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인 블랙니스 - 아프리카, 아프리카인, 근대 세계의 형성, 1471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하워드 프렌치 지음, 최재인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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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원정을 떠나기 한참 전에, 콜럼버스는 오늘날의 가나Ghana, 엘미나Elmina에 자리한 유럽 전초기지로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항해를 했다. 그 기지는 유럽인이 해외에 구축한 최초의 대규모 요새였다. 15세기 중엽 유럽의 서아프리카 원정은 그 지역 어딘가에 막대하게 비축되어 있는 금의 원천을 찾는 일에 집중되었다. 1471년 포르투갈인이 개척했고, 1482년 엘미나에 요새를 건설하면서 확보한 황금무역의 규모는 막대하여, 이 수입으로 훗날 바스쿠 다 가마의 아시아 항로 개척 임무도 지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 가마가 캘리컷까지 항해한 이래 거의 10년 동안, 아시아로의 항해는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 이 10년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인이 엘미나에 도착한 뒤부터 그들이 인도에 상륙할 때까지 30년에 가까운 시기에 대해서도 역사교육은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무렵에 유럽과 오늘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라고 불리는 지역이 불가역적인 깊은 관계를 맺었고, 그 과정에서 근대의 기초가 마련되었다."(15-6)


1부 아프리카의 ‘발견’


"이베리아인의 탐험 가운데 매우 이례적인 형태로 꼽아온 디아스(1488년 희망봉에 도달한)의 행로를 계속 추적해보려는 노력이 사실 초기에는 없었다. 그 시대 포르투갈 왕 주왕 2세와 관련된 사료들을 보아도 디아스의 업적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와 관련한 강력한 단서를 포르투갈 왕실이 즐겨 사용한 별명에서 찾을 수 있다. 주앙 2세는 당대에 '아프리카인 주앙'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신하들이 서아프리카에서 풍부한 자원에 접근해 이를 가져왔기 때문인데, 이는 우연이 아니었다. 포르투갈은 처음부터 서아프리카에서 부를 찾고 있었다. 아프리카에 관심을 둘 만한 무언가가 있었음을 인정하기보다, 아프리카를 돌아서 가는 길을 찾으려는 것이었다는 발상이 '대항해시대'를 주제로 한 책마다 일관되게 유지되어왔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현상의 중요한 기초를 제공했다. 이렇게 아프리카를 그림에서 지우는 것이 서구가 근대로 이르는 길을 설명하는 방식의 가장 근저에 놓인 특징이다."(61-2)


"지금은 에스파냐령인 카나리아제도에서 아프리카 대륙에 가장 가까운 섬은 모로코의 대서양 해안 남단에서 불과 62마일(약 10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카나리아제도는 세계사 책에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최근 시사문제에서도 거의 언급되지 않지만, 이 지역은 대서양에서 유럽인이 처음으로 식민화를 실행한 곳이다. 포르투갈인, 에스파냐인 등이 해외 제국에 대한 경험을 쌓은 곳이고, 그 과정에서 사악하기 그지없는 수단이 수없이 동원된 지역이다. 대서양에서 동산노예제chattel slavery, 집단학살, 폭력적인 교리 주입, 정착민 식민주의 등이 가장 먼저 선보여진 곳이 바로 카나리아제도이다." "카나리아제도 선주민의 저항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려는 유럽인의 노력이 성과를 거둔 것은 1496년에 가서였다. 한편 그 무렵 포르투갈인은 이미 서아프리카의 문을 크게 열어젖힌 상황이었고, 이는 세계를 변화시켰다. 당시는 이미 디아스가 인도양을 항해하고,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뒤였다."(81-2)


"포르투갈은 에스파냐로부터 카나리아제도에 대한 통치권을 빼앗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이는 포르투갈이 15세기 대서양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탐험국가가 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 덕분에 1420년대에 여러 새로운 지역을 개척했다. 우선 1424년 마데이라제도, 그리고 곧이어 아조레스제도를 발견했다. 작은 규모의 섬들이지만 이를 통해 엔히크는 상당한 정치적 후원세력과 금전적 소득을 확보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새로 정복한 마데이라섬에 제노바 사업가들과 함께 대서양 세계에서는 아마도 처음으로 제당소를 세우고 엔히크가 그 소유자가 된 것이다. 이는 수익성이 높은 투자인 동시에 미래를 예고하는 사업이었다. 15세기 중엽, 마데이라는 매년 약 70톤의 설탕을 생산했다. 당시 설탕은 귀한 외국산 약재로 여겨졌다. 포르투갈인은 설탕을 대량생산하고자 유일하고 현실적인 방책으로 노예 노동을 대규모로 투입한다는 결단을 내렸다. 마데이라에 처음 노예로 들여온 이들은 카나리아인이었다."(90-1)


"1440년대에 노예제와 관련해 발생했던 포르투갈인과 아프리칸인의 접촉은 모두 해변에서 펼친 기습공격을 둘러싸고 발생했다. 포르투갈의 아비스 왕조는 약탈을 일삼는 무사세력에 기초해 수립되었다. 그 나라의 패기만만한 팽창 계획의 핵심에는, 전쟁에는 항상 보상이 따르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중요하게 자리해 있었다. 엔히크는 비용을 많이 들여서 아프리카 해안을 탐험하며 황금을 찾았지만, 금은 거의 거두어들이지 못했고, 황금 공급망에 대한 통제권도 거의 확보하지 못했다. 황금을 향한 탐험에 소모된 비용이 점점 쌓이면서, 탐험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다른 소득원을 찾아야 했다. 도식적으로 간단히 설명하면, 황금 때문에 포르투갈은 노예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고, 노예는 수익성이 높은 새로운 산업인 설탕 산업의 팽창을 추동했다. 인종은 유럽인 사이에서 노예화의 적격성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흑인은 유난히 비천하며 문명이 선사하는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간주되었다."(96-100)


"포르투갈 상인은 아프리카로 계속 금속제품과 직물을 수출하면서 아프리카에서 획득한 상품을 북유럽인에게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는 유럽 자체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지금까지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포르투갈인이 북유럽에 판매한 아프리카 제품에는 많이들 탐냈던 '천국의 곡물' 혹은 말라게타malagueta 후추라고 불리던 칠리 같은 열매도 포함되어 있었다. 포르투갈인이 이를 오늘날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 지역 부근에서 대량으로 들여왔는데, 그래서 이 지역을 '후추 해안Pepper Coast'이라고 부른다. 이 '천국의 곡물'을 구매하려고 북유럽인은 포르투갈인에게 새로 발견한 아프리카 사회들에서 수요가 높았던 옷감과 금속제품을 팔았다. 지금은 거의 기억되지 않는 거래지만, 이는 첫 번째 삼각무역이라고 부를 만한 가치가 있다. 대서양을 횡단하는 유명한 삼각무역이 정착한 것은 이보다 한참 뒤였다. 아프리카와 교역을 한 덕분에 남유럽은 북유럽과 경제적으로 보다 더 밀착될 수 있었다."(108)


"오늘날 가나가 위치한 지역의 황금을 둘러싸고 벌어진 작은 해전을 거친 후에, 포르투갈은 교회가 승인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모든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한편, 에스파냐는 오랫동안 겨뤄왔던 카나리아제도에 대한 통치권을 마침내 얻을 수 있었다. 이후 10년 동안 포르투갈은 엘미나에서 매년 황금 8000온스(약 227킬로그램)를 가져갔는데, 그 양은 1494년까지 거의 세 배로 증가했고, 이 증가세는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포르투갈이 서아프리카의 엄청난 황금을 새롭게 독점하면서, 에스파냐가 할 수 있는 것은 '헤라클레스의 기둥' 너머로 멀리까지 나아가는 것과 대서양의 극서쪽까지 새로운 탐사를 계속 밀어붙이는 일이었다. 다시 말하면,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에서) 새롭게 발견한 부를 보면서, 에스파냐도 자기만의 귀금속 원천지를 찾아야 한다는 집착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콜럼버스는 이사벨라 여왕과 나눈 대화에서 자신이 대서양을 건너려고 하는 이유가 황금이라고 설명했다."(116-7)


2부 중심축


"1481년, (특히 에스파냐에게) 엘미나에 대한 권리를 엿볼 기회도 주고 싶지 않았던 주앙 2세는 가나 해안가에 성채 하나를 세우라고 명령했다. 주앙 2세는 엘미나 성채 건립의 지휘관으로 아잠부자를 앉혔다. 그의 동료 중 한 명이 디아스였다. 귀족 디아스는 이로부터 7년 뒤,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아프리카 남단에 도착했고, 그곳을 돌아 인도양까지 갔다. 이후 몇 년간, 훗날 '대항해시대'로 불리게 될 시대의 여러 거장이, 포르투갈이 사하라 이남 지역에 처음 세운 전초기지인 엘미나로 들어오거나 그곳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경력을 갖게 된다. 이는 포르투갈이 시작한 지구적 차원의 사업에서 엘미나가 핵심적 역할을 했음을 증명해준다. 이 거장 중에는 훗날 아시아에 대한 제국주의적 정복의 길을 훤하게 열었던 알부케르크와 멀리 동남아프리카에 자리한 주요 왕국인 콩고를 '발견'한 캉Diogo Cão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 리스본에서 캉의 콩고 개척사업은 인도로 가는 길을 찾는 것보다 훨씬 중시되었다."(124-5)


"15세기의 막바지에, 포르투갈은 황금 사업에 조바심을 냈고, 이에 따라 1482년 성채가 완공되자마자 교역은 빠르게 성장했다. 엘미나에 성채를 완공한 이후부터 16세기 중반까지, 포르투갈의 카라벨은 '황금해안'을 오가며 왕실 금고에 비축할 몫으로 매달 46~57킬로그램의 귀금속을 가져왔다. 포르투갈 왕국의 재무부를 이전에는 '기니의 집Casa da Guiné'이라고 했는데, 이는 검은 아프리카와의 교역이 재정에서 가장 중요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제는 이름을 '미나의 집Casa da mina'으로 바꾸고, 리스본의 왕궁에 있는 건물로 이주했다. 이 왕국의 번영에서 엘미나의 황금이 차지하던 중요성을 이보다 더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는 없을 것이다. 15세기 마지막 20년 동안, 엘미나와의 교역으로 포르투갈 왕실 수입이 거의 두 배로 증가했다. 1506년까지, 포르투갈 제국의 촉수가 이제는 브라질을 덮었고, 아시아로 깊숙이 뻗어나가고 있었다. 황금해안은 포르투갈로 매년 약 680킬로그램의 황금을 보냈다."(135-6)


"노예 플랜테이션으로의 혁신들은 상투메섬에서 결집되어 거의 형태가 완결되었다. 이는 장기적으로 보면 같은 시기에 에스파냐가 진행했던, 훨씬 더 유명한 팽창정책보다 월등하게 큰 경제적 효과를 낳았다. 이는 폭력을 통해 관리된 흑인 노동력이 훨씬 더 지속적이고 생산적으로 경제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에스파냐의 은과 브라질의 황금 호황이 막대하기는 했지만, 결국은 사그라들었고 절정기는 한 세기를 넘지 못했다. 반면에 흑인 노예를 동력으로 삼는 플랜테이션 농업은 쿠바를 비롯한 대서양 세계 여기저기에서 모방했다. 직간접적으로, 여기서 생겨난 노예 플랜테이션 모델의 정수가 근대사에서 발생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대규모 농업혁명, 즉 대규모 설탕 생산과 면화 생산의 근간이 되었다. 신세계에서 노예 플랜테이션 경험은 작동할 수 있는 모든 곳으로 퍼져나갔다. 여기저기에서 재배되던 인디고와 담배 경작으로도 빠르게 전파되었고,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쌀과 커피와 카카오 경작으로도 이어졌다."(167-8)


"유럽의 신세계 제국주의 초기 단계에서 크리올은 꽤 다양하게 활동했다. 그들은 흑인세계와 백인세계를 오가며 두 세계 사이의 간극을 메웠고, 그들만의 대륙횡단 통신망과 형제 관계(포르투갈어로 코프라디아스cofradias)를 유지해갔다. 선박이나 항구 안팎에서 일하던 노동자 중에 크리올이 막강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은 대부분 어렵지 않게 진행되었다. 근대가 막 시작되던 시점에서, 이 크리올 공동체 출신들이 신세계를 향한 콜럼버스의 항해에 함께했다. 또 다른 이들은 발보아, 코르테스, 소토, 피사로의 역사적 정복행위에 함께하기도 했다. 이렇게 크리올은 상업적·사회적 기구들이 잘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윤활유가 되었다. 그들은 최고의 중개자였다. 노예제의 역사를 연구한 미국 역사학자 벌린은 식민지에 정착했던 크리올을 〈특허장 세대〉라고 했다. 이는 플랜테이션 노예제가 광범하게 수립되기 이전에 꼭 필요한 역할들을 했던 아프리카계 아메리카인을 지칭한다."(190-1)


3부 아프리카인을 향한 각축전


"우리가 제국주의 시대 유럽 국가들 사이의 경쟁을 상상할 때, 이를 영토의 지배권에 대한 것이며, 더 넓은 영역을 차지할수록 더 비중 있는 나라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아프리카인을 향한 각축전은 다른 원리에 입각해 있었다. 땅의 넓이보다는 흑인 노동력 공급을 통제하거나 사탕수수를 재배할 수 있는 비옥한 토지를 확보하는 문제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대략 한 세기 반 정도 뒤에 도래할 '면화 대량생산Big Cotton'의 시대 전까지는, 엘미나와 같은 작은 해안 전초기지나 포르투갈의 앙골라 식민지처럼 소규모의 고립된 지역이나 서인도제도의 섬 같은 곳을 장악했을 때 가장 큰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지금은 미국 영토의 일부가 된 오하이오강 계곡을 둘러싼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도 카리브해에서 두 강국 사이에 벌어졌던 경쟁이라는 맥락에서 보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유럽의 지배자들과 여론 모두 해운업과 무역에 국운이 달려 있다고 생각했는데, 영국과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다."(201-2)


"프랑스는 경쟁국 영국을 아메리카 본토에 묶어두어야 영국이 프랑스령 서인도제도 식민지들을 탐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윌리엄 피트가 1757년 집권했을 때, 그는 프랑스의 카리브해 사탕수수 재배 섬들을 공격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서인도제도에서 피트의 첫 목표는 마르티니크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롱아일랜드의 4분의 1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섬이지만, 설탕 생산을 위해 많은 노예를 수입하고 있었다. 식민지 시대를 포함해 미국사를 통틀어 미국으로 팔려간 아프리카인 전체 숫자보다도 더 많은 아프리카인이 이 섬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이 섬에 배치된 방어용 대포의 위력에 눌려, 영국은 마르티니크 대신 부근의 과들루프를 공격했다. 그들의 반복된 행동들로 판단해보건대, 이 시대 유럽의 선진 강대국은 노예무역과 노예무역의 공급을 받는 플랜테이션 지대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희생도 각오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203-4)


"17세기 당시에는 〈앙골라 없이는 노예도 없고, 노예 없이는 설탕도 없으며, 설탕 없이는 브라질도 없다〉라는 말이 있었다. 이 말처럼 앙골라인이 공급했던 노예 노동력 덕분에 브라질은 설탕 강국이 되었고, 놀라울 정도로 짧은 기간 내에 포르투갈에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앞서가는 중심지가 되었다. 제국주의 시대를 선도하면서 포르투갈은 부국이 되었지만 인구 규모가 작아 인적 자원이 빈약했다. 그래서 포르투갈 모델은 용병에 기초해 있었고, 이것이 발목을 잡았다." "네덜란드인은 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인 노예를 확보하는 것이 포르투갈을 패퇴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여겼고, 훗날 브라질이 네덜란드에 이익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1637년 네덜란드가 엘미나를 장악하고 곧이어 상투메섬과 루안다를 정복하자, 포르투갈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서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군주의 제국 자산들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면서, 대서양 뒤편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218-20)


"네덜란드의 기획은 초기 에스파냐나 포르투갈 정복 사업의 임기응변적인 성격과는 전혀 달랐다. 이는 이질적이지만 상호 보완할 수 있는 환대서양의 식민지들을 묶어 하나로 통합된 제국을 세운다는 고도의 계획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 기획에 따라, 네덜란드는 중앙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 즉 엘미나와 루안다 양쪽에서 여러 주요 노예 공급지를 지배했다. 동시에 네덜란드는 가장 크고 생태적으로도 가장 유망한 설탕 생산지, 즉 브라질에서 네덜란드가 정복한 토지들을 지배했다. 한편, 네덜란드는 북아메리카 본토에서 오늘날 매사추세츠부터 델라웨어에 이르는 지역에 정착지들을 세워 지배하기도 했다. 당시 그 지역은 뉴네덜란드로, 뉴욕은 뉴암스테르담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 영토들은 곧 초기 모피무역에서 벗어나 네덜란드 플랜테이션 경제권에 식량을 공급하는 역할로 변모해갔다. 17세기 중엽부터 빠르게 성장하던 영국은 비슷한 종류의 시너지 효과들을 추구했고, 네덜란드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갔다."(250-1)


"노동의 윤리적 기반과 사회적 가치에 대한 새로운 개념들, 우리가 인도주의라고 부르는 생각이 영국에서 막 생겨나고 있었지만, 흑인은 그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다. 유럽인이 아프리카인 노동력을 〈소나 말처럼〉 극한까지 착취해도 문제 없이 용인되었다." "흑인을 잔인하고 타락한 체제에 복속시키는 것이 생산성을 높이려는 목적만은 아니었다. 이는 아주 초기부터 백인에게 심리적으로 중요했다. 이는 아메리카 전역에서 새로이 등장하고 있던 잡다한 혼합 사회들에서 백인의 정체성을 고양시키는 방법이었다. 아메리카 사회들은 백인에게 유럽 태생은 근본적으로 다른 유형의 인류이며, 흑인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확인시켜주는 증거가 되었다." "설탕 플랜테이션 세계는 들판 혹은 보일러 앞에서 일하다 사망한 노예의 비율이 높다는 점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사업의 일반적인 과정 혹은 삶의 평범한 현실로 여겼다. 설탕 생산에 투입된 노예의 기대 수명은 보통 7년을 넘지 못했다."(265-7)


"바베이도스섬이 도입한 또 다른 중요한 혁신은, 무장을 한 〈몰이꾼들drivers〉이 원하는 속도대로 노동자를 몰아붙이며 일하게 만드는 집단노동방식gang labor이다. 이 시스템 역시 리처드 드랙스가 했던 초기 실험에서 처음 시도되었다. 드랙스는 2주마다 관리자에게 보고서를 제출하게 하는 관행을 만들었다. 이 보고서를 근거로 드랙스는 노예와 감독관 모두에게 그가 적합하다고 생각한 보상을 주기도 하고, 그보다 더 빈번하게는 징벌을 내렸다. 드랙스의 플랜테이션에서 처음 선보인, 기록해야 한다는 집착 덕분에 소유주는 서열이 있고 번호가 매겨진 여러 작업단을 조직할 수 있었다." "드렉스의 체제는 산업화된 스타일의 노동 분업과 조직화, 그리고 기록 보존을 구체적으로 예고했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이 영국에서 결합되기까지는 한 세기 이상이 걸렸다. 전문화를 강조하고 시간을 크게 고려하는 작업 조정과 같은 경영 기술들은 근대의 조립라인을 예언하는 사례였다."(270-2)


"1642~1649년 영국 내전과 1688~1689년 명예혁명에서 중요한 특징은 노예제를 통해 재산을 일군 새로운 사업가 엘리트의 역할이 컸다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건 모두 영국이라는 좁은 관점에서 보면 왕정의 권력을 제한하여 '자유'를 확대하는 것을 기본 목표로 한 싸움이었다. 이에 대해 애스모글루, 존슨, 로빈슨은 그들의 논문 〈유럽의 부상〉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서양 무역은 영국과 네덜란드(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공국)에서 정치권력의 균형을 바꾸어놓았다. 대서양 무역이 왕실과 그 주변세력 밖에 자리한 교역 관계자들, 즉 해외무역을 하는 다양한 대상인들, 노예무역상, 다양한 식민지 대농장주 등을 부유하고 강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경로를 통해, 대서양 무역은 왕실 권려게 맞서 상인을 보호하는 정치제도가 등장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그런 사례 속에서, 아프리카인의 땀과 생산성의 부산물로 유럽에 주어진 중요한 변화는 시민 사회와 근대적 공론장의 등장이다."(291-2)


4부 비단뱀신의 저주


"1483년 포르투갈 탐험가 캉이 오면서 유럽인과 접촉하기 시작했을 때, 콩고 왕국은 이미 정교하게 발전된 국가였다. 또 다른 강국 베냉은 유럽과의 접촉 이전에 다각화된 경제를 갖춘 나라로, 유럽 상품이나 유럽 종교를 거의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실, 베냉은 새로 온 유럽인과 노예무역을 시작하자마자 금방 중단시켰다. 이와 대조적으로, 그리고 그 나름의 독특한 이유로 콩고 지배자에게 기독교는 즉각적으로 강력한 매력을 발휘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그 이전부터 콩고에 퍼져 있던 믿음으로 설명할 수 있다. 운명적인 우연의 일치로, 콩고의 우주관에는 바다 건너 어디엔가 더 높은 존재가 거하는 영역이 있는데, 그곳에는 새하얀 생명체들이 창조되어 살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1491년 5월 3일은 콜럼버스가 동인도제도를 찾기 위해 에스파냐에서 서쪽으로 첫 항해를 나가기 15개월 전이다. 그런데 이날, 콩고의 왕 '은징가 아 은쿠아'(통치명 주앙 1세를 자처했다)가 자기 궁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362-4, 369)


"15세기 말 콩고와 포르투갈이 쌍무관계를 수립한 이래, 콩고는 포르투갈에 공물을 제공하지 않았고, 포르투갈도 공물을 요구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주앙 1세가, 그리고 다음에는 그의 아들 아폰수 1세가 포르투갈에 다양한 종류의 원조를 요청하고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일들은 계약을 통해서 진행되었고 꼼꼼하게 보상을 받았다." "실제로, 19세기까지 어떤 규모의 아프리카 나라도 유럽인에게 정복된 적은 없다. 유럽인과의 접촉이 단단하게 지속적으로 이어져 노예무역으로까지 치닫게 되었지만, 어떤 정치체도 복속되지는 않았다. 캉이 콩고 왕국을 발견한 이후 약 150년 동안, 콩고 입장에서 보면 포르투갈과 전반적으로 좋은 관계를 구가했다. 이 관계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동료 사이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두 문명이 만났던 당시 콩고 왕국과 제도들에 내재해 있던 어떤 강고함 때문이기도 했고, 콩고의 국정 운영 능력과 아폰수 1세와 같은 지도자들이 갖고 있던 지략과 지성 덕분이기도 했다."(379-80)


"1622년 말, 포르투갈은 임방갈라와 동맹하여 콩고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이는 네덜란드 의회가 서인도회사를 세우고 1년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1625년 콩고 왕 페드로 1세와 소요(해안 지대의 강력한 준자치구역)의 마누엘 백작은 각각 네덜란드 의회에 편지를 보내, 앙골라에서 포르투갈인을 모두 몰아내기 위해 공식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다." "1620년대까지 브라질과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식민지들로 이송된 노예의 절반 이상이 앙골라에서 출발했다. 중앙아프리카 서부에서 오는 인간 파이프라인을 폐쇄시킬 수 있다면, 그것이 서인도회사가 이베이라반도 두 강국의 대서양 복합단지를 근본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콩고의 동맹제안은 아프리카에서도 유럽의 정치 상황을 깊이 있게 파악하고 있던 곳에서만 할 수 있는 제안이었다." "분명한 것은 콩고의 주도적인 전략이 없었다면, 이 시기 대서양에서 네덜란드의 구상은 '위대한 기획'이라는 이름값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397-400)


# 임방갈라Imbangala : 초기 노예무역이나 가뭄으로 인한 약탈과 파괴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용병부대


"수백만 명의 사람을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빼앗아간 대서양 노예무역 때문에, 인류 사회가 처음으로 지구화되던 바로 그 시기에 아프리카는 세계 다른 지역들과의 경쟁에서 크게 뒤처진 상태로 남게 되었다. 이 시기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는 인구가 급증했다. 이 시대 어디에서든, 급속한 인구 증가는 도시화를 촉진했고, 도시화는 모든 종류의 근대화 과정을 차례로 이끌어냈다. 인구증가로 더 크고 더 강력한 국가가 되고, 더 큰 군대를 조직하고 배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인구증가는 시장의 엄청난 확대와 무역이 성장할 잠재력을 의미했다. 그러나 노예제로 아프리카에서 이 모든 것이 빠져나가게 되면서, 아프리카는 외부 경쟁자와 공격자, 특히 유럽인 앞에서 더 취약해졌다. 당시 아프리카에서 유출된 노동력은 기획에 따라 절대 다수가 생산성이 최고조에 올라 있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실 아프리카 인구는 식민화 초기인 20세기 초까지도 계속 감소세였을 것이다."(418-9)


"정치학자 넌Nunn과 그의 동료 완치콘은 아프리카 여러 지역에서 노예무역의 강도와 지속기간과 사회적 신뢰의 지속적인 하락 사이에 강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넌과 완치콘은 〈노예무역은 노예무역을 경험한 종족 집단들의 문화적 규범을 바꾸어놓았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덜 신뢰하게 되었다〉고 분명하게 주장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신뢰수준이 낮은 지역에서 개발된 제도는 더 취약했고, [그들의] 더 취약한 제도는 더 나쁜 행동과 훨씬 더 낮은 수준의 신뢰로 이어졌다. 이런 사회는 비협조적인 행동, 불신, 비효율적인 제도가 평형을 이룬 가운데 갇힌 상태에 머물러 있다.〉 노예무역의 압력하에서 개인은 공동체 내의 다른 사람에게 등을 돌림으로써 올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들이 자리 잡게 되었다." "넌과 완치콘은 〈노예무역이 성행했던 지역에서는 타인에 대한 불신의 규범이 신뢰의 규범보다 더 유익해졌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만연하게 되었다〉고 말한다."(424-6)


5부 검은 대서양과 새롭게 형성된 세계


"전통적인 미국사 교육에서는 거의 강조되지 않지만, 제퍼슨의 루이지애나 프로젝트가 호소력을 가졌던 중요한 매력 중 하나는 미시시피강 계곡과 강안을 따라 세워지고 있던 면화 플랜테이션을 버지니아가 뻗어나갈 수 있는 출구로 이용하여 노예봉기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발상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목적을 위해 1820년에서 1860년 사이에 100만 명의 흑인이 예상대로 '강을 따라 팔려갔다.' 이런 이동은 제퍼슨의 구상을 실현하고, 면화 농장주들의 급증하는 노동력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이는 프랑스가 한때 영국 직물 산업에 중요한 면화 공급지였던 아이티를 상실한 시기와 우연히 일치하면서 더욱 힘을 받았다." "제퍼슨은 앞날을 내다보며 이런 기록을 남겼다. 〈생도맹그St. Domingo에서 시작된 이 역사의 첫 장은 ··· 다른 모든 섬에서 모든 백인이 어떻게 쫓겨나게 될지를 자세히 보여줄 것이다.〉 이는 노예봉기에 성공한 후 1804년에 아이티로 이름을 바꾼 플랜테이션 식민지를 언급한 것이었다."(434-5)


"아이티 혁명 이전 10년 동안 프랑스 선박은 22만 4000명 이상의 아프리카인을 싣고 대서양을 건너가 노예로 팔았는데, 그들 대부분이 생도맹그로 갔다. 1780년대가 되면, 생도맹그가 프랑스 무역량의 3분의 1을 차지하면서 나머지 프랑스식민지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큰 부를 생산했다." "1791년, 나폴레옹이 아이티 노예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라살 후작을 파견했을 때, 그는 그의 군대에 프랑스 혁명에서 직접 영감을 받은 문구인 〈자유로운 삶이 아니라면 죽음을〉이라는 기치를 〈국가, 법, 왕〉으로 바꾸라고 명령했다. 문구에 담긴 체제전복적 성격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이 혁명의 시대에 아마도 가장 일관되게 관철된 규칙이 있다면, 흑인 사이에서 인권과 자유에 관한 정보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취했던 예방조치들이 모두 소용없었다는 점이다. 여러 신세계 노예 사회에서 속박되어 있던 사람들 사이에 돌던 '모두의 바람common wind'의 침투력은 너무도 강해서 어떤 검열체제로도 막을 수 없었다."(441-2)


"1720년대에 생도맹그 식민지가 경제적으로 도약한 직후, 이 지역 백인 사이에서 프랑스 본국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다. '대표 없이 부과된 세금'에 대해 불만을 품은 대농장주들의 반발이 거세졌던 것이다. 이런 대농장주의 반발은 훗날 발생한 미국 혁명의 중심 주제를 선명하게 예견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대농장주는 프랑스 중상주의가 가하는 통제에 대해서도 불만이었다. 중상주의 정책에 따라, 국가는 노예 공급에 대해 독점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프랑스 본국 정부는 식민지 정착자가 상품을 본국에만 판매할 수 있게 했고, 판매 조건은 본국만이 결정할 수 있게 했다. 대농장주의 분노는 1780년대에 다시 불이 붙었다. 프랑스가 노예에 대한 착취를 규제하는 일련의 규정들, 즉 흑인법Code Noir을 제정하는 등 온건한 개혁 정책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18세기까지, 재산 소유자의 신성한 권리에 대한 침해가 백인이 지배하는 노예제 사회들에서 거의 보편적인 주제가 되었다."(464-5)


"노예들의 충성을 얻어 질서를 회복하기를 희망했던 혁명 프랑스는 불안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식민지의 자유로운 유색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법령을 제정했다. 이는 본국에서 이미 노예제도의 미래를 놓고 논의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생도맹그의 백인은 두 가지 발전 모두에 대해 격분했다. 한 대농장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예제가 없다면, 생도맹그에는 문명도 없다. 우리가 아프리카 해안에서 50만 명의 야만인 노예를 찾아 구매한 것이 그들을 프랑스 시민으로 식민지에 데려오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자유인으로서 그들의 존재는 우리 유럽 형제들의 존재와 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자유인이 된 흑인과 유럽인의 양립을 상상할 수 있었던 사람은 그때에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정확히 1년 안에 그 양립이 실현되었다. 이렇듯 아이티 혁명은 유럽이 대서양 전역에 수립할 노예제를 종식시키고, 세계적 차원에서는 반식민주의를 촉발시키는 데 기여했다."(472-4)


"1802년 3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스스로 제1집정관이라는 혁명적 칭호를 채택한 지 거의 2년 반이 지난 후, 영국은 아미앵에서 영원한 라이벌 프랑스와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유럽에서의 전쟁과 영국과의 해전에서 빠져나오면서, 나폴레옹은 우선 식민지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력을 재확립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1802년 5월, 국민의회는 마르티니크, 레위니옹 등 프랑스령 섬들에서 노예제를 복원하는 것을 놓고 투표하여, 211 대 60으로 복원을 결정했다. 이 와중에 영국은 노예무역을 금지하면서,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가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이렇게 노예무역 금지를 주도하면서 영국은 도덕적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고, 이는 유럽에서 영국이 나폴레옹을 물리치고 영제국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막상 영국은 서인도제도에서 60만 명의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리고 여전히 노예 노동을 통해 수익을 얻으면서 이런 과업을 달성했다."(477, 482-4)


"역사학자 스벤 베커트의 비교에 따르면, 면화가 19세기 미국에 갖는 의미는 석유가 20세기 사우디아라비아에 갖는 의미와 같았다. 플랜테이션 노예의 식량을 제한했던 것은 분명 투자 수익의 문제였지만, 심리적 목적도 확실히 있었다. 이런 한계설정은 사회적 지배와 비인간화라는 고의적 전략의 일부였고, 한 인종을 비하하고 다른 인종을 높여서 인종 간의 차등을 강화하는 방법을 계속 추구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동산노예제는 미국 사회에 존재하는 〈속성에 기초한 서열〉의 기본 요소가 되었다고 봐야 한다. 〈속성에 기초한 서열〉이란 출신이나 특성의 차이에 따라 인생에서 다른 지위를 부여받도록 오랫동안 작동해온 시스템이다. 물론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백인성 자체가 인종적 정체성으로 발전하고 강화되는 과정에서 동산노예제가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백인성은 근대성이 낳은 영향력 있는 부산물 중 하나이다. 모리슨에 따르면, 〈노예제만큼 [백인을 위한] 자유를 두드러지게 보여준 것은 없다.〉"(507-8)


"사실, 인디언 추방에서부터 흑인 노예를 동남부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재배치했던 것, 그리고 미시시피강 계곡과 인근 지역의 목화밭에 새로운 플랜테이션을 설립하는 것까지 이 모두를 재정적으로 열심히 지원했던 것은 월스트리트를 비롯한 여러 북동부 금융가들이었다. 이에 따라 흑인의 몸에 대한 지속적인 착취를 기생적인 남부만의 문제라고는 더 이상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노예제는 대서양 전역에서 광범하게 전개된 경제적으로 중요한 사업이었다." "당시 미국이 상당한 잠재력을 가진 나라인 것은 분명했지만 예정된 강국은 아니었고, 나중에 미국이 이루게 된 경제적 동력을 발산해내는 나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불과 수십 년후에, 즉 19세기 중반에 이르면 미국은 무엇보다도 목화라는 한 가지 작물에 기초한 플랜테이션 노예제에 힘입어 빠르게 산업화된 국가이자 세계 강국으로 발을 내디딘다. 사실, 한 역사가가 쓴 것처럼, 〈면화 무역은 미국 경제가 갖고 있던 유일한 '주요 팽창력'이었다.〉"(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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