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전복자들 - 근대 과학혁명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박재용 지음 / 사월의책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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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 


1장 그리스 자연철학 


# 이원론(현상계와 구분되는 본질적인 세계가 있다) : 아낙시만드로스,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 일원론(우리가 감각하는 현상계가 실재 세계이다) : 탈레스, 아낙시메네스, 헤라클레이토스, 데모크리토스, 엠페도클레스 


"데미우르고스는 선하고 지혜로운 존재이기에 가능한 한 이데아를 닮은 완벽한 우주를 만들고자 합니다. 하지만 완전무결한 창조는 불가능했고 변화무쌍하고 불완전한 현상계가 만들어지게 되었죠. 재료 즉 '질료'(코라, khôra)의 한계 때문이라 합니다. 여기서 질료란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는 아니고, 공간 그 자체 혹은 받아들임(receptacle)이라 볼 수 있습니다." "현상계의 창조가 불완전한 또 하나의 이유는 '필연'(anánkê)이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은 데미우르고스의 이성적이고 목적론적인 활동 외에도 무작위적이고 비이성적인 힘, 즉 필연이 창조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필연은 논리적 필연성과 같은 의미보다는 강제성이나 어찌할 수 없는 숙명에 가깝습니다. 이 필연은 우주의 질서에 저항하는 비합리적인 요소로, 플라톤이 완벽한 질서와 불완전한 현실 사이의 긴장 관계를 설명하려고 도입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죠. 이 필연이 창조의 결과를 왜곡시키고 불완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38)


2장 아리스토텔레스가 본 세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우주는 하나이자 둘이었습니다. 달보다 위쪽에 있는 천상계(celestial world)와 그 아래쪽의 지상계-월하계(terrestrial world)로 나뉘었지요. 그에 따르면 지상계는 물, 불, 흙, 공기라는 네 원소로 이루어진 곳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본이 되는 원소가 네 가지나 된다는 것은 각각의 원소가 어딘가 부족한 불완전한 요소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렇게 불완전한 속성을 가진 원소로 구성된 지상계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지요. 반대로 천상계는 완전한 원소인 에테르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에테르는 지상의 4원소가 가진 모든 속성을 스스로 가진 존재로 완전한 질료입니다. 따라서 이런 질료에 의해 구성된 천상계는 완전한 모습을 가집니다. 에테르(Aither)는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의 핵심 개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테르를 '제5원소' 또는 '첫 번째 물질'(Prime Matter)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에테르가 지상계를 구성하는 4원소와는 전혀 다른 속성을 가진 실체임을 의미합니다."(67-8)


"『천체에 관하여』(De Caelo) 제1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천체의 운동은 균일하고 끊임없는 원운동이다. 그 이유는 첫 번째 물질(에테르)의 본성이 완전무결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첫 번째 천체'란 항성천구, 즉 우주의 가장 바깥 경계를 이루는 천구를 가리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항성천구의 원운동이 다른 모든 천체의 운동을 규정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천체들은 모두 항성천구에 고정되어 함께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천체의 일차적 운동은 모두 완전한 원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행성들의 운동에서 나타나는 불규칙성을 설명하기 위해 제한적으로 '부차적 운동'을 도입하기도 합니다. 이는 기본적인 원운동에 추가되는 보조적인 운동으로, 행성마다 고유한 속도와 방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차적 운동 역시 근본적으로는 원운동의 속성을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합니다."(69)


"하지만 불완전한 원소로 이루어진 지상계에서는 원운동이 불가합니다. 물과 흙의 속성을 많이 가진 물질은 아래로 내려가는 낙하 운동을 하고, 불과 공기의 속성을 가진 물질은 위로 올라가는 상승운동을 합니다. 이런 수직운동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은 불완전한 것이죠." "우주의 구조에 대해서는 지구가 중심에 위치하고, 그 주위를 여러 천체가 감싸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중심에서 정지해 있는 것이 바로 지구이기 때문이다. (중략) 지구는 물로 둘러싸여 있고, 물은 공기로, 공기는 불로, 그리고 이들은 같은 방식으로 천체들에 둘러싸여 있다.〉 (『천체론』, 제2권, 제4장) 이는 지구중심적 우주관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우주의 중심에 있는 지구를 구성하는 것은 무거운 원소인 땅(흙)입니다. 지구 주위에는 물, 공기, 불이 층을 이루며 둘러싸고 있습니다. 물은 땅 바로 위에, 공기는 물 위에, 불은 공기 위에 위치합니다. 지상계를 넘어서면 천상계가 시작됩니다."(71-2)


# 『천체에 관하여』(De Caelo)가 원제목이며, 간단히 『천체론』이라고 부른다.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창조주는 관조의 신이었습니다. 올림포스의 신들은 그저 미신에 지나지 않았지요. 그의 창조주는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전 우주의 운동의 제1원인이자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는 부동의 동자는 완벽히 아름답고 불가분하며 완벽한 '관조'만을 '관조'하는 자라고 하지요. 즉 이 세상이 자신이 창조한 원리대로 움직이도록 하되, 개입하지는 않는 자입니다. 그러니 '기적'은 당치도 않는 행위지요. 창조자가 스스로 정한 원칙을 깨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기적은 원격으로 작용합니다. 제우스가 올림포스 산에서 벼락을 내리치듯이 말이지요. 그로서는 접촉 원리를 벗어난 일이 실제 세상에서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주장은 훗날 중세에서 르네승스로 넘어가는 시기 유럽에서 대학과 수도원 사이의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80)


# 접촉 원리 : 지상계에서 운동하는 물체의 힘은 접촉을 통해서만 전달된다는 원리.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진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3장 지구중심설 대 태양중심설 


"문명세계 최초로 지구중심설(geocentrism)을 부정한 이들은 피타고라스학파입니다. 이들은 거의 태양중심설(heliocentrism)로 볼 만한 생각을 가진 최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우주의 중심에 거대한 불타는 구, 이른바 '헤스티아의 불'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헤스티아는 그리스 신화에서 가정과 화덕의 불을 관장하는 여신으로, 불의 수호자이자 가정의 평화를 상징하는 존재였죠. 그들이 우주의 중심에 자리한 불에 헤스티아의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그들이 이 불을 단순한 물리적 실체 이상의 것, 즉 우주 만물을 품고 길러내는 근원이자 신성한 존재로 여겼음을 시사합니다." "사실 피타고라스학파에게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당위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천체들의 역행운동처럼 당대의 천문학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웠던 문제를 해결하고, 그들이 맹신했던 기하학적 원리와 수의 조화를 우주에 투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리라 짐작합니다."(98-100)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는 말 그대로 천문학자로서, 피타고라스학파의 신비주의적 경향과는 다른 과학적 견지에서 지구중심설 대신 태양중심설을 주장합니다." "아리스타르코스의 주장에 대해 당시 다른 천문학자들과 자연철학자들 대다수는 반대합니다. 반대의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면 지구 위에 있는 우리는 왜 그 힘(원심력)을 느낄 수 없는가라는 점입니다(지구 공전을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지구가 공전하거나 자전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원심력이 중력에 비해 워낙 작아서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별의 연주시차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연주시차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유는 둘 중 하나입니다. 별이 너무 멀어서 시차 자체가 너무 작아 볼 수 없다는 것이 하나이고,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아리스타르코스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 지구가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요."(101-5)


# 별의 연주시차(年周視差) :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면 지구는 반년마다 반대쪽 끝에 도달한다. 두 지점에서 별을 보았을 때 우리 눈에 보이는 각도의 차이를 연주시차라고 한다.


"히파르코스는 기원전 2세기경에 로도스 섬에 천문대를 세우고 그곳에서 주로 활동한 그리스 천문학자로, 천체 관측과 수학적 계산을 통해 천문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는 특히 별의 위치와 밝기를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삼각법과 구면삼각법을 활용하여 천체의 운동을 정밀하게 계산하는 등 고대 천문학을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여러 업적은 당시 지중해 사람들에게 대단히 인상적이었지요. 후에 프톨레마이오스가 쓴 『알마게스트』('천문학 집대성') 내용의 거의 삼분의 일 정도가 히파르코스가 발견하고 정리한 내용들로 채워질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우주의 중심에 대한 히파르코스의 입장이 대단히 아리송합니다. 아리스타르코스의 제자로 알려졌지만 딱히 태양중심설을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지구중심설을 확고하게 주장한 것도 아닙니다(스승의 주장이 당대의 모든 지식인들에게 외면당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정해 볼 뿐입니다)."(110, 113)


"프톨레마이오스는 역행운동과 같은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주전원(周轉圓, epicycle), 이심(離心, eccentric point) 등의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각 행성은 지구를 중심으로 한 큰 원(주원)을 따라 공전하는 것이 아니라, 주원 위의 한 점을 중심으로 하는 작은 원(주전원)을 따라 공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전원의 중심이 주원을 따라 움직이는 거죠. 이심은 행성 궤도(주원)의 중심이 지구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는 개념입니다. 이는 행성의 속도가 일정하지 않은 걸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문제는 이렇게 해도 행성 궤도의 실제 관측결과와 잘 맞지 않았다는 거죠. 그래서 그는 다시 대심(對心, Equant)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대심은 이심을 중심으로 놓았을 때 지구 반대편에 있는 장소인데, 행성의 주전원이 이 점을 중심으로 놓았을 때 일정한 속도로 원운동을 한다고 가정한 거죠. 그의 우주 모델은 매우 복잡하지만, 당시 이론 중에서는 관측 결과와 가장 닮았기에 널리 받아들여졌습니다."(116-8)


제2부 소멸, 복권, 균열 


4장 헬레니즘 시대 


"헤르메스주의(Hermeticism)는 그리스에서 상업, 여행, 전령의 신이자 정보와 의미를 관장하던 신인 헤르메스가 이집트의 신 토트(Thoth)와 동일시되면서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라는 신비로운 인물을 탄생시킨 데서 비롯됩니다. 점성술, 연금술, 마법의 세 가지 능력을 가진 이 반신적 인물에 대한 종교철학적 숭배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널리 유행하게 되었던 거죠." "특히 그노시스주의는 헤르메스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영지주의'(靈智主義)라고 번역되는 이 사상은 기원후 1~2세기경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 유행한 종교 사상입니다." "헤르메스주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내놓습니다. 인간이 자연에 개입하여 이를 변화시키고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기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현하는 겁니다. 헤르메스주의는 인간을 신적 본성을 지닌 존재로서, 자연의 신비를 깨우치고 이를 자신의 의지로 다스릴 수 있는 미시적 우주(microcosmos)로 여깁니다."(126-8)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수용 발전시켰는데, 그에 따르면 우주는 원자(atom)와 공허(void)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원자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최소 단위의 물질 입자로, 다양한 모양과 크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원자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그것들의 결합과 분리에 의해 모든 사물이 생성되고 소멸한다고 보았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원자의 운동에 대해 특히 주목했는데, 그는 원자들이 자유 낙하하듯 수직으로 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아래는 우주의 중심을 뜻합니다. 이때 원자들은 모두 동일한 속도로 평행하게 떨어진다고 합니다. 에피쿠로스는 여기에 중요 개념을 하나 추가하는데, 바로 '클리나멘'(clinamen, 라틴어로 기울어짐, 편향, 휘어짐)입니다. 이는 원자가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미세하게 궤도를 이탈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때문에 발생하는 원자 충돌은 상당히 우연한 경향이 있어 결정론적 우주관에서 벗어나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데에도 사용되었습니다."(129-30)


# 에피쿠로스는 무한한 우주 공간 속에 무수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일종의 다중우주론도 제시했다.


"'판단중지'(에포케, epoche)로 잘 알려진 피론주의는 기원전 4~3세기경 엘리스의 피론(Pyrrhon)에 의해 체계화된 회의주의 철학입니다. 피론은 감각과 이성으로는 사물의 참된 본질을 알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꿀이 어떤 이에게는 달게 느껴지지만 다른 이에게는 쓰게 느껴지는 것처럼, 감각은 주관적이며 상황 의존적이라는 것이죠. 또한 이성으로도 사물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운데, 같은 대상에 대해 철학자들 사이에서조차 상반된 주장이 난무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진리라고 여기는 것들도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는 게 피론의 생각입니다." "피론은 여기서 더 나아가 판단중지 즉 '에포케'야말로 인간이 마음의 평정을 얻는 지름길이라 역설했습니다. 피론에게 에포케는 단순한 회의가 아니라 평온한 삶을 위한 실천적 방법이었던 거죠.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을 유보함으로써 우리는 독단적 믿음에서 벗어나 진정한 마음의 평화인 아타락시아(ataraxia)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핵심적 윤리관이었습니다."(133-4)


5장 이슬람으로 간 아리스토텔레스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헬레니즘 수학은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 아폴로니우스 등의 업적으로 대표됩니다. 유클리드의 『원론』은 기하학의 체계를 세웠고, 아르키메데스는 원주율 계산과 적분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아폴로니우스는 원뿔 곡선 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인도 수학자들은 십진법과 0의 개념을 발전시켰고, 음수를 도입했으며, 방정식 해법에서도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이슬람 수학자들은 이 두 전통을 수용하고 종합하여 새로운 발전을 이룹니다." "이슬람 학자들은 관측천문학 분야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들은 천체 관측을 위한 다양한 기기를 발명하고 개선했을 뿐만 아니라, 정밀한 관측 기록을 남기고 새로운 천문 현상을 발견합니다." "이슬람 천문학자들은 관측 결과와 프톨레마이오스 이론 사이의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해 새로운 이론적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물론 지구중심설을 유지한 상태로는 근본적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죠."(147, 150-1)


"아리스토텔레스는 투사체가 계속 움직이는 이유를 주변 공기의 작용으로 설명했지만, 이븐 시나(Ibn Sina)는 이러한 설명이 논리적으로 모순된다고 봅니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서 공기는 투사체를 앞으로 밀어주는 동시에 저항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븐 시나는 같은 매질이 이렇게 상반된 작용을 동시에 한다는 것이 모순된다고 봅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대로라면 투사체의 속도는 급격히 감소해야 하는데, 실제 관찰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이븐 바자(Ibn Bajjah)는 물체의 낙하 운동을 연구하여, 운동의 속도와 시간, 거리 사이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분석합니다. 그는 낙하하는 물체의 속도가 시간에 따라 변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일정 속도 낙하 이론과 대비되는 중요한 관찰입니다. 이븐 바자는 비록 정확한 수학적 공식을 도출하지는 못했지만, 낙하 거리가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점을 암시하는 분석을 시도합니다."(153, 156)


"플라톤과 유클리드가 주장한 '방출설'은 눈에서 광선이 나와 물체에 닿아 시각이 형성된다고 봅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체의 '형상'이 매질을 통해 눈으로 전달된다고 주장합니다. 알 하이삼은 이러한 기존 이론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물체에서 반사된 빛이 눈으로 들어와 시각을 일으킨다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합니다. 그는 여러 가지 관찰과 논리적 추론을 통해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합니다." "알 하이삼의 광선유입설은 빛을 독립적인 물리적 실체로 보고, 눈을 빛을 수용하는 정교한 광학 기관으로 인식하게 합니다. 이는 이후 렌즈와 망원경 발명 등 광학 기술 발전의 토대가 됩니다. 그의 책 『광학 서설』은 13세기에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에 전해졌고, 로저 베이컨, 비텔로, 케플러 등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칩니다. 당시에는 『광학 서설』이 일종의 교과서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또 이 책은 원근법 연구에도 영향을 주어 르네상스 미술의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157-9)


6장 아리스토텔레스의 복권에서 균열까지 


"12세기부터 아랍어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이 들어오면서 유럽 지성계는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특히 대학들부터 먼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수업의 중심으로 삼았죠." "왜 대학들은 교회와 여러 번의 갈등을 겪으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와 수업의 중심으로 삼게 된 걸까요? 우선,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논리학, 자연학, 형이상학, 윤리학, 정치학 등 다양한 분야를 모두 다루면서도 서로 잘 연결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또 개념을 명확하게 정의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기에 쉽게 말해서 강의용 교재로는 그만이었죠. 특히 『논리학』이 그러합니다. 대학 교육에 딱 맞았습니다. 이런 이유에다 시간이 지나면서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대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기독교 신학을 융합한 스콜라철학을 만들고 신학의 주류가 되면서, 신학을 공부할 때도 아리스토텔레스가 필수가 된 점도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배우는 건 신학 연구의 기초를 다지는 일이었죠."(178-80)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업의 중심이 되면서 중요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먼저, 학문이 더 세속적으로 변합니다. 이전 수도원 학교나 초기 대학에서는 대부분 신학이 중심이자 대부분이었죠. 이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도 커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의 이성적 능력을 강조하고, 논리로 학문을 탐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니까요. 이런 태도 때문에 대학에서도 계시나 권위에 의존하던 방식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철학도 독립했지요. 원래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고 불리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들어오면서 철학이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 자리 잡습니다." "마지막으로, 교육 방식도 바뀝니다. 이전에는 성경과 교부들의 책을 암기하고 반복하는 방식과 강의가 주된 교육 방법이었습니다. 여기에다 글에 대한 주석을 학습하는 것이 추가되었죠. 하지만 이제 책을 같이 읽고 해석하는 강독과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토론, 그리고 논리적 분석과 비판적 사고가 주된 교육 방법이 됩니다."(180-1)


"르네상스가 본격화하면서 일어난 흥미로운 현상 중 하나는 중세의 전성기 혹은 번역 르네상스 시기 이래로 유럽 지성계를 지배하던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먼저 그리스어 원전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학자들은 중세 시대에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원전 사이의 차이를 발견합니다. 이는 기존 해석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켰죠. 인문주의 운동의 확산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4세기 페트라르카를 시작으로, 15세기의 로렌초 발라, 그리고 16세기 초의 에라스무스는 고전 문헌에 대한 비판적 독해와 수사학적 분석을 강조했습니다." "16세기 들어 항해술, 광산업, 농업 등 실제 경험에 기초한 지식이 중요해지면서, 순수하게 이론적인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하죠. 17세기에 이르러 갈릴레오 갈릴레이, 프랜시스 베이컨 등이 등장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과 새로운 과학적 방법론의 제시가 이루어집니다."(184-5)


제3부 과학혁명 


7장 새로운 철학, 새로운 방법론 


"프랜시스 베이컨이 보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설명하기보다는 선험적 관념에 끼워 맞추는 오류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는 중세 스콜라철학이 빠졌던 함정이기도 했습니다. 경험과 실험보다는 권위자의 텍스트에 의존하고, 자연의 모습보다는 신의 섭리를 입증하는 데 골몰했던 것입니다. 반면 베이컨은 물체나 생명체의 작동 방식을 꼼꼼히 관찰하고 실험하며 자연의 질서와 법칙을 귀납적으로 도출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자연의 '목적'이 아니라 '기제'(mechanism)를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근대 실험과학의 방법론적 기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베이컨의 『노붐 오르가눔』(Novum Organum)은 제목부터가 아리스토텔레스를 겨냥한 일종의 도발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작들을 『오르가논』이라 부르는데, 여기에 '새로운'이란 뜻의 '노붐'을 붙인 거죠. 베이컨은 이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사고와 연역법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206-7)


"데카르트는 자연을 하나의 기계로 봅니다. 〈이 우주 즉 물질적 실체를 하나의 기계로 간주했다〉는 그의 말은 당시 떠오르던 기계론적 세계관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것입니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데카르트는 체계적인 방법론을 개발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그가 창안한 해석기하학입니다. 해석기하학은 기하학적 문제를 대수학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의 기계론적 자연관은 당시 과학자들에게 하나의 연구 방향을 제시합니다. 자연을 수학적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은 갈릴레오, 뉴턴 등 동시대 과학자들의 연구와 맥을 같이 합니다.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은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우주관과 일정 부분 연관성을 가집니다. 수학에서는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이 주목할 만한 발전을 가져옵니다. 기하학과 대수학을 연결함으로써 그는 새로운 수학적 도구를 만들어내고, 이는 후에 미적분학 발전의 한 토대가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좌표계도 데카르트가 제안한 것입니다."(214-6)


"스피노자에 따르면,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하며, 이 실체가 바로 신 또는 자연입니다. 이는 데카르트가 정신과 물질을 별개의 실체로 본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스피노자는 정신과 물질을 하나의 실체의 서로 다른 속성으로 파악합니다." "그의 일원론적 세계관은 자연의 통일성과 법칙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과학자들이 자연현상 이면의 보편적 원리를 탐구하는 데 중요한 철학적 기반을 제공합니다. 특히 스피노자의 결정론적 세계관에 따르면 모든 사건은 필연적인 인과 관계의 연쇄 속에서 발생합니다. 이는 자연현상을 인과적으로 설명하려는 과학적 접근방식과 맥을 같이 합니다." "스피노자의 합리주의적 윤리학 또한 주목할 만합니다. 그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 자연의 필연적 질서를 이해함으로써 진정한 자유와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봅니다. 결론적으로, 스피노자의 사상은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비판적 계승이자 독자적인 발전으로 볼 수 있습니다."(216-7)


8장 천문학 혁명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복잡성과 비일관성에 불만이 많았던 코페르니쿠스는 이를 해결하려고 새로운 체계를 고안합니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를 완전히 뜯어고치지는 않습니다. 천구도 그대로 있고, 행성과 지구가 천구에 고정되어 도는 것도 그대로입니다. 단 하나 태양과 지구의 위치만 바뀌었습니다. 그가 해결하고자 했던 것은 결국 '기하학적으로 우아한 우주'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플라톤의 지상 명제 '원으로 현상을 구제하라'는 명령을 충실히 받들었던 것뿐이지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태양과 지구를 맞바꾸는 것만으로 행성 궤도를 완전히 원으로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애초에 행성들이 원 궤도를 돌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결국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적 우주체계에 있던 이심과 주전원 개념을 그대로 도입합니다. 모두 원운동을 위한 것이지요. 그래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복잡함을 비판한 그였지만, 코페르니쿠스 체계 역시 여전히 복잡한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221-2)


"1587년 튀코 브라헤는 『새로운 천문학 입문』을 펴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지구를 중심에 두고 다른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도는 독특한 우주 모델을 제안했습니다. 이 모델은 당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과 전통적인 지구중심설 사이의 타협안으로 여겨졌으며, 관측 데이터와도 잘 맞았습니다." "그가 발견한 새로운 별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관에 또 하나의 깊고 굵은 상처를 냅니다. 완전하고 영원한 우주에는 어떠한 새로운 천체도 생길 수 없고, 존재하는 무엇도 사라지지 않아야 하는데, 그는 단 하나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별이 생겼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게 14개월에 걸쳐 꼼꼼하게 기록해서 내밀었지요. 마찬가지로 혜성의 발견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에 커다란 구멍을 냅니다. 혜성이 행성들 사이로 움직이고 있다는 그의 발견은 천구(Celestial spheres)를 무의미하게 만들었습니다. 행성들의 역행도 견디기 힘든데 그보다 더 괴상한 궤도를 도는 녀석이 우주에 있었던 거죠."(224-6)


"요하네스 케플러는 태양중심설의 지지자였습니다. 애초에 튀코의 모델이든 프톨레마이오스의 모델이든 지구중심설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지요. 태양을 중심으로 튀코의 관측 자료를 원운동 궤도로 만드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습니다. 겨우 관측 결과와 가장 유사한 모델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지만 케플러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지요. 평균적으로 '2분'의 범위 내에 일치하는 모델이기는 했습니다만 특정 지점에서 8분의 격차가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8분의 오차. 원을 360등분한 것 중의 하나가 1도이고 그 1도를 다시 60등분한 것 중에 8에 해당하는 오차입니다." "여기서 자신의 믿음과 관측 결과가 다를 때 무엇을 따를 것인가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케플러는 관측 결과를 따랐지요. 자신이 온전히 믿고 있던 우아한 기하학의 우주, 그 근본이 되는 원 궤도를 스스로 부정하고 타원 궤도를 도입합니다. 케플러의 제1법칙입니다. '행성은 태양을 그 한 초점으로 하는 타원 궤도를 돈다.'"(229-30)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금의 쌍안경보다 못한 망원경으로 금성의 위상변화를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것을 관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하늘을 봤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천동설에서는 금성은 항상 태양의 앞쪽에서 지구 주위를 돕니다. 그럴 경우 지구에서 보았을 때 금성의 모습은 항상 반달보다 더 얇은 모습일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금성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면, 지구에서 봤을 때 태양 뒤쪽에 있는 금성이 보름달 모양으로 동그란 걸 볼 수 있습니다. 지동설의 결정적 증거지요." "그에 비해 목성의 위성 네 개를 발견한 것은 일종의 우연과 목적의식이 겹친 일일 것입니다. 지동설을 확고히 하기 위해 금성의 위상변화와 함께 역행운동을 파악하는 것 또한 중요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관찰하기 좋은 행성이 목성과 화성이지요. 그가 목성의 위성을 발견한 것은 아마 목성의 역행 운동을 관찰하기 위해 매일 그 주변을 살피다 일어난 일이겠지요."(237-9)


9장 역학 혁명 


"갈릴레오는 최초로 '관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갈릴레오의 관성은 지금 우리가 배우는 관성과는 좀 달랐습니다. 갈릴레오에게 관성운동이란 등속 원운동입니다. 즉 움직이는 물체는 외부의 작용이 없으면 계속 등속 원운동을 한다는 뜻이지요. 갈릴레오에게는 (직선운동이 아니라) 등속 원운동이 엄청난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천체가 원운동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비단 아리스토텔레스만의 주장이 아니었죠. 플라톤도 그렇게 말했고, 히파르코스도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하늘의 천체가 원운동을 하지 않는다고 한 이가 없을 정도지요. 그러니 갈릴레오에게도 하늘의 천체가 원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원운동이 천체에 내재된 속성이라는 점도 한 점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요. 따라서 갈릴레오에게는 하늘의 기본적 속성인 원운동이 지상에서도 구현된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255-6)


"그런데 사고실험이라든가 포물선에서 설명하는 것은 모두 직선인데 무슨 원운동이냐는 의문을 가질 법합니다. 갈릴레오에게 직선은 원의 근사적 표현일 뿐입니다. 갈릴레오가 생각할 때 이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지구 자체가 어마어마하게 큰 구(sphere)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는 태양중심설의 중요한 무기이기도 합니다. 고대 그리스 때부터 내려오는 문제제기이지요. 만약 지구가 태양 주위를 원 궤도로 돈다면 왜 우리는 원심력을 느끼지 못하느냐는 첫 번째 문제와, 왜 지구가 원 궤도를 도는데 우리는 지구로부터 떨어져나가지 않느냐는 두 번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인 겁니다.(첫 번째 문제는 8장에서 다룬 연주시차입니다.) 하늘의 천체처럼 그리고 지구처럼 우리도 모두 외부의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한 번 시작된 원운동을 계속하려는 '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처럼 고대 때부터 이어진 태양중심설에 대한 지구중심론자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 하나를 무력화시킨 것입니다."(257-8)


"상대성 원리의 개념을 처음 떠올린 사람도 갈릴레오입니다. 갈릴레오는 자신의 저서 『두 가지 새로운 과학에 대한 대화』에서 '절대적인 운동'이라는 개념을 버리고, 모든 운동을 '상대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지구라는 절대적인 운동의 기준에 따른 우리 일상의 직관과는 다르지만, 우주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는 데는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갈릴레오는 배 안에서의 물체의 운동에 대한 사고실험을 통해, 배가 정지해 있을 때나 등속으로 움직일 때나 물체의 운동은 차이가 없음을 보여 주었지요. 즉 배 안에서 공을 떨어뜨리면 배의 운동 상태와 무관하게 공은 배 안의 똑같은 지점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사고실험들은 운동의 상대성이라는 혁명적 개념을 직관적으로 보여줍니다. 갈릴레오는 이를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할 수 있었지요. 지구가 움직인다 하더라도 지구상에서의 물체의 운동은 지구가 정지해 있다고 가정했을 때와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266-7)


10장 뉴턴 


"뉴턴은 케플러의 법칙이 암시하는 바를 물리학적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는 행성이 타원 궤도를 따라 운동하고 태양에 가까울수록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 행성이 태양으로부터 끌어당기는 힘을 받기 때문이라고 보았죠. 뉴턴은 이 힘을 만유인력, 즉 질량을 가진 모든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이라고 가정했습니다. 다음으로 갈릴레오가 중력을 지구 중심을 향한 힘으로 본 반면, 뉴턴은 중력을 모든 질량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일반화했죠." "뉴턴은 미적분학을 사용하여 만유인력에 의한 물체의 운동 방정식을 유도했죠. 이 방정식으로부터 그는 케플러의 세 법칙을 모두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혜성의 운동, 조석 현상 등 다양한 천문 현상을 만유인력으로 설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로써 뉴턴은 이전까지의 행성 운동 이론을 종합하고 극복한, 보편적인 역학 법칙을 확립했습니다. 또한 만유인력 이론은 지상에서 일어나는 자유낙하운동이나 경사면 운동, 포물선 운동에도 적용됩니다."(275-6)


"뉴턴은 데카르트의 관성 직선운동 개념을 받아들여 이를 운동 제1법칙으로 정립했습니다. 관성의 법칙인 뉴턴 제1법칙에 따르면, 물체는 외부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등속 직선운동을 유지합니다. 다음으로, 뉴턴은 갈릴레오의 낙하 운동 연구를 발전시켜 가속도의 법칙인 운동 제2법칙을 도출했습니다. 그는 물체의 가속도가 힘에 비례하고 질량에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수학적으로 정식화했죠. 이는 힘과 운동의 관게를 정량적으로 규명한 획기적 성과입니다. 또한 뉴턴은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운동 제3법칙을 통해, 물체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역학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는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라는 사실을 밝혔죠. 이는 데카르트와 하위헌스의 충돌 연구를 일반화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로써 뉴턴은 자신의 운동 법칙을 바탕으로 이전까지 개별적으로 연구되던 역학의 여러 분야를 하나의 통합된 체계 속에서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280-1)


"뉴턴의 역학 이론은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이라는 두 가지 핵심 개념을 전제로 합니다. 절대 시간은 균일하게 흐르며, 외부의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절대 공간은 그 안에 존재하는 물체와 무관하게 항상 동일하고 부동의 상태로 존재합니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시간을 사건들의 연속 순서로 이해했습니다. 그에게 시간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사건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 정의됩니다. 공간 역시 라이프니츠에게는 관계적 개념입니다. 그는 공간이 물체들 사이의 상대적 위치 관계로 정의된다고 보았습니다." "라이프니츠의 관점을 잘 보여주는 사고실험이 있습니다. 우주에 단 하나의 물체만 있다면 그 물체의 위치나 운동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위치와 운동은 다른 물체와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가진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19세기 말 에른스트 마흐의 사상에서 시작되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이어집니다."(290-2)


11장 데모크리토스의 후예들 


"진공은 예로부터 불신자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들(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은 신으로 가득 찬 세상을 부정하여 물질과 물질 사이에 진공을 두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신조차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진공이었지요. 그들에 따르면 이 세상은 물질보다 더 많은 진공으로 에워싸인 곳입니다." "토리첼리는 수은이 담긴 유리관의 모양을 여러 가지로 변형시켜 실험을 하지요. 여러 다양한 실험을 통해 토리첼리는 관 속의 수은이 밑으로 흘러내리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은 그릇의 수은을 누르고 있는 공기의 힘이라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더불어 유리관의 위쪽 수은이 빠져나간 곳은 진공이 되었다는 것도 알았지요. 그러나 토리첼리는 갈릴레오의 예상만큼 명민했기에 자신이 한 실험이 미칠 파장도 예상했습니다. 그는 아주 친한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입을 다뭅니다. 일찍이 조르다노 브루노가, 그리고 스승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교황청과 싸워 어떠한 결과를 얻었는지 알고 있던 그였으니까요."(296-8)


"갈릴레오의 진공에 대한 생각을 이어갈 사람은 아일랜드 백작의 아들 보일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토리첼리가 자신의 발견을 숨긴 것과 달리 보일은 적극적이었습니다. 물론 로마로부터의 거리도 멀고 종교도 다르니 별다른 두려움도 없었겠지요. 그는 새로운 진공펌프를 이용해 진공 상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고부동하게 입증합니다. 그는 나아가 진공 상태에서는 소리가 전달되지 못하지만 빛은 진공을 뚫고 진전할 수 있다는 사실도 확인하지요. 이제 진공은 더 이상 불신자의 단어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보일은 연금술(Alchymist)의 전통과 결별하고 회의하는 과학으로서의 화학(Chymist)을 선언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도, 파라켈수스가 제안한 3요소(유황, 수은, 소금)도 거부합니다. 그는 세상 만물이 더 이상 다른 물질로 분해되지 않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이야기하지요. 그리고 혼합물과 달리 화합물은 원소들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라 이야기합니다."(299-300)


"19세기 후반, 열역학의 발전과 함께 원자론을 둘러싼 논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습니다. 이 시기에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은 열역학과 원자론을 결합하여 통계역학을 정립했습니다. 볼츠만의 접근은 물질이 원자나 분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원자론적 가정을 전제로 합니다. 아직 물리학자들에게 원자론이 수용되기 전이었기에 당시로은 대담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는 이 가정을 바탕으로 기체 분자 운동론을 발전시키면서 열역학 법칙을 통계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는 기체를 수많은 분자의 집합으로 보고, 이들의 운동을 통계적으로 분석해 온도, 압력, 엔트로피 등 열역학적 물리량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볼츠만의 스승이었던 에른스트 마흐는 원자론에 철저히 반대했습니다. 마흐는 과학적 지식이란 오로지 관찰과 실험을 통해 얻어진 것이어야 한다는 실증주의 철학을 견지했습니다. 그에게 원자와 분자는 직접 관찰할 수 없는 존재였기에 과학 이론의 기초가 될 수 없었습니다."(313-4)


12장 생물학 혁명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이 지닌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첫 번째 변화는 르네상스 시기에 나타납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박물학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집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지적 유산이 재발견되고, 신대륙 탐험을 통해 신기한 동식물들이 속속 유입되면서 이를 연구할 필요가 생긴 거죠." "16~17세기를 거치며 방대한 자료가 축적되면서 점차 분류의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시기 박물학의 발전은 전통적인 종 개념에도 변화를 가져왔죠. 신대륙의 생물들은 기존의 분류로는 쉽게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이었거든요. 예를 들어,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견된 주머니쥐나 아르마딜로는 유럽의 분류 체계에 맞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화석 연구는 멸종한 생물들의 존재를 알려줍니다. 조르주 퀴비에가 발견한 매머드나 마스토돈 화석은 현존하지 않는 생물의 증거였습니다. 이는 곧 종이 불변하지 않을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했죠."(319-21)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는 갈레노스 의학의 오류를 하나둘씩 발견해 나갑니다. 가령 갈레노스는 심장에 구멍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베살리우스는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밝혀냅니다. 개, 원숭이 등의 동물 해부를 통해 축적한 지식을 인체에 그대로 적용한 갈레노스의 한계를 정확히 지적한 거죠. 1543년, 베살리우스는 이런 연구를 바탕으로 『인체 구조에 관하여』를 출간합니다." "갈레노스는 혈액순환에 대해 간에서 만들어진 혈액이 온몸으로 퍼져 조직에 흡수된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영국의 의사이자 생리학자인 윌리엄 하비는 이에 의문을 품습니다. 그가 보기에 갈레노스의 이론대로라면 매일 만들어야 할 혈액량이 너무 많았던 거죠. 하비는 동물 해부 실험을 통해 혈액순환의 실마리를 풀어갑니다. 개구리, 뱀, 물고기 등 다양한 동물의 심장을 관찰했는데, 심장이 규칙적으로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혈액을 내보내고 받아들이는 것을 발견합니다. 1628년 하비는 『혈액의 운동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를 출간합니다."(322-5)


"과학혁명 시기 새로 등장한 도구 중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를 꼽으라면 망원경과 현미경이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현미경이 생물학 연구에 본격적으로 활용된 건 1660년대입니다. 영국의 로버트 훅이 복합 현미경을 개발하면서부터죠. 훅은 코르크 조직을 관찰하다 벌집 모양의 작은 방들을 발견했는데, 이를 '셀'(cell)이라 명명합니다." "네덜란드의 안토니 판 레이우엔훅은 매우 정교한 단렌즈 현미경을 제작했는데, 무려 300배에 이르는 배율을 자랑했죠. 1674년, 레이우엔훅은 연못물과 침 등에서 작은 '애니멀큘레스'(animalcules)가 꿈틀거리는 것을 포착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죠. 하지만 관찰을 거듭하며 미생물이 엄연한 생명체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훅의 세포 발견은 생명의 기본 단위가 무엇인지를 밝혀줬고, 레이우엔훅의 미생물 발견은 자연발생설을 무너뜨리는 강력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현미경에 의한 생물학 혁명의 시작에 불과합니다."(326-7)


맺는 글: 과학혁명과 근대 과학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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