 30년물은 3.23%로 사상 최고치, 20년물은 2.69%로 25년 만의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일본의 장기 금리 상승은 경제 회복 기대라는 긍정적 신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GDP 대비 부채 규모 260%라는 현실 속에서 장기 금리가 더 오르면 일본은행이 감당해야 할 이자 부담이 급증한다. 이 때문에 미·일 국채 수익률 격차가 축소되면 일본 투자자들은 자금을 미국에서 빼내 본국으로 돌릴 수 있다. 그 결과 ‘미국 채권 가격 하락 → 금리 재상승 → 또다시 악순환’이 이어져 일본 경제에도 위기로 다가올 수 있다. 109)


미국의 부채와 인플레이션에도 불구하고 달러는 여전히 강하다. 흥미롭게도 트럼프 행정부 내 일부 인사들은 달러 약세를 반길 수도 있다. 부통령 J.D. 밴스는 외국인의 미국 증권 대량 보유가 달러 가치를 인위적으로 높여 제조업에 피해를 줬다고 주장했다. 백악관 경제자문위원 스티븐 마이런도 해외 보유 미 국채에 세금을 부과하는 아이디어를 담은 보고서를 제출했다. 미국의 경상·무역적자는 상대국의 대미 흑자가 미 국채 매수로 ‘재활용’되는 구조다. 따라서 달러 표시 국채 매입을 막으면, 흑자국의 대미 흑자를 축소하거나 아예 실현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는 논리다. 전 세계 중앙은행가들을 이 정도로 자극한 단일 문서는 드물다. 일부는 미 재무부의 제재 역량을 경계하고, 다른 이들은 ‘모든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기’ 차원의 분산을 택했다. 달러의 전 세계 외환보유 비중은 2001년 73%에서 현재 58%로 하락했다. 이러한 다변화는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가능성이 크다. 115-6)


◆ CHAPTER 4 금과 암호화폐: 달러를 대체할 수 있을까


1991년 구 소련의 몰락 이후, 미국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 극적인 군사적 우위를 가지고 있지만, 군사적 우위의 지속과 경제적 패권의 약화가 미국의 절제(자제) 능력을 시험할 것이다. 그 시험은 네 가지 주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첫째, 동맹을 압박해 단기적 이익을 챙기려는 유혹이다. 미국의 동맹국들은 여러 면에서 워싱턴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대가를 과도하게 요구하려는 충동은 늘 존재한다. 워싱턴이 이득을 얻기 위해 힘을 전혀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미국이 과도한 이익 추구로 권력을 남용하면 리더십과 질서의 정당성이 훼손된다. 둘째, 중국 같은 국가가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할 때 미국은 과잉 반응할 유혹을 받을 것이다. 과거 떠오른 강대국(독일·일본·소련)은 대체로 경제보다 군사력이 앞섰다. 반면 중국은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 군사력보다 경제력이 더 클 것이다. 이는 국제질서에는 비교적 안정적 파급을 줄 수 있지만, 중국이 경제적 방식의 도전을 시도한다는 뜻이며, 신중한 관리가 필요하다. 142)


셋째, 미국은 핵심 이익이 직접 관련되지 않은 사안에 개입하려는 유혹을 항상 겪는다. 냉전기 미국의 베트남, 소련의 아프가니스탄이 그 예다. 오늘 미국에는 동등한 경쟁자가 부재하지만, 이 유혹은 여전하다. 마지막으로, 미국은 핵심 이익이 걸린 상황에서도 지나치게 공격적인 군사 태도를 피해야 한다. 예컨대 베이징의 A2/AD(접근거부/지역거부) 역량 강화로 중국 인근에서의 미 군사작전 비용·위험이 커졌다. 워싱턴의 대응은 전략목표의 재정의에 달려 있다. 1990년대와 같은 완전한 군사적 자유를 되찾으려 들면 충돌 위험이 커진다. 어떤 접근이든, 미국의 글로벌 이익에서 중요한 것은 지정학적 영토 그 자체가 아니라, 전략·전술이 더 넓은 질서에 미치는 파급이다. 중국의 전략은 분명하다. 굳이 무력을 동원해 미국을 쓰러뜨릴 필요는 없다. 스포츠에서도 ‘상대 실수 유도’가 가장 효율적 전략일 수 있다. 중국은 현 상태를 정면 도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안다. 미국도 중국도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할 때다. 142-3)


미국 달러 가치가 만약 급락해 기축통화 지위가 실질적으로 약화된다면, 금은 국제 부채 결제의 보조 단위이자 가치 저장 수단으로 존재감을 더 키울 수 있다. 중앙은행들이 법정통화와의 직접 태환을 부활시키지는 않더라도, 외환보유고의 통화 구성을 다변화하면서 금 비중을 높이는 흐름은 패러다임 전환기에 대비한 방어적 선택으로 해석된다. 법정통화 기반 준비자산이 인플레이션으로 실질가치가 줄어들 때, 금은 중앙은행 대차대조표의 완충재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화폐 신뢰가 흔들릴 때 소비와 교환이 앞당겨지며 물가 급등을 자극해 위기를 심화시키는 자기강화 메커니즘이 관찰되지만, 이것이 항상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중앙은행들이 금 매입을 확대하고 보유 금을 역내 반입하는 사례는, 제재·지정학·제도 신뢰 리스크에 대한 포트폴리오 헤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에 더해 완전한 ‘탈달러’는 대체 결제 인프라·유동성·법제 등에서 높은 진입장벽을 마주한다. 148)


그렇다면 암호화폐는 달러를 대체하는 기축통화로 기능할 수 있을까? 결론은 ‘아니다’. 다만 보조적 기능을 일부 수행할 여지는 있다. 게다가 비트코인의 가격 불안정성은 일상적 화폐로서의 기능을 사실상 무력화한다. 또한 비트코인이 완전한 익명성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미국 정부가 콜로니얼 파이프라인 랜섬웨어 사건에서 해커 조직 다크사이드가 받은 비트코인의 일부를 추적·회수한 사례는, 비트코인 거래가 완전히 추적 불가능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결국 비트코인은 본래의 목표에는 실패한 채 투기성 자산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이는 아이러니하다. 비트코인은 내재적 가치가 없고, 어떤 실물 자산에도 연동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지자들끼리 한정판 굿즈를 사고파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지자들은 금처럼 희소성에 의미를 부여하며, 발행 한도가 2,100만 개라는 점을 강조할 뿐이다. 이는 명품의 ‘한정판(limited edition)’과 같은 성격이다. 152-4)


전략적 비트코인 비축이란 미국이 대량의 비트코인을 매입해 보유하는 것이다. 비트코인 정책연구소(BPI)는 미국이 비트코인을 채택하면 달러 패권을 약화시키려는 중국과 러시아보다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두 국가는 금에 집중하고 있지만, 미국은 디지털 금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트코인의 장점은 공급량이 한정되어 있어 인플레이션 압력에 쉽게 노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총 발행량은 2,100만 개로 제한되어 있으며, 이미 약 1,990만 개가 채굴된 상태다. 이론상 수요가 유지된다면 장기적으로 가격 상승이 가능하다. 그러나 가격이 급등하면 인플레이션이나 독점적 가격 착취로 이어질 수 있으며, 무차별적인 시장 교란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만약 미국이 이를 달러 대체 수단이나 최소한 달러 방어 수단으로 삼는다면, 가장 큰 위험은 변동성 그 자체다. 화폐의 변동성은 금리·환율로 어느 정도 조정이 가능하지만, 기초적 펀더멘털이 부재한 비트코인은 공급과 투자자 심리에 따라 가격이 움직인다. 157)


스테이블 코인의 주요 위험 요인들을 요약하면 다음의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금리 위험(Interest Rate Risk)으로, 채권 가격은 금리와 반대로 움직인다. 스테이블코인이 매일 채권을 사고판다면, 단기 금리 변동에도 일부 평가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 둘째, 유동성 위험(Liquidity Risk)이 잠재한다. 스테이블코인이 하루 단위로 대량 국채를 거래할 경우, 유동성 부족 시 원하는 가격에 매도하지 못할 수 있다. 셋째, 재투자 위험(Reinvestment Risk)이 존재한다. 만기 채권이 재투자될 때, 금리가 이전보다 낮으면 예상 수익률이 감소한다. 넷째, 신용 및 제도적 위험(Credit / Regulatory Risk)이다. 미국 국채는 사실상 무디스, S&P AAA 등급으로 초우량이다. 그러나 극단적인 시나리오(예: 정부 채무 상환 지연, 미국 디폴트 가능성)는 이론상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운영 및 시스템 위험이 존재한다. 매일 채권을 사고파는 구조에서는 거래 시스템 오류, 가격 산정 오류, 스마트 계약 오류 등이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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