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만주족의 역사 - 변방의 민족에서 청 제국의 건설자가 되다
패멀라 카일 크로슬리 지음, 양휘웅 옮김 / 돌베개 / 2013년 3월
평점 :
1장. 만주족의 역사적 평가를 둘러싼 모순
"주지하듯이 청조는 동아시아 전역에서 가공할 만한 군사력을 가진 존재이자 세계적인 문화적 역량을 갖춘 국가였다. 청조를 ('왕조'가 아니라) 제국으로 이해하는 것은 청조의 문화적 다양성과 정치적인 복잡성을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 만주족을 민족적인 호칭으로서 정의하기 어렵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한다 하더라도, 통치계층의 혈통은 만주족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복자 엘리트들은 많은 기원을 가진 민족들로 섞여 있었다. 한인과 조선인, 몽골인, 튀르크인, 만주 일대의 퉁구스인, 그리고 후대에는 중앙아시아인까지 여기에 포함되었다. 일찍이 중국 북부 일대를 정복한 1640년대 당시의 침략군인 청군의 구성을 보면, 극소수의 만주족과 날로 늘어가는 한족 출신 또는 한족 태생의 사람들이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 제국과 그 정책을 '만주족'의 것으로만 뭉뚱그려 묘사하는 일은 모든 면에서 진실을 호도하는 것이다. 또 19세기에 중국이 겪은 어려움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켜 억지 해석을 내리려는 것이다."(34-6)
2장. 샤먼과 ‘씨족’: 만주족의 기원
"엄격하게 말해서 1635년 이전에는 어떠한 만주족도 없었다. 1635년은 건국 준비 단계의 청 제국에서 추종자들의 상당수가 앞으로는 새로운 이름으로 알려지게 될 것임을 반포한 해였다. 그해에 만주족으로 분류된 사람의 대부분은 과거에 만주에 살았던 사람들, 특히 당대唐代(618~907) 이래 중국을 기반으로 한 제국들에게는 여진족으로 알려진 사람들이 그 조상이었다." "청 '제국'으로 발전하면서, 수 세기 동안 만주에 살았던 여진족과 '만주족'을 구분하려는 청조의 분명한 계획에 따라, '만주족'은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았다. 정치적인 고려는 제쳐놓더라도 새로운 민족적 감정의 형성에는 약간의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이때까지 여진이란 명칭은 지리상의 용어로 널리 퍼져 있었을 뿐, 문화적으로는 매우 이질적이었으므로 옛 이름에는 더 이상 어떠한 실제적 의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시대에 나타나 계속해서 그 면모를 보인 만주족의 문화는 동북아시아의 전통적인 생활과 근본적인 연속성을 드러냈다."(46-7)
"금 제국의 관료체제는 거란의 관료체제와는 거의 유사성이 없었는데, 유목사회와 정주사회의 기본적인 사회·경제적 차이에서 그 부분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거란과 몽골은 적어도 관료정책에서는 자기 민족 사이에서 나타나는 유목생활의 원칙에 대한 강한 애착을 두었고, 전통적으로 분할된 정치구조에 대해 용인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관료적·문학적 성취와 사회적 신분이나 업적을 연결시킴으로써 경제적·사회적 삶에서 극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현상을 탐탁찮게 생각한 듯하다. 이러한 이유로 거란족은 요조 아래에서 거행되는 시험에 참여하는 것이 조서로 금지되었고, 원 제국의 대부분 사람들에게 시험 응시의 기회가 유보되었다. 그러나 여진족의 경우, 2개의 언어로 된 시험을 확립하고 해당 민족들에게 시험의 참여를 장려하려고 공식적으로 시도했다. 이것은 매우 다른 국가적 대처법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러한 관례는 모두 청 제국 관료체제의 전신이었다."(57-8)
"금 제국의 여진족이 만주 지역과 중국 북부를 통치한 때인 12세기에는 이미 근대 만주어의 단어 '무쿤mukūn'의 원형이 되는 단어가 사회적 협력체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사회적 협력체는 확장된 형태의 종족과 매우 흡사했던 것 같다." "누르하치의 통일전쟁에서 무쿤은 다시 기본적인 조직단위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누르하치가 동북쪽으로 팽창하며 마을을 합병하고 마을의 족장을 부대의 대장으로 임명함으로써 잘 작동되었다." "정복이 확대되고 팔기에 대한 행정적 통제가 강화되면서 무쿤의 지배력이 느슨해졌다. 이것은 대략 백여 년에 걸친 과정이었다. 결국 만주족의 대다수가 불완전하나마 봉급을 받는 주둔군으로 중국에 정착했을 때 무쿤 본래의 결속력은 더욱 약화되었고, 만주족은 무쿤의 유대의식을 주로 조상의 제휴관계라고 인정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에서 가리키는 조상은 대체로 누르하치 시대보다 더 앞선 시기의 사람들은 아니며, 많은 경우 중국을 점령한 시기 이전의 사람들도 아니다."(62, 66-7)
"샤먼shaman은 정신적인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여, 결과적으로 초자연적인 공간을 여행하고 그곳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샤먼은 병, 가뭄, 또는 동물의 이주를 일으키는 초자연적 힘을 인식하고 이에 개입할 수 있었다. 사냥이나 호전파 일당의 성공을 보장하는 샤먼의 능력 때문에 향촌과 종족의 지도자들은 필수적으로 샤먼과 친밀하게 지내야 했다." "무쿤은 수호신을 가졌으며, 샤먼은 집단의 구성원들을 위해 그러한 수호신과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 무쿤과 영적인 수호신 사이의 관계는 모든 구성원에게 강력했지만, 족장에게 특히 강했다. 족장의 지위는 샤먼의 승인에 달려 있었기에 족장과 샤먼은 협력하여 일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여진족의 건국신화는 자기들의 전형적인 초기의 전쟁지도자 자체가 샤먼이었다고 주장한다." "청조 내내 황실의 황족은 샤머니즘적인 일련의 의례를 발전시켰다. 18세기에는 조정에서 주술적인 의례를 다룬 일련의 총서 편찬을 명령할 정도였다."(70-1)
3장. 누르하치의 수수께끼
"1618년 누르하치가 공식적으로 명 제국과의 전쟁을 선포했을 때, 그는 하늘에 무속적인 맹세를 하면서 우선 부친과 조부의 죽음을 언급했다. 그러나 이러한 언급은 명조 당국의 국경 침범에 대한 비난이라는 배경에서 발생했고, 여섯 가지의 다른 큰 비난의 뒤를 이은 것이었다. 이 일곱 가지의 비난은 '칠대한'七大恨으로 뭉뚱그려져 알려져 있다. 칠대한의 일곱 조목은 모두 여진족의 영토에 뚜렷한 경계가 존재하고, 그 경계 안에서 여진족은 명군의 괴롭힘을 당하지 않아야 하며, 자치를 확보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생각과 연결되어 있었다. 1582년부터 1616년까지 누르하치가 여진족 및 그 주변의 여러 민족과 벌인 전쟁은 그 당시 그의 삶을 지배했다. 그 전쟁의 주요 원인을 찬찬히 돌이켜보면, 누르하치가 무조건 가차 없이 부친과 조부의 원수를 갚겠다고 마음먹고 특히 그 과정에 일조한 여진족 첩자들을 색출하여 없애겠다고 결심한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오로지 후대의 서술에서 나타난 것이다."(106-7)
"누르하치의 권력이 늘어남에 따라 그는 수도를 계속해서 이동시켰고, 그 이동방향은 끊임없이 서쪽을 향했다. 누르하치가 명조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은 분배할 수 있는 부가 극적으로 증가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기보다는, 현재의 수준이 제약될 것이라는 공포감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칠대한七大恨을 표명한 원래 의도는 분명 누르하치의 불안감에서 비롯되었다. 그 지역의 독립적인 추장들과 25년 이상 전쟁과 협상을 거친 이후 그가 결집시킨 거대한 여진족 연맹은 어느 정도 흐트러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적 침체의 압박, 명조 침략자의 경작 방해행위, 누르하치가 강제로 동맹관계를 맺은 동부 여진연맹에 남아 있는 분노를 잘 활용하는 한족 관료들의 약삭빠른 용병술 등이 이런 위험에 해당했다. 얼마간 누르하치는 북경으로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고 관직과 거래의 독점권을 구걸하는 행위를 계속했다. 그러다가 1609년 이후에는 중국에 사신을 보내는 것도 완전히 멈춘 것 같다."(131-2)
"누르하치는 요동에서 새롭게 벌이는 전쟁 활동과 보조를 맞추고, 명조가 반박할 수 없을 만한 조건으로 자신의 선전·선동을 밀어붙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가 단언한 대로 후금은 12세기 여진족이 세운 금 제국의 합법적인 계승자였다. 그들은 같은 지역에서 살던 같은 민족이었다. 또한 같은 언어와 같은 전통을 갖고 있었고, 심지어 같은 씨족이기도 했다. 누르하치는 이제 명조를 '남조'南朝라고 불렀다. 이는 여진족이 세운 금조가 1127년에 송조를 중국 북부에서 몰아낸 후, 그들을 남송南宋이라고 언급한 사레를 모방한 것이었다. 그와 같은 비유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역사적인 타당성 외에도 누르하치의 야망을 잘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명조가 누르하치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그가 언급한 구도에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명조는 후금의 여진족과 금 제국을 세운 여진족 간의 역사적 관계를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 점을 기념하기 위해' 북경 근거의 방산房山에 있는 금조의 황릉을 훼손했다."(132-3)
"누르하치는 자신의 휘하에 1만 명의 남성을 모았다고 알려졌으며, 말과 무기도 비교적 잘 갖추었다. 첫 번째 공격지점은 무순이었다. 이 공격을 통해 누르하치는 자신의 도전을 뒷받침할 힘을 극적으로 증가시키기에 충분한 인력과 무기를 확보했다. 확보된 무기 중에는 그곳의 명군이 보유하고 있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제작한 대포도 포함되어 있었다. 누르하치를 진압하려는 명 제국의 시도는 효과가 없었다. 누르하치는 1619년 여름에 무순의 동쪽인 사르후Sarhū에서 첫 번째 명조의 원정군을 격퇴했고, 9월에는 자신의 동쪽에 있는 훌룬 집단 중 여허의 정치적 독립을 궤멸시켰다. 1621년 5월에 누르하치군은 명조 요동의 행정수도인 심양瀋陽을 차지했다. 그는 그 도시의 이름을 묵던Mukden으로 고쳤다. 그는 요동의 동쪽에 자신을 위해 새로운 처소와 행정 중심지를 건설했지만, 1625년에 묵던으로 영구히 이주했다. 묵던은 그의 아들 홍타이지가 이끌게 될 국가의 문화적 중심지가 되었다."(135)
"요동 정벌은 청 제국의 건설로 가는 길을 준비하는 것이었으므로, 우리는 종종 그것을 '탄생'이 암시하는 무한한 에너지, 희망, 야망과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누르하치에게는 그런 것들이 다소 다르게 보였음이 틀림없다. 1621년에 요동 대부분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했을 때 누르하치는 거의 62세였다. 그는 초년을 제외한 인생의 3분의 2가량을 끊임없는 전투 속에서 보냈고, 때로는 자신의 가족구성원들과도 전투를 벌였다. 자신의 통치를 소규모 촌락 집단에서 명조의 변경인 광활한 요동 지역을 포함한, 만주 전역으로까지 확대했다." "그러나 누르하치가 건설한 국가는 독점적인 경제권의 집행과 그 때문에 생겨나는 부의 통제를 기반으로 설립된 지역 정권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누르하치는 요동을 장악하고, 중국과 조선으로부터 자신의 지역적 패권에 대한 인정을 어떻게든 받아내야 했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했지만, 그가 더 많은 일을 하려고 계획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없다."(140)
4장. 청 제국의 팽창
"몽골족이 중국에서 세운 원 제국처럼 청조는 청 제국의 지배층과 정복당한 백성을 구분했다. 조정과의 친밀성 면에서 만주족, 몽골족, 한군기인이 만주 지역에 있던 정복국가의 핵심집단을 형성했고, 중국 정복의 선두에 섰다. 종종 '러시아인'으로 불린 비교적 소수의 '알바진인'阿爾巴津人(Albazinians) 출신 기인과 이슬람교를 믿는 투르키스탄 출신의 기인도 여기에 참여했다." "기인을 점령군으로 세운 데 대한 정치적·경제적 결과는 빠르게 느껴졌다. 정복 전에 만주 지역에 거주하던 기인들은 농산물의 생산자였으며, 그들이 불하받은 토지에는 세금이 매겨졌다. 요동에서도 홍타이지의 정책은 기인들이 자신의 전투에 동원될 때에만 그들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을 때에 그들은 자활하기 위해 농지·강·숲에서 일해야만 했다. 만주 지역에 남은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관습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기인들은 더는 생산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봉급을 받았고, 불하받은 토지에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생활했다."(151-3)
"1700년대 기인의 상황에 대한 제국의 고민거리는 만능 정복자 엘리트를 창조하려고 한 한때의 원대한 계획이 강희제 치하에서 비참한 종말로 끝났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오스만 제국의 술탄 아래에서 오스만리osmanli 계층이 겪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만주족, 몽골족, 한군기인은 모두 다부지고 지략 있는 병사이자 충분히 교육받은 박학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새롭게 정복한 영토를 통치하고 안정시켰고, 필요에 따라 무관과 문관의 직책을 넘나들었으며, 기인 백성이 자기 절제와 수양의 길을 따르도록 권면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홍타이지는 정복한 한족 관리들을 불신했고, 그래서 정부의 민정 사무를 집행할 수 있도록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기인 계층을 양성하려고 했다. 그러나 기인들에게는 많은 시간이 걸리는 위험한 공부에 투자할 시간도, 돈도 없었다. 그들은 출세로 나아갈 매력적인 방안을 더 많이 갖고 있었다. 전장에서 복무하는 것은 더욱 빠르고 좋은 보상을 가져다주었다."(154-5)
# 오스만리osmanli : 오스만 제국의 근간이 되는 민족
"18세기까지 청 제국은 정복왕조의 체제였으며, 그들의 자원은 침략과 점령에 집중되어 있었다. 강희제와 옹정제 치하에서 이 과정은 거의 완성되었다. 그들은 도로와 급수시설을 보수하고 통행세를 완화하며 비교적 낮은 임차료와 금리를 명령하고 명말의 농민반란으로 황폐해진 지역의 재정착을 위해 경제적 우대책을 만들어주는 등, 중국 경제 및 인구의 회복을 가져왔다. 17세기가 끝난 이후 한때 명조에 위협을 준 서몽골은 군사적·정치적 타격을 받아 제압되었고, 18세기 중반에는 서몽골, 중앙아시아, 티베트가 모두 청조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동부 유라시아 대륙의 통합이 재건되어 사마르칸트에서 조선까지 이어지는 육로교통이 부활했다. 물론 그들의 경제적·문화적 영향력은 13세기 몽골 치하에서 이룩한 성과의 희미한 흔적이었다. 청조는 '유교적' 표현방식이라고 평가받는 것들로 자기들을 표현하는 법을 신속히 배웠고, 18세기 중반까지 관료 엘리트들의 비위를 맞추고 그들을 끌어들이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188-9)
"청조는 황제의 권력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제국의 국격을 향상시킬 수 있는 여러 문화를 자기표현의 방식에 포함시켰다. 그들은 몽골로부터 세계 제국의 유산을 상속했다는 권리와 자기들의 정통성을 지탱시켜주는 많은 종교적 근거를 끌어냈다. 또한 만주기인으로부터 정복을 수행할 군사적 힘과 기술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청조 조정은 만주 지역에 남아 있는 고대의 정치적 전통에 접근할 권리를 유지했다. 한족으로부터는 관료적 기술을 끌어냈고, 중국의 지배와 조선과 베트남에 대한 도덕적 지도력을 정당화하는 유가의 도덕률도 이끌어냈다. 티베트인들로부터는 보편적인 불교의 지도자들만큼이나 초월적인 권력의 이양을 이끌어냈다. 이슬람교도들로부터는 중앙아시아를 정복하고 지배할, 추가적인 군사적 힘을 이끌어냈다. 예수회 선교사들로부터는 수학과 의학에 대한 관념적인 통찰력은 물론이고, '화약 제국'의 실용적 기초 기술을 배웠다. 이를 통해 유목민인 몽골과 투르키스탄의 군대를 지배할 수 있었다."(189-90)
"제국의 초기에 팽창과 안정이 비상하게 결합하는 대목에서 강희제의 개인적 성품은 중요했고, 그 점이 그러한 제국의 확고한 기초를 다진 것에 대한 가장 큰 설명이 될 수도 있다. 중국 국내·외 모두에서 매력과 강압이 결합한 그의 태도는 만주족 귀족, 한족 관료, 한족 백성, 몽골족 사이에서 그를 핵심적인 자리에 자리매김하게 했고, 이는 그의 제국을 성장시키는 데 필요했다. 그가 성공 때문에 피해를 본 적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충분한 근거는 없다. 그의 습관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고, 쓸데없이 국가에 가혹함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조부인 홍타이지처럼 역사를 이해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과거의 성공으로부터 배우지 않는 사람은 남들한테도 역사를 돌아보지 않게 함으로써 지탄을 받게 된다고 믿었다. 갈단 치하의 몽골 지역에 대해서도, 오삼계가 다스리는 운남에 대해서도, 그는 누르하치가 명조 제국의 구조를 무너뜨린 원동력이었던 지역적 열의의 조직화를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192)
5장. 건륭제의 황금시대
"자신을 만물의 군주이자 끝없이 도덕적인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로 설정한 건륭제의 신념은 아무 근거 없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그런 신념의 요소라든가 그런 신념을 표현한 어휘 대부분은 전륜성왕轉輪聖王(차크라바르틴čakravartin)이라는 불교적 이상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전륜성왕은 부처의 이름으로 거행된 정복을 통해 만물의 구원이라는 다음 단계를 향해 세상을 움직이는 지상의 군주이다." "불교에 대한 건륭제의 보편적인 관심은 티베트와 몽골 지역을 결속시킨 종교적·정치적 이상의 집합체에 근거했다. 누르하치 시대 이래로 몽골인을 합법적으로 통치하는 길이 티베트 출신의 라마승을 후원하는 데 달려 있다는 점은 분명해졌다. 알탄 칸Altan Khan이 이들 라마승을 몽골인의 정신적 지도자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청초의 황제들은 칭기즈 칸의 세속적 계승자로 나타나는 것에 대체로 만족했다. 그러나 건륭제는 제국의 수도인 북경을 라마교 왕국의 정신적 수도로 만들려고 했다."(199-201)
"차크라바르티니즘čakravartinism(전륜성왕을 신봉하는 신앙체계)의 토대 위에 건륭제는 모든 문화를 아우르는 자신의 도덕적 권위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는 한족 군주들에게 적용되는 구절대로 '북신'北辰(북극성)이었다. 그 밖의 모든 별들은 북신의 주위에서 움직이고, 북신 자체의 부동성은 모든 움직임에 의미를 부여한다. 실제로 모든 문화를 후원하기 위해 홍력(건륭제)은 각각의 문화에 규격화, 즉 더욱 정확하고 정형화할 것을 권면해야 했다. 이것은 그의 시대의 문화적 광휘의 진수이다. 문화적 우상에 대한 모방, 양식화, 복제는 말 그대로 문화에 대한 그의 보편적 표현을 이룩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러한 실행의 이면에 있는 목적은 민족들 자체에 대한 객관적이고 묘사적인 지식을 발전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논의되고 있는 여러 문화에 대한 황제의 권위를 높이는 것이었다." "그의 세계주의cosmopolitanism에 대한 과시는 언제나 모든 문화가 집중하는 중심지로 황제 자신의 자리를 지목했다."(205-6)
"건륭조 조정은 몽골과 티베트뿐만 아니라 만주 지역과 만주족에 대해서도 특별한 이념적·전략적 관심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만주족은 청조로부터 새로운 이상에 문화적으로 순응하라는 기이한 압력의 부담을 받았다. 엄격하고 진부한 문화 유형에 대한 건륭제의 열정은 만주족에게 강하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1765년 이후 건륭제는 기인들이 말타기와 활쏘기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지 않는 한, 과거시험에서 거둔 일족의 성과를 보고함으로써 더 이상 자신을 귀찮게 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강희제는 자신을 위대한 기인의 모범으로 내세우고 기인의 발전을 위해 그들 앞에 자주 자신의 문학적·군사적 재주를 입증했지만, 건륭제는 기인에게 매우 다른 방식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는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으며, 모든 문화를 사랑하는 예술의 애호가이자, 만능의 황제로서 귀감이 되었다. 하지만 기인들은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종교, 말타기와 활쏘기에 전념해야 했다."(214, 222-3)
"새로운 군사적 임무에 초점을 맞춘 기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국가는 그들의 경제적 고민을 완화해주고자 했다. 건륭연간 초기에는 한족에게 팔렸던 기인의 토지 상환을 위해, 약 1백만 량에 해당하는 은자銀子를 지급하라는 명령이 네 차례 내려졌다. 몇 년 안에 기인 군관들은 그렇게 받은 토지를 모두 다시 팔았다. 국가에서 최고 가격으로 상환해준 후에, 그 땅들은 새로 생긴 빚을 청산하기 위해 투매가격으로 다시 팔렸다. 이러한 정책은 18세기 중반 이후 폐기되었고, 홍력은 북경에 거주하는 많은 수의 기인을 만주 지역으로 이주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사람이 북경 또는 그 주변 지역으로 돌아왔고, 그들은 부득불 그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채 살았다. 1763년 군사행정 조직은 기인의 생존에서 가장 큰 장애가 그들을 다른 사회와 분리시킨 장벽이었음을 인식했다. 그해에 기인들은 정체성을 계속 유지했지만, 개인적으로 일자리를 찾고 주방 밖에서 생활하기 위한 허가를 자유롭게 신청할 수 있게 되었다."(225-6)
"1784년 이후 '광동 체제'(Canton system)로 알려진 관례가 확정되었다. 광동 체제란 유럽의 상인들이 광주廣州(즉 광동Canton)에서만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으로, 그들은 광주에서 중국 상인을 통해 보장과 보호 및 혜택을 받았으며, 모든 세수는 광주에 상주하는 대표를 통해 황실 가문에 직접 제출되었다. 이 행방총관은 유럽인들에게는 '호포'hoppo로 알려져 있었다. 이 체제가 독특하며 해상을 기반으로 한 자기들 제국과는 전혀 다른 원칙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한 유럽인들에게 광동 체제는 비이성적으로 보였다. 미국이라는 식민지를 상실한 이후, 영국은 특히 자기들의 시장이 감소할까 두려워했다. 영국과 일부 미국 상인들은 중국이 개척되지 않은 거대한 시장이라고 믿었다. 고래의 지방으로 만든 등유, 인도 또는 미국 남부에서 생산된 면화, 런던 또는 코네티컷에서 제조한 총기류의 잠재적인 소비자가 중국에는 수억 명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방해가 되는 것은 오로지 광동 체제뿐이었다."(241-2)
6장. 스러져가는 제국의 최후
"1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남경조약(1842)은 그야말로 1840년대 내내 이어진 일련의 조약 중 첫 번째에 해당했을 뿐이다. 이런저런 조약으로 청나라 해안의 통치권과 그 내부의 통제력 대부분은 결국 상실되었다. 광주의 지방 관료들은 조약 이행을 지연시킨 반면, 조정은 희생양을 찾아내려고 애썼고 영국군과 맞닥뜨렸던 중국 남부와 중부의 각 성 기인들에게서 쉬운 목표를 찾았다. 군관들은 반역죄와 비겁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으며, 종종 최고 형벌을 받았다. 기인들은 총체적인 무능으로 비난을 받았으며, 기인들의 죽은 시신을 묻어주고 그 시신을 기념하기 위해 걷던 특별기금도 거부되었다. 주방駐防에 할당된 토지는 종종 조정에 의해 팔렸다. 중원 정복 이후 언제나 침묵으로 고난을 견디지만은 않던 기인들은 공공연히 이의를 제기했다. 1850년대에는 폭동이 빈번하게 증가했다. 처음에는 만주 지역에서, 다시 중국 남부에서, 그리고 마지막에는 근근이 점령하고 있던 신강의 주방에서 폭동이 일어났다."(267)
"처음에 태평군은 하카Hakka(객가客家, 중국 북부에서 넘어온 이주자들)의 배타주의와 신도를 끌어들이는 태평천국 교리의 카리스마 넘치는 매력에 의지한 것 같다. 그러나 신도 수와 힘이 증가하자, 그들은 설교와 운영방법을 바꾸었다. 그들은 하카를 모집하여 다수인 한족과 상대하는 방식을 멈추고, 한족을 포섭하여 만주족과 맞서기 시작했다. 태평군의 우주론으로 볼 때 만주족은 악마와 같은 힘이 일찍이 발현된 존재였다. 태평군과 청군이 벌일 내전의 결과는 하느님이 중국을 통치하느냐, 악마가 중국을 통치하느냐를 결정하는 전투였다. 태평천국운동이 성장함에 따라 그 여파는 중국 동부와 북부까지 확산되었다. 극심한 공포감이 태평군의 공격보다 더 먼저 들이닥쳤다. 일반 주민들은 태평군의 노동조직과 군사조직에 징집될까 두려워했고, 엘리트층은 이질적인 신이 말하는 기이한 관념, 전체주의적 통치, 신체가 튼튼한 여성 등에 대한 공포감으로 움츠러들었다. 지역의 관료와 지주들은 자기방어 작업을 주도했다."(272)
"1856년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중국의 상황을 걱정했다. 아편전쟁 종결 이후 체결한 조약의 조항들을 중국 측이 이행하지 않자, 유럽의 인내심은 거의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유럽과 미국의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동료 기독교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고 싶어 남경을 방문했다. 그들이 고국으로 보낸 보고서는 충격적이었고, 신앙심이 깊은 신도들을 낙담하게 했다. 태평군이 무엇을 실천하고 있든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었고, 그들이 읽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성경이 아니었다." "유럽 측은 매우 신속하고 잔혹한 일련의 해안 공격을 결정했다. 이 사건이 바로 '애로호 사건'이라고 불리는 2차 아편전쟁이다. 1860년에 그 전쟁이 끝나자,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여러 지역에서 온 용병들과 함께 태평군과 전투를 벌이는 청군에 합세했다. 다국적 군대를 조직하려는 시도는 때때로 시끌벅적했고 때로는 애처로웠지만, 유럽의 무기와 자본의 투입은 1860년대에 태평군과 염군의 반란 모두를 진압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276-7)
"태평천국전쟁 이후의 회복 기간에는 청 제국에 근본적인 구조상의 변화가 있었다. 군사집단과 그에 협조하는 문관들이 지배하던 정복적 성격의 정권 대신에, 이제 개혁적인 귀족과 무관, 독립적인 권력을 가진 지방의 총독과 순무, 몇몇 외국인 고문관으로 구성된 컨소시엄 형태에 의해 지배되었다. 분권화된 통치형태는 내전 이후 시대의 특징이 된 지방 상황의 극심한 변화와, 지방의 개선을 가져올 수 있도록 지방 재정을 확보할 필요성에 잘 맞았다. 그러나 복잡한 국제관계의 상황 속에서 청조는 강하고 중심적이고 통일된 지도력이 부족했다. 청조 정부는 가중되는 외국의 도전(특히 일본)과 늘어나는 배상금, 영토 손실, 불가피하게 그에 잇따르는 국경의 붕괴에 직면하여 속수무책이었다. 1860년대부터 청 제국은 하나의 거대한 권력지대로 발전했고, 이 권력지대 내에서 지휘권은 지방의 총독과 순무에서 그들의 후계자들에게 이양되었다. 청조 정부는 결국 의례상으로만 이들을 승인할 수 있었다."(296)
"오스만 제국의 영토에서 그랬던 것처럼, 유럽인이나 미국인들은 혜택받은 지위를 누리기 위해 청조를 식민지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 오스만 제국의 땅도, 청 제국의 땅도 식민통치국의 힘에 의한 발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착취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재력을 가졌고, 따라서 착취는 식민화처럼 대가가 크고 위험한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략적인 동맹이나 외교적인 수단을 통해서 잘 이루어졌다. 두 제국이 자신들의 영토를 보전해주겠다고 마음먹은 유럽세력(중국의 경우에는 미국)으로부터 결국 유라시아의 '병자들'이라는 조롱을 받고, 자기들을 지켜주겠다는 국가에 맞서 자신들을 지킬 수도 없었으며, 자기들보다 훨씬 작지만 더 역동적인 국가에 시장과 원료, 전략적 이익을 제공함으로써 낮은 단계의 생존을 유지하는 국가로 남은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청조 및 오스만 왕조의 존재 자체와 외국세력들의 간섭은 두 제국과 외국세력에 대해 늘어가는 대중들의 거부감에 불을 지폈다."(310-1)
7장. 에필로그: 20세기의 만주족
"〈태평천국전쟁 없이 만주족에게 어떤 근대적인 정체성이 있었겠느냐?〉라는 의문은 역사학자, 사회학자, 그리고 만주족 본인들에게도 남아 있는 문제이다. 처음으로 태평군은 민족적인 어휘를 도입했다. 그들은 민족적으로 중국인에게 '한족'이란 단어를, '만주족'에게는 '만족'을, 몽골족에는 '몽족'이라는 근대적인 용어를 제시했다. 그들은 민족을 구별했을 뿐 아니라, 그런 구별을 행동으로 옮겨 만주족이나 만주족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도살했다. 이러한 압박 아래에서 만주족 기인들은 신속히 자기들을 우선은 만주족으로, 그다음은 기인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제국을 파괴하고 처음으로 근대적인 중화민국을 수립한 민족주의 혁명에서도 반복되었다. 만주족에 대한 민족적인 저주는 1903년 사법 개정 이전에도 청조의 백성들이 보복에 대한 두려움 없이 제국을 비난할 수 있었던 개항장(치외법권 지역)에서 쏟아져 나왔다. 1895년 일본에게 패배한 여파로, 만주족의 결함은 크게 비난받았다."(316)
"민족주의 운동이 주창한 의도적인 민족차별의 정치적 타당성이 무엇이든 간에, 만주족이 치르는 희생은 엄청났다. 1911년에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됨에 따라, 민족주의자들과 지방의 비밀결사 출신인 그들의 지지자들은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민족적 증오심을 입증했다." "1912년 2월 전쟁의 최종 합의에서 만주족과 그들의 재산에 대한 안전을 보장했다. 그러나 (1924년에 폐지된) 그 조항이 준수될 것이라고 기대한 만주족은 거의 없었다. 소수의 만주족은 만주 지역으로 돌아갔다. 만주 지역의 충성스러운 보황파保皇派 군벌들은 그들이 안전할 것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만주족은 자기들에게 낯선 지역으로 도주할 수단도, 의지도 없었다. 그들은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 했고, 가족사에 관한 질문에는 거의 대답하지 않았으며,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는 등 좀 더 쉬운 전략을 택했다. 현재 만주족의 인구 비율은 전체 중국 인구 중에서 100명 중 1명에 약간 못 미치는 실정이다."(321-2)