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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역사 - 우리의 생각,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생각하게 된 경로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 지음, 홍정인 옮김 / 교유서가 / 2024년 12월
평점 :
서문
"내가 〈아이디어〉라는 말로 의미하는 바는 생각이고 그것은 상상력의 산물이다. 이러한 생각은 경험을 능가하며 단순한 예측보다 탁월하다. 아이디어는 평범한 생각과 다르지만, 이는 그것이 그저 새로운 것이어서만이 아니라 예전에 본 적이 없는 것을 보는 일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다루는 아이디어는 환영이나 영감의 형태를 띨 수도 있지만, 그것은 정신적 '환각'이나 머릿속의 음악(가사가 없거나 가사가 붙기 전까지의 음악)과는 다르다. 아이디어는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모델들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부제에는 〈우리의 생각(What We Think)〉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 "그것은 과거에 시작된 아이디어 중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각되는 것만을 가리킨다.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왔거나 우리 시대에 새로 등장한 문제에 대처하도록 우리가 물려받은 정신적 무기고라는 의미에서 〈우리의 생각〉이다. 이 아이디어들은 그것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도 널리 퍼져 있는 지혜 또는 우몽의 배경을 이룬다."(8-9)
제1장 물질에서 나온 정신: 아이디어의 주요 원천
"인간 사유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용어는 아마도 '상상력'─판타지아, 혁신성, 창조성, 오래된 생각을 새롭게 다듬는 능력, 새로운 생각을 발생시키는 능력, 영감과 황홀경의 모든 결실─일 것이다. 상상력은 크고 거창한 단어이지만, 이는 결국 우리가 쉽게 이해하는 한 가지 현실에 해당한다. 상상력이란 그 자리에 있지 않은 것을 보는 힘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을 극도로 상상력이 풍부하게 만들까? 나는 상상력의 구성요소로 세 가지 능력을 제시한다. 첫번째는 기억력이다. 기억력은 우리가 발명을 위해 사용하는 정신 능력 중 하나다. 우리는 새로운 어떤 것을 생각하거나 만들 때 언제나 이전에 생각했거나 만든 것에 대한 기억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대부분 기억이 그대로 유지되기를, 그러니까 기억이 정확하고 실제 과거에 충실하며 미래를 위한 토대로 신뢰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놀랍게도 상상력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오히려 나쁜 기억력이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 같다."(40-2)
"인간의 비효율적인 기억력은 기억력과 상상력의 차이에 다리를 놓는다. 그 차이는 어떤 경우든 그리 크지 않다. 상상력과 마찬가지로 기억력도 우리가 지금 이 시점에서 감각할 수 없는 것을 보는 능력이다. 앞서 정의된 것처럼 상상력이 실제로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을 보는 힘이라면, 기억력은 거기에 더는 있지 않은 것을 우리가 볼 수 있게 해준다. 어떤 의미에서 기억력은 특수한 형태의 상상력이다. 기억력은 사실과 사건의 표상을 형성함으로써 작동한다. 이것은 상상력이 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따금 삶은 상식(common sense)을 왜곡한다. 현실에서 기억과 상상은 융합한다. 그런데 기억은 허위일 때 상상력과 가장 가깝다. 기억의 창조적인 힘은 회상을 왜곡하는 데 있다. 거짓 기억은 현실을 환상으로, 경험을 추측으로 재구성한다. 우리는 오래된 일을 잘못 기억할 때마다 새로운 것을 상상하는 셈이다. 우리는 과거를 결코 일어나지 않은 일과 뒤섞고 난도질한다. 그렇지 않다면 삶은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51-2)
"상상력은 예측력 이상의 능력이다. 상상력은, 부분적으로는, 예측력의 과잉으로 빚어진 결과다. 일단 우리가 적이나 먹잇감, 문제, 결과 따위를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다면, 우리는 아마도 개연성이 더 적은 대상, 그러니까 경험하지 않았거나 눈에 보이지 않거나 형이상학적이거나 불가능한 어떤 것이라도 마찬가지로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새로운 종, 과거에 먹어보지 않은 음식,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음악, 환상적인 이야기, 새로운 색깔, 괴물, 요정, 무한대보다도 거대한 어떤 수, 신 등을 말이다. 우리는 심지어 '무(無)'를 생각할 수도 있다. 이는 아마도 상상력이 이루어낸 가장 대담한 도약이었을 것이다." "상상력은 예측력과 기억력이 접근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 상상력은 진화의 일반적인 결과물들과 달리 생존 요구를 넘어서고 우리에게 어떤 경쟁적 우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문화는 상상력에 보상을 제공하고 그 지위를 드높임으로써 상상력을 자극한다."(62-3)
"기억력·예측력과 더불어 언어는 상상력의 마지막 재료다. 내가 여기서 '언어'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은 상징체계다. 언어는 몸짓과 발화의 합의된 패턴이나 기호의 체계다. 이 몸짓과 발화는 실제 대상과 명백한 유사성을 반드시 띠지는 않는다." "현재 우리가 가진 증거에 미루어 볼 때 우리는 대체로 우리의 아이디어를 표현하기 위해 단어를 고안한 경우가 그 반대 경우보다 더 많다." "당연히 일단 우리가 상징의 레퍼토리를 갖게 되면 상징이 상상력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자유롭고 풍성하다. 그리고 상징이 많을수록 결과도 더욱 풍부해진다. 언어(또는 모든 상징체계)와 상상력은 서로에게 양분을 제공한다." "언어가 사용하는 기호는 대부분 임의적이고 실제 대상과 유사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오해를 빚을 가능성은 증가한다. 오해는 유익할 수 있다. 흔히 새로운 아이디어는 오래된 아이디어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언어는 성공적인 의사소통 못지않게 왜곡과 재앙을 통해 아이디어의 형성과 혁신의 흐름에 이바지한다."(64-8)
제2장 생각을 채집하다: 농경 이전의 사고
"유물론은 세계를 보는 가장 오래된 방식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의 호미닌 조상들은 필시 유물론자였다. 그들이 아는 모든 것은 물리적인 것이었다. 망막에 맺힌 인상들이 그들이 가진 최초의 생각들이었다. 그들의 감정은 사지의 떨림과 장기의 동요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표면은 안에 있는 것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5세기 말 압데라의 데모크리토스가 말했듯 〈진실은 심층에 있다.〉 경험들을 비교하고 그로부터 추론을 끌어내는 데 관심이 있는 생물체는 하나의 감각이 다른 감각과 상충된다는 것, 감각은 시행착오를 통해 인식을 축적한다는 것, 우리는 결코 가상(假像, semblance)의 끝에 도달했다고 가정할 수 없음을 알아챌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꼭 감각만을 신뢰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아이디어는 만능키 아이디어였다. 그것은 정신 세계로 가는 열쇠였다. 이 아이디어는 무한한 사변의 파노라마를 열어젖혔다. 나중에는 종교와 철학이 이 사상의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다."(106-8)
"똑같이 오래되었고 광범위한 인류학 문헌에서 증거를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 아이디어는 모든 사물에 어떤 보이지 않는 존재가 스며들어 있다는 아이디어다. 이 개념은 가령 '무엇이 하늘을 푸르게 만들고, 물을 습하게 만드는가?'라는 물음으로부터 합리적으로 따라 나온다. 푸름은 하늘의 본질적 속성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늘은 색깔이 바뀐다고 해서 하늘이기를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의 습함은 어떨까? 이것은 다른 문제 같다. 마른 물은 물이 아닐 것이기 때문에 습함은 물의 본질적 속성이다. 어쩌면 모든 속성의 기저에 단일한 실체가 자리해 있어 이 의견상의 충돌을 해결해줄 수 있을지 모른다. 당신이 그러한 질문을 계속 한다면 당신은 관련된 대상의 본성에 관한 심층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하는 셈이다. 우리가 만일 인류학적 증거에 기댈 수 있다면, 가장 오래된 대답 중 하나는 보이지 않고 보편적인 동일한 힘이 모든 것의 본성을 설명하고 모든 활동이 실행되게 한다는 것이었다."(116)
"자연을 무척 친밀하게 알고 있었던 초기 인간들은 자연에서는 모든 것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무엇이든 체계적인 것은 어느 일부분을 통제함으로써 조작이 가능하다. 이렇듯 자연을 조작하려는 노력 중에서도 주술은 가장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방법이다." "주술과 과학은 같은 선상에 있다. 양자 모두 자연을 지성으로 지배해 인간의 통제하에 두려고 한다. 주술 아이디어는 두 가지의 뚜렷하게 다른 생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우리는 감각으로는 지각할 수 없지만 정신으로는 그려낼 수 있는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끌어낼 수 있다. 둘째, 정신은 이러한 원인을 불러내어 활용할 수 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접근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것을 장악할 힘을 획득한다. 주술은 진정 강력하다. 지금도 주술은 자연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아니더라도 인간에게만큼은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모든 사회에서 되풀이해 나타난다. 숱한 실망들도 이 사실을 바꿀 수 없었다."(118-9)
"일단 코스모스적 질서에 대한 감각이 사회를 조직하는 방법에 관한 초기 개념에 영감을 주었다고 잠정적으로 가정할 수 있다. 자연은 언뜻 카오스 즉 무질서한 상태로 보이지만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하면 그 아래나 내부에는 세계를 지탱하는 질서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이 질서가 보편적이라는 추론에 도달하려면 커다란 정신적 도약이 필요하다." "질서라는 아이디어는 너무나 오래된 것이어서 생성 연대를 추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일단 이 아이디어가 생기자 우주는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바뀌었다. 질서라는 아이디어를 갖게 된 정신들은 세계 전체를 단일한 체계 안에 그려내기 위해 노력했다." "정치에서 질서는 각기 다른 사람에게 각기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있다. 하지만 최소한 우리는 사회를 규제하기 위한─사람들의 행동을 어떤 모범이나 양식에 맞추기 위한─모든 노력에서 질서의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아주 먼 고대에도 사회적 규범이 있었음이 확인된다."(137-9)
제3장 정착된 정신: ‘문명화된’ 사고
"농경 사회는 기근이 반복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시기에는 풍요로운 일상이 배경을 이루었다. 농사는 도시를 가능하게 했다. 농사는 모든 전문화된 경제 활동의 형태를 고루 갖출 만큼 큰 정착지에 식량을 조달했다. 도시에서 기술은 더욱 정교해지고 향상되었다. 〈사회적 본능은 자연이 모든 사람에게 심어준 것이지만 가장 큰 은인은 최초로 도시를 건설한 사람들이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언했다. 도시는 지금까지 인간의 정신이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해 고안한 수단 중 가장 급진적인 수단이다. 인간은 세상의 풍경을 속속들이 재상상한 새로운 거주지로 뒤덮었다. 그것은 오로지 인간만이 고안할 수 있는 목적을 위해 세심히 조성한 새 환경이었다." "기원전 제3천년기 메소포타미아에서 널리 받아들여진 지혜에 따르면 카오스란 〈벽돌이 하나도 놓이지 않고 (···) 도시가 하나도 건설되지 않은〉 때였다. 기원전 2000년경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는 인구의 90퍼센트가 도시에서 살았다."(167-8)
"낭만과는 거리가 멀게도 문자는 일상적인 발명품이었다. 거의 모든 문명에서 지금까지 문자와 관련해 알려진 가장 오래된 유물은 이론의 여지 없이 상인들이 사용한 꼬리표나 물표이거나, 세금 또는 공물 징수원이 종류와 수량, 가격 등을 기록한 자료였다." "위대한 문학이나 중요한 역사 기록처럼 소중한 내용은 직접 외워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시인의 걸작이나 현자의 지혜는 일반적으로 구술로 전해졌고 수 세기가 지나서야 예찬자들이 이를 문자로 받아적었다. 그전까지 문자로 옮겨 적는 행위는 그 자체로 신성 모독으로 비쳤다." "전문가들은 문자를 국가의 필요에 맞게 조정했고 이어 법을 성문화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최초의 법규는 아마도 사례들로부터 추출한 일반론, 즉 모든 종류의 사례에 적용할 수 있도록 변형된 계율들이었을 것이다." "어디에서나 법을 신의 의지와 동일시하는 관점이 지배적이었다. 기원전 제1천년기 중반 중국과 그리스에 세속적 법률 이론이 등장할 때까지 이 추세는 계속되었다."(184-7)
"우리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아이디어가 현대적인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아이디어는 어느 시대에나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평등한 시대는 결코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시대를 상상하는 것은 가능하다. 대부분의 문화는 오늘날의 악덕을 고발하기 위해 '참으로 좋았던 과거의 한때'라는 신화를 만들어낸다. 고대 이집트의 속담은 그러한 시절을 〈신들의 뒤를 이었던 시대〉라고 불렀다. 〈지혜의 책들이 그들의 피라미드였던 시대, 여기 누구라도 [그들과] 같은 이가 있는가?〉 현전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서사시인 기원전 제2천년기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는 운하, 감독관, 거짓말, 질병, 노년 등이 존재하기 전의 시대를 그렸다. 세계에서 가장 긴 시로 알려진 기원전 4세기 또는 5세기의 『마하바라타』에는 같은 주제의 고대 인도 전통들이 응축되어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축복받은 세계,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가 나뉘지 않은 세계였다."(188-90)
"유한 계급은 법을 고안하고 국가를 규정했으며 새로운 통치 개념을 발명하고 여성과 커플들에게 새로운 역할과 의무를 배정했다. 그들은 이제 당장에는 급하지 않은 생각, 이를테면 오늘날 우리가 철학적 또는 종교적 사색으로 분류할 만한 것에 시간을 쓸 수 있었다. 개개인들을 코스모스에 관한 사색으로 이끈 이들 세 가지 아이디어는 운명이라는 아이디어, 불멸성의 아이디어, 그리고 영원한 보상과 처벌이라는 아이디어였다." "운명, 불멸성, 영원한 처벌 모두 사회적 유용성을 위해 떠올린 아이디어로 보인다. 똑같이 위대하지만 언뜻 유용성은 없어 보이는 두 가지 생각이 있다. 하나는 세계는 환상이라는 아이디어이고, 다른 하나는 생각은 창조적인 힘이라는 아이디어다. 후자는 사유에 대해 사상가들이 품은 자기 본위의 존경심에서 나왔을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이 시기의 전문 지식인들은 여러 가지 철학적 또는 원시 철학적 문제들을 개시한 것으로 보인다(아니면 적어도 이 문제들을 최초로 기록했다)."(197, 204, 207)
제4장 위대한 현자들: 이름을 남긴 최초의 사상가들
"지금의 우리에게 종교처럼 보이는 것(오늘날 이해하는 방식대로의 종교)이 당시의 현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을 수 있다. 종교와 주술을 구분하는 선은 이따금 과학과 주술을 가르는 선처럼 흐릿하다. 이 시기의 전설은 종교 창시자들을 마법으로 보이는 것들과 연결시킨다." "전통적인 주술에 진 빚이 얼마나 많든 새로운 종교들은 인간이 자연이나 모든 신적인 것과 맺은 관계를 조정할 진정으로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모든 새로운 종교들은 형식적 의례와 더불어 도덕적 실천을 옹호했다. 단순히 유일신이나 여러 신에게 정해진 제물을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추종자들의 윤리를 바꾸라고 요구했다. 자연을 달래는 의식을 거행하기보다는 개인의 도덕적 발전을 위한 여정을 밟아나감으로써 추종자들의 마음을 얻었다. 현세에서든, 죽어서든, 시간의 끝에서 이루어질 변화에 의해서든, 선의 완성 또는 〈악으로부터의 구제〉를 약속했다. 이 새로운 종교들은 단순히 생존의 종교가 아닌 구원의 종교였다."(222, 228)
"모든 것이 환상이라는 개념의 주창자들은 통념적인 지혜와 겨루고 있었다. 그들이 이 주장을 얼마나 열렬히 내세웠는지가 이를 예증한다. 기원전 4세기 중반 중국에서 장자는 나비가 된 꿈을 꾸고 깨어난 뒤 혹시 자신이 실제로는 사람이 된 꿈을 꾸는 나비인 것은 아닌지 궁금히 여겼다. 장자보다 조금 앞선 플라톤은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들을 보고 비슷한 의심을 품었다." "우리가 아는 한 피타고라스는 수가 실재한다고 말한 최초의 사상가다. 분명 수는 우리가 사물을 분류하는 방법이다. 꽃 두 송이, 파리 세 마리. 하지만 피타고라스의 수는 그것이 열거하는 사물들과 별개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수는 그저 형용사가 아닌 명사다. 피타고라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수는 아키텍처이고 코스모스는 이에 따라 건설되었다. 피타고라스는 이를 〈만물은 수〉라고 표현했다. 만일 당신이 수가 실재한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초감각적인 세계가 있다고 믿는 셈이다."(246, 251-2)
"기원전 제1천년기 이전에는 아무도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을 수 없었다. 과학은 종교적이었으며 의학은 주술적이었다. 기원전 제1천년기 사상가들은 플라톤의 동굴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과학과 이성으로 저글링 묘기를 했다. 이때 발생한 충돌에서 우리는 오늘날 교조적 과학─반대자들은 이것을 '과학주의'라고 부른다─과 영적 사유방식 사이에서 벌어지는 문화 전쟁의 기원을 발견할 수 있다." "유라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자연적 원인은 지식인의 담론에서 주술을 다양한 수위에서 자연의 영역으로부터 쫓아냈다. 그러나 과학은 자연을 완전히 탈신성화할 수는 없었다. 영혼과 악령이 물러나자, 현자들의 정신에서 자연은 대체로 신의 손에 남겨졌다. 중국에서 황제들은 여전히 우주의 조화를 유지하기 위한 의례를 거행했다. 서양 사람들은 여전히 자연재해를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고난의 원인을 죄악에 돌렸다. 과학은 결코 종교와 완벽하게 분리된 적이 없다."(258-60)
"현자들의 노력이 과학과 회의론으로 이어졌다면 그 노력의 또다른 가닥은 윤리와 정치에 관한 생각을 고무했다. 진실과 허위의 구분에 무관심한 정신은 선과 악의 구분으로 관심을 돌릴 수 있다. 사람들을 선하게 만들고자 한다면, 또는 악을 억제하고 싶다면, 한 가지 확실한 수단은 국가다." "모든 정치 사상은 도덕적·철학적 가정에 의해 형성된다. 사상가가 인간의 조건에 관해 얼마나 낙관적이었는지 또는 비관적이었는지를 살펴보면 우리는 그가 정치 스펙트럼에서 어느 지점에 위치하는지 예측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생각하는 낙관론자는 인간의 정신을 자유롭게 해방해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기를 원한다. 인간은 구제 불능이며 사악하거나 오염되었다고 생각하는 비관론자는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는 제약적이고 억압적인 제도를 선호한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자유를 강조하고 인간의 선함을 풀어내려 한다. 보수주의는 법과 질서를 강조하고 인간의 사악함을 억누르려 한다."(269-72)
제5장 신앙을 생각하다: 종교적인 시대의 아이디어들
"종교를 전파하기 위한 도구상자는 신학과 교회학만으로 불완전하다. 믿는 자에게 유익하며 세계가 나아지리라는 확신을 줄 수 있는 강력한 윤리 체계가 있어야 한다. 기독교에 가장 급진적으로 이바지한 성 바울의 아이디어는 가장 영감이 넘치면서 가장 문제적인 아이디어이기도 했다. 성 바울은 신은 구원을 내릴 때 구원을 받는 자의 공과를 따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성 바울은 「에베소서」에 이렇게 썼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 바울이 거듭 단언하듯 구원받은 자의 공적 때문이 아니었다. 이 교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면─교회는 이 입장을 항상 공식적으로 옹호했다─우리가 행한 선은 신이 베푼 호의의 결과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일부 사람들은 이 아이디어─인간의 자유가 설 자리가 거의 또는 아예 없다는 아이디어─에서 암울함과 무력감을 느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아이디어는 해방감을 주기 때문에 매력적이라고 느낀다."(302-3)
"이슬람교는 도덕적 사상의 거의 모든 측면에서 기독교보다 단순하고 현실적인 교리를 내놓았다. 이슬람은 직역하면 '순종' 또는 '복종'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은혜에 응답하라고 개개인에게 요청한 반면 무함마드는 더 직설적으로 신의 율법을 따르라고 요구했다. 예언자이자 통치자였던 무함마드는 종교뿐만 아니라 국가를 위한 청사진 역시 제시했다. 그 결과 그리스도가 세속적 영역과 정신적 영역을 분명하게 구분한 것과 달리 무슬림들은 두 영역의 차이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이슬람교는 예배의 방식인 동시에 삶의 방식이었다. 칼리프─직역하면 무함마드의 '계승자'라는 뜻이다─는 이 모든 영역을 관장했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남긴 율법은 어떻게 보아도 포괄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8세기와 9세기 스승들이 창설한 율법학파는 이 빈틈을 메우고자 했다. 그들은 무함마드가 생전에 남긴 가르침들을 수집해 일반적인 명제들을 수립했다. 어떤 경우에는 이성이나 상식 또는 관례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312-3)
"이슬람교는 점차 수백 갈래의 분파 및 하위 분파로 나뉘었다. 다양한 칼리프 선출 방식들은 양립할 수 없었고, 칼리프가 되기를 원하는 이들 사이에서 이슬람교는 갈수록 더 큰 균열을 겪었다. 무함마드의 사후 한 세대 이내에 생긴 갈등의 골은 이후 절대 메워지지 않았다. 분열은 갈수록 더 확대되고 분파는 늘어났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이슬람 지역에서 통치자나 국가가 칼리프 또는 칼리프에 준하는 지위의 권위를 가로챘다. 그들이 자기 잇속을 차리느라, 또는 최근 들어 〈현대화〉나 〈서구화 추세〉를 명목으로 샤리아를 제대로 준수하지 않을 때마다 혁명가들은─갈수록 더 자주─무함마드의 망토를 깃발 삼고 무함마드의 책을 무기 삼아 통치자들을 〈변절자〉라고 부르며 비판을 제기했다. 무함마드는 삶의 모든 측면을 관장하는 보편적 행동 수칙인 '샤리아'를 제시했다. 그러나 오늘날 샤리아를 재해석할 필요성을 인정하는 무슬림들도 이 일을 누가 맡아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좀처럼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314)
"15세기 초, 장 제르송(Jean Gerson)은 세속 정부와 교회 정부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이후 서양 세계의 정치에 영향을 미치게 될 국가 기원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국가는 죄악 때문에 발생했다. 에덴동산의 바깥에서는 부정한 행위의 제한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예외가 있었으니 그것은 사람들이 평화를 위해 공동으로 자원을 모으고 서로의 자유를 구속하기로 합의했다는 것이었다. 이 과정은 자연스럽고 합리적이었다. 시민들의 합의는 국가의 유일한 정당한 토대다. 신이 내려준 교회와 달리, 국가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창조물로서 역사적 계약에 의해 만들어지고 암묵적 갱신에 의해 유지된다. 군주정의 경우, 통치자의 권력은 신에게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은 사람들이 왕에게 운영을 맡기는 것이 골자를 이루는 계약에 따른 것이다. 국가를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문제는 사회계약론에서 하나로 통합되었다. 국가에 계약적 토대가 있다는 아이디어는 입헌주의와 민주주의에 자양분을 제공했다."(342-3)
제6장 미래로의 회귀: 흑사병과 추위를 통과한 생각
"생물군의 변화는 우리가 사는 행성의 표면을 농업의 발명 이래 그 어떤 혁신보다도 크게 바꾸어놓았다. 농사는 우리가 '부자연 선택'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도입해 진화에 수정을 가했다. 하지만 16세기에 시작된 변화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동안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진화의 패턴을 정반대로 뒤집었다." "전 세계를 떠도는 유럽의 식민지 개발자들과 탐험가들을 따라 생물군도 대양을 건넜다. 어떤 경우에는 일부러 동식물을 이동시켜서 새로운 가축 종을 만들거나 새로운 토양에서 식물을 재배하기도 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혁명적인 변화는 이 책이 주장하는 바에 부합한다. 사람들은 세계를 다시 상상했고 그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생명력이 넘치는 수많은 씨앗, 세균, 곤충, 포식자, 사람들이 귀여워해 몰래 들여간 동물 등도 사람들의 옷깃과 주머니, 선박의 창고나 밑바닥을 통해─말하자면 디즈니의 〈놀라운 여행〉을 거쳐─새로운 환경으로 건너가 변화를 빚어냈다."(359-61)
"탐험은 유럽의 영향을 세계 전역으로 투사했다. 아울러 탐험가들이 개척한 경로를 따라 전 세계적인 생태적 교류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콜럼버스가 세계를 상상한 방식─그는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기술로 다 돌아볼 수 있을 만큼 세계가 작다고 생각했다─은 이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아이디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알려진 세계의 크기는 탐험가들을 주저하게 했다. 콜럼버스는 작은 세계를 상상함으로써 지구 일주를 시도하도록 자극했다. 콜럼버스의 아이디어는 어떻게 잘못된 아이디어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생산적인 예였다." "(프톨레마이오스 같은) 텍스트적 권위에 대한 콜럼버스의 무관심은 사실상 그를 과학혁명의 전령으로 만들었다. 콜럼버스는 근대 과학자들처럼 문자로 기록된 권위보다는 관찰된 증거를 더 선호했기 때문이다. 과학혁명을 유도한 또다른 요소는 콜롬버스의 영향으로 탐험 지역이 확대되며 축적된 지식의 형태로 나타났다."(375-8)
"르네상스와 과학혁명 시대의 새로운 정치사상은 과학과 비슷한 궤적을 밟았다. 고대에 대한 경의로 시작해 새로운 발견의 영향에 적응하다 결국 혁명으로 끝났다. 사람들은 그리스인과 로마인을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새로운 문제에 대응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명했다. 주권 국가와 전례 없는 제국의 부상은 새로운 패턴을 구상하도록 강요했다." "사람들은 흔히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는 모어의 판타지와 완벽한 대조를 이룬다고 여긴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가 오히려 더 창의적인 상상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서양에서 통치에 관해 등장한 기존의 모든 사상─국가의 목적은 시민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라는─을 비난했다." "이후의 사상은 마키아벨리의 주장으로부터 두 가지 영향을 받았다. 첫째는 국가는 도덕 법칙에 종속되지 않으며 오로지 그 자신을 위해 봉사한다는 현실정치주의고, 둘째는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며 국가의 존속이나 공공의 안전을 위해서는 과한 조치도 허용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394-8)
"16세기에 유럽 밖 제국의 건설이 낳은 또다른 결과는 정치사상을 국가의 경계를 초월한 더욱 폭넓은 성찰로 되돌려놓았다는 데 있었다. 16세기 중반에 스페인의 도덕 개혁가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는 〈인류에 속한 민족들은 모두 인간이다〉라고 말했다. 오늘날에는 너무나 자명한 말로 들리겠지만 이것은 근대의 가장 새롭고 강력한 아이디어 중 하나인 인류의 통일성을 표명하려는 시도였다. 그 이유는 거의 모든 문화에서 거의 모든 시기에 이러한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원전 제1천년기의 현자들은 인류의 통일성에 관해 자세히 논했고 기독교는 우리가 혈통을 공유한다는 믿음을 종교의 정설로 삼았지만, 인간과 이른바 '인간 이하(subhuman)'의 경계선이 어디라고 자신 있게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세 생물학은 〈존재의 사슬〉을 상상했다. 이 상상 속에서 인간과 야수 사이에는 괴물들에게 할당된 〈유사 인간(similitudines hominis)〉 범주가 있었다."(415-6)
제7장 전 지구적 계몽: 연합된 세계의 연합된 사상
"『백과전서Encyclopédie』는 당시 프랑스의 계몽주의 지식인들, 곧 필로조프들(philosophes)에게 세속의 성서나 다름없었다. 이 책의 부제 〈이성에 입각한 과학·예술·상업 사전〉은 아마도 출판 역사상 책의 성공에 가장 크게 일조한 부제일 것이다. '사전'이라는 단어는 질서정연하게 배열된 지식이라는 개념을 상기시킨다. 아울러 언급된 세 주제는 추상적 지식과 실용적 지식을 모두 하나의 저작에서 아우른다는 것을 알려준다. 디드로는 이 책의 취지를 〈인간에서 출발해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것은 〈지구상에 흩어져 있는, 우리가 죽기 전에 반드시 인류로부터 상찬을 받아 마땅한 지식을 집대성하려는〉 노력이었다. 기계라는 아이디어는 계몽주의의 심장부를 차지했다. 기계라는 아이디어는 그 자체로 코스모스의 메타포였다. 『백과전서』의 저자들은 기계의 우월성이나 우주의 기계적 본성에 대체로 의견이 일치했다. 아울러 이성과 과학은 동맹 관계에 있다는 확신을 공유했다."(431-3)
"18세기 내내 해방 옹호론자와 억압 옹호론자 사이에서 논쟁이 활발했다. 볼테르는 조직화된 종교에 염증을 느꼈고 그 철학적 대안으로서 유학(儒學)에 매력을 느꼈다. 아울러 우주는 질서정연하고 합리적이며 관찰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중국인들에게 깊이 공감했다. 볼테르가 보기에 중국 국가체제의 절대 권력은 선을 위한 강제력이었다." "몽테스키외는 중국을 〈공포를 통치 원리로 삼는 전제국가〉라고 비난했다. 사실 한 가지 근본적인 의견 차이가 몽테스키외와 볼테르를 갈랐다. 몽테스키외는 법치를 옹호하고 헌법적 안전장치가 통치자에게 재약을 가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볼테르는 국민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고 강하고 분별 있는 정부를 선호했다." "몽테스키외는 이렇게 썼다. 〈아시아가 약하고 유럽이 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럽은 자유롭고 아시아는 예속적이다.〉 〈동양적 전제주의(oriental despotism)〉는 서양의 정치 문헌에서 권력 남용을 뜻하는 용어가 되었다."(451-2)
"18세기에 만일 국가가 이를 보장하기만 하면 평등에 도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순간이 있었다. 어떤 면에서 이는 합리적인 개념이었다. 국가는 언제나 중대한 불평등과 맞선다. 그렇다면 모든 불평등과 맞서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나 이것은 위험한 아이디어이다. 자유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강요된 평등은 횡포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이 기능은 다른 모든 기능보다 중요하다는 아이디어를 가장 먼저 생각한 사람은 장 자크 루소였다." "루소는 계몽주의의 가장 신성한 원칙 중 하나와 절연했다. 그것은 〈기술과 과학은 인류에게 혜택을 주었다〉는 원칙이었다. 루소는 사유재산과 국가를 비난했다. 하지만 그는 인간의 본성적이고 원시적인 선한 상태를 옹호했을 뿐 달리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않았다." "루소는 감정과 직관의 가치를 중시하며 어떤 면에서 이성보다 우월하다고 여긴 낭만주의자들의 포스트 계몽주의 시대적 감성을 선취했다. 루소는 프랑스혁명의 주도자들과 폭도에게 탁월한 영웅이었다."(458-60)
"확실한 사실은 계몽주의 운동은 인민 주권과 민중의 지혜라는 측면에서, 유럽에서는 실패했지만 미국에서는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민주주의 무르익는 동안 유럽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민주주의를 매도했다. 신중한 사상가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비난한 체제를 추천하기 망설였다. 루소는 민주주의를 혐오했다. 에드먼드 버크─18세기 후반 잉글랜드에서 정치적 도덕성을 외쳤다─는 민주정 체제를 〈세계에서 가장 뻔뻔스러운〉 체제라고 일컬었다. 한때는 민주주의를 옹호한 이마누엘 칸트조차 1795년에 민주주의를 다수의 횡포라고 부르며 기존의 견해를 철회했다." "반면 미국에서 민주주의는 〈쑥쑥 자랐다〉. 토크빌은 민주주의를 피할 수 없다고 결론 지었다. 오래된 지배층의 의무는 이에 적절히 부응해 〈민주주의를 지도하고, 민주주의의 신념을 되살리고, 민주주의의 풍습을 정제하고, 민주주의의 움직임을 규제하는 것〉, 요약하면 민주주의를 파괴하지 않고 길들이는 것이었다."(468-9)
"18세기 유럽은 이른바 〈이성의 시대〉였다. 그러나 이 시대의 실패─전쟁, 억압적 정권, 시대 자체에 대한 실망─는 이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직관은 최소한 이성과 동등했다. 느낌은 생각만큼 중요했다." "과학과 낭만성의 융합은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손꼽히는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1802년 침보라소산에 오르던 훔볼트는 고산병 증상이 나타나 추위로 몸이 뒤틀리며 코와 입술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그는 돌아가야 했다. 훔볼트가 겪은 고통과 좌절의 이야기는 유럽의 낭만주의 작가들이 두고두고 기리는 바로 그 주제가 되었다.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한 내성적인 독일 시인 노발리스는 1800년에 낭만주의의 가장 강력한 상징 중 하나인 〈파란 꽃(blaue Blume)〉을 창조했고, 절대 꺾이지 않을 이 아련한 꽃은 이후 낭만주의적 갈망을 상징해왔다. 낭만주의의 핵심에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충족될 수 없는 갈망─에 대한 숭배가 자리해 있다."(479-82)
제8장 진보의 전환기: 19세기의 확실성
"벤담의 〈공리주의〉는 종교가 없는 사람들을 위한 교리였다. 벤담은 일종의 행복의 미적분학을 개발했다. 벤담은 사회적 〈효용〉을 개인의 자유보다 더 높은 자리에 두었다. 하지만 벤담의 철학은 급진적이었다. 유구한 전통이나 권위, 과거의 성공 기록을 참조하거나 존중하지 않으면서 사회 제도를 평가할 새로운 방식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 신조는 의도적으로 신을 배제했고 유물론적이었다. 벤담이 제시한 행복의 기준은 쾌락이었고 악의 기준은 고통이었다." "벤담은 낭만주의에서 손을 뗀 영국 지배층의 가장 유창한 웅변가였다. 그러나 존 스튜어트 밀은 낭만적 열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밀은 처음에는 공리주의를 수정하다가 이후 전면적으로 거부했고, 마침내 자유를 모든 가치 중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에 두었다. 밀은 벤담의 최대 다수를 개인이라는 보편적 범주로 대체했다. 밀은 개인의 자유는 절대적이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다만 그것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였다."(499-502)
"마르크스는 국가의 〈소멸〉을 목격하기를 소망했지만 대부분의 동시대인에게 국가는 진보를 유지할 최고의 수단이었다. 어느 정도는 아이디어의 영역 바깥에 있는 것들이 국가에 힘을 실어주었다. 물질적인 우발 사건들이 국가를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인구 성장은 군대와 경찰력의 증강을 가져왔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들은 명령을 신속하게 전달하고 무자비하게 실행했다. 세금과 통계 자료, 지식이 누적되었다. 형벌 수단이 증가했다. 폭력은 갈수록 국가의 특권(궁극적으로는 거의 독점적 특권)이 되었고 국가는 개인이나 전통적인 제도, 협회, 지역의 권력 구조보다 더 많은 무기를 보유했고 더 많은 자금을 썼다. 국가는 다른 19세기 권위의 원천─부족이나 혈족 등의 혈연 집단, 교회 그리고 세속 권력에 대한 여타 신정 정치적 대안들, 귀족계층, 사업 연합체, 지방 및 지역의 자주 독립주의, 깡패들의 두목이나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마피아, 프리메이슨 단체 등─과 맞서는 거의 모든 대결에서 승리했다."(512)
"그러나 19세기에는 개인 숭배가 문화 전체를 재편성했다(초인 숭배의 위험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저작에 잘 드러나 있다). 영국 남학생들은 웰링턴 공을 모방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독일인의 롤모델이 되었다.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공화국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그 이름에서 울려 나오는 영웅주의의 메아리가 경외심을 자극했다. 아메리카대륙에서도 조지 워싱턴과 시몬 볼리바르의 인간적 결점은 영웅적 신화에 가려졌다. 헤겔의 영웅 숭배는 피로 물든 폭군들을 향했다. 영웅들은 집단─정당, 민족, 운동─에 봉사했다. 오로지 성자들만이 세계 전체를 위한 덕을 구현한다. 대중의 판단에서 영웅이 성자를 대체하자 세계는 나빠졌다. 민주주의 체제 국가들은 위인이 사회를 구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지도자에게 어느 때보다 큰 권력을 맡겼고 20세기의 수많은 사례에서 그랬듯이 대중선동가와 독재자들에게 스스로 투항했다."(518-9)
"헤겔은 〈민족(Volk)〉을 하나의 이상으로 보았다. 헤겔에게 그것은 초월적이고 변하지 않는 실재였다. 일부 민족주의 옹호자들은 역사와 과학에 의해 민족주의의 정당성이 인정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민족주의는 흔히 신비주의적이거나 낭만적인 언어로 표현되었다." "민족주의는 일관된 정치적 프로그램이라기보다는 낭만적인 갈망의 상태였기 때문에 음악으로 가장 잘 표현되었다. 체코의 음악가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이나 잔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는 어떤 민족주의 문학 작품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낭만주의 시인들은 민족주의는 〈사고가 아닌 감각〉이라는 가치에 속한다고 선포했다. 주세페 마치니─이탈리아의 통일을 위해 싸운 공화주의자─에게 민족은 개개인에게 잠재적인 도덕적 완벽성을 마련해준다고 말하는 〈신의 음성〉을 들었다. 시몬 볼리바르는 침보라소산에서 〈나를 사로잡은 콜롬비아의 신〉이 〈이상하고 탁월한 불〉을 피운 순간 〈섬망〉을 경험했다고 전해진다."(536-8)
제9장 카오스의 역습: 확실성을 풀어헤치다
"앙리 베르그손은 자신의 저서 『창조적 진화』에서 우주를 움직이는 힘에 이름을 붙였다. 베르그손은 그것을 엘랑 비탈(élan vital, '생의 약진')이라고 불렀다. 엘랑 비탈은 자연을 진화론에서처럼 내부에서 지휘하지 않았고 신처럼 외부에서 지휘하지도 않았다. 엘랑 비탈은 물질의 질서를 다시 세우는 역량을 지닌 정신적인 힘이었다. 일부 낭만주의자나 주술사가 추구하는 '세계영혼'과 엘랑 비탈이 어떻게 다른지도 분명하지 않다. 이것은 아마 베르그손에게도 그러했을 것이다. 베르그손이 엘랑 비탈을 떠올린 것은 우리에게는 과학이 예측하는 것과 다른 미래를 만들 자유가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베르그손은 과학을 공격하는 비합리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객관적 실재들을 정신적 구성물로 제시하고, 생각하지 않는 창조물에 목적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과학적 결정론이 인간을 제약하거나 방해한다고, 심지어 위협한다고까지 느낀 사람들은 베르그손의 생각을 환영했다."(585-6)
"아인슈타인의 우주에서 겉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속임수였다. 질량과 에너지는 서로 전환이 가능했다. 평행선들은 서로 만났다. 뉴턴 이래 지배적이었던 질서 개념들은 우리를 호도하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상식적인 지각은 이상한 나라 앨리스의 토끼굴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지만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자극을 받아 수행된 실험들은 하나같이 아인슈타인의 이론의 타당성을 확인시켜주는 듯했다." "더욱이 상대성 이론은 새로운 역설들을 드러내는 데 일조했다. 아인슈타인이 코스모스의 큰 그림을 다시 상상하는 동안 다른 과학자들은 코스모스를 구성하는 세밀한 부분들에 집중했다. 사실 물리학자들은 그전부터 빛의 이중적인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씨름하고 있었다. 빛은 파동일까 입자일까? 모든 증거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빛은 파동인 동시에 입자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인정하는 것뿐이었다. 〈양자 역학(quantum mechanics)〉의 새로운 담론은 정합성이라는 오래된 개념을 쫓아냈다."(593-4)
"프로이트는 20세기의 모델이자 멘토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과학적 통설을 (인류학자) 보애스보다도 더 세차게 뒤엎었다. 프로이트의 발견 혹은 주장은 사회들 사이의 관계를 넘어서 개개인의 자아에 관한 이해에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동기는 상당수가 무의식적이라는 프로이트의 주장은 책임, 정체성, 성격, 양심, 사고 방식 등에 관한 전통적 가정들을 모조리 부정했다." "프로이트의 〈과학〉은 잘 작동하는 듯했으나 가장 엄격한 검증을 통과하는 데는 실패했다. 칼 포퍼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어떻게 구분하느냐고 물었고 심리분석 협회는 이 질문에 크게 출렁였다. 그들은 마치 종교 분파나 비주류 정치 운동 세력처럼 굴며 서로의 오류를 지적하고 반대자들을 협회에서 추방했다. 여하튼 프로이트가 문화의 영향을 과소평가한 것만큼은 확실했다. 문화는 심리 형성에 영향을 주며 각기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의 경험은 문화로 인해 다양한 색채를 띤다."(603-4)
"20세기의 화가들은 자신들이 직접 본 것보다는 과학과 철학이 묘사한 것을 그리는 경향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두드러졌다. 이 시기의 혁신적인 예술작품은 과학과 철학이 불러일으킨 동요와 충격을 표현했다. 1907년 큐비즘은 산산이 조각난 거울에 비친 것 같은 파편화된 세계의 이미지를 제시했다. 큐비즘 운동을 창시한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는 원자론이 시사한 광경─어딘가 서로 잘 맞지 않는 파편들로 이루어진 무질서하고 통제할 수 없는 세계─을 확인시켜주는 듯했다." "1911년 바실리 칸딘스키는 러더퍼드가 원자에 관해 설명한 글을 읽고 〈두려운 힘을 느꼈다. 마치 세계의 종말이 다가온 듯했다. 모든 것이 힘이나 확실성을 잃고 투명해졌다〉고 말했다. 이러한 효과들은 새로운 양식의 출현에 반영되었다. 이 새로운 양식은 실제 대상을 연상시키는 모든 것을 억눌렀다. 칸딘스키가 시작한 이 완전한 〈추상〉 미술 사조는 대상을 알아볼 수 없게 묘사하거나, 아예 묘사하지 않았다."(610-1)
제10장 불확실성의 시대: 20세기의 망설임들
"19세기 말을 향해 갈 즈음 모든 측정 가능한 변화의 그래프는 지면을 벗어났다. 토템 연구자 알렉산더 골든와이저는 문화적 변화는 비활성 국면 사이에서 〈솟구치듯 출현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스티븐 제이 굴드가 진화는 길게 이어지는 평형상태 사이에서 〈단속적으로〉 일어난다고 생각한 것과 대체로 비슷했다." "양자의 세계에서는 더 많은 모순이 겹겹이 쌓였다. 전자를 관찰한 사람들은 아원자 입자들이 각자 보유한 에너지양과 어긋나 보이는 위치로 이동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과학자들은 다시 그들의 선배인 연금술사들과 동등한 위치로 되돌아갔다." "과학은 다른 분야의 연구자들이 진리성을 보장받기 위해 선망하는 객관성의 잣대다. 20세기의 철학자, 역사학자, 인류학자, 사회학자, 경제학자, 언어학자, 심지어 일부 문학과 신학 연구자들까지도 주체로서의 지위를 탈피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과학자라 부르며 객관성을 가장했다. 하지만 이것은 기만적인 기획으로 판명되었다."(626-8)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원래 오래된 철학인 실존주의가 다시금 유행했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소외(alienation)〉를 가장 큰 사회 문제로 파악했다. 경제적 경쟁 관계나 근시안적 유물론은 공동체가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고, 부단히 움직이는 뿌리 없는 개인들을 남겼다." "사르트르는 말했다. 〈인간은 어떤 상태일 뿐이다.〉 아니면 〈인간은 자기 스스로 만든 어떤 것일 수밖에 없다. (···) 인간은 자기 자신을 미래로 내던지는 존재이자, 미래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을 상상하며 그러한 스스로를 의식하는 존재다〉. 〈그 결과 인간은 쓸쓸하고 그 어디에도 매달릴 곳이 없다. (···) 존재가 진정으로 본질에 선행한다면 인간은 어떤 고정된 (···) 인간의 본성을 지시함으로써 설명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결정론은 없다. 인간은 자유롭다. 인간은 자유다.〉 실존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자기 관조라는 방어벽 안에 가둘 수 있었다. 자기 관조는 추악한 세계에 대한 혐오 속에서 찾은 안전한 공간이었다."(635-6)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은 〈언어론적 전회(轉回)〉로 그치지 않았다. 언어 문제들은 불확실성과 결합해 지식의 접근성─과 심지어 실재성─에 대한 불신감을 조성했다. 전쟁, 학살, 스탈린주의, 히로시마, 근대 건축 운동이 만들어낸 싸구려 유토피아, 전후 유럽인이 살고 있는 과도한 계획 사회의 음울함 같은 고통스러운 사건들과 새로운 기회들은 모더니즘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소외된 사람들은 문화를 되찾아야 했다. 맹렬한 속도로 발전하는 전자 기반 오락 기술이 그들을 도왔다. 이러한 배경에 미루어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부분적으로 세대적인 영향을 받은 듯 보인다. 베이비붐 세대는 실패한 부모 세대와 절연하고 탈식민주의와 다문화와 다원주의의 시대에 어울리는 감수성을 껴안았다. 북적이는 세계와 지구촌에서 삶의 접촉들과 연약함은 다양한 관점을 갖기를 권장 또는 요구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우리의 역사적 맥락이 부과한,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문화적으로 조작된 공식이었다."(641-2)
"카오스 이론은 분석의 한 층위를 드러냈다. 이 층위에서 원인과 결과는 도저히 추적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모델은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듯했다. 이것을 임계 질량에 적용하면 지푸라기 하나가 낙타의 등을 무너지게 할 수 있었고, 작은 먼지 알갱이가 산사태를 일으킬 수 있었다. 사실상 설명이 불가능한 어떤 갑작스러운 변동이 시장을 교란하고, 생태계를 망가뜨리며, 정치적 안정을 뒤엎고, 문명을 산산이 부수고, 우주의 질서를 찾으려는 노력을 무효화하고, 진자의 진동과 중력의 작용을 말한 뉴턴 시대 이래 이어져온 전통 과학의 성소를 침범할 수 있었다. 20세기 말의 희생자들에게 카오스에 의한 비틀림은 복잡성의 작용으로 보였다. 그러니까 체계는 다종다양하고 상호연결된 부분에 더 많이 의존하면 할수록 어느 깊은 수준에서의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변화로 인해 전체가 붕괴할 가능성이 더 증가했다. 역설적으로 카오스 이론은 더 깊고 높은 수준의 정합성을 탐색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었다."(652-3)
"조심성, 회의주의, 자기 회의, 머뭇거림 같은 것은 우리가 진리로 오를 때 내딛곤 하는 발판이다. 내가 불안해지는 때는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한 확신에 차 있을 때다. 그릇된 확실성은 불확실성보다 훨씬 더 나쁘다. 하지만 후자는 전자를 야기한다. 20세기 사회·정치 사상에서는 새로운 교조주의(dogmatism)들이 과학의 새로운 결정론들을 보완했다. 변화가 좋은 것인지 모른다. 변화는 항상 위험하다. 불확실성에 대한 반작용으로 유권자는 대중 선동가가 내세우는 그럴듯한 해결책에 쉽게 현혹된다. 종교는 교조주의와 근본주의로 변질된다. 사람들은 변화의 원인으로 짐작되는 대상, 특히─전형적으로─이민자들과 국제기구를 공격한다. 자원 고갈이 두려워지면 큰 희생을 요구하는 잔혹한 전쟁을 일으킨다. 이러한 반응들은 변화의 형태이되 하나같이 극단적이고 일반적으로 폭력적이며 언제나 위험한 형태의 변화다. 사람들은 보수적인 이유에서, 익숙한 삶의 방식을 붙들기 위해 이러한 형태의 변화를 택한다."(682)
"반(反)다원주의는 여전히 흔하다. 21세기 초 몇 년간 일부 서양 국가에서는 다문화주의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문화 통합〉 정책들이 유권자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이들 국가에서는 유구한 역사의 공동체들이 세계화를 비롯한 여러 거대한 종합적 흐름에 맞서 자신들의 문화를 방어하는 태세를 취했다. 어디에서나 나와 다른 문화를 가진 이웃과 평화롭게 공존해야 한다고 설득하기가 갈수록 더 어려워지고 있다. 세르비아, 수단, 인도네시아는 폭력적으로 분리되었다. 체코 공화국과 슬로바키아는 평화롭게 결별했고, 영국의 스코틀랜드나 스페인의 카탈루냐와 바스크는 동거의 조건을 재협상했다. 하지만 다원주의의 아이디어는 여전하다. 다원주의는 다양성이 있는 세계에 대한 유일한 현실적인 미래를 약속하기 때문이다. 다원주의는 유일하게 전 세계 모든 민족이 다 같이 진정으로 고르게 누릴 수 있는 이득을 제공한다. 역설적이지만 다원주의는 어쩌면 우리를 통합할 수 있는 하나의 신조다."(6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