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세계사 - 고대 제국에서 G2 시대까지
피터 프랭코판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머리말


1. 실크로드의 탄생 


"에우리피데스가 쓴 《바카이Bakhai》의 첫 구절에서 디오니소스는 〈나는 엄청나게 부유한 동방〉에서 〈그리스로 왔다〉고 말한다. 그곳은 페르시아의 평원이 햇빛에 목욕하는 곳이고, 박트리아의 마을들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아시아와 동방은 그리스인들보다 훨씬 전에 디오니소스가 성스러운 신비에 싸여 〈뛰어 돌아다닌〉 땅이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는 누구보다 열심히 그런 작품을 탐독한 학생이었다. 필리포스 2세가 기원전 336년에 암살당한 후 왕위에 오른 이 젊은 장군이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기 위해 어느 쪽을 향할지는 명백했다. 그는 유럽 쪽은 한순간도 쳐다보지 않았다. 그곳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도시도 없고, 문화도 없고, 위신도 없고, 보상도 없었다. 다른 모든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알렉산드로스에게 문화와 사상과 기회는 (위협도) 동쪽에 있었다. 그의 시선이 고대 세계의 최강국으로 향한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 나라는 바로 페르시아였다."(26-7)


"스텝 지역을 서로 맞물리고 서로 연결된 세계와 이어주는 일은 중국의 야망이 커지면서 가속화되었다. 한漢 왕조(기원전 202~기원후 220) 시대에 팽창의 물결은 국경을 더욱 멀리 밀어내 마침내 당시 서역西域이라 부르던 지방에까지 도달했다." "가장 중요하게 거래된 비단은 사치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 통화로도 쓰였다." "중국인들은 또 외국에서 오는 상인을 통제하기 위해 공식적인 체제를 마련했다. 둔황에서 멀지 않은 솬찬懸泉 역참 유적지에서 출토된 3만 5000점의 문서는 하서주랑河西走廊의 길목에 자리 잡은 마을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난 사건들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준다. 대쪽과 나무쪽에 쓰인 이 문서들은 중국으로 들어가는 방문자들이 반드시 지정된 경로를 이용해야 했고, 나중에 한 명도 빠짐없이 자기 나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정기적으로 점호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세계화는 2000년 전에도 살아 있는 현실이었다. 기회를 제공하고 문제를 일으키고, 기술 발전을 촉진한 일이었다."(34, 38-9)


"역설적이지만 페르시아가 힘을 키울 수 있도록 추동한 것은 바로 로마의 성장과 야망이었다. 예컨대 페르시아는 동방과 서방 사이의 장거리 교역에서 큰 이득을 보았다. 그것은 또한 페르시아의 정치적·경제적 무게중심을 북쪽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기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이전에는 스텝 지대에 가까운 쪽이 중요시되었다. 유목 민족들과 가축이나 말을 거래하고, 스텝 지대의 무시무시한 사람들로부터 내키지 않는 관심이나 요구를 피하기 위해 필요한 외교적 접촉을 지휘해야 했기 때문이다." "로마의 페르시아 정복 노력이 가져온 가장 큰 효과는 페르시아의 정치개혁을 촉진했다는 것이다. 220년 무렵에 등장한 새 왕조 사산제국은 과감한 비전을 내놓았다. 사실상 독립적이었던 지방 총독의 권한을 박탈해서 권력을 중앙에 집중시킨 것이다. 그리고 잇단 행정개혁으로 국가의 거의 모든 측면을 통제하게 되었다. 페르시아가 부상하면서 로마는 전형적인 자기 성공의 희생자가 되었다."(53-5)


2. 신앙의 길 


"고대에 태평양, 중앙아시아, 인도, 페르시아만, 지중해를 연결하는 대동맥을 따라 흘러간 것은 물건만이 아니었다. 사상도 흘렀다. 가장 강력한 사상은 신과 관련된 사상이었다." "실크로드의 지적·신학적 공간은 북적거렸다. 여러 신과 종교, 성직자들과 각 지역의 지배자들이 서로 경쟁했다. 판은 컸다. 당시는 일상적인 일에서부터 초자연적인 일까지 모든 현상을 알고 싶어하던 때였고, 신앙이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 해법을 내놓던 때였다. 서로 다른 종교 사이의 투쟁은 매우 정치적이었다. 이 모든 종교에서 전쟁터 또는 협상 테이블에서 승리하는 것은 곧 문화적 우월성과 신의 축복의 증거로 간주되었다. 이 등식은 간단하지만 강력했다. 제대로 된 신(또는 신들)이 보호하고 아끼는 사회는 번영하고, 거짓된 우상과 공허한 약속에 매달리는 사회는 고난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지배자는 성대한 예배 장소 같은 훌륭한 영적 기반시설에 투자할 강력한 동기를 느꼈다. 그것은 내부 통제의 방편을 제공했다."(63-5)


"페르시아 제국이 팽창하면서, 전통으로 내세워지고 정치적·군사적 성공에 필수적이라고 생각되었던 가치관과 믿음이 강요되었다. 이와 다른 가치관을 주장하는 사람은 추적을 당하고 대부분 살해당했다. 카리스마 있는 3세기의 선지자 마니는 동방과 서방에서 기원한 여러 사상을 혼합하여 한때 샤푸르 1세의 후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마니의 가르침은 이제 파괴적이고 해롭고 위험하다는 비난을 받았고 그의 추종자들은 무자비하게 추적을 당했다. 가혹한 처우를 받은 것으로 지목되고 카르티르가 배척 대상으로 언급한 사람들 가운데 나스라예와 크리스티오네가 있다. 각각 '나사렛인'과 '기독교인'이라는 뜻이다." "조로아스터교가 3세기 페르시아의 의식과 정체성에 깊이 파고들게 된 이유 중 하나가 기독교 전파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기독교는 교역로를 따라 놀라울 정도로 확산되고 있었다. 바로 이 무렵에 조로아스터 사상은 인상적인 급진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73-4)


3. 기독교도의 동방으로 가는 길 


"로마의 붕괴는 아시아 기독교도들의 곤경을 완화시켰다. 스텝 지역 종족들에 대항한다는 공통의 이해관계에 직면하자 로마와 페르시아의 관계가 개선되었고, 로마가 크게 쇠약해지자 기독교는 더 이상 위협으로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이해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100년 전 콘스탄티누스가 페르시아를 공격하여 그곳의 기독교 주민들을 해방시키려고 준비할 때만 해도 로마는 명백한 위협으로 보였다. 이에 따라 410년에 페르시아의 샤 야즈데게르드 1세가 후원한 첫 회의와 이후 몇 차례의 회의를 통해 페르시아에서 기독교 교회의 지위를 공인하고 그 신앙을 합법화하게 된다. 서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그리고 신자들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신앙을 고백하고 실천해야 하는지에 관해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그리스어로 예배를 보는 교회와 시리아어로 예배를 보는 교회간의 의례와 교리의 차이는 계속해서 문제의 근원이 되었다."(96-7)


"서방 교회가 다른 견해를 뿌리 뽑는 일에 매달려 있는 동안, 동방 교회는 야심차고 광범위한 선교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기독교는 심지어 스텝 지대의 유목민들에게도 전해졌다. 6세기 중반에는 아시아 깊숙한 지역에 대주교 관구가 있었다. 바스라, 모술, 티크리트에서는 기독교도 주민이 급증했다. 메르브, 군데샤푸르 같은 도시들과 심지어 중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오아시스 도시 카슈가르에도 영국 캔터베리보다 훨씬 먼저 대주교가 있었다. 이들 지역은 폴란드나 스칸디나비아에 처음 선교사들이 들어가기 수백 년 전의 주요 기독교 중심지였다.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역시 아메리카 대륙에 기독교가 소개되기 1000년 전에 흥성하는 기독교 공동체들의 중심지였다. 어쨌든 바그다드는 아테네보다 예루살렘이 더 가까웠고, 테헤란은 로마보다 성지가 더 가까웠으며, 사마르칸트도 파리나 런던보다 성지와 더 가까웠다. 기독교가 동방에서 번성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잊히고 있었다."(103-4)


4. 혁명으로 가는 길 


"사태의 전개 과정을 확실하게 밝히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7세기 초 아라비아 반도에서 유일신에 대해 이야기한 사람이 무함마드 혼자만은 아니라는 데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또한 페르시아와 동로마의 전쟁으로 경기가 심각하게 위축된 상황에서 무함마드가 선교를 하고 있었다는 데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동로마와 페르시아의 대결 및 그 결과로 나타난 군국화는 히자즈에서 출발하거나 그곳을 통과하는 교역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정부 지출이 군대로 빨려 들어가고 전쟁 수행을 지원하기 위해 국내 경제에 지속적인 압박이 가해졌기 때문에 사치품에 대한 수요는 상당히 감소했을 것이다. 전쟁이 전통적인 시장(특히 레반트와 페르시아의 도시들)을 파괴하면서 남부 아라비아의 경제는 더욱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의 동란이 더 멀리까지 파장을 미치고 일상생활에 혼란을 주자 심판의 날이 임박했다는 무함마드의 경고는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132-3)


"이 새로운 정체성의 한가운데에는 통일에 관한 강한 신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무함마드는 남부 아라비아의 여러 부족들을 하나의 권역으로 통합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로마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은 오랫동안 이곳의 경쟁관계를 조종하여 서로 싸우도록 부추겼다. 후원과 재정 지원은 의존적인 예속 지배층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했다. 치열한 전쟁은 이런 체제를 망가뜨렸다." "그러므로 새로운 신앙이 현지 언어로 설교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아랍인은 이제 독자적인 종교를 가지게 되었다.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이 종교는 그곳 주민들을 위해 설계되었다. 유목민이든 도시인이든, 어느 부족 성원이든, 그리고 민족적·언어적 배경에 관계없이, 무함마드에게 전해진 계시를 기록한 책, 즉 코란에 나오는 그리스어, 아람어, 시리아어, 히브리어, 페르시아어 차용어는 차이보다 유사성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했던 다多언어 환경을 시사한다. 통합은 핵심 교리였고, 이슬람교가 성공할 수 있었던 주된 요인이다."(134-5)


5. 화합으로 가는 길 


"코란에서 무함마드 당대의 사건을 이야기한 얼마 안 되는 구절 가운데 하나는 동로마인들을 좋게 말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기독교도들과 유대인들이 이슬람교 팽창의 최초 국면에 핵심 지지 기반이었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다." "초기 무슬림들이 신봉했던 금욕주의 또한 그리스-로마 세계와 문화적으로 친숙한 판단 기준을 제공함으로써 동의와 감탄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기독교도들을 회유하려는 노력은 아흘 아키타브(성서의 사람들)를 보호하고 존중하는 정책으로 보완되었다. 아흘 알키타브는 유대교도와 기독교도까지 포함하는 용어다. 코란은 초기 무슬림들이 자기네를 이들 두 종교 신자들의 라이벌이 아니라 같은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들로 보았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코란은 인류가 한때는 하나의 '움마'였으며, 이후 차이가 사람들을 갈라놓았다고 탄식조로 몇 차례 이야기하고 있다. 유일신을 믿는 종교들 사이의 유사성은 코란과 하디스에서 강조되고, 차이는 언제나 하찮게 취급되고 있다."(150-1)


# 하디스 : 선지자 무함마드의 언행을 모은 것


"동로마제국과 페르시아 사이의 치열한 대결로 시작된 일련의 사건들은 이례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고대 말기의 두 강대국이 위력을 과시하며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 양국을 모두 대체하여 지배하는 세력이 아라비아 반도 먼 구석 출신의 일파일 것이라고 예견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무함마드에게 고무된 사람들은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건설했다. 그들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부터 이베리아 반도에 이르기까지 관개기술과 새로운 농작물을 들여와서 수천 킬로미터를 뻗어나가는 그야말로 농업혁명을 촉발하게 된다. 이슬람의 정복은 새로운 세계 질서와 경제 대국을 만들어냈다. 자신감과 관대함, 진보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이를 추동했다." "이 세계는 질서가 뿌리 뿌리 내린 곳, 상인들이 부자가 될 수 있는 곳, 지식인들이 존중받는 곳, 서로 다른 생각을 교환하고 토론하는 곳이 되었다. 메카 부근의 한 동굴에서 신통찮게 출발했지만, 전 세계에 걸친 일종의 유토피아를 탄생시킨 것이다."(174-5)


6. 모피의 길 


"이슬람 제국의 등장은 새로운 교통로와 새로운 교역로를 만들어냈다. 북쪽의 스텝과 삼림 지대로 통하는 '모피의 길'이 만들어진 것은 7~8세기의 대규모 정복 이후 수백 년 동안 가용 재산이 급격하게 증가한 직접적인 결과였다. 동물과 모피와 기타 산물을 시장으로 쉽게 가져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부유한 유목 종족들은 당연히 좋은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정착민 세계와 활발하고 믿을 만한 거래 상대였다. 마찬가지로 스텝 지대에서 가까운 도시들은 부유해졌다."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일듯이, 이 시장에 가까운 곳은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시장 접근성에 큰돈이 걸려 있기 때문에 스텝 지대의 종족 집단들은 서로 경쟁했다. 가장 좋은 목초지와 수자원을 놓고 벌이던 경쟁이 도시와 가장 좋은 교역 시장에 대한 접근권을 둘러싼 대립으로 격화되었다. 이는 두 가지 반응을 예상할 수 있다. 폭력에 의해 분열되거나, 종족 내부와 종족들이 통합하는 것이다. 싸울 것이냐 협력할 것이냐, 선택은 둘 중 하나였다."(186-7)


"스칸디나비아의 상인들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바이킹의 시대에 가장 용감하고 가장 억센 남자들은 서쪽으로 가지 않고 동쪽과 남쪽으로 갔다. 많은 사람들은 부자가 되었고, 고향에서뿐만 아니라 그들이 정복한 새로운 나라에서도 명성을 얻었다. 더구나 그들이 남긴 흔적은 북아메리카에서처럼 미미하고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동방에서 새로운 나라를 발견하게 된다. 발트해에서 카스피해 및 흑해와 연결되는 거대한 수계水系를 장악한 상인, 여행자, 침략자 들의 이름을 딴 나라다. 이 사람들은 루시Rus' 또는 로스rhos로 알려져 있었다. 아마도 그들의 빨간 머리칼 때문이거나, 좀 더 가능성이 높은 것은 그들의 노 젓는 솜씨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러시아의 조상들이었다." "그들은 밀랍, 호박, 꿀 등의 교역에 종사했다. 가장 벌이가 좋은 것은 비단 장사였다. 비단은 북쪽으로, 러시아의 수계를 거슬러 올라가 스칸디나비아를 향해 흘러들어가는 막대한 양의 돈의 원천이었다."(196-9)


7. 노예의 길 


"9세기에 유럽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한 수입품들의 대금으로 지불된 것은 노예를 팔아 번 돈이었다. 인기 있는 사치품이나 의료 필수품으로 기록에 점점 더 자주 등장하는 양념류와 마약은 대규모 인신매매에서 번 돈으로 치렀다. 그리고 노예 장사로 이득을 본 것은 바이킹 루시만이 아니었다. 현재 프랑스 동북부 베르됭의 상인들은 내시들을 팔아 많은 이득을 올렸다. 알안달루스의 무슬림이 주요 구매자였다. 장거리 교역에 종사한 유대인 상인들 역시 내시는 물론 〈어린 소녀와 소년들〉의 매매에 깊숙이 관여했다." "노예 교역은 벌이가 좋았다. 그것이 유럽인 이외의 노예들도 동방으로 끌어온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무슬림 사업가들도 뛰어들었다. 그들은 동부 이란을 벗어나서 슬라브인들의 땅을 습격했다. 그런 포로들은 거세를 했고 매우 인기가 있었다. 이 시기의 한 아랍 작가는 슬라브인 쌍둥이를 잡아 그중 한 명을 거세시키면 그는 틀림없이 다른 형제보다 더 재주가 있는 사람으로 자랄 것이라고 썼다."(209-10)


"셀주크인들이 노예 병사에서 막후 실력자로 갑자기 떠오른 것은 1055년에 칼리프의 초청으로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부와이흐 왕조를 몰아내면서부터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왕조 이름의 연원이 된 창시자 셀주크의 아들들 이름이 셀주크인은 본래 기독교였거나 아니면 심지어 유대교도였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아들들의 이름은 각기 미카일(미카엘), 이스라일(이스라엘), 무사(모세), 유누스(요나)다. 그들의 성공이 좀 더 천천히 이루어졌다면 세계는 아주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동로마 황제 로마누스 4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대군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1071년 현재 터키의 동부인 말라즈기르트에서 재앙을 만났다. 그곳에서 습격을 받고 굴욕을 당한 것이다. 이 전투는 오늘날에도 터키 국가 탄생의 순간으로 기념되고 있는데, 제국 군대가 포위되어 궤멸되고 황제는 포로로 잡혔다. 셀주크의 지배자 알프 아르슬란은 동로마 황제를 땅바닥에 눕게 하고 그의 목을 발로 밟았다."(226-7)


8. 천국으로 가는 길 


"1099년 7월 15일, 예루살렘이 1차 십자군 기사들에게 함락되었다. 십자군 원정 직전에는 곧 다가올 세상의 종말에 관한 암울한 예측이 나돌았다. 이것이 이제 낙관론으로, 떠들썩한 자신감과 야망으로 바뀌었다. 5년 사이에 세상의 종말에 대한 두려움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환영으로 변했다. 우트르메르Outremer('해외'라는 의미)에 새로운 기독교 통치자들이 지배하는 새로운 식민지들이 건설되었다. 예루살렘, 트리폴리, 티로스(수르), 안티오키아는 모두 유럽인들의 통제하에 들어가고, 봉건 서유럽에서 들여온 관습법에 따라 통치되었다. 그것이 새로 도착한 사람들의 재산권에서부터 세금 징수와 예루살렘 왕의 권한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에 영향을 미쳤다. 레반트는 서유럽처럼 움직이도록 개편되었다." "바그다드와 카이로에서는 (방관이라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다. 아마도 기독교들이 이 도시를 점령하는 편이 라이벌인 시아파나 수니파가 통제권을 갖는 것보다 낫다는 정서에 기인한 것이었으리라."(233-6)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예루살렘 점령에서 상업적 가능성을 재빨리 발견했다. 제노바, 피사, 베네치아는 심지어 십자군이 성도에 도달하기도 전에 선단을 바다로 내보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으로 향하게 했다." "예루살렘 점령 이후 십자군은 보급이 절실했고, 근거지인 유럽과 연결망을 갖추고자 필사적이었다. 따라서 도시국가의 함대들은 예루살렘의 새 지배자들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들의 입지는 십자군이 성공적인 포위전에 나서기 위해 하이파, 야파, 아크레, 트리폴리 등의 해안과 항구를 확보할 필요가 커지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협상이 타결되어 막대한 이익을 올릴 가능성이 생겼다." "동부 지중해 지역의 교역 패권을 둘러싼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이전투구는 광포하고 무자비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베네치아가 확실한 승자로 떠올랐다. 이는 상당 부분 아드리아해에 면한 지리적 위치 덕분이었다. 동쪽에서 베네치아로 가는 것이 피사나 제노바로 가는 것보다 항해 시간이 짧았던 것이다."(240-3)


9. 지옥으로 가는 길 


"그들의 평판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일이지만, 몽골인들이 13세기 초 중국과 중앙아시아 및 그 너머에서 거둔 놀라운 성공에 대한 한 가지 해석은 그들이 항상 압제자로 보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예컨대 호라즘은 지역 주민들에게 1년치 세금을 선납하도록 명령했다. 임박한 몽골의 공격에 대비해서 사마르칸트 주변에 새로운 요새를 건설하고 궁수 부대의 급료를 지불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주민들에게 그런 부담을 주고서는 계속 호의를 얻기가 어려웠다. 이와 대조적으로 몽골인들은 자기네가 점령한 일부 도시에서 기반시설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사마르칸트를 찾은 한 중국인 도사道士는 중국에서 많은 기술자들이 그곳에 와 있고 방치되었던 들과 과수원 운영을 돕기 위해 주변 지역과 더 먼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려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야만적인 파괴자라는 몽골인의 이미지는 왜곡된 것이었고, 다른 무엇보다도 파괴와 약탈을 강조해 오도하는 후대 역사서들의 유산을 대변하는 것이었다."(273-4)


10. 죽음과 파괴의 길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호황을 누린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고객의 욕구, 그리고 유럽의 다른 도시들에서 그곳으로 물건을 사러 온 상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에서 보여준 재능과 선견지명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흥성한 배후에는 몽골인들이 교역에 세금을 부과하면서 부린 세제상의 재주와 규제가 있었다. 여러 자료들은 흑해 항구들을 통과하는 수출품에 대한 세금이 전체 상품 가치의 3~5퍼센트를 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는 알렉산드리아를 통과하는 상품들에서 뜯어내는 통행세 및 부담금과 비교하면 매우 낮은 것이었다. 자료에 따르면 알렉산드리아의 세금 부담은 10퍼센트에서 20퍼센트, 심지어 30퍼센트에 이르기도 했다." "세심한 가격 설정과 세금을 낮게 유지하는 정책은 몽골제국 관료 집단의 지혜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는 폭력과 마구잡이 파괴의 이미지에 가려진 점이다. 사실 몽골의 성공은 무분별한 만행으로 거둔 것이 아니라 타협하고 협력한 덕분에 이룬 것이다."(299-300)


"페스트로 인해 촉발된 변화는 북서 유럽의 장기적인 번성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유럽의 각 지역 사이의 차이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기까지는 물론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체제의 유연성과 경쟁을 긍정하는 태도, 지리적으로 불리한 위치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투철한 직업의식이 필요하다는 북쪽 사람들의 자각 등이 근대 초 유럽 경제의 변혁의 바탕이 되었다. 현대의 연구들을 통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듯이, 18세기 산업혁명의 뿌리는 페스트 이후 세계의 근면 혁명industrious revolution이었다. 생산성이 올라가면서 포부가 커지고 쓸 수 있는 돈도 많아졌다." "15세기의 프라 안젤리코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나 그 이후의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티치아노 등이 유럽 미술의 황금기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덕분이었다. 하나는 아시아와의 교류로 다양한 색을 내는 물감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돈이 많아 예술가들을 후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324-5)


11. 황금의 길 


"동부 대서양과 아프리카 해안을 내려가는 탐험으로 카나리아 제도와 마데이라 제도, 아소르스 제도 같은 여러 도서군島嶼群이 발견되었다. 이 섬들은 추가적인 발견의 가능성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서 돈이 벌리는 오아시스가 되었다. 기후가 좋고 땅이 비옥해서 설탕을 만드는 작물이 자라는 데 적합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산되는 설탕은 곧 잉글랜드의 브리스톨이나 플랑드르뿐만 아니라 멀리 흑해 지역에까지 수출되었다. 콜럼버스가 출항할 무렵에 마데이라에서만 매년 1500톤가량의 설탕을 생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문을 열고 서유럽의 운명을 바꾼 것은 군사력이나 외교술도, 교황의 면허도, 영토 점령을 둘러싼 왕실 간의 경쟁도 아니었다. 진정한 약진은 모험기업의 배 선장들이 식용유와 가죽을 거래하고 금을 살 기회를 찾는 것보다 더 쉽고 나은 기회를 깨달으면서 이루어졌다. 유럽의 역사에서 여러 차례 사실로 입증되었듯이, 가장 큰 돈벌이는 인신매매였다."(343-6)


"한편 돈이 끝없이 대서양을 건너 흘러들어왔기 때문에 에스파냐 국왕 카를로스 1세는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새 제국의 지배자였을 뿐만 아니라 유럽 정치에서도 핵심 인물이 되었다. 이에 따라 야망도 재조정되었다. 1519년, 카를로스는 재정적 영향력을 동원해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되었다. 유럽의 다른 군주들은 자신의 힘을 더욱 확장하기로 단단히 결심한 지배자에게 패하고 압도당하고 밀려났음을 깨달았다." "에스파냐가 유럽에서 비중이 높아지고 중앙아메리카 및 남아메리카에서 급속하게 팽창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부와 힘과 기회가 변함에 따라 에스파냐는 지중해의 가장 외진 곳에 있는 지방 변두리에서 세계의 강국으로 변모했다. 한 에스파냐 역사가에게 이것은 〈천지창조 이래 가장 큰 사건〉이나 다름없었다. 〈예수의 강생降生과 창조주 자신의 죽음을 제외하고〉 말이다. 또 다른 사람은 〈그렇게 많은 금과 은이 매장된 페루 지방〉을 보여준 것은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했다."(358-60)


"새로운 시대, 진정한 '황금시대'의 도래는 로마의 거리에서 통곡 하게 하고 가슴 치게 했던 1453년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잊게 해주었다. 이제 할 일은 과거를 재창조하는 것이었다. 옛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종말은 입양된 새 상속자들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유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사실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에스파냐, 포르투갈, 잉글랜드는 아테네나 고대 그리스 세계와 아무 관련이 없다. 그리고 로마의 역사에서도 초기부터 멸망하는 날까지 대체로 주변부였다. 그러다가 예술가, 작가, 건축가들이 고대로부터 주제와 발상과 문장을 빌려다가 이야기를 꾸미고 과거에서 입맛에 맞는 것을 골라 그럴싸하게 만들었고,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사실처럼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예 표준이 되었다. 따라서 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시기를 르네상스라 불렀지만 이는 결코 재탄생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네상스Naissance('탄생')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이 세계의 중심이 된 것이다."(364)


12. 은의 길 


"서아시아에서 격변의 시기가 지나고 1517년에 오스만이 이집트의 지배권을 장악한 뒤 지중해 동쪽의 지배 강국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유럽을 위협하는 주요 세력이 되었다." "오스만은 1538년에 인도 서부 디우에 있는 포르투갈 항구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이 무렵에는 향신료 교역에서 얻는 이문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일부 포르투갈인들은 향신료에서 발을 빼서 다른 아시아 상품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품목이 무명과 비단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16세기 말 무렵에 뚜렷해지는데, 이 시기에는 유럽으로 선적되는 직물의 양이 계속 늘고 있었다. 당대의 일부 비평가들은 이것이 향신료 교역에 관여하는 포르투갈 관리들의 극심한 부패의 결과이자 국왕의 졸렬한 결정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포르투갈은 수입품에 지나치게 높은 세금을 물렸으며, 유럽에 비효율적인 유통망을 만들고 있었다. 오스만의 경쟁력은 포르투갈을 (그리고 주변부를) 극심하게 압박하는 데 성공했다."(381-3)


"유럽과 서아시아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들려온 발견 소식들과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열린 해로로 인해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가장 휘황찬란한 곳은 인도였다. 1494년 테무르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인 바부르는 중앙아시아에 있는 페르가나 분지의 땅을 물려받았고, 이를 확장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가 남쪽으로 이동한 시점은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새 영토는 오래지 않아 강대한 제국으로 변신했다. 새로운 교역로가 열리고 유럽이 적극적으로 구매에 나서면서 갑작스럽게 경화硬貨가 인도로 밀려들어왔다.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은 말을 사는 데 썼다." "말 시장에 접근하기 좋은 위치에 있는 관문 도시들은 호황을 누렸다. 가장 크게 번성한 곳은 델리였다. 그곳은 힌두쿠시 산맥에 가까운 위치 덕분에 급속하게 성장했다. 이 도시의 상업적 중요성이 커지면서 그 지배자의 지위도 높아졌다. 곧 이 지역에 직물산업이 번성하면서 이곳 물건들은 아시아 전역과 그 너머에까지 명성을 얻었다."(387-90)


"1571년 에스파냐인들의 마닐라 식민지 건설은 세계 무역의 흐름을 바꾸었다. 우선 그들은 처음 대서양을 건넜을 때에 비해 현지 주민들에게 피해를 덜 주는 방식의 식민화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이 정착지는 본래 향신료를 구매하는 기지로 건설되었지만, 곧 거대 도시로 성장해서 아시아와 아메리카 사이의 중요한 연결점이 되었다. 이제 상품은 먼저 유럽을 거쳐가지 않고 태평양을 넘어 운송되었으며, 그 상품 대금으로 치를 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닐라를 통하는 경로가 만들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스만제국의 경기가 위축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는 국내의 재정 압박과 합스부르크 및 페르시아를 상대로 한 군사원정에 지나치게 많은 돈을 쏟아부은 탓도 있었지만, 수천 킬로미터 밖에 대륙을 가로지르는 상품 교역을 위한 새로운 교차로가 탄생한 것도 오스만제국의 수입 감소에 한몫했다."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의 송금이 줄기 시작하면서 에스파냐의 일부 지역에서도 경고등이 켜졌다."(394-5)


13. 북유럽으로 가는 길 


"잉글랜드는 아메리카와 아시아로 가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새 교역로에 도전하면서 오스만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들였다. 1571년 코린토스 만에 있는 레판토 앞바다에서 기독교 국가들의 '신성동맹'이 오스만 함대를 격파하자 유럽 전역에서 환호하는 장면이 연출되고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시, 음악, 미술과 기념물이 건립되었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조용했다." "두 나라 간의 공식 무역 협정에서 오스만 제국에 있는 잉글랜드 상인들에게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 후한 특권이 주어졌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오스만과 무슬림 세계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잉글랜드의 주류 문화 속으로 확산되었다. 《오셀로》에서는 베네치아군에 복무하는 '무어인'인 (따라서 아마도 무슬림이었을) 주인공의 비극적인 고결성이 그의 주변에 있는 기독교도들의 이중잣대, 위선, 속임수와 뚜렷하게 대비된다. 실제로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영국 문학에서 공통적인 문화적 준거로서 페르시아가 등장했다."(404-7)


"잉글랜드의 위선적인 태도는 16세기 초의 거대한 변화가 만들어낸 엄청난 기회를 이용하는 데서 불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종교 분쟁과 운 나쁜 타이밍으로 인해 이 나라는 세계 강국으로 떠오른 에스파냐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이에 따라 아메리카로부터, 그리고 동방에서 홍해와 육상 교통로를 통해 베네치아로 들어오는 교역으로부터 나오는 엄청난 이득을 얻기에는 불리한 위치에 서고 말았다. 아무리 에스파냐를 비난하더라도 잉글랜드가 쓰레기 더미나 뒤져 약간의 부스러기만 챙겨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처지임을 숨길 수는 없었다. 잉글랜드는 〈이 시기에 용감한 젊은이들이 우글우글〉했으며, 만성적인 〈일자리 부족〉으로 경제 침체에 빠져 있었다고 리처드 해클루트는 썼다. 젊은이들을 고용하여 〈이 왕국〉을 세계 〈모든 바다의 지배자〉로 만들 수 있는 해군을 창설하는 것은 신나는 일이 아니겠느냐고 그는 물었다. 어쨌든 꿈을 꾸는 것은 잘못이 아니었다."(409-10)


"아메리카에서 돈이 흘러들어오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유럽 전역에서 이른바 물가혁명Price Revolution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자연히 소비자들이 한정된 양의 상품을 따라다니게 되었다. 도시화가 진척되면서 물가가 더욱 치솟았다. 에스파냐에서는 콜럼버스의 '발견' 직후인 16세기 동안에 곡물 가격이 다섯 배로 뛰었다. 사태는 결국 에스파냐 영토의 일부였던 저지대 국가의 지방과 도시들에서 터지고 말았다. 이곳 사람들은 에스파냐가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거운 세금을 물리자 화가 폭발했다." "오래지 않아 개별 주와 도시들은 가혹하게 높은 수준의 세금을 매기는 데 깜짝 놀라 울부짖었다. 여기에 더해 에스파냐는 신앙 문제에 야만스러울 정도로 폭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경제적·종교적 박해가 복합되고 강력해져서 반란을 일으켰고, 마침내 1581년 위트레흐트 동맹이 탄생했다. 이 독립선언에 의해 '7개 주 동맹'이 이루어지면서 사실상 네덜란드 공화국의 탄생을 알렸다."(413-4)


14. 제국으로 가는 길 


"영국이 성공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으로 드러난 으뜸패는 지리적 이점이었다. 잉글랜드(1707년 스코틀랜드와 합병한 이후에는 영국)는 나라를 경쟁자들로부터 지켜주는 천연 방벽을 두르고 있었다. 바로 바다였다. 이는 군사적 위협에 대처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지만, 정부 지출을 생각하면 하늘이 준 선물이었다. 방어할 육상 국경이 없기 때문에 영국의 군비 지출은 대륙 경쟁자들의 지출에 비하면 푼돈이었다." "영국으로서는 결코 끝나지 않은 것 같은 전쟁이라는 유럽의 전염병에 대한 예방주사를 맞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륙의 나라들은 17세기와 18세기에 서로 상대를 바꾸어가며 티격태격 싸움을 벌였다. 영국인들은 현명하게 개입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이용하지만 입장이 불리해질 경우에는 관여하지 않는 방법을 터득했다. 또한 유럽에서 일어난 일이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도 분명해졌다."(445-6)


"표면 아래서 강력한 흐름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아시아에 대한 유럽인들의 태도가 뻣뻣해지고 있었다. 동방을 이국적인 초목과 보물로 가득한 놀라운 나라로 보던 태도를 바꾸어, 현지 주민들을 아메리카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나약하고 쓸모없는 사람들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에 대한 태도는 얻을 수 있는 이득으로 인한 흥분에서 노골적인 수탈에 대한 생각으로 바뀌었다. 이런 관점은 본래 무굴제국의 지방장관을 가리키던 말인 나와브nawab가 아시아에서 엄청나게 돈을 번 동인도회사 관리를 지칭하는 말로 변질된 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들은 마치 폭력배나 고리대금업자처럼 행동했다. 그것은 '거친 동부'였다. 100년 뒤 북아메리카 서부에서 연출되는 '거친 서부'라는 비슷한 장면의 서곡이었다." "이 거대한 재산에 접근하는 열쇠는 동인도회사가 상품을 한 대륙에서 다른 대륙으로 운송하는 무역업체에서 점령 세력으로 변모한 데 있었다. 마약 거래와 협잡질로 이동하는 일도 자연스러웠다."(451-3)


"미국 독립전쟁은 영국에서, 단지 상업적으로 수익성이 좋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도 있는 교역 입지를 다져가고 있는 지역을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에 관한 깊은 반성을 촉발했다. 벵골을 사실상 정복한 것은 중요한 순간이었다. 영국이 자기네 나라에서 이주해나간 정착민들을 지원하는 나라에서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다는 측면에서다. 그리고 잘 돌아가고 오래 갈 수 있는 기반을 어떻게 건설할 것인지도 알아내야 함을 인식했다. 하나의 제국이 탄생하고 있었다. 그 제국의 탄생은 한 시대의 종말이었다. 인도의 대부분이 영국의 손에 넘어가자 육상 교역로가 생명력을 잃었다. 구매력과 소비력, 자산과 관심이 결정적으로 유럽 쪽으로 옮겨갔다. 군사 기술과 전술(특히 화력 및 중포와 관련한)이 더욱 발전하면서 기병대의 중요성이 떨어진 것 또한 수천 년 동안 아시아를 이리저리 연결해주던 길을 따라 운송되던 물량의 감소를 촉진했다. 중앙아시아는 그 이전의 남부 유럽과 마찬가지로 사라져가기 시작했다."(457)


15. 위기로 가는 길 


"19세기를 보통 영국 제국의 절정기로 보지만, 사실은 그 반대라는 징표들이 있다. 영국의 지배력이 약화되면서 필사적인 지연 작전을 펼쳤고, 종종 전략적·군사적·외교적으로 처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세계 곳곳에 흩어진 영토들을 점령하고 유지하려 노력하는 현실은 현지 및 세계의 경쟁자들과 벌이는 위험한 벼랑 끝 게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판돈은 점점 더 커졌다. 1914년이 되면 판돈은 더욱 커져 유럽에서의 전쟁 결과에 제국의 운명을 걸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세계를 전쟁으로 끌어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이 그림자가 커지는 것을 막으려는 영국의 필사적인 시도였다. 러시아가 영국에 가하는 위협은 오스트리아의 제위 계승권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을 앞둔 19세기에 암처럼 자랐다. 러시아가 성장하고 팽창하면서 영국과 이익을 다투게 될 뿐만 아니라 영국을 압도할 만한 위협 세력이라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런던에서는 더욱 자주, 더욱 크게 경종이 울려퍼졌다."(461-2)


"크림 반도와 아조프해에서 벌어지고 다른 곳들에서 잠깐 비쳤던 전쟁(1853. 10~1856. 3)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이익이 걸려 있었다." "마르크스는 영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이 소수 지배층의 요구에 따른 것이고 대중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보았다. 공산주의는 크림 전쟁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그 전쟁으로 인해 심화되었다. 이탈리아의 통일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와 영국 병사들의 희생 속에 러시아의 코피가 터진 뒤 마침내 파리에서 협상 조건이 논의되었다.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사르데냐 왕국 총리 카밀로 벤소였다. 그가 이 자리에 간 것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프랑스를 돕기 위해 흑해로 지원군을 보내기로 결정한 덕분이었다. 그는 자신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위치에 있는 순간을 약삭빠르게 이용해서 이탈리아의 통일과 자주를 요구했다. 이런 구호는 동맹국들에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고, 본국의 지지자들을 자극했다."(476-8)


"1856년 파리 평화회담에서 부과한 조항은 러시아에게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협력해서 자기네 경쟁자의 목을 올가미로 묶었다. 러시아는 캅카스에서 어렵사리 얻은 이득을 빼앗겼고, 흑해의 군사적 접근을 박탈당하는 굴욕을 겪었다. 그곳은 중립 지대로 선포되어 모든 군함이 통제되었다. 해안 지대도 비무장 지역으로 만들어, 요새를 만들거나 병기를 보관할 수 없었다. 그 목적은 러시아에 굴욕감을 주고 야망을 꺾어버리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는 역효과를 낳았다. 이는 훗날의 베르사유 조약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이 조약을 통한 해결이 오히려 위험한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합의 내용이 매우 가혹하고 구속적이어서 러시아가 즉각 그 족쇄에서 빠져나오려 했다는 사실과 별개로, 그것은 변화와 개혁의 시대를 재촉했다." "차르의 농노제 폐지는 1850년대의 심각한 금융위기가 일정한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이를 촉진한 것은 크림 전쟁에서의 패배와 그 이후의 치욕적인 합의 내용이었다."(478-9)


16. 전쟁으로 가는 길 


"19세기 말에 러시아의 자신감은 (심지어 완고함은) 빠르게 커가고 있었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파리 조약의 흑해 관련 구절을 백지화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유럽 각국 주재 공관들은 차례차례 조약을 개정하고 특히 민감한 구절을 삭제하는 일에 대한 지지를 조용히 호소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다. 단 하나 예외가 있었다. 바로 영국이었다." "전쟁이 임박했다는 극심한 불안감은 흑해에 대한 우려보다도 러시아가 갈수록 강한 힘을 과시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했다. 군사행동은 비현실적인 가능성이었고 쓸 수 있는 카드도 별로 없어, 영국은 받아들이는 수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러시아는 원하던 것을 얻었다. 다시 말해 해안 지역에서 자기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크림 반도의 항구나 흑해 북안의 다른 지역 어디에든 군함을 배치할 자유를 얻었다. 한 영국인 목격자에 따르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기쁨 속에 이를 맞았고, 러시아의 〈승리〉로 해석되었다."(485-6)


"불안은 커져갔다. 제국이 일을 너무 벌려놓고 있다는 통렬한 자각이 나오는 시기였다. 남아프리카에서 보어인들과 대치하고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영국이 해외에서 패배할 위험에 처해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러시아의 진격에 대한 공포를 더욱 부채질했다. 1901년 말 영국 내각에 제출된 파멸을 예고하는 한 보고서는 철로가 오렌부르크에서 타슈켄트까지 연결되면 러시아는 20만 명의 병사를 중앙아시아에 보낼 수 있고, 그 수의 절반 이상은 불안하게도 인도 국경 가까이로 파견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영국의 선택지가 적다는 점이었다." "'피의 일요일'로 불린 190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의 폭력적인 장면과 러일전쟁에서 차르의 해군이 참패한 일은 러시아가 족쇄를 벗어던지는 것이 단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작은 위안을 주었다. 이제는 러시아의 관심을 아시아가 아닌 완전히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504-5)


"타이밍은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프랑스는 이웃이자 앙숙인 독일의 급격한 경제 성장에 갈수록 동요되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독일 공업이 1870년 이후 20년 사이에 급속히 성장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따라서 러시아의 관심을 그 서쪽 변경으로 돌리려는 영국의 바람은 프랑스에게도 달콤한 음악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첫 번째 재조정 국면은 1904년에 일어났다. 1907년에는 동맹국의 범위가 확정되었다. 영국은 세계의 중심을 가로질러 러시아와 공식적인 협약을 맺었다." "영국 관리들은 그들에게 닥친 어려움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서 자기네가 결국 끔찍한 사태에 맞서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가뜩이나 취약한 상태를 최악으로 몰아갈 수 있는 시나리오였다. 바로 러시아와 독일의 동맹이었다. 이런 공포는 한동안 영국의 정책 당국자들 사이에 만연해 있었다. 사실 1907년 영국-러시아 동맹의 목적 중 하나는 아시아에서 서로의 이익을 위해 협력하고 현상 유지를 하는 것이었다."(505-6, 509)


17. 석유의 길 


"석유 발견으로 1901년에 샤가 서명한 문서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문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것이 수십억 달러짜리 사업으로 성장하는 바탕이 되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 혼란의 길도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이 협정 조항들로 페르시아 국가의 보물에 대한 통제권이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은 외부 세계에 대한 뿌리 깊고도 지긋지긋한 증오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민족주의를 촉발했으며, 마침내 서방에 대한 심각한 의구심과 거부감을 낳았다. 가장 전형적인 것이 오늘날의 이슬람 근본주의다. 석유 통제권을 차지하려는 욕구는 장래에 많은 문제들의 원인이 된다. 인간적인 수준에서 녹스 다시가 채굴권을 따낸 것은 놀라운 사업 감각이자 불가능에 도전하여 이뤄낸 성공이었다. 이 사건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1492년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를 '발견'한 일과 맞먹는다. 당시에도 막대한 보물과 재산들이 콩키스타도르들에 의해 수탈되어 유럽으로 보내졌다.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났다."(545)


"1917년 이후 영국의 일부 정책 담당자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큰 기대를 가졌다. 동부 페르시아에서 근무해서 이 나라를 잘 알고 있던 노련한 행정가 퍼시 콕스는 1917년에 영국이 러시아, 프랑스, 일본, 독일과 오스만까지 영구히 배제하고 페르시아만 지역을 확실하게 장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1917년 러시아가 붕괴하여 혁명이 일어나고 볼셰비키들이 정권을 잡은 직후 독일과 평화에 합의한 것이 유럽에서의 전쟁이라는 관점에서는 우려스러운 일이었지만, 다른 곳에서는 밝은 전망을 가져다주었다. 벨푸어 장관은 1918년 여름에 로이드 조지 총리에게 이렇게 썼다. 〈[전제 체제하의 러시아는] 그 이웃에게 위협 요소였고, 그 이웃들 가운데서도 바로 우리에게 가장 큰 위협이었습니다.〉 그런 나라가 내부에서 붕괴한 것은 동방에서의 영국의 입지를 생각하면 좋은 소식이었다. 수에즈 운하에서 인도까지 뻗어 있는 지역의 장악력을 공고히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559)


18. 화해로 가는 길 


"'벨푸어 선언'으로 대표되는, 유럽 유대인들의 자치구역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당연히 관심을 끌었지만,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주시한 것은 그곳이 지중해로 연결되는 석유 송유관의 종점이기 때문이었다. 입안자들은 나중에 이것이 수천 킬로미터의 운송 경로를 줄이고 영국에 〈세계 최대 규모의 유전으로 드러나게 될 곳의 석유 생산에 관한 실질적인 통제권〉을 부여하게 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영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강한 존재감을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또한 수심이 깊고 좋은 항구가 있어 석유를 영국 유조선에 싣기에 이상적인 곳이 하이파를 장악하고, 송유관이 프랑스가 통제하는 북쪽의 시리아가 아니라 이 항구로 연결되도록 해야 했다. 하이파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석유를 수송해오는 송유관의 종점으로 완벽한 곳이라는 판단은 옳았다. 1940년까지 400만 톤 이상의 석유가 전쟁 뒤에 건설된 송유관을 통해 메소포타미아에서 수송되었다. 《타임》지가 표현했듯이 그것은 〈대영제국의 경동맥〉이었다."(567)


"문제는 이 새로운 제국의 시대가 거의 곧바로, 세계는 변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인식으로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교한 계획을 세우고 영국이 석유 및 송유관 네트워크 통제권을 주장하려 한 것은 모두 좋았다. 그러나 그러려면 대가를 치러야 했다. 영국의 국가 부채가 치솟자 제국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데 필요한 규모의 군대를 유지하는 비용에 관한 고통스럽고 힘든 논의가 이루어졌다. 엄청난 비용은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라고 커즌은 썼다." "야망과 능력 사이의 이 부조화는 참화로 가는 길이었고, 그 곤경은 고위 외교관들의 고집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런던의 정책 담당자들은 현지 주민들의 이익에는 관심이 없었고, 대신에 영국의 전략적·경제적 과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1920년대에 영국은 이라크,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의 지배자들을 세우고 끌어내리는 데 직접 책임이 있거나 배후에 있었다. 이는 불가피하게 지긋지긋한 문제를 만들어냈고,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고약해졌다."(580-1)


19. 밀의 길 


"1939년 봄, 나치 독일과 공산주의 소련이 불가침 협정에 조인했다. 폴란드 침공 이후 몇 달 동안은 독일로 상품과 물자가 흘러들어왔지만, 언제나 그렇게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협상은 팽팽했다. 특히 수요가 많았던 밀과 석유 등 두 가지 자원의 경우에는 더했다. 스탈린은 이 문제를 직접 감독해서 독일이 요구한 80만 톤의 석유를 보낼 것인지 그 일부만 보낼 것인지, 그리고 어떤 조건으로 보낼 것인지를 결정했다. 일일이 화물 선적을 논의하는 것은 긴장되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더구나 독일 전략가들에게는 그것이 거의 상시적인 불안의 근원이었다. 당연히 독일 외무부는 상황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알고 있었고, 소련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일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보고서를 쏟아냈다. 지도부가 바뀌거나, 그들이 고집을 부리거나, 아니면 단순한 거래상의 이견이 발생하거나 등의 이유로 독일은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이것이 히틀러가 유럽에서 계속 놀라운 군사적 승리를 거두는 가운데 제기된 커다란 위협이었다."(611)


"독일은 갈수록 식량과 물자가 떨어져가고 있었다. 소련 곡물을 들여와도 만성적인 공급 부족 사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예컨대 1941년 2월에 독일 라디오는 영국의 교역 봉쇄로 인해 유럽 전역에서 식량 부족이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농업 전문가 헤르베르트 바케의 제안은 급진적이었다. 소련은 광대해서 지리와 기후가 다양하지만, 대략적인 선으로 나눌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와 남부 러시아, 캅카스 산지를 포괄하는 남부는 들판과 자원이 있는 '잉여' 구역이었다. 중북부 러시아와 벨라루사, 발트해 연안 지역 등의 북부는 '부족' 구역이었다. 바케가 밝혔듯이 이 선 한쪽에 있는 사람들은 곡물을 생산했고, 그 반대쪽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소비하기만 했다. 독일의 식량 문제에 대한 해법은 잉여구역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후자는 무시하면 되었다. '잉여' 구역을 점령하여 그 산물을 독일이 차지해야 했다. '부족' 구역은 잘라내게 된다. 이 지역 사람들의 생존은 관심 밖이었다."(616-7)


20. 대량학살로 가는 길 


"히틀러와 그의 측근들은 독일의 자원 기반을 확장하는 일에서 두 나라를 본보기로 삼았다. 첫째는 대영제국이었다. 독일은 동방의 드넓은 새 영토에 발자국을 찍게 된다. 마치 영국이 인도아대륙에서 그랬던 것처럼. 식민지 개척에 나선 독일의 소수 주민들이 소련을 지배하게 된다. 마치 소수 영국인들이 라지Raj('통치'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를 통해 통치했던 것처럼, 유럽 문명은 정말로 열등한 문화에 승리를 거둘 것이다." "히틀러가 자주 언급한 또 다른 모델이 있었다. 그는 여기서 유사성을 보았고 여기에 자극받았다. 바로 미국이었다. 독일은 유럽인 정착민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그곳 원주민들에게 했던 일을 할 필요가 있다고 히틀러는 새로 임명된 동방점령지부 장관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에게 말했다. 현지 주민들은 몰아내거나 아니면 몰살해야 했다. 볼가 강은 독일의 미시시피 강이 될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문명 세계와 그 너머의 무질서 사이의 경계선이었다."(626-7)


"스탈린은 이제 영국 및 그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는 동맹자가 되었다. 문제는 무기와 물자를 어떻게 소련에 공급하느냐였다. 북극해에 있는 항구들로 실어다 주는 데는 수송의 어려움이 있었고, 한겨울에는 위험하기까지 했다. 한편으로 블라디보스토크 이외에 동방에 적당한 항구가 없다는 것 역시 문제였다. 무엇보다 태평양의 부동항들을 일본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해법은 분명했다. 바로 이란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현지의 독일 요원들과 동조자들이 발판을 마련하는 일을 막을 수 있고, 연합군이 잃으면 곤란한 천연자원을 보호할 수 있으며, 베어마흐트(독일군)의 동방 진군을 저지하고 중단시키는 일에 함께 노력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연합군의 전쟁 목표에도 부합했지만, 영국과 소련 각자에게 장기적인 보상을 약속했다. 이란을 점령하면 두 나라는 정치적 영향력과 경제적 자원, 전략적 가치라는 측면에서 오랫동안 갈망해오던 것을 얻을 수 있었다."(636-7)


21. 냉전의 길 


"아시아에서 일어난 군사적 압력의 해일은 동방에서 여러 차례의 '됭케르크 철수'를 불러왔다. 영국의 황금시대가 끝났음을 통렬하게 보여주는 마구잡이 퇴각의 사례들이었다." "영국의 어설픈 모습은 영국의 보호령 트란스요르단의 지배자 압둘라 1세와의 거래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압둘라는 영국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비밀 협정을 통해 1946년 독립 이후 자신의 정권에 대한 영국의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는 이 약속을 이용하여 영국이 철수한 뒤 자신의 영토를 팔레스타인 전역으로 확장할 계획을 세웠다. 한계는 있었지만 영국의 승인을 받은 셈이었다. 어떠한 조언을 했든, 영국이 발을 빼고 있는 세계의 또 다른 부분을 덮친 혼란은 유럽 제국의 세력의 해로운 영향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1948년의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영국이 고개를 끄덕이고 팔꿈치로 찌르고 눈짓을 해서 실행한 정책의 결과는 아니겠지만, 그것은 치안 세력이 바뀌면서 힘의 공백이 생겼음을 드러냈다."(666, 669)


"모사데그는 서아시아에서 서방의 영향을 그저 약화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제거한다는 비전을 제시했다가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모사데그는 새로운 시대의 비전을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제시한 사람이었고, 그 새로운 시대는 서방 세력이 아시아의 중심부에서 물러나는 시대였다. 그가 쫓겨난 정황에 대해서는 정보기관들이 수십 년 동안 숨겨왔지만, 모사데그 제거가 서방 강국들이 자기네 목적을 위해 조직한 일이나는 데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모사데그는 이 지역에서 수많은 계승자들을 낳은 정신적 아버지였다. 아야톨라 루홀라흐 호메이니, 사담 후세인, 오사마 빈 라덴, 탈레반 등 다양한 부류의 방법과 목표와 야망은 서로 달랐지만, 이들 모두는 서방이 진실하지 않고 해로우며, 현지 주민들을 해방시키는 것은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핵심 원리를 통해 하나가 되고 있다."(689-90)


22. 미국의 실크로드 


"석유 자원 때문에 이란이 서방에 특히 중요한 곳이 되었지만, 그 이웃 나라들 역시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소련의 남쪽 변경에 있다는 위치 때문이었다. 그 결과 지중해와 히말라야 산맥 사이에 미국으로부터 경제적·정치적·군사적 지원을 받는 친서방 정권이 들어선 나라들이 띠를 이루었다. 소박한 덜레스 국무부 장관이 '북단Northern Tier'이라 명명한 이 지역의 나라들은 세 가지 목표에 이바지했다. 첫째로는 소련의 이익 확대를 막는 방파제 구실을 했고, 둘째는 자원이 풍부한 페르시아만 지역을 보호하고 석유를 서방으로 수송하여 유럽의 재건을 촉진하고 동시에 지역 안정에 중요한 수입을 제공했으며, 셋째로 소련 진영과의 긴장이 공개적 충돌로 이어질 경우를 대비한 정보 수집처와 군사기지를 제공했다." "1955년 서쪽의 터키에서 이라크와 이란을 거쳐 동쪽의 파키스탄에 이르는 지역의 나라들이 단일 협정(바그다드 조약)을 결합했다. 서로 간에, 그리고 영국과 맺었던 복잡한 동맹관계를 대체한 것이다."(698-9)


"현지 정권들이 호의적으로 행동하도록 보장하기 위해 꼼꼼한 고려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몇 가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1955년 말 3년 전 CIA의 지원하에 파루크 국왕을 쫓아낸 쿠데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집트의 혁명가 가말 압델 나세르가 역시 소련에 무기를 요청하며 접근했다. 깜짝 놀란 미국은 영국 및 세계은행과 함께 아스완에 거대한 댐을 건설하는 프로젝트에 돈을 대주겠다고 제안했다." "나세르는 바그다드 조약에 대해 짜증을 내왔다. 그는 이것이 아랍 통일의 장애물이며 아시아의 중심부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서방의 도구라고 보았다. 돈과 지원을 약속받았다면 그는 아마도 누그러졌을 것이다.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금 지원 약속이 철회되었다. 댐을 건설하면 이집트의 면화 생산이 증가하여 가격이 떨어지고 그것이 미국 농민들에게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미국 의회 의원들이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 이기주의는 치명적인 것으로 드러났다."(699-701)


"자유 세계와 민주주의적 생활방식을 수호하고자 하는 미국의 정치적·군사적 목표가 아주 다른 결과를 낳았다는 것은 상당한 아이러니다. 미국의 입지는 비민주적인 본능을 지니고 있고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 고약한 방법을 동원하는 독재자들을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대부분의 서방 정책 담당자들은 현장의 실정을 무시하고 자기네가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는 쪽을 택했다. 미국의 많은 관측통에게 이란은 완전한 승리로 보였다. 〈서아시아에 있는 미국의 견실한 친구들 가운데 하나〉인 이란의 경제는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는 보고서가, 1968년 린든 B. 존슨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 이란의 국민총샌산(GNP)이 급속도로 증가해 최근의 〈주목할 만한 성공담〉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4년 뒤에도 같은 결론이 나왔다. 더 단호한 어조였다." "이란은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번영하는 나라〉, 그리고 유럽 여러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나라가 되는 길을 착착 밟아가고 있다고 보고서는 확신에 차서 예측했다."(712, 717-8)


23. 초강대국 대결의 길 


"동아프리카와 페르시아만 지역, 그리고 인도양 지역 사람들에게 양다리를 걸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두 초강대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으려는 관행을 가리키는 말이 생겼다. '불편不偏'이라는 뜻의 '비타라피bi-tarafi'가 외교정책의 원칙이 되어서, 소련이 주는 것과 미국이 주는 것이 비슷해지도록 균형을 추구했다. 소련과 미국은 각기 아프가니스탄의 군 장교들을 공식 교육 프로그램에 초청하여 미래의 지도자들과 연줄을 만들고 관계를 발전시키고자 했다. 양쪽 프로그램에 참여한 장교들은 고국에 돌아온 뒤 서로 정보를 교환했다. 재능이 인정된 장교들에게서 특히 두드러진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미국도 소련도 그들이 선전하는 낙원은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따라 해외 연수를 다녀온 사람들 대다수의 반응은 새로운 개종자를 만들기 위해 전도하기보다는 아프가니스탄이 자주국으로 남아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왔다는 것이었다."(727-8)


"사실 이란이 핵 원료를 확보한 것은 미국의 적극적인 권고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 정책을 추진한 프로그램의 이름은 '평화를 위한 원자력'이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구상한 이 프로그램은 미국이 〈국제원자력 풀〉에 참여하기 위해 설계되었고, 결국 우방국 정부들은 4만 킬로그램의 우라늄-235를 비군사적 연구를 위해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30년 동안 핵 기술과 부품과 원료를 공유하는 것은 미국 외교정책의 기본 원칙이었다. 소련 진영에 맞서 협력과 지지를 해주는 데 대한 직접적인 장려책이었다." "1976년 포드 미국 대통령은 이란이 원자로 연료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재처리 시설이 포함된 미국산 시스템을 구매하고 운용할 수 있도록 하는 협정을 재가했다. 이란은 이에 따라 '핵연료 순환'의 전 과정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포드 대통령의 비서실장 리처드 체니(딕 체니)는 주저 없이 이 판매를 승인했다. 1970년대에 그는 이란의 동기가 무엇이지 〈알아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741-3)


24. 파멸로 가는 길 


"이란에서 일어난 혁명은 이 지역 전체에서 미국이 세운 엉성한 구상을 허물어뜨렸다. 그곳에는 한동안 불안정을 가리키는 징표들이 있었다. 샤 정권의 부패는 경제 침체와 정치적 무기력, 그리고 경찰의 만행과 함께 고약한 조합을 이루었다." "샤가 몰락하면서 이례적인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났다. 1980년 말 이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의 장래는 불확실했고, 자기네 지도자들의 선택과 외부 세력의 간섭에 달려 있었다. 지역 전체는 고사하고 각 나라에서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를 추측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미국에게는 모든 일에 다 관여하며 그럭저럭 넘어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처참했다. 반미 정서의 씨앗이 20세기 이전에 뿌려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이 처절한 증오로 자라는 것을 결코 막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에 내렸던 미국의 정책 결정은 지중해와 히말라야 산맥 사이에 놓인 이 지역 전체의 감정을 악화시키는 데 영향을 주었다."(755, 777-8)


"동력은 소련 쪽에 있는 듯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에서 성공을 거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소련군은 도시를 점령하고 주요 교통로를 확보했으며, 적어도 밖에서 보기에는 상황을 장악하고 있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희망을 걸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정책 담당자들이 한 가지 분명히 취해야 할 조치가 있음을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사담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라크가 이란과의 전쟁에서 밀려 붕괴한다면 그것은 〈미국에게는 전략적 재난〉이 될 터였다. 이는 페르시아만 일대와 서아시아 전체에 혼란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국제 석유 시장에서 이란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을 터였다.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새로운 정책이 떠올랐다. 그곳은 미국이 아시아의 중심에서 진행되는 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큰 곳이었다. 사담을 돕는 것은 계속해서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고, 이란과 소련 두 나라 모두의 전진을 막는 방법이기도 했다."(781-2)


"사담은 여전히 미국과 그들의 목적에 대해 깊은 의구심을 품고 있었으며, 이런 모든 조치들이 취해진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1983년 말 레이건 대통령이 도널드 럼스펠드 특사를 바그다드에 보냈을 때 그의 명시적인 목표 가운데 하나는 사담 후세인과 〈대화를 시작하고 개인적인 친밀감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럼스펠드의 요약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이렇게 설득했다. 〈우리는 이라크의 운명에 중대한 이상이라도 생긴다면 이를 서방의 전략적 패배로 생각할 것입니다.〉 럼스펠드의 행보는 미국과 이라크 양쪽으로부터 주목할 만한 성과라는 평가를 받았다. 게다가 그것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생각하기에도 〈아주 대단한 진전〉이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호메이니가 서아시아 전역에 시아파 이슬람교를 전파하는 일에 관해 우려하고 있었다. 이라크와의 협력이 너무도 중요했기 때문에 미국은 사담이 화학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눈감아줄 용의가 있었다. 미국에게 이라크는 국제법의 원칙보다도 더 중요했다."(783)


25. 비극으로 가는 길 


"2001년 9월 11일의 테러 공격 몇 시간 만에 빈 라덴을 처리하기 위한 전략들이 만들어졌다. 9월 13일 아침에 나온 실행 계획은 이란과 관계를 맺고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중국 당국과 접촉하는 일의 중요성을 제기했다. 모두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거나 가까운 나라였다. 그 후 일주일 이내에 이들의 기운을 〈다시 북돋우〉기 위한 계획이 만들어졌다. 곧 있을 탈레반에 대한 군사행동을 준비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9·11에 대한 첫 번째 대응은 실크로드의 나라들을 줄 세우는 것이었다." "빈 라덴을 찾아내고 알카에다의 역량을 파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이 기울여졌지만, 범인 추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실제로 미국의 관심은 아시아의 중심부를 결정적으로, 그리고 적절하게 통제하는 문제로 옮겨갔다.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 이 지역의 나라들을 완전히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곳에서 미국의 이익과 안전이 근본적으로 개선될 수 있도록 말이다."(822-4)


"9·11 공격은 미국이 전 세계의 여러 나라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바꾸었다. 이란과 이라크는 북한과 함께 〈악의 축을 이루어 무장을 하고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 악의 축을 해체하는 것이 긴요했다." "통제권을 장악하겠다는 결의는 대단했다. 안정을 해치고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정권을 전복시키는 것은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전략적 사고의 중심에 있었다. 분명하게 존재하는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되었다.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일어날 수 있는지, 일어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기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장기적인 전망보다 더 중요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알카에다와 탈레반을 물리치는 것이 것이 핵심이었다. 그 뒤의 상황은 그때 가서 걱정하면 될 일이었다. 이런 근시안적 태도는 이라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담 후세인을 권좌에서 몰아내는 일에만 집중했을 뿐 이 나라의 장래 모습에 대해서는 계획이 없었다."(825-6)


맺음말 : 새로운 실크로드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서 서방이 어설프게 개입하고 기타 지역에서 압력을 행사하는 일 이외에 진행되는 것이 더 있다. 동방에서 서방까지 실크로드들이 다시 한 번 일어서고 있다. 이슬람 세계의 혼란과 폭력, 종교적 근본주의, 러시아와 그 이웃들 사이의 충돌, 중국이 서부 지방에서 벌이는 극단주의와의 사투를 보면 혼란과 동요를 느끼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한때 지적·문화적·경제적 풍광을 지배했으며 이제 다시 떠오르고 있는 지역의 산고產苦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지역에 매장된 천연자원이다." "수천 년 동안 그래 왔던 것처럼, 여기에 새로운 종류의 대동맥들이 추가되었다. 기존 파이프라인과 예정된 파이프라인이 유럽을 세계의 중심에 있는 석유 및 가스 매장지와 연결한다. 이에 따라 자원 수출국뿐만 아니라 파이프라인이 지나가는 나라의 정치적·경제적·전략적 중요성도 덩달아 증대된다. 실크로드가 다시 떠오르고 있다."(842, 8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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